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에 해당되는 글 18건

  1. 2010.12.03 김두관 지사님, 제발 저를 살려주세요 by 파비 정부권 (5)
  2. 2009.08.01 낙동강에서 만난 보물 석탑에 앉은 목 잘린 불상 by 파비 정부권 (7)
  3. 2009.07.30 낙동강 도보길에 만난 탱크와 자주포 by 파비 정부권 (11)
  4. 2009.07.28 낙동강에서 만난 선산의 보물들 by 파비 정부권 (6)
  5. 2009.07.18 낙동강은 산도 뚫고 흐른다 by 파비 정부권 (5)
  6. 2009.06.01 살벌한 세상에 읽는 ‘고민하는 힘’ by 파비 정부권
  7. 2009.05.25 낙동강에서 접한 노무현 서거 by 파비 정부권 (1)
  8. 2009.05.05 터널에서 마주친 기차, 사선을 넘어 천국으로 by 파비 정부권
  9. 2009.05.04 투쟁구호 가득한 낙동강 발원지 태백 by 파비 정부권
  10. 2009.04.28 치열한 광고전쟁, 똥값이 쌀까, 껌값이 쌀까? by 파비 정부권 (11)
  11. 2009.04.22 화왕산 참사에 쓸쓸한 낙동강유채축제 by 파비 정부권 (4)
  12. 2009.04.16 한국에서 제일 높은 고개 두문동재를 넘어 by 파비 정부권 (3)
  13. 2009.04.09 개도 만원 짜리를 입에 물고 희희낙락하던 시절? by 파비 정부권 (2)
  14. 2009.04.04 낙동강 발원지 태백 너덜샘으로 by 파비 정부권 (2)
  15. 2009.04.02 세상엔 절대적 선도 악도 없다 by 파비 정부권 (2)
  16. 2009.03.31 터미널에서 만난 비키니 아가씨들 by 파비 정부권 (8)
  17. 2009.03.31 별뜻없이 낙동강 명예를 훼손했네요 by 파비 정부권 (2)
  18. 2009.03.27 낙동강 천삼백리 도보기행을 시작하며 by 파비 정부권 (8)
얼마 전에 100인닷컴이 <감 고부가가치화 클러스터사업단>의 후원을 받아 상주 곶감팸투어를 다녀왔습니다. 상주에 있는 곶감명가와 곶감으로 된장, 고추장을 만든다는 도림사도 들렀습니다. 도림사에는 온퉁 시래기가 주렁주렁 열려있었는데요. 이 시래기와 곶감된장이 합해져서 하나의 상품이 만들어졌습니다. 

휴대폰 반절 크기의 이 시래기된장국은 물만 부으면 1분만에 시래기된장국이 되는 상품이었는데요. 마치 미군이 쓰는 C-레이션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칭기스칸의 몽골군이 이런 음식을 처음 개발했다는 걸로 들었는데요. 샤브샤브도 몽골군의 전투식량이었죠. 말하자면, 이 시래기된장국은 비상전투식량인 셈인데 스님들이 만행 떠날 때 바랑에 넣어가는 음식이라네요. 

그날 저녁은 명실상감한우라는 상주축협에서 운영하는 식당에 가서 감 껍질을 먹여 키운 한우를 또 먹었겠죠. G20 정상들이 먹은 한우세트를 우리가 먹었다고 하는데 제가 사실 G20 정상들 얼굴을 한번도 본 적이 없어서 그건 모르겠고, 아무튼 정말 맛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어 상주 낙동면에 있는 승곡농촌체험마을에 가서 밤새는 줄 모르고 즐겁게 놀았답니다. 때는 딱 보름날. 캠파이도 하고요. 술도 마시고, 한우 소고기 잔뜩 먹은데다 다시 돼지 삼겹살 장작불에 구워서 달빛 아래 건배를 마구마구 때렸겠죠. 그렇게 흐뭇한 밤이 지나고 난 다음날...

그래도 저는 야외에 나가면 아침 일찍 일어나는 편이랍니다. 이거 아시는 분은 다 아시는 진실입지요. 아침에 일어나 밤 사이에 흩어놓은 술자리 청소도 하고 막 그러지요. 그런데 나가보니 누가 벌써 깨끗이 청소를 해놓았더군요. 물론 전날 밤에 거다란님과 커피믹스님이 캠파이 자리를 대충 깔끔히 치우긴 했지만. 

'아, 주인장이 치웠나보다!' 생각하고 주인장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지요. 그랬더니 그 주인장님의 집에 떡하니 이런 게 달려있지 뭡니까? 그 앞에 실비단안개님이 서서는 얼마나 감동을 했던지 이리 사진을 찍고 또 저리 사진을 찍으면서 "아, 집이 너무 예쁘다. 그렇죠, 파비님?" 하며 동의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시는 분은 다 아시는 사실이지만, 이 실비단안개님은 자기 맘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간이라도 빼줄 듯이 하는 분이랍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에는 지구 끝까지라도 따라가서 섬멸하고서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기도 하시죠. 암튼 그래서 그 댁 주인장 사진을 찍고 싶었던 실비단님 덕분에 저도 함께 찍히는 영광을. 

▲ 사진. 실비단안개



위 사진이 다빈이네 집 사진이구요. 대문에 보시면(대문이랄 것도 없지만) "여기는 다빈이, 여빈이네 집이에요"라고 적혀 있답니다. 그리고 그 옆 창문 사이에 "우리집은 4대강 사업을 반대합니다" 하고 서명해놓은 거 보이시죠? 실비단님이 아니 반할 수가 없지요. 

아래 사진 멋있게 생기신 분이 이집 주인장이시며 승곡농촌체험마을 사무장이십니다. 아마 체험마을은 주민 여러 분이 힘을 합해 만든 팬션식 체험마을인 듯싶습니다. 시설도 좋고, 무엇보다 마당이 넓어서 캠파이 하기 아주 좋습니다. 옆에는 계곡도 흐릅니다.

 
이렇게 즐거운 하루를 보낸 우리는 다음날 관광코스로 나각산 전망대와 경천대를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나각산 전망대에 오르면 상주 낙동지역이 훤하게 내려다보이고 굽이굽이 흘러가는 낙동강도 조망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전망대에 오르자 강은 보이지 않고 거대한 저수지만 보이는 겁니다. 

"어라, 오늘 안개가 너무 많이 끼어 낙동강이 보이지 않는 걸까? 저기 보이는 건 큰 저수지네." 

그런데 그게 낙동강이었습니다. 여행블로거들이 많은 우리 팸투어 참여 블로거들 탄식이 절로 나오더군요. 하긴 저같은 사람보다야 여행블로그를 전문으로 하시는 분들 입장에서 보면 기가 찰 노릇이겠죠. 다음 간 곳은 경천대. 더 말 안하겠습니다. 해봐야 열불만 날 테고. 듣는 여러분도 기분 안 좋습니다. 

하나만 알려드리겠습니다. 공지사항 겸. 상주 곶감팸투어에 참여했던 보라미랑님께서 팸투어 원고료로 받은 10만원을 "김두관 힘실어주기 캠페인"에 써달라고 기탁하셨습니다. 아마 보라미랑님이 이날 가장 열이 많이 받으신 분 중에 한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분은 저하고 맨 마지막에(새벽 3시 34분) 취침모드에 들어가신 분이기도 한데요. 아침에 정시에 기상하는 체력을 보여주시더군요.)  


"김두관 힘실어주기 캠페인"은 경남도민일보 19면의 자유광고란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마침 경남도민일보가  자유광고란인 걸 만들어 돈이 없는 사람은 1만원만 내고, 좀 여유가 있는 사람은 더 내고 해서 광고를 실을 수 있도록 개방한 코너입니다. 아주 적절한 시기에 딱 걸린 거죠. 

여기에 경남도민들이 날마다 줄줄이 김두관 힘실어주기 캠페인 광고를 하니까 한나라당에서 선관위에 꼰질렀나봅니다. 그래서 선관위에서 경남도민일보에 주의인지 협조인지 뭐 하여간 그런 공문을 보냈다 합니다. 

그래서 김주완 편집국장이 "불법선거운동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선관위의 의견을 일정하게 받아들여 특정인(김두관)의 이름은 가급적 거명하지 않는 선에서 광고를 게재하도록 하겠다"는 답변을 보냈다고 합니다. (내용은 김주완 김훤주 블로그 '지역에서 보는 세상' 참조) 

그리하여 원래 보라미랑님이 의뢰하신 광고문안은 "김두관 지사님, 제발 살려주세요" 라고 낙동강이 김두관 지사에게 호소하는 형식으로 짜여졌지만, 김두관이란 이름은 빠지고 그냥 "제발 살려주세요"가 됐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행에도 김두관 대신 경남도가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크게 의미가 훼손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김두관 도지사의 낙동강 지키기를 위해 원고료를 흔쾌히 쾌척해주신 보라미랑님께 감사 드립니다. 선관위, 한나라당 등 외부의 압력에도 자유광고란의 취지를 살려 좋은 광고를 실어주신 경남도민일보에도 감사 드립니다. 

아래에 보라미랑님의 광고를 소개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 원래 광고문안도 소개합니다. 끝.




김두관 지사님, 제발 저를 살려주세요!

평생을 살면서 이렇게 슬픈 여행은 처음이었다
100인닷컴 상주곶감팸투어 끝에 간 경천대
하늘이 스스로 내렸다는 경천대는 죽어가고 있었다
낙동강 제1비경엔 거대한 불도저가 호령하고 있었다
경천대 돌무더기에서 발견한 낙서 하나

“우리가족을 오래오래 살게 해 주세요!”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이런 소원을 빌었을까
금수강산 오래오래 행복을 누리고 싶었을 테지
반만년 유구한 역사를 굽이쳤을 경천대
그러나 이제 그 경천대가 이렇게 외치고 있다

“제발 저를 살려주세요!” 

김두관 경남지사가 외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불의에 맞선 그의 투지는 정의에서 나온다
덤프트럭에 실려 이리저리 해체되고 있는 낙동강
그 낙동강이 그에게 이렇게 외치고 있다

“제발 저를 살려주세요!”

(100인닷컴 상주팸투어 원고료로 싣는 광고입니다)
100인닷컴 회원블로그 내가꿈꾸는그곳/보라미랑

Posted by 파비 정부권
여기는 낙동강 4차 도보기행이 거의 끝나가던 지점입니다. 낙동강과 병성천이 합강하는 곳인데요. 산진 왼쪽에서 흘러나오는 강이 병성천입니다. 우리는 상주 경천대와 도남서원을 지나 이곳에 다다랐습니다.

상주 일대의 낙동강. 왼쪽에서 흘러나오는 병성천과 합강 지점에서 찍은 사진


이곳에서 신나게 물놀이를 즐기며 더위를 식혔습니다. 때는 6월 28일, 폭염이 기승을 부릴 때입니다. 6월이 이렇게 더웠던 적은 아마도 유사 이래 처음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뜨거운 6월이었죠. 이때 우리는 5차 기행 때는 낮에는 그늘 밑에서 쉬고 새벽과 밤에 걷자고 계획을 세울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토록 뜨거운 태양아래 달아오른 대지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는 다시 하늘로 올라가 7월은 유사 이래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많은 비를 뿌렸습니다. 결국 7월 24일부터 2박 3일 동안 진행한 5차 도보기행은 하루 30km가 넘는 강행군을 하게 되었습니다. 날이 너무 선선했거든요. 시원할 때 많이 걸어두자면서…  

날씨가 너무 무더워 물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모두들 얼마나 더웠던지 갈 생각들을 하지 않고 낙동강에 퍼질러 앉아 놀고 있습니다.

병성천 저 멀리 낙동강이 흘러가는 모습이 보인다.


이곳 병성천에서 조금 더 걸어 병성마을에서 낙동강 4차 도보기행은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사벌국 왕릉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해산했는데요. 아래 사진은 전사벌국왕릉입니다. 사벌국왕릉 앞에 전자를 붙인 것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사벌국 왕릉이다, 그런 뜻입니다.

안내판에 그렇게 적혀 있었는데요. 매우 양심적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통 '전'자를 붙여야 함에도 빼먹는 경우가 허다하거든요. 그런데 이 전사벌국왕릉 옆에는 석탑이 하나 있었습니다. 보물이었습니다.  

전사벌국왕릉


상주 화달리 삼층석탑입니다. 보물 제117호입니다. 소재지는 경북 상주시 사벌면 화달리 422번지입니다.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 석탑으로 높이는 6.24m, 건립연대는 9세기경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 그러나 제가 이렇게 사진을 찍어 여기에 올리는 이유는 이 석탑이 보물이라서가 아닙니다. 자세히 보십시오. 석탑 기단에 불상이 하나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목이 없습니다. 살펴 보니 예리한 무엇으로 잘린 듯합니다. 목 없는 불상… 도대체 저 불상의 목은 누가 잘라 갔을까요? 팔이나 다리도 아니고 하필 목을 잘라 갔을까요? 목을 잘라다 도대체 어디다 쓰려고 그런 것일까요? 국보 제130호 선산 죽장동 5층석탑의 상륜부를 떼어간 것처럼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저지른 소행일까요? 아니라면 대체 누구의 짓일까요? 

생각할수록 괘씸하군요. 낙동강을 도보로 기행하며 우리 국토에 흩어져있는 무수한 문화유산들을 보며 감탄했던 저로서는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불상의 목을 잘라갈 생각을 했는지, 인간의 잔혹한 마성에 그저 치를 떨 따름입니다.   

상주 화달리 삼층석탑

Posted by 파비 정부권
이곳은 우리가 낙동강 5차 도보기행을 위해 베이스캠프로 준비한 구미청소년수련원입니다. 마침 휴가철이라 낙동강 일대의 숙박시설이 꽉 차는 바람에 이곳을 잡았는데 시설이 엉망이었습니다. 하루에 30km를 걸어야 하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샤워시설이었지만,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첫날밤은 대구 모 교회의 캠프 때문에 밤새도록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습니다. 내가 도착해 아래 사진을 찍은 시간이 9시 무렵인데, 이미 한창이었던 집회는 밤 12시가 넘도록 "아버지~ 아버지~"를 외치며 울기도 하고 하는 바람에 정말 힘들었습니다. 거의 새벽 2시가 되어 기도가 끝났지만, 이번에 아이들이 새벽5시 가까이까지 복도를 뛰어다니며 노는 통에 완전 뜬눈으로 밤을 새웠답니다.

기도도 좋지만 이왕 아이들 여름방학을 이용해 캠프를 왔으면 기도는 짧게 하고 재미있게 노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신나게 놀게 해주고 일찍 재우는게 옳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람 사는 방법도 믿는 방법도 가지가지라지만 이건 너무 하다 싶었습니다. 그리고 기도는 왜 조용히 하면 안 되는 것일까요? 마음 속으로 조용히 신을 찬미하면 신도 좋아 하실텐데 말입니다.

신이 귀가 먹은 것도 아니고 너무 시끄럽게 굴면 싫어할 것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하긴 이건 제가 간섭할 사항이 아니로군요.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민폐가 되는 일은 가급적 삼가는 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만… 그런데 제가 시끄러운 기도소리에 잠 못드는 밤을 괴로워하며 마당에 나와 있자니 희한한 광고썬팅을 한 차가 한 대 들어왔습니다. 

아마도 그 교회 팀의 일원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광고 문구가 너무 이상했습니다. VIP경호, 행사경호, 주주총회, 노사대립, 개인경호… 제가 이해할 수 있는 건 개인경호와 VIP경호뿐이었습니다. 주주총회를 하고 행사를 하는데 무슨 경호가 필요하다는 건지, 파업현장에 경호회사 요원들을 투입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보긴 했지만 막상 이렇게 광고썬팅을 보니 섬뜩하군요. 무섭습니다.


어렵게 새벽 3시가 거의 다 되어 잠을 청하고 다음날 새벽 5시 반에 기상해서 아침을 먹고 낙동강 도보기행 길을 떠났습니다. 이번 도보기행의 시작점은 상주 강창나루입니다. 강창나루에서 시작해 토진나루를 지나고 낙동나루를 거쳐 구미시 해평면(청소년수련원이 있는 곳)까지 걷게 됩니다.

옛날 이곳 강창나루에는 소금배가 드나들었던 모양입니다. 강창나루 나들목에 소금배란 간판을 단 식당이 있습니다.


나루배로 건너던 강에는 이제 배는 사라지고 대신 다리가 길게 낙동강을 가로지릅니다.


다리위에서 찍은 낙동강의 모습입니다. 강 중간에 모래톱이 섬을 만들었습니다.


낙동강둑길로 올라서니 고추잠자리들(고추잠자린지 배추잠자린지는 알 수 없지만 하여간 잠자리들)이 떼를 지어 축하비행을 해줍니다.


강둑으로 나가려면 이렇게 논둑을 가로질러 가야 합니다. 미안했지만, 농부 아저씨들은 우리를 보고 밝게 웃으며 고생이 많다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참으로 느낀 바이지만, 태백, 봉화, 안동, 예천, 상주를 거쳐 오는 동안 정말 인심들이 좋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풋풋한 경북 북부지방 사투리는 결코 사람을 밀어내는 법이 없었답니다.  


이슬을 머금은 달맞이꽃… 밤새 활짝 가슴을 벌려 달을 애무했을 꽃들은 이제 아침을 맞아 몸을 오무리고 잠을 청하려나 봅니다.


토진나루에 닿았습니다. 이곳에서 모두들 휴식을 취했습니다.


토진나루 위쪽에서 강물은 줄기차게 흘러내려 오고…


나루터를 지난 강물은 우리가 쉬든말든 지치지 않고 흐릅니다. 정말 유장하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우리는 강창나루를 지나 토진나루로 오는 길에 이렇게 담배 밭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 멀리 미류나무 옆에 뭔가 심상찮은 물건이 보입니다. 뭘까요?


가까이 다가가 보았더니 155미리 자주포와 탱크가 서 있었습니다. 누군가 물었습니다. "혹시 저거 6·25 때 쓰다가 저렇게 버려진 거 아닐까요?" 그는 여자 회원이었습니다. 그러자 옆에 가던 남자 회원이 말했습니다. "에이~ 그때는 저런 대포나 탱크도 없었네. 저건 최근에 쓰던 걸 여기다 갖다 놓은 거야. 그런데 저걸 왜 여기다 전시해 놓았을까?"

