'김주완'에 해당되는 글 14건

  1. 2017.12.22 문빠와 서민, 진짜 미친 것은 누구일까 by 파비 정부권 (6)
  2. 2016.04.26 별난사람 별난인생, 진짜 별난 것은? by 파비 정부권 (2)
  3. 2015.06.03 풍운아, 기인, 또는 건달 채현국 by 파비 정부권 (3)
  4. 2011.05.13 페이스북이 호호국수에서 연 잔치, 꽉 찼어요 by 파비 정부권 (1)
  5. 2010.12.04 김주완 "아, 상주팸투어 참 니나노빨 안 받네" by 파비 정부권 (12)
  6. 2009.10.31 새 블로그 이름, 추천 좀 해주세요 by 파비 정부권 (28)
  7. 2009.08.30 노무현·김대중 조문하지 않은 김기자를 위한 변명 by 파비 정부권 (12)
  8. 2009.08.26 독설닷컴, 블로그 고속성장 비결은? by 파비 정부권 (17)
  9. 2009.06.21 민간인학살, 나찌의 유태인학살보다 더 나빠 by 파비 정부권 (31)
  10. 2009.05.21 브레이브 하트는 아일랜드인 아닌 스코틀랜드인이 주인공 by 파비 정부권 (2)
  11. 2009.04.28 치열한 광고전쟁, 똥값이 쌀까, 껌값이 쌀까? by 파비 정부권 (11)
  12. 2008.12.05 어청수, 돈 안내고 상 받으면 뇌물수수 아니유? by 파비 정부권 (6)
  13. 2008.11.10 빨갱이에 얽힌 추억 by 파비 정부권 (3)
  14. 2008.10.14 블로그로 프리젠테이션도 할 수 있었다 by 파비 정부권 (18)

서민은 미친 것이 분명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 정도의 이력을 가지신 분이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 혹자는 특정 인물을 겨냥해 그렇게 말해도 되느냐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다수의 일반국민을 지칭해 ‘문빠’라는 딱지를 붙이고 미쳤다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사람한테 그럼 뭐라고 해야 하나.



나는 처음에 한국 기자의 폭행 소식을 듣고 분개했다. 미개한 중국놈들이라느니 후진국이라느니 하는 소리가 바로 튀어나왔다. 이것은 생각해보면 어디까지나 내 속에 잠재된 민족주의 근성이라거나 잘 훈련된 애국주의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사실 나는 어려서부터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목숨마저도 초개처럼 버릴 줄 알아야 훌륭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주입받으며 자랐다. 아이러니지만, 나이가 들어 운동권 언저리에 놀면서 이른바 학출들이 ‘민족’ ‘자주’ ‘민주’ ‘통일’ 이런 단어들을 소리 높여 외칠 때 바로 감동받았던 것도 그 탓이었으리라.


하지만 나는 곧 ‘아, 이게 아니군’ 하고 깨달았다. 많은 사람들이 “맞아도 싸지” 할 때 “에이, 그래도 그건 아니지” 했던 것이 “아, 이유가 있었군” 하는 쪽으로 생각이 바뀐 것이다. 내 민족주의보다 애국주의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중국경호원 기자폭행 나눌 때 ‘김정숙 여사’는 스카프 나눠”



MBN이 내보냈다는 기사 제목이다. 글쎄 대충 상황은 짐작이 간다. 중국경호원에게 한국기자가 폭행을 당하던 같은 시간대에 다른 장소에서 김정숙 여사는 중국의 작가 한메이린으로부터 스카프를 선물 받았던 모양이다. 한메이린이 한국에 왔을 때 김정숙 여사가 “중국에 가면 꼭 들르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 따로 논평은 필요 없을 것이다. 성인 수준의 지능 정도를 가진 사람이라면 어떤 상황인지 바로 이해가 간다. MBN의 기자는 무작정, 이유 불문하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문재인 정권을 비판 아니 비난하고 싶었던 것이다. 한국기자가 폭행당하던 순간 그는 동물적으로 반응했을 것이다. “찬스다!”


그런데 이게 한번이 아니며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 일이년 벌어진 일도 아니란 것이 문제다. 다수의 “맞아도 싸다”는 반응을 보인 네티즌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조국이나 민족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그들이 인간성이 나빠서? 천만에. 그들 개개인을 들여다보면 서민 류보다 훨씬 훌륭한 인격을 보유하고 있고 사회에 더 긍정적인 기여를 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 그럼 그런데도 왜 그랬냐고?


바로 “중국경호원 기자폭행 나눌 때 김정숙 여사는 스카프 나눠” 따위의 오물을 싸지르는 기자들 탓이다. 그러므로 20년 넘게 기자들의 이런 행태를 보아온 네티즌들의 즉자적인 반응을 탓하는 생각 자체가 난센스다. 나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러니 맞아도 싸다는 소리가 나오는군.”


당연한 귀결인 것이다. 사실 나는 서민이 미쳤는지 안 미쳤는지 모른다. 그가 미치지 않았다면 어떤 소영웅주의적인 도그마에 빠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이 유명해지면 약간의 독단이 생기고 우쭐해지며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그마해져서 깔보게 되는 습성이 생기는 수도 있다.


말이 길어졌다. 우리 동네에 김주완 기자란 분이 있다. 경남도민일보 편집국장을 거쳐 지금은 그 회사 이사로 재직 중이다. 내가 인정하는 몇 안 되는 훌륭한 기자 중 한 사람이다. 그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분기탱천 한마디 남겼다.


“정말 웃긴다. 지가 학자이고 지식인이라면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는지 연구하고 분석하고 해결방안을 내놓아야지. 익명의 대중을 상대로 가르치고 훈계하고 정신병 진단을 내리고 호통친다. 전형적인 꼰대의 모습이자 있지도 않은 적(풍차)을 향해 돌격하는 돈키호테에 다름 아니다.”


그 몇 시간 전에는 이런 말도 남겼다.


“좀 웃긴다. 과거 '노사모' 정도나 되면 모를까. 아무 조직도 없고 실체도 없고 실명도 없고 얼굴도 없는 그저 익명의 군중일 뿐인 네티즌들에게 '문빠'라는 딱지를 붙인 후, 기를 쓰고 그들의 댓글 하나하나를 걸고 넘어지면서 논박하고 가르치고 굴복시키려하는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지식인? 좀 배웠다 그거지? 요즘 같은 에센에스 시대에 그런 군중의 일차원적 감정 배설까지 통제하고 바로잡겠다는 발상은 파쇼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드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그리고 이것은 그 앞에 쓴 글이다. 이렇게 계속해서 자기 심정을 올리는 걸 보면 김주완 기자도 얼마나 황당하고 화도 나고 분개했으면,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사람이 하는 말에는 흔히 과도한 표현이 쓰인다. 자신의 괴로움을 표현하면서 ‘미치겠다’ ‘죽고 싶다’는 예사고, 미운 상대를 향해서는 ‘패 죽여버린다’는 말도 곧잘 쓴다. 


광주항쟁 당시에는 플래카드에 ‘전두환을 찢어죽이자’는 구호가 있었고, 우리가 80년대 학생운동 할 때도 ‘전두환 노태우는 자폭하라’는 구호를 늘상 외치고 다녔다. 병역의무를 위해 할 수 없이 입대하여 데모 진압에 동원된 전경들에게 돌팔매질도 했고, 화염병을 던져 타격을 입히기도 했다. 맞아도 되는 전경은 없지만 우리는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


언론의 악의적인 왜곡보도에 증오심을 가진 일부 네티즌들이 중국에서 폭행당한 기자들에게 ‘맞아도 싸다’는 댓글을 올린 것도 어찌 보면 그런 것이다. 힘없는 개인이 거대한 언론권력을 향해 ‘댓글’이라는 아주 소심한 돌팔매를 던져본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대학교수라는 사람이 그런 익명의 군중들에게 ‘문빠’라는 딱지를 붙이고 준군사조직인 ‘홍위병’에 비유하며 ‘정신병 환자’라는 진단을 내린다.


이런 식이라면 광주시민이 내건 ‘전두환을 찢어죽이자’는 구호를 빌미삼아 ‘폭도’나 ‘빨갱이’ 딱지를 붙이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가만 이 글을 쓰다 보니 나도 갑자기 ‘문빠’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퇴근길에 정신병원에라도 들러야 하나. 미리 예약이라도 할까? 

Posted by 파비 정부권


<별난사람 별난인생>에서 제일 내 눈길을 끈 사람은 방배추였다. 이름도 별났지만 그의 이력은 실로 별난 것이었다. 그는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건달이었다고 했다. 이 책을 통해 듣기로 여느 깡패처럼 패를 지어 몰려다는 그런 건달이 아니라 시라소니처럼 홀로 움직이는 싸움꾼이었다.

 

하지만 전설의 주먹이라든가 시라소니 이후 최고의 주먹이라든가 조선 3대구라따위의 다소 선정적인 닉네임에 끌린 것은 아니었다. 내 관심을 끈 것은 따로 있었다. 그는 한때 백만 평이 넘는 부지에 <노느메기밭>이라는 농장을 짓고 함께 일하고 똑같이 나눠 갖는 공동체를 운영했다는 것이다.

 

공동생산 공동분배. 노느메기밭에서는 아무리 일을 잘하는 사람도, 아무리 일을 많이 하는 사람도 남보다 더 많이 가져갈 수가 없었다. 아무리 일을 못하는 사람도, 몸이 아파 일을 하지 못한 사람도 남보다 더 적게 가져가지 않았다. 누구든 공평하게 똑같이 분배받았다는 것이다.

 

오호라, 1970년대에 이런 생각을 하다니. 도대체 그는 어떤 사람일까? 박정희 정권은 두말할 필요 없이 네놈이 빨갱이 아니면 이럴 수 없다면서 그를 잡아다 고문하고 6개월간 징역을 살렸다. 그때의 고문 후유증으로 그는 40대부터 지금까지 이가 하나도 없이 모두 의치에 의존해 살고 있다.

 

그는 진짜 빨갱이였을까? 그러나 그의 말을 들어보면 결코 그런 것 같지도 않다. 그는 <자본론>을 읽어봤다고 했지만 마르크스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그는 마르크스가 스스로 먹고살기 위해 노동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천재였지만 커다란 약점을 안고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어쩌면 그는 푸리에와 같은 공상적 사회주의자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메시지가 없는 사람이다. 사실 내 삶 자체가 그러하기도 하고 거창한 철학 따위를 앞세우려는 마음도 전혀 없다. 하지만 숱한 고비와 기회가 다가올 때마다 맨몸 하나를 내던져 새로운 세상을 뜨겁게 만났고 부딪혔다는 점 하나만큼은 자부한다. 나를 건달, 주먹, 깡패, 협객 뭐라고 해도 상관없지만 그냥 뜨거운 내 인생을 찾아 자유로운 삶을 추구했던 사람으로만 받아줬으면 좋겠다.”

 

방배추 선생(본명 방동규)


방배추라는 사람이 사회주의자여도 상관없고 아나키스트여도 상관없다. 물론 그의 말처럼 아무 철학도 없고 메시지도 없는 그저 깡패거나 협객이어도 상관없다. 다만 그가 1970년대에 아무도 생각지 못했을 공동체를 건설하고 운영할 생각을 했으며 실제로 실행했다는 사실이 내게는 중요하다.

 

그는 선각자였던 것이다. “최근 정부의 이른바 성과급 중심 임금제 개편이나 저성과자 해고 가이드라인 마련 등 정책 어떻게 보느냐?”는 저자(김주완 기자, 경남도민일보 이사)의 질문에 대한 답변만 보아도 80을 훌쩍 넘은 나이의 그가 얼마나 선진적인 사상을 몸과 마음에 담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일을 많이 하고 잘난 사람은 돈 많이 주고, 못하는 사람은 적게 주고, 아주 못하는 사람은 퇴출시킨다? 이건 노예의 노동력을 착취할 때 사용했던 방법이에요. 노예끼리 서로 잡아먹고 자기가 살기 위해 상대를 죽이고, 그건 백 년 전에, 2차대전 전에 했던 경제이론이야.”

 

아무리 평등사상을 신조로 삼는 진보인사라도 이런 주장을 이토록 손쉽게 할 수 있을까? 일을 잘 못하는 사람도 일을 잘하고 많이 하는 사람과 똑같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당당하게 그렇소!” 하고 말하지는 못할 것 같다.

 

방배추는 정말 별난 사람이다.

