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에 해당되는 글 29건

  1. 2012.10.15 박근혜는 부마항쟁 군사진압 사과부터 해야 by 파비 정부권
  2. 2012.03.12 마산회원 후보들, 인터넷포스는 하귀남이 최고 by 파비 정부권 (4)
  3. 2012.01.14 목포 횟집과 마산 횟집, 상다리 비교 by 파비 정부권 (54)
  4. 2011.12.06 마산서 부마항쟁보다 앞선 항쟁모의 있었다 by 파비 정부권 (2)
  5. 2011.11.30 눈물의 기록, '마산, 다시 한국역사를 바꾸다' by 파비 정부권 (3)
  6. 2011.11.01 청도를 보니 갑자기 마산이 걱정된다 by 파비 정부권 (14)
  7. 2010.10.28 문성근 보러갔다 만난 호소 "타매장에서 절 죽이려 해요" by 파비 정부권 (1)
  8. 2010.07.21 해양도시 마산에 왜 바다가 없어? by 파비 정부권
  9. 2010.05.16 도로공사로 어차피 병신산, 골프장 짓겠다고? by 파비 정부권 (3)
  10. 2010.05.15 삼진ㆍ구산면 지역에서 만난 선거 민심 by 파비 정부권 (6)
  11. 2010.05.04 시골마당에서 여는 신선한 선거대책회의 by 파비 정부권 (2)
  12. 2010.04.20 STX가 단기간에 돈을 많이 번 비결? by 파비 정부권 (10)
  13. 2010.04.18 4.19혁명 50주년 드라마 '누나의 3월', 꼭 보자 by 파비 정부권 (2)
  14. 2010.03.11 폭설에 묻힌 춘삼월 만날재의 하얀 사진들 by 파비 정부권 (2)
  15. 2010.02.10 '더불사' 데모 좀 안하고 생업에 종사하게 해다오! by 파비 정부권 (1)
  16. 2009.12.14 국감에 허위문서제출 마산시장, 월드베스트사기꾼? by 파비 정부권 (3)
  17. 2009.11.26 명태찜에 동동주가 맛있는 정자나무집 by 파비 정부권 (20)
  18. 2009.11.14 아들과 올라간 장복산, 감동적 일몰과 비극적 결말 by 파비 정부권 (8)
  19. 2009.10.18 49년만의 민간인학살위령제, 마산시장은 왜 안 오나 by 파비 정부권 (14)
  20. 2009.08.17 공장옆 하천에서 즐기는 피서, 재미있을까? by 파비 정부권 (12)
  21. 2009.08.10 미천마을 산골축제, 마산에도 달이 뜬다 by 파비 정부권 (19)
  22. 2009.07.02 공무원이 주민들에게 뿔난 사연, "에이 분위기 안 좋네" by 파비 정부권 (16)
  23. 2009.02.14 아들들은 모두 배신자란 사실을 봄바람에 느끼다 by 파비 정부권 (5)
  24. 2008.12.14 이선관, "초지일관 말하면 조지일관 알아듣고" by 파비 정부권 (5)
  25. 2008.12.05 눈 내리는 슬픈 날 by 파비 정부권 (2)
  26. 2008.10.31 가고파 국화축제에 대한 커다란 오해 by 파비 정부권 (26)
  27. 2008.10.27 10·26의 추억, 부마항쟁과 유신의 종말 by 파비 정부권 (5)
  28. 2008.09.16 목포는 항구다, 마산도 항구냐? by 파비 정부권 (7)
  29. 2008.09.11 STX와 경남대, 좋은 일 하는 김에 제대로 합시다 by 파비 정부권 (3)

박근혜 후보는 부마민주항쟁 군사진압에 대한 사과와

진상규명 등의 요구에 대한 응답부터 하라

박근혜 후보진영에서 ‘부마민주항쟁기념식은 국민대통합 차원에서 박 후보가 꼭 가야 한다’는 입장이라 한다. 그리고 이번 주 중 ‘경남을 찾아 부마민주항쟁기념식에 참석할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고 14일 보도되고 있다.

먼저, 본회는 18일 창원시 마산의 부마민주항쟁기념식에 박근혜 후보는 물론 어느 대선 후보도 초청한 사실이 없음을 밝힌다. 과거사위원회의 결정에 의하면 박 후보는 부마항쟁 관련 국가 폭력 및 인권침해의 가해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33년간 역사적 재평가와 진상규명이라는 요구를 외면해 왔고, ‘부마민주항쟁’ 언급조차 없었으며, 사과 한 마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기념사업회가 박 후보를 먼저 초청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상도 할 수 없는 쓸개 빠진 일이다. 박근혜 후보가 먼저 대선후보라는 권위를 내세워 기념식에 참석 하겠다면, 이는 정치도의나 인간에 대한 예의에 크게 벗어남을 분명히 밝힌다.

15일 박근혜 후보가 새누리당 경남선대본부 출범을 위해 마산에 온다고 한다. 박 후보는 그간 여러 차례 우리가 요구한 바에 대해 먼저 답부터 해야 한다. 우리의 요구를 다시 간추리면 박정희 정권의 ‘반국가적 부마 폭도 난동’ 규정과 이에 대한 합법적, 불법적 군사진압이 잘못이라는 것, 반유신 부마항쟁이 헌법적 가치 회복을 위한 주권자의 정당한 민주화 운동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부마항쟁 진압과 수사 과정의 사망, 인권유린에 대한 정중한 사과와 이에 대한 책임을 표명하는 것, 이후 후속 조치로 부마항쟁 관련 전면적 진상규명과 부산·마산시민 명예회복, 배상과 예우 등에 대한 제도적 입법 조치 등이다.

참고로 사업회는 해마다 기념식을 하면서 정당을 불문하고 경남도지사, 도의회 의장/의원, 창원시장·의회의장/의원과 지역구 국회의원 등 선출직 대표들을 초청해 왔다. 지난 해 마산지역 한나라당 국회의원과 야당 국회의원들의 부마항쟁특별법 발의에 호응하여 한나라당 경남도의원들이 부마항쟁특별법 통과촉구 결의안을 채택했지만 한나라당은 이를 부결한 바 있으며 올해 다시 재발의 추진 중이다.

2012년 10월 14일

(사)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 부마항쟁기념사업회에서 보내온 성명서 전문입니다. 저는 부마기념사업회 회원은 아니지만(그 당시 중학생이었음), 성명서 전문에 깊이 공감하는 바라 여기 게재합니다. 

Posted by 파비 정부권

지난 3월 6일 경남도민일보 3층 강당에서 열린 야권후보 블로거합동인터뷰. 보는 이들의 눈은 대체로 비슷했습니다. 이날 토론회에서 단연 최강의 포스를 자랑한 것은 진보신당 송정문 후보였습니다. 다른 블로거들도 대체로 그렇게 보았던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인터넷에서 가장 강한 포스를 뽐내고 있는 것은 누구일까요? 민주통합당 하귀남 후보입니다. 그는 일면식도 없는 제게도 꾸준하게 이메일통신을 통해 선거운동정보를 보내왔습니다. 매우 깔끔하게 잘 만들었더군요.

우리끼리 하는 말로 “성의가 괘씸해서”라는 말이 있는데 정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의가 가상해서라도 꼭 밀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거기는 제 구역이 아닙니다. 저는 합포구거든요.

▲ 제게 매주 오는 한주간 하귀남의 선거운동정보 중 일부를 캡쳐한 것입니다.

그런데 합포구에는 제게 이런 거 보내는 사람 아무도 없답니다. 어쩌면 합포구의 후보들은 이렇게 첨단을 달리는 선거운동보다는 전통적인 방식을 선호하는 것일까요? 이런 따위의 인터넷 선거운동은 불필요하고 시간낭비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아무튼,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하귀남 후보가 더 신선하고 매력적인 후보라고 생각되는군요. 그렇지만 6일 합동인터뷰에서 저는 하귀남 후보 참모 때문에 살짝 기분이 안 좋기도 했었답니다. 사건의 개요는 이랬습니다.

마침 그날 볼펜으로 메모하기도 귀찮은데다 노트북도 안 들고 가서 어찌할까 고민하다 스마트폰으로 동영상녹화를 하기로 했습니다. 도민일보 노조사무실에서 커피믹스(녹차?) 상자를 빌려 그 위에 스마트폰을 스카치테이프로 감아 즉석에서 캠코더를 만들었습니다.

▲ 사진= 경남도민일보 박일호 기자

당연히 그날의 히트상품이 됐겠죠. 이 모양은 다음날 경남도민일보 1면을 장식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하 후보 참모 한분도 잽싸게 이를 모방하여 스마트폰 캠코더를 만들었습니다. 청테이프를 활용해 그 위에다 스마트폰을 스카치테이프로 고정시켰더군요.

그리고는 맨 앞자리에 앉아있는 제 옆에 끼어들어서는 촬영하기 좋은 위치를 잡는다고 제 스마트폰 캠코더를 슬쩍 치는 것이었습니다(물론 본인은 전혀 몰랐겠지요). 그 바람에 성능 안 좋은 제 스마트폰은 동영상 촬영모드가 꺼지고 말았던 거지요. 짜증.

하지만 그렇다고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좀 짜증난다는 눈치를 주었지만 이분은 자기 일에만 열중하느라 제가 왜 그러는지 이해를 못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다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다 하던 그는 결국 사회자의 제지로 쫓겨났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는 인터뷰를 하는 블로거들만 앉도록 만들어놓은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각 후보 소속정당의 당직자나 다른 방청객들은 뒤쪽에 따로 자리를 만들어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리 이런 돌발적인 상황을 예측하고 그랬던 것이지요.

당시에는 좀 기분이 나빴지만(물론 그렇다는 내색은 하지 않았습니다) 지나고 보니 하귀남 후보 입장에서는 매우 흐뭇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아이디어를 발견하자마자 곧바로 써먹는 순발력과 저돌적인 추진력. 아주 훌륭했습니다.

게다가 이분은 이 스마트폰 캠코더로 인터넷 생중계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충성심이 너무 강해서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좀 부족한 것이 아쉽긴 했지만(합동인터뷰 사회자나 블로거들도 이분에겐 관심밖이었던 듯) 그래도 뭐 어떻습니까?

나중에 맨 뒤에서 진짜 영상촬영 장비를 가지고 현장을 녹화하고 있던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역시 하귀남 후보 측에서 나온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제게 날아온 <하귀남의 한 주간 선거운동정보>에는 그날 촬영한 동영상과 사진들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친절하게도 more(위 사진 하귀남의 선거일기 오른쪽 노란 버튼)을 누르면 바로 하귀남 블로그로 들어가 동영상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놓았더군요. 이외에도 소개할 내용이 많겠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인터넷포스 최강은 하귀남 후보라는데 동의하지 못하실 분 없으시겠지요?

인터넷을 이 정도로 선거운동에 잘 접목시키는 것만으로도 하귀남 후보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질만한 정치인이라는 증거 아닐까 싶네요. 하지만 물론 아쉽게도 저는 마산회원구가 아니라 마산합포구랍니다. 그리고 또…….

Posted by 파비 정부권

지난 연말에 이어 지난주에도 목포에 다녀왔습니다. 목포에 가면 어김없이 가는 집이 북항에 있는 돌수산횟집입니다. 우리 형님이 목포에 정착해 32년을 살면서 가장 좋아하고 아끼는 후배입니다. 아니 어쩌면 그 반대로 그 후배가 우리 형님을 좋아하고 아끼는 것일지도.

아무튼 내려가는 내내 노인네도 아니고 “어디쯤 왔냐?” “몇 시 도착이냐?” 하고 전화로 귀찮게 굴더니 돌수산횟집에다가 상을 떡하니 차려놨습니다. 지난 연말에는 우리 동네 아는 형님 두 분이랑, 그리고 지난주에는 아들, 딸 데리고 갔었는데 연타로 돌수산횟집….

▲ 회가 나오기 전의 찌개다시. 오른쪽 반은 못찍었다. 스마트폰 카메라 성능이 별로다. 흐미하다. 이해해주시길...

상다리가 휘청하겠더군요. 이거 농담이 아니고 진담입니다. 정말이지 상다리 두께가 좀 있어서 그렇지 가느다란 다리였다면 여지없이 디비졌을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흠~ 여튼, 제가 이쯤에서 20여 년 전 제 친한 친구 종길이랑 목포에 놀러갔을 때 일화를 하나 소개해드립죠.

위 내용으로다가 충분히 짐작하셨듯이 우리는 형님의 초대(혹은 무단방문일지도)를 받아 목포로 내려갔습니다. 형님의 안내로 신안 비금도에 가서 이틀을 잘 놀고 돌아오는 날이었습니다. 형님과 헤어진 우리는(네 명이었음) 배가 고파서 어느 식당으로 들어갔습니다.

▲ 그 유명한 다금바리. 자연산은 키로에 50만원, 양식은 25만원이다. 이건 양식이다.

여러 가지 메뉴가 있었습니다만, 당근 가장 저렴한 백반을 시켰습죠. 당시 한 2천 원 정도 했을라나요? 기억이 잘 아닙니다만, 아무튼 그렇게 시켜놓고 얌전히 기다렸죠. 계산이 딱 맞았거든요. 밥값 내고 마산까지 차 기름값 제하고 나면 휴게소에서 음료수 딱 한잔씩….

그런데 웬걸? 상이 차려지는데 이거 입이 떡 벌어져 다물어지지가 않을 지경입니다. 그야말로 오만가지 반찬이 다 나오는데 상다리 부러지겠습니다. 제가 젤로 좋아하는 꼬막도 나오고, 갖가지 젓갈들. 암튼 이름 모를 괴기들이 한상 그득하니, 사이사이에 풀들이 가끔 보이고….

“야, 종길아. 이거 우리가 잘못 시킨 거 아이가? 백반 시킨 거 확실하나?”

“아, 백반 시킨 거 맞는데, 아, 와 이러지? 혹시 여기 전라도라 우리 보리문디들 말을 잘못 알아들은 거 아일까?”

“그건 아인 거 같은데. 분명히 백반이라고 했고, 자기도 백반 같다주겠다 했거든.”

“야, 여서는 백반이 혹시 한정식 아이가? 우리는 오입을 거시기라 하지만 여서는 가출하는 걸 오입이라 한 대메.”

“야, 이거 큰일 났는데. 잘못하면 우리 집에 못가겠다.”

그렇지만 우리는 불안에 떨면서도 자존심이 있어서 물어보지도 못하고 그냥 얌전히 앉아서 상이 다 차려지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쇠도 소화시킬 20대 후반의 젊은 총각들이었던 우리는 밥이 나오자 허겁지겁 숟가락질을 해대기 시작했습니다. “우와, 맛있다!”

나올 때 이빨(사람은 ‘이’라고 해야 하지만 원초적으로 먹었다는 의미에서)을 쑤시면서 계산을 하는데 우리는 다시 한 번 놀라고 말았습니다. 2,000×4=8,000원(아니면 이보다 더 쌀 수도 있음. 당시 밥값이 생각 안 남) 한숨을 내쉬며, “살았다.”

돌아오는 내내 얼마나 뿌듯하던지. 저의 사랑스런 애마 ‘프라이드 벤츠’ 트렁크엔 싱싱한 육젓 네 통자가 편안하게 잠들어있고…. 목포란 곳은 이런 곳이었죠. 나중에 알게 됐지만, 막걸리를 한 병 시켜도 이렇게 반찬을 푸짐하게 주더군요.

▲ 세발낙지 한접시도 보이고, 강원도에서 내려온 듯한 명태 새끼 비슷한 것도 보이고...아삭아삭한 멍게, 해삼, 키조개살 등등등등^^ 이것만 해도 크~

그런데 이 돌수산횟집은 그런 목포에서도 정도가 좀 지나친 집이었습니다. 혹시 우리 형님 때문 아닌가 싶어 옆에 상을 살짝 훔쳐보았더니 역시 거기도 상다리가 휘청. ‘목포는 항구다!’ 역시 목포는 항구였습니다. 인심 만선의 항구!

▲ 농어살을 집어든 우리 딸내미. 잠깐 딸자랑 하자면 이번에 창원교육청 선발 영재교육원에 합격했다. 선발시스템에 문제가 있었나? ㅋㅋㅋ

지난주 목포갔다 올라오면서 형님을 차로 모시고 와서는 “자, 그럼 이번엔 우리 마산의 횟집으로 한번 가봅시다” 해서 마산 어시장 장어구이골목의 한 횟집으로 갔습니다. 대자 한 접시에 7만원. 목포에서도 농어 한 접시에 7만원 했으니 가격은 뭐 거기서 거기.

하지만, 찌개다시에서 차이가 완연한 만큼 가격 대비 만족도에선 목포가 완승! 아 물론 계산을 대봐도 목포가 훨씬 싸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같은 돈 주고 목포의 횟집은 오만가지 해물을 다 먹을 수 있으니까요. 아래 사진으로 비교들 해보시길….

보시다시피 목포도 항구고 마산도 항구지만 확실히 차이가 납니다. 가고파는 마산이 아니고 목포란 것을 확실히 알 수가 있지예? ㅋㅋ~ 암튼, 언제든 저하고 목포 같이 가자 하시면 같이 갈 수 있습니다. 단, 기름값이 좀 마니(money) 나옵니당~ 유념하시길… 흐흐흐.


ps; 혹시 목포 북항 가시는 분은 돌수산횟집 찾아가서 우리 형님 이름 대면 좀 더 마니 줄지도... ㅎㅎ

▲ 여기가 마산 어시장의 모 횟집 사진. 정말 찍을 게 없다. 그래서 아무 생각없이 있다가 아차, 비교삼아 찍어보자 해서 찍었다. 회 맛은 있었다. 물론 목포 회가 더 맛있었다. 목포 농어맛은 쫄깃쫄깃한 게 일품이었다. 아, 목포는 항구다!

▲ 목포북항 돌수산횟집입니다. 다음 메인에 올라간 김에 대접 잘 받은 데 대한 보답 차원에서 광고 좀 하겠습니당~ 널리 이해해주시와요... 오른쪽은 형님 후배기도 한 횟집 사장님. 사진은 외람되게도 찍은 사진을 못찾아서 모 까페에서 급히 빌려왔음. 서로 좋은 사이니 뭐라 하지는 않을 걸로 봅니다만. 홈페이지(혹은 까페)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Posted by 파비 정부권

부마민주항쟁보다 앞서서 유신반대시위가 모의됐었다는 증언이 새롭게 나왔다. 12월 5일 오후 6시 30분, 경남 창원 ‘웨딩의 전당(구 가든예식장)’에서 열린 <부마항쟁증언집 마산편: 마산, 다시 한국의 역사를 바꾸다> 출판기념회를 열었는데, 이 증언집에 이러한 증언들이 수록됐다.

<증언집>은 가나다 순으로 40여 명의 증언자들이 구술한 녹취록을 실었는데 그중 제일 첫 번째로 올라온 김용백 신부(현 마산월영성당 주임신부)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경남대 학생이던 최갑순, 옥정애 씨 등이 주도하여 유신반대데모를 준비했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9월 말에 경남대 방송실을 점거하는 것을 시작으로 시위를 벌이기로 했으나 함께 하기로 했던 남학생들이 모이지 않아 실패했으며, 다시 10월 22일을 디데이로 잡고 가톨릭학생회, YMCA, JOC, 각 서클장들과 학과장들을 비밀리에 만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 정성기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회장의 인사 모습.

보다 치밀한 계획과 발로 뛰는 조직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이들은 정성기(현 경남대 교수), 경남대 극예술연구회 회장 이윤도 씨, 신정규 씨 등과 합세해 거사계획을 세웠는데, 10월 22일을 디데이로 잡은 것은 그때가 중간고사 시기라는 점을 활용하자는 것이었다.

김 신부는 증언록에서 “처음에 두 여학생이 나를 찾아와 도와달라고 했다. 그래서 너희들 그거 하면 죽는 줄 아느냐? 하고 물으니, 다 안다면서 감수하겠다고 했다. 처음엔 말렸지만 젊은 처자들이 의지가 너무 강하고 죽음도 불사한다는데 안 도와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김 신부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18일 마산에서 항쟁이 일어나기 이틀 전에 부산에서 먼저 시위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랬기 때문에 18일 저녁 상남성당에 모여 선언문 등을 완결 짓기로 했다. 그런데 경남대에서 먼저 터진 것이다.”

18일 오전 1교시를 마치고 학교를 빠져나와 유인물 작업을 하던 두 여학생은 학교에서 데모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택시를 타고 부랴부랴 학교로 돌아갔다. 그리고 1차 시위를 마치고 교내에 흩어져있던 학생들을 다시 규합해 거리로 나왔다.