글쎄 아무리 생각해도 거기에 대한 답은 알 수 없었습니다. 저 흉칙한 무기들의 오른편으로는 낙동강이 흐르고 그 옆과 앞과 뒤는 온통 논과 밭 뿐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말했습니다. "저거 고철로 팔아먹으면 돈 꽤 되겠는데!" 그러자 다시 옆에서 누군가 말을 받았습니다. "고철로 팔어먹고 싶어도 저거 끌고 갈 차가 들어올 길이 없어요, 여기는."


155미리 자주포와 탱크와 한대의 기관총(아마 캬라바 50인 듯)은 우리가 걸어온 북쪽 하늘을 노려보고 있는 모습이 왠지 외로워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기를 보고 외롭게 보인다는 저도 좀 이상하긴 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외로워 보이지 않나요?


무기를 지나 조금 내려오니 사람들이 들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농사일에 바쁜 사람들을 보니 기분이 풀립니다. 대포와 탱크와 기관총 옆에서도 농촌 사람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그저 평화롭기만 합니다. 트랙터가 바쁘게 땅을 갈고 있습니다. 방금 전에 보았던 탱크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평화로움입니다.
 

동네 주민들이 지나가다가 너무 반갑다는 듯 소리를 지르며 막 손을 흔듭니다. 하하~ 역시 경북북부지방 사투리를 쓰면서… "오데 가니껴~" "예, 낙동강 따라 걷습니다. 태백에서 부산까지 갑니다." "아이고~ 차말로 고생이 많게니더." 우리 일행과 헤어진 이분들도 잠시 후면 들에 세워져 하늘을 노려보고 서있는 자주포와 탱크와 기관총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도 이렇게 똑같이 반갑다고 인사할까요? "거기 뭐 한다꼬 서 있는교? 하루 젱일 땡비테 서 있을라카므 차말로 고생이 많겠니더~ 누가 그러라꼬 시키던고? 차말로 얄궂데이~"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

태백산에서 시작한 낙동강 도보기행(사단법인 우리땅걷기, 대표 신정일)이 드디어 다섯 번째를 맞았습니다. 매월 네 째주에 2박 3일 일정으로 진행되는 낙동강 도보기행의 이번 구간은 상주 강창나루에서 시작하여 낙동나루를 거쳐 구미까지입니다. 낙동나루는 김해에서 시작한 낙동강 7백리 뱃길의 종착점입니다. 낙동강이란 이름도 이 낙동나루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보물 제 492호 선산 보천사 석조여래좌상


물론 가야의 동쪽에 있는 강이란 뜻에서 낙동강이 유래했다고 해석하는 분도 있지만, 대체로 역사서들은 낙동강의 유래를 이곳 상주 낙동에서 찾습니다. 상주의 옛 이름은 낙양입니다. 우리는 낙동강 5차도보기행의 베이스 캠프로 구미시 해평면 소재의 청소년 수련원을 선택했습니다. 시설은 최악이었습니다. 전혀 관리가 안 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수련원에서 불과 500여 미터만 올라가면 만날 수 있는 보천사에서 진귀한 보물을 볼 수 있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보통 사찰 대웅전에는 금동불상을 모시는 게 일반적인데 이곳에는 돌을 깍아 만든 부처님을 모셔 놓았습니다. 아침 6시, 절은 조용했습니다.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절에 개 한마리가 불청객을 나무라듯 시끄럽게 짖어댑니다.

첫 번째 만난 보물 : 해평 보천사 석조여래좌상
1968년 보물 제 492호로 지정된 보천사의 본존불로서 경북 구미시 해평면 해평리 526번지 보천사 대웅전에 있다. 오른손을 무릎 아래로 내린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 석불좌상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이다. 대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으로 이 불상의 특징은 광배와 대좌다.

광배(光背)란 부처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것으로서 원광(圓光)·후광(後光)·염광(焰光)이라고도 한다. 2중의 원으로 표현된 머리광배와 몸광배의 원 안에는 덩쿨무늬가 새겨져 있고 머리광배의 중심부분에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광배의 곳곳에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고 아래쪽에는 향로가 새겨져 있으며 가장자리에는 화려한 불꽃무뉘가 둘러싸고 있다.

대좌(臺座)란 부처님이나 보살, 천인, 승려 등이 앉거나 서는 자리를 말하는데 기원과 전래에 대해 정확한 기록이 없지만 붓다가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을 때 앉았던 풀방석에서 유래한 것으로 금강좌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주로 연화좌가 많이 사용되는데 이는 연꽃이 더러운 흙 속에서도 청정함을 잃지 않는 덕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상중하 3면으로 나뉘어진 보천사 석불좌상의 대좌에도 연꽃잎이 새겨져 있다.

보천사의 현재 주소가 구미시로 되어 있지만 원래 이곳은 선산군 해평면이었습니다. 고려말 삼은의 하나였던 야은 길재가 나고 말년을 보낸 선산은 조선인재의 반은 영남에서 나고 영남인재의 반은 선산에서 난다고 한 바로 그곳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선산은 공업도시 구미에 그 이름을 내어주고 말았습니다. 이름과 함께 역사와 전통마저 버린 셈입니다. 

구미에 이름을 빼앗기고 구미시의 일개 읍으로 전락한 선산읍에는 보기 드문 보물이 하나 있습니다. 죽장사 5층석탑이 바로 그것입니다. 원래 죽장사였던 이 절은 이제 이름이 서황사로 바뀌었습니다. 절의 이름을 바꾼 이유는 죽장사란 이름을 가진 절들 중에 망한 절이 많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개명을 하는 이유도 참 다채롭다는 생각이 듭니다.
 

국보 제 130호 선산 죽장동 5층석탑

석탑의 감실에 약사여래불이 모셔져 있었다

비구니승들의 섬세한 정성이 너무 예쁘다

            

두 번째 만난 보물 : 선산 죽장동 5층석탑
국보 제 130호다. 통일신라시대 5층석탑으로 높이가 10m이다. 5층석탑으로서는 국내 최대 규모이다. 행정구역은 경북 구미시 선산읍 죽장리다. 화감암을 깍아 만든 석탑의 규모만큼이나 위용이 대단하다. 18매의 장대석으로 기단을 만든 것이 특징이다. 기단의 면적이 평범하지 않다. 보통의 석탑에서는 느낄 수 없는 웅장함이 이 석탑의 묘미다.
 
일반적인 석탑과 달리 이 석탑은 기단이 2중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그 위에 탑신을 얹었다. 석탑의 모양으로 보아 안동-의성 지역에서 유행했던 전탑을 모방한 모전석탑으로 보여지며 웅장하고 세련된 신라 석탑의 조형미를 잘 보여주고 있는 뛰어난 석탑이다. 1층 탑신부에는 불상을 모실 수 있도록 감실이 만들어져 있다.

상륜부는 일제시대에 일본인에 의해 뜯겨져 일본으로 건너가 행방불명되었다. 아마 석탑 전체를 들고 가고 싶었겠지만, 워낙 크기가 거대하다 보니 상륜만 뜯어간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아마 정교한 조각이 빼어난 상륜부는 어느 일본인의 정원에 잠자고 있을 터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꼭대기를 보니, 탑신 가운데 비가 들지 않도록 돌을 깍아 얹어 놓았다.  

어떻든 이 절은 신라시대까지만 해도 50여 동에 이르는 대가람이었지만, 몽고의 침입 때 모두 소실되고 5층석탑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1952년에 새로이 창건되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도반이신 신정일 선생(사단법인 우리땅걷기 대표, 낙동강역사문화탐사 등 40여권의 기행록 저술)의 말씀에 의하면 비구승들이 말아먹은 이 절을 비구니승들이 와서 새로 일구었다고 합니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부 승려들 중에는 깡패 출신들도 있다고 합니다. 비구니승들이 절을 잘 닦아놓으면 이들이 와서 빼앗고 다시 불과 오래지 않아 절을 다 말아먹는다는 것입니다. 뭘 어떻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절의 재정상태를 완전 바닥까지 드러나도록 만들고서야 떠난다는 것입니다. 

그럼 다시 비구니승들이 와서 다시 절을 가다듬고 가꾸어 복원을 한다는 것이죠. 여자들의 섬세한 생활력이 남자들이 말아먹은 절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는 것입니다. 신정일 선생의 말에 의하면 이런 경우가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있다고 했습니다. 이곳 서황사의 내력이야 알 수 없는 노릇이긴 하지만 역시 절 곳곳에 비구니 스님들의 세심한 배려가 역력했습니다.
 
죽장동 5층석탑에는 전해내려오는 전설이 하나 있습니다. 옛날에 두 남매가 살았는데 서로 재주를 자랑하다가 누가 먼저 탑을 쌓는지 내기를 했다고 합니다. 이에 누이동생은 이곳 중장리에서 석탑을 쌓고 오빠는 낙산리에서 석탑을 쌓았는데 누이동생의 재주에 오빠가 감히 대적하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보물 제 469호 낙산동 3층석탑



이에 아들이 질 것을 염려한 어머니가 딸 몰래 아들이 석탑 쌓는 도왔지만 결국 누이동생이 이겼다고 합니다. 죽장동 석탑은 5층이요, 낙산동 석탑은 3층입니다. 죽장동 5층석탑의 기단과 마찬가지로 2층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기단의 크기는 훨씬 작습니다. 규모에 있어서 낙산동 3층석탑이 죽장동 5층석탑을 따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두 개의 석탑은 형식이나 모양이 크게 닮았습니다. 아마 그런 데서 남매의 전설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남매의 어머니는 어째서 아들이 질 것을 염려하여 아들을 도왔을까요? 딸이 이기면 안 되는 것입니까? 거 참 전설도 얄궂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설에도 남녀차별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슬퍼지네요.
 
그냥 당당하게 졌으면 좋았을 걸… 아래 사진은 오빠가 쌓았다는 낙산동 3층석탑입니다. 과거에는 이곳에 커다란 절이 있었을 것이지만, 지금은 주변이 논과 밭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보물로 지정되어 있었지만 그저 쓸쓸하게 벌판에 버려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나마 바로 옆에 부락이 있어 위안이 되었습니다.

세 번째 만난 보물 : 선산 낙산동 3층석탑
보물 제 469호다. 행정구역은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 837-1번지이다. 양식이 죽장동 5층석탑과 비슷한 통일신라시대의 모전석탑 계열의 석탑이다. 주변에 별다른 유적이 없으나 주변 경작지 일대에서 기와조각과 토기 편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절터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도리사 극락전 마당에 도리사 석탑이 있다

 

보물 제 470호 도리사석탑

구미시 해평면에는 또 하나의 보물이 있습니다. 도리사석탑이 그것입니다. 도리사석탑은 1968년에 보물 제 47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러나 도리사는 절 전체가 하나의 보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선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러 왔다가 지은 신라 최초의 사찰입니다.
 
고구려의 승려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전한 것은 눌지왕 때인 417년이라고 합니다. 아도가 전법하기 위하여 서라벌에 다녀오는 길에 이곳 태조산을 지나는 데 한겨울인데도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만발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이곳이 길지라고 생각한 아도가 절을 지었는데 신라 최초의 절이라고 합니다.

1976년 종 모양의 세존사리탑 속에서 금동육각사리함이 발견되었는데 그 안에 부처님의 사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국에서 신도들이 몰려들어 조용하던 태조산이 한때 몸살을 앓았다고 합니다. 금동육각사리함은 국보 제 208호로 지정되었으며 직지사의 성보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고 합니다.

네 번째 만난 보물 : 도리사석탑
보물 제 470호다. 행정구역은 경북 구미시 해평면 송곡리 403 도리사다. 극락전 마당에 있다. 전체적으로 5개 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맨 아래는 기단, 그 위 두개 층은 탑신부로 보이지만 구분하기가 매우 모호하다. 일반 탑들과는 달리 형상이 매우 특이한 이 탑은 안동 의성지방의 모전석탑 계열로 보이는데 고려시대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왼쪽에 있는 사진이 바로 세존사리탑입니다. 불자들의 마음으로 보면 세존사리탑이 최고의 보물일 것입니다. 불교 신자들에게 세존의 사리는 곧 부처님의 현신으로 받아들여지겠지요. 세존의 사리를 보기 위해 전국에서 구름처럼 모여들었을 사람들의 기도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그러나 이곳은 이제 냉산의 차가운 여름 바람만이 부처님의 사리탑을 식혀주고 있습니다.   

태조산은 냉산이라고도 부릅니다. 도리사는 냉산의 거의 정상 가까이에 지어져 있었습니다. 산은 이름처럼 무척 추웠습니다. 찬바람이 마치 늦가을 날씨를 연상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태조산을 냉산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일까요? 이 무더운 여름날의 가운데에서 이처럼 시원한 산을 찾아 까마득한 절집을 오르는 것도 더없는 기쁨이었습니다.  

이렇게 네 개의 보물을 모두 구경한 우리는 다시 길을 떠나야 합니다. 낙동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행히 구름이 해를 가려 뜨거운 여름날의 고통은 많이 줄어들 듯합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강둑길을 바라보니 한숨이 납니다. 그래도 가야 합니다. 이곳에 온 목적은 보물을 보기 위함이 아닙니다. 

다시는 보지 못할지도 모를 낙동강을 눈에, 머리에
그리고 가슴에 담아두는 것이 목적입니다. 영원히, 수로로 변해 영원히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를 낙동강을 말입니다.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
3년후에도 우리는 낙동강을 이 모습 그대로 다시 볼 수 있을까?
물은 부드럽습니다. 물보다 더 부드러운 건 세상에 없습니다. 음~ 공기가 있군요. 그러나 아무튼 물보다 더 부드러운 건 세상에 별로 없습니다. 물은 부드러운 만큼 참 유연합니다. 산이 앞을 가로막으면 돌아갑니다. 소를 만나면 서두르지 않고 쉬었다가 동료들이 많이 모이면 다시 넘쳐흐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옛사람들도 즐겨 말하기를 "물처럼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 또 물은 유연할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합니다. 이태백은 물속에 뜬 달을 보며 술잔을 기울이고 시를 썼습니다. 이런 노래도 있었지요. "달아 달아 둥근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이태백이 놀던 그 달도 실은 물에서 놀았습니다. 그래서 이태백이 달을 잡으러 물로 뛰어들었다지요?

낙동강이 내려가다가 산을 만났다. 돌아갈 길도 없다. 바로 구무소다.


태백산은 낙동강과 한강이 발원하는 곳입니다. 한줄기는 북으로 흘러 강원도와 충청도를 적시고 경기평야를 일군 다음 황해에 몸을 담급니다. 나머지 한줄기는 남으로 흘러 경상도 땅을 휘돌아 김해에 드넓은 삼각주를 만들고 마침내 남해와 몸을 섞어 어느덧 태백산에서 헤어진 두 개의 물줄기는 하나가 됩니다. 

그런데 낙동강은 태백산에서 발원하여 채 30 리도 못가서 커다란 난관에 봉착합니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산을 발견한 것입니다. 물은 유연합니다. 가로막으면 돌아갑니다. 그러나 이곳에선 돌아갈 길도 없습니다. 아, 이럴 때 물은 어찌 해야 할까요? 그러나 물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연약하기 이를 데 없는 물이 단단한 바위벽을 뚫기 시작합니다.  

강은 결국 산을 뚫고 지나가기로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물줄기는 산을 뚫고 아래로 흐릅니다. 이렇게 하여 생긴 동굴은 낙동강이 메마른 대지를 적시고 남해에 다다르기 위한 투쟁의 결과입니다. 이름 하여 구무소입니다. 요즘은 한자음을 따서 구문소라고도 하더군요. 아래 사진은 산을 뚫고 나온 반대편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동굴 벽면을 자세히 보시면 각자가 보이실 겁니다.

'오복동 자개문'이라고 한답니다. 자개문은 확실히 알겠는데 그 앞의 글자는 한문 실력이 형편없는 저로서는 알기 어렵습니다. 혹시 각자의 정확한 음과 뜻을 아는 분이 계시면 가르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대충 이런 내용입니다. 비결을 전하는 정감록이란 책에 나오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낙동강 최상류로 올라가면 더 이상 길이 없어 갈 수 없는 곳에 커다란 석문이 나온다. 그 석문은 자시에 열리고 축시에 닫히는데 그 속으로 들어가면 사시사철 꽃이 피고 흉년이 없으며 병화가 없고 삼재가 들지 않는 오복동이란 이상향이 나온다." 이처럼 자시에 문이 열린다고 해서 자개문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굴 안쪽 햇빛과 그늘이 갈라지는 지점에 "오복동 자개문" 각자가 보인다.


중국의 도연명이 설명한 무릉도원도 그 입구가 구무소처럼 생겼다고 합니다. 무릇 사는 곳은 달라도 세상을 관통하는 이치는 다르지 않은가 봅니다. 그런데 구문소 보다는 구무소가 훨씬 부드럽고 듣기 좋은데 왜 굳이 한자음을 따르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구무소라 하면 구멍과 소가 합쳐진 말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지만, 구문소라 하면 별로 다가오는 느낌이 없습니다. 제가 사는 인근 동네의 소벌이 한자음을 빌려 우포늪으로 불리고 있는 것과 같은 이유가 아닌가 생각되어 한편 씁쓸합니다. 그리고 이곳에는 이런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일본인이 인공동굴 위에 새겼다는 흐릿한 각자



"옛날 구무소가 생기기 전에 황지천과 철암천에는 각각 커다란 소가 있었는데, 황지천에는 백룡이 철암천에는 청룡이 살았다. 이 둘은 낙동강의 지배권을 놓고 싸웠지만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하루는 백룡이 꾀를 내어 석벽을 뚫고 청룡을 기습하여 제압함으로써 오랜 싸움을 끝내고 승천하였다. 이때부터 구무소가 생겼다."

이외에도 구무소에는 무수한 전설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엄종한이란 어부가 구무소에 빠져 용궁에 갔다가 살아 돌아온 이야기며 선덕여왕의 아들 효도왕자와 월선낭자의 사랑 이야기 등 많은 이야기들이 구전으로 혹은 문집을 통해서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무소의 옆에는 동굴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동굴이 아니라 사람이 뚫은 굴입니다. 일제시대에 한 일본인이 뚫었다고 하는데 그는 굴을 뚫고 그 윗부분에 자개문의 각자를 흉내 내어 글을 새겼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글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미천한 한문 실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글자가 너무 흐릿했던 탓이기도 합니다. 자개문에 비해 각자의 정성이 부족했던 게지요.