 

<별난사람 별난인생>에는 방배추 외에도 6명의 별난 사람 이야기가 더 실려 있다. 채현국 선생은 너무도 유명한 별난 인생이라 따로 설명이 필요 없겠다. 장향숙 할머니는 참 아름다운 분이었다. 양윤모, 김장하 같은 분은 별난 인생이라기보다는 의인에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노동운동가 김진숙의 삶에 대해선 따로 이야기가 있어야 할 것이다. 최소한 나는 이분에 대해서만큼은 별난 인생이라 부르는 것은 실례가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그의 인생은 뜨겁고 진지하며 정의로운 것이다. 우리가 지나온 산업화시대의 사랑과 아픔 그리고 미래가 그를 통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별난 공무원 임종만과 별난 농부 김순재는 특별히 내가 아는 분들이다. 그래서 내가 아는 만큼 이분들에 대해서도 따로 할 이야기가 많다. 아마도 임종만은 자신의 임명권자인 시장이 근무하는 시청 앞에서 1인 시위까지 하는 인물이니 별종이라고 해도 별로 이의를 달지 못할 것이다.

 

김순재도 마찬가지다.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했고 졸업 후에는 농촌에 들어가 농사를 짓고 살다가 농협조합장까지 오른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그의 인생도 들여다보면 만만찮다. 그의 행보뿐 아니라 성격이나 행동도 알고 보면 아주 별나다.


하지만 누구보다 별난 사람은 이 책을 쓴 김주완 기자가 아닌가 한다. 그의 기자 이력을 들어보면 그가 얼마나 별난 사람인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다른 기자들이 안 하는 일을 주로 한다. 그러다 가끔 욕 아닌 욕을 듣기도 하지만 그의 개척정신, 실험정신은 실로 대단하다. 


김주완 기자는 나쁜 사람, 남들이 다루길 꺼리는 비극적 사건을 주로 쫓아다녔는데, 이승만 정권 하의 민간인학살이 대표적이다. 그는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에 일등공신이다. 그의 휘하에(이런 표현을 써서 미안하지만 이 표현이 좀 멋진 거 같아서, 임기자님 죄송^^) 임종금이란 기자는 그의 영향을 받아서 아예 <악인열전>이라는 별난 제목의 책을 불과 얼마 전 출간했다. 


 별난 기자 김주완 경남도민일보 이사


아무튼 <별난사람 별난인생> 재미있게 읽었다. 감동도 받았다. 이런 별난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더 빛나고 아름답게 변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면 이런 별난 책을 꼭두새벽에 일어나 열심히 쉬지 않고 재미있다고 읽은 나도 참 별난 사람이다.

 

그러나 진짜 별난 것은 이 세상이다.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밑에 사람 있는 이 차별의 세상이야말로 가장 별난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별난 제위들에게 권한다. <별난사람 별난인생>을 읽고 별나지 않은 미래에 동참하시기를.

Posted by 파비 정부권

기인이었다. 사실 나는 이 책 <풍운아 채현국>을 읽어보기 전에 그를 먼저 만났다. 창원대학교 강당에서 열렸던 이 책 출판기념회에서였다. 엄밀히 말하면 출판기념회가 아니고 북 콘서트라고 해야겠다.

 

다시 사실을 말하면, 나는 북 콘서트의 개념을 잘 모른다. 아마 대충 내가 아는 개념대로라면 북 콘서트란, 책을 통해 사람들이 모여 즐기고 소통하는 것이다. 하나의 문화행사다.

 

이날의 북 콘서트는 책을 팔기 위한 목적보다는 채현국이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가 무엇을 했는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런 것들을 나누는 그런 소통의 자리였다고나 할까.

 

하여튼 내가 그때 처음 본 채현국이란 노인은 기인이었다. 그는 거침이 없는 사람이었다. 욕도 예사롭게 해댔다. 그래서 그의 이력을 잘 모르고 그의 대화를 듣게 된다면, 뭐 이런 노인네가 다 있지? 하며 부담스러워할지도 모른다.


그의 입에서 마구 쏟아져 나오는 쓰레기 같은 욕설을 듣노라면 그가 과거에 건달이었던지 아니면 최소한 무식한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여길 것이다.

 

실제로 그는 자기 스스로 건달이라고 했다. 또 그 이후에 읽어본 이 책에 따르면, 그의 친구들은 그를 일러 만약 이 친구가 돈이 없었다면 천상병처럼 되었을 것이다!”라고 했다. 천상병 시인의 기인 행적에 대해선 익히 들어왔던 터이지만, 그러고 보니 채현국 노인의 외모가 천상병 시인을 닮은 듯도 싶다. 각설하고.


 

그는 기인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유심히 읽어보기로 마음먹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첫 대목부터 나는 아, 하고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그는 기인이 맞다. 그는, 과거 그 시절에 이른바 서울대 중의 서울대라 불리던 서울문리대 출신이었다. (나는 그의 외모나 말투만 보고 진짜 그가 무학자에다 건달 출신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토록 무식하게, 쓰레기 같은 욕설이 뒤섞여 거침없이 튀어나오는 말들의 행렬 속에 놀랍도록 고매한 지식들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건달 입에서 버나드 쇼가 나오고 니체가 나온다면 사실 평범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는 건달이었지만, 대단한 학식을 겸비한 건달이었다.

 

, 그럼 지금부터 책 이야기를 하자. 어차피 이 글은 이 책을 읽고 난 독후감이다. 그런데 책 이야기는 안 하고 서두에 노인 채현국 혹은 건달 채현국에 대한 이야기만 해댔으니. 책을 쓴 김주완 기자가 섭섭하다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다시금 생각해보면 그리 섭섭할 일도 아니다. 채현국을 이야기하는 것이 곧 이 책 이야기를 하는 것이니까. <풍운아 채현국>은 김주완 기자가 채현국 노인을 만나 나눈 대화를 기록한 책이다. 그러므로 그저 채현국의 어록이라 하는 편이 맞을지도 모른다.


@사진. 김주완 김훤주의 지역에서 본 세상


김주완은 친절하게도 책의 첫머리에 채현국을 모르는 대다수의 독자를 위해 그의 이력을 간단하게 알려준다. 방법은 기록을 찾아 소개하는 것이다. 과거에 그를 아는 사람들이 남겼던 기록을 꼼꼼하게 더듬는 작업은 그 특유의 성실함이다.

 

그는 가끔 술자리에서, 대충 기억나는 대로 쓰자면 이런 말을 했다. “취재하러 왔다는 놈이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온다면 그게 말이 되겠느냐. 그래서 나는 누구를 취재하러 가기 전에 먼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조사부터 한다. 그게 사람에 대한 예의다.”

 

그가 소개한 채현국은 이런 사람이었다.

 

채현국 형은 가두의 철학자라고 내가 부르는데 당대의 기인이라 할 것이다. 옷도 막 입고 말도 막 하고 술도 막 마시고…… 집안에 돈이 있어서 그렇지 없었으면 천상병 시인과 비슷해졌을 것이다.” (남재희, 언론인, 전 노동부장관)

 

그는 마음에 맞는 친구들에게 밥과 술을 사주고 헤어질 때 차비를 쥐어주는 데 그치지 않고 셋방살이를 하는 친구들에게는 조그마한 집을 한 채씩 사주는 파격의 인간이다. (임재경, 언론인)

 

채현국은, 그 당시 표면에는 일절 나서지 않으면서 군사정권의 지명수배를 받거나 도망치 다니는 사람들을 그 탄광에 받아서 그들에게 호신처를 제공하고, 또 음으로 양으로 반독재 노선을 추구하는 지식인들과 학생들 그리고 문인들을 경제적으로 도와준 훌륭한 분이오.” (리영희, 전 언론인)

 

존경하는 리영희 선생까지 나서서 훌륭한 분이라고 치켜세웠으니. , 이쯤되면 더 소개할 필요가 없겠다. 이외에 인정의 사나이, 활빈당주 등 그를 따라 다니는 수식어들은 실로 넘치고도 남았다. 무엇보다 스스로 건달을 자처하는 그는 기인이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의 부친 역시 기인의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채기엽. 젊어서 물산장려운동에도 투신했으며, 나중에 임시정부에 합류하고자 상해로 건너가서는 사업에 투신해 큰돈을 벌게 된다. 해방 후 귀국한 이후에도 사업수완을 발휘 재벌급의 기업을 일구게 된다.

 

그의 부친 역시 기인이었다는 것은, 독립운동에 투신하겠다는 일념으로 가족까지 팽개치고 중국으로 건너갔다는 것이나, 대륙에서 트럭을 몰고 사지를 오가며 무역을 해 큰돈을 벌었다는 것이 아니다. 부친도 채현국과 마찬가지로 돈이 생기면 여기저기 나누어주는 버릇이 있었던 것이다.

 

상해에서 이분에게 은혜를 입은 한국인은 아마 백 수십 인이 넘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그들이 아직 당시의 은혜를 갚는 것 같지 않다. 뿐만 아니라 계속 누를 끼치고 있기까지 하다. ‘은혜가 다 뭐냐. 다들 건강하게 일 잘하고 있으면 그로써 만족하다고 말씀하시지만 부끄럽기 한이 없다. 희귀한 인물임을 특기해두고 싶다.” (이병주, 소설가)

 

, 이쯤 되면 책 얘기도 더 할 필요가 없겠다. 직접 읽어보시라. 그의 어록을. 그럼에도 하나 특이사항을 소개한다면 대학 시절 그가 탤런트 이순재와 연극반에서 함께 했었다는 사실이다. 책 속에 나오는 그의 말이다.

 

한번 전화를 했는데, ‘이름 들어봐야 잘 모를 끼다. 나 채현국이다했더니 왜 몰라?’ 하대. 그래서 이 자식, 알면서 전화도 한번 안 했냐고 하니 지금도 욕하는데. 뭐 욕먹으려고 전화 하냐?’ 하더군. 2년 선배에요.”

 

그러고 보니 이순재가 서울대 철학과 출신이었다. 나는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늙어서 케이블방송에서 상조회 광고나 하는 그가 곱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건 내 사정이고. 아무튼 채현국의 입을 통해 등장하는 이름들만 해도 쟁쟁하다. 책을 통해 직접 만나보시기를 바란다.

 

채현국 선생은 이미 유명인사가 됐다. 그의 이름으로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모니터가 그의 사진들로 꽉 찬다.


, 특이사항이 하나 더 있다. 채현국 부자가 현 경남대학교를 당시 박정희 대통령 경호실장이던 박종규가 인수(강탈?)하기 전 소유주였다는 사실. 우리 지역 일이니 관심이 아니 갈 수가 없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비사다. 어쨌든 책을 읽다 보면 그의 입을 통해 우리가 몰랐던 많은 사실을 접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그의 입을 통해 세상을 발가벗겨보는 재미도 느끼게 될 것이다. 채현국은 실로 기인이다. “노인들이 저 모양이란 걸 잘 봐두어라!” “세상에 정답은 없다. 무수한 해답만 있을 뿐!” “재산은 세상 것이다!”와 같은 그의 어록이 아니라도 그는 삶 자체가 기인이다. 그러나 이 책 <풍운아 채현국>을 읽고난 이제 그를 이렇게 불러야겠다.

 

채현국 선생!

Posted by 파비 정부권

요즘 뜨는 국수집 호호국수가 어디 있나 했더니, 내동상가에서 서울깍두기 쪽으로 내려가다 5층 상가건물 1층 안쪽에 있었네요. 저는 워낙 유명세를 타고 있어서 길가 잘 보이는 곳에 있을 줄 알았는데 건물 밖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았어요.

김주완 경남도민일보 국장님하고 택시 타고 갔는데요. 국수 한 그릇 먹으려고 마산에서 창원 내동까지 택시로... 어쨌든 저는 택시비 아끼려고 국장님 택시에 꼽사리~ ㅋㅋ 김주완 국장, 차 안에서도 열심히 아이폰질입니당~

기사님 옆에서 열심히 스마트폰으로 뭘 하고 계시는 김 국자님. 페부질인가요?

 

도착하니 벌써 페이비 회원님들이 밖에서 손님들을 맞고 있군요. 와! 국수 먹으러 와서 이런 환영 받아보기는 난생 처음이네요.

전 민영이가 맞지만, 정민영이에요. 으흐, 제가 전민영으로 착각해서 페이비에다 전민영이라고... ㅋ~ 사진 들고 있는 분 중에 한분... 어느 분일까요? 경남도민일보 메인에 난 호호국수 기사를 액자에 담아 기증하겠다네요. 정말 대단한 페이비언들...

자, 오늘 그럼 우리가 왜 마산에서 창원까지 택시를 타고 국수를 먹으러 갔을까요? 며칠 전 경남도민일보 1면에 호호국수 송미영 사장님이 커다란 사진과 함께 등장했는데요. 마산에서 감자탕집을 운영하면서 <오유림 여사의 제3의 활동>이란 블로그도 운영하시는 오유림 사장님에 이어 신문 메인을 장식한 두 번째 인물이었답니다.

이 두 편의 기사 반응은 매우 뜨거웠답니다. 페이스북 창원시 그룹에서도 난리가 났겠지요. 이 바람에 도민일보 구독자도 막 생겨나고 했으니 김주완 국장으로서야 입이 함지박만큼 째졌을지도... ㅎㅎ~ 그래서 김 국장이 벙개를 쳤답니다. 13일 12시에 호호국수로 모이라고요. 그러면 자기가 밥값 다 낸다는...