당시 같은 경남대 학생이었던 한 증언자는 “여학생 둘이가 정말 대단했다. 우리가 미적거리고 있으니까 ‘남자××들이 × 달고 뭐하는 거냐?’면서 호령을 하기에 ‘여학생들도 저러는데 우리가 이래서 되겠나’ 해서 용기를 내 다시 모였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 두 여학생은 그러나 학생들이 거리로 진출해서 마산시청을 거쳐 3․15탑 주변에서 경찰과 대치하던 초반에 연행되고 만다. 시위대열의 선두에서 선동을 하고 있던 이 두 여학생을 경찰이 기습적으로 체포해 경찰차에 싣는 과정에서 십여 명의 남학생들이 함께 연행됐다.

▲ 한 참가자가 증언집을 읽고 있는 모습.

최갑순 씨의 증언에 따르면 “남자친구와 가포해수욕장에 데이트를 다녀오다 시위대와 경찰이 대치하고 있는 통에 길이 막혀있던 한 쌍의 연인도 그때 함께 체포됐는데 부산 계엄사까지 함께 갔다. 나중에 어떻게 됐는지 소식을 모른다”며 안타까워했다.

스무살 가량의 그 여인은 가방에서 조약돌이 나왔는데 ‘애인과 가포에 갔다가 해변에서 주운 것’이라고 해도 경찰은 막무가내로 시위용품으로 몰아 마산경찰서를 거쳐 부산 계엄사까지 끌고 갔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다른 증언자의 증언에도 들어있었다.

이 두 여학생은 입고 있던 바지와 치마가 다 찢겨질 정도로 난폭하게 연행되었는데, 마산경찰서에서는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온갖 고문과 폭력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이년들은 애도 못 낳게 만들어야 된다”는 욕설과 함께 자행된 고문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옥정애 씨는 증언에서 “79년 여름방학이 지나면서 시위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유신정권은 택시에서 박정희 대통령 욕을 한 승객을 신고한 택시기사가 포상(개인택시)을 받는 용납할 수 없는 단계까지 갔다. 누군가 성냥불 하나만 던지면 확 일어날 것 같은 상태였다”고 회고했다.

그녀에 따르면 김용백 신부 외에도 최동호 교수(현재 고려대), 고 이선관 시인 등이 모의에 조언을 주었으며, 학생들 중에는 이신모, 학보사 편집장 김명섭, 송창호, 정인권 씨 등 여럿이 함께 했는데 구체적인 계획은 두 여학생과 정성기, 신정규 씨가 짰다.

이들이 짠 계획을 보면 ‘먼저 방송실을 점거한 다음 최갑순이 마이크로 학생들을 모으고, 1차 시위로 교문 앞 진출을 시도하다가 흩어지면 2차로 마산의 상징적인 장소인 3․15탑으로 집결, 그때부터는 마산시민들의 몫으로 저녁까지 시위가 이어지면 3차 집결장소로 퇴근시간에 맞춰 수출정문으로 간다’는 식이었다.

그녀는 “그런데 갑순이가 전화를 하고 오더니, ‘큰일 났다. 부산에서 일이 크게 터졌다는데 그 여파가 마산에도 올까봐 휴교령을 내린 모양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세운 계획 터트려보지도 못하고 막 내리는 거 아니냐’면서 안절부절 했다. 급히 택시를 타고 학교로 갔다”고 말했다.

▲ 허성무 부지사가 축사를 하고 있다.

한편, <증언집>에는 부마항쟁에 시위대로 참여했던 인사들 뿐 아니라 전경으로서 반대편에 서있었던 사람들의 증언도 몇 편 실렸다. 이들의 증언은 당시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또 MBC, 경남매일 등에서 근무하던 기자의 증언도 3자적 관점에서 실렸다.

무엇보다 시선을 끄는 것은 소문으로만 돌던 부마항쟁 희생자의 유족의 증언이 <내 아버지 죽음의 진실, 32년 만에 밝힌다>란 제목으로 실렸다는 것이다. 경찰은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증언자의 부친을 부검한 다음 서원곡에 가매장했다.

이날 출판기념회에는 여러 사람이 축사를 했지만 이은진 교수(경남발전연구원장)의 축사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역사는 위험한 사람들이라고 분류되는 사람들보다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움직였을 때 바뀐다.”

그래서 그는 “세상이 어떤 면에선 불공평하다”고 말했다. 부마항쟁증언집도 결국 정부가 위험하다고 분류한 사람들의 취조기록이나 공판기록을 토대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며 앞으로 이를 극복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부마항쟁에 앞서 데모를 주도적으로 기획했던 두 여학생이 10월 18일 시위초반에 끌려가는 장면을 목격한 시민들로부터 둘 중 하나는 죽었을 거란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나 곧이어 10․26이 터졌고 독재자 박정희가 죽고 난 후 이들은 무사히 사회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 이후 최갑순 씨는 여성운동에 투신해 경남여성회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창원여성문제상담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옥정애 씨는 중등교사가 되었으며 전교조 조합원으로서 노조활동에도 대단히 열심이라고 한다.

<증언집> 제목처럼 ‘두 번이나 독재자를 쓰러뜨린’ 역사의 중심에 어린 두 여학생이 있었다는 사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ps; 1. 주대환 씨(한국사회민주주의연대 대표)는 이은진 교수의 말에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사실은 전혀 위험하지 않다”는 말로 해석을 달았다. <증언집>에는 그의 증언도 들어있다. 그는 구치소에서 박정희의 죽음 소식을 듣고 “기쁘지 않느냐?”는 간수의 물음에 “사람이 죽었는데 무엇이 기쁘겠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2. 주대환 씨처럼 최갑순 씨도 구치소에서 박정희의 죽음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통방(수감자들끼리 창살을 통해 연락을 취함)을 해서 기도를 할 것을 제안해 “불쌍한 영혼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마산사람들은 두 번이나 독재를 무너뜨렸지만, 대개 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3. 이 <증언집>에는 자기 아버지의 말을 믿고 애인을 밀고했다가 그 애인이 물고문, 전기고문 등 갖은 고초를 겪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미쳐버린 이야기도 실려 있다. 증언자는 그러나 “나는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잘 살고 있는데 그녀는 그렇게 돼버려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고 말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서울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을 때 그녀의 오빠는 “만나면 괴롭기만 할 거다. 과거의 기억은 잊는 게 좋다. 만나지 말고 그냥 떠나 너라도 잘 살아라”고 했다 한다. 창원대 출신인 그는 현재 인천에 살고 있다.

4. 북마산파출소 등을 불태운 당사자의 증언도 생생하게 실려 있다. 당시 그는 18세의 청년이었다. 그는 “그때 정말이지 희열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었을까? 잠겨있던 울분이 폭발하면서 느낀 전율 혹은 오르가슴 같은 것이었을지도.  

5.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했던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79년 당시에는 경찰이나 중정, 보안대보다도 헌병대가 민간인 사찰에서 큰 활약을 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내가 읽고 느낀 바로는 헌병들이 경찰보다 훨씬 우수한 자원이 많았던 듯하다. MBC 기자였던 신용수 씨의 증언에서 그걸 느꼈다. 첨언하면, 일정시대 헌병들이 생각났다.

6. 그러고 보니 나도 부마항쟁을 목격한 사람 중의 하나다. 당시 나는 중3으로서 부산에 고등학교 시험을 치러갔다가 탱크와 군인들이 도열해있는 것을 목격했다. 후일에 내가 보았던 현장을 찍어놓은 사진으로 안 것이지만 탱크는 장갑차였다. 당시만 해도 경북의 어느 골짜기 산골소년이었던 나는 탱크와 장갑차를 구분하지 못했다.

그날 저녁, 해운대에 숙소를 정하고 동백섬에 바람 쐬러 나갔는데 갑자기 써치라이트가 켜지면서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같은 수하가 들려왔다. 당연히 나는 손을 들고 덜덜 떨면서 수백 개나 되는 계단을 올라갔다. 어찌나 멀든지. 철모를 쓴 두 명의 군인 앞에서 나는 빌었다. “저 중학생이에요. 내일이 시험인데 저 멀리 시골에서 왔어요. 살려주세요.”

그들은 “밤에는 위험하니 나다니지 마라. 빨리 가서 자거라” 하면서 보내주었다. 정말이지 천지신명께 감사를 드렸다. 너무 놀라서 다음날 어떻게 시험을 봤는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때가 아마도 10월 18일 경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1주일 정도 지나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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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마산은 "유신독재 물러가라는 함성"으로 들끓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한발의 총성이 청와대 옆 한 비밀궁전에서 울려퍼졌다. 영원할 것 같던 독재자 박정희가 죽은 것이다. 이로써 마산은 두번에 걸쳐 독재정권의 막을 내리는 진원지가 됐다.
하지만 그 역사적 의의에 비해 마산이 받는 대접은 너무나 약소하다. 온갖 인사들이 정치판에 나와 과거의 민주화운동 이력을 들먹이지만, 1979년 10월 부마항쟁의 주역들은 망각과 무관심의 그늘 속에 창동골목의 허름한 술집에서만 그 영광이 되살아날 뿐이다.

2011년.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가 뒷골목에 숨어있던 그늘진 영광을 끄집어내 한권의 책을 만들었다. 최초로 발간하는 증언록에는 우선 40여명의 육성이 담겼다. 앞으로 더 많은 증언자를 찾아내 보완된 책을 낼 계획이라고 한다. 이 첫번째 증언록을 만드는 데는 일부 나의 공도 들어있다.
나는 부마항쟁 당시 중학교 3학년짜리로서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였지만, 실로 눈물겨운 녹음테이프를 활자로 옮기면서 울지 않을 수 없었다. 한숨도 무지 나왔다. 그 다음에 밀려드는 어쩌면 지독하게 처절하고 슬픈 한편의 영화를 보고 난 다음의 공허함.
이게 모두 진짜로 벌어진 일들이었을까. 부마항쟁 며칠 후, "알아서 처리해주겠다'는 부모의 말을 믿고 애인을 밀고했고, 그 애인이 중정과 39사단에 끌려가 물고문, 전기고문 등 갖은 고문이란 고문은 다 당한 것을 알고 자신은 결국 정신병자가 되고 말았다는 이야기. 아, 이런 이야기들이 모두 진실이란 말인가.  

12월 5일 오후 6시 30분. 창원역 맞은편 (구)가든예식장 1층에서 <부마항쟁 증언집- '마산, 다시 한국의 역사를 바꾸다'>가 망각과 무관심의 그늘로부터 과감하게 몸을 끄집어내 세상에 나온다. 아래 소개하는 글은 그 역사의 현장에 여러분을 모시는 글이다. 특히 블로거들이 많이 와서 잊혀진 이야기들을 세상에 많이 알려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 파비 

이 증언집은 1989년의 『부마항쟁10주년 자료집』에 비해 증언자 수가 3배 가량이며, 다양한 신분의 입체적 증언이 풍부하게 수록되었다. 항쟁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경남대·창원대 학생, 고교생, 교수, 시민, 노동자, 기자, 음악실 DJ 등은 물론, 유족 증언과 함께 전투경찰 소방관, 마산시청 공무원 등 40여명이 겪은 생생한 증언들이 담겨 있어 당대의 드라마틱한 상황을 다양한 관점에서 폭넓게 알 수 있다. 특히 생애사적 접근방법을 통한 인터뷰 방식으로 기술하였으므로 당대의 정치 ․ 사회 ․ 경제 ․ 문화 전반에 대한 총체적 이해가 가능하며 마산시민의 집단적 용기가 정의로운 저항으로 승화되는 과정을 그물망처럼 꼼꼼하게 그려서 부마항쟁을 입체적으로 조감할 수 있다.

증언집 내용에 있어서도 부산항쟁 이전 경남대 학생의 목숨을 건 사전 시위 계획과 종교인의 지원 사실, 근로대중들의 잠재된 정치적 분노, 용기있는 현장 취재와 언론탄압 등 그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거나, 떠돌던 소문에 대한 새로운 증언들이 풍부하게 드러났다.

이 증언집은 그 자체로서도 의미가 크지만, 부마항쟁특별법 제정의 당위성을 촉구하는 근거로서의 의미도 크다. 또한 아직도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박정희 시대 ‘개발독재’의 환상과 실체를 되새기며, 새로운 정치·경제, 새로운 사회를 전망하는 데 학계, 교육계를 비롯하여 각계에 매우 의미있는 자료가 되리라 판단된다.


<증언집 수록 내용>

김용백(당시 마산 상남성당 주임신부) • 미리 준비되었던 부마항쟁   23

김의권(당시 마산 수림음악실 디제이) • 음악실 DJ가 겪은 유신시대   37

김종대(당시 마산시청 공무원) • 억압세력에 대한 저항정신의 표출  65

김지근(당시 경남대 학생) • 여전히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는 자부심  85

김채윤(당시 경남대 학생과 직원) • 빗방울 모여서 강물 되고 바다 되듯이  95

김철수(당시 마산대 학생) • 박정희 총통제 차단한 부마항쟁  107

김태만(당시 창원공단 내 대한중기 사원) • 형제가 겪은 3·15와 10·18  129

남부희(당시 경남매일 사회부장) • 부마항쟁은 제2의 3·15의거  139

박봉환(당시 경남대 학생) • 부마항쟁의 시민정신과 화해의 정신  167

박진해(당시 해군 장교) • 긴 역사에 대한 낙관론  185

박홍기(당시 자동차보험 대리점 운영) • 작지만 큰 저항의 몸부림  215

배장수(당시 전투경찰대원) • 유신의 전경  235

손해규(당시 자영업) • 불의에 항거한 정신 계승되어야  257

송윤도(당시 마산시 월영2동 동장) • 국민을 하늘 같이 여겨야지  295

신용수(당시 마산문화방송 기자) • 역사의 현장을 취재하다  307

양석우(당시 자영업) • 부마항쟁, 올바로 자리매김 돼야  347

옥정애(당시 경남대 학생) • 자유와 용기를 갖게 해준 부마항쟁  365

유성국(당시 무직, 고 유치준씨 유족) • 내 아버지 죽음의 진실, 32년만에 밝힌다  385

이경호(당시 마산대 학생) • 모진 고문과 보상받을 길 없는 민주화 투쟁  401

이부웅(당시 마산소방서 소방관) • 소방차 포기하고 몸만 피신하다  433

이승기(당시 씨알의 소리 마산보급소장) • 박정희 정권을 더 연장시켜서는 안 된다  439

이윤도(당시 경남대 학생) • 영원히 잊지 못하는 노래  451

이재구(당시 마산대 학생) •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바꾼 민주항쟁  481

이종상(당시 경남대 교수) 법학교수, 유신헌법 홍보를 거부하다  491

이창곤(당시 마산 경상고 학생) • 고등학생에게 가해진 야만적인 국가폭력  505

장정욱(당시 경남대 학생) • 박정희 유신정권의 누적된 문제들  527

정성기(당시 경남대 학생) • 역경을 극복하는 개인과 도도한 역사의 물결  541

정인권(당시 경남대 학생) • 역사의 소용돌이에 던져진 삶  575

정현섭(당시 공업전문대 학생) • 민주화로 가는 첫걸음을 만들어준 계기  605

정혜란(당시 무직) • 사람이 변해야 사회도 변해  623

조순자(당시 마산대, 경남대 음악과 강사) 마산은 두번이나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특별한 곳  635

주대환(당시 서울대학교 제적생) • 억압됐던 민중의 본능이 자연스럽게 분출된 부마항쟁  643

지경복(당시 정비공장 직원) • 부마항쟁 참여로 고단하고 힘든 삶  669

진이호(당시 자영업) • 우리가 싸웠던 것은 제대로 살아보자는 뜻  687

최갑순(당시 경남대 학생) • 여성운동으로 다시 태어나  701

한석태(당시 경남대 교수) • 유신독재 붕괴 촉발시킨 부마항쟁  737

한양수(당시 경남대 학생) •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10·18  761

한철수(당시 회사원) • 마산 민주항쟁의 역사, 하나의 맥으로 연결되어야  783

현태영(당시 마산기동대 전경대원) • 마산에서 일어나면 정권이 바뀐다  795

황성권(당시 외국어대 휴학생) • 숨 막히는 독재를 끝낸 투쟁  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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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복산이란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는 이춘모 씨가 쓴 글을 보면 창원시와 청도군을 비교하고 있는 대목이 나옵니다. 결론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청도군은 지자체가 직접 나서서 청도 감을 홍보하는데 앞장서고 있는 반면 창원시는 관심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선 블로거 실비단안개도 같은 의견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도 창원에 정착해서 산지가 벌써 30년이 지났건만 창원이 감 주산지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어쩌다 차를 타고 창원 동면을 지날 때 주위에 펼쳐진 누런 감밭을 보면서도 저게 창원단감이거니 하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동면과 연접한 진영이 단감으로 유명하다보니 저것도 진영담감이려니 이렇게 생각하고 말았던 모양입니다. 사실 진영과 동면은 경계도 모호할 정도로 붙어있으니 그리 생각할 만도 한 일입니다. 아무튼 이춘모님과 실비단님의 글을 보고서야 아하, 창원이 단감 주산지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사진. 장복산

그에 비해 경북 청도군의 감 사랑은 정말이지 눈물겨울 정도입니다. 물론 청도와 창원은 감 생산의 규모에 있어서 확연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청도는 군 전체가 감숲에 덮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감나무가 많았습니다. 그녀의 말처럼 청도는 감 ‘천지삐까리’였습니다.

경북 영양에서 청도로 시집왔다는 그녀는 이틀 동안 ‘청도반시 블로거팸투어’ 일행을 안내하던 청도군 문화해설사였습니다. ‘천지삐까리’란 그녀의 표현이 절대로 과장이 아닌 것이 꼭 과수원이 아니라도 집집마다 감나무 대여섯 그루씩은 다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집은 열 그루가 넘는 집도 있었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을 보낸 문경도 사실은 청도, 상주와 더불어 감이 유명한 곳입니다만, 청도처럼 이렇게 감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진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집집마다 감나무가 많았지만 보통 두 그루에서 세 그루였습니다. 흠, 감나무에 올라가 소머즈 흉내를 내다가 머리부터 떨어져 한해 후배가 된 친구놈 생각이 나는군요.

아무튼 블로거 팸투어를 유치한 ‘감 고부가가치화 클러스터사업단’-이름도 참 길죠? 이 사업단은 따로 ‘네이처 팜’이란 주식회사를 만들어 인근 농가에서 생산된 감을 모아 상품화하는데도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이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건물을 지어 임대를 준 것도 청도군이라고 합니다.

감 클러스터사업단 서영윤 팀장.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는 청도반시 축제장에서도 그는 즐겁다.

문화해설사-이름이 배명희 씨였습니다-의 설명에 의하면 청도는 사방으로 물이 흘러나갈 뿐 어느 곳에서도 물이 들어올 수 없는 지형이라고 합니다. 때문에 수질이 매우 깨끗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청도에서 생산되는 감은 공해와는 100% 무관한 신선도 높은 청정과일이다,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그러고 보니 밀양강도 청도에서 시작되는 강이었습니다. 오래 전에 가끔 밀양시 청도면의 밀양강가에 놀러간 적이 있었는데 그 강의 발원지는 바로 인접한 청도군이었습니다. 어쨌거나 청도사람들의 청도 감 사랑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예정수 감 사업단장도 오래 다니던 회사까지 그만두고 이 사업에 뛰어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매우 잘 나가는 직장인이었지만-거기에 대해선 김훤주 기자의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청도반시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감 클러스터사업단에 들어왔습니다.

이른바 영남알프스라 불리는 산악지대의 북쪽에 위치한 청도는 한때 오지였습니다만 이젠 더 이상 오지가 아닙니다. 바로 옆으로 대구-부산 간 고속도로가 힘차게 뻗어가는 교통의 요지가 됐습니다. 부산까지 30분이고 대구는 더 가깝습니다.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만약 마산이나 창원이었다면 감나무 밭을 확 갈아엎어서 공장을 지었을 거야. 아니면 아파트나 상가를 지었을 테지. 뭔가 돈이 되는 일을 하기 위해 시장님-아니, 거긴 군수님이군-은 고뇌를 했을 거고 결단을 했을 거야. 어떻게 멋지게 갈아엎을 것인가를.

지금도 창원시장님은 마산만을 갈아엎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계십니다. 이미 수없이 갈아엎어진 마산만이건만 아직도 갈아엎을 곳이 남은 모양입니다. 이번에 그야말로 기상천외합니다. 그나마 남은 마산만에 섬을 만들겠답니다. 거대한 인공섬을 만들어 맨하탄처럼 개발하겠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우리 마산 쪽에서 보면 마산만은 완전히 없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집에서 마주 보이는 곳에 그런 섬을 만들겠다는 것인데 최소한 우리집에선 마산만은 완벽하게 없어지는 것입니다. 반대편 창원 귀산 쪽에서 보면 바다는 보이겠지만 우리동네에선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지요.

‘가고파’가 어쩌고저쩌고 마산만을 자랑하면서 마산의 자랑 마산만을 갈아엎는 창원시-거참 마산시란 이름이 없어지고 보니 마산만? 창원시? 헛갈리네-와 청정지역에서 나는 특산물 감을 자랑으로 여기며 발전시키기 위해 애쓰는 청도군.