그래서 그 이후로 물만 이 석벽을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차도 지나다니게 되었습니다.

황지천이 구무소를 지나면 바로 철암천과 합류한다.


백룡이 구무소를 뚫어 청룡을 물리친 석벽 위에는 누각이 하나 있습니다. 자개루입니다. 별로 높지는 않지만 그래도 워낙 경사가 가파른지라 올라가는데 땀 깨나 뺐습니다. 그러나 위에 올라가니 시원하기가 이를 데 없었습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백룡이 구무소를 지나 청룡을 습격하는 장면이 눈에 그려지는 듯합니다.

석벽을 뚫어낸 물은 물론 황지천입니다. 아마 백룡과 청룡의 전설이 만들어진 것도 결국 산을 뚫고 흐르는 황지천의 기상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낙동강의 발원천도 황지천입니다. 결국 낙동강을 지배하는 것은 황지천, 즉 백룡이라는 얘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전설이 아무런 이유 없이 만들어진 것도 아니며 나름대로 합리성을 갖추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구무소 위 석벽 위에 지어진 자개루. 땀을 뻘뻘 흘리며 오르다 한 컷.


4대강 살리기 하고 나면 낙동강 천리길에 지천으로 깔린 모래사장들은 다 어디로 갈까?  
이제 물은 계속해서 남으로 흐릅니다. 이렇게 물길은 계속 흘러 육송정을 지나고 석포리를 건너 봉화를 지나고 하회마을을 휘돌아 남으로 남으로 흘러갈 것입니다. 태백산에서 출발한 우리는 지금 상주 경천대를 지났습니다. 태백산을 뚫고 내려온 낙동강은 경천대에서 대지를 굽이치는 강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그려놓았습니다.

뱀처럼 휘어지는 강줄기 옆에는 어김없이 아름다운 백사장이 눈부시도록 아름답습니다. 경천대의 절경에 취해 차마 발을 떼지 못하는 가슴 한구석에서는 그러나 답답한 슬픔이 아프게 배어있었습니다. 저렇듯 뱀처럼 굽이치는 강물과 빛나는 백사장을 더 이상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제가 <사단법인 우리땅걷기(대표 신정일)>의 낙동강 도보기행에 따라나서기로 결심한 것도 사실은 그것 때문입니다. 이명박 정권이 기어코 일을 내고야 말 것 같다는 불안 말입니다. 이 정권은 온 국민이 대운하에 반대하는데도 굳이 '4대강 살리기'란 묘한 이름을 만들어 강 죽이기에 나서고 있습니다. 제게는 이명박 정권의 목적이 오로지 강을 파헤쳐 건설수요를 창출하는 것 외에 다른 이유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돈 때문이란 것이 제 생각입니다. 국민들의 혈세를 걷어다 자기 동족인 건설족의 배를 불려주는 것이지요. 아래 사진에 보이는 저 아름다운 자연, 금빛으로 빛나는 모래사장은 어떻게 될까요? 3년 6개월 후에도 우리는 저 모습을 그대로 다시 볼 수 있을까요, 아니면 6m 깊이까지 파헤쳐져 모래들은 모두 속세로 실려나가고 결국은 수로로 변한 참담한 모습만을 보게 될까요?


상주 경천대 (사진=경천대 홈피)


제가 낙동강 1차 도보기행에서 위의 사진들을 찍은 날은 3월 28일이었습니다. 당시는 가뭄으로 태백시내에 물이 공급되지 않아 데모가 벌어지던 상황이었지만, 보시다시피 낙동강 발원천은 유장하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낙동강 발원지(문헌상) 황지는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이곳에 물이 마르면 나라에 변고가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4차 기행까지 마쳤으며 상주 경천대를 지났습니다. 아직 절반도 못 내려왔습니다. 다음주에 2박 3일 일정의 5차 기행을 떠납니다. 그러면 아마 상주 낙동을 거쳐 구미를 지나게 될 것 같습니다. 이제 낙동강 칠백리 뱃길을 걷게 되는 것이지요. 이명박은 혹시나 조선시대에 뗏목이나 작은 배가 다녔다는 이야기를 듣고 여기에 거대한 선박을 띄울 생각을 했던 것일런지도 모르겠습니다. 
     pabi
Posted by 파비 정부권
본 도서 리뷰는 TISTORY와 알라딘이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고민하는 힘
- 10점
강상중 지음, 이경덕 옮김/사계절출판사


내가 이 책 『고민하는 힘』을 다 읽은 것은 낙동강으로 도보기행을 떠나기 위해 탔던 차 안에서였다. 이미 절반 이상을 읽었던 책을 마무리하기 위해 배낭에 넣고 시외버스를 탔던 것이다. 경북 봉화와 안동의 경계지점 어느 곳이었을 절에서 하룻밤을 묵고 잠에서 깨어났을 때 하늘에선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때 시각이 새벽 5시 30분. 


절밥은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상위에는 온통 풀로만 만든 음식들이 펼쳐져 있었다. 국도 반찬도 모두 풀이었다. 쌀도 결국 풀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면, 강변 둑방에서 풀을 뜯는 소가 된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그래도 허기가 반찬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허겁지겁 밥을 먹고 나니 주지스님께서 차 공양을 해주신다고 한다.


아직도 하늘에선 계속해서 비가 내리고 있다. 이런, 걱정이 태산이다. 우산도 없고 우비라고 해야 천 원짜리 허접이다. 무엇보다 카메라가 걱정되었다. 캐논 450D. 낙동강을 위해 구입한 재산 1호다. 그러나 하늘은 내 걱정 따위는 아랑곳없이 계속 비를 뿌려대었다. 그러다 시계바늘이 7시를 향해 다가가면서 서서히 빗방울도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역시 하늘은 우리 편이야!”라는 농담을 섞어가며 우리는 출발했다. 주지스님께서 친히 단천리 비경에서부터 윷판대를 거쳐 도산서원까지 동행하시겠다고 한다. 길잡이가 되어주시겠다는 뜻이리라. 낙동강을 따라 두 시간여를 걸어 우리는 이육사기념관에 도착했다. 잠깐 휴식을 취한 다음 기념관 바로 위에 있는 윷판대를 올랐다.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온 윷판대는 장관이었다.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뱀처럼 휘어들어오는 낙동강. 그 위에 펼쳐진 단천리의 아름다운 벼랑바위들. 다리가 후들거리고 가슴이 서늘해지는 두려운 쾌감이 몸을 휘감아온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다급한 목소리로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노무현이 죽었다는데…!”


이후부터 우리의 낙동강 도보기행은 엉망이 되었다. 형식상으로야 별일 없다는 듯 그대로 진행되었지만, 이미 사람들은 무력감에 빠져 아무것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개중 몇몇은 부랴부랴 짐을 챙겨 떠났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이 전례가 없는 사태에 모두들 입을 다물었다. 길을 걸으면서도 눈물이 나오는 걸 억지로 참으면서….
 

“살벌한 세상과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회. 지금의 일본을 한 가지 색으로 표현하라고 하면 어떤 색이 될까요? 나는 희미한 납색밖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은 내 눈이 어둡기 때문이며, 그래서 비관적인 이미지를 품을 필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분명 급속도로 진행되는 낮은 출산율과 고령화, 경제력의 쇠퇴, 막대한 재정적자, 정치적 폐쇄 상황 등 부정적인 요소가 많지만 가족의 연대가 강하고 사람들 사이의 정을 실감할 수 있다면 고립감이나 우울증에 시달리지 않겠지요. 즉 사람들 사이의 유대관계, 커뮤니케이션이 상호 신뢰에 의해 지탱되고 그것이 각 개인의 정체성에 안도감을 줄 수 있다면 경제적 곤란이나 정치적 부정이 횡행한다고 해도 미래에 대한 희망이 희미해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사회에는 고립감과 시기심이 가득하고 꿈과 희망은 위축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고민하는 힘』의 저자 강상중이 <글을 마치고>에 쓴 말이다. 그는 이 책을 매우 부드러운 어조와 친절한 화법으로 썼다. 이 책을 읽으며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원래 일본인들―그는 재일한국인이지만, 역시 일본어를 사용하는 일본인이다―은 이렇게 친절한 어법을 구사하길 즐긴다고 들었지만, 그래서 그런 걸까? 아니면 옮긴이의 온화한 성품 탓일까?”


그래서 자칫 잘못하면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우리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유행했던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마음을 양식을 구하기 위해 읽었던 ‘에세이’ 부류로 치부하는 오류를 범할지도 모른다. 나도 처음에 그런 느낌으로 읽었다. 그러나 노무현의 죽음은 나로 하여금 이 책을 다시 읽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강상중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단순히 고민하기―혹은 고민하는 훈련을―위해 정신세계의 지평을 넓히라든가 하는 따위의 에세이 같은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이 시대를 설명하기 위해 막스 베버와 나쓰메 소세키를 끌어들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100년 전은 오늘과는 확연히 다른 시대다. 오늘날 우리는 뉴욕에서 워렌 버핏이 하는 말과 행동을 실시간으로 해석까지 덧붙여 접할 수 있는 좁은 지구촌 시대를 살지만, 그때는 확실히 사정이 달랐을 것이다. 동양의 끝자락과 서양의 끝자락에 살고 있던 두 사람이 소통할 수 있는 장치는 당시엔 아무데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 둘은 생각만 비슷한 것이 아니라 시대에 맞선 태도 또한 닮았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강상중은 막스 베버와 나쓰메 소세키가 살았던 시대적 혼돈 상황이 오늘날의 상황과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을 통해 오늘의 문제를 들여다보고 삶의 의미를 되새겨보고자 시도를 하는 것이다.


19세기 말, “장기불황과 내란 상태로 어지러웠던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다른 나라로 몰려갔으며 일본도 비슷한 이유로 그 대열에 합류했다. 이른바 제국주의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제국주의는 조정되었으나, 지금 세계를 바라보면 국경을 넘어 ‘글로벌 머니’가 종횡무진 ‘배회’하고 있고 그 ‘폭주’를 막을 수 없는 상태”가 계속 되고 있다.


국민은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대상이었던 과거의 자본주의는 타파되고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되게 되었으며 자유는 무한히 확대되었지만, 그 자유는 인민의 것으로 되지 못하고 시장의 힘에 속박되었으며 자본이 독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말하자면, 강상중은 100년 전의 세기말적 상황과 오늘의 세기말적 상황이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막스 베버와 나쓰메 소세키가 백 년 전에 쓴 것을 다시 읽어 보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곳곳에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개인’의 시대가 시작되었을 때 시대의 흐름에 올라타 있으면서도 그 흐름에 따르지 않고 각각 ‘고민하는 힘’을 발휘해서 근대라는 시대가 내놓은 문제와 마주 했”다.


그리고 강상중은 고민하는 인간이었던 막스 베버와 나쓰메 소세키로부터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과 생각을 섞어 ‘고민하는 힘’에 대해 예의 친절하고 부드러운 화법으로 풀어쓰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다루는 아홉 가지 주제 즉, 자아, 돈, 지성, 청춘, 믿음, 직업, 사랑, 죽음, 늙음에 대하여 막스 베버와 나쓰메 소세키의 고민을 빌어 잔잔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어떻게 고민에서 벗어날 것인지, 또는 고민과 함께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하여 살펴보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그러나 앞에 소개한 <글을 마치고>에서 저자가 표현한 것에서 보듯이 이 책은 단순한 에세이가 아니다. 이 책을 쓰게 된 동기가 보여주듯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살벌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 세상’이다.


국가는 인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자본주의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지만, 그 인민이 향유해야할 자유와 민주는 시장의 힘에 이끌려 자본의 노예가 되었다. 검찰은 물론이고 법원 등 모든 국가기구가 자본의 하수인이 되었다. 국가는 바야흐로 자본을 위한 존재로 된 것이다. 반면 보다 값싸고 유연한―혹은 편리한―비정규직은 넘쳐나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국가를 위해 국민이 있다’가 아니라 ‘국민을 위해 국가가 있다’라는 방향으로 전환하려는 몇 십 년 동안의 노력은 그러나 수상쩍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고 저자는 통렬히 비판한다. 일본은 모르겠지만, 확실히 우리나라는 수상쩍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노무현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그 수상쩍은 그림자를 확실히 보지 않았는가.


과거 독재권력의 충직한 개 노릇을 했던 언론들, 구체적으로 조중동은 이제 자유와 민주란 바람을 타고 자본의 이름으로 스스로 권력이 되었다. 검찰과 경찰, 법원 등 모든 국가기구도 자본의 하수인이 되고자 스스로 명단에 이름을 집어넣기에 바쁘다. 노무현 대통령의 국민장이 엄수되는 그 시각에 하필 대법원이 삼성의 이건희에게 무죄판결을 선물한 것은 무얼 의미하는가.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을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은 말이 있다. 늘 그렇게 하겠지만, 먼저 서문을 열심히 그리고 진지하게 읽어보라.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면서 저자가 무얼 말하려고 하는지 그 의도를 분명히 짚어 본문 책장을 넘긴다면 나침반도 없이 큰 바다에 나가 방향을 잃고 헤매는 어부의 고통을 겪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 독자들은 서문을 대충 읽거나 아니면 생략함으로써 마치 잔잔하고 평온한 바다에서 낚시꾼이 고기 한 마리도 낚지 못했을 때 느꼈을 불평을 하는 경우를 가끔 본다. 물론 이 책은 앞서 말했듯 빠른 물살이 지나가는 갯바위에서 낚시를 즐기는 그런 기쁨은 없다. 세상을 향한 냉혹한 비판과 주장도 없고 대단한 지혜를 뽐내는 그런 구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바람 한 점 없는 잔잔한 바다에 돛단배 하나 띄워놓은 것 같은 그런 책이다. 그러나 서문을 꼼꼼히 읽어보는, 그리하여 저자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 독자라면 수평선 저 멀리 떠오르는 빛나는 별들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그 별들은 수고에 대한 보답으로 독자에게 노를 저어 수평선을 지나 피안에 닿을 수 있도록 힘을 불어넣어 주리라.


시대의 흐름에 올라타 있으면서도 그 흐름에 굴복하지 않고 ‘고민하는 힘’을 발휘하며 이 시대가 내놓은 문제와 마주했을, 또 늘 그렇게 하기 위해 분투했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빌며…. 그리고 강자에게 절대 굴하지 않았으며, 약자에게는 늘 온화한 웃음과 위트로 그가 좋아했던 노래가사처럼 ‘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오길 염원했을 그를 추억하며…      파비

ps; 원래 이 서평은 알라딘 리뷰와 이 블로그에 진즉 올렸어야 하나 낙동강 도보탐사, 노무현 대통령 서거 등으로 경황이 없었습니다. 특히 노무현의 죽음은 거의 진공상태에 빠진 듯한 무력감을 가져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하기도 싫었습니다. 한동안 리듬이 완전 깨졌습니다. 알라딘과 티스토리에는 매우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언제나 시의라는 것이 있을 텐데 늦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또 한 권이 밀리는 곤란함이 생겼습니다. 별로 재미도 없고 인기도 없는 포스팅이긴 하지만, 이 시대가 자아에 대한 보다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시대인 것만은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고 그런 점에서 한 번 읽어볼 만한 책이란 생각은 확실히 듭니다. 하필이면,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와 맞물리기도 하면서 고민이 더 많았던 책입니다. 

Posted by 파비 정부권
낙동강을 걷다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했다. 낙동강 천삼백 리 도보기행팀은 3차구간이 시작되는 단천교에서 시작하여 단천리 비경과 이육사기념관을 거쳐 윷판대에 올라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낙동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아래로는 까마득한 천길 단애다. 사람들은 두려운 마음에 떨면서도 아래를 내려다보며 탄성을 질렀다. 


그때 누군가가 “노무현이 죽었다는데?” 하고 말했다. 그는 행군을 하면서도 귀에 리시버를 꼽고 라디오를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방금 뉴스에 나오는데 노무현이 죽었대.” 이 무슨 황당한 소리란 말인가. 신정일 대표는 어이없다는 듯이,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야. 오늘이 만우절이야? 오늘 만우절 아니잖아. 그런데 방송국에서 그런 거짓말도 하나?”


사람들은 갑작스런 소식에 술렁거렸다. 그리고 곧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야, 너 혹시 소식들은 거 있어? 노무현이 죽었다는데? 어떻게 된 거야. 뭐? 모른다고? 빨리 뉴스 틀어봐. 그리고 바로 전화해줘.”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소식이었지만 곧, 믿을 수 없는 또는 믿고 싶지 않은 소식은 사실이 되어 우리를 침묵 속에 밀어 넣었다.


갑자기 세상이 무서워졌다. 까마득한 윷판대 아래로 휘감아 돌며 탄성을 자아내게 하던 낙동강이 갑자기 흐릿한 회색빛으로 두려움을 몰고 왔다. 이제 겨우 두  시간 남짓 걸었을 뿐인데 다리가 후들거린다. 그리고 두려움은 분노로 변하기 시작했다. 화가 난다. 세상이 밉다. 구체적으로는 이명박이, 이명박의 똥개를 자처하는 검찰이, 모든 똥개들의 나팔수 조중동이 죽이고 싶도록 밉다.


이렇게 힘든 낙동강 걷기는 처음이다. 아름다운 경치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사진을 찍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고 또 잘 찍히지도 않는다. 비록 카메라를 잡은 지가 갓 석 달째에 불과하지만, 나름대로 구도를 잘 잡는다는 칭찬을 들었었다. 그런데 엉망이다. 전차의 도보기행에서는 찍은 사진이 천장을 넘었었다. 그러나 이번에 채 50여장도 채우지 못했다.


윷판대를 떠난 일행은 도산서원을 지나 자연공원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며 점심을 먹었다. 세 명의 길벗이 이곳에서 인사를 고했다. 조문을 가야겠단다. 자동차도 다니지 않는 오지에서 어떻게 가겠냐고 걱정들을 했지만, 그들은 짐을 챙겨 서둘러 떠났다. 나머지는 계속해서 걸었다. 비보에 기진맥진한 탓이었을까. 목적지인 병산서원에 훨씬 못 미친 우리를 태우기 위해 버스가 왔다.