가게가 꽉 차서 다른 손님들이 들어오지도 못하고... 지송! 아시는 분 있는가 찾아보세요.

29명이 모였네요. 사실은 28명인데요. 1명은 모인 일행 중에 누군가를 만나러 온 1인이었답니다. 그분은 국수를 드셨는가 모르겠어요. 아무튼, 대성황... 국수값이 좀 마니(money) 나왔겠어요. 한 그릇에 3,500원이니 곱하기 28 해보셔요. 그럼 얼마지? 설마 이걸로 김 국장님, 부도나신 건 아니겠죠?

얼마 전에 창동 가배소극장에서 바디페인팅 퍼포먼스를 보여주신 배달래 작가님도 오셨군요. 그런데 배 작가님, 케이크를 사요셨어요. 김주완 국장에게 주려고 가져왔다는군요. 아, 정확하게는 김 국장이 아니라 경남도민일보 창간 12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사온 케이크였어요. 정말 이름만큼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배달래...입니다.

김주완 경남도민일보 편집국장. 생일선물도 받고... 므흣!!

민주노동당 문성현 창원시당위원장님과 손석형 경남도의원도 오셨군요. 제일 늦게 오셔서 박수도 제일 많이 받았네요. 우리는 각자 소개도 돌아가면서 하고 했는데, 이분들은 자기소개도 안하고서도(아니 못한 거죠?) 이렇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니 황송했을 거예요.

오해하지 마셔요. 이집은 막걸리 안 팝답니다. 우리가 사 온거에요. ㅋ

나중에 호호국수 사장님, 나오셔서 김주완 국장에게 절까지 하면서 고맙다고... 뜨거운 포옹을 하는 두 사람... 우레와 같은 박수 속에 눈물이... 정말 울려는 분들이 계시더군요. 역시 마음씨들이 착한 페이비언들이에요. 가만 페이비언? 막 쓰다 보니... 그런데 그거 말 되네... ㅎㅎ

감격적인 포옹. 옆에 서계신 분... 잘못하면 우시겠어요... 흑~

국수 한 그릇의 벙개였지만 정말 보람찬 점심이었습니다. 아, 호호국수는 3,500원만 내면 국수는 양껏 먹을 수 있도록 주신다고 하는데요. 곱빼기도 3,500원... 거기다 더 곱빼기 해도 가격은 동일. 물론 수육을 따로 시키면 그건 돈을 더 내야겠죠?

앞으로 가끔 호호국수 애용해야겠어요. 마산에서 창원까지 멀긴 하지만... 일부러 창원에 일을 만들어서라도. 송미영 사장님은 젊은 시절 너무 배곯고 살아서 배고픈 사람은 절대 못봐준다네요. 그래서 그렇게 막 퍼준답니당~

단체사진도 찍었네요. 문성현님 승리의 브이 그리시는데... 그 밑에 손석형님, 난 벌써 이겼어... 웃고 계시고... ㅎㅎ

호호국수. 이름도 정말 정겹지 않나요? 정말 즐거운 이름이죠. 그렇지만 아무리 즐거워도 저야 뭐 호호 하고 웃을 순 없고, 하하하 하고 웃어야겠습니다. 암튼^^ 보람찬 하루였습니다. 여러분도 시간 나시면 호호국수 들러서 하하 웃으면서 또는 호호 웃으면서 국수 한 그릇씩들 드세요. 하하하하~

Posted by 파비 정부권
앞서 제 포스팅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경남 팸투어에서는 긴긴 밤을 니나노로 지샜습니다. 

무척 피곤했던 저도 그 니나노를 들으며 흥이 났었는데요. 
노래방 기계 없으면 노래 못하는 저로서는 아쉬운 일이었죠. 

그때 결심하기를 앞으로 가끔 노래방에 홀로 가서
가요 연습을 좀 해야겠다, 그러기도 했었죠. 

저로 말씀드리자면,
사실 유행가는 듣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특이한 종족에 해당한답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과 차를 타고 가다 보면 저들은 노래를 틀고 
저는 시끄럽다고 노래를 끄고 하기를 몇 차례나 반복하지요. 

제가 노래를 아주 안 듣는 것은 아니지만, 취향이 좀 독특해서... 

김추자를 제일 좋아해서 제가 차 끌고 다닐 땐 늘 이 노래를 틀었었죠.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좋죠? 
그 다음, 문주란도 좋아하고, 백지영 노래도 좋아하는데...

대체로 제가 아는 사람들은 이런 노래는 잘 안 듣더군요.
이들 이외의 노래는 그저 소음으로만 들리니, 저로선 고역인 셈이죠.
 
제가 또 취향이 아주 고상해서 클래식 듣기는 아주 좋아합니다만...
비 올 때는 베에토벤도 가끔 듣지만, 모짜르트를 아주 좋아했죠.
경쾌하고 달콤한 그 음률... 그러나 요즘은 이도 안 듣습니다.

아무튼 전반적으로다가 소리가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는데요.
감성이 메말라가고 있다는 증거겠지요.

그런데 두 번의 팸투어를 하면서 김주완 국장이 노래를 아주 좋아한다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특히 니나노를 좋아한다는 걸 말이죠.
니나노... 젓가락 두드리면서 부르는 노래 스타일을 우리는 흔히 니나노로 알고 있습지요.
 

경남 팸투어. 모두들 젓가락으로 상을 두드리며 니나노에 열중하고 있다.


정운현 국장님이 그렇게 노래방 가자고 사정을 했건만...
김주완 국장은
"아닙니다. 이렇게 젓가락 장단 맞춰 니나노가 좋잖습니까? 오늘은 계속 니나노로 갑시다"
 할 정도였지요.

니나노를 듣다 담배 피러 잠시 밖에 나와보면 
사방이 자욱한 안개로 포위된 감 밭 속의 집,
가느다란 불빛만 새나오는 창문에서 들려오는 니나노 소리

환상적이었죠.

경남 팸투어. 한쪽에선 신세대 블로거들의 랩? 아무튼 신났다.


그 환상에 겨운 김주완 국장.
상주 곶감팸투어 때도 다시 니나노판을 벌리고 싶었는데...
그런데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습니다.

경남 팸투어 당시의 정운현, 임마 등 니나노계의 거물들이
이번엔 모두 빠졌기 때문이었을까요?

새롭게 구성된 팸투어 멤버들...
눈치도 없이 술만 축내고 있습니다.




이에 참다 못한 김주완 국장.
분연히 일어섰습니다.

"자, 우리 이제 그만 니나노로 갑시다. 팸투어는 밤에 이 니나노를 해야 재미도 있고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한곡조 먼저 뽑겠습니다."




갑자기 주먹을 흔들면서 노래를 부르는 폼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뭔가 중대한 결심을 하고 나온 듯 자못 비장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좌중들...

갑자기 이거 뭔 시츄에이션이여? 하는 반응들입니다.
오른쪽 열 네 분, 바람흔적, 보라미랑, 실비단안개, 이승환 뉴스보이 대표...
모두 심드렁하게 입에 뭘 집어넣기만 합니다.

지민이의 식객님, 뒤로 몸을 제끼고 경청하긴 합니다만...

유일하게 선비님만이 젓가락으로 장단을 맞춰주고 계십니다.

"아, 그래도 이 자리를 만들어준 100인닷컴 대표에 경남도민일보 편집국장이 노래를 부른다는데.
장단 좀 맞춰주자고."




반응이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의 김주완 선수 열창은 계속됩니다.

보라미랑 : '아, 되게 시끄럽네.'
실비단안개 : '언제 끝나는 거야?'




반응이 별로란 걸 눈치 챈 우리의 김주완 선수... 

이제 온몸으로 열창하기 시작합니다.
이 정도면 거의 발악 수준...  




그러나 결국 이날 분위기를 니나노로 끌고 가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김주완 국장의 열창이 끝났지만 아무도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없네요.

'에이, 오늘 감 껍질 먹인 상주한우 소고기를 너무 많이 먹였나? 전부 다 어째 소 여물 씹듯 하고만 있네."

보라미랑: "어이, 한사 이리와봐. 자 우리 술이나 계속 먹자구. 확실히 우리는 아웃푸트 보다 인푸트가 어울리는 사람들이야. 자자 많이 마셔."  




잠시 후 시무룩하게 술을 마시고 있던 우리의 김주완 국장. 어느틈엔가 조용히 사라지고 없더군요. 방에 가봤더니 벌써 이불 깔고 누웠네요. 하긴 이때 시간이 이미 자정이 지났습니다. 니나노가 없으니 술맛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제가 분명히 팸투어 준비물로 노래 3곡씩 가져오라고 사전 통지 했건만, 상주 곶감팸투어 멤버들 대부분이 다큐멘타리파들이었습니다. 그저 날밤 새는 줄도 모르고 다큐멘타리에만 열중하다 새벽 3시 반이 넘어서야 잠이 들었지 뭡니까. 마지막까지 남았던 인물은 네 사람.

보라미랑. 한사정덕수. 크리스탈. 저는 주최측으로서 마지막 최후의 1인이 잠드는 모습을 보고 자야 했기에 남았던 것이고, 크리스탈님은 다 들어가고 나면 상을 치워야 한다나요? 아니 밖에 나와서까지 그렇게 고생하실 필요가... 아무튼 덕분에 제가 좀 편했습니다만.

다음번 팸투어엔 꼭 노래 세 곡씩 준비하도록 합시다. 끝.  
Posted by 파비 정부권
제 블로그는 탄생한지가 그리 오래 되지는 않았지만, 이름의 역사를 쓰자면 좀 깁니다. 제 블로그가 처음 세상에 빛을 본 것은 작년, 그러니까 2008년 4월 19일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이날은 매우 의미가 깊은 날입니다. 4·19혁명 기념일이죠. 바로 그런 날에 제 블로그가 태어났다고 생각하니 한편 가슴 뿌듯합니다. 

내 블로그 생일은 4·19혁명 기념일

사실 그러고 보면 이날은 제 인생에도 혁명이 일어난 날임에 틀림없습니다. 아날로그 세상에서만 맴돌던 제가 디지털 세계에 본격적으로 입문했다는 것을 혁명이라고 해도 그리 과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제 블로그는 4·19혁명 기념일에 탄생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블로거가 된 것은 그로부터 몇 달 후의 일입니다.

2008년 8월 30일, 경남블로거스컨퍼런스. 사진=경남도민일보


제가 블로거가 되도록 인도한 사람은 경남도민일보에서 미디어부장으로 일하는 김주완 기자와 정성인 기자입니다. 제 블로그를 만들어준 사람도 사실은 김주완 기자입니다. 그가 제게 티스토리 초대장도 보내고, 블로그 스킨도 만들고, 나중에 광고도 달아주고, 그가 다 했습니다. 저는 오로지 글만 써서 올리면 되었던 거지요. 

당연히 제 티스토리 블로그 아이디와 비밀번호도 그는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까먹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당시 저는 거의 컴맹이었습니다. 컴퓨터를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컴퓨터는 제게 워드프로세서, 엑셀, 파워포인트나 사용하는 사무용품 이상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인터넷을 아예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도 업무상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한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니 컴맹이라고 불려도 별로 변명의 여지가 없지요. 넷맹이라고 하는 게 보다 더 정확할 수도 있겠군요. 4월 19일, 김주완 기자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블로그 다 만들었으니 들어가 보시고 이전에 써두었던 글 있으면 우선 몇 개 올려보세요."

대박 난 첫 번째 포스팅, "삼성은 뭔 짓을 해도 됩니더"

그래서 도민일보에 기고했거나 어떤 까페에 올렸던 글 등 30편을 골라 한꺼번에 올렸습니다. 제일 첫 번째로 올렸던 글은 <삼성은 뭔 짓을 해도 용서해줘야 됩니더>란 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글이 떴습니다. 다음 메인 뉴스 화면에 발탁된 이 글은 4시간 만에 5만 명이 넘는 네티즌들이 방문했습니다. 댓글도 백여 개가 달렸습니다. 

그게 4월 20일이었던가, 4월 21일이었던가요?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에 김주완 기자로부터 받았던 전화 목소리는 아직도 생생합니다. "어, 파비님 블로그가 다음에 떴던데 보셨어요? 난리가 났던데요." 글쎄 저는 그때 블로그란 게 이런 것이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습니다. 그저 한 순간 지나가는 태풍처럼 그렇게 지나갔을 뿐입니다. 

9월이 오기까지 저는 단 한편의 포스팅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2008년 8월 30일, 경남도민일보에서 주최했던 <경남블로거스 컨퍼런스>는 블로그에 대한 인식의 대전환을 하도록 만들어주었습니다. 말하자면, 제게 그것은 신항로의 발견에 버금가는 큰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9월 1일, 저는 블로그를 위한 첫 포스팅을 했습니다. 