청도군 문화해설사 배명희 씨와 함께 한 장복산님. 그새 친해졌네요~~

물론 청도군과 창원시를 단순비교하는 게 무리이긴 합니다만 현재 스코어, 청도군에 비해 창원시는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창원시장의 눈에는 감 따위는 보일 리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마산만을 조금이라도 더 갈아엎는 공사를 벌일 수 있을까, 그런 생각뿐이지요.

람사르를 유치하고 유엔사막화방지협약 총회를 유치했던 창원시장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동양 최대의 철새도래지 주남저수지에 60리길을 조성해 철새를 쫓아내겠다는 것입니다. 주남저수지를 발판으로 람사르를 유치했던 창원시가 주남저수지를 없애려 한다니. 토사구팽도 아니고.

청도는 어떨까요? 지금처럼 아름다운 청도가 영원히 지속될 수 있을까요? 내 고향 남쪽 바다 어쩌고 하던 마산에 지금은 바다가 없습니다. 모두 매립되고 남은 바다도 곧 사라질 형편입니다. 하지만 감 클러스터사업단의 예정수 단장이나 서영윤 팀장 그리고 청도군의 배명희 문화해설사 같은 분들이 고향을 지키고 있는 한...

감나무 숲이 아름다운 청도는 영원할 것으로 믿어도 되지 않을까요?
그냥 그렇게 믿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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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창원 정우상가 앞에 갔습니다.
여기는 젊은이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곳이지요. 영화배우 문성근이 온다기에 구경하러 갔습니다.
아니 사실은 구경하러 간 건 아니고 뭐 하나 살펴 보러 간 것입니다.















아 이거 말이 자꾸 헛나오는데요. 더 사실적으로다가 말씀드리자면 취재하러 갔던 것입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고 모르시는 분은 모르시지만 제가 요즘 인터넷신문 <100인닷컴> 편집장 책을 맡고 있거든요. 블로그를 하다 보니 어쩌다가 그렇게 됐습니다. 


사연이야 경남도민일보에 인터뷰 기사도 나고 했으니 거기 가보시면 아실 수 있을 테고요.
<100인닷컴>은 언론사 등록까지 한 공식적인 인터넷언론이랍니다. 취지는 그렇습니다.
<파워블로거 100명과 함께하는 100인닷컴>.
요 정도로 <100인닷컴> 광고는 마치고,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10월 23일 토요일 오후 6시부터 문성근 씨가 야권단일정당을 촉구하는 100만 민란 행사를 한다기에 미리 정우상가 앞에 갔던 것인데요.
아직 시간도 남고 하여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배회하고 있는데 이런 광고 판넬 문구가 눈에 들어오는 겁니다.


"절 죽이려 합니다."



뭐야 누가 누굴 죽인다는 거야? 이 대명천지에 이 무슨 황당한 소리람.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살펴 본 저는 그러나 실소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타매장에서 절 죽이려 합니다. 너무 싸게 판다구요." 

아, 그렇군요. 휴대폰 싸게 판다는 광고판넬이었습니다.
이젠 별 희한한 수법까지 다 동원됐군요.  





옆에 매장을 보니 "공짜"라고 쓴 광고판넬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습니다.
아 그런데 이거 "싸게 판다고 타매장에서 죽이려 한"다면 옆에 공짜로 파는 매장보다 더 싸게 판다는 말인데 도대체 얼마나 싸게 판다는 말일까요?


혹시 휴대폰을 사면 공짜에다 더해서 돈을 얹어주는 건 아닐까요?
조선일보나 중앙일보가 그렇게 많이 하잖습니까? 신문 봐주면 돈을 10만원 준다든지 뭐 그런.
요즘 인터넷도 그런다더군요.
자기네 회사에 가입하면 40만원을 준다든지, 넷북을 준다는 어떤 회사 광고도 본 거 같은데요???


아무튼 자칫 잘못하면 살인사건 날 판이니 저 집에 가서 휴대폰 사줘야 되겠네요.

제가 작년에 구미에 갔다가 이런 광고문구는 본 적이 있는데요. 그때보다 훨씬 진화했네요. 1년 사이에.




저 사진을 찍어 포스팅하면서 제목을 이렇게 달았었지요. "똥값이 쌀까, 껌값이 쌀까?"

그런데 이제 "타매장에서 절 죽이려 한다"는 호소까지 광고문구로 등장하고 보면,
이제 아래와 같은 이런 광고 따위는 아주 구석기 시대 유물쯤으로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나저나 우리의 문성근 아저씨 오기 전에 여기저기 둘러보니 확실히 창원 성산구가 마산합포구보다 월등하게 잘 사는 동네임은 분명해보이네요.
우리 마을에선 이렇게 멋진 공중전화 구경하기 참 힘들거든요.
가만 보고 있으려니 이거 뭔 사람 차별하는 것도 아니고. 

괜히 사람 비참해진다는 생각이….  

공중전화 부스 옆에는 시원한 나무그늘 밑에(사실은 이제 제법 날씨가 쌀쌀해져서 나무그늘은 필요없지만, 암튼^^*) 앉아 쉬거나 버스를 기다리는 시민, 학생들이 살짝 부럽네요.
마산은 언제 이렇게 만들어주실 건가요?
바다 매립하고 공장만 잔뜩 짓는다고 창동-오동동 상권 안 살아나거든요.


사람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오고 싶게 만들어야지요.




아무튼…, 고놈의 공중전화 부스가 참 부럽습니다요.
휴대폰 공짜 주는 거보다 이런 시설 많이 해주시는 게 훨씬 더 고맙게 생각할 거 같은데요. 저만 그런 생각일까요?


이제 통합도 되고 했으니 마산에도 신경 좀 써주세요.
나무도 심고, 벤치도 만들고, 공중전화 부스도 이쁘게 꾸며보고, 그래야 사람들이, 특히 젊은 사람들이 마산에 살고 싶다 그러지 않겠어요?
지금은요. 마산에 사는 게 불편하다 못해 창피하다는 사람들도 있다니까요.





어? 이거 휴대폰 공짜 이야기 하다가 이야기가 이상한 데로 흘러왔네요.

어쨌거나 다들 잘 살아보자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맞나? 아무튼, 그럼~

아참, 다음달, 그러니가 11월 11일에 문성근 씨가 다시 창원에 온다네요.
경남도민일보 강당에서 100민란을 강의하기 위해서라는데요. 
영화배우 문성근이 보고 싶으신 분은 그날 경남도민일보로 오시면 될 것 같군요. 


물론 제가 보고 싶으신 분도 그날 오시면 저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 ㅋㅋ~ 

Posted by 파비 정부권

이 정도 수준을 바라는 건 절대 아니랍니다. ^--^





















대구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여보게, 많이 덥재? 여기도 보통이 아이다. 사람 딱 죽긋네.”
“네, 많이 덥습니다. 본격적으로 더울 모양이네요.”
“이사람아, 그래도 자네 사는 마산은 좀 시원하잖아? 거는 그래도 좀 걸어 나가면 바다도 있고 말일세.”
“…….”
“시원한 바닷바람 좀 쐬고 그러면 훨씬 안 낫겠나?”
“그야 그렇겠지만, 형님, 마산은 바다가 없습니다.”
“아이, 그게 뭔 소리로? 마산에 바다가 없다니? 마산이 해안도시 아니었나?”
“글쎄요. 해안도시가 맞는 거 같기는 한데, 그런데 바다는 없습니다.”

대구에 사는 아는 형님으로부터 마산은 바다가 있어서 시원할 거라는 소리를 듣고 황당했던 제가 마산엔 바다가 없다고 말하자, 이번엔 그 형님이 어리둥절해졌습니다. 그는 도무지 제 말이 이해하기도 힘들고 믿기도 어려운 모양이었습니다. 하긴 그럴 만도 합니다. 전국 어디에 사는 사람이라도 백이면백 마산은 바닷가에 있는 해양도시라고 생각할 테니 말입니다.  

15년 전 우리집이라면 둥그런 달처럼 마산만이 훤히 보였다. 그러나 가까이 가더라도 바다에 접근할 순 없다.


사실 마산에도 아름다운 바다가 있었던 시절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8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마산엔 전국에서 내노라하는 해수욕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건 저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장담할 순 없지만, 경남도민일보가 몇 년 전에 기획 연재한 기사에 보면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산시청 자리가 월포해수욕장이었고 그 뒤로 울창한 송림이 있었는데(아마도 세무서 자리겠지요), 서울에서 직통 증기기관차가 다녔다는 겁니다. 

인천의 송도해수욕장과 더불어 전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해수욕장이었다고 합니다. 무학산에 올라가서 마산만을 내려다보시면 과거에 존재했을 월포해수욕장이야말로 천혜의 해수욕장 터였다는 것을 알게 되실 겁니다. 내륙 깊숙이 들어온 항아리 같은 만에 자리 잡은 해수욕장, 상상이라도 해보셨습니까? 멀리 갈 것 없이 20년 전만 하더라도 마산에 해수욕장이 있었지요. 가포해수욕장. 오염된 바닷물에 좀 썰렁하긴 했어도… 지금은 매립되어 육지가 됐습니다. 

제가 마산에 와서 처음 어시장에서 회식을 하게 되었는데, 모두들 홍콩빠라고 불렀습니다. 바닷가에 길게 늘어선 횟집 아무 곳이나 골라 들어가면 출렁이는 바닷물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물론 그때도 오염이 심했지만, 그래도 답답한 도회의 한 귀퉁이에 그런 곳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었습니다. 그 홍콩빠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홍콩빠가 있던 자리 역시 매립으로 육지가 됐습니다. 바다였던 자리엔 차가 달리고 콘크리트 벽이 만들어졌습니다. 

15년 전까지만 해도 그래도 아쉬운 대로 집에서 마산만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아파트와 빌딩들로 이루어진 숲에 가려 바다를 볼 수가 없습니다. 굳이 바다를 보고 싶다면 산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무학산에 오르면 마산만이 한눈에 내려다보입니다. 그러나 당연히 철썩이는 파도를 느낄 수 없음은 물론입니다. 산에서 내려다보는 마산만은 바다라기보다는 빌딩숲에 가리워진 자그마한 호수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땀 흘려 산에 오르지 않는 대부분의 시민들에겐 해당이 없는 이야깁니다. 아마도 짐작하건대 바다를 가끔이라도 보면서 살아가는 마산 시민은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1년 동안 한 번도 바다를 보지 못하고 사는 사람도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저도 바다를 본지가 오래 됐습니다. 일부러 교외로 빠져나가 바다를 보려고 마음먹지 않는다면 바다를 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여기는 여수, 왼쪽에 카메라 든 이가 필자. 이 수변공원의 뒤는 아파트 단지촌이다. 사진=김주완


“해양도시 마산에 바다가 없다니 참 거 희한한 말이로세.”
“형님, 그러니까 바다가 있긴 있는데요, 우리는 그 바다에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왜?”
“글쎄요. 어쨌든 저는 마산에서 바다에 가 본 일이 없으니까.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르고.”
“…….”
“바다와 연결되는 부분은 모두 철조망으로 막아놓았거나, 일반인이 접근할 수 없는 공장이거나 그렇거든요.”

하긴 그러고 보니 그 형님의 전화가 아니었다면 마산에 바다가 있는지 없는지 그런 사소한 문제에 대해선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산에는 바다가 있어서 시원하겠다는 소리를 듣고 보니 과연 마산에도 바다가 있었던가, 내가 사는 곳이 해양도시였던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거의 생각지도 않고 살아왔던 마산의 정체성이 갑자기 신경 쓰이기 시작합니다. 

아름다운 바닷가를 가진 마산에 살고 있는 저를 부러워하는 대구의 형님에게 괜히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에이, 그냥 바닷바람이 참 시원하다고 말하고 말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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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바지저고리로 아나, 물어보지도 않고 지들 맘대로다"

지산마을은 진북면소재지로서 아담하고 아름다운 마을이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이 마을 뒤로 국도 2호선 산업도로가 나면서 주민들은 소음과 분진에 시달려야 했다. 더 큰 문제는 요란한 발파소리에 뒤이어 따라온 아파트 건물 균열이었다. 불안한 주민들이 공사업체인 한진을 찾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법대로 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바로 이 도로에 인접한 동네 뒷산이 헐리고 있는 것이었다. 제보를 받은 기자가 갔을 때 주민들은 마을회관에 모여 대책을 논의하는 중이었다. 진북 성원아파트 입주민회의 총무(우정명)를 빼고는 모두 어르신들이었다.

진북 지산마을 너머로 진동과 진동만이 보인다.


"시의원들이 말이야, 허새비라, 허새비"

“시의원이란 사람들이 말이에요, 허새비야. 한나라당 이주영 국회의원 사무실에서 만났는데 인간들이 아니더라고. 이주영하고는 독대를 한번 했는데, 전화는 한통 해주대요. 국토 무슨 청인가 어디라던데.”

처음 그들을 만났던 <더불사> 고문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매우 격앙돼 있었다. 시의원이든 국회의원이든 별로 쓸모가 없었던 것이다. 주민들을 바지저고리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주민들은 스스로 돈을 모아 5천만 원을 만들어 1년 넘게 도로공사, 공사업체와 싸움을 벌여 공사가 끝난 뒤 정신적 보상과 건물균열 등 물질적 피해를 조사해서 배상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엔 마을 뒷산이 벌겋게 헐리고 그 자리에 골프장이 들어선다는 것이다. 처음에 주민들은 도로공사에서 하는 작업인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50년, 100년 된 소나무가 베어져나가고 굴삭기가 올라가 산 정상을 헐어내기시작하자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공사업자를 찾아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얼버무리며 제대로 답변을 하지 않아 벌목을 하는 인부에게 물어보니 골프연습장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산꼭대기까지 직접 안내에 나선 주민들은 아주 흥분돼 있었다. “이 산이 어떤 산인 줄 알아? 조상대대로 우리 마을을 지켜온 산이라고. 저 소나무들을 봐, 저걸 다 베어냈어.”

골프연습장이 나는 산 뒤로는 국도 2호선 공사가 한창이다. 맨 아래 사진은 공사장에서 내려다 보이는 소나무들. 이게 어떻게 재선충 걸린 나무로 보이냐는 어르신들. 놔두면 여기까지 잘라낼 판이다.


산은 별로 높지 않은 야산이었다. 그러나 정상에 서자 진동만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 한눈에 명당임을 알 수 있었다. 함께 간 경남대 안차수 교수와 기자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와, 이런 곳이 다 있었네요!” 조상대대로 내려온 마을의 영산도 예리한 부동산업자들의 눈은 피해가지 못했다.

재선충 걸렸다고 허가 받아 벌목한 나무들은 다 어디로 반출 됐을까?

우리가 서있는 자리로부터 아래로 마을에 닿는 지점까지 소나무들이 모조리 베어져나갈 판이다. 이미 삼백여 그루를 베어냈다고 한다. “이 놈들이 말이야. 재선충에 걸리지도 않은 걸 걸렸다고 속여 벌목을 하라고 허가를 내줬어. 그게 말이 돼? 산림행정하는 놈들도 다 사기꾼이야, 봐, 저 밑에 소나무들 보라고, 어디 저게 재선충 걸린 나무야.”

실제로 둥치가 100년은 족히 돼 보이는 소나무들은 재선충과는 아무 인연도 없어보였다. “그리고 말이야. 재선충 걸린 나무를 잘랐으면 그걸 반출해도 돼? 여기 봐, 벌목한 소나무 하나도 없잖아. 다 싣고 나갔어. 그리고 백그루 벌목하라고 허가했다는데 삼백그루 베어냈어. 이거 전부 감옥 보낼 일이라고.”

주민들은 말이 나오기 시작하자 그칠 줄을 몰랐다. “시에서도 말이야, 주민들 애로가 뭔지 그런 것도 안 물어보고 지들 맘대로 처리해도 되는 거야? 이게 김일성이 김정일이 하고 똑같은 정치 하는 놈들이지, 책상만 지키고 앉아 있을 줄 알았지 말이야.”


산은 야트막한 야산이다. 산을 깍아 골프연습장을 만들면 아파트 높이와 비슷해진다. 그러나 여기 서서 골프채를 돌리면 진짜 기분은 그만일 듯.


골프장 공사인 것을 확인한 주민들이 공사업자를 찾아가 따졌지만 상상도 못한 황당한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마을과 산 뒤로 도로가 나는데 어차피 병신산 아니냐.” 이 말을 듣고 노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아니 마을 뒤에 산이라도 있으니까 도로가 나도 그나마 소음이라도 줄일 수 있는 거지, 그 산이 병신이 됐다니, 그게 말이 돼? 조상대대로 마을을 지켜온 영산을 모독해도 분수가 있지.”

주민들을 곧 대책위를 만들어 대응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아무 역할도 못하는, 아니 안하는 주민들의 대표였다. 주민들에게 애로가 뭔지 한번 물어보지도 않고 허가를 내준 시도 문제지만, 주민들의 편에서 시정을 감시하고 해결해야할 시의원들이 허새비 소리나 듣고 있다는 것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답은 간단하다. 경운기하고 트랙터 끌어다 막아야 되는 기라"

벌겋게 파헤쳐진 산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진북면 지산마을 너머 진동만은 실로 아름다웠다. 아마 이런 곳에서 골프채를 들고 휘두르는 유한 사람들에겐 이보다 더 좋은 골프연습장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날마다 땅, 땅 하며 총소리처럼 들려오는 골프공 나는 소리는 얼마나 주민들의 귀를 따갑게 할 것인가. 몰려드는 골프장 손님들을 위한 야간 서치라이트 불빛에 주민들은 또 얼마나 잠을 설쳐야 할 것인가.

“도로 건설은 그래도 국책사업이라 우리가 참았는데, 지들 개인이 돈 벌겠다고 저러는 짓을 어떻게 용납한단 말이야. 이런 일을 벌이면서 아무 설명도 의논도 안 하고, 지들 맘대로야. 대체 우리를 얼마나 무시하기에 이런 짓을 하노 말이다. 이건 탕탕 하고 우리한테 선전포고한 거나 마찬가지 아이가.”

여기에 대한 해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한 어르신은 혀를 차며 이렇게 말했다. “경운기하고 트랙터 끌어다 공사 못하게 막아버려야지. 다 짓고 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거라. 그라고 저래 벗기 놓은 것도 다 다시 원상복구 시켜야 된다. 저게 뭐꼬, 마을의 영산을 할딱 벗겨놓고 말이야. 저게 사람으로 말하면 코고 이마고 그런 건데, 우리 마을을 죽이는 게 아니고 뭐냔 말이다.”

※ 이 글은 마산 삼진/구산마을 더불어사는내고장운동본부(더불사) 소식지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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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무시해? 본때를 보여줄 테다!"

6.2 지방선거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삼진ㆍ구산지역 시의원 선거구에도 네 명의 후보가 출마했다. 이 지역 주민들은 이번 선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지역민들의 여론을 들어보기 위해 직접 현장으로 나가보았다. 의외로 반응은 뜨거웠다. 진동면 소재지에서 만난 어느 유권자는 매우 격앙돼 있었다. “이번에 본때를 보여줘야 된다. 진동을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

대체 무슨 얘길까? “진동은 인구가 제일 많아. 그런데 한나라당 하는 짓이 뭐야. 진동엔 한명도 공천 안줬어. 이거 잘못된 거 아냐?” 또 다른 이 지역민도 같은 반응을 보였다. “세 번이나 시의원 해먹으면서 자기들이 한 게 뭐 있어? 세 번만 해먹고 절대 안 나온다고 해놓고 이번에 또 나왔어. 약속도 안 지키는 사람 무슨 말을 믿어.”

시골이라고 예외 없는 한나라당 공천후유증


일단 나온 자체가 약속을 안 지켰다는 거다. 그러나 진동 버스환승장에서 만난 한 할머니는 다른 의견을 보이기도 했다. “사람은 아주 점잖은 사람 아이가. 약속 문제도 있고, 활동이 별로 없었던 것도 맞지만, 그래도 꽤 좋은 사람 아이가?”

일부에서는 지역민에게 아무런 신망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공천 된 데 대한 비판도 있었다. “돈 놓고 돈 먹기가 바로 이런 거 아니가? 돈 좀 있다고 거들먹거리는 것들 반드시 욕을 보이야 된다.” 경남지역 한나라당 공천후유증이 삼진ㆍ구산지역도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였다.

진동 고현에서 만난 한 유권자는 이렇게 말했다. “공천 받았다고 다 됐다고 생각하는지 코빼기도 안 보인다. 지들이 그러고도 될 거라고 보나.” 이 말을 듣자 <레미콘반대대책위>에서 내건 플래카드가 생각났다. “노인들이 추위에 떨며 싸울 때 시의원들은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섬기는 주인은 누구인가?”

플래카드를 본 마을 노인들은 모두 “그래, 그때 그 사람들 아무도 안 왔었지, 우리가 그래 고생할 때도.” 그러면서도 일부 진전 주민들은 혼란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우리 진전에는 두 명이 동시에 출마했거든. 한명은 한나라당이고, 한명은 무소속인데 참 난감하네.”