병산서원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었다. 건축학도들이 가장 보고 싶어 한다는 병산서원. 아름다운 해넘이로 유명한 병산서원에서 그러나 우리는 붉은 노을을 볼 수 없었다. 하루 종일 칙칙한 회색빛으로 하늘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애도하고 있었다. 다음날도 여정은 계속되었지만, 너무나 힘들었다. 이렇게 힘든 여정은 처음이다.


유장한 낙동강의 아름다운 물결도, 역사도, 사람도 모두 덧없이 느껴졌다. 모든 것이 그저 회색이었다. 어젯밤 늦게 집에 돌아온 나는 제일 먼저 인터넷부터 켰다. 온통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이다. 세상 밖 낙동강 상류의 오지에서 들었던 소문이 이제 눈앞에 사실로 다가왔다. 슬픔이 밀려온다. 소주 두병을 샀다. 취하지 않고서는 잠들기 힘들 것 같았다.


오늘 점심시간, 어느 중국집에 들어가 짬뽕을 시켰다. 텔레비전에선 노무현의 일대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텔레비전 속에서 고무장화를 신고 밀짚모자를 쓴 얼굴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중국집 여주인이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에고~ 저렇게 소탈하신 분이었는데. 고마 고향 사람들과 농사지으며 행복하게 살도록 내버려 두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중국집 주방장이자 주인아저씨도 맞장구를 쳤다. “저기 다 이명박이 때문인기라. 쥑일 놈들.” “저리도 소박하게 사는 사람을 호화판 어쩌구 하며 욕하는 놈들도 미친 놈들이제.” 내가 끼어들었다. “그런데 사장님. 호화판 어쩌구 한 놈들, 그거 바로 조선일보, 동아일보 아입니까. 노무현 사저가 땅이 천 평이 넘는다면서 말입니더.”


“전두환이며 노태우며 이런 더러운 인간들이 살고 있는 집터가 평당 천만 원만 하겠습니꺼? 그런데 봉화마을 땅값은 얼마겠습니꺼.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내는 그거 오천 원에 사라고 해도 안 사겠습니더. 골짝에 뭐할라꼬. 그런데 그걸 씹고 대든 놈들이 바로 조중동 아입니꺼. 이집에 보니 동아일보 들어오는 모양인데, 낼부터 당장 끊으이소.”


주인 아줌마는 갑자기 미안했던지 말을 돌렸다. “그란데 아이씨요. 엊그제 테레비에 보니까 이명박이 나왔던데 말입니더. 모내기에 가서 봉사활동을 했다고 하데예. 그란데 내가 그거 보고 얼마나 웃었던지. 시상에, 모내기 한다는 사람이 말입니더. 하얀 와이샤스를 입고 팔도 안 거지고 모를 심고 있더라 이 말입니더. 흙 하나 안 묻히고… 쇼를 해도 잘 해야지예.”


그녀는 그러면서 논둑에 앉아 동네사람들과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 생전의 노무현을 바라보며 눈물지었다. 그래, 그녀의 말처럼 하얀 와이샤스를 입고 국민을 향해 쇼를 벌이는 대통령이 있는가하면 노무현처럼 진심으로 국민들과 소통하고자했던 대통령도 있었다. 짬뽕을 먹고난 나는 중국집을 나서면서 말했다. “사장님, 낼부터 당장 동아일보부터 끊으이소.”


나는 노무현의 지지자는 아니었다. 그가 대통령이 될 때 그를 찍어주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던 날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비록 그를 또는 그가 속한 정당의 견해를 이해하진 못해도 그는 영웅이었다. 말하자면, 개천에서 용이 났으며 그런 용을 개천에 사는 우리는 선망과 희망을 섞어 바라보았던 것이리라.


그리고 그는 보통의 용들이 모두 개천을 한번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과 달리 개천으로 돌아왔다. 밀짚모자를 쓰고 논에 오리를 몰면서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런 모습에 국민들은 열광했다. 봉화마을엔 그런 그의 모습을 보기 위한 관광객들로 늘 붐볐다. 이런 일이 우리 역사에 언제 있었던가. 어떤 대통령이 퇴임 이후에 이런 대접을 받았던 예가 있었던가.


그러나 그런 모습이 이명박의 눈에는 가시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넘쳐나는 봉화마을의 관광객들을 보며 이명박은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도 못하는 괴로움을 맛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검찰을 닦달했던 것일까. 그리고 똥개를 자처한 검찰은 소명도 하지 않은 조사내용을 언론에 슬쩍 흘리며 전직 대통령을 모욕하는 비열한 모습을 연출한 것일까. 


진짜로 모를 심고 있는 생전의 노무현을 눈물을 훔치며 바라보던 중국집 아줌마의 마지막 말이 다시금 생각난다. “진짜 죽어야 할 전두환이 같은 놈은 뒤지도록 안 뒤지고, 저런 소박한 분이 왜 죽느냐 이 말입니더.” 노무현 전 대통령은 유서에서 “아무도 원망하지 마라!”고 했다지만, 나는 그걸 액면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그의 진심을 이해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의 유언은 직접 몸으로 보여준 행동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이 중차대한 시국에 북한이 핵실험을 하고 세발의 미사일 쏘았다고 한다. 늘 그렇지만 북한은 저런 식으로 남한의 수구세력을 도와준다. 또 남한 국민들이 크나큰 상처를 입은 상황에서 감행한 도발에 비판은커녕 도리어 부화뇌동하는 듯 보이는 민노당의 논평도 참 걱정스럽다.

그러나 어쩌랴. 그들이 벌이는 엉뚱하고 무모한 쇼에 관심둘 때가 아니다.
지금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그저 묵묵히 해야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몸을 던져 보여준 유서의 참뜻이 무엇인지를 헤아리며…. 그게 전직대통령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는 길이 아닐까. 방금 전 봉화마을에서 취재 중인 김주완 기자의 블로그를 살펴보니 봉화마을에 촛불이 켜지고 있다고 한다.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

이 글은 (사)우리땅 걷기 <다음까페>에 실었던 글입니다.
그러므로 블로그 현실과 조금 차이나는 내용도 있을 수 있답니다. 
 


에휴~ 이 제목도 달고 보니 낚시질 비스름 하구먼요.
할 수 없죠.

내용이 별로면 제목으로라도 승부를 걸어야지요.
어쨌든 그럼 지금부터 감상모드 들어갑니다요.

 

아래 사진은 낙동강 도보기행 제1차 구간이 끝났던 분천역입니다.

당연히 이곳에서 제2구간이 시작되겠지요. 
일기예보에선 비가 많이 온다고 해서

날씨를 걱정했지만, ‘스스로 돕기에’ 부지런한 우리땅 걷기에 하늘도 감동해서 도와주는 모양입니다. 

 

상쾌한 아침입니다.   

 

 


이곳에서 지도를 펼쳐놓고 작전회의를 하고 있습니다
.

모두들 신정일 선생님의 작전지시에 경청하는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저는 딴짓하느라 무슨 소린지 잘 못 들었습니다. 

 

그 결과는 잠시 후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나타나게 됩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은 메시지가 바로 그거랍니다. 

“늘 깨어 있어라. 딴전 부리지 말고. 특히 초보들…  
 

 

 

출발입니다. 자욱하게 펼쳐진 운무가 신비로운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훤칠하게 키가 큰 소나무들도 일렬로 줄을 서서 반겨주고 있습니다.

고난의 행군이 될지 천국으로 가는 길이 될지 모르지만,

우리의 장도를 격려해주는 듯합니다.

 

 

 

철길로 들어섰습니다. 앞에 가는 행렬이 아득해 보이기 시작하는군요.

1차 때도 느낀 것이지만 우리땅 회원들 정말 잘 걷습니다.

아니 제 다리가 부실한 거라고요? 아이, 아닙니다. 아직 제 다리 쓸만합니다.

연식이 아직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거든요 

 

 


이분은
고작가라고 불리는 분이시랍니다.

고작가는 아호랍니다. 미국식으로 아이디’ 또는 ‘닉’이라고도 하지요. 성함은 잘 모르겠습니다.

여자 이름 나이 물어보는 거 헌법상 행복추구권 침해 항목이란 거 다들 아시죠?

스스로 밝힐 때까지 인내를 갖고 기다려야 합니다.


 

 

사진 찍느라 여념이 없으시네요. 엄청 무거워 보이는 대형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다시 자그마한 똑딱이로 동영상도 만들고, 무지무지 바쁘십니다.

 

기차가 지나갑니다. 얼른 카메라로 찍었습니다.

아침부터 기차가 지나가니 기분 좋습니다.

(그러나 그 사진은 뺍니다. 왜냐하면, 여기는 20장만 입장 가능하다는군요. 아래 현동역전과 대합실에

벅적거리는 우리 회원들 사진도 뺍니다. 정원을 좀 늘려주시면 좋을 텐데, <다음>, 신경 좀 써주세요.)

 

그런데 갑자기 저 앞에서 초석님이 막 소리를 지릅니다.

파비님, 파비님, 빨랑 오이소. 우리 터널 드가야 됩미더.

뭐 합미꺼. 좀 있다 기차 또 옵미데이. 빨리 뛰 오이소.

? 이게 뭔 소립니까? 터널이라니? 벌써 풍애터널이란 말입니까?

 

이때 시간이 9 조금 못 되었나요? 마음의 준비도 안됐는데 이게 무슨 일이람?

아이 무셔~

헐레벌떡 터널로 따라 들어갔습니다.

급한 와중에도 이렇게 풍애터널 입구는 찍었답니다. , 대견하지요?

 

초석님 뒤를 따라가며 그런 생각을 했답니다.

, 착한 우리 초석님도 겁줄 줄을 다 아시네.

승부터널 지날 때도 두 시간 동안 기차가 안 오던데.

이번에도 그렇게 안배를 하셨겠지.

 

그런데 굴을 빠져 나와 숨을 돌리려는 순간,

갑자기 터널 안에서 요란한 굉음이 밀려왔습니다.

기차소리였습니다.


 

, 정말이었군요. 초석님이 괜히 겁주려고 그랬던 게 아니었군요.

다음 차는 9시 48 지나간답니다.

하여간 지휘관 지시사항을 잘 안 듣고 딴전 피는 병졸들이

늘 하나씩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게 하필 저라니

 

철길을 한참을 걷는데 뒤에서 또 기차가 오는 게 보였습니다.

시간을 보니 9시 48. 시간을 잘 지키는군요. 손을 흔들었습니다.

기관사 아저씨도 손을 흔들어주시네요.

 

그런데 제 뒤에 분명 두 사람이 더 있었는데…

그분들이 안 보이는데 그냥 돌아가셨나?

그분들은 원래 우리땅 걷기 회원으로 오신 게 아니라

어느 출판사 직원들이라고 들었던 거 같습니다. 
 
  

 

잠시 후 철길을 벗어난 우리는 이제 한적한 낙동강 변 시골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철길은 완전 이별인가 봅니다.

백색 그랜저 한대가 오더니 손을 흔듭니다.

수고 많으십니다.

 

보니까 안면이 있습니다. 낙동강 걷기에 함께 온 출판사 대표라고 하셨던 분입니다. 

저기요. 사장님. 그런데 함께 오신 일행 분들 있잖습니까?

제 뒤에 따라왔는데 풍애터널에 안 들어오신 것 같거든요.

혹시 되돌아갔을지 모르니까, 반대편에 가서 기다려보는 게 어떨까요?

 

그는 갑자기 얼굴에 수심이 가득 차기 시작했습니다.

, 큰일 났네. 어떡하지?

잠시 생각하더니,

일단 제가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어서 따라 가세요.

이 글의 맨 끝을 유심히 읽어보실 여러분이라면

그분의 얼굴에 숨김없이 드러난 수심의 의미를 아마도 이해 하시게 될 겁니다.

 

한참을 걷다 보니 현동역이 나왔습니다.

앞서 간 사람들이 모두 거기서 쉬고 있었는데,

그런데 역사를 거의 점령하다시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역이 무인역사인 줄 알았습니다.

역사무실을 가득 메운 회원들은 커피도 타먹고 떠들고 하는 폼이

꼭 친한 친구 집을 찾은 듯 자연스럽습니다.

 

? 그런데 역장님이 안에 계십니다. 인상이 아주 좋으십니다.

아예, 책상 위에다 커피를 한 통 내놓으셨군요.

우리 오면 먹으라고 미리 큰 통을 하나 사 놓으셨나?

저는 그때 그런 생각을 했답니다.

 

맞아. 신정일 선생님이 미리 전화를 해놓으셨구나. 커피 준비해놓으라고.

그나저나 그 역장님, 정말 성품이 좋으시더군요.

그러고 보니 승부역에서도 똑같은 대접을 받았었지요.

요즘 역장님들은 모두들 다 이렇게 친절한가 보지요?


 


다시 행군을 시작했습니다
. 슬슬 배가 고프기 시작합니다. 1시간쯤 걸었을까요?

현동 다리 결에 우리를 싣고 온 버스가 서있습니다. 그리고 앞서간 사람들이 

모여있습니다. 저는 항상 맨 꼴찌로 갑니다.

 

,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뒤에 가는 건 아니고요. 초보라 그렇답니다.

다른 분들은 이 아름다운 자연을 자주 보았겠지만, 초보인 제게는 너무나 신비롭습니다.

하나도 놓치기 아깝습니다. 사진 찍으랴 걸으랴 바쁘기가 그지 없습니다.

 

그러니 남들보다 운동량도 더 많아서 배도 엄청 빨리 고파지나 봅니다.

바로 앞에 가는 여자회원님들을 따라가며 제가 말했지요.

아유, 점심시간인 모양이네요. 빨리 가야겠어요.

 

무슨 점심? 아직 시간이 11 안됐는데 간식 주는 거 아니에요?

? 그러고 보니 그렇군요. 그런데 왜 이렇게 배가 고픈 거지요?

하여간 다리도 아픈데 쉰다니 참 좋은 일입니다.

애써 간식을 준비해오신 초석님을 위해 박수 한번 쳐주고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간식을 맛있게 먹고 있는데, 이게 웬일이랍니까?

저쪽 다리 반대편에서 뒤에 쳐져 돌아갔을 거라고 생각했던 분들이 오고 계십니다.

두 분이 아니고 세 분입니다. 모두 출판사 분들입니다.

 

얼마나 반갑던지요…. 그런데 그분들 말씀을 듣고 그만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답니다. 

그분들은 돌아가시지 않고 그냥 터널을 지나왔다는 겁니다.

자기들은 거기가 풍애터널인지도 몰랐답니다. 한참을 걸어오는데

앞이 하나도 안 보이는 게 덜컥 겁이 나더라는 거지요. 물론 랜턴을 켰겠지요.

 

그런데 뒤에서 갑자기 기차가 달려오더라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 이분들은 터널 벽에 납작 붙어 꼼짝도 않고 있었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우와, 정말 재미있었어요. 멋졌어요.

 

한 분은 남자분이고 두 분은 여자분. 세상에, 이렇게 간들이 클 수가.

재미있었다고요? 하긴 군대도 제대하고 나면 다 추억만 남는 법이랍니다.

하여간 이분들, 만약 굴 안에서 기차를 만났을 때 행동요령을 잘 숙지하고 있었군요.

 

지난 1차 때 대표님으로부터 교육을 받았었지요.

어쨌든 이분들에겐 두고두고 우려먹을 무용담 하나가 생겼네요.

사실 천국이야기보다 지옥에 다녀온 이야기가 더 재미있는 법이지요.

 

그런데 제가 우리 회원님들에게 이 이야기를 너무 흥분해서 하다가,

“돌아가셨는 줄 알았는데, 그냥 지나오셨더라.

고 말했다가 모두들 웃어서 영문을 몰랐는데, 곧 깨우치긴 했지만, 

‘되’자를 빼먹었더라고요. 아유, 큰 실수였습니다. 죄송합니다. 하하.  

 

, 간식을 먹고 난 우리가 지금부터 걸어갈 길이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천국의 길이었답니다. 글쎄요. 천국에 가도 이렇게 아름다운 길이 있을까요?

금강산에 가보지는 못했지만, 금강산이라도 이리 아름다운 길은 없을 겁니다.

 

금강산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거기엔 낙동강이 없잖아요?

임기 소수력발전소를 지나 만나게 되는 낙동강 변의 바위 길과 모래사장.

명호 수력발전소의 풍경을 타고 넘어오는 꿈결 같은 물길.

한 폭의 그림 같은 청량산. 바로 위 사진이 낙동강을 따라가다 마주친 청량산 뒷모습이에요.

 

그러나 무엇보다 가송리를 가로지르는 끝이 안 보이는 협곡과 단애가 일품입니다.   

이 협곡에는 농암종택과 농암각자를 보는 즐거움도 함께 있습니다.  

이름마저도 아름다운 가송협입니다.

퇴계선생이 이 길을 걸어 청량산을 드나들었다고 해서 퇴계오솔길이라고도 부른다는군요.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천근처럼 무겁던 다리는 새털처럼 가벼워지고

점심 때 반주로 마셨던 술기운도 씻은듯이 사라졌습니다.

눈이 확 뜨입니다. 정신도 맑아지고 마음은 상쾌합니다.
 

 

위 사진 첫 번째가 월명담이고요. 그 다음이 농암종택의 긍구당 그리고 마지막 사진이 바로

농암각자랍니다. 저도 모르고 그냥 사진을 찍었는데 나중에 돌아오는 길에 초석님에게 들어 알게 되었답니다.

원래는 다른 곳에 있었는데 안동댐에 수몰되는 걸 피해 현재의 장소로 옮겼다는군요. 농암각자 뒤의 건물은 무엇일까요?

그것도 초석님께 들었는데 까먹었습니다요. 누구 아는 분 계시면 가르침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이야기라도 너무 오래하면 재미없겠지요?

자, 이제 이쯤에서 마무리하는 센스가 필요할 거 같네요.

사실 오늘 이 후기의 핵심 포인트는

고작가가 어떻게 사선을 넘었으며

또 어떻게 천국을 담았는가!가 되겠는데요.

 

더 이상 자세한 것은 고작가에게 직접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이렇게 대답하실지도 모르겠어요  .

지옥도 너무 짜릿했고요. 천국은 너무나 아름다웠어요.

아니면 조만간 수기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요.