아마 이날이 제게는 실질적인 블로그 생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무얼 써야 할까? 마치 '뭘 해먹지?' 하고 고민하던 우리 어머니처럼 쓸 게 없었던 저는 제 이야기를 쓰기로 했습니다. 제목이 <목욕탕에서 만난 낯선 남자>였는데, 낯선 남자란 다름 아닌 저였습니다. 이후 주로 세상사는 이야기를 주로 쓰던 저는 슬슬 시사블로그로 옮겨갔습니다. 

감성블로거가 되지 못하고 시사블로거도 아닌 의문의 블로거로 남다

'빗물처럼 감성이 줄줄 흘러내리는' 그런 감성블로그를 만들고 싶었던 저는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하고 시사포스팅을 주로 하기 시작했습니다. 왜냐고 물어보신다면, 그게 가장 접근하기 쉬워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제 경우엔 말입니다. 그리고 당시는 촛불정국을 지나 세상이 혼돈한 시기였습니다. 물론 여전히 혼돈상태에 있긴 하지만 그땐 정말 시끄러웠죠. 

그리고 제 경우에 감성블로그란 여행을 중심으로 문화답사, TV·영화·책 등 문화비평 블로그를 운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충분한 시간과 돈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시사포스팅을 위주로 하는 블로거가 되었던 탓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요즘은 또 드라마 리뷰를 주로 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아이덴티티가 없는 블로그라고 할 수도 있겠군요. 시사블로거도 아니고 드라마리뷰어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행블로그도 아닌, 정체가 모호한 의문의 블로그인 셈이지요. 한 달쯤 전에 김주완 기자와 커서님 그리고 저, 이렇게 세 사람이 경주에 놀러 간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두 분이 제게 했던 말도 그런 것이었습니다.

"파비님은 블로그 정체가 뭔지 그걸 모르겠단 말이에요." 그리고 김주완 기자가 구체적인 해법까지 내놓았습니다. "요즘 드라마 리뷰를 자주 쓰시던데 아예 그 길로 가세요. 조회 수 10만 넘는 것도 몇 건 있잖아요. 이참에 블로그 이름도 고치고요. '고' 블로그가 뭡니까? '고' 블로그가… TV저널, 이런 건 어떻습니까?" 듣고 보니 그럴듯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블로그 이름의 변천사, 고마나루에서 테레비저널까지

"TV저널이 좋긴 한데 좀 촌스럽군요. 그보다는 고상하게 테레비저널로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그러자 두 사람은 적극적으로 찬성의 의사를 표시하며 지지했습니다. "아, 그거 정말 좋네요. 그걸로 하세요." 그렇게 해서 보시다시피 제 블로그는 지금 현재 테레비저널이란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자, 그럼 지금부터 제가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제 블로그 이름의 변천사라고나 할까, 거기에 대해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블로그가 4·19혁명 기념일에 태어났을 때 처음 이름은 고마나루였습니다. 제 대신 블로그를 만든 김주완 기자가 제게 블로그 이름을 무얼로 할 거냐고 물어봤을 때 퍼뜩 생각나는 게 없어서 그냥 고마나루로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 티스토리 블로그 주소도 http://gomanaru.tistory.com 입니다. 그러나 이 이름이 갑자기 마음에 들지 않게 되는 불상사가 생겼습니다. 도민일보에 실리는 기사마다 사사건건 나타나서 시비를 거는 아주 극렬한 우익인사가 한 분 계시는데, 그 분 필명이 강나루로서 비슷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감각이 부족한 제게 좋은 이름이 떠오를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고마나루>에서 뒷부분의 '마나루'를 뺀 '고'를 이름으로 삼기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고블로그>가 탄생한 것입니다. 그리고 2차 도메인 주소도 아예 go.idomin.com으로 정했습니다. 제 블로그 주소는 지금도 http://go.idomin.com 입니다.

부담스러운 이름, "내 주제에 무슨 저널?"

그 이후에도 제 블로그 이름은 <파비의 고블로그>, <고블로그, 파비의 블로그 여행>으로 바뀌었다가 마지막으로 <테레비저널>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고민이 생겼습니다. 블로그 이름 때문에 말입니다. <테레비저널>이란 이름을 만들게 해준 이는 김주완 기자였는데, 이제 이 이름이 자꾸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저널이란 거창한 개념이 맘에 걸립니다. "내 주제에 무슨 저널?" 이런 회의가 자꾸 드는 것입니다. 게다가 테레비 보고 비평하는 글만 써야할 것 같은 부담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바꾸고 싶은데, 그래도 제가 의리라는 묘한 감상주의에 연연해하는 사람인지라... 테레비를 전격적으로 버리지는 못한답니다. 마음 약해서…  

그래서 대충 아래와 같은 정도의 이름 중에서 하나를 골라 바꾸고 싶습니다. 이번에 바꾸는 이름은 절대로 변하지 않고 저와 운명을 함께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아니 꼭 그럴 생각입니다. <칼라테레비>나 <검정테레비> 혹은<블루테레비> 같은 이름은 꼭 드라마 리뷰를 써야만 한다는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이름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세상을 보여주는 창이란 의미로 해석될 수 있겠지요. <테레비페이퍼>나 <테레비노트>라고 하면 역시 TV 이야기에 구속되는 문제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블루노트>나 <블랙노트>로 가면 테레비란 이름에 대한 의리를 배반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튼 후보가 난립하긴 했지만, 관심들 가져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예? 그런 쓸 데 없는데 시간 낭비하기 싫다고요? 그러시면 할 수 없지요, 뭐. 하긴 국회의원 보궐선거도 귀찮아서 하기 싫다는 분들도 많던데요. 흐흐흐~ 

새로운 블로그 이름, 추천 좀 해주세요

추천 마감시간은 월요일 오후 10시까지입니다. 그런데 이거 하나를 고른다고 해도 김주완 기자와 커서님에게 재가를 받아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그분들이 골라준 이름이니 그분들에게 거부권이 있는 거 아닐까요? 제가 헌법 전문가가 아니라 잘 모르겠는데, 아니 이거 비약이 달나라로 가고 있군요…. 이만 퇴장해야겠습니다. 

특별히 <블로거스경남> 여러분은 꼭 관심 가져주세요. 안 그러면 미워할 겁니다. 진짜로요. ㅎㅎ    

1. 칼라테레비   2. 검정테레비   3. 빨강테레비   4. 파란테레비   5.지테레비   6. 감성테레비   7. 블루테레비  
8. 블랙테레비   9. 테레비페이퍼    10. 블랙페이퍼    11. 레드페이퍼     12. 옐로페이퍼     13. 감성페이퍼   
14. 테레비노트     15. 감성노트   16. 블루노트   17. 옐로노트   18. 레드노트   19. 블랙노트   20. 기타 좋은 이름


ps; 제가 블로그 이름 골라 달라고 <블공> 까페에도 올렸더니 실비단남이 그런 의견을 주셨군요. 블로그 이름이나 대화명을 자주 바꾸면 변덕스럽게 보이고 신뢰성이 떨어진다고요. 그냥 밀고 나가라네요. 텔레비전에는 별의 별 걸 다 하니 부담 갖지 마라는군요. 그 말씀을 듣고 보니 또 그렇습니다.

하하, 역시 저는… 제 블로그가 의문의 블로그가 아니라 제가 의문인 것 같네요. 에휴~ 어쨌든, 고민은 참 많습니다. 그래서 블로그 시작할 때 이런 고민 너무 오래 하다가 정작 블로그 개설도 못한다는 이야기가 맞는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는 저에게 블로그를 전도한 김주완 기자의 말입니다만, 구구절절 옳은 말 같습니다.
Posted by 파비 정부권
엊그제 김훤주 기자의 글 <내가 노무현·김대중을 조문하지 않을 까닭> 때문에 좀 시끄러웠습니다. 김훤주 기자는 많은 비난에 시달렸습니다. 악플도 많았습니다. 심지어는 인신공격성 댓글도 많았습니다. 익명을 이용한 광기의 수준이 도를 넘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떤 분의 말씀처럼, 집단적 광기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특성일까? 이런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사실 이런 경향은 우리나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본도 매우 심하다고 합니다. 중국의 경우에 이 집단적 광기는 거의 폭발 수준입니다. 얼마 전 티벳과 위구르 사태 때 서울에서 보여준 중국 극우파 유학생들의 난동을 우리는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 나라의 유학생을 극우파라고 하는 것이 좀 생뚱맞긴 합니다만, 저는 그들이 극우파로 보였습니다. 

사진출처=경남도민일보

민족주의와 애국주의로 무장한 극우세력. 어쨌든 말이 좀 새긴 했습니다만, 저는 모든 지나친 행동은 탈이 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김훤주 기자가 굳이 '나는 김대중을 조문하지 않았다'라고 말할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가 모두들 조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위기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그의 자유의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이것이야말로 김대중 선생(!)이 바라는 바가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김대중이 30년 가까이 싸워왔던 바도 바로 이것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그가 생각한 민주주의의 가치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가 한 사람의 발언을 두고 거의 집단적 광기에 가까운 분노를 쏟아낼 때 김대중 선생이 추구했던 가치들이 하나씩 부서진다는 생각들은 들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저는 많은 사람들의 비난 또는 악플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진정으로 김대중을 평가하고 그의 업적을 제대로 알아주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훤주란 사실을 말입니다. 집단적 광기 수준으로 분노를 뿜어대는 지지자들보다 김훤주야말로 제대로 김대중을 추모하고 있구나, 그런 생각을 말입니다.

도대체 민주당이야 김대중이 결단한 혁명적 사회복지에 대해 평가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다고 하더라도―그들의 정체성은 역시 한나라당과 별반 다르지 않은 보수우파가 대부분이다―진보정당들,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의 추모논평을 보더라도 매우 실망스러운 것은 사실입니다. 민주와 평화를 빼고 복지에 대한 평가를 한 세력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김훤주는 그걸 했지 않습니까? 조문을 하지 않았지만 그는 김대중의 업적을 제대로 바라보고 공정하게 평가를 해주었지 않습니까? 비난성 악플을 다는 여러분 중에 김대중의 업적 중에 사회복지의 혁명적인 단초를 마련한 사실을 짚어주신 분이 한 분이라도 있으십니까? 제가 좀 과격하게 말씀드리자면, 우리 모두 허깨비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말씀드리자면, 사실 김훤주는 김대중을 조문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는 김대중의 지지자도 아니었을 뿐 아니라 그와는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서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공인도 아닙니다. 어떤 정당의 당직자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모두들 조문하는 분위기에서 "나는 조문하지 않았다"고 말해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김대중 선생을 조문한 어떤 사람들보다 김대중의 높은 업적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안목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이쯤에서 제 추억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교편을 잡았던 마을에서 자랐습니다.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박정희는 비명에 갔습니다. 그때 우리 반 부실장이었던 기종이는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았습니다. 슬프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덜컥 겁이 났습니다. '혹시 전쟁이라도 터지는 거 아닐까?' 그러나 다행히도 전쟁은 나지 않았습니다. 급하게 열린 비상조회에서 교장 선생님은 면사무소에 마련된 분향소에 가서 조문하도록 지시하셨습니다. 네, 제 귀엔 지시였습니다.

물론 저는 조문을 갔습니다. 헌화하고 향을 피우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들 훌쩍훌쩍 울었습니다만, 역시 저는 울지 않았습니다. 그저 두려웠을 따름입니다. 그리고 며칠 후 그분이 일제시대에 교편을 잡았던 문경국민학교 교정에는 꽃이 피었습니다. 신문에도 났습니다. 모두들 영웅이 비명에 가 하늘이 노한 것이라고 수군거렸습니다.

지난 7월 말, 낙동강 5차 도보기행 때 구미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구미시 해평면의 어느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청국장이 참 맛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식당 건물에서 고향 냄새가 났습니다. 게다가 식당 벽에 걸려있는 십자고상에서 동질감을 느낄 수 있어서 더 좋았습니다. 그리고 벽에 붙어있는 사진과 달력이 또 하나의 향수를 자극했습니다.

달력에 "평화통일의 대도"란 쓴 글이 이채롭다. 박정희가 평화통일의 대도를 걸었을까? 또 김일성은 어땠을까?


박정희 대통령 일가의 사진이었습니다. 박정희가 비록 독재를 하고 민주주의를 압살했지만 경제를 잘 해서 국민들을 배고픔에서 해방시켰다, 이게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박정희의 경제개발 정책이 오늘날 결국 대기업 위주의 재벌공화국을 탄생시킨 원흉이다 이런 평가도 있지만, 아직 국민들이 그런 진실에 접근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박정희는 경제개발 정책과 더불어 의료보험제도도 도입했습니다. 그리고 생활보호법도 만들었습니다. 협동조합을 본 딴 농협도 만들었습니다. 이런 제도들은 북유럽을 모방한 제도들입니다. 군사독재의 힘으로 사회주의적 제도들을 이 땅에 수입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박정희가 만든 사회보장제도들은 시혜적인 것이었습니다. 불쌍한 국민들에게 정부가 나누어주는….