그러면서도 진동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세 번이나 했으면 됐지, 약속도 깨고 왜 또 나왔나” 하는 반응들이 많았다. “도의원에 자리 없어 밀리니까 또 나온 거 아냐?” 한 주민은 이렇게 말했다. “두 사람은 같은 진전 사람이면서도 레미콘공장에 대한 입장이 확실히 달랐어. 한 사람은 적극적으로 반대운동에 앞장섰던 반면 다른 한 사람은 아예 관심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찬성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거든.”

"주민들의 편에서 무엇을 했고, 앞으로 할 사람인가가 중요해"

진북면에서 만난 한 유권자도 역시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문제는 우리 지역 문제에 얼마나 주민들 편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가 중요하지요. 진북산단에 주강공장이 들어와 독가스를 내뿜을 때 시의원이란 분들이 대체 뭘 했지요? 우리는 그걸 다 기억하고 있어요. 이번에 투표로 확실히 뭔가 보여줘야 되지 않겠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구산면에서 만난 어느 어르신의 이야기였다. “선거? 나는 그런 거 모른다. 그거 어차피 지들끼리 짜고 치는 고스톱 아이가. 선거는 해서 뭐 하나.” “그래도 이번엔 뭔가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주민들이 직접 뽑은 후보도 있다고 하던데요.” 라고 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 기 있었나? 그래봐야 말짱 꽝인 기라. 의원인지 병원인지 뽑아봐야 어차피 완장 차면 다 똑같은 놈 되는 기라.”

아직도 이렇게 선거에 대한 불신이 크구나 하고 생각하니 한편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전반적인 분위기는 조용하면서도 뜨거운 열기가 감지되었다는 거다. 주민들은 이번만큼은 제대로 한번 찍어보자는 의지들이 대단했다. “당이니 연고니 그런 거 보지 말고 진짜 제대로 된 인물을 뽑아야지.” 하고 말하는 어느 지역민의 이야기는 변하고 있는 삼진ㆍ구산지역 유권자들의 정서를 대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6.2 지방선거 현장에서 전하는 마지막 목소리는 이렇다. “이번 선거는 엄청 재미있을 거 같다! 매우 뜨거운 한판이 될 것 같은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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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주민들이 직접 만든 후보의 선거운동, 어떻게 할까?

저는 지금 마산 진전면의 산골마을에 와있습니다. 이곳에서는 특별한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는 중입니다. 주민들이 직접 추대한 주민후보가 이번 6·2 지방선거에 출마했기 때문입니다. 마산
삼진·구산 지역의 시의원 후보로 출마한 강신억 후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강신억 후보는 삼진지역(진동, 진전, 진북면)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더불어사는내고장운동본부(약칭 '더불사')>의 본부장입니다. 

마산 진전면 대정리. 강신억 후보 선대본 회의가 열리는 미천마을로 가다 빛깔이 너무 고와 한 컷.


더불사는 이제 창립한지 갓 1년이 된 단체입니다. 그러나 이 단체는 어떤 단체보다 오랜 역사를 가진 조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전면 레미콘 공장, 진북면 주강공단, 쓰레기 매립장 등 평화로운 농촌마을에 공해성 공단이나 유해시설을 설치하려는 마산시의 의도에 맞서 지역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맞서 싸우면서 만들어진 단체가 바로 더불사이기 때문입니다. 


수의사 출신의 농부가 데모꾼을 거쳐 시의원이 되려는 까닭은?

그리고 또 더불사는 자기 마을 문제에만 관심을 갖는 이익단체가 아닙니다. 구산면 주민들이 수정만 매립지 문제로 몸살을 앓자 그쪽 마을에도 많은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는 단체이기도 합니다. 부패한 관료사회와 자기 배 불리기에만 급급한 기업의 결탁으로부터 피해 받는 모든 사람들은 한편이라는 생각으로 고통을 함께 나누기에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 더불사요 그 회원들입니다.

수의사 출신의 농부 강신억 본부장은 이미 70을 바라보는 나이입니다. 사실 저는 그분을 처음 뵈었을 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이고, 70이나 되신 분이 무슨 영광을 보려고 나오셨을까?" 그러나 그런 생각은 더불사 총회에서 한 그분의 몇 마디 연설을 듣는 순간 접어야 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시청과 기업들의 횡포에 마냥 투쟁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우리가 직접 시의원도 되고 시장도 돼야 되겠더라."

구산삼진지역 4개면 청년회 축구대회에서 참가 선수로부터 막걸리를 받는 모습


강신억 본부장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왜 시의원이 되려고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우리 주민들이 더 이상 데모 같은 거 그만 하고 않고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왜 우리를 이토록 피곤하게 괴롭히는가. 내가 나가서 여러분들 데모 좀 안 하고 살 수 있도록 만들겠다." 거기에 참석하신 어느 할머니도 그러시더군요. "우리가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냥 가만 내비리만 도."


글쎄 이건 참 충격적인 이야기였습니다. 그냥 가만 내버려 두라는 게 그분들의 요구였던 것입니다. 평화롭게 잘 살고 있는 마을에 왜 레미콘이니, 주강공장이니, 쓰레기 매립장이니 하는 걸 만들어 사람을 괴롭히느냐는 것입니다. 뭘 잘해 줄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살던 대로 내버려두면 된다는 어느 할머니의 발언(!)이 제겐 실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시골집 마당에서 여는 신선한 선거대책회의, 유쾌한 선대본부장의 감동 선거운동

하긴 공기 좋은 농촌마을에 독가스를 내뿜는 공해공장과 쓰레기 매립장을 짓겠다고 하는 것이 농촌마을을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니지요. 다 도시인들의 편리와 기업들의 이윤과 표가 많은 도회지 사람들이 눈치를 보아야 하는 선출직 시장과 시의원들 때문입니다. 인구가 적은 농촌마을의 민심이 그들에게 보일 리도 없습니다. 아무튼 저는 농촌의 민심이 직접 추대한 강신억 본부장을 보기 위해 진동면 그의 사무실을 찾았습니다.

진전면 미천마을에서 선거대책본부 회의 모습


그러나 그는 사무실에 있지 않았습니다. 선거대책본부 회의를 하기 위해 진전에서도 깊숙한 산골마을 미천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미천마을로 들어갔더니 마침 강신억 후보 선대위원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산골마을 어느 집 마당에 둘러 앉아 있었는데, 저는 이런 선거대책회의를 예전에 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보기 힘든 참으로 진귀한 광경이었습니다. 

사회를 보고 있는 사람은 경남대 안차수 교수였습니다. 그는 매우 젊고 유머가 넘치는 교수 같지 않은 교수라고 합니다. 그와 실제로 대화를 몇 번 해본 사람이라면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금방 알아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정말 격의 없는 교수였습니다. 교수라는 직업을 가진 분들이라면 으레 가지고 있을 법한 권위나 체면 따위는 아예 안드로메다에 이주 보낸 듯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매우 매력적이고 유쾌한 사람이었는데, 그런 사람이 아마도 강신억 후보의 선거대책본부장이었던가 봅니다. 그러므로 저는 순간 그런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강신억 후보도 매우 훌륭하지만, 저렇게 유쾌한 분이 선대본부장을 맡고 있으니 안 될 일도 되겠군." 하하, 좀 난센스 같은 말이긴 합니다만, 재치 넘치는 안 교수의 유머들이 생각나서 저도 한 번 재미를 떨어봤습니다.

안 될 일도 될 것 같은 아름다운 광경들

아무튼, 이토록 정겨운 선거대책회의를 본 일이 있으십니까? 이렇게 선거운동 하면 정말 재미도 있고 밥맛도 좋아질 것 같지 않습니까? 딱딱한 책상보다 이렇게 시원한 자연 속에서 흙냄새, 풀냄새 맡아가면서, 그러다 저편 서녘하늘을 붉은색으로 수놓는 저녁노을도 보아가면서 '당선'을 논의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요? 실제로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표정은 매우 행복해보였습니다.


강신억 후보의 가슴에 "주민이 추대한 후보" 문구가 선명하다.


그러나 세상에, 이 회의가 끝나고 진전의 어느 한우소고기 전문점으로 식사를 하러 갔지 뭡니까. 갈비탕을 한그릇씩 먹었겠지요, 물론 소주와 맥주도 몇 병씩 들어 오고요. 진전마을의 소고기 식당들이 요즘 유명하다고 하더니만, 진짜 벅적벅적 하더군요. 저는 당연히 밥은 그냥 공짜로 주는 거다, 그렇게 생각했지요. 그런데 돈을 만 원씩 거두지 뭡니까. 20명 쯤 되는 참석자들이 모두 돈을 만 원씩 내더군요. 


그리하여 '농촌주민들이 직접 만든 주민후보는 어떻게 선거운동을 하는지' 취재하러 갔던 저도 만 원을 각출당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답니다. "여기 선거대책위원들은 밥 먹을 때도 이렇게 밥값을 따로 각출하나 보네. 야유, 밥 정도는 그냥 사주면 안 될까?" 덕분에 저도 계획에 없던 만 원을 내긴 했습니다만, 그러나 참 아름다운 광경이었습니다.

선대본부장님도 참 유쾌한 분이고, 선대위원들도 저토록 자발적인 열의들이 대단하신 걸 보고 앞에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더 하면 이렇습니다. "안 될 일도 되겠네!" 사람들의 표정은 무척 밝았습니다. 그들은 거꾸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 될 일이 아니에요. 이미 되는 일을 뛰어다니면서 확인시키는 게 우리 일이죠. 무소속이라고 얕보다간 큰 코 다친다는 걸 이번에 알 게 될 거예요."

"주민들이 직접 만든 후보의 힘이 어떤 건지 똑똑히 보게 될 거라 그 말이죠."
Posted by 파비 정부권
강신억 더불사 본부장, "마산시 비전사업본부는 비전사기본부"

마산은 오랜 동안 수정만 매립지 문제로 시끄럽습니다. 원래 수정만을 매립할 때 마산시는 주민들에게 방파제를 만드는 공사라고 속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나중에 매립지란 사실이 밝혀지자 이번엔 주택지를 만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조선기자재 공장이 들어오는 걸로 다시 바뀐 것입니다.

마산시청을 향해 "주민들의 재산을 내놓아라" 고함을 치는 수정만 주민들


주민들이 수정만 매립지에 STX조선소를 유치하는데 앞장서고 있는 마산시 비전사업본부를 비전사기본부라고 부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마산시는 진북면에 산업단지를 조성하면서 이곳에 첨단무공해산업시설이 들어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는 첨단산업시설 대신 주강공장이 들어섰습니다.

이 주강공장에서는 매연이 아니라 독가스가 뿜어져 나온다고 합니다. 매연과 독가스의 차이, 그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매연은 몸에 해로운 것이지만 독가스는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더불어사는내고장운동본부(더불사)> 강신억 본부장이 마산시에 물었다고 합니다. "진북산단에 첨단공장이 들어온다 해놓고 우리한테 왜 사기 쳤냐?" 

강신억 본부장. 직접 시정을 바꾸기 위해 통합창원시 삼진, 수정지구 시의원 후보로 출마했다.


아무 권한도 없는 사람이 웬 마산시장이고 부시장? 

우물거리며 제대로 답변을 못하자 다시 물었습니다. "첨단산업시설에 주강공장 허가 내주면서 우리한테 설명했냐?" "안했다." "인정하느냐?" "인정한다." 이에 강신억 본부장이 부시장에게 따지듯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독가스를 내뿜는 주강공단 가동을 중단시킬 용의가 있는가?" 이에 부시장의 대답은 참으로 실망스런 것이었습니다. "그럴 권한이 없다." 


4월 20일 오후, 쏟아지는 비속에서 열린 마산시 규탄 수정만 주민대회에서 강신억 본부장은 분개해서 외쳤습니다. "아니 아무런 권한도 없는 놈들이 비싼 월급은 왜 받아가는 겁니까?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놈들이 무엇 때문에 시민의 혈세를 축내는 겁니까?" 이처럼 마산시는 지금껏 거짓말로 주민들을 속이다 들통 나서 할 말이 없으면 "나는 아무 권한이 없소!" 라는 무능한 말로 일관했던 것입니다.

빗속 거래행진을 함께 하고 있는 강신억 본부장


오죽 거짓말을 자주 했으면 STX와 마산시를 일러 "월드 베스트 사기꾼"이라고 했겠습니까. 그런데 이번엔 마산시가 STX에 특혜를 주었다고 해서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하긴 수정만 매립지를 STX에 불하한 자체가 특혜지만, 이번 문제는 조금 달랐습니다. 주민들의 주장에 의하면 주민들의 재산을 아무런 이유도 설명도 없이 STX에 무상으로 주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마산시가 주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난 3월 26일 STX와 수정지구 매립사업을 완료하고 정산협약을 체결했는데 이때 면 청사부지와 어촌계공동작업장 등 10,460㎡의 감정평가금액 24억 원이 고스란히 STX로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이 24억이란 금액은 감정평가사가 측정한 가치일 뿐이므로 실제 금액은 이보다 훨씬 높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요즘 공장부지를 평당 100만 원 주고 살 수 있는 곳이 있을지 생각해보면 얼마나 큰 돈이 오갔는지 능히 짐작이 갑니다. 주민들의 주장에 의하면 마산시가 공짜로 넘긴 이 일만여 평 부지의 감정평가금액 24억 원을 STX가 다시 수정만 마을 발전기금으로 내놓는 웃지 못 할 희극이 벌어졌다는 겁니다. 듣고 보니 실로 희극인지 비극인지 분간할 수가 없습니다. 

없던 땅도 만들어내고, 있던 땅도 사라지게 만드는 신통한 마산시

진보신당 마산시 현역 의원인 이옥선 의원

마산시는 이 공공부지가 주택부지일 때는 남아있었지만, 공장부지로 변하면서 없어졌다는 입장이라는데, 그 말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실체적인 부동산이 지목이 대지에서 공장용지로 바뀌었다고 없어지다니, 서류상 지목 변경만 하면 있던 땅도 없어진다는 마산시의 재주가 신통하기만 합니다. 하긴 바다를 매립해 없던 땅도 만들어내는데 선수인 마산시이고 보니…. 

<더불사>의 고문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임수태 진보신당 고문은 "STX가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 자그마한 조선소에 불과했던 STX가 어떻게 단기간에 세계적인 거대 기업이 될 수 있었는지 이제야 그 실체를 알 것 같습니다. 저는 엊그제 STX 하청업체 (주)진명의 사장이 서울 STX 본사에 올라가 1인 농성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농성에 들어가기 전에 죽을 각오로 미리 유서를 써놓고 갔는데, 그 유서에는 STX가 납품단가를 30%씩이나 깎으면서도 진명에서 일하는 직원들 임금은 깎지 말도록 강요했다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STX는 이렇게 해서 컸던 것입니다. 거기에다 마산시 같은 곳에서 이런 특혜까지 받으면서 크지 않는다면 그게 정상이겠습니까?"

맞는 말씀입니다. 한편으로 하청업체 죽이고 한편으로 특혜 받으면서 성장하지 못한다면 그건 바보나 다름없습니다. 아니 바보라도 그렇게 하면 돈을 벌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튼 이날 비가 내리는 가운데 수정만 주민들의 집회 열기는 뜨거웠습니다. 경찰들이 둘러싼 마산시청을 향해 힘찬 고함을 지르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목소리가 참으로 우렁찼습니다.

대열에 낙오했지만 열심히 따라오시는 할머니. 마산시는 이분들에게 "권한 없다" 말고 무슨 할 말이 없을까?


STX가 부자된 비결, "지목을 바꾸었더니 마산시 땅이 내 땅이 되었더라"  

그러나 마산시는 묵묵부답입니다. 하긴 주민들이 재산을 빼돌려 STX에 공짜로 준 마산시나 그렇게 받은 돈 중에 일부를 잘라 주민들에게 마을발전기금이라고 내놓은 STX나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그들이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지목을 대지에서 공장으로 바꾸었더니 땅이 없어졌더라" 하는 것 외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니 참으로 명언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지목을 바꾸었더니 땅이 없어졌다? 그런 재주 나한테도 좀 가르쳐주면 좋으련만…, 그럼 나도 STX처럼 금방 부자 될 텐데…, 하하~, 하도 어이가 없어서 웃자고 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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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의 3월', 영화보다 더 멋진 2시간짜리 드라마

오늘 밤 10시 40분, 마산 mbc에서 제작한 <누나의 3월>이 전국 방송됩니다. 저는 이미 시사회를 통해 이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지방 방송사에서 만든 드라마라고 하기엔 너무나 멋진 작품이었습니다. 마치 한 편의 잘 만들어진 영화를 보는 듯했습니다. 아니 영화보다 더 멋진 영화였습니다.



3.15는 마산에서 이승만 정권의 3.15부정선거에 항의해 일어났던 민주화투쟁이었습니다. 이 투쟁의 과정에서 김주열 열사가 머리에 최루탄이 박힌 채 죽음을 맞았으며 그 시신은 마산 앞바다에 버려졌습니다. 그리고 4월 11일, 김주열 열사의 시신은 다시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습니다.

1960년 4월 11일을 기해 마산 시민들은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 투쟁은 전국으로 확대되었으며 마침내 4.19혁명의 불길로 치솟았습니다. 바로 내일이 4.19혁명 50주년 기념일입니다. <누나의 3월>은 바로 그 시대를 살았던 이름 없는 사람들의 이야깁니다. 다방레지, 구둣방 소년들, 넝마주이, 그리고 학생들.

<누나의 3월>은 3.15의거나 4.19혁명의 주역들의 영화는 아닙니다. 그러나 사실은 주역들보다 더 주역인 민초들을 다룬 영화입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모든 투쟁의 주역들은 사실은 이름이 없습니다. 10.18부마항쟁을 시작한 사람들도 사실은 이름 없는 학생들이요, 거리의 노동자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주역들도 진실을 말하자면 진짜 주역들인 대중이 만들어놓은 투쟁의 현장에서 앞세워진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희한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과거에 민주화투쟁의 대상이었음직한 사람들이 3.15의거, 10.18항쟁 등의 기념식에서 마치 주역처럼 행세합니다.

기념사를 하기 위해 기념식장 맨 앞줄에 앉아 기념사를 하기 위해 기다리는 그들의 모습에 진짜 투쟁의 주역들은 기념식장을 외면하고 창동, 오동동의 막걸리집으로 향한다고 합니다. 완전히 주객이 전도되었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3.15의 주역들이 따로 모여 김주열 열사 장례식을 50년 만에 치르기도 했지요.

얼마 전, 백인닷컴 김주완 기자의 기사에 의하면, 마산시청이 발간하는 시보에서 3.15의거 50주년을 언급하며 김주열 열사에 대해 "구경하다가 희생당했다"는 모욕적인 문구를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마산대표; 백남해 신부, 남원대표; 김영철, 김주열열사장례위원장; 김영만)가 마산부시장에게 수정할 용의가 없냐고 항의하자 "그럴 용의가 없다"는 대답만 들었다는 것입니다.
 

관련기사 ☞   명백한 오보도 정정보도 못한다는 마산시
                 마산시보, 김주열 열사 폄훼, 왜곡 말썽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들은 마치 주역인 것처럼 맨 앞자리에 앉아 3.15의거를 기념하면서도 정작 3.15 투쟁의 정신은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3.15의 주역이었던 다방레지, 구둣방 소년들, 넝마주이, 이름 없는 학생들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입에서 "김주열 열사가 구경하다가 희생당했다"는 따위의 말이 튀어나왔을 것입니다.

오늘 밤, 4.19혁명 50주년을 맞아 그 도화선이 됐던 3.15의거 현장을 재현하는 영화 <누나의 3월>이 방영됩니다. 드라마지만 영화보다 더 멋진 영화입니다. 재미도 있습니다. 재미로 말하자면 이 드라마보다 더 재미있는 영화는 잘 없으리라고 보증합니다. <화려한 휴가>보다 더 재미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드라마를 꼭 보리라고 생각합니다. 내일이 4.19혁명 50주년 기념일이므로 특히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갖고 이 드라마를 보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궁금한 게 있습니다. 높으신 분들, 공무원들, 마치 주역처럼 맨 앞줄에 앉아 기념사를 하시는 분들도 이 드라마를 볼지…. 

저는 그들이 꼭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고서도 기념식장의 맨 앞줄에 앉아 기념사를 기다리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지, 그게 궁금한 것입니다.  

Posted by 파비 정부권

엊그제 밤, 겨울에도 볼 수 없었던 비바람 소리가 윙~ 윙~ 창문을 흔들었습니다. 찬바람이 방안으로 스며들며 떠난 줄 알았던 추위를 다시 몰고 왔습니다. 발이 시리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오죽했을까요. 그리고 두어 시간 후에 다시 현관문을 열고 밖을 내다봤더니 비바람이 눈바람으로 바뀌고 있었습니다.

정원수 너머 어둠에 묻힌 지붕위에 하얗게 눈이 쌓이고 있는 게 보이실 겁니다. 강풍에 실려 온 눈보라가 마치 우리 동네를 북국에 실어놓은 게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였답니다.