 

하하. , 그럼 고작가님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고작가님은 용무가 바쁘셨던 만큼 맨 꼴찌였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오시는 모습이 보이시죠.

 

, 꼴찌가 한 명 더 있군요.

그 뒤에 비실거리며 올라오시는 분은 고작가님과 세상에서 가장 친한 분이시랍니다.

이분이 바로 아까 그 수심 가득하던 출판사 사장님이기도 합니다요.

 

 

그리고 밑에 계신 분은 역시 고작가님과 일행으로서 함께 사선을 넘어오신 분인데

꼴찌올림픽 동메달입니다.

그러나 비록 꼴찌일망정 인생의 지혜가 대단하신 듯합니다.

아래 사진을 보시고 다같이 지혜를 배우도록 합시다. 
낙동강 2구간 도보기행을 마치고 맥주와 막걸리로 쫑파티를 하는 중에 찍은 사진이랍니다.  


 

 

고작가님은 작가답게 이번 제2차 낙동강 도보기행의 마지막도 멋지게 장식해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손을 들어 파이팅을 요구하기도 하고 김치를 요구하기도 하는

저 모습을 보아주세요.

우리 공윤님의 포스에 절대 뒤지지 않습니다.

 

고작가님, Fighting! 스펠링이 맞나? ㅎㅎ

 

 

언제든 고작가님이 담으신 천국을 꼭 구경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점심시간이 지났네요. 식사들은 많이 하셨나 모르겠어요.  건강하시고요

시간 봐서 또 재미있는 사진 있으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오늘 사진은 하나도 재미 없었다고요? 할 수 없죠, 뭐. 그건 제 관할 밖이에요.

저는 오로지 제 주관의 세계만 관장한답니다.   

                                      

게다가 저는 아직 자동모드 밖에 쓰지를 못하는 아마츄어거든요

그러므로 널리 이해해주시지 않으면 안돼요그렇게 믿을 게요.

제가 보기에 우리땅 걷기 회원님들은 모두들 너무나 순수하신 분들 같아요.

그렇죠? 까뮈가 말한 순결한 영혼들 말이에요.

 

아니, 참 니이체가 말했었나? 갑자기 헷갈리네요.
신샘이 하도 니이체 타령을 하셔서 “모든 말은 니이체로 통”하게 되어버린 거 같아요.
 



그런데 위 사진에 나오는 버섯, 혹시 이름을 아시는 분 안 계셔요? 청량산 자락을 돌아내려가는 

낙동강 변 어느 모퉁이에서 자라던 버섯(?) 같은 건데요. 이렇게 예쁜 건 보통 독버섯이라고 하던데….

오늘의 마지막 주제는 바로 이거랍니다. 이거 독버섯일까? 또 이름이 있다면 무얼까?      파비

 

ps; 사선을 지나온 진짜 이야기는 다음까페에...
고작가님은 나중에 터널안에서 용감하게도 지나가는 기차의 동영상까지 촬영했습니다. 그리고 칠흑같은 터널에서 멀리 자그마한 점으로 새어들어오는 빛을 찍었답니다. 저도 조금만 늦었다면 함께 지옥을 감상할 수 있었는데 아깝습니다. 딱 1분 아니 30초만 늦었더라면…
아, 지옥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다음까페 <우리땅 걷기cafe.daum.net/sankang>에 가시면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소미란 아이디로 올라있으니 소미를 검색하시면 되겠지요? 제 블로그에 소개를 하고 싶지만 애써 공들인 저작물을 함부로 그러기도 곤란하고, 좀 써도 좋겠느냐고 물어보면 아는 안면에 거절하기야 하겠냐만, 그것도 다 민폐지요.
오른쪽 사진은 고작가님이 찍어주신 누구랍니다. 가송협 낙동강가에 앉아있는 폼이 꼭…

Posted by 파비 정부권
낙동강 천삼백리 길을 걷는다

  제1구간 너덜샘에서 분천리까지

황지는 태백시내 한복판에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황부자란 구두쇠가 있었는데 어느날 대문앞에서 한 노승이 목탁을 두드리며 시주를 청했다. 그러자 외양간을 치고 있던 인색한 황부자는 시주대신 두엄 한가래를 퍼다 “이거나 가져가라”며 노승의 바랑에 넣어 주었다.

마침 방아를 찧다가 이를 본 며느리가 시아버지 대신 용서를 구하며 쌀을 한되박 담아 시주를 올리자 노승은
이 집은 운이 다했으니 따라오되 어떤 일이 있더라도 뒤를 돌아보아선 안 된다
고 당부를 주었다. 아기를 업고 한참을 노승의 뒤를 따라가는데 느닷없이 집 쪽에서 뇌성벽력이 쳤다.


이에 놀란 나머지 노승의 당부를 잊고 뒤를 돌아본 며느리는 그만 아기를 업은 채로 돌이 되고 말았다. 뇌성벽력이 떨어진 황부자의 집터는 땅속으로 가라앉아 커다란 연못으로 변했는데 후에 사람들은 이 연못을 황지라고 불렀다. 삼척군 도계읍 구사리 산마루에 가면 돌로 변한 아기를 업은 며느리(미륵바우)와 뒤따라가다 함께 돌이 된 개(개바우)가 돌미륵으로 남아있는데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황지는 현재 둘레 100m의 상지, 50m의 중지, 30m의 하지 등 세개의 연못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이는 것은 상지다.


몇 년 전 서울에서 지하철을 탔다가 벽에 붙은 경주 최부자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아마 지하철공사에서 교훈이 될만한 이야기를 골라 차량 벽에 붙여놓은 모양이었는데 매우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되었다. 요즘도 그렇게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거기엔 이런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우리 속담에 부자는 3대를 못 넘긴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경주 최부자는 대대로 만석꾼을 누렸는데 그 집안에 내려오는 가훈 중에 곳간이 차기를 기다리지 말고 비우라는 가르침이 있었다. 후손들은 이 가르침을 잘 따랐고 대대로 부귀를 누릴 수 있었다.

 

얻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버리고자 하면 얻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런 교훈이었으리라. 버린 것은(희사한다는 뜻도 직역하면 버린다는 것이다) 곧 거름이 되어 다시 더 많은 부를 이 가문에 가져다 주었으리라는 뜻이다. 물론 이런 이야기들은 사람들이 지어낸 말일 수도 있겠지만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귀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우리땅 걷기" 회원들에게 설명 중인 신정일 선생

그런데 황부자는 인색할 뿐만 아니라 성격도 매우 괴팍했던 모양이다. 시주를 안 하면 그만이지 두엄을 퍼다 노승에게 던져줄 건 또 뭐란 말인가? 어떻든 황부자에게 내린 벌로 인해 만들어졌다는 황지는 그러나 평온했다. 도심 한복판에 있는 그다지 크지 않은 이 연못은 이 도시의 노인들에겐 더없이 좋은 휴식공간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대한 호수는 아니라도 그래도 꽤나 큰 호수를 기대했던 내 마음은 적이 실망스럽다. 그러나 황지가 지금은 이렇게 작아졌지만 원래의 황지는 이보다 두 배는 넓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많아지고 발길이 잦아지면서 크기도 자꾸 줄어들었을 것이다. 신정일 선생의 설명을 듣고 있으려니 옛사람들이 밟았을 황지가 그리워진다.
 

황지연 입구에는 낙동강 천삼백 리 길 예서부터 시작되다 라고 쓴 커다란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건너편에서는 물차 두 대가 황지에 파이프를 들이대고 물을 퍼 담고 있었다. 마침 곁에 있던 문화해설사에게 물어보았더니 태백시는 지금 심각한 식수난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 황지의 물을 퍼다 정수해서 태백시민들에게 공급하고 있다고 했다.

하루 5천톤의 물이 솟는 황지의 물을 퍼담고 있는 물차.



원래 태백시는 1989년까지만해도 이곳 황지의 물을 식수원으로 사용했다. 그러던 것이 정선에 광동댐이 만들어진 이후로는 그곳에서 물을 공급받아 먹었다. 그런데 지난 겨울 내도록 계속된 사상 최악의 가뭄으로 광동댐이 거의 말라버렸다. 그리하여 물을 제대로 공급할 수 없게 된 태백시는 제한급수 중이라고 했다.  
 

그랬구나, 태백시로 들어오면서 보았던 두 주먹을 불끈 쥔 투쟁구호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구나. 나는 낯설지 않은 그 투쟁구호가 적힌 현수막을 보면서 오래 전의 사북사태를 생각했었다. 1980 4, 유신체제의 몰락은 탄광의 노동자들에게도 발언권을 주었다. 그들은 막장에서 나와 사북읍내를 장악했다.

 

당시 동원탄좌 노동자들의 요구는 어용노조 위원장 사퇴임금인상이었다. 개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녔다는 말이 전설처럼 떠도는 곳에서 막장의 광산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도시를 장악한 것이다. 당시 사북에서 중3짜리 까까머리였던 후배의 증언에 의하면 총파업을 주도한 것은 남자들이 아니라 여자들이었다고 한다.

 

몸빼 입은 아줌마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파업에 참여할 것을 종용하였다고 하는데, 심지어는 철도를 점거한 것도 이들 부녀자들이었다고 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파업이랍시고 술에 취한 남정네보다 여자들이 훨씬 조직적이고 강력했다. 원래 모든 무용담이 그러하듯 세월이 흐르면 전설이 담기게 마련이다.

 

그러나 사북노동자들의 총파업이 승리로 끝난 20여일 후, 5·17 비상계엄령이 발표되고 진주한 군대와 경찰에 의해 70여명이 연행되고 이중 40여명이 구속되었는데 상당수가 부녀자들이었다는 사실은 그 친구의 말이 허언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한 이 이야기는 황지와 도계, 사북 등지에서 광산노동자로 일했던 나의 형들이 증언하는 바이기도 하다.

 

태백시내 거리 곳곳에 매달린 현수막들은 과거를 회상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제 이곳엔 막장도 광산노동자들도 술 취한 남정네를 대신해 파업을 독려할 여자들도 없다. 오로지 자작나무들이 허옇게 머리를 둘러싼 태백산과 고원도시를 지키고 있는 주민들, 그리고 낙동강과 한강의 발원지를 보고픈 우리 같은 관광객들만이 있을 뿐이다.
 

불끈 쥔 주먹이 그려진 현수막은 한두 개가 아니라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그런데 웬 난데없는 투쟁구호란 말인가? 그것은 물 때문이었다. 20만의 인구가 흥청거리던 이 검은 도시엔 아직도 6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떠나지 못하고 남아있다. 그리고 이들에겐 해마다 증가하는 관광객이 주요한 수입원일 것이다. , 어딜 가나 사람이 있는 곳엔 깨끗한 물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물이 끊긴 것이다

우리나라의 양대 강인 낙동강과 한강 발원지를 담고 있는 태백시에서 일어나는 일치고는 아이러니였다
. 황지에서 솟아나는 물만으로 수많은 세월을 버텨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다가 광산이 개발되고 급격하게 인구가 늘어나면서 부족한 식수원을 확보하기 위해 인근 정선에 광동댐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댐은 지독한 가뭄 앞에 속수무책, 과거에 비해 3분의 1로 줄어든 인구의 식수는 고사하고 버쩍 말라버린 바닥만 드러내고 말았다. 댐의 바닥엔 물 대신 자갈이 굴러다니는 모습이 처량하기 그지없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지난 가을께만 해도 가득 찬 저수량으로 넘실대던 댐이 불과 몇 달 사이에 이토록 처참한 모습으로 변하다니….

물이 없으면 관광객들도 오지 않겠지만 자신들도 살지 못한다. 이들이 도시 곳곳에 내다 걸어놓은 두 주먹 불끈 쥔 플래카드를 보며 나는 미안함을 느꼈다. 그러나 어쩌랴. 나는 가야 한다. 저 플래카드 아래를 지나 황지천을 따라 낙동강을 걸어야 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며 이곳에 온 목적이다.      파비 <제1구간 일정; 3월 27~29, 2박 3일>

Posted by 파비 정부권

얼마 전, 주완 기자의 블로그에서 휴대폰
홍보전쟁 기사를 보며 배꼽을 잡았습니다
.

"김주완 김훤주의 세상사는 이야기" 에서 사진 인용


“마산에서 제일 싼 집”
“북한 빼고 남한에서 제일 싼 집”

다음이 완전 압권이었죠?

옆집보다 무조건 싸게 팝니다”


하하.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물론 저도 매일 한번 이상은 이런 홍보문구를 거리에서 보았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무심코 지나쳤던 거지요. 워낙 이런 상술에 익숙해진 지 오래 됐으니까요. 그런데 김주완 기자가 부럽군요. 아직도 이런 것이 눈에 들어오는 걸 보면 그는 아직도 풍부한 감성을 간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덕분에 저도 지난 금요일에 구미에 올라갔다가 비스름한 것을 봤습니다. 구미에 간 이유는 낙동강 도보기행 제2구간(경북봉화 임기, 명호, 청량산, 안동 가송협, 도산서원까지)에 함께 갈 초석님이 구미역 근처에서 치과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그의 퇴근시간이 7이므로 그 시간에 맞춰 열차를 타고 구미역에 내렸습니다. 나중에 따로 포스팅 하겠지만 정말 환상의 강길이었습니다.

섬진강 하동포구길이 올해 한국의 아름다운 길 1등에 선정되었다는 기사를 어디서 본 것 같은데요. 글쎄요. 제가 보기엔 낙동강 가송리 협곡이 가장 아름다운 길이 아닐까 생각되는군요. 물론 이 길은 차가 다닐 수는 없는 길이니 섬진강과 비교하긴 좀 그렇지만요. 게다가 이 길은 퇴계 이황 선생의 발자취가 묻어나는 길이기도 하답니다
.

퇴계선생은 이 길을 걸어 수없이 청량산을 올랐을 텐데요,
 자신의 아호마저도 청량산인이라고 고쳤다 하는군요. , 이 정도로 제가 다녀온 낙동강 홍보는 그만 하기로 하고요. 금요일 오후 6 53, 구미역은 엄청나게 북적거리더군요. 한산한 마산역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습니다. 마치 서울역에 온듯한 착각이 일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가 촌놈이 된 듯 두리번거리며 역을 빠져 나온 제 눈에 제일 먼저 뛴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바로 이것이었답니다.   “폰값 똥값”


폰값과 똥값 사이에 있는 화투짝 보이시나요? 저게 바로 똥광이란 건데요. 제가 화투는 칠 줄 모르지만 아마 대충 맞을 겁니다. 광 중에서도 팔광과 똥광이 최고라고 들었거든요. 어쨌든 이 휴대폰 가게는 대구 동신골목을 싹쓸이하고 드디어 구미에 판을 깔았다는데요. 휴대폰을 똥값에 팔겠다는 거고요. 똥값에 폰을 사신 고객님은 화투판에서 똥광을 잡은 거나 마찬가지다 뭐 이런 이야기인 것 같네요.

폰값이 똥값이라…


, 그런데 옆집을 보세요. 이 집은 “폰값이 껌값이래요.”
 


! 정말 치열한 홍보전쟁이 김주완 기자의 말처럼 점입가경입니다. 차마 이 정도일 줄 몰랐는데 이제 아예 폰을 똥값이나 껌값에 팔겠다고 나섰으니… 먹고 살기가 어렵긴 어렵나 봐요. 이렇게 해서라도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쳐야 한다니. 이거 이러다 삼성전자나 엘지전자 같은 대형회사들 부도 나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 

아니 휴대폰을 똥값이나 껌값에 팔고 그 원가부담을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참으로 걱정됩니다. ? 제가 쓸데 없는 걱정을 하고 있다고요? 그래도 다 남는 장사라고요? 하긴 안 남기고 이런 짓 할 리도 없겠지요. 돈 되는 일이라면 공산주의도 팔아 이윤을 남긴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안 되는 짓을 할 리가 없겠지요. 

그런데 여러분, 사실은요. 제가 저 거대한 똥값과 껌값 간판을 보면서 생각이 들었던 건 그저 이런 이야기가 아니었답니다. 폰값이 똥값이든, 북한 빼고 남한에서 제일 싸든, 아니면 무조건 옆집보다는 더 싸게 팔든 뭐 우리는 이미 이 치열한 생존경쟁에 무덤덤해진 지가 오래 되었잖아요? 

휴대폰 가게를 자세히 보세요. 그리고 간판도 다시 한 번 봐주세요. 가게보다 간판이 더 크지 않나요? 그리고 위에 김주완 기자가 찍어 올린 자기네 신문사 근처에 있는 휴대폰 가게들 간판과도 한 번 비교해보아 주세요. 확실히 틀리지요? 구미는 대체로 간판들이 이처럼 초대형이더군요. 최소한 저 간판은 똥값으로는 달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던데, 여러분 생각은 어떠세요?

혹시 앞 전에 제가 올렸던 기사 중에 <터미널에서 만난 비키니 아가씨들>을 보셨던 분이라면 "그래 맞다!" 하실 거에요. 제가 한 달 전 낙동강 탐사를 떠나기 위해 이곳 구미에 들렀을 때, 그때는 버스를 타고 구미종합터미널에 내렸었죠. 터미널 앞은 온통 아가씨들로 뒤덮여 있었는데요. 간판 속의 아가씨들 말이에요. 그 간판들 크기도 장난이 아니었죠. 


저는 나날이 이토록 커지는 간판들이 걱정이네요. 작년이었던가요? 아니면 재작년? 모 방송사에서 방영한 신년기획 다큐멘터리에서 세계적인 사진작가인 프랑스의 얀이 유네스코의 지원으로 우리나라의 산하를 찍으면서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한국의 산과 들은 참으로 아름답다. 정말 눈이 부실 지경이다. 그러나 한국의 도시들은 너무나 황량하다. 미안하지만, 한국의 도시들은 너무 볼품없어서 카메라를 들이대기가 민망하다.

한국의 도시들은 건물들도 너무 개성이 없이 지어졌지만 거기에 달린 간판들도 너무 무질서하고 너무 크다.