그러니 그 범위도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회보장의 효시는 독일의 비스마르크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흔히 철혈재상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지요. 우리나라에 의료보험제도와 생활보호대상자 제도를 도입한 박정희와 유사한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아마 이 두 독재자들이 이런 제도를 도입한 이유도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박정희가 무늬만 입혀놓은 사회보장제도를 김대중이 혁명적으로 바꿨습니다. 생활보호대상자를 정당한 권리자란 의미의 수급권자로 바꿨습니다. 법 이름도 생활보호법이 아니라 기초생활보장법으로, 즉 국가가 보장해야할 의무가 있다는 것으로 바꿨습니다. 김대중이 결단하지 않았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법이었습니다.

당시 민주당 국회의원들도 반대했다고 하니까요. 그들 중 대다수는 김대중과 달리 한나라당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은 사람이 많다는 사실은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 그래서 김대중이나 노무현이나 어려움이 많았을 겁니다. 그러나 노무현에 비해 김대중이 역시 거목이라고 하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김대중은 자기 칼을 잘 다루고 쓸 줄 알았지만, 노무현은 자기에게 주어진 칼을 잘 쓰지 못했을 뿐 아니라 간수도 제대로 못했습니다. 노무현이 만약 탄핵정국 이후 주어진 사상 최고의 권력을 제대로만 썼더라면, 국가보안법 등 악법들을 없앨 수도 있었을 것이고, 민주주의를 완성한 그는 가장 위대한 지도자의 반열에 이름을 길이 새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아쉬움입니다.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아쉬움. 그래서 늘 공부하며 새롭게 진화하기 위해 몸부림치던 노무현의 죽음이 더 슬픈 것입니다. 거기에 비해 김대중은 충분히 꿈을 꾸었고 또 대부분 그의 꿈을 이루었습니다. 그는 천수를 다했습니다. 

식당과 붙어있는 안채. 할머니가 토마토도 내주시고 무척 고운 분이었다. 어린 시절 생각이 나게 하는 집 풍경이다.


이제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박정희 일가의 사진을 걸어놓았던 구미의 어느 시골 식당의 풍경으로부터 저는 어느 영화의 한 장면을 생각했습니다. <웰컴투 동막골>이란 영화였습니다. 인민군 장교가 동막골의 늙은 촌장에게 묻습니다. "큰 소리 한 번 안 치고도 나오는 그 영명한 지도력은 어디서 나오는 겁네까?" 노인이 먼 산을 쳐다보며 조용히 말합니다. 

"그저 뭘 많이 먹이야지 뭐." 네, 맞습니다. 그저 많이 먹여야 합니다. 아프지 않게 해야 합니다. 돈이 없어서 학교에 못 가고, 돈이 없어서 병원에 못 가고, 돈이 없어서 먹고 싶은 걸 못 먹는 그런 사람이 하나도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 그게 바로 큰 소리 한 번 안 치고도 나올 수 있는 영명한 지도력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노무현-김대중의 열렬한 지지자들은 정작 보지 못하는 영명한 지도력을 김훤주 기자가 보았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자고로 정치지도자란 이런 일을 해야된다는 메시지를 던져준 거 아니겠습니까? 이명박이 지금 민주주의를 압살한다고 하지만 이는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에 하나의 작은 소일 뿐입니다.

물결은 휘어지기도 하고 소에서 잠시 쉬어가기도 하지만 결국은 거대한 강줄기가 되어 바다로 갑니다. 중요한 것은 그 물줄기가 얼마나 주변의 대지에 충분한 물을 공급하며 바다로 가는가 하는 것이지요. 저는 김훤주 기자의 목소리에서 그걸 들었습니다. 이런 방식이야말로 지지자가 아닌 그가 김대중을 가장 잘 추모하는 방법이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해보았고요.

횡설수설 한 것 같지만, 강호제현의 보살핌을 바라마지않습니다. 하하. 저는 김훤주보다 간이 많이 작습니다. 고재열 기자가 말한 맷집도 약하고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민주당이 두 분 대통령 김대중과 노무현의 사진을 당사에 걸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그런다고 두 분의 유지를 받들 수 있을까요? 

두 분의 생각이 뭔지도 모르면서 유훈을 말한다는 게 어불성설이란 생각이 듭니다. 사진을 거는 것을 나무라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잘 했다고 생각하지만, 노무현이 김대중을 공부했다고 말한 것처럼 제대로 두 사람을 공부하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또 다시 강조하지만,

그 공부는 오히려 조문도 하지 않은 김훤주가 제대로 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슬픈 일이지만….         파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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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거스경남>의 블로그 강좌는 매달 열립니다. 이번 8월의 강좌에 초대된 강사는 독설닷컴을 운영하는 고재열 기자입니다. 그는 시사인의 기자이기도 합니다. 강의는 오후 7시부터 시작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서울에서 내려오는 고 기자가 조금 연착하는 바람에 경남도민일보 김주완 기자가 대신 '땜방'을 했습니다.

강의 준비 중인 김주완 기자.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이는 구르다란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정보사회연구소 이종은 소장

 
그러나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김주완 기자는 탁월한 강의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교수법이 훌륭하다고 훌륭한 선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풍부한 지식과 내용을 먼저 갖추는 게 순서지요. 당연히 김주완 기자는 내용도 충분히 갖추고 있는 훌륭한 기자요 블러거입니다. 그는 블로그 전도사로 불리기에 정말 손색이 없습니다. 

땜방 내용은 트위터에 대한 소개였습니다. 아직 트위터를 개설하지 않고 있는 나로서도 매우 흥미가 있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이윽고 40여 분 지각한 고재열 기자가 강단에 섰습니다. 인상이 매우 좋았습니다. 착하다고 하면 실례가 될까요? 아무튼 착해 보였습니다. 아직 젊은 나이였고요. 과거 기자들은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다녔겠지만, 그는 캐주얼이었습니다. 

고재열 기자, X-세대 출신 블로거다운 자유로운 외모

신세대들이 좋아할 것 같은 그러나 제 눈에는 희한하게 보이는 그런 종류였는데, 상의는 빨간 원색에 가슴에는 프리미어 리그 팀 심벌 같은 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바지는 청바지였던가? 아니 까만바지로군요. 전체적으로 머리 모양부터 신발까지 젊은 냄새, 자유의 냄새가 물씬 풍겼습니다. X-세대 출신다웠습니다. 음, 요즘 기자들은 저러고 다니는구나. 

김주완 기자가 고재열 기자를 소개하고 있다. 두 기자의 복장상태가 비슷하다.


하긴 김주완 기자는 머리에 염색을 하기도 하고 머리를 길러 뒷꼭지를 묶고 다니기도 합니다만―참고로 김주완 기자는 저보다 1년 선배뻘 됩니다―요즘 기자들은 매우 자유분방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격식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여졌습니다. 보다 자유롭고 날카로운 기자정신도 그래서 가능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고재열 기자도 역시 김주완 기자 못지 않은 강의 실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블로그를 한지가 이제 1년 6개월 정도 되었다고 하는데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고속성장을 했습니다. 이제 곧 본격 블로그를 시작한지 1년이 되는 나는 겨우 방문자 백만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는 벌써 누적 방문자 천오백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는 이 시간 현재 1045개의 글을 블로그에 올렸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글을 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대단합니다. 저도 꽤 많이 썼다고 생각하지만, 겨우 300여 개에 불과합니다. 김주완-김훤주 팀블로그가 비슷한 수의 콘텐츠를 올렸으나 두 사람인 점을 감안하면 가히 독보적이라 해도 되겠습니다. 혼자서 하루에 두 개 정도의 글을 쓴다는 말이죠.

고속성장의 비결? 대량생산과 이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속도전
 
그는 여기에 대해 블로그를 급속 성장시킬 필요가 있어서 집중한 결과였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럼 수출드라이브 경제정책 비슷한 거였나? 그런데 아무리 급속 성장을 하고 싶어도 어디 팔 게 있어야지, 그런 궁금증이 들었지만 그건 강의를 들으면서 거의 해소됐습니다. 그는 물건을 만들고 파는 방법에 대해 친절하게 잘 설명해주었습니다.

물론 그의 친절한 설명들은 모두 그의 경험에서 얻은 것들입니다. 그래서 나 같은 사람이 따라 하기엔 역부족일 수도 있습니다. 그는 황새고 나는 뱁새기 때문이죠. 그러나 유용한 내용임에는 틀림 없었습니다. 우선 그는 블로그는 겉절이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오프라인에서 ' 힘 있는 자가 약한자를 이긴다'면 온라인에서는 '빠른 자가 느린 자를 이긴다'는 것입니다. 

곧 블로그는 이슈의 빠른 속도에 적합한 방식을 가진 도구라는 것입니다. "미워하고 싶을 때 미워하고 싶은 재료를 줘라!"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바로 이때, 바로 이런 이야기를, 바로 이런 방식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블로그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때 바로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건 그러나 말처럼 쉬원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고재열 기자는 초보 블로거들은 이슈를 따라 다닐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어느 정도 단련이 될 때까지는 이 방법이 좋은 교육훈련의 장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면, '무한도전'이나 '패밀리가 떳다'가 방영된 다음날은 예외 없이 많은 글들이 포털이나 메타블로그를 장식하게 될 것인데 여기에 숟가락을 걸치라고 말입니다. 

블로그는 '설득의 매체'가 아닌 '공감의 매체'

이게 반드시 나쁘다고 할 수만은 없다는 겁니다. 연예전문 블로그를 운영하는 블로거들이야 연예기사를 포스팅하는 게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이런 이슈를 따라 다니는 게 마땅찮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재열 기자는 슬며시 우리를 설득합니다. 거기에 자기의 주장을 투영시키면 되는 거 아니겠느냐고…. 

그러면서 크는 거라고요. 금석 같은 이야기들이 많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이 말이 가슴에 남습니다. "블로그는 설득의 매체가 아니라 공감의 매체다." 참으로 중요한 말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속성장도 곰감의 방법을 깨달았을 때 가능할 것이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설득을 하려다 보면 반드시 무리가 따르게 되고 그리 되면 본래의 목적도 이룰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공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다 보면 설득도 자연스럽게 이룰 수 있습니다. 팔로우 업 하는데도 큰 도움이 되겠지요. 그러나 이 역시 말처럼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고재열 기자는 공감의 방법으로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국립 오페라단이 해체되었을 때, 단원이 눈물로 쓴 편지를 직접 실었다는 겁니다.

고재열 기자의 강연은 아주 열정적이었다. 말리지만 않는다면 열 시간도 할 거 같았다.


약간의 설명만 곁들여서 올린 해고된 오페라 단원의 눈물겨운 편지는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고 합니다. 강호순 사건이 났을 때, 오래 전에 써두었던 사형수들의 육성기록을 역시 약간의 설명을 첨부해 올렸더니 호응이 좋았습니다. 이 경우는 공감의 한 예이기도 하면서 과거의 글을 재활용하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블로그를 잘 하려면 맷집도 강해야

음, 지나간 글이라고 해서 사라지는 건 아니군요. 언제든 때가 오면 리바이벌 할 수 있는 것이로군요. 좋은 걸 배웠습니다. 금석 같다고 할 만한 이야기를 하나 더 소개하겠습니다. "펀치도 중요하지만, 맷집도 중요하다." 악플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특히 시사블로거는 비판기능을 주로 합니다.

펀치를 많이 날리는 블로거란 말이죠. 그런데 펀치는 잘 날리면서 맷집은 너무나 약한 블로거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열 대 때리다가 한 대 맞고 그만 나가떨어지는 블로거도 가끔 보았습니다. 사실은 그 길로 완전히 은퇴한 블로거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누구든 이유 없이 악플을 받으면 기분이 매우 안 좋습니다. 

그럼 맷집이 좋아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부분에 대해선 고재열 기자의 대답도 별 거 없었습니다. 그냥 무시전략이 최고라는 것이었죠. "그냥 무시해버리세요." 그런데 그게 어디 쉽나요? 속은 부글부글 끓는데 무시가 잘 되나요? 그러나 별 다른 대책도 없는 게 현실이니 맷집을 키우기 위해 우리 모두 도를 열심히 닦아야 할 듯싶습니다. 

아 참, 재활용에 대해서 한 가지만 더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번에 해운대란 영화가 크게 히트를 쳤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걸 지켜보고 있다가 관객이 한 400만쯤 동원 됐을 때 약 6년 전에 썼었던 기사 하나를 올렸다는 것입니다. 내용은 2박 3일 동안 해운대에 머물며 해운대의 일상들을 르뽀 형식으로 취재한 기사였는데요. 