플래시를 켜고 찍으니 눈송이가 내려오는 게 보이시죠?


다음날 아침, 세상이 하얗게 변했습니다.
아직 눈보라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겨울보다 훨씬 더 춥게 느껴집니다. 이렇게 추운 겨울은 느껴보지 못했습니다. 그것도 춘삼월에 눈보라를 동반한 강추위를 맛보게 되다니... 그래도 눈을 처음 본 딸아이는 마냥 즐겁습니다.


우리 집 옥상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출근시간인데도 차들이 한 대도 나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오후에 살펴보니 딱 한 대가 나갔더군요. 누군지 몰라도 대단히 용감한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 옆은 우리 집 마당에서 눈사람을 만들고 있는 딸아입니다.

학교에 오지 말라는 문자를 받고 신이 난 딸아이와 함께 만날재에 올랐습니다.  마산만이 보이는군요.
이날만큼은 마산만도 매우 아름답습니다.


만날재 공원에서 우선 사진부터 한 컷. 
그런데 색깔이 이상하군요. 
3인치 모니터 창에 비친 그림도 너무 하얀색이라 눈 때문에 그런가 했는데, 집에서 뽑아보니 영 색감이 아니군요.   


계속 하얗습니다. 저 멀리 마산만의 푸른 물결과 창원, 진해를 가르는 하얀 머리의 산줄기가 보여야 하지만 그저 하얀 도화지 위에 딸아이와 소나무만 덩그러니 그려진 느낌이네요.


음, 여기선 은근하게 배경이 보이는군요. 역시 하얀 눈의 빛깔이 너무 강렬하기 때문일까요?  


빨간 나뭇잎이 너무 곱습니다. 눈속에서 보니 붉은 색이 더 붉어 보이더군요. 나무 이름은 제가 모릅니다. 
저는 고구마 줄기와 담쟁이 넝쿨을 잘 구분 못한답니다. 

한 번은 그런 일이 있었지요. 서울 종로에 갔을 때 도로변에 단지(화분인데 보통단지보다 훨씬 크더군요) 비슷한 것에 심어놓은 식물을 가리키며 한 일행이 물었습니다. 
"니 저기 뭔지 아나?" 물론 그는 저를 잘 아는 사람입니다. 짓궂은 장난이 하고 싶었던 게지요. 
한참을 망설이던 제가 자신 없이 대답했습니다. 
"담쟁이 넝쿨 아닙니까?" 
그러자 사람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앙천대소를 하며 말했습니다. 
"하하하하~ 그럴 줄 알았다. 이기 어떻게 담쟁이 넝쿨이냐, 고구마 줄기지." 

사실 저는 담쟁이 넝쿨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릅니다. 단지 '마지막 잎새'에 나오는 담쟁이 넝쿨이 그때 생각났을 뿐이죠.   


이날은 평일인데도 유난히 등산객이 많았습니다.


만날재 공원에 심어진 조경숩니다. 역시 나무 이름은 모릅니다.


그 이름 모를 나무 앞에 딸아이가 포즈를 취했습니다.
눈밭을 굴러다니던 딸아이가 잠깐 저를 위해 포즈를 취해주었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색깔이 너무 이상합니다.
그래서 카메라를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글쎄 이럴 수가….
노출레벨을 가장 오른쪽에 맞추어 놓았군요. 누가 그랬을까요?
저는 원래 이런 거 손 안대는 편인데, 틀림없이 아들 녀석입니다.
이 녀석은 뭐든 손에 쥐면 가만 놔두는 법이 없거든요.

아무튼 레벨을 다시 가운데로 맞추고 다시 찍었습니다.
이제 제대로 나오는군요.
아뿔싸~, 어쩐지 눈사람 윤곽이 희미하더라니.


에혀~ 눈사람을 눈 속에 파묻은 꼴이 되었네요. 그러나 어쨌든 눈 구경은 실컷 하셨지요? 만날재에 올라가니 도심에서 만난 눈과는 질이 달랐답니다. 발목까지 푹푹 빠지도록 쌓인 눈밭 그리고 아무도 밟지 않은 그 눈밭에서 뒹구는 재미란… 겪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그런 경지라고 할 수 있겠죠.

우리 딸아이는 10년 만에, 정확히는 8년하고 4개월 만에 처음 보는 눈이었습니다. 혹시 어디서 눈을 봤을지는 모르겠는데, 마산에서는 처음 보는 눈이었답니다. 제게도 물어보더군요.

"아빠도 눈사람 오늘 처음 만들어보나?"
"그래."
"아, 그렇구나. 아빠도 그럼 눈 처음 본 거야?" 
"아니지, 아빠 어릴 땐 눈이 엄청 많이 왔었지." 
"그런데 왜 처음 만들어 봤다고 했어?" 
"아, 마산 와서는 처음이란 말이었어." 
"아, 그랬구나. 아빠 어릴 땐 정말 눈이 많이 왔어?" 
"그랬지. 정말 많이 왔었단다. 네 키만큼 눈이 쌓이고 그랬지. 정말 솜사탕만한 눈송이가 하늘에서 떨어지고 그랬지." 

그렇게 말해놓고 생각해보니 제가 어릴 땐 정말 그렇게 생각했었군요. 하늘에서 마술할멈이 솜으로 만든 눈송이를 뿌린다고 말입니다. 평소에 열심히 솜으로 눈송이를 만들어 모아두었다가 기분이 좋을 때 땅위로 뿌리는 거지요. 그러면 하늘하늘 눈송이가 푸른빛을 내며 내려온답니다.

그럼 엊그제 밤처럼 눈보라가 몰아칠 때는 마술할멈의 기분이 매우 안 좋을 땐가 보지요? 아무튼 기분 좋은 하루였습니다. 언제 다시 이런 날이 올 수 있을지…, 자주 왔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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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마산시 내서읍 | 만날재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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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파비 정부권

'더불어사는내고장운동본부' 지방의원 후보수락 연설
"우리도 데모 좀 그만 하고 밥 좀 먹고 살자!"

마산시에는 삼진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진전면, 진북면, 진동면, 이 세 곳을 합쳐 그렇게 부릅니다. 원래는 창원군 삼진이었던 이곳은 1997년부터 마산시에 편입되었습니다. 한국전쟁 때는 낙동강 전선과 더불어 가장 치열한 전장이기도 했던 곳입니다. 북한인민군의 침공에 맞서 싸우다 이곳에서 전사한 수많은 해병대를 추모하는 위령비가 당시의 치열했던 전흔이 되고 있습니다.

삼진 중 하나인 진전면 어느 마을 풍경


아픈 전쟁의 상처가 많은 삼진마을은 아직도 전쟁 중

한편 삼진은 국군에 의해 무고하게 희생된 수많은 학살 피해자들이 존재하는 마을이기도 합니다. 어쩌다 조용한 이 마을 옆 국도를 지날 때면 마치 억울한 혼령들의 귀곡성이 들리는 듯 하여 흠칫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비오는 날이면 더욱 그렇습니다. 물론 제가 당시의 참상에 대해 들은바가 많기 때문이겠지요.

그런 아픈 역사를 가진 삼진마을에 <더불어사는내고장운동본부(약칭 '더불사'>라는 단체가 있다고 했습니다. 무엇 하는 단체인가 했더니 조용한 농촌에 레미콘 공장을 지어 주민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 공장을 짓는다고 환경을 해치고 지하수를 오염시키려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주민들의 삶의 터전을  저당 잡히려는 시장과 공무원들에 맞서 싸우는 단체라고 했습니다.

"아이고 이곳은 아직도 전쟁이 안 끝났나. 인민군에 당하고 국군에 당한 아픈 역사를 가진 마을이 이젠 공무원들과 돈 많은 놈들한테 당하는가보네. 왜들 사람을 좀 조용히 살게 내버려 두지 못하나." 당장 그런 생각부터 들었었지요. 아무튼 어제는 그 더불사의 총회가 있는 날이라고 했습니다. 마침 토요일이라 함께 가자는 진보신당 사람들과 함께 카메라를 메고 더불사 총회장에 갔습니다.

더불사 총회가 열리는 곳은 진전면 농협 강당이었습니다. 총회장에는 이미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역시 농촌답게(?) 대부분 노인들이더군요. 물론 행사장을 차리고 안내하는 사람들은 젊은이들이었지만 거의 어르신들만 눈에 띄었습니다. 총회가 시작되기 전에 여흥을 위해 초청된 국악오케스트라(!)의 공연이 있었습니다.

'섬마을선생님'도 열창한 국악오케스트라. 한 분은 앵콜했는데 왜 안 받아주냐고 불만이었다.


더불사 총회장, 흥겨운 국악공연에 분위기도 좋고

생소한 국악공연이었지만 나이 든 어르신들은 매우 신나는 모양이었습니다. 박수도 치고 장단도 맞추고 하는 폼이 아주 자연스럽고 흥겨워 보였습니다. 참석자 중 한분은 이렇게 무대에 나와 춤도 추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르신들에겐 생소한 국악공연이 아니라 매우 익숙한 공연일 수도 있겠군요. 제 기준으로 자르다 보니, 원….  

국악공연이 끝나고 이어 2부 본행사로 총회가 시작됐습니다. 참석자들이 한명도 빠져나가지 않을 것을 보면 모두들 더불사 회원들인 모양입니다. 저는 사실 걱정했었거든요. 어떤 행사든지 공연 끝나고, 떡 좀 얻어먹고, 그러고 나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이 보통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흥겨운 분위기는 2부 총회가 시작되자 아주 진지한 분위기로 바뀌었습니다. 

사회자님의 그간의 약력과 지난 1년 사업보고가 끝나고 이어 더불사 강신억 본부장님의 인사 차례가 되었습니다. 본부장님도 제가 보기엔 나이가 지긋하신 어른이었습니다만, 회원들을 향해 "어르신들" "어르신들" 하는 소리에 속으로 웃음이 나왔지만 참았습니다. 그런데 인사말을 하던 중 돌발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본부장님이 갑자기 북받치는 감정에 못 이겨 울기 시작한 것입니다. 

갑자기 펑펑 울어서 사람들을 놀래킨 강신억 본부장.



아, 이럴 수가…, 그러나 저는 순간 기자정신(?)을 발휘하여 얼른 뛰어가 울면서 간신히 인사말을 하는 본부장님의 얼굴을 카메라에 담았지요. 원래 연설문을 준비하셨지만, 그걸 제쳐두고 그냥 심중에 있는 말씀을 하시다가 어느 대목에서 흐느끼며 목을 잇지 못하는 상황이 연출된 것입니다. 연설하다가 중간에 그토록 흐느끼며 우는 장면을 저는 처음 보았습니다.

인사말 도중 울음을 터뜨린 더불사 강신억 본부장

본부장님은 원래 삼진에서 태어나고 자란 삼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릴 때 고향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수의사가 됐습니다. 그렇게 평온한 삶을 살던 그는 어느날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삼진으로 돌아와 진전 마을에서 축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소를 키우는 농민이 되신 거지요. 

수의사에서 농민이 되었던 그분이, 다시 내 고장 농촌마을을 지키기 위해 데모꾼이 된 이야기를 하시다가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만 것입니다. 삼진중학교에 다닐 무렵 한국전쟁이 터졌는데 그때 참전했다가 전사한 사람의 상여가 학교운동장을 한 바퀴 도는데 뒤따르던 부인이 슬피 우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더라는 것입니다. 

후보수락연설에 박수치는 더불사 회원들


그분이 얼마나 고생하며 아이들을 키웠을까 생각하니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아, 그렇군요. 우리나라는 그 자리에 모이신 어르신과 같은 분들의 피땀 어린 노력으로 이만큼 잘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나라는 선진국이 되지 못했습니다. 국가 경제력으로 보면 세계 10위권을 넘나드는 경제대국이지만 선진국은 아닙니다. 

경제대국 레벨에 드는 우리나라는 왜 아직도 선진국 소리를 못 들을까? 

왜 선진국이 아닌가? 강신억 본부장님이 울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던 이유가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그대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 보육비, 교육비 걱정 없는 나라, 노인들 의료비와 생계비 때문에 자식들이 불효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 그런 나라가 아직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경제력은 10위권을 맴돌면서도 복지는 100위권 밖에서 겉돌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부장님은 머슴일 잘 하라고 공무원 뽑아주었더니 도리어 머슴이 주인을 부려먹고 심지어 쫓아내기까지 하는 나라가 우리나라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현재의 시장이 그렇고 시의원들이 그렇더라는 거지요. 국회의원은 두말 하면 잔소리니까 아예 생략하셨습니다. 머슴들이 주인인 주민을 못살게 굴고 괴롭히니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주인인 주민들이 머슴들 다 쫓아내고 직접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거지요. 주인이 직접 나서서 정치도 하고 시청 공무원도 부려서 의료비, 교육비 걱정 안 하고 살 수 있는 복지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본부장님은 역설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만 고생하던 옛날 생각이 나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던 것이지요. 보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도 눈물이 핑 돌더군요.

경남도민일보 기자와 인터뷰도 하시고...


더불사는 총회 마지막 순서로 "이제 더 이상 시장이든 시의원이든 믿을 수 없다, 우리 후보를 우리가 직접 만들어 내보내 당선시키자"는 결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강신억 본부장님을 2010년 지방선거 시의원 주민후보로 추대했습니다. 아직 눈에 눈물이 덜 말라 뿌연 눈을 훔치며 나온 강신억 본부장은 길게 말하지 않고 간단하게 말했습니다.

"우리 좀 고마 괴롭히고 데모 좀 안하게 해다오!"

"여러분들이 저를 후보로 추대해 내보내는 데에는 다른 뜻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데모 좀 그만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가 열심히 싸워서 우리도 이제 데모 같은 거 좀 안 하고 각자 생업에 종사하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지금껏 작지 않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많은 인사말을 들어봤지만 이보다 명쾌한 시의원 후보 수락연설은 들어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데모 좀 안 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겠다." 이보다 더 좋은 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말을 거꾸로 하면 이렇게 되는 것이로군요.  

그동안 마산시장을 비롯한 시의원들, 공무원들이 삼진 주민들이 데모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만들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도 더불사 총회장에 다녀온 소감문의 마지막을 그렇게 쓰도록 하겠습니다. "황철곤 시장님, 여러 의원님들 그리고 공무원님들, 그동안 마이 괴롭힜다 아임니까? 이자 고마 하시고 데모 좀 안 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해주소, 제발!"  

Posted by 파비 정부권
수정만 매립지에 STX조선소가 입주하는 데 반대하는 수정만 주민들이 잘 쓰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월드 베스트 사기꾼"입니다. 이 월드 베스트 사기꾼으로 지목된 것은 다름 아닌 황철곤 마산시장과 STX그룹입니다. "월드 베스트 STX"란 기업홍보용 구호를 패러디한 이 데모구호는 누가 아이디어를 냈는지 몰라도 참으로 기발합니다. 


수정만 주민들의 데모구호, "월드 베스트 사기꾼" 

그러나 데모구호는 어디까지나 데모구호일 뿐입니다. STX가 제아무리 월드 베스트라고 우겨도 아무도 월드 베스트라고 인정해주지 않는 것처럼, 수정만 주민들이 아무리 마산시장을 "월드 베스트 사기꾼"이라고 몰아붙여도 사기꾼이 아닌 사람이 사기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산시장이 정말로 사기꾼일 것이라고 믿는 사람도 그리 많지는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황철곤 마산시장이 진짜 사기꾼이라면 마산시민들은 사기꾼을 시장으로 뽑아 시청에서 사기행각을 벌일 수 있도록 방조한 공범이 되는 셈입니다. 만약 이에 대한 재판이 열린다고 가정하면, 세기의 재판이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해외토픽감이죠. 시장과 수십만 시민들이 공범으로 법정에 서는 진풍경은 아마도 기네스북에 오를 겁니다.

그런데도 <수정만STX유치반대대책위원회(이하 수정만대책위)> 주민들은 마산시장이 진짜 사기꾼이 맞다고 계속 주장합니다. 그들이 옷 위에 걸쳐 입은 조끼에는 어김없이 마산시장은 월드 베스트 사기꾼이라고 적혀있습니다. 그들이 데모할 때 들고 있는 피켓에도 마산시장은 거짓말쟁이에다 사기꾼이라는 붉고 푸른 글자들이 선명합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몇 개월 전, 가톨릭 마산교구청에서 천막농성 중인 수정만대책위를 찾았을 때 함께 농성 중인 트라피스트 수녀원 원장수녀마저도 마산시장은 지독한 거짓말쟁이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원장수녀는 황철곤 시장이 확실히 사기꾼이라는 확증을 갖고 있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영적 삶을 맹세한 수녀들이
마산시장을 사기꾼이라고 부르는 이유

하느님 앞에 한 점 부끄럼 없이 고결한 삶을 살기로 맹세한 수녀님들마저 마산시장과 STX가 짜고치는 고스톱처럼 시민들을 우롱하는 사기꾼이라고 생각하는 근거는 대체 무얼까요? 지금까지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마산시장은 수차례 수정만대책위와 수녀들과의 약속을 어겼습니다. 심지어 어제 한 말을 오늘 뒤집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수녀들이 마산시장을 거짓말쟁이에다 사기꾼이 분명하다고 믿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아무리 세속을 떠나 스스로를 봉쇄한 채 영적 삶을 살기로 한 수녀들이라도 뻔히 보이는 사기행각을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마산시와 STX는 이주보상에 관해 서로 다른 말을 해 주민들을 혼란스럽게 합니다.

마산시는 이주보상비는 STX가 전적으로 책임질 문제이고 자기들은 행정적 지원만 하기로 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STX는 이주보상비 등 모든 문제를 마산시와 공동으로 부담하기로 했다고 주장합니다. STX조선소의 수정만 입주가 사실상 이루어지고 있는 시점에서 이것은 주민들에겐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대책위(좌)와 강기갑의원실(우)에 보낸 공문. 결재란 형식이 다르고 문서번호 등도 수기로 작성됐다.


아무도 책임질 사람이 없어진 것입니다. STX에 가면 마산시장에게 물어보라고 하고, 마산시장에게 가면 STX에 가서 알아보라고 말하는 꼴입니다. 둘이서 짜고 사람 골병 들여놓고 책임을 서로 미루며 결국 피해자에게 아무런 보상도 안 해주겠다는 심보와 하나 다를 바 없습니다. 이것도 수정만대책위의 입장에서 보면 고도의 사기행각인 것입니다.

국감에 제출된 마산시장이 사기꾼이란 명백한 문서

그런데 트라피스트 수녀원 원장수녀의 말에 의하면, 수정만대책위가 주장하는 것처럼 마산시장이 사기꾼이라는 명백한 증거가 나왔다고 합니다. 다음 아니라 문서를 조작했다는 것입니다. 마산시는 기본적으로 사용하는 문서 형식이 있습니다. 이것은 일반 기업체도 마찬가지인데, 문서형식에 관해 따로 규정을 두어 통일된 양식을 사용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수정만대책위가 마산시로부터 받은 공문도 모두 통일된 양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강기갑 의원실에 국정감사자료로 제출한 문서 중 하나에서 이상한 점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문서는 다른 문서와 달리 통일된 양식으로부터 일탈된 문서형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급하게 조작된 문서라는 의심이 가는 대목이었습니다. 

뭔가 문제가 있다고 직감한 원장수녀는 급히 강기갑 의원실로 하여금 마산시로부터 해당 문서가 속한 기간의 문서목록을 제출받아 보내달라고 부탁했고, 그 문서목록이 도착한 때는 마산시의 저열한 문서조작행위가 폭로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허위문서였던 만큼 문서목록에 그 문서의 이름이 있을 리 없었던 것입니다.  

강기갑 의원실이 받은 문서목록대장에 "수정마을민원해소대책통보"란 제목의 공문은 없었다.


조작된 해당 허위문서의 제목은 바로 <수정마을 민원 해소대책 통보>였습니다. 내용은 가) 수정마을 386세대 중 이주희망자 이주보상, 나) 마을 발전기금 40억 원 기탁, 다) 트라피스트수녀원 이전, 라) 기타 요구 및 지원사항 별도협의, 이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산시장과 부시장 비전사업본부장의 사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국정감사에 허위문서를 만들어 내는 마산시, 무슨 배짱일까?  

그리고 이 공문의 수신처는 수정마을 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 이종균, 박석곤, 김종인으로 되어 있었지만, 대책위는 이런 공문을 받은 사실이 없다고 했습니다. 또 이 공문은 다른 문서와는 달리 통일된 형식을 취하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강기갑 의원실의 국감 문서 제출 요구에 급하게 날조한 문서가 분명했습니다.