 

대체로 이런 투로 이야기 했던 것 같은데요. 유럽 사람답게 참 솔직하게 말한다 싶었지만, 살짝 기분이 나빴던 것도 사실이었지요. 그런 제 마음을 알았던지 그는 친절하게도 또 이렇게 마무리 코멘트를 해주었답니다.  다만, 한국의 절들은 정말 감동적이다. 자연에 녹아 든 절의 모습은 실로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실제로 백두대간을 따라서 헬기를 타고 사찰을 찍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모습을 다큐멘터리를 통해 보여주었습니다. 자연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 오래된 절의 모습은 자연 그 자체였습니다. 요즘은 절에서도 자연을 배제한 인공의 모습이 많이 발견되기도 합니다만, 우리 조상들이 만들어놓은 아름다운 건축기술을 보고 싶다면 여전히 절로 가야 한다는데 아무도 이의가 없을 겁니다.  

 

아무튼, 오늘 제 블로그에서 무지막지하게 큰 도시의 간판 때문에 눈을 버리신 분이 있다면 보상하는 의미에서 아름다운 한국의 건축물 사진을 하나 보여드리겠습니다. 바로 위에 있는 사진은 제가 엊그제 낙동강을 타고 내려오다 가송리 협곡을 지나 농암종택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긍구당입니다. 뒤에는 낙동강이 살짝 보일 겁니다.

 

아이고, 결국 마무리는 낙동강 타령이군요. 요즘 제가 낙동강에 풍덩 빠졌거든요. 금강산 가는 길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청량산으로 가는 가송협과 퇴계 오솔길 만은 못할 것이다. 왜냐? 거긴 낙동강이 없으니까….” 이건 그냥 제 말인데요. 믿기지 않으시면 한번 가보세요. 후회는 안 하실 겁니다.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

지금 창녕 낙동강 변은 온통 샛노란 물결로 넘실대고 있습니다. 창녕군 남지읍은 2006년부터 낙동강 변의 드넓은 둔치에다 유채꽃밭을 조성했습니다. 원래 이곳은 민가들이 부락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해마다 장마철이 되면 상습적인 침수로 피해가 극심하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창녕군에서는 남지에 새로운 이주단지를 만들어 둔치의 주민들을 옮겨가게 하고 이곳에다 체육공원과 광활한 유채단지를 조성한 것입니다남지 낙동강 둔치의 노란 유채꽃 물결은 이렇게 해서 태어났습니다. 매년 여름 장마에 시달리던 상습침수지역이 놀라운 변신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해마다 이곳에서 유채꽃 축제가 열리는 것입니다.
 

 낙동강유채축제. 창녕군이 2006년부터 매년 4월말에 개최하는 축제의 이름입니다. 작년까지 세 차례 열렸으니 올해는 4회째가 되는 셈입니다. 그러나 올해는 유채꽃축제가 열리지 않습니다. 낙동강용왕대제를 시작으로 각종 공연과 전통행사, 문화행사, 체육행사 등 다양한 이벤트가 열리던 이곳이 올해는 썰렁합니다.

 

창녕군은 특별한 이유에 대한 설명 없이 낙동강유채축제를 열지 않음을 공지하면서 내년에는 꼭 열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말로 대신했습니다. 이유를 밝히진 않았지만 화왕산 참사로 어수선한 군청의 사정을 그저 축제위원회의 사정이란 간단한 말로 대신한 것입니다. 그러나 굳이 말하지 않아도 참담하고 고통스런 그 심정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이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채꽃은 예년과 다름없이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출렁이는 노란 물결이 신비롭기 그지없습니다. 유채꽃 물결이 출렁이는 옆으로는 태백산에서부터 천리를 달려온 낙동강이 굽이쳐 흐릅니다. 그 위로 동족상잔의 포화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리를 지켜온 남지철교가 낙동강과 유채꽃밭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부지런히 유채꽃 사이를 누비는 벌과 나비의 모습이 너무도 평화로운 봄날의 따사로운 햇볕,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강변은 그러나 적막하기만 합니다. 화왕산 화마의 여파가 이곳 낙동강에도 불어 닥친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유채꽃밭을 날아다니는 벌과 나비도 왠지 힘이 없어 보입니다. 오직 도도하게 흐르는 낙동강만이 피 같은 물을 출렁여 힘내라고 박수를 보내는 듯합니다.

 

일을 하다 보면 뜻하지 않은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너무 잘해보려다 도리어 화를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는 것입니다. 창녕군은 큰 교훈을 얻었을 것입니다. 비록 그 교훈의 대가로 지불한 쓰라린 고통이 참을 수 없을지라도 이제 그만 훌훌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이 황량하도록 쓸쓸한 낙동강유채축제장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내년 오늘 이 드넓은 노란 유채꽃 물결 속에 넘실대는 사람들의 물결을 함께 보고 싶다고 말입니다. 꽃이 제아무리 아름다워도 벌과 나비가 칭송해주지 않으면 존재이유가 없듯이 유채꽃밭이 제아무리 화려해도 그것을 즐겨주는 사람이 없다면 무슨 보람이 있겠습니까.

 

불의의 사고에 희생된 분들의 억울한 넋을 생각하면 쉽사리 다시 축제를 열 생각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공무원들의 분위기도 어수선할 것입니다. 의기소침해 있기도 할 것입니다. 자숙하는 시간도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 정도면 되었습니다. 이제 그만 털고 일어나 내일을 향한 발걸음을 다시 시작하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내년 오늘
 남지의 낙동강가에선 다시금 희망이 노란 꽃물결에 넘실대는 유채축제를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늘에 걸린 달빛에 빛나는 유채꽃의 향기에 취해 터져나오는 노래소리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먹거리 장터에서 새어나오는 고기굽는 냄새와 파전에 동동주 마시는 소리도 그립습니다. 그러자면 하루 빨리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용기도 필요하겠지요.   

오늘도 세상 모든 영욕, 인간들의 교만과 근심과 걱정을  다 안고서도 지칠 줄 모르는 낙동강은 변함없이 침착하고도 굳센 물결을 출렁이며 흘러가고 있습니다. 실로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저 낙동강의 도도하고 줄기찬 바다를 향한 집념입니다. <파비>


낙동강.강변에 유채꽃 단지가 보이고 그 뒤로 남지철교가 보인다.

지앙담. 제왕담의 남지식 발음이라 한다.

1933년 완공된 남지철교. 이편 남지쪽에는 웃개나루가 있었다 한다. 그럼 저쪽 함안에는 아랫개나루?

단일지대로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유채단지. 전체면적이 12만평이라고 한다.

유채꽃에 붙은 벌이 바쁘게 작업 중이다.

유채꽃밭 사이로 난 오솔길. 오히려 한적한 이때가 연인들에겐 그럴듯한 데이트 장소다.


 
Posted by 파비 정부권

낙동강 천삼백 리 길을 걷는다

2. 제1구간, 너덜샘에서 분천리까지

한국에서 제일 높은 고개 
   두문동재 너머 너덜샘에서 고사를 지내고

낙동강 발원지는 어디인가? 옛 문헌들에 의하면 낙동강 발원지는 강원도 태백산 황지다. 1486년 간행된 『동국여지승람』「삼척도호부」편에
황지는 도호부의 서쪽 1 10리에 있으며 물길이 남쪽으로 30리를 흘러 작은 산을 뚫고 나가니 천천(穿川)이라 하는데 곧 경상도 낙동강의 원류라고 했다

또 조선의 모든 지리서들도 낙동강 발원지는 황지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1978년 김우관 교수는 25만분의 1 지형도상에서 태백산 일원에 있는 1634곳의 시원지를 일일이 자로 재어 조사한 결과 천의봉 너덜샘이 최장 발원지라는 사실을 새롭게 밝혀 내었다. 이후 여러 차례 실측에 참여한 학계는 물론이고 국토지리원에서도 낙동강 최장발원지가 천의봉 너덜샘이란 사실을 인정하고 있지만 태백시를 비롯한 일각에서는 여전히 황지를 발원지로 고집한다.

 

너덜샘이 황지보다 10여 킬로 상류에 있으므로 최장발원지에 대한 논쟁의 여지가 없을 듯 보이지만, 실상 태백시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닐 듯싶기도 하다. 우선 황지는 태백시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어 관광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있는데다 커다란 연못을 이루고 있는 황지와 자그마한 옹달샘에 불과한 너덜샘을 비교하는 것이 그들로서는 못내 아쉬운 일이기도 할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높은 역. 지금은 관광객만이…

막장에서 석탄을 실어오던 '까시랑차'로 기억나는 탄차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고개는 어디인가?
추전역을 떠난 우리는 두문동재를 넘어 너덜샘으로 향했다
. 너덜샘은 추전역에서 두문동재 너머 조금 아래쪽에 있다. 두문동재. 해발 1268m. 해발 855m의 추전역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역이요, 두문동재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고개다. 두문동?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대체 고려의 충신들이 숨어 살았던 두문동과는 무슨 관계일까?

 

사마천의 『사기열전』「백이숙제」편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백이와 숙제는 고죽국 영주의 후예로서 상나라 서쪽 서백의 아들 희발이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 무왕이 되자 고죽국 영주로서 받는 녹을 받을 수 없다 하여 수양산에 숨어들어 고사리를 캐먹고 살았다. 뒤에 왕미자라는 사람이 주나라의 녹을 받을 수 없다더니 주나라의 산에서 주나라의 고사리를 캐먹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하고 책망하자 이들은 마침내 고사리도 먹지 않고 굶어 죽었다.

 

고려가 조선에 멸망하자 고려의 선비들도 백이숙제의 전철을 따라 충절을 지키고자 했다. 송의 주자학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고려의 선비들에게 수양산의 고사는 지침과도 같은 것이었으리라. 현재의 경기도 개풍군에 위치한 두문동에 72명의 고려 유신들이 조복을 벗어 던지고 들어가 새 왕조에 출사하지 않았다. 이에 조선왕조는 군사를 풀어 두문동을 포위하고 이들을 모두 불살라 죽였다고 전해진다.

 

이후 세인들은 이들 72인의 충신을 일러 두문동 72현이라 부르며 두문불출(杜門不出)이란 말로 이들의 충절을 기렸다. 함께 어느 일행의 설명에 의하면 두문동 충신들 중에 7명이 살아남아 이곳 두문동재 아래 정선 땅에 피난 살았다는데 자연부락의 이름이 두문동이라 한다. 듣고 보니 마음이 숙연해지고 고개를 숙이지 않을 없다.


수양산이
두문불출의 고사가 요즘의 시선으로 보자면 한없이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 실종된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두문동은 이름만으로도 커다란 표석이 되고 있음에 틀림없다. 3월의 마지막 주말이었지만 두문동재는 새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눈은 사람들을 동심으로 끌고 가는 마력이 있는 것일까?
 


 

          
장난끼가
발동한 사람들은 눈을 뭉쳐 서로 던지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위에 벌렁 누워 봄볕이 쏟아지는 하늘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이럴 보면 어른 아이가 따로 없다. 그러나 갈 길이 멀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너덜샘으로 향했다너덜샘은 황량했다. 김우관 교수와 이후에 분이 세워두었다는 낙동강 최장발원지 푯말도 보이지 않았다. 누가 치워버린 것일까?

 

다만 너덜샘이란 돌로 만든 비석과 샘터만이 이곳이 너덜샘임을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고사를 지냈다. 전주에서 가져온 막걸리를 부어놓고 신정일 선생은 축원문을 읊었다. 낙동강 천삼백 도보기행을 무사히 마칠 있게 해달라는 축원이었다. 고사를 지낸 우리는 음복으로 막걸리를 나누어 마셨다. 전주막걸리가 맛있다. 전주비빔밥, 한정식, 전주는 맛의 고장이다. 그러고 보니 막걸리 맛도 기가 막히다.

 

다시 버스에 올라탄 우리는 계곡을 따라 10 킬로 아래에 있는 황지를 향해 출발했다. 낙동강 천삼백 리 도보기행 출발점은 황지가 것이다. 신정일 선생은 현재 논란이 일고 있는 낙동강 발원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낙동강 최장발원지는 너덜샘입니다. 국립국토지리원이나 수자원공사에서 나온 지도에도 그렇게 표기되어 있어요. 그러나 어쨌든 황지가 발원지라고 하는 주장도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는 일이지요. 그래서 최장발원지는 너덜샘이고 역사적 발원지는 황지다,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 싶네요.” 

말하자면, 학계와 지역주민 의견의 절충인 셈이다. 봄볕에 새하얀 눈을 본 즐거움에 장난스러워진 내가 일부러 마이크를 잡고 한마디 했다. “저, 공지사항 있습니다. 저는 마산에서 왔는데요. 무려 10여 년만에 흰 눈을 처음 구경했네요. 그것도 봄에요. 아주 기분이 좋습니다.” 그러자 모두들 눈값 내놓으라고 난리다. 눈값이라니…. 눈은 공기와 마찬가지로 자유재 아니었던가? 

하긴 이렇게 경비를 들여 태백산 꼭대기에 오지 않고서는 쉬 보기 어려운 것이 오늘날의 눈이고 보면 돈을 내야만 누릴 수 있는 경제재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터이다. 어쩌면 멀지 않은 미래에는 깨끗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선 돈을 지불해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이미 수도물을 믿지 못해 사람들이 마트에서 돈을 주고 생수를 사먹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어쨌든 이날 이후로 눈값을 언제 내겠느냐는 시비(?)는 아직도 계속 되고 있다.

황지연을 향해 달려가는 버스의 발걸음은 왁자한 웃음소리와 더불어 경쾌하다. 봄의 전령사들이 밝게 빛나는 태양아래 삐쭉거리며 고개를 내미는 것이 차창밖으로 언뜻언뜻 보인다. 차창으로 달려드는 따스한 햇볕에 사람들의 얼굴색도 밝아지고, 푸근해진 마음은 초면의 어색함도 녹여내는 듯하다. 정말 화창한 날씨다.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

낙동강 천삼백 리 길을 걷는다

2. 제1구간, 너덜샘에서 분천리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기차길, 추전역
추전역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역이다. 해발 855m라는 높이는 내가 살고 있는 마산의 진산 무학산 정상보다도 100m가 높다. 이 높은 곳에 어떻게 기차가 올라왔을까, 기술의 진보가 오늘과 같지 않았을 까마득한 옛날에 말이다.

아마도 태백산 일대에 석탄이며 아연이며 중석이 발견되지 않았던들 이곳은 아직도 태고의 원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추전역으로 올라가는 길 양 옆으로는 오래된 석탄도시의 흔적이 봄기운에 녹아 내리는 눈과 함께 질척거린다. 검은 도시의 영광을 아쉬워 하듯….

 

추전역에 올라서니 바로 코 앞에 거대한 풍차를 머리에 매단 매봉산이 바라다보인다. 대관령을 넘으면서도 저런 풍경을 보았었다. 거대한 풍차의 날개가 돌아가는 모습과 동해바다가 이국적이었다. 석탄도시의 상징 추전역에서 바라보는 풍차의 날개짓…. 추전역은 한산했다. 한쪽 귀퉁이에선 과거에는 석탄을 가득 싣고 분주하게 뛰어다녔을 검은 화물열차가 오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대신 코에 기다랗게 고드름을 매단 삐에로 복장을 한 인형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우리를 반긴다.

추전역에서 바라보는 매봉산 풍력발전용 풍차들

한 세월 전국의 에너지 공급을 책임지며 땀을 흘렸던 이 역사는 이제 검은 무연탄 대신 카메라를 들고 알록달록한 등산복으로 치장한 관광객들을 맞는다. 석탄을 가득 싣고 길 떠날 준비에 바삐 움직이던 기관차와 화물열차 대신 선로에는 관광객들의 셔터소리만이 가득하다.

 

한때 태백시는 인구가 20만에 육박하는 고원도시였다. 원래는 삼척군 상장면(또는 1920년대 이전엔 상장성면이라고도 불리었음)으로 화전지대였던 이 곳은 1920년대에 탄층이 발견되면서 탄전지대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1961년 삼척군 장성읍으로 승격했고 1973년에는 장성읍 황지리가 삼척군 황지읍으로 분리되었다가 1981년 다시 장성과 황지를 합하여 태백시가 되었다.

 

태백시는 우리나라 최대의 탄광도시였다. 사람들은 그때의 영광을 말할 때 지나다니던 개도 입에 만 원짜리를 물고 다녔다는 말로 대신한다. 물론 이 말은 그저 우스갯소리다. 사람에게도 귀한 만 원짜리를 어찌 개가 물고 다닐 수야 있겠는가그러나 이런 우스갯소리는 당시의 풍요로움을 그리워하는 듯한 말이어서 한편 못내 서러운 마음을 배척할 수가 없다

내 어린시절 고향도 탄전지대였다. 태백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태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문경이란 또 하나의 탄전지대가 있었다
그런데 내 어릴 적 추억이 묻은 이곳을 소개할 때도 마찬가지로 예의 개도 만 원짜리를 입에 물고 희희낙락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랬던가. 그러나 사정은 달랐다. 광산주에게는 맞는 말일지언정 막장에서 탄을 캐는 광부들에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이다.

 

광부들은 땅속에서 일을 했다. 그들은 밀폐된 어두운 곳에서 희미한 카바이드 불빛에 의지한 채 죽음을 친구로 삼아 검은 흙에 삽질을 한다. 발파 후에 채탄작업, 그리고 다시 동발을 세우고 한발 한발 막장이 깊어질수록 채탄장에 쌓이는 석탄의 높이만큼 사끼야마(선산부)들의 폐는 검은 먼지에 색이 변한다. 그렇게 변색되는 폐가 그들의 생활을 얼마나 윤택하게 했을까.

 

얼마나 많은 광부들이 진폐로 생과 이별했던가. 그들은 폐에 묻은 검은 먼지를 털어내기 위해 돼지비계와 소주가 필요했다. 갱도 주변에는 수많은 술집과 작부들이 그들의 진폐를 달래기 위해 들어섰고 광산도시는 밤이나 낮이나 흥청거렸다. 글쎄, 어쩌면 그 시절 술 취한 어느 광부의 만 원짜리를 개란 놈이 훔쳐 물고 달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머리를 박박 밀고 시커먼 교복과 교모를 눌러쓴 모습이 스스로도 너무나 대견스러워 우쭐거리던 중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어느 날 하교 길에 국민학교 동창을 만났다. 녀석은 검은 탄가루를 날리며 달리는 재무시(GMC트럭) 조수석에 매달려 있었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잽싸게 얼굴을 돌렸다. 나 역시 마치 무슨 큰 죄라도 지은 냥 얼른 눈길을 피했었다.