재활용도 잘 하면 좋은 블로그 소재가 될 수 있다

이것도 대박이 터졌다고 하더군요. 6년 전 썼던 글을 살짝 손질하여 이렇게 장사(?)를 잘 해먹을 수 있다니 그 재치가 놀랍지 않습니까? 블로그를 장사에 비유해서 죄송합니다만, 어쨌든 물건을 만들었으면 잘 팔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니 모두들 너그럽게 이해해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블로그를 프레이밍 하는 방법, 이슈의 패자부활전, 이슈에 집중하라 등등… 많은 가르침이 있었지만 이만 하겠습니다. 공부도 너무 많이 하면 졸리운 법이니까요. 벌써 길다고 불만에 찬 아우성이 들려옵니다. 특히 구르다님, 소리 그만 지르세요. 저번처럼 너무 길다고 불평하는 댓글 달겠다는 '발칙한 생각', 당장 그만 두세요. 내가 원래 '가늘고 길게' 사는 놈인 거 잘 아시면서.  

강좌가 끝나고 마산 어시장에 가서 아구수육을 안주로 소주를 한 잔 걸쳤습니다. 그런데 고재열 기자와 어떻게 헤어졌는지 기억이 잘 나지도 않는군요. 부산의 파워블로거로 유명하신 거다란닷컴의 커서님도 바로 옆에 앉아 있었는데, 잘 가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를 처음 블로그로 인도해주신 정성인 기자님도 마찬가지고요.

김주완, 커서, 고재열 기자 등 쟁쟁한 블로그계의 전설들과 한 자리에 앉다 보니 너무 긴장을 했었나? 완전 기억 상실되었습니다요. 흑흑~ 하여간 그날 필름이 끊겼습니다. 다음날 하루 종일 고생한 건 두 말 하면 잔소리고요. 
         파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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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0일 오후 1시, 경남도민일보 3층 강당에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마산유족회> 창립총회가 열렸습니다. 저도 그 행사에 참석했습니다. 저는 유족은 아닙니다. 우리 가족 뿐 아니라 친족 누구도 학살에 희생된 사람은 없습니다. 참 다행한 일입니다. 창립총회 토의발언을 하시면서도 눈물을 적시는 어르신들을 보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치수 회장의 취임사는 민간인학살에 대한 정부태도 성토와 유족들의 결의촉구가 돼버렸다. 오른쪽은 김주완 부장.


우리 아버지는 한국전쟁 참전용사이십니다. 전쟁이 나던 해 열여덟 살이셨던 아버지는 부산의 어떤 거리에서 술을 마시다 잡혀갔다고 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군사 훈련장이었는데, 그곳에서 특수훈련을 받고 전쟁에 투입됐다고 했습니다. 공도 많이 세우셨다고 했습니다. 은성무공훈장을 세 개나 받기도 하셨습니다.


제가 어릴 때 그 훈장들을 마당에서 석유를 부어놓고 불을 지르셨습니다만, 최근에 다시 받아다 집 거실에 걸어두고 계십니다. 다리에 총상이 선명하도록 처절하게 싸우셨건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한창 공부할 젊은 나이에 배우지도 못했습니다. 일본에서 태어나 교또중학교를 졸업하고 해방을 맞아 귀국했을 때 조종사가 되는 게 꿈이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모든 걸 앗아갔습니다. 전쟁이 끝나고도 10년 가까이 군에 남아있다 제대했지만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도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석회석광산, 탄광 등지에서 발파감독으로 오래 일하셨지요. 제 어릴 적 아버지의 기억은 살기어린 눈빛과 술과 그리고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훈장을 태우던 힘없는 모습이 대부분입니다.


저는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전쟁의 상처가 어떤 것인지를 몸소 느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식들을 앉혀놓고 자기 무용담을 늘어놓는 모습이 어느 날부터인가 푸념처럼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숱하게 사람을 죽이면서 얻어낸 “이거 하나면 사람 목숨 세 개와 바꾼다”던 훈장은 삶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훈장으로 얻은 것은 피폐한 생활과 살기등등한 성격, 평생을 가도 가슴속에 쌓여있는 분노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버지가 매우 불쌍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의 피해자로서 말입니다. 그리고 더불어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저도 매우 불쌍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매우 행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전투와 상관없이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것도 적군이 아니라 아군이나 경찰에 의해서 말입니다. 그들은 모두 민간인이었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가서 집단총살 당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배에 태워져 마산 앞바다에서 수장됐습니다.


그중 아홉 구의 시신이 마산 구산면에 떠내려 온 것을 마을사람들이 거두어 묻어주었다고 합니다. 곧 그곳에서 유골 발굴 작업이 벌어질 거라고 합니다.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쌀을 준다는 꼬임에 넘어가 죽음을 당한 분들도 많다고 합니다. 보도연맹 가입자를 늘려 실적을 쌓으려는 천인공노할 만행의 희생자들입니다.


4․19혁명으로 세상이 바뀌자 마산에서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유족회가 발족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등장한 박정희 쿠데타정권은 유족회를 강제해산시켰습니다. 이때 노현섭씨 등 지도부는 구속되어 15년을 감옥에서 썩어야했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48년 만에 유족회가 다시 창립하게 된 것입니다.

학살자 가족들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한이 맺힌다. @경남도민일보 김주완 기자


이미 6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사건을 정확하게 밝혀내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유골을 발굴하는 것조차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1960년에 했어도 어려운 일을 2009년에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일지 짐작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다 정부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도 없애겠다고 합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지난 2월 진실규명 결정문을 통해 '1950년 7월 5일부터 9월까지 네 차례에 걸쳐 국군과 경찰, 형무관들에 의해 마산형무소 재소자와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 등 최소한 717명이 인근 산골짜기에서 총살되거나 구산면 원전 앞바다에서 집단수장됐으며, 그들 중 358명의 구체적인 신원을 확인했다'(김주완 기자)고 밝혔다고 합니다.


창립총회에서 마산유족회 회장으로 선출된 노치수 회장에 의하면 과거사위원회가 밝힌 숫자는 극히 일부이며 자신들이 확인한 숫자만 해도 1676명이고 신고를 하지 않고 있는 수백 명을 포함하면 최소한 2000명이 넘게 학살당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럼에도 이 정도라도 밝혀낸 것은 과거사위원회의 공적입니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은 그런 과거사위원회가 불편한 모양입니다.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원혼을 달래고 유족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서는 과거에 국가가 저지른 범죄행위를 반드시 밝혀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을 교훈으로 삼아야합니다. 그런데 현 정부는 그게 싫은 것입니다.


‘그게 싫다는 것’은 똑같은 일을 되풀이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한 유족은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니면 누구도 우리 한을 풀어주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 절대로 물러나서는 안 됩니다. 제 나이가 육십 넷입니다. 여기 저보다 나이 더 많으신 분들도 많고요. 우리 죽고 나면 아무도 없습니다.”


그랬습니다. 거기 모인 분들은 모두 머리가 허연 할아버지, 할머니들이었습니다. 안경을 벗고 눈물을 훔치는 어르신을 보니 저도 눈물이 나왔습니다. 유족도 아닌 제가 눈물을 흘리는 것이 부끄러워 먼 산을 쳐다보았지만, 가슴속에 흘러내리는 눈물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분들을 보면서 홀로코스트가 생각났습니다.

산청군 시천면 민간인학살 현장. 발굴팀장 경남대 이상길 교수는 마산유족회 자문위원이다. @김주완

잠시 후에 죽게 될 줄도 모르고 줄을 서서 목욕탕으로 들어가는 유태인들, 그 유태인들을 학살한 히틀러의 나찌정권과 우리나라가 무엇이 다릅니까? 그래도 나찌정권은 제 민족을 학살하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자기 동포를, 바로 얼마 전까지도 한 동네에서 함께 살아가던 이웃을 집단으로 학살한 것입니다.


이게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내내 분노와 슬픔으로 뒤범벅이 된 노인들의 붉어진 얼굴이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곧 마산시 구산면 바닷가에서 유골 발굴 작업이 이루어질 거라고 합니다. 10월 26일에는 위령제도 연다고 합니다. 저는 민간인학살 유족회원은 아니지만 그때도 꼭 참석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미력한 힘이나마 그분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고자 합니다. 왜 정부는 제 나라 국민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재판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국가범죄행위에 대하여 배상은 고사하고 한마디 사과도 안하는 것인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혹시나 그런 학살행위에 대해 찬동하고 있는 것일까요? 자기나 자기 가족이 그런 처지에 놓인다면 무어라고 할지 그게 궁금합니다.    파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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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다음영화

안녕하세요, 김태훈님.
<김태훈의 사생활과 공생활http://metablog.idomin.com/> 잘 보고 있습니다, 오늘 <경남블로거스> 추천글(민요의 변신은 무죄)에 올라온 아일랜드 민요도 잘 들었고요. 고맙습니다.  
댓글로 달 이야기를 이렇게 블로그에 올려 트랙백으로 보냅니다.
그냥 심심해서 실험적으로 해보는 거니까 너무 나무라지는 마시고요. 

사실은 이렇게 긴 댓글은 블로그에 적어 트랙백으로 보내는 게 더 좋지 않겠느냐고 저의 블로그 사수이신 김주완 기자님이 말씀하셨던 게 생각나서요.
제가 댓글이 대체로 길다보니 몇 번 그런 충고를 받았었거든요.
그래서 오늘 최초로 그 충고를 받아들여봅니다.
하랄 때는 안 하다가, 꼭 청개구리가 지 애미 무덤 냇가에 만들어놓고 비올 때마다 우는 짓을 따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아일랜드, 님의 말씀처럼 민족성이 우리하고 비슷하다고 하더군요.
저야 뭐 아일랜드 가본 적도 없고, 아일랜드 사람 본 적도 없지만.
아일랜드는 독실한 가톨릭계 나라라고 하지요.

천주교의 자율적인 조직 중 레지오라고 있는데 그 본부가 아일랜드 더블린에 있습니다.
레지오란 로마군단에서 따온 것이구요. 철저한 군대규율을 따른다고 하지만, 그렇게 군대적이지도 않습니다.
미국은 개신교의 나라인데 최초로 케네디가 아일랜드계 가톨릭으로 대통령이 되어 유명해지기도 했지요.

그런데 오늘 죄송합니다만, 제가 안티를 하나 걸어야 되겠네요. 감상 잘 하고 나서는... 흠~


멜 깁슨이 주연한 브레이브 하트의 무대는 아일랜드가 아니고 스코틀랜드랍니다.
독일의 앵글로와 작센지방에 살던 게르만족이
(이 작센이란 말이 변해 삭슨, 색슨으로 발음된다고 하던데요. 저는 그 이상은 잘 모릅니다)
켈트족이 살던 브리타니아로 쳐들어가서 초지(평지)가 많은 잉글랜드를 차지하고,
켈트족들은 모두 산악지방인 스코들랜와 웨일즈 지방으로 쫓아냈다고 하더군요.

나중에는 이 스코틀랜드마저 집어삼키자 저항이 일어났던 것이고,
그 저항군의 지도자 윌리엄의 일대기를 영화한 것이 브레이브 하트였죠.
이 영화에는 소피 마르소도 등장했었는데,
제가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해서 이 소피 마르소도 꽤나 좋아했었답니다.
1980년 라붐이었지요? ㅎㅎ 다시 소시적으로 가는 느낌.
하여튼 죄송합니다만, 윌리엄은 스코틀랜드 인이고,
아마 잘은 몰라도 이 스코틀랜드인과 아일랜드인은 같은 켈트족으로 알고 있습니다. 

님의 블로그에서 말한 신교는 영국국교회(성공회)를 말하는 것일 텐데요.
이 신교란 것이 헨리8세가 자신의 이혼과 재혼을 정당화하기 위해
가톨릭으로부터 이탈해 교황의 지위에 영국국왕을 올려놓은 결과로 탄생한 것인데요.
(물론 표면적인 이유는 이혼문제지만, 그 속에는 국왕과 봉권귀족들간의 권력게임이 숨어있는 것이지만서도)
지금도 영국성공회의 수장은 엘리자베스 여왕이죠.
신부가 결혼한다는 것 말고 가톨릭과 차이가 하나도 없어보인답니다.

그러니 신구교간 갈등이라기보다는 오래된 민족간 갈등, 침략의 역사로부터
오늘의 문제를 진단하는 게 옳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가보지 않고 말하는 게 좀 그렇긴 합니다만… 대충 주워들은 풍월로는 그렇습니다.
여행 안내책에 보면 스코틀랜드에 가서 "유아 잉글리쉬?" 이러면 무척 화낸답니다.
"유아 스카치?"라고 해야 좋아한다는군요.


좋은 노래 잘 들었습니다.
역시 우리하고 민족성이 비슷하다더니 아리랑하고도 비슷한가요?
이것도 모르니 패스. 그냥 제 느낌이었습니다요.