수신자가 받은 바도 없고, 따라서 당연히 문서보관파일에도 없는 문서가 갑자기 국감자료로 강기갑 의원에게 제출되었으니 이는 귀신도 곡할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결국 문서 수발신 대장을 제출받도록 강기갑 의원실에 조언한 원장수녀의 기지에 의해 마산시의 사기행각은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원장수녀의 말에 의하면, 현재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트라피스트수녀원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강기갑 의원실에도 아직 연락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방금 강기갑 의원실로부터 팩스를 받아 확인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아마 월요일이면 마산시장도 이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함께 간 김훤주 기자가 경남도민일보에 기사로 쓸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졸지에 월드 베스트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문서로 증명하게 된 마산시장의 얼굴 표정이 궁금합니다. 그 표정도 월드 베스트일까요? 그 표정을 볼 수 없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아마도 역사에 길이 남을 표정일 게 분명한 데 말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이 허위문서를 통해 한 가지 사실은 확실히 확인했습니다. 그건 그래도 문서를 날조한 마산시장의 공입니다. 

허위문서로 확인된 한 가지, "마산시장은 월드 베스트 사기꾼이 맞았다"

허위문서에 기재된 수정마을 민원 해소대책이란 것들은 애초부터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수정마을 주민들의 민원을 해결하기 위한 협상 같은 것을 사전에 마련하고 통보한 사실도 전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마산시가 말했던 모든 이야기들이 거짓말이란 사실은 진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확실하게 확인한 한 가지란 다름 아니라 마산시장이 바로 월드 베스트 사기꾼이 맞았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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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파비 정부권
마산 내서읍에 가면 정자나무집이란 맛있는 주막이 있습니다. 제가 주막이라고 하는 것은 식당이 요즘답지 않고 옛날다운 분위기가 많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아, 내서라고 하면 잘 모르는 분들도 계십니다. 보통 중리라고들 하지요. 아마 내서에 중리역이 있어서 그런 모양입니다.

내서는 읍이라고는 하지만, 보통 읍면과는 달라서 자그마한 군보다도 인구가 많는 신도시입니다.


정자나무집 식당은 내서 대동이미지 아파트를 지나 감천방향으로 약 1~2백 미터쯤 올라가면 전안초등학교가 나오고 그 다음에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곳 마을 이름이 전안마을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대동이미지 아파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죽 올라가면 삼계마을이 나옵니다. 내서는 이미 어느 곳이든 아파트촌으로 뒤덮여 있지요.

신도시 내서를 무학산과 여항산 줄기가 감싸고 있고 그 사이에서 감천계곡이 흘러내리는 것은 커다란 복입니다. 삭막한 도시의 사막에 깃든 오아시스라고나 할까요. 그 오아시스 입구에 정자나무 식당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허름합니다. 세련되고 감각적인 색깔로 치장한 인테리어에 익숙한 사람들에겐 불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불편함이 사실은 아늑한 평온을 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만이 추운 겨울 따뜻한 난로 옆에 앉아 동동주의 달콤한 맛에 취할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또 여름에는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겨드랑이에 맺힌 땀방울마저 얼것 같은 시원함을 한없이 누릴 자유가 있습니다. 불편함으로부터 얻는 평온과 자유라…, 그럴듯하지요?    

아래 사진은 그 불편한 정자나무집의 내부 전경입니다. 사실은 뭐 전경이랄 것도 없습니다. 너무 좁으니까요.


난로가 피워진 내부는 무척 따뜻했지만, 그래도 찬바람에 귀를 얼리며 백여 미터를 걸어왔기에 따뜻한 아래묵이 깔린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습니다. 이게 아마 심야전기보일러란 것이지요? 식사시간이 끝나가는 시간이었기에 한산했습니다. 우리가 들어갔을 때 마지막 손님이 밥을 먹고 있었는데, 청국장이었나 봅니다. 

무척 맛있게 보였지만, 청국장은 시키지 못했습니다. 이미 다른 곳에서 점심을 배불리 먹고 왔기 때문입니다. 청국장뿐만 아니라 촌국수도 맛있다고 했지만, 다음 기회에 맛볼 수밖에 없겠군요. 이럴 줄 알았으면 점심 안 먹고 오는 건데…. 사실 이렇게 허름하고 불편한 집에서 옛 냄새 물씬한 맛있는 청국장을 맛볼 수 있는 기회란 별로 없거든요.  



대신 동동주에다 명태찜을 하나 시켰습니다. 배가 너무 불렀던 터라 간단하게 배부르지 않은 안주가 없냐고 물었더니 명태찜을 소개해주었습니다. 명태전이나 명태찌개는 많이 먹어보았지만, 명태찜은 처음 들어보는 요리였습니다. 명태로도 찜을 하나? 아무튼 배부르지 않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니 한번 먹어보기로 하겠습니다.

명태찜과 동동줍니다. 술이 얼큰하게 한잔 된 상태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사진을 다시 보니 또다시 입맛이 당기는군요. 동동주도 일품이었지만, 처음 먹어보는 명태찜 맛이 독특했습니다. 계란과 나물과 함께 씹히는 명태 살맛이 깔끔했습니다. 담백하면서도 매운 양념 맛이 톡 쏘는 게 동동주 안주로서 그만이더군요. 

게다가 정말 배도 부르지 않았습니다.  


이건 가까이 찍은 사진입니다. 맛있어 보이십니까? 하긴 먹어봐야 맛이죠. 사진으로만 보고서야 알 수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취객이 찍은 사진을요. 언제 한번 시간 나시면 들러보세요. 위치는 위에서 제가 가르쳐 드렸죠? 그러나 그렇다고 오해는 마십시오. 저  절대 그 집 영업사원 아닙니다.


술이 반쯤 된 상태에서 나오니 집이 이렇게 생겼군요. 들어갈 때는 '스페셜 특선메뉴 청국장+보리밥'도 안 보이더니 이제야 보이는군요. 아무튼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명태찜이었습니다. 동동주도 맛있었지만 명태찜은 독특한 일품이었습니다. 다음에는 동동주와 파전을 시켜 먹어보고 동동주와 명태찜의 조합과 비교해봐야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정자나무집 앞에는 이렇게 커다란 정자나무가 서있었습니다. 정자나무를 둘러싼 은색으로 빛나는 금속물질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냥 통나무, 하다못해 나무판대기로 울타리를 쳐도 얼마나 보기가 좋았을까? 금속성의 아래를 떠받치고 있는 하얀 콘크리트가 거슬린 것도 물론입니다. 도대체가 어울리지 않는 조합입니다.   

그래도 꿋꿋하게 버티고 서서 가는 세월의 옷을 벗어던지고 추운 겨울을 맞는 정자나무가 대견하기만 합니다.


전안마을을 벗어나 버스를 타기 위해 터덜터덜 걸어오는데 길이 꾸불꾸불합니다. 분명히 차도 옆의 보도는 차도처럼 반듯해야 할 정상일 터인데, 동동주에 취한 제 눈이 꾸불거리는 것일까요? 고개를 흔들고 다시 쳐다보았지만, 역시 길은 꾸불꾸불.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그런데…

아, 일부러 길을 이렇게 꾸불거리도록 만들어 놓았구나! 오, 이 빛나는 센스. 마산에도 이런 아름다운 보도가 있었다니.


꾸불거리는 아름다운 길엔 벤치도 놓여있었습니다. 그래요, 이렇게 아름다운 길을 걷다보면 누군가는 저 벤치에 앉아 쉬고 싶은 마음이 절로 일어날 수도 있겠지요. 특히 저처럼 비 내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센치에 빠져드는 낭만주의자라면 말입니다. 아니 낭만주의는 무슨, 그냥 감상주의자라고요? 네, 그래도 좋습니다.  


아무튼 대단한 발견이었습니다. 회색으로 칙칙한 마산에도 이토록 아름다운 보도가 있었다니…. 동동주의 단맛에 취하지 않았다면 도저히 발견할 수 없는 아름다운 보도, 조만간 다시 한 번 동동주를 마시고 이 길을 걸을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그러면 누군가는 또 이렇게 말하겠지요.

"또 핑계대고 건수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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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파비 정부권
아들과 함께 장복산에 올랐습니다. 아래의 사진들은 10월 25일에 찍은 사진들입니다. 그러니까 10월 25일 우리는 장복산을 오른 것입니다. 시내버스를 타고 진해시민회관에서 내려 장복산 공원과 삼밀사를 거쳐 정상에 오르는 코스를 선택했습니다. 장복산 정상에서 능선을 타고 봉우리들을 넘어 안민고개에서 도로변 데크 등산로를 걸어 태백동으로 내려오기로 했습니다. 

진해시민회관에서 조금 올라가니 장복산 공원이 나왔습니다. 이곳에서 오뎅을 사먹었는데 맛은 하나도 없는 것이 개당 700원, 세 개에 2000원 하더군요. 기분 잡쳤습니다. 가격이 비싸면 그만한 값어치를 해야 하는데 이건 내가 만든 오뎅보다 더 맛이 없는데다가, 주인아주머니(할머니인지)가 경상도 갯가 사람 아니랄까봐 퉁명스럽기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초장부터 기분 잡쳤군. 오늘 산행은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 이거 기분이 영 안 좋아." 위에 보이는 녀석이 아들입니다. 이 녀석이 산에 따라온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요즘 제 카메라에 부쩍 눈독을 들이고 있습니다. 캐논 450D인데 나름대로 쓸 만한 DSLR 카메라죠. 전문가용은 아니라도 전문가용을 흉내 낸 보급형 SLR 카메랍니다.

저는 이 카메라를 산지 무려 8개월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자동모드만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들놈은 재산 1호인 이 카메라에 손을 못 대게 하는 데도 벌써 수동모드를 마음대로 조작하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알지 못하는 용어까지 써가면서 말입니다. 확실히 신식문물을 익히는 데는 아이들이 빠른 것 같습니다.

빛의 세계에 대해 더 고수인 것처럼 보이는 아들에게 저는 "그래, 좋다. 오늘은 카메라 니거다." 하고 과감하게 맡기고 말았습니다. 저는 8개월 동안 이 재산 1호를 불면 꺼질 새라 신주처럼 모셔왔습니다. 아직 잔기스 하나 없으니 방금 산거라고 해도 믿을 겁니다. 자, 그러므로 이제부터 보시는 모든 사진들은 아들놈의 솜씨랍니다. 

다람쥐가 지나가고 있군요. 녀석이 잽싸게 셔터를 눌렀지만, 18-55미리의 표준 줌렌즈로는 한계가 명백합니다. 녀석이 말합니다. "아빠, 봐라. 지름신이 안 내리나? 아, 나는 자꾸 지름신이 내리는 것 같다." 그게 무슨 소린지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망원렌즈 사고 싶지 않느냐 뭐 그런 이야기였더군요.  


망원렌즈? 아직 초보인 우리에게는 표준 줌렌즈면 꿀떡입니다. 그리고 풍경을 찍기에는 표준렌즈가 딱이죠. 산을 오르다보니 이런 태그가 나무에 붙어있군요. 산을 사랑하는 부부. 오우, 정말 훌륭한 부붑니다. 함께 산을 오르내리면 건강에도 좋겠지만, 정도 돈독해지고 일석이조란 생각이 드는군요.  


장복산 정상입니다. 아 참, 우리가 산에 오른 목적은 산행도 산행이지만, 장복산 일몰을 사진에 담기 위해서랍니다. 사실은 2주 전에 장복산에 올랐었는데 넘어가는 해가 너무 멋졌거든요. 아마 평생 그렇게 멋진 일몰광경은 처음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들놈을 꼬여 다시 장복산에 오른 것입니다.

12시 반부터 산을 타기 시작해 쉬엄쉬엄 올랐는데도 시간이 2시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해가 지려면 5시는 넘어야 할 텐데….


북쪽을 보니 창원시가지와 공단이 보입니다.


서쪽을 보니 마산시가지가 보입니다.


이번엔 다시 남쪽을 보니 진해시가지가 보입니다.


그러고 보니 장복산이 진해, 마산, 창원의 중심에 솟은 산이었습니다. 아들놈이 장복산 정상 표지석에 섰습니다. 제가 카메라를 받아 한 컷 찍었습니다. 산은 그리 높지 않았습니다. 5백 수십 미터쯤 되었는데, 정확한 높이는 까먹었습니다.


저 멀리 마창대교도 보이는군요. 다리 건너 오른쪽에 희미하지만 가포 매립현장이 보입니다. 날씨가 구름이 많고 황사가 있었던지 시계가 별로 좋지 않습니다. 며칠 전처럼 선명하고 대단한 크기의 일몰은 기대하기 어렵겠습니다.


저물어가는 가을에 웬 봄꽃이 피었습니다. 이게 창꽃이던가요, 진달래던가요? 아무튼 찬바람을 맞고 있는 꽃이 애처로웠습니다. 겨울을 재촉하는 늦가을에 핀 봄꽃의 피부 곳곳은 멍이 든 것처럼 시커멓게 시들어 있었습니다.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또 한편 왠지 불길한 생각이 다시금 밀려왔습니다.  


장복산 정상 바위에서 내려오는데 이렇게 밧줄을 타고 내려오는 코스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옆에 목재로 잘 만들어놓은 계단이 있는 줄을 모르고 이리로 내려왔습니다. 마치 유격대가 된 것 같습니다.


정상 부근의 바위들이 멋들어지게 서있군요. 아마 이 일대에서 가장 아름다운 능선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름다운 능선에 아름다운 꽃들도 만발하고요. 이 꽃은 구절초라고 하나요? 아니면 국화일까요? 저는 꽃 이름은 장미, 코스모스 밖에 몰라서…


장복산 정상이 바라보이는 옆 봉우리에 올랐습니다. 여기서 배낭에 넣어온 도시락을 먹고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현재 시간은 2시. 세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합니다. 저는 미리 책을 한 권 넣어왔습니다. 주변의 적당한 바위를 찾아 그곳에 앉아 세 시간을 버티려면 독서가 최고지요. 아들 녀석은 카메라를 들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를 테고요.


측량기준점인 모양입니다. 삼각점의 중심에 추를 늘어뜨리면 거기가 기준이지요.


드디어 서서히 일몰이 시작 되려나 봅니다. 그러나 아직 멀었습니다.


하늘에 비행기도 지나가고요.


이제 다섯 십니다. 오랫동안 기다린 보람이 있습니다. 역시 다가오는 저녁의 색은 아름답습니다.


자 지금부터는 말이 필요 없습니다. 그냥 사진만 감상하시겠습니다. 물론 다 우리 아들이 찍은 사진입니다. 아 우리 애는 월포초등학교 6학년입니다. 내년에 중학생이 되죠.


자, 잘 감상하셨습니까? 여기까지가 마지막 사진입니다. 아들 녀석은 진해시가지 야경도 찍겠다고 했지만 찍지 못했습니다. 장복산 정상에서부터 안민고개까지는 예닐곱 개의 봉우리가 있습니다. 오르락내리락 해야 하죠. 그런데 흥분에 도취된 아들놈이 내리막길을 카메라를 손에 든 채 뛰어가다가 엎어진 것입니다.

다음 봉우리에 뛰어올라가서 거기서 또 다른 일몰장면을 잡고 싶었던 것이죠. 제 딴에는 엎어지면서도 최대한 카메라를 보호하려고 했던 모양이지만, 보시다시피 이후부터 사진은 없습니다. 말씀 안 드려도 아시겠지만, 암흑은 산중에만 찾아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씩씩거리면서 능선을 달렸고, 녀석은 모르겠습니다. 대화가 단절되었으니까…. 

일몰이 지나가자 세상은 순식간에 검은색으로 변했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칼 같은 바위 능선의 양쪽은 천 길 낭떠러지, 이거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워낙 화가 났던 터라 아무 생각이 없더군요. 그냥 묵묵히 한 시간 가량을 달리니 안민고개가 나왔습니다. 속으로 살았다 싶었지만 일단 냉전을 유지해야 하므로 그런 내색은 하지 않았습니다. 

안민고개에서 진해시가지 방향으로 한참을 내려가려니 진해에 사는 아내의 대학 선배가 차를 몰고 우리를 데리러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평소 잘 가는 어느 실내포장에 들어가서 닭발 요리와 소주를 한 병 시키고 녀석에겐 우동과 만두를 한 접시 시켜주었습니다. 그 선배가 아들놈의 눈치를 살피더니 "야, 너 무슨 기분 안 좋은 일 있나. 표정이 와 그렇노." 

"일마 이거 오늘 사고 한개 칬다 아임니까." "와 무슨 사고 칬는데?" 경위를 들은 그 선배는 "야, 너그 애비 재산 1호를 그래 뿌사삤으니 성질 안 날끼가. 조심 좀 하지. 지나간 일인께 신경 쓰지 말고 만두나 먹어라." 그리고 제게도 한마디 했습니다. "아한테 너무 그라지 마라. 카메라가 중요하나, 아가 중요하지." 

하긴 맞습니다. 그러나 어디 사람이 그게 됩니까? 기분 나쁜 건 나쁜 것이고 또 아들은 아들이고 카메라는 카메라인 것이지요. 어쨌든 카메라는 2주 후에 부산에 가서 깨끗하게 수리를 했습니다. 그리고 아들놈은 매일 저녁마다 아르바이트로 설거지를 해서 받은 1000원을 모아 2만원을 변상했습니다. 

영문도 모르는 애 엄마는 "야 임마, 시키지도 않는 설거지를 니가 와 하는데?" 하면서 불만입니다. 그리고 제게도 불만입니다. "설거지를 할라면 자기가 하지 와 아를 시키노?" 제가 시켰거든요. 설거지해서 돈 벌어 갚으라고요. 어쨌든 오늘부로 2만원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녀석이 꽤 설거지를 많이 한 셈이죠. 

오늘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동민아, 오늘까지 2만원 받은 걸로 끝내자. 5만원은 받아야 되는데 나머지는 탕감이다. 됐나?" 그러자 녀석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며 무척 기분 좋아라 하는군요. 가만 생각하니 저도 좀 웃기는 구석이 있다는 생각은 들지만, 어쨌든 벌어진 일이니까…. 

적당한 시기에 적당한 방법으로 2만원은 돌려주어야 할 듯합니다. 아무튼 카메라는 무상수리로 간단하게 고쳤거든요. 물론 부산까지 두 차례 왕복 차비는 들었지만.
Posted by 파비 정부권
10월 16일(금), 마산공설운동장 올림픽체육관 강당에서는 제59주기 민간인학살희생자 위령제가 열렸습니다. 저는 이 위령제가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열린 합동위령제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잘못 알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이 두 번째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다시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이렇게 씌어 있었습니다. 

<제59주기 2차 마산지역 민간인학살희생자 합동위령제>

위령제는 유교 방식으로 제를 지낸 다음 불교, 천주교, 원불교 등이 각각 위령예식을 올렸다. 개신교는 안 왔다.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수많은 민간인들이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학살된 사건은 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일입니다. 이승만 독재정권처럼 제 나라 국민, 제 민족을 재판도 없이 무참하게 학살한 천인공노할 만행은 사실상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들은 왜 죄 없는 민간인들을 아무런 재판절차도 없이 학살했던 것일까요? 

이승만 정권의 민간인 학살과 유사한 나찌가 저지른 유태인 학살이 있습니다. 히틀러도 선거에 의해 독일인들의 선택을 받은 정치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계대전을 일으켰고, 국민들을 동원하기 위해 희생양이 필요했습니다. 그 희생양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유태인이었습니다. 아우슈비츠, 홀로코스트, 얼마나 소름끼치는 말입니까?

묵념하고 있는 허정도 전 경남도민일보 사장 등 참석자들


그 홀로코스트가 대한민국 땅에서도 벌어졌다는 상상을 한번 해보십시오. 그것도 남이 아닌 동족의 손에, 이웃의 손에 말입니다. 지금으로부터 59년 전, 바로 이곳 마산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수천 명의 우리의 이웃들이 영문도 모른 채 손과 발이 묶여 마산 앞바다에 수장되었습니다. 깽이바다라고 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무심하지 않았습니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고 이승만 정권이 국민들의 손에 쫓겨났습니다.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고, 세상도 바뀌었습니다. 숨죽이고 있던 유족들도 늦게나마 억울하게 죽어간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누이들의 명복을 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제1차 마산지역 민간인학살희생자 합동위령제>가 열렸던 것입니다. 

위령제가 진행되는 동안 내내 오열하고 있는 유족


그러나 기쁨도 잠시 박정희의 쿠데타가 일어났고 유족들은 다시 숨을 죽여야만 했습니다. 유족회를 주도했던 노현섭 전국유족회장(마산)은 감옥에 끌려갔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유족으로서 억울하게 희생된 가족의 명복을 빌었다는 것이 죄였습니다. 그때는 법도 상식도 필요 없는 시대였습니다. 노 회장을 비롯한 많은 유족들에게 최고 10년씩 징역형이 선고됐습니다.