 

그런 아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근로기준법에 기재된 아동근로 금지의 원칙 같은 것은 그야말로 법전 속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더 슬픈 기억은… 국민학교 때였다. 양정모 선수가 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금메달을 땄다고 흑백 텔레비전에서 카 퍼레이드를 하던 바로 그날이었다. 옆집 형이 복날 개 맞듯이 맞았던 것은….

추전역. 무연탄 적재용 화물열차가 보이고 그 옆에 싣다 만 석탄이 쌓여있다.

옆집 형은 나보다 세 살 위였다. 그는 광산에서 후끼야마(후산부)로 일했는데 그날 낮에 친구들과 막걸리를 많이 마셨던가 보았다. 그는 미성년자였으므로 그의 아버지는 팬티만 입힌 채 엎드려뻗쳐 시켜놓고 장작으로 빠따를 때렸는데 그 형의 엉덩이와 허벅지에선 피가 줄줄 흘렀다. 그리고 그 몸으로 병반(3교대 중 밤에 일하는 조)을 들어갔던 그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굴이 무너진 것이다.

 

모두 옛날 이야기다. 새끼줄에 연탄을 매달고 퇴근길을 재촉하던 시절도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다. 탄광도시의 영광도 옛날 이야기 속으로 사라졌다. 광부들의 애환도 작부의 구성진 노래도 모두 개가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니던 과거의 거리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이제 해발 855m에 외롭게 서있는 추전역사는 관광객들을 맞아 헤픈 웃음을 짓는다.

 

나는 그 추전역에 카메라를 들이대며 어디서 무얼 하며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 내 친구와 하늘나라에서 살고 있을 옆집 형을 생각했다. 그 모습을 매봉산 정상의 풍차들이 빙글거리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추전역을 떠나 두문동재를 향해 버스를 달렸다. 추전역 바로 위에 있는 두문동재는 해발 1268m의 고개다. 두문동이라. 이성계와 정도전에게 멸망한 고려의 충신들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고개 너머에는 낙동강 발원지 너덜샘이 기다리고 있다.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

낙동강 천삼백 리 길을 걷는다

2. 제1구간, 너덜샘에서 분천리까지

 낙동강과 한강의 발원지 태백
강원도의 힘이란 영화가 오래 전에 상영된 적이 있다. 그러나 정작 영화는 제목에 대한 어떤 힌트도 주지 않는다여기서 강원도는 도피처이거나 주인공들의 로맨스를 설명하기 위한 무대장치일 뿐이다. 이 영화를 감명 깊게 보긴 했지만, 제목과 줄거리가 이렇게 서로 어떤 영감도 주지 않는 영화도 별로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 영화로부터 강원도의 힘을 느꼈다고 하면 역설일까영화를 보는 내내 강원도의 힘을 찾던 나는 그러나 정말 강원도의 힘을 느꼈다. 어쩌면 강원도는 묵묵한 배경, 드러내지 않는 후원자 같은 존재이리라. 그래서 사람들은 평소에는 강원도의 존재를 깨닫지 못하다가도 삶이 피로해지거나 마음에 상처를 받았을 때 지친 몸을 이끌고 강원도를 찾는다.

이렇듯 사람들은 도시의 분주함에 시달리면서도 실은 고향을 그리듯 늘 강원도를 동경하는 것이다바로 여기에 강원도의 진정한 힘이 숨겨져있는 것은 아닐지, 생명의 원천 같은 것 말이다. 원래 강원도란 이름은 강릉과 원주의 머리글자를 합하여 만든 이름이다.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국한 태조는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각 도의 이름을 그 지방의 유력한 두 개 도시의 이름을 따 체제를 정비했다.

, 충청도는 충주와 청주, 경상도는 경주와 상주, 전라도는 전주와 나주, 황해도는 황주와 해주, 평안도는 평양과 안주, 함경도는 함흥과 길주(나중에 역모사건으로 길주가 강등되고 경성으로 바뀜)의 머리글자를 따 지은 것이다경기도란 이름만 유달리 왕성 주변에 수도운영에 필요한 물자와 노동력을 확보하고 수도방위를 위해 설치한 경기(京畿)에서 유래했다. 이때 도()란 길을 의미하는 것으로 강원도라 하면 ‘강릉과 원주방면으로 가는 길’로서 광역지방을 관할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강원도란 이름에서 이런 역사적 의미를 따지기보다 그 어감으로부터 전해오는 다른 것을 먼저 떠올린다. 바로 ‘강의 원천이요, 그리하여 생명의 근원’인 산이다. 강원도는 그야말로 산의 천지다. 백두산에서 뻗어내려 온 백두대간은 그 넓고 긴 등판을 강원도 땅에 기대고 누웠다. 여기에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두타산, 태백산이 백두대간의 허리를 지탱하는 요추처럼 자리를 틀고 앉았다그중에서도 태백산은 사람으로 말하자면 백두대간의 허리 중에서 요추와 천추가 맞닿는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다.

백두산으로부터 3천여 리를 내달려온 백두대간은 이곳 태백산에서 긴 여정의 응어리를 마음껏 풀어놓았다. 태백산은 경북 봉화군과 강원도 영월군·태백시의 경계에 위치한 해발 1567m로 높이 솟은 태백산맥의 주봉으로 주변에 함백산(1573m) 1000m급 이상의 고봉을 100여 개나 거느리고 있다.

고려의 승 일연은 “천제의 아들 환웅이 태백산 신당수에 내려와 신시를 열었는데 이것이 우리 민족의 기원이다”라고 삼국유사에 적어놓았다. 그러나 그 태백산이 백두산인지 묘향산인지 현재의 태백산인지는 알 길이 없다. 지금도 태백산 정상에는 천제단이 있어 매년 개천절이 되면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이 제천행사는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 의하면 부족국가시대부터 행해왔는데 신라와 고려, 조선을 거쳐 오늘에까지 이어오고 있다.

태백산은 비록 그 산세가 높고 험하기는 하나 완만하여 등산하기에 그리 부담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맑은 날이면 동해에서 떠오르는 일출이 장관이라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 봄에 피는 철쭉과 겨울에 피는 눈꽃이 절경이다. 정상부근에는 고사목과 주목 군락지가 있어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태백산은 참으로 신령스러운 산이면서 웅대하고 아름다운 산이다. 민족의 영산으로 숭상하는 이곳 태백산에서 생명의 근원 물길이 시작한다. 남한의 양대 강인 한강과 낙동강이 바로 이곳에서 발원하는 것이다.

태백 검룡소에서 발원한 한강은 도계와 정선을 지나 북으로 흐르다 서로 뻗어 경기평야를 일구었고, 너덜샘에서 발원한 낙동강은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며 경상도를 한 바퀴 휘돌아 안동분지와 대구분지, 김해평야를 일구어 생명의 젖줄이 되었다. 그리하여 본다면 환웅이 삼신(풍백, 우사, 운사)을 이끌고 내려와 널리 사람을 이롭게 했다는 전설의 신시가 바로 이곳이리라는 생각도 든다. 물길이야말로 생명이며 홍익인간의 근본이 아니겠는가.

새벽 두 시가 넘어 잠들었건만 눈을 뜨니 아직 채 여섯 시가 되지 않았다. 역시 산중에서 맞는 아침은 상쾌하다. 간밤의 숙취도 온데간데 없다. 7시10. 출발이다. 이제 드디어 낙동강 도보기행의 대장정에 오르는 것이다. 태백고원휴양림의 통나무집 아래로 아직 채 녹지 않은 눈과 얼음 사이에 차디찬 소리를 내며 계곡물이 흐르고 그 너머에 우리를 싣고 갈 버스가 시동을 켜놓은 채 기다리고 있다. 버스에 올랐다. 목적지는 낙동강의 발원지 너덜샘이다.       파비

동국여지승람에 낙동강은 태백산 황지에서 발원한다. 황지가 마르면 국난이 일어난다고 했다.

Posted by 파비 정부권

낙동강 천삼백 리 길을 걷는다

1. 낙동강의 고향, 태백산으로

세상엔 절대적 선도 절대적 악도 없다
오후 7, 구미종합터미널에도 서서히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다. 초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3분 안에 도착할 테니 터미널 옆 주유소 앞에 서있으란다.


잠시 후 낙동강 변 도로에 비상등을 깜박거리며 달려오는 카렌스 승용차가 보인다
. 이제 출발이다. 낙동강의 발원지 태백산으로 가는 것이다.


초석님은
<사단법인 우리땅걷기> 회원이다. 내일은 근무를 해야 하는 날이지만 치과의원 문도 닫고 오는 중이라고 했다. 대화를 통해 그가 신정일 선생의 열렬한 팬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신정일 선생 이야기만 나오면 입에 침이 마르는 줄 몰랐다.

 

주말엔 쉬어야지요. 우리나라도 대부분 주 5일 근무가 정착되어 가는데, 그래도 토요일 하루 쉬니까 간호사들은 좋아하겠네요?

, 좋아하지요. 그치만 돈이 안되잖아요. 주말만 되면 이러이 돌아댕기니 우리 마누란 별로 안 좋아해요.

 

자동차는 시원한 고속도로를 달려 금새 안동에 닿았다. 구미에서 안동까지 이렇게 가까운 거리였던가. 이미 세상은 칠흑 같은 어둠에 점령당해 있었다. 차는 도산서원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자면 안동시내를 지나가야만 한다. 시내를 가로지르는 낙동강 다리를 건넜다.

 

강은 저 아래 어둠 속에 그 모습을 감추고 있다. 그러나 제아무리 어둠이 빛을 가린들 도도하게 흐르는 낙동강의 기질마저 감출 수는 없는 일이다. 어둠보다 더 짙은 검은 물줄기가 대지를 어루만지며 흘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시내에 들어서자 도로변을 밝히는 불빛들이 여느 도시와 다르지 않다. , 그런데 신호등들이 모두 황색점등 일색이다. 깜박거리는 노란색 신호등 아래로 차들은 잘도 지나다닌다. 초석님은 별일 아니라는 듯 익숙한 솜씨다. ~ 조수석에 뻗은 두 다리에 쥐가 날 것 같다.

 

다시 어둠에 점령당한 시골길을 달린다. 지금 우리가 가는 목적지는 농암종택(조선 중기 문신 농암 이현보의 종가)이다. 그곳에 <낙동강역사문화탐사>의 저자 신정일 선생이 기다리고 있다. 그는 그곳에서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일행들의 낙동강답사(안동지역)에 강연을 한다고 했다.

농암종택의 주인이 살고 있는 안채. 안동댐에 수몰되면서 옮겨온 이곳이 아직도 안정이 덜 된 듯했다.

이미 시간은 9를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초석님은 걱정이 되는 듯 신정일 선생에게 연신 전화를 걸어 조금 늦으니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부탁했다. , 이거 선생님 추운데 많이 기다리시겠네. 에이, 농암종택 거 군불도 뜨끈뜨끈하게 때 놓았을 텐데 방안에 가만 계시면 되지 뭐. 혼자서 중얼거리며 달리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다.

 

그러더니 깜깜한 시골길에 길을 잘못 들고 말았다. 이 길을 제집 드나들 듯 했을 초석님도 시간에 마음을 빼앗겼던지 길을 잃고 말았다. 깜깜한 비포장 길을 계속 달리다 보니 경운기 한대도 겨우 지나갈 것처럼 길이 좁아지기 시작한다.

 

결국 한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어디가 어디인지도 모를 곳에서 우리는 어렵사리 차를 돌렸다. 다시 되돌아 나와 국도변에서 보니 농암각자(聾巖刻字)라고 쓰여진 커다란 바위가 보인다. 그걸 보고 잘못 길을 들은 것이었다.

 

, 저걸 보고 헷갈렸네. 길도 진짜 비슷하게 생겼습디더. 그래도 좋은 거 하나 알았네요. 저 안에 어디 농암각자가 있는 모양인데 다음에 꼭 한 번 와봐야겠심더. 초석님의 사투리는 속된 말로 완전 오리지널이다. 의사보다는 농군 냄새가 더 물씬한 것이 정겹다.

 

다시 1Km쯤 더 내려오니 이번엔 진짜 농암종택이라고 쓴 이정표가 보인다. 오른쪽으로 꺾어 드니 정말 아까 잘못 들었던 길과 생김새가 비슷하다. 한참을 달리니 낙동강이 보인다. 낙동강 변을 달리는데 낭떠러지 아래 물살이 제법 세다. 어둠보다 더 짙은 검은 물결이 무섭기까지 하다.

 

드디어 농암종택 도착. 대문 앞 공터에는 관광버스와 수십 대의 승용차가 번쩍거리고 있었다. 최신형 제네시스도 보이고 대체로 고급차들이다. , 그러고 보니 오면서 들은 대로 이곳에는 7명의 환노위 국회의원들과 봉화군수와 안동시장이 있을 터였다. 그리고 수행원들도.

 

이분들은 오늘 안동과 봉화 일원의 낙동강을 직접 발로 걷고 느꼈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 강문화 전도사 신정일 선생으로부터 훌륭한 강연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분들은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결심했을까? 글쎄 그게 가장 궁금했지만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강연도 모두 끝나고 왁자지껄한 담소 소리가 담장을 넘어왔다. 고색창연한 고가의 적막을 기대했지만 부질없는 바람이었다. 이미 국회의원들과 이 고을 수령들과 수행원들이 모여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런 기대는 애초부터 말았어야 했다.

 

바깥채에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 앞으로 낙동강이 흐른다. 하늘의 별이 유난히 맑게 빛났다.

대신 하늘에는 별이 총총 떠 있었다. 검은 어둠 위에 하늘은 더없이 푸르렀다. 맑은 대낮에 보는 하늘보다 더 푸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하늘은 머리 위에 쏟아질 듯 지척에다 별들을 매달고 있었다. 반짝거리는 별들이 더없이 하얗게 빛난다.

 

사랑채와 긍구당(肯構堂)등을 둘러본 다음 이 저택의 주인이 살고 있는 안채로 가보았다. 안채는 대청에 매달린 불빛만이 사람이 산다는 것을 증거할 뿐 조용하다. 서울에서 온 귀한 손님들을 위해 그저 묵묵히 안방만 지키기로 한 것일까.


다시 사랑채 마당으로 나오니 신정일 선생이
MBC 카메라 앞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나름대로
찬스다! 싶어 얼른 카메라를 들이댔다. 항상 자동모드만 고집하는 내 카메라는 번쩍 플래시를 터트렸다. 카메라 기자가 움찔하며 손을 들어 제지하며 당황한다.

 

이런, 이럴 때 플래시를 꺼야 하는데 할 수 없지. 이미 지나 간 일. 나 때문에 텔레비전에서 인터뷰 하던 얼굴에 갑자기 하얀 불빛이 지나가면 민망하고 미안해서 어쩌지? 초석님이 옆에서 훈수를 둔다.

 

이런 데는 플래시 터트리면 안됩니더. 오토에다 놓지 말고요. 항상 플래시발광금지 모드에다 놔 두이소. 사람들이 잘 모르고 무조건 오토에다 놔 두거든예~. 그런데 플래시발광금지가 오토하고 똑같심니더. 플래시만 안 터진다 뿐이지요.

 

태백산으로 올라가는 차 안에서 신정일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절대적인 선도, 절대적인 악도 없는 것이여.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서 낙동강 살리기다 운하다 말들이 많은데, 물론 나는 대운하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어쨌거나 요즘처럼 낙동강에 많은 관심을 보인 시절이 어디 있었나? 그러니까 절대적인 악이란 것도 없다는 말이 맞는 말이제. 

 

그러고 보니 낙동강이 오늘날처럼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적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랬다. 매년 6월 깨나 ‘낙동강전선’이란 피어린 이름으로 우리에게 기억되었을 뿐 낙동강을 낙동강으로 살펴준 적이 제대로 있었던가.

 

그래, 그럴지도 모른다. 절대적인 악이란 것도 절대적인 선이란 것도 없다는 그 말.  나는 철학적 심오함이 숨겨진 듯한 그 말의 깊은 뜻을 아직은 완전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낙동강과 함께 길을 걸으며 서서히 그 뜻을 헤아리게 될 것이다. 멀리 철암역의 불빛이 보인다.

 

쓸쓸한 적막 속에 아스라히 빛나는 역사의 불빛. 언젠가 읽었던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 느낄 수 있는 불빛이 아마 저런 것이었으리라.       파비

 

사평역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낮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Posted by 파비 정부권

 

낙동강 천삼백 리 길을 걷는다

1. 낙동강의 고향, 태백산으로

 터미널에서 만난 간판속 비키니 아가씨들
낙동강 천삼백 리 도보기행에 참여하기 위해 먼저 구미에 들렀다. 여기서 <우리땅걷기> 회원인 초석님을 만나 함께 차를 타고 태백으로 향할 것이다. 일찍 서둘러 마산시외버스터미널에서 구미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는 새로 난 중부내륙고속도로를 시원하게 달렸다
. 성주IC를 빠져 나와 구미 방향으로 접어들자 오른편으로 드넓은 모래사장을 적시며 흐르는 강줄기가 보인다. 바로 낙동강이다. 감동이 밀려온다. , 언제쯤이면 우리는 이곳에 다다를 수 있을까.


구미종합터미널에 도착하니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았다
. 먼저 육개장으로 허기진 창자부터 달랬다. 그러고도 한 시간 반이 남았다. 어떻게 시간을 보내지? 생각하다 터미널 주변을 걸어서 구경하기로 했다.

 

터미널 바로 앞 도로에서 횡단보도를 건넜다. 그러자 끝도 보이지 않는 기다란 골목이 나타났다. 아마도 상업지역인 듯싶다. 그 골목길을 터덜거리며 걸었다. ? 그런데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큰 상권에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를 않다니 .

 

그런데 어느 순간 불현듯 좌우를 둘러본 나는 깜짝 놀랐다. 온통 벌거벗은 아가씨들이 건물 벽에서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아니 그냥 웃는 것이 아니라 유혹하고 있었다. 세상에…, 이곳은 유흥가였다.

골목길은 재어보지는 않았지만 수백 미터는 족히 넘을 성싶었다. 그리고 이런 거대한 골목길이 아래위로 서너 개가 더 있었고 바둑판처럼 이어져 있었다. 내가 너무 좁은 세상에서만 살다 온 것일까? 왜 나는 그 동안 이렇게 차려진 골목을 보지 못했던 것일까?