앞으로도 자주 좋은 자료 많이 보여주세요. 고맙습니다.
제발 비는 안 와야 할 텐데…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

얼마 전, 주완 기자의 블로그에서 휴대폰
홍보전쟁 기사를 보며 배꼽을 잡았습니다
.

"김주완 김훤주의 세상사는 이야기" 에서 사진 인용


“마산에서 제일 싼 집”
“북한 빼고 남한에서 제일 싼 집”

다음이 완전 압권이었죠?

옆집보다 무조건 싸게 팝니다”


하하.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물론 저도 매일 한번 이상은 이런 홍보문구를 거리에서 보았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무심코 지나쳤던 거지요. 워낙 이런 상술에 익숙해진 지 오래 됐으니까요. 그런데 김주완 기자가 부럽군요. 아직도 이런 것이 눈에 들어오는 걸 보면 그는 아직도 풍부한 감성을 간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덕분에 저도 지난 금요일에 구미에 올라갔다가 비스름한 것을 봤습니다. 구미에 간 이유는 낙동강 도보기행 제2구간(경북봉화 임기, 명호, 청량산, 안동 가송협, 도산서원까지)에 함께 갈 초석님이 구미역 근처에서 치과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그의 퇴근시간이 7이므로 그 시간에 맞춰 열차를 타고 구미역에 내렸습니다. 나중에 따로 포스팅 하겠지만 정말 환상의 강길이었습니다.

섬진강 하동포구길이 올해 한국의 아름다운 길 1등에 선정되었다는 기사를 어디서 본 것 같은데요. 글쎄요. 제가 보기엔 낙동강 가송리 협곡이 가장 아름다운 길이 아닐까 생각되는군요. 물론 이 길은 차가 다닐 수는 없는 길이니 섬진강과 비교하긴 좀 그렇지만요. 게다가 이 길은 퇴계 이황 선생의 발자취가 묻어나는 길이기도 하답니다
.

퇴계선생은 이 길을 걸어 수없이 청량산을 올랐을 텐데요,
 자신의 아호마저도 청량산인이라고 고쳤다 하는군요. , 이 정도로 제가 다녀온 낙동강 홍보는 그만 하기로 하고요. 금요일 오후 6 53, 구미역은 엄청나게 북적거리더군요. 한산한 마산역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습니다. 마치 서울역에 온듯한 착각이 일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가 촌놈이 된 듯 두리번거리며 역을 빠져 나온 제 눈에 제일 먼저 뛴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바로 이것이었답니다.   “폰값 똥값”


폰값과 똥값 사이에 있는 화투짝 보이시나요? 저게 바로 똥광이란 건데요. 제가 화투는 칠 줄 모르지만 아마 대충 맞을 겁니다. 광 중에서도 팔광과 똥광이 최고라고 들었거든요. 어쨌든 이 휴대폰 가게는 대구 동신골목을 싹쓸이하고 드디어 구미에 판을 깔았다는데요. 휴대폰을 똥값에 팔겠다는 거고요. 똥값에 폰을 사신 고객님은 화투판에서 똥광을 잡은 거나 마찬가지다 뭐 이런 이야기인 것 같네요.

폰값이 똥값이라…


, 그런데 옆집을 보세요. 이 집은 “폰값이 껌값이래요.”
 


! 정말 치열한 홍보전쟁이 김주완 기자의 말처럼 점입가경입니다. 차마 이 정도일 줄 몰랐는데 이제 아예 폰을 똥값이나 껌값에 팔겠다고 나섰으니… 먹고 살기가 어렵긴 어렵나 봐요. 이렇게 해서라도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쳐야 한다니. 이거 이러다 삼성전자나 엘지전자 같은 대형회사들 부도 나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 

아니 휴대폰을 똥값이나 껌값에 팔고 그 원가부담을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참으로 걱정됩니다. ? 제가 쓸데 없는 걱정을 하고 있다고요? 그래도 다 남는 장사라고요? 하긴 안 남기고 이런 짓 할 리도 없겠지요. 돈 되는 일이라면 공산주의도 팔아 이윤을 남긴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안 되는 짓을 할 리가 없겠지요. 

그런데 여러분, 사실은요. 제가 저 거대한 똥값과 껌값 간판을 보면서 생각이 들었던 건 그저 이런 이야기가 아니었답니다. 폰값이 똥값이든, 북한 빼고 남한에서 제일 싸든, 아니면 무조건 옆집보다는 더 싸게 팔든 뭐 우리는 이미 이 치열한 생존경쟁에 무덤덤해진 지가 오래 되었잖아요? 

휴대폰 가게를 자세히 보세요. 그리고 간판도 다시 한 번 봐주세요. 가게보다 간판이 더 크지 않나요? 그리고 위에 김주완 기자가 찍어 올린 자기네 신문사 근처에 있는 휴대폰 가게들 간판과도 한 번 비교해보아 주세요. 확실히 틀리지요? 구미는 대체로 간판들이 이처럼 초대형이더군요. 최소한 저 간판은 똥값으로는 달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던데, 여러분 생각은 어떠세요?

혹시 앞 전에 제가 올렸던 기사 중에 <터미널에서 만난 비키니 아가씨들>을 보셨던 분이라면 "그래 맞다!" 하실 거에요. 제가 한 달 전 낙동강 탐사를 떠나기 위해 이곳 구미에 들렀을 때, 그때는 버스를 타고 구미종합터미널에 내렸었죠. 터미널 앞은 온통 아가씨들로 뒤덮여 있었는데요. 간판 속의 아가씨들 말이에요. 그 간판들 크기도 장난이 아니었죠. 


저는 나날이 이토록 커지는 간판들이 걱정이네요. 작년이었던가요? 아니면 재작년? 모 방송사에서 방영한 신년기획 다큐멘터리에서 세계적인 사진작가인 프랑스의 얀이 유네스코의 지원으로 우리나라의 산하를 찍으면서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한국의 산과 들은 참으로 아름답다. 정말 눈이 부실 지경이다. 그러나 한국의 도시들은 너무나 황량하다. 미안하지만, 한국의 도시들은 너무 볼품없어서 카메라를 들이대기가 민망하다.

한국의 도시들은 건물들도 너무 개성이 없이 지어졌지만 거기에 달린 간판들도 너무 무질서하고 너무 크다.

 

대체로 이런 투로 이야기 했던 것 같은데요. 유럽 사람답게 참 솔직하게 말한다 싶었지만, 살짝 기분이 나빴던 것도 사실이었지요. 그런 제 마음을 알았던지 그는 친절하게도 또 이렇게 마무리 코멘트를 해주었답니다.  다만, 한국의 절들은 정말 감동적이다. 자연에 녹아 든 절의 모습은 실로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실제로 백두대간을 따라서 헬기를 타고 사찰을 찍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모습을 다큐멘터리를 통해 보여주었습니다. 자연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 오래된 절의 모습은 자연 그 자체였습니다. 요즘은 절에서도 자연을 배제한 인공의 모습이 많이 발견되기도 합니다만, 우리 조상들이 만들어놓은 아름다운 건축기술을 보고 싶다면 여전히 절로 가야 한다는데 아무도 이의가 없을 겁니다.  

 

아무튼, 오늘 제 블로그에서 무지막지하게 큰 도시의 간판 때문에 눈을 버리신 분이 있다면 보상하는 의미에서 아름다운 한국의 건축물 사진을 하나 보여드리겠습니다. 바로 위에 있는 사진은 제가 엊그제 낙동강을 타고 내려오다 가송리 협곡을 지나 농암종택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긍구당입니다. 뒤에는 낙동강이 살짝 보일 겁니다.

 

아이고, 결국 마무리는 낙동강 타령이군요. 요즘 제가 낙동강에 풍덩 빠졌거든요. 금강산 가는 길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청량산으로 가는 가송협과 퇴계 오솔길 만은 못할 것이다. 왜냐? 거긴 낙동강이 없으니까….” 이건 그냥 제 말인데요. 믿기지 않으시면 한번 가보세요. 후회는 안 하실 겁니다.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

어제 경남도민일보 김주완 기자를 만났다. 그는 어청수 경찰청장을 비롯한 지방자치단체장들이 돈을 주고 CEO 대상을 받았다는 의혹을 파헤쳐 특종을 한 인물이다. 궁금했다. 어떻게 알았을까? 그의 집 앞 한 횟집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매우 피곤한 듯 보였다.

하루 종일 전화에 시달렸다고 했다. 경찰청 홍보과장은 물론이고, 경남지방경찰청장으로부터도 전화가 걸려왔다고 했다. 한국일보에서도 전화가 걸려왔다. 계속 걸려오는 전화로 업무를 못 볼 지경이라고 했다. 틀림없이 곱게 걸려온 전화는 아니었을 것이다.

역시 전화선을 타고 넘어오는 목소리에는 어깨부터 목까지 솟아있는 힘줄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하긴 높으신 분들이 일개 시골 신문사의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말해야 하는 처지가 탐탁지는 않았을 터이다. 이처럼 불편한 처지를 만든 기자와 신문사가 매우 미웠을 것이다.

한국일보 11월 27일자 20면, 21면에 전면으로 실린 광고. - 김주완 김훤주의 '지역에서 본 세상'


물론 전화를 걸어온 목적은 “어청수 청장님은 절대 돈을 주지 않았다”는 변명을 하기 위해서였다. 돈도 주지 않았는데 왜 그런 기사를 쓰느냐며 빨리 기사를 고치라는 압력이 들어왔다고 했다. 김주완 기자도 술잔을 기울이며 그 점에 대해선 인정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럴 수도 있을 겁니다. 어청수 경찰청장은 돈을 안 냈을 수도 있어요. 다른 사람들은 돈을 냈다는 게 확인이 됐고 시인도 했지만, 어 청장은 돈을 냈다는 걸 계속 부인하고 있고 확인할 수도 없거든요. 아마 한국일보와 한국전문기자클럽에서 어청수 이름을 써먹으려고 그랬을 수도 있지요.”

그러면서 그는 한국전문기자클럽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그 단체에 대해 아무도 모른다는 거였다. 여기저기 알아보는데 마치 유령을 찾는 기분이라고 했다. 그래서 특히 어청수 이름이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국전문기자클럽이란 유령단체는 그렇다 하더라도 도대체 한국일보는 왜 그랬을까?

“어청수가 돈을 안 내고 상만 받았다고 합시다. 그럼 어청수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돈 주고 상을 받는다는 사실을 몰랐을까요? 절대 그럴 리가 없고 그래서도 안 될 텐데요. 만약 몰랐다면 이명박에게 바로 모가지 될 일이죠. 업무태만으로요. 자기가 하는 일이 뭡니까? 정보 수집하는 거죠. 특히 언론의 동향이 제일 중요한 건데…. ”

“그리고 알면서도 상을 받았다면 이거 뇌물수수죄에 해당되는 거 아닌가요? 제가 법리는 잘 몰라서 확신할 순 없지만, 이건 영락없이 뇌물이죠. 한국일보나 한국전문기자클럽은 뇌물공여죄가 되는 거고요.”

내가 의문을 제기하자 김주완 기자도 수긍했다.

“아마 충분히 가능성 있을 겁니다. 파고들면 뇌물이 될 수 있지요. 아니 뇌물 맞지요.”

오늘 신문에 보니 노무현 전 대통령의 형이 구속됐다고 한다. 뇌물을 수수했다는 것이다. 노무현이 현직에 있을 때 “많이 배우신 분들이 시골의 별 볼일 없는 노인에게 찾아가 머리 조아리고 뇌물 주고 하지 마라”고 누누이 타일렀건만, 대통령도 말발이 안 섰던 모양이다. 사건의 결과는 알 수 없지만, 노건평 씨에게 계속 머리 조아리며 찾아오는 많이 배우신 분들이 여전했다는 건 이미 드러난 것 같다.

하물며 시골의 일개 별 볼일 없는 노인도 그렇건만, 서울에서, 그것도 공권력의 최고 실세인 경찰청장에게 머리 조아리고 뇌물 갖다 바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찰청장이 돈을 안 주고 상을 받았다면 이는 틀림없이 뇌물에 해당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만약 뇌물인 줄 절대 몰랐다고 주장할 테지만, -자기는 돈을 주고 상을 받는 실태를 몰랐으므로- 그러면 다음엔 직무유기라는 그물이 기다리고 있다. 이는 이명박 대통령이 용납 못하는 일이다.

이래저래 어청수 경찰청장은 욕보게 생겼다. 그러나 결국 욕만 조금 보고 말 것이다. 문제는 언론사들이다. 조중동을 비롯한 여타의 신문사들이 대부분 공범구조에 갇혀있는 상태에서 아무도 입을 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경남도민일보도 메아리 없는 고함만 질러대는 꼴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전화통에 시달린 김주완 기자는 일찍 들어가서 자야 되겠다고 했다. ‘한 병 더’가 주특기인 나도 더는 ‘더’를 주장할 수 없었다. 아쉽지만 할 수 없었다. 실제로 그의 얼굴이 많이 피곤해 보였다.