그 이후로 유족들은 오랜 세월을 눈물 속에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은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민주화의 여파로 김대중 정부가 들어섰고, 이어 노무현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들 앞에 나와 겸허하게 정부를 대표해 사과를 드린다며 고개를 숙였습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곧 과거사위원회도 해산해야할 운명에 처했습니다. 아직 일을 다 하지도 못했는데 말입니다. 이제 겨우 물꼬를 트기 시작한 일이 커다란 난관에 봉착한 것입니다. 다름 아니라 다시 정권이 바뀐 것입니다. 이명박 정부가 과거 이승만 정권이나 박정희 정권의 후예들이란 사실 때문이었을까요? 그들은 이제 그만 과거사위원회 따위는 접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명박 정부가 외면하고 싶어도 이미 전직 대통령이 공식 사과한 일에 대하여 왈가왈부하기는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국방부장관이 직접 군이 저지른 과거의 학살행위에 대해 인정하고 사과의 뜻에서 이번 합동위령제에 조화를 보내왔습니다. 그리고 39사단 강재곤 중령을 대리로 보내 추모사도 하게 했습니다.

물론 이명박 대통령의 각료인 국방부장관의 한계는 분명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사과하고 고개까지 숙인 일에 대해 그저 유감이란 애매모호한 말로 사과를 대신했습니다. 유감? 대체 뭐가 유감이란 것이죠? 어쨌든 민간인학살 행위가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유감을 표명한 데 대해 더 이상 토를 달고 싶지는 않습니다.

국방부장관이 보내 온 추모조화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기분 나빴던 것은 바로 황철곤 마산시장의 행위였습니다. 그는 이날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부시장을 대리로 보내고 추모사를 대독하게 하긴 했지만, 다른 일도 아니고 억울하게 죽어간 수천 명의 마산시민들의 유족들이 위령제를 지내는 곳에 그가 직접 오지 않고 부시장을 보낸다는 게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혹시 그는 자기가 마산시장이 아니라 전주시장이나 안산시장으로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게다가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그는 조화도 보내지 않았습니다. 국방부장관과 진실화해과거사위원회, 마산수협장의 조화는 있었지만, 마산시장의 조화는 없었습니다.

혹시, 이분 정말로 자기가 마산시장이란 사실을 잠깐 까먹은 것이 아닐까요? 아니면 까먹고 싶었거나…. 오늘 10·18 부마항쟁 기념 마라톤대회에 갔더니 제일 먼저 황철곤 마산시장이 축사를 하더군요.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독재에 항거했던 부마항쟁) 그날의 함성을 되새기며 힘차게 뛰어주시기 바랍니다."

희망연대 김영만 상임의장은 추모사에 앞서 위령제에 불참한 마산시장을 성토부터 했다.


저는 그저 웃음이 나올 뿐이었습니다. 어쩌면 저토록 뻔뻔할 수가 있을까? 그래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일까? 돈도 많이 벌고…. 하긴, 옛날 어릴 때 어른들에게 그렇게 배웠던 것 같습니다. "세상은 요령이란다. 요령이 없으면 거지처럼 늘 남 밑에서 살게 되는 거야. 그러니 아무래도 요령이 최고지."

그러나 역시 제게는 요령부득입니다. 그런데 마산시장은 그렇다 치고, 진보단체들, 민노당이나 진보신당, 민노총, 진보연합 등 수시로 각종 행사에 이름을 내미는 진보단체들이 민간인 학살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의외였습니다. 그들도 혹시나 마산시장처럼 민간인 학살 문제가 계륵이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59주기를 맞은 민간인학살희생자 유족 여러분의 말할 수 없는 슬픔에 대해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나 결국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라는 말 외엔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이상 아무런 도움도 돼 드리지 못하는 점에 대해서도 매우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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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6일, 오늘은 일요일입니다. <걷는사람들(대표 송창우 시인)>이 주최하는 걷기행사에 참여하기로 했습니다. 여름방학이라고 별다르게 아이들 피서도 시켜주지 못했는데 이런 정도로 갈음하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무엇 때문에 고생을 사서 하냐"고 불평도 있었지만, 막상 밖으로 나오니 기분이 좋은 모양입니다.

경남대 정문이 집결장소입니다만, 만날재 밑에 사는 우리 가족은 그냥 만날재에 먼저 올라 기다리기로 하였습니다. 바람이 시원합니다. 딸아이가 손으로 쌍안경을 만들어 무언가를 살피고 있습니다. 그 옆에 멍하니 서 있는 사람은 우리 딸아이의 엄마랍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성질이 매우 고약하며 잔소리도 아주 심하답니다.


보니 시비가 하나 있군요. 천상병 시인의 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저도 천상병 시인의 시를 좋아합니다. 귀천도 좋아하며, 막걸리 사주는 아내가 좋다는 시도 좋아합니다. 그는 참으로 기인이었습니다. 그는 술 사주는 친구를 좋아했지만, 술 값 이상 주는 친구는 경멸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가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남산에 끌려가 모진 고문 끝에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한 이야기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모골이 송연하게 합니다. 그는 서울상대를 나온 전도가 유망한 인재였지만, 거의 행려병자가 되다시피 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오랫동안 실종되기도 했던 그는 친구들에 의해 유고시집이 출간되기도 했습니다. 살아있는 천상병을 추모하는 유고시집.

천상병이 중앙정보부에서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하고, 연고가 없는 행려병자로 오해받아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용되고, 이런 그가 죽었다고 생각한 친구들이 출간한 유고시집의 이름이 바로 <새>입니다. 아래 사진에 보이는 시비에 새겨진 시 새는 이런 아픈 역사의 상징입니다.

사실 이 모든 아픔은 친구에게서 받은 막걸리 값 오백 원으로부터 기인한 것입니다. 그것이 공작금이었다는 것입니다. 친구에게 받은 공작금 오백 원으로 막걸리를 마신 천상병이 남산 지하실에서 성기에 전기를 연결해 고문을 받고 평생을 행려병자처럼 살았다는 이야기는 소설이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실화였던 것입니다.      

이런 그가 마산 출신이랍니다. 마산중학교 5학년 때 모윤숙의 추천으로 처음 시단에 등단했다고 하니 아마 마산중학교와 마산고등학교 출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세월이 흘러 동백림 사건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간첩 천상병을 기리는 시비가 마산시에서 조성한 만날재 공원에 이렇듯 떡하니 서 있다니 실로 격세지감입니다.


사람들이 도착하고 출발했습니다. 만날재 꼭대기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서니 오솔길이 나옵니다. 제가 마산창원에 터박고 산 지도 어언 27 년이 흘렀건만 이렇게 좋은 산길이 있었다는 사실은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40년을 넘게 이 동네에서 살았다는 우리 집 아이들 엄마도 이 길이 처음이라는군요. 
  

가다 보니 약수터도 있습니다. 물이 무척 시원했습니다.


잠깐 쉬는 틈에 우리 딸 사진을 한 장 찍었습니다. 정말 예쁩니다. 아시는 분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제가 좀 팔불출계에 속합니다. 제가 알기로 팔불출계가 우리 지역에 한 명 더 있습니다. 경남도민일보에서 월급 받아 먹고 사는 김훤주 기자가 또 하나의 팔불출입니다. 그런데 실은 그이가 저보다 상태가 조금 더 안 좋습니다.  


아래 사진은 우리 마누랍니다. 딸 자랑으로 충분히 팔불출이 되었으니 마누라 자랑은 안 할랍니다. 사실은 이 아줌마는 잔소리가 좀 심한 편인데, 딸 사진만 올려주면 삐칠 것 같아 올렸습니다. 아 참, 그리고 여기 사진에는 안 나오지만 우리 아들 자랑도 곁들이자면, 오늘 여기 실린 사진들은 모두 우리 아들이 찍은 것입니다. 흐흐~ 


만날재에서 걷기 시작한 우리 일행들이 도착한 종착지는 감천계곡이었습니다. 계곡에는 사람들이 버글버글 합니다. 마산시민들이 다 여기에 모인 것 같습니다. 우리 아들 녀석은 아는 친구도 발견했습니다. "어? 쟤는 병걸이 동생인데, 왜 여기 있지? 가만… 그런데 병걸이는 안 보이네. 아, 저기 저 사람은 병걸이 삼촌이다." 


그런데 계곡 옆에는 커다란 공장이 있습니다. 공장 이름은 주식회사 이송입니다. 마땅하게 놀 곳이 없는 마산 시민들이 공장 옆 계곡에 몸을 담그고 저리도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한편 씁쓰름하기도 합니다. 오죽 갈데가 없었으면 공장 옆에다 텐트를 치고 저렇게 피서를 즐기고 있을까?

아들 녀석이 걱정을 합니다. "아빠, 그런데 저 공장에서 폐수 같은 거 안 나올까?" "깨끗하게 정화해서 내보내겠지 뭐." 그러나 제가 생각해도 걱정입니다. 아무리 정화를 하더라도 공장에서 나오는 물이 계곡물처럼 깨끗할 수는 없을 터입니다. 그렇다고 저리도 큰 공장에서 물 한 방울 안 내보낸다는 것도 말이 안 됩니다. 

"왜 마산시민들은 하필 공장 옆에서 피서를 즐긴다고 저렇게 난릴까?"라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저에게 옆에 함께 가던 영주 형님이 그러는군요. "야, 시민들이 왜 저기서 놀고 있는지 그게 문제가 아니라 왜 저기다 공장 지으라고 허가를 내 줬는지 그게 더 문제 아이가?" 

피서 인파는 이 계곡을 따라 아래로 거의 1킬로미터나 이어집니다.


아무튼 계곡에서 물장구 치며 신나게 노는 아이들이 부럽습니다. 우리에겐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모습들이죠. 아들 녀석이 말합니다. "아빠, 우리도 내일 여기 오자." "그래." 하고 약속은 했지만 지킬 자신은 없습니다. 계곡 옆에 선 공장이 좀 찜찜하긴 해도 그래도 마산에서 이만한 계곡이 있다는 건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그렇네요. 정말 다행이네요.     파비

ps; 원래 맨 마지막 문장은 수정만 STX 이야기를 썼으나 이 다음 포스팅으로 따로 독립하여 쓰고 여기서는 삭제합니다.    
   
Posted by 파비 정부권
마산시 진전면 미천마을에서 열리는 <서북산 산골축제>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서는데 마당에 핀 꽃이 곱습니다. 무슨 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아는 꽃은 장미와 코스모스 뿐입니다. 거기에 국화가 하나 더 있는데, 제대로 구분을 못합니다. 저는 식물 이름을 잘 모릅니다. 시골에서 자랐는데도 그렇습니다. 

한번은 이런 에피소드도 있었습니다. 서울 종로 거리에 가 보면 1가에서 3가를 거쳐 가는 대로변에서 작은 길로 들어가는 입구에 커다란 단지 비슷한 것을 세워놓고 거기에 무언가를 심어놓습니다. 저를 잘 아는 어떤 분이 제게 물었습니다. "야, 저거 이름이 뭔지 너 혹시 아나? 말해 봐라." 그래서 제가 유심히 살펴보니 줄기와 잎새의 모양이 '마지막 잎새'에 나오는 덩쿨나무 같습니다. 

"덩쿨나무 아닙니까? 덩쿨나무 같네요." 그랬더니 박장대소를 하며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합니다. "야, 너는 문경 촌 골짝에서 살았다는 놈이 고구마 줄기도 모르냐? 이거 고구마잖아." 아, 그러고 보니 그런 것도 같습니다. 세상에, 왜 하필 고구마를 서울 한복판에다 심어 사람을 이렇게 부끄럽게 하는 것인지 원…    


지금부터 사진이 엄청 많습니다. 한 서른 댓 장 될 거 같습니다. 오늘은 별 내용 없이 그냥 사진 전시회만 합니다. 발목이 좋지 않으신 분들은 미리 잘 판단하시고 이쯤에서 그만 내려가셔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더운 여름에 너무 무리하면 건강에 안 좋으니까요. 하하~ 우선 아래 보이는 집은 마산시 진전면 미천마을에 사는 송창우 시인의 집입니다. 

테라스에 보이는 쟁반을 든 젊은 남자는 역시 이 마을에 사는 사람이지만, 이 집 주인은 아닙니다. 저하고 똑같은 객인데 꼭 저렇게 주인 행세를 한답니다. 이날 산골축제 공연을 비롯한 행사도 이 사람이 대개 일을 했다고 합니다.     


테라스에서 마을 아래쪽을 바라보고 찍은 사진입니다.(이 사진은 지난 달 사진임) 경치가 너무 좋았습니다. 이런 곳에 살면 신선이 안 될 수 없겠다 싶습니다.


송창우 시인의 뒷 집이 부재산방입니다. 오늘 행사는 이곳에서 합니다. 가수 김산 씨와 경남대 배대화 교수가 공연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배 교수는 무언가 신기한 듯 쳐다보고 있군요. 일은 안 하고… 배 교수는 진보신당 경남도당 문화생태위원회 위원장으로 이날 행사에 찬조 지원했다고 합니다. 

찬조지원이라고 해봤자, 기획을 비롯해 노동력 제공이 전부였습니다. 그래도 고생했습니다. 이날 <재앙>이라는 다큐멘타리를 상영했는데, 지루하지 않게 34 분짜리로 편집하는 수고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물론 이런 힘들고 어려운 일은 배 교수가 아니라 위 사진에서 보았던 젊은이가 다 했습니다만… 흐흐  


얼마 전에 히말라야 트래킹을 다녀온 박영주 선생입니다. 이분은 몇 년 전에는 중국을 거쳐 티벳을 다녀오셨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형님, 형님은 어째서 아름다운 금강산 같은 곳도 아니고 히말라야니 티벳이니 그 험하고 위험한 곳에 무엇 하러 가십니까? 취미도 참 특이하십니다." 물론 답변은 이거였습니다. "내 맘이다, 와~"

그러고 보니 참 취미가 독특합니다. 남들은 잔디밭에 편하게 앉아 구경하는데 배구네트에 올라가 있는 것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래서 히말라야에도 갔었나 봅니다.


제가 이분은 누구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이분도 이날 공연행사를 위해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노래도 마음껏 부를 수 있습니다. 오브리 값은 없습니다. 공짜입니다.


한쪽에선 고승하 선생님과 아름나라 어린이들이 리허설을 하고 있습니다.


이분은 오늘 행사의 주관자요 총감독인 송창우 시인입니다. 경남대에서 문학을 강의하고 있기도 한 송 교수는 <걷는사람들> 대표입니다. <걷는사람들>은 매월 1회 걷기 행사를 한답니다. 주로 마산의 한적한 시골길을 택해서 걸으며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고 하는데요, 모토는 '도시 보행권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합니다. 

프로그램 일정을 쓰고 있는 분은 송 시인의 아내입니다. 글을 시원하게 참 잘 쓰는군요.


1부 순서로 댜큐멘터리 <재앙>이 상영되고 있습니다. 내용은 이랬습니다. 남태평양 작은 섬나라가 어느 날 갑자기 부자나라가 됩니다.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니까 우리나라가 천불소득을 목표로 열심히 일할 때 그들은 국민소득이 3만 불을 넘었다고 합니다. 한 집에 자동차가 서너 대는 기본이었다고 하네요.

인광석 덕분이었다고 합니다. 가난한 섬나라이던 이곳에 인광석이 발견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나라는 30년이 지난 오늘 어떻게 되었을까요? 세상에서 제일 가난한 나라가 되어 아이들을 어떻게 먹일 것인지를 고민해야 하는 처지에 빠졌습니다. 그래도 이 나라 사람들은 아직 예전의 생활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답니다. 

30 년 동안 세계 최고의 부자로 살아왔던 이들이 갑자기 세계 최고의 가난뱅이로 산다는 걸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게지요. 무분별한 개발로 인광석은 동이 났고, 옛날 농사를 짓던 농토도 모루 폐허가 되었습니다. 섬 곳곳은 쓰레기와 버려진 자동차들로 몸살을 앓고 있었습니다. 섬나라 주민들은 농사 짓는 방법도 다 까먹었다고 합니다.

더 문제인 것은 30 전에는 날씬하고 건강한 몸매를 유지했던 이들이 이제는 마치 살찐 돼지를 연상시킬 정도로 뚱뚱해져 비만으로 인한 건강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30 년 전의 모습과 비교해 보여주는 섬 주민의 모습에서 보통 문제가 아니란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걷는 것마저도 힘겨워 보였습니다.

넘쳐나는 돈으로 외국에서 들여온 인스탄트 식품을 많은 먹는 대신에 농사도 짓지 않고 운동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잘 사는 것도 좋은 게 아닌가 봐요, 그러고 보면.


해는 서산에 지고 동쪽 하늘로부터 서서히 어둠이 밀려오고 있습니다.


어딜 가나 꼭 이렇게 대열에서 이탈한 열외군번들이 있습니다. 그래도 평상에 편안하게 앉아 담소를 나누며 영상을 감상하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영화감상이 끝나고(영화가 아니고 자연다큐멘타리죠, 참)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이날 행사를 총괄기획하고 주관하신 <걷는사람들> 대표이며 <산골마을 축제> 준비위원장이신 송창우 시인이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꼭 노래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노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인사만 했고, 공연에 대한 소개만 했습니다. 노래도 한곡 시킬 걸 그랬군요.


첫 번째 출연진은 4인조 혼성그룹, 이름은 기억이 안 나고 아는 사람도 가운데 두 여자분 뿐입니다. 결성한지 이제 한 달, 아니면 두어 달? 하여간 신생 그룹입니다. 물론 프로는 아니고 아마추어 수준도 아니며 그냥 써클 수준이랍니다.  


아, 그런데 실력은 프로급입니다. 대단하네요. 직접 못 보신 여러분은 참으로 아깝게 되겠습니다. 왼쪽 여자분은 미천마을공동체 사무장이셨던 김수환 씨의 부인이고, 그 오른쪽은 송창우 시인의 부인인 심경애 씨네요. 김수환 씨 부인은 그러고 보니 제가 이름을 모르네요. 마산 창동 시와 자작나무 옆에서 <비누공방>을 하고 있답니다.  


사실 이분은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 지역의 가수라고 하던데요. 목소리가 너무 매력적이었습니다. 정말 놀랐습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어떤 가수에게서도 이만큼 매력적인 목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제가 조성모를 좋아하는데 조성모보다 훨씬 매력적인 목소리였습니다.


배구네트 심판대에 올라가 계시던 박영주 형님, 위에서 그냥 놀기만 하는 게 아니라 열심히 촬영 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가수는 주부가요열창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상을 받으신 분이시랍니다. 무슨 상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잘 모를 땐, 그냥 대상이라고 하면 되겠습니다. 역시 노래 참 잘 하시더군요.


다음 순서는 아름나라입니다. 고승하 선생님과 준비한 노래와 율동이 참 예뻤습니다.


이 팀은 미천마을 어린이 합창단입니다. 물론 이날 행사를 위해 급조된 팀입니다. 어쩌면 공연 끝나고 바로 해산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쑥스러워 인사도 제대로 못합니다. 참 걱정 되는군요. 이래 가지고 공연 되겠어요?


그러나 노래가 시작되자 금방 달라졌습니다. 완전 프롭니다. 나중엔 거의 광기 수준이었습니다. 해산이 아니라 본격 프로팀 창단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산 씨와 베꾸마당 대표님, 고승하 선생님이 협연을 하고 있습니다.


아름나라도 이제 박수를 치며 관객으로 즐겁습니다.


역시 마지막은 우리의 가수 김산 씨가 장식해주었습니다. 옆에서 박수치고 있는 두 사람은 바람잡이인 것 같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서 찍어보니 역시 바람잡이들이 맞습니다.


관람석은 가족 단위로 이렇게 최대한 자유롭고 편안하게 마음대로입니다. 저쪽 한쪽 구석에선 십여 명이 둘러앉아 술병을 돌리며 구경하는 팀도 있습니다.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그분들 소개는 생략합니다. 별로 그림이 안 좋습니다. 흐흐~  


기타를 내려놓고 마지막 열창을 하고 있는 김산 가수. 짜 짜라 짜라짜라 짠짠짠~ 대충 이런 거였는데요. 제목은 역시 모름.


공연이 끝나고 뒷풀이 시간을 가졌습니다. 부재산방 한쪽에 마련된 장소에서 술과 돼지고기 수육으로 회포를 풀었습니다. 얼마 전에 경남도민일보 사장직에서 물러나시고 휴가를 즐기고 계신 허정도 사장께서 인사를 하고 계시네요. 앞서 임수태 위원장님과 몇 분의 동네 어른을 소개하는 자리가 있었습니다만, 술 먹느라고 사진을 못 찍었습니다.   


뒷풀이가 끝나고 가실 분들은 가시고 남은 서른 몇 분의 사람들이 "미천마을 달빛 속에 걷기" 행사를 가졌습니다. 이날 프로그램의 마지막 행사입니다. 둥근 달을 이고 산골길을 걷는 기분이 쏠쏠했습니다. 혼자서는 도저히 걷기 어려워 보이는 무서운 산골길이었지만, 함께 걸으니 신이 났습니다.

반환 지점에서 모두 퍼질러 앉아 쉬고 있습니다. 먹은 술기운이 모두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아래 사진에 보이는 이분은 한참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나중에 보니 귀신 이야기였습니다. 마지막에 "와앙~" 하자 모두들 깜짝 놀랐습니다. 물론 저만 빼고요.


누구 생일이었던 모양입니다. 창동수다님이 케잌을 준비해서 불을 켜고 있습니다.