 

물론 마산이나 창원에도 유흥가는 존재한다. 인구 백만에 달하는 도시가 아무래도 구미에 비해 유흥산업이 뒤떨어질 리도 없을 것이다창원은 밤이면 불야성이 따로 없다. 서울사람들도 강남에 비해 쳐지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이니….

 

그런데도 나는 이런 곳은 처음이다. 끝도 없이 펼쳐진 환락의 거리 양 옆 대형간판에 비키니를 입고 뭇 사내들을 유혹하는 이렇듯 자극적인 거리는 실로 처음이다. 곧 땅거미가 지면 반짝이는 불빛과 더불어 사람의 숲으로 흥청거리게 될 터이다. 괜스레 이 길을 걷는 내가 민망스럽다.

 

문득 카메라 생각이 났다. 낙동강 기행을 위해 장만한지 오래지 않은 윤이 반지르르 흐르는 캐논450을 꺼내 들었다. 아직 조작이 서툴러 그냥 자동모드만 사용한다. 여기저기 셔터를 눌렀다. 저쪽 골목 각지에 위치한 24 슈퍼에서 아저씨가 나를 보며 빙긋이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할까? 혹시 감찰 나온 공무원? 그러나 등에 배낭을 매고있는 모습을 보고 그렇게 생각할리는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다시 터미널 앞으로 돌아왔다. 터미널 입구에서는 한 명의 거지가 구걸을 하고 있었다. 그는 말이 자유롭지 않은 지체장애자인 듯싶었다. 그는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바람 부는 터미널 입구에서 손을 벌리고 발음도 정확하지 않은 말투로 간절하게 흐느끼듯 말했다.

 

배거~ 언 만 배거~ ~ 언 만…”

 

그러나 백 원만을 간절하게 속삭이는 그의 부르튼 손에 쥐어지는 백 원짜리는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너무 바빴다. 분주한 행인들에게 부정확한 발음에다 흐느끼듯 속삭이는 힘없는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을 것 같았다.  

 

예로부터 선산은 선비의 고장이다. 중환이 택리지에서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서 나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서 난다!고 갈파한 바로 그곳이다. 선산군 구미면이었던 이곳은 국가산업단지로 개발되면서 구미시가 되고 선산은 이제 구미시의 일개 읍으로 전락했다.  

 

택리지가 극찬한 영남일선(嶺南一善) 선산은 이렇게 사라져 가는 것인가. 이리하여 멀리서 찾아온 객을 맞는 것은 선비들의 옹골찬 숨결 대신 얼굴에 한없이 미소를 머금은 비키니 입은 아가씨들이다.  

 

그러나 수백 리를 흘러온 낙동강은 여전히 선산을 휘감아 돌아가며 그 유장함을 뽐내고 있다. 자본주의의 밤 물결이 제 아무리 휘황한들 억만년을 지칠 줄 모르고 흘러온 낙동강에 견줄까. 낙동강은 이렇게 말하리라.

 

너희들의 노래도 단지 한때일 뿐이다. 너희들이 제아무리 교만을 떨어도 곧 세월에 정복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너희들은 모두 나에게로 올 것이다. 나는 너희들이 갖고 오는 온갖 더러운 것도 다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니 일찌감치 얄팍한 생각일랑 버리고 빨리 와서 나와 같이 생명의 찬가를 부르자.”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

"낙동강 천삼백 리를 걷는다" 도보기행을 떠나 강원도 태백과 경북 봉화의 산골오지를 걷다 보니 인터넷이나 신문을 볼 기회가 전혀 없었는데, 제1구간 기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떠나기 전 제 블로그에 써두었던 글이 경남도민일보에 실렸군요. 그런데 그만 중대한 실수 하나를 하고 말았습니다. 유로연장 기준으로 남한에서는 낙동강이 가장 긴 강인데 한강이 가장 길고 낙동강이 두 번째라고 해놓았던 것입니다.

낙동강 발원지 황지(역사적 발원지이고, 실제 최장발원지는 10여 킬로 위에 있는 너덜샘)에서 안내도반이신 신정일 선생으로부터 낙동강에 대한 설명을 듣다가 아차 했습니다. 우리나라 전체로 따지면 압록강, 두만강에 이어 세 번째로 긴 강이지만, 남한에서만 따지면 가장 긴 강이었거든요. 우리나라의 4대강은 압록강, 두만강, 낙동강, 한강이며 길이도 써놓은 순서대로입니다. 본의 아니게 한국 제1의 강 낙동강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앞으로는 아무리 개인 블로그라 해도 신중하게 조사하고 검토하는 자세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울러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게 된 점에 대하여 매우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래 글은 "낙동강 천삼백 리를 걷는다" 제1구간에 참여하고 난 이후 <사단법인 우리땅걷기> 까페에 올린 글입니다.           파비

존경하는 신정일 선생님과 함께했던 시간들, 영광이었습니다. 다정다감이 넘쳐나는 <우리땅걷기> 회원님들과 함께 걸었던 낙동강 제1구간,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눈보라가 뺨을 적시던 아름다운 석포리 물길, 꿈결 같은 승부역, 두려움과 설레임으로 울렁거리는 가슴을 안고 걸었던 가막굴, 승부역에서 양원역까지 환상적인 철길여행, 즐거웠습니다.

 

아직 그 감동이 가슴속에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사진 속에서 영원한 추억으로 남겠지요. 사진을 무려 7백 장이나 찍었답니다. 그러나 쓸만한 사진은 거의 하나도 건지지 못했습니다. 낙동강을 위해 똑딱이캐논450으로 업그레이드 했건만, 역시 제게는 똑딱이가 어울리나 봅니다. , 그리고 DSLR은 배보다 배꼽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도 이제서야 깨달았습니다.

 

구미에서 치과를 운영하시는 초석님. 정말 고맙습니다. 초석님이 아니었던들 멀고 험한 태백산을 어찌 올랐겠습니까. 초석님이 아니었던들 오늘 이 영광과 행복과 즐거움은 그저 몽상 속에서나 가능했을 터이지요. 초석님은 훌륭한 치과의사 선생님임에 틀림없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 환자들 이 뽑을 때도 절대 안 아프게 해주시겠지요? 하하.

집으로 돌아오니 제가 올라가기 전 써놓았던 글이 우리 동네 지역신문에 실렸군요. 그저 답사를 떠나기 전 감상문을 블로그에 올려놓았는데, 저와 친분이 있는 신문사 기자님이 보시고 실어주셨네요. 제겐 고마운 일이긴 하지만 혹시나 우리땅걷기와 신정일 선생님께 폐가 되지나 않았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황지에서 신정일 선생님으로부터 설명을 듣던 중 낙동강이 가장 길다는 말씀을 듣고 아차! 했답니다낙동강 천삼백 리 도보기행에 참여하며」 에는 한강에 이어 낙동강이 두 번째로 길다고 써놓았거든요. 이런 실수를 하다니….

 

환상적인 낙동강 길을 걸으면서도 내내 찜찜한 마음을 털어낼 수 없었습니다. 첩첩 산골에 PC방이 있을 턱도 없으니 수정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더니 결국 일이 터졌습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김기자로부터 글 좀 쓸게요! 하는 간단한 문자가 온 것입니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그 시간이면 벌써 인쇄가 들어갔을 테니까요.

 

본의 아니게 낙동강의 명예를 훼손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보다 주의를 기울여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리저리 살펴보니 낙동강과 한강의 길이(유로연장), 넓이(유역면적), 유량 등에 대하여 발표하는 주체들마다 차이가 있군요. 어느 걸 기준으로 삼아 야할지 매우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참 멍청한(!) 회원이지요? 매우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이곳 경남지역은 요즘 4대강 살리기와 연계한 지리산 댐 공사 문제로 시끄럽답니다. 정부와 4대강 살리기를 추진하는 측에서는 낙동강은 이미 죽었으므로 강 살리기 공사를 해야 하고 더불어 부산, 대구지역 주민들에게 깨끗한 식수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낙동강 취수원을 지리산 댐을 만들어 옮겨야 한다고 하더군요.

 

글쎄요. 무슨 말인지 제 머리로는 아직 이해가 잘 안될뿐더러 불쑥 이런 궁금증마저 듭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죽은 낙동강 물을 우리에게 먹였단 말인가? 그리고 낙동강은 도대체 누가 죽였을까? 언제 어떻게 죽었을까? 그리고 돈을 위해 개발을 일삼는 사람들에게 낙동강을 맡겨두면 낙동강을 친환경적으로 살린다는 게 정말일까?

 

한쪽에선 낙동강은 이미 죽었다!고 하고 반대편에서는 아니다. 낙동강은 아직 살아있다!고 주장합니다. 죽었다는 쪽은 정부와 개발업자이고 살아있다는 쪽은 강을 보호하고 살려야 한다던 환경단체들입니다. 제 눈엔 이 어처구니없는 공방이 미련하기 그지없어 보입니다. 세상에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이러한 때에 낙동강을 직접 걸어보는 것이야말로 답을 구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다시 한번 저에게 길을 허락하신 우리땅걷기와 신정일 선생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마지막 구간까지 단 한차례도 빠지지 않고 완주할 수 있도록, 그리하여 「사단법인 우리땅걷기」에서 수여하는 인증서를 받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 노력의 첫 번째가 댓글을 빨리 다는 것이더군요. ㅎㅎ
(주; 신청경쟁이 치열해 참가댓글을 빨리 달아야 함)

 

걷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Posted by 파비 정부권

낙동강 천삼백 리 도보기행을 시작하며


이 정부가 낙동강을 살리겠다며 파헤치겠다 합니다. 멀쩡한 강을 파헤치면 다시 살아나는 것인지도 의문이지만 그 의도가 심히 수상쩍습니다. 최근 10, 20년 동안 꾸준하게 진행돼온 환경운동단체들과 뜻있는 주민들의 노력 덕분에 죽어가던 한국의 강과 산과 바다는 생기를 많이 되찾았습니다.  

 

당장 우리동네만 해도 그렇습니다. 썩은 냄새가 진동하던 봉암갯벌에서 다시 조개가 잡힌다고 합니다. 마산만이 아직은 그 오염도가 심각한 지경을 완전히 벗어났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10년 전에 비해 괄목상대할 만하다고는 말할 수 있다는 데 별다른 이의가 없을 줄로 압니다.  

 

십 수 년 전만 해도 마산에서 승용차를 타고 창원공단으로 출근할라치면 수출정문 해안도로를 지날 때는 아무리 더운 여름철이라도 반드시 창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창문을 열고 해안도로를 달려도 예전처럼 머리가 빠개질 듯한 냄새가 달려드는 일은 없습니다.

 

이렇게 강과 산과 바다가 서서히 그 생기를 되찾고 있음에도 갑자기 강이 죽었다며 장례를 치러야 한다고 호들갑을 떠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말은 4대강 살리기지만 그건 허울이고 강을 파헤쳐 완전히 죽인 다음 자기들이 생각하는 새로운 강 즉, 운하를 만들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경우엔 ‘수술’이 아니라 ‘장례’라고 해야 올바른 어법이라고 보아집니다.  

 

아직도 우리의 강과 산과 바다는 더 많은 관심과 사랑으로 보살핌을 받아야 하지만 작금의 이 기괴한 현상들은 우리땅을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환경운동가들로 하여금 우리나라 강은 너무나 깨끗하다!고 강변하는 아이러니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참으로 역설 중의 역설입니다.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최고의 비경 상주 경천대. 이미지=상주경천대 홈페이지


낙동강은 한강과 더불어 한국을 대표하는 강입니다. 남북을 합치면 압록강이 가장 길지만, 남한만 따진다면 한강이 497.25km 낙동강이 513.5km로 남한에서 가장 긴 강입니다. 경상도를 남북으로 길게 가로지르는 낙동강은 다른 지방의 강들과 다르게 주변의 모든 강들이 한줄기로 모여듭니다. 

 

특히 전라도의 강들이 서해와 남해로 각자 제 갈 길로 흩어지는 것과 달리 경상도의 강들은 모두 낙동강으로 모여들어 하나의 줄기를 만들어 남해로 흘러갑니다. 이것을 빗대어 호사가들은 전라도의 풍토가 자유분방하며 창조적인 반면 경상도는 일사분란하고 충성심이 강하다는 말로 비교하기도 합니다.

 

낙동강은 신라 이래로 ‘황산진’ 또는 ‘견탄’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던 것이 조선 초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에서는 ‘낙동강’ 또는 ‘낙수’라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때부터 낙동강은 현재의 이름을 갖게 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낙동강이란 이름의 유래에 대하여 최근에는 가야(가락국)의 동쪽을 흐르는 강에서 따왔다는 설을 많이 믿는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엔 최근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가야에 대한 관심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다산 약용도 낙동강의 지명에 대해 가야(가락국)의 동쪽을 흐른다 하여 예로부터 낙동강이라 불렀다고 자신의 저서에서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동국여지승람이나 연려실기술, 택리지에서는 모두 다른 유래를 이야기합니다.

 

예로부터 상주를 낙양이라고 불렀으며 낙양의 동쪽을 낙동, 서쪽을 낙서, 북쪽을 낙원 또는 낙상, 남쪽은 낙평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상주에 가면 이런 지명들이 그대로 존재합니다. 또 낙동강은 상주 즉, 낙양으로부터 동쪽 30여 리 밖에 있다고 동국여지승람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낙동강백 리 뱃길’이라고 할 때 그 기산점은 바로 상주의 낙동나루입니다. 이처럼 낙동강의 유래에 대하여 여러 기록들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고찰해 볼 때 최근 힘을 얻고 있는 가야의 동쪽을 흐르는 강보다는 상주 즉, 낙양의 동쪽을 흐르는 강이란 설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낙동강은 천삼백 리를 굽이쳐 흐르는 곳곳에 조상들의 숨결을 묻어놓았습니다. 봉화와 안동을 지나는 곳에 무릉도인 주세붕과 청량산인 이황으로 하여금 사림의 토대를 닦도록 했으며 상주에 닿아 드넓은 곡창지대를 펼쳐놓았고 선산에 이르러서는 조선 최대의 인재를 배출했습니다. 택리지에서도 조선 인재의 반은 선산(오늘날 구미)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대구를 지나 창원에 이르러 지리산을 휘돌아온 남강과 힘을 합치고 밀양을 거쳐 김해에 다다라 다시금 드넓은 들을 일구어낸 다음 유유히 바다에 몸을 섞습니다. 낙동강은 창녕을 거치면서부터 주변에 여러 개의 습지를 흩어놓아 생명의 보고를 만들기도 합니다. 소벌(우포늪)과 주남저수지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명체들과 철새들이 생명을 노래합니다. 낙동강은 단순한 강이 아니라 역사의 숨결이고 생명의 보고인 것입니다.
 
이 정부가 어떻게든 낙동강을 파헤쳐 대운하를 만들어보겠다는 야심을 멈추지 않는 속내를 공군전투기의 비행까지 방해해가면서 제2롯데월드를 허가한 정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앞서 세 명의 대통령이 15년 간이나 이어진 롯데측의 끈질긴 로비에도 불구하고 “NO!” 한 사안이 하루아침에 “YES!”로 바뀌는 것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토록 국가안보를 외치며 애국자연하던 수구보수인사들은 한마디 말도 없습니다. 

이 돌연한 안보위기(?) 상황에서도 불붙은 가스통을 짊어진 HID도 없고 자유총연맹도 없으며 구국의 기독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희한한 일입니다. 돈을 위해서라면 공산주의도 팔아먹는다는 자본의 위력이 실로 경천동지할 만합니다. 그 자본가의 대표적 인물이 대통령 자리에 앉았으니 누가 감히 대적을 하겠습니까? 이제 바야흐로 이윤추구에 어떤 장애도 이적행위가 되는 시대가 온 듯합니다. 

이러한 때에 어쩌면 다시는 보지 못할 낙동강의 모습을 가슴에 담아두기 위해 태백에서 부산까지 순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예 답사가 아니라 순례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 위한 방법을 여러모로 알아보던 중에 <사단법인 우리땅 걷기(대표 신정일)>라는 곳에서 태백 너덜샘에서 부산 을숙도까지 낙동강 걷기탐사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기쁜 마음으로 당장 회원가입을 하고 탐사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제1구간을 답사하기 위해 떠납니다. 

<우리땅 걷기> 카페의 낙동강 도보기행 안내문에는 다음과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강 정비다, 운하다 말이 많습니다.  두 눈으로 보고, 두 발로 느낄 수 있는 낙동강 걷기에 많은 참여 바랍니다.”        파비

※ 제1구간은 낙동강 발원지 태백 너덜샘(황지보다 10여 킬로 위에 있다 함)에서 봉화 청량산 언저리까지가 될 거 같습니다. 중간에 승부터널(봉화군 석포면 승부리, 이곳 사람들은 가막굴이라고 함)이 있는데 이곳을 직접 통과할런지도 모르겠군요. 신정일 선생의 <낙동강역사문화탐사>에 보면 ‘까마득히 보이는 희미한 작은 점 하나를 쫓아 터널을 통과하는 살 떨리는 기분’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승부터널(가막굴)을 넘어 낙동강을 따라갔으면 좋으련만… 혹덩이들을 안고 그리로 가려고 하진 않겠지요. 이제 글도 올렸으니 봇짐 메고 떠납니다요.

ps; 낙동강 총연장이 513.5km, 한강이 497.25km로 낙동강이 남한에서는 가장 긴 강입니다.(브리태니커 사전) 우리나라 전체(한반도)를 따지면 압록강 두만강에 이어 세 번째로 긴 강이며 한강은 네 번째로 긴 강입니다. 그래서 위 경천대 사진 아래 첫 번째 문장 <한강에 이어  가장 긴 낙동강>을 <남한에서 가장 긴 강>으로 정정했습니다. 중대한 착오가 있었습니다. 확실히 확인해보지 않고 기술한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아무리 개인 블로그라도 조사, 확인하는 습관을 들여야한다는 경험으로 삼겠습니다.  

ps2; 정확한 유로연장(길이)에 대해 발표주체들마다 조금씩 다르게 나옵니다. 확인이 필요할 듯하고요. 어떻든 남한에서는 낙동강이 가장 긴 강입니다. 유량은 한강이 가장 많다고 하는군요.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쳐지는 이유인 듯합니다.   

Posted by 파비 정부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