‘에휴~, 그러니까 별 볼일 없는 시골 신문사 기자가 왜 서울에 높으신 경찰청장님을 건드려 갖고서는….’

그래도 그의 당당한 모습이 너무 장하다.

2008. 12. 5.  파비 

습지와 인간
카테고리 여행/기행
지은이 김훤주 (산지니,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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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파비 정부권

김주완 기자는 경남도민일보 기자입니다. 그는 기자 신분을 십분 활용해서 지역현대사에 관한 누구도 넘보기 어려운 커다란 업적을 쌓았습니다. 주로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일어났던 민간인학살을 들추어내기 위해 지난 수년 간 그가 닳아 없앤 신발만 해도 상당하리라 짐작합니다. 

그런 그가 엊그제 그의 블로그에 올렸던 기사 「70 노인이 말하는 빨갱이의 정의 
http://2kim.idomin.com/521」에 실린 70대 노인의 육성은 그야말로
지난 수년 간 돌아다니며 파헤친 현대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살아있는 역사였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굴비처럼 엮여가서 죽은 사람들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었습니다. 심지어 남자가 멀리 출타하고 없자 그의 아내를 대신 엮어가서 죽였다는 이야기엔 넋을 잃을 지경이었습니다.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 발굴현장에서 유해의 상태를 설명하는 이상길 교수. 경남도민일보/김주완기자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말들이 많습니다. 이런 진실을 밝혀내는 사람을 도리어 빨갱이라고 모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자 이어 김훤주 경남도민일보 언론노조지부장이 거들었습니다. 역시 그의 블로그에다 「21세기의 ‘빨갱이’와 150년 전의 ‘천좍쟁이’ http://2kim.idomin.com/523」란 제목으로 권력자들이 빨갱이를 어떤 용도로 이용해왔으며 빨갱이의 제대로 된 정의가 무엇인지 밝혀주는 좋은 글을 실었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의 빨갱이에 얽힌 이야기들 듣다보니 저도 갑자기 빨갱이에 관한 오래 된 추억이 하나 떠오릅니다. 저도 예전에 빨갱이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결혼 전
지금의 처가에 인사드리러 갔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한창 때인 20대였는데, 연애 중이었던 아내가 집에 인사드리러 가자는 말에 아마 엉겁결에 가게 되었지 싶습니다.  

그때 저는 노동조합 일로 경찰에 지명수배 중이었고 제 아내는 마산수출공단 어느 공장의 노조 위원장이었습니다. 미리 이야기가 있었던지 장인, 장모님과 위로 언니 세 분과 형부들이 모두 모여 있었습니다. 제가 수배자라고 미리 언질이 있었으므로 모두들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막상 저를 보더니 약간 안심하는 눈치였습니다.

제가 당시만 해도 허우대가 꽤 멀쩡했습니다. 그래서 그랬던지 뭐 그렇게 대단한 빨갱이처럼 보이지는 않았나 봅니다. 어른들에게 큰절을 올리고 몇마디 물어보시고 대답하고 하는 의례적인 순서가 지나가고 과일상이 나오고 모두들 편하게 둘러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긴장이 풀리려는 순간, 갑자기 제일 손위 처형이 대뜸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사람은 빨갱이 사상을 가지고 있어서 아무래도 안 돼. 두 사람은 고마 저 위에 평양에 올라가서 결혼하고 거기서 살든지 해."

"사람에게는 저마다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재능, 기독교에서는 이를 신이 부여한 운명으로 여기는 모양)가 있는데 그 달란트대로 살아야 되는 거야. 그걸 부정하는 사람이 바로 빨갱이지."

참고로 우리 큰처형과 큰동서는 서울에서도 꽤 큰 교회의 집사와 장로입니다. 대뜸 저더러 자기 동생 데리고 평양 가서 김일성이 밑에서 살라고 하니까 황당했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몇 년 후에 무사히 결혼을 했고 애도 낳고 잘 사는지는 모르지만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그때는 노조만 한다고 해도 모두 빨갱이로 보는 시절이었으니 큰처형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그분들이 저를 빨갱이라고 생각하시진 않는 거 같습니다. 저나 제 아내가 약간 좌파적 경향을 갖고 있는 건 알지만, 그렇게 (그분들이 생각하는 머리에 뿔 난) 숭악한 빨갱이처럼 보이진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오래지않아 학교 선생님들도 노동조합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뒤이어 일반 공무원들도 노동조합을 만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들과 대학교수에 공무원들까지 모두 빨갱이가 된 셈입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머잖은 장래에 경찰들도 유럽 선진국처럼 노조를 만드는 세상이 올 겁니다.  

그런데 아직도 세상에선 빨갱이가 유령이나 악마의 거죽을 쓰고 돌아다니고 있으니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젊은 사람들 중에도 빨갱이 타령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니 그놈의 유령이 끈질기긴 끈질긴 모양입니다. 그나저나 이렇게 계속 거꾸로 돌다가는 어지러워서 모두 다 쓰러지고 말 것이 걱정입니다.  

2008. 11. 10.  파비

습지와 인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김훤주 (산지니,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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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파비 정부권
또 한 수 배웠습니다. 블로그를 이용하면 파워포인트 없이도 프리젠테이션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블로그 전도사' 김주완 기자가 직접 시범을 보여주었습니다.

10월 13일 오후 7시, 경남도민일보 3층 강당에서는 지난 8월 30일 열린 '경남블로거 컨퍼런스'에 이어 지역의 블로거들을 상대로 블로그 강좌가 있었습니다. 김주완 기자가 직접 강사를 맡았습니다. 아마 강사를 섭외하기도 어렵고 또 돈도 들고 하니까 자기가 직접 나선 거 같습니다.

블로그 전도사 김주완 경남도민일보 기자. 사진="경남블로거 컨퍼런스" 때 토론 모습

 

그러나 무려 세시간 가까이 한 번도 쉬지 않고 이어진 그의 강의에도 참석한 40여 명의 블로거들은 한 명도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남아 경청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대장정' 끝에 '질문과 토론' 시간도 활발하게 이어졌습니다. 참으로 열정과 열기가 대단했습니다. 

이번 강좌에서 가장 확실하게 제 기억 창고에 담아온 것이 있다면, 블로그 글쓰기는 스트레이트 식으로 해서는 안 되고 내러티브 식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똑 같은 기사를 스트레이트 식으로 딱딱하게 발행했을 때와 다시 네러티브 식으로 고쳐서 재발행 했을 때의 네티즌들의 반응을 비교해주기도 했습니다.

반응은 폭발적인 차이를 보여주었습니다. 스트레이트 식 기사엔 거의 관심을 보여주지 않던 네티즌들이 똑같은 기사를 내러티브 식으로 고쳐 다시 발행했을 때는 엄청남 관심을 보인 것입니다.

김주완 기자는 신문들도 이제 스트레이트 기사 방식을 버려야할 때가 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보수적인 신문들은 잘 변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을 거라고 했습니다. 대세는 블로그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김주완 기자의 강의가 바로 내러티브 식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생생한 자료와 파워블로거의 예를 들어가며 지루하지 않게 해주는 김부장의 강의야말로 참으로 내러티브의 전형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글쓰기 만이 아니라 강의도 내러티브가 대세가 되어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블로그를 이용한 프리젠테이션으로 강의를 하는 모습. 사진=블로그 거다란의 "커서"


그래서 저는 두 가지 중요한 것을 배운 것입니다. 하나는 "블로그로 프리젠테이션을 할 수 있다. 전국 어디를 가든 인터넷만 된다면 언제든지 자기 블로그를 열어 강의도 할 수 있고, 보고도 할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글을 쓸 때는 내러티브 방식으로 친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듯' 재미있게 써야한다는 것입니다. 

듣고 보니 물이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써야 읽는 사람도 부담이 없고 그것이 또한 독자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그것은 또 반대로, 글을 쓰는 사람이 직업적인 글잡이가 아니더라도 글을 쓰는데 아무런 부담이 없도록 만들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어렵게 격식에 맞출 필요 없이 그냥 사람들과 정겨운 대화를 나누듯 하면 되니까요. 

내러티브, 말은 어렵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은 참으로 소중하고 정겨운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저와 함께 강좌에 참여한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제 아내도 틀림없이 유용한 도구 하나를 얻었을 겁니다. 지금쯤 함께 가서 강좌를 들어보자고 권유한 저에게 매우 고마워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블로거와 블로거 지망생들. 저 중에 우리 아내도 있습니다. 사진=김용택의 참교육 이야기


우리나라의 인터넷 사용 인구는 3536만 명에 달한다는 통계가 있다고 합니다. 40대는 82%의 인구가, 50대는 48.9%의 인구가 인터넷을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20대는 무려 99.7%가 인터넷을 한다고 하니 이들이 세상의 주력이 되는 가까운 미래는 아마 인터넷 천국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가만 보니 30대에 대한 통계가 없군요. 제가 메모를 빠트린 것 같습니다만, 90%이상 되겠지요?

그러나 IT 최강국으로 평가 받는 우리나라에 파워블로거 수는 아주 미미하다고 합니다. 일본 만해도 활동적인 블로거가 300만에 이른다고 합니다. 블로그의 발상지인 미국은 무려 우리나라 인구에 맞먹는 숫자가 활동하고 있다고 하니 실로 대단합니다. 우리나라는 기술적인 부분에서는 IT 강국의 위상을 보유하고 있지만, 활동 블로거 수에서도 보듯 콘텐츠나 내용면에서는 확연한 열세입니다. 

이런저런 이유가 있겠지만, 폐쇄적인 사이버 환경도 한 몫 하고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주완 기자에 의하면 우리나라 최대 포털인 네이버가 바로 삼성의 벤처기업으로부터 출발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삼성의 폐쇄적이고 독보적인 기업정책이 그대로 네이버에도 유전병처럼 옮아갔으리라고 말합니다.
 
저도 아직 올챙이지만 블로거가 된 이상, 네이버의 폐쇄성에 대해선 한 번 꼼꼼히 따져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제 의견을 말하고 거꾸로 의견을 들어보는 그런 기회를 만들었으면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늘 하는 주장입니다만, "폐쇄적인 모든 것은 민주주의의 적이다. 모든 것은 열어야 하고 판단은 사람들이 한다."는 게 제 신조 중의 하나입니다. 

저는 얼마 전에 올린 "내가 올챙이 블로거가 된 까닭은?"에서 밝혔다시피, 블로거가 된지 이제 겨우 40여 일 남짓 됐습니다. 열심히 해서 백일잔치라도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올챙이 블로거가 된 까닭'을 읽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저는 사실 블로그가 뭔지도 모르다가 경남도민일보의 정성인 미디어팀장과 김주완 기획취재부장에게 꼬여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분들과 상관없이 저 스스로 블로그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습니다. 매우 재미있습니다. 저는 사실 서정적인 블로그를 만들고 싶었지만, 아직은 제 능력과 여유의 모자람 탓으로 주로 시사적인 내용들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제 블로그 카테고리 맨 위에 달아놓았다시피 '청풍명월淸風明月'로 감성이 비 오듯 흘러내리는 그런 블로그를 만들고 싶습니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재미없는 그리고 짜증나는 시사포스팅이라도 관심 많이 가져 주세요! (이렇게 살짝 광고도 좀 하고...)

8/30일, 경남블로그컨퍼런스에서 사진찍다가 김주완 부장에게 도로 찍힌 모습. 이때부터 블로그를 시작했다.


오늘 여기 다 소개하지 못하는 많은 것들을 블로그 강좌에서 배웠습니다. 정말 유익했습니다. 특히 "문성실의 아침 점심 저녁"이란 블로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큰 수확 중의 하나입니다. 저는 요리는 잘 못하지만 먹는 걸 아주 좋아합니다. 앞으로 이 블로그에 자주 가서 냄새라도 열심히 맡아봐야겠습니다. 그러다가 혹시 압니까? 저도 앞치마 두르고 맛있는 남자가 될 수 있을지도

강의 중에 저의 전도사님이신 김주완 기자는 역시 신도인 저를 열심히 홍보해 주셨습니다. 제가 싹이 조금 보인다나요? 제 블로그를 프리젠테이션을 통해 몇 차례씩이나 틀어주셨습니다. 물론 저는 매우 뿌듯하고 어깨가 으쓱했습니다. 조금 (시쳇말로) 쪽 팔리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신도가 열심히 크는 모습을 보시는 전도사님도 매우 기쁘시겠지요?

열심히 할게요, 전도사님. 우리 '블로거교'의 중흥을 위하여, 화이팅!

2008. 10. 14. 올챙이 블로거 파비

ps; 부랴부랴 쓰다 보니 빠진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두 가지 중요한 것을 배운 것입니다." 해놓고선 하나만 말하고 두 번째는 빠트렸습니다. 그래서 첨가하고, 조금 수정했습니다.
Posted by 파비 정부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