그리고 축하노래도 일장 해주십니다. 그런데 생일노래 치고 너무 어렵습니다. 무슨 가곡 같았거든요. 우리는 그저 "해피 벌쓰데이 투유~" 이것 밖에 모르니까…



허정도 경남도민일보 전 사장님도 축하노래를 한곡 뽑고 계십니다. 그런데 더 어렵습니다. 만주에서 독립군들이 부르던 노래 같습니다. 흐~ 그러나 어쨌든 노래 실력이 보통이 아닙니다. 콩쿨 나가셔도 장려상 정도는 무난할 듯합니다. 아래 모자를 쓰고 계신 분은 경남대 양운진 교수님이십니다. 역시 노래가 너무 고상하고 어렵나 봅니다. 고개를 숙이고 깊은 마음으로 감상하고 계시네요.  


얘는 촛불 꺼질라 걱정이 태산입니다. 오로지 촛불을 지키는데 일념입니다.


빨리 촛불 끄고 케잌이나 먹지 축하인사가 너무 깁니다. 우리의 케잌방위대 독수리 소년, 그러거나 말거나 촛불 지키기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마침내 기다란 생일축하 노래와 인사가 끝나고 케익을 잘라 나누어 먹는데, 그냥 손으로 잘라 먹어야 됩니다.


진보신당(경남) 문화생태 위원장 배대화 교수도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사진 좌측 위에 달이 떴군요. 달밤인데, 인사 말고 노래나 한곡 하시지 그러셨어요~ 다음부터는 앞에 나오시면 노래를 하세요, 특히 달이 떴을 때는. 정말 달이 아름답습니다. 이렇게 크고 밝은 달은 정말 오랜만입니다.  

도시에 살다 보면 이렇게 달이 뜨는지도 모르고 사는 게 대부분입니다. 그러고 보니 마산에도 달이 뜨는군요. 한적한 산골마을에 들어와 이처럼 여유로워지니 달도 보이는 것이 아닐까요? 원래 달은 늘 뜨고 지고 변함이 없었건만 우리만 마음이 바빠서 그 달을 못 보았던 것이지요.


이날 행사의 마지막은 이 행사를 주관하신 송창우 시인과 함께 창동수다님이 촛불을 켜놓고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마쳤습니다. 창동수다님은 이날 수다 대신 주로 노래를 많이 하셨네요. 좀 늦게 오셨는데, 미안해서 그러셨나? 좋은 노래 잘 들었습니다요.


좋은 행사를 준비하신 <걷는사람들>과 <서북산산골마을축제>에 감사드립니다. 내년에도 더 좋은 행사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참, 생일파티의 주인공은 산골마을 주민이면서 이날 행사준비에 가장 공이 많았고 <재앙> 영상편집을 했으며 바람잡이 역할까지 충실히 수행해주신 유목민 김성훈 씨였습니다.           파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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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6월 30일, 마산시 진전면 미천마을 회관에서 공청회가 열렸다. 공청회가 열린 이유는 이곳에 산업단지가 지정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미천마을은 마산에서는 보기 드문 산골마을이다. 양촌온천을 지나 오른쪽으로 꺽어 한참을 들어가다보니 진로소주(두산그룹) 표지판과 함께 미천마을 이정표가 보인다.

미천마을 회관에서 바라본 전경. 앞에 보이는 산은 여항산 줄기란다.


이정표를 따라 다시 오른쪽으로 꺽어 올라가니 저수지가 보이고 그 뒤로 험준한 산맥이 둘러쳐져있다. 낙남정맥이다. 실로 높고 깊은 것이 장관이다. 도회지로만 알려진 마산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공기 냄새부터가 다르다. 논두렁 아래 내려다 보이는 개울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가 정겨웁다.
 
먼저 이 동네에 살고 있는 송창우 선생 집부터 들렀다. 송창우 선생은 이 마을에 살면서 경남대학교까지 수업을 하기 위해 마티즈를 몰고 다닌다. 경남대 근처에 집을 구해 살 수도 있겠지만, 이 마을이 좋아서다. 송 선생의 집 마당을 둘러싸고 있는 우람한 산과 구름과 내려다 보이는 정겨운 마을이 부럽다.  

그런데 이 산골마을에 산업단지가 들어선단다. 도대체 이 산골에 무엇하러 갑자기 산업단지가 들어서는 것일까?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그래서 이곳에 온 것이기도 하지만) 저녁 7시가 가까워오자 마을회관에서 방송이 흘러나왔다. "주민 여러분. 모두 마을회관으로 모여주십시오. 산업단지지정에 관한 공청회가 곧 열리겠습니다. 맛있는 부페음식도 많이 준비되어 있으니 공청회도 참여하시고 맛있는 음식도 많이 드시기 바랍니다." 

공청회장에 뷔페까지 등장하는 줄은 몰랐다. 평소에 좀 하시지…


마을회관으로 가니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잘 차려진 출장 부페다. 하늘에선 굵은 장맛비가 대지를 적시고 곧 이어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한다. 공청회가 시작되었다. 진로소주 공장에서 나온 직원들이 프리젠테이션으로 산업단지지정에 대한 소개부터 시작한다. 그러고 보니 공청회의 주체는 마산시가 아니라 진로소주다.

그때서야 왜 이 산골마을에서 산업단지지정을 놓고 공청회가 벌어지는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아차~ 제 2의 수정만 사태가 여기서도 벌어질지 모르겠구나.' 국회에서 산업단지 지정신청 및 하가절차를 간소화하는 법률이 통과된 후 전국적으로 이런 현상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고 있다. 마산에서만도 대략 대여섯 곳 정도가 신청을 했다고 한다.
   

한 주민의 발언에 손을 흔들며 제지하듯 자기 주장하는 도시개발계장님


주민들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당장 지하수 고갈로 먹을 물 걱정이 우선이다. 산단이 들어서면 늘어나는 차량과 콘테이너로 인해 주민들의 안전문제도 심각한 고민거리다. 그러나 공청회를 주최하는 진로소주의 답변은 단순함 그 이상 아무 것도 없었다. "차량이 늘어날 일도 없고, 지하수 고갈도 없을 것이다. 산단지정은 그냥 창고를 짓기 위해 하는 것 뿐이다."

진로소주만의 창고를 짓기 위해 산업단지 지정을 한다는 게 도대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그러나 그 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수정만 사태에서도 늘 지적되어 오던 문제였지만, 공무원들의 태도였다. 공무원들이 시민의 공복이기보다 기업체의 용역직원처럼 행세하길 더 즐기듯이 보이는 건 왜였을까? 

주민들의 질문에 도시계획과장을 대신해 참석한(도시계획과장은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함) 도시개발계장은 매우 짜증난다는 듯이 손을 휘저으며 큰 소리로 싸울듯이 달려들었다. 그는 주민들의 반대의견들이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냥 조용히 설명 듣고 잘 차려진 부페나 먹고 갈 것이지!' 하는 생각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보였다.

주민의 질문이 매우 귀찮고 어이없다는 표정. 옆에 마이크를 든 사람은 진로소주 부장.


[동영상 마지막에 보면 질문하는 주민이 공무원 나오라고 하자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등장하는 계장님이 보인다]

공청회가 끝난 후, 주민들은 이왕 차려진 음식이니 먹고나 가자며 마을회관에 차려진 부페에 모여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매우 신경적인 반응을 보이느라 피곤했던지 도시계획계장은 부페 옆에 멍하니 서있었다. 그때 진로소주의 전무가 그의 옆에 다가갔다. 그는 공청회 내내 주민들 뿐아니라 공무원에게도 공손했었지만, 이때는 달랐다. 

마치 아랫사람이나 잘 아는 아우를 다루듯이 말했다. "어이, 음식도 많이 차려놓았는데 좀 먹지 그래." 그러자 계장이 대답했다. "에이, 안 먹을랍니다. 분위기도 안 좋고…" 글쎄, 나만의 생각이었을까? 그 두사람이 얼마나 허물이 없는 사이일지는 몰라도 주민들이 많이 모인 장소에서 그래도 되는 것일까? 

그래도 명색이 공무원인데… 공무원이란 말 그대로 공무를 보는 사람 아닌가 말이다. 국민을 위해 일하는 사람…. 아마도 선입견이 없었다면 이런 사소한 대화를 옆에서 들으면서도 별 생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민들을 향해 대들듯이 손을 휘젓던 그가 진로소주 전무 앞에서는 양순하기 이를데 없어 보이니…

설마 그렇지야 않겠지? 내 생각이 쓸데없는 공상이었기를 빈다. 간절히…  
     파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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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봄이다. 창문을 여니 봄내음이 확 코끝을 스친다. 어제는 비바람이 용천을 부리더니 오늘 이렇게 맑은 날씨를 선물하려고 그랬나보다. 아들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우리 집은 산동네다. 해안가 산비탈에 도시가 형성된 마산은 모든 마을이 산동네라고 해도 별로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마산을 차지하고 난 이후 그들의 방식대로 바다는 매립되었고 이제 평지도 꽤 넓어졌다.

일본인들이 물러가고 난 이후에도 매립의 역사는 멈추지 않고 계속됐다. 박정희가 집권하던 시절에는 바다를 메우는 간척을 영토 확장 사업쯤으로 생각했었다. 우리는 국민학교(요즘은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바다가 어떻게 메워지고 있으며 지도가 어떻게 바뀌는지를 배웠고 시험도 치렀다. 어느 선생님은 간척사업을 (거의 찬양에 가깝게) 칭찬하면서 박통은 광개토대왕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마산만이 시원하다. 멀리 창원도 보이고, 두산중공업도 보인다. 아들놈이 자전거를 타고 있다.

마산의 역사는 매립의 역사
수년 전에 경남도민일보가 기획으로 연재했던 기사가 떠오른다. 아마 1976년이던가? 기억이 희미하다. 당시 마산시청을 새로 짓는 공사를 한다고 땅을 파니 그곳에서 조개껍데기가 무더기로 나왔다. 그래서 조사를 해보았더니 그곳이 1930년대까지만 해도 바다였다는 것이다. 바다라도 보통 바다가 아닌 아주 특별한 바다 말이다. 바로 마산시청자리가 월포해수욕장이 있었던 자리였다는 것이다.

월포해수욕장은 일제시대 때만 하더라도 대단한 명성을 자랑하던 명소였단다. 인천의 송도와 더불어 조선팔도에 쌍벽을 이루는 해수욕장이었다니, 실로 놀라운 일이다. 이 해수욕장으로 인해 경성에서 마산까지 직통 증기기관차가 다녔다고 할 정도니 가히 그 명성을 알만하다. 하긴 산 위에서 가만이 내려다보니 둥근 항아리처럼 생긴 마산만 한쪽에 자리한 모양이 해수욕장의 입지로서 그만이다. 게다가 당시에는 해수욕장을 따라서 길게 송림이 있었다고 하니 그 운치가 오죽했으랴.

나는 사실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이 월영이란 사실에 별로 믿음이 가지 않았다. 누가 월영이라고 이름을 지었단 말인가? 월영이란 달그림자. 이름 한 번 대단하다. 이 퀴퀴한 냄새나는 마산만에 도대체 달그림자가 가당키나 한가. 그런데 그 이름을 지었다는 분이 다름 아닌 고운 최치원 선생. 아, 이분이야말로 자타가 공인하는 신선 같은 사람이 아니던가? 그의 드높은 학식은 이 좁은 땅을 넘어 당나라에까지 떨쳤다.

그러나 인걸이 시대를 잘못 만나면 할 수 있는 일은 방랑뿐이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는 최치원을 신선으로 기억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중환도 권력에서 밀려나 20여년의 방랑 끝에 택리지를 썼다. 정약용은 맏형 정약종이 천주학쟁이(천주교)의 괴수로 지목돼 한강에서 목이 잘리었으며, 또 다른 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를 가 그곳에서 죽었다. 그 자신도 18년 유형의 세월을 보냈는데, 그가 권력의 품 안에서 달콤한 나날을 보냈다면 우리는 목민심서와 흠흠신서, 경세유표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만날고개에 얽힌 전설이 돌에 새겨져 있다. 읽어보면 눈물 난다. 참말로 옛날엔 저리 살았나.

따스한 봄볕 아래 배드민턴을 즐기고 있는 부부가 부럽다. 참으로 평화로운 풍경이다.


월영대의 전설이 어린 마산, 그러나 이제 달그림자 대신 쓰레기만…
이렇든 저렇든 나는 그 고매하신 최치원 선생이 어째서 마산의 이 시끄러운 도심 한복판에 월영대를 짓고 시가를 읊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답은 매립에서 나왔다. 최치원이 감동해서 3년을 머물렀다는 월영대. 그 월영대가 바라보던 바다는 매립되어 이제 건물이 하늘을 찌르고 차들이 매연을 뿜으며 달린다. 달이 그림자를 드리우던 아름다운 밤바다는 이제 휘황한 네온사인과 젊은 남녀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어느 취객이 웩웩거리며 고통스러워하는 소리들로 가득 찬다.

어제 서점에서 책 한 권을 샀는데, 이런 내용이 있었다. “마산은 퇴근시간이면 항상 붐비는 고속도로와 국도, 낡은 건물, 구불구불한 도로, 그리고 오염된 바다로 이제는 그 초라함을 감출 수가 없다. …… 쓰레기가 둥둥 떠다니는 마산 앞바다가 현재 마산의 실상이다. 쇠퇴해가는 도시에 대한 아쉬움과 마산 시내의 도로에 대한 불평을 달고 마산을 가로질러 달린다.”

이런 괘씸한 녀석이 있나. 이 책의 저자는 이제 겨우 스물여섯이다. 대학졸업 기념으로 전국을 일주하고 있단다. ‘로시난테’라고 명명한 자전거를 타고서. 그렇다면 녀석은 틀림없는 돈키호테일 터. 그러나 녀석의 말은 하나 틀린 데가 없다. 책이름은 <『달리는 거야 로시난테』글/사진 양성관, 즐거운상상>, 문장이나 구성이 신선하다. 한마디로 좋은 책이었다. 나는 원래 서점에서 너댓시간씩 죽치며 공짜로 책 읽기를 즐기는 데 이 책은 너무 좋아 직접 돈을 주고 샀다. 내가 다 읽고 아들에게 물려 주려고….

사실 마산은 도로도 엉망이고 가로수도 별로 없고 공원도 없다. 젊은 부부가 아이 키우기에 가장 부적합한 도시가 마산이다. 노인들에게는 편리한 구석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단선에 가까운 교통망하며 인근에 어시장을 비롯한 재래시장이 가까이 있으니 노인들이 살기에는 편하다. 그러나 젊은이들이라면 이런 곳에서 별로 살고 싶지 않을 터이다.

지금 마산은 매립이 한창이다. 그리고 그곳에다 공장을 유치한단다. 그러면 마산의 인구가 늘고 상권이 되살아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요즘처럼 교통이 발달하고 자가용이 생필품이 된 시대에 STX가 수정만에 들어오면 젊은 부부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마산에 정착하고 창동 상권이 살아날까? 몇 년 지나보면 자연히 알 일이다.

차이나 최가 뽑는 옛날 손짜장은 정말 맛있다. 한 번 가 보시길. 만날재에 올라 마산만도 감상하시고.

그래도 만날재 공원이 있어 마산만은 아직 푸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산을 오른다. 겨울이 바로 엊그제, 너무 무리하지 말자. 오늘은 그저 만날고개 꼭대기까지만 올라가 봄바람을 마음껏 쐬기로 했다. 만날고개 입구에 ‘만날재 옛날 손짜장’ 집이 있다. 최점구 씨가 하는 가게다. 그의 별명은 ‘차이나 최’다. 그에게 딱 어울리는 별호다.

보신 분은 수긍하겠지만, 그는 꼭 무술영화에 나오는 검객(또는 권객)처럼 생겼다. 주먹도 엄청 큰 게 진짜 강호에 태어났더라면 한 가닥 했을 것처럼 보인다. 거기서 일단 요기부터 했다. 아들은 짜장면, 나는 짬뽕. 계산을 하고 다시 산을 오른다.

마산 앞바다가 가슴을 후련하게 쓸어준다. 아들녀석이 돝섬을 바라보며 말한다. “아빠, 요즘은 돝섬에 사람이 아무도 안 가나봐.” 지난 가을 국화축제 때 녀석을 데리고 돝섬에 갔었다. “어떻게 아는데?” “봐라. 배가 안 다니잖아. 배가 안 가면 사람이 어떻게 가는데?” ‘음, 역시 젊은 놈이라 관찰력이 나보다 뛰어나군.’

그러나 어떻든 정말 시원하다. 마산에도 이렇게 시원한 공원이 있다. 나는 예의 그 돈키호테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탁 트인 호수 같은 바다를 조망하며 등산까지 즐길 수 있는 이런 공원이 세상에 그리 흔한 줄 아느냐? 보아라. 예서 보니 마산 바다가 얼마나 푸르고, 봄바람은 또 얼마나 상큼하단 말이냐.”

만날재 공원 주변에 심어놓은 자그마한 나무들이 불쌍해보였다. 저놈들이 탈 없이 건강하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렇더라도 저것들이 훌쩍 커서 아름드리 나무가 되어 시원한 그늘을 만들 때쯤이면 나는 백발을 날리며 여기 기어오르는 것조차 힘들어 할 테지. 그리 생각하니 괜히 또 짜증이 난다. ‘대체 마산의 조상님들은 지금껏 무얼 하셨단 말인가.’

하긴 못난 놈이 조상 탓이다. 가수 이용 생각이 난다. 그가 부른 노래 중에 이런 가사가 있었다. 종로에는 사과나무를 심어보자. 을지로에는 감나무를 심자고 했던가, 배나무를 심자고 했던가? 하여간 나무를 많이 심자는 건 좋은 일이다. 아직은 앙상한 뼈대가 너무나 초라하고 불쌍해 보이는 이 애처로운 나무들도 머잖아 사람들의 훌륭한 휴식처로 사랑받게 되겠지.

만날공원 내에 주막집도 있다. 공원으로 조성되면서 허름하던 옛집을 신축한 모양이다.

새로 지은 주막 옆에 오래된 옛 건물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공원 안에 만들어놓은 자리에서 한참을 쉬다가 일어났다. 앉았다 일어서려니 불룩한 배가 장히 부담스럽다. “아, 이거 나도 배가 꽤 나왔는데. 운동을 너무 안 했나?” 그러자 옆에서 아들 녀석이 응수한다. “아빠. 나는 운동을 너무 많이 해서 배에 왕(王)자가 새겨졌다.” 그러고 보니 녀석의 배에는 왕자가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아들들은 모두 배신자다
너무나 바싹 말라 불쌍해 보이는 녀석이 언젠가 자기 배를 내어 보이며 왕자를 살펴보라고 했던 적이 있다. 자세히 보니 녀석의 배에 새겨진 것이 왕자 같기도 했고, 또는 너무 말라 뼈대가 드러나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하여간 살찌지 않는 체질은 실로 복 받은 일이라는 데 둘은 동의했었다.

그러나 방심하지 마라, 아들아. 이 아빠도 어릴 때 별명이 자그마치 ‘며르치’였단다. 그러나 이제 80Kg에서 1~3Kg이 들락거리는 ‘살찐 며르치’가 되었단다. 오늘에 자만하지 말고 항상 내일을 염려하며 자신을 갈고 닦기에 게으름이 없어야한단다. 그리해도 겨우 자기를 보존하는 데 만족해야 하는 게 인생이란 것이지.

그런데 녀석이 안 보인다. 아, 그러고 보니 내가 한참 사진을 찍고 있을 때 “아빠, 나 먼저 내려갈게.” 하며 내려갔었지. 나는 아래쪽 공연무대가 있는 곳에서 기다리겠다는 소리로 알아듣고 그러라고 했었다. 전화를 걸었다. “야, 너 지금 어디냐?” “아빠, 나 지금 중앙캐스빌에 와 있는데. 먼저 내려간다고 했잖아. 친구랑 좀 놀다 갈게.”

중앙캐스빌은 월포초등학교에 함께 다니는 제 친구 녀석의 집이다. 아, 이럴 수가, 아들 녀석이 나를 배신했다. 터덜거리며 혼자 내려오는 길이 외롭다. 화도 난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이것도 다 운명이다. 결국 아들들이란 모두 배신자다. 나도 배신자가 아니던가?

그래, 배신자여. 너는 네 갈 길로 떠나라. 나도 내 갈 길로 가련다. 아들은 아직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아내는 딸내미를 데리고 풍물 연습하러간다고(또는 구경) 갔다. 모두들 돌아올 생각을 않는다. 전화도 받지 않고. 재미있나보다. 에이~ 배신자들….

이 녀석이 바로 배신자다.


2009. 2. 14. 토요일
오후 6시 정각. 파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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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선관 시인을 잘 알지는 못합니다. 그분을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은 그분과 가까이 지낼 기회가 제게 별로 없었다는 말입니다. 제가 세상에 오기도 전에 이미 이선관은 시인으로 활동했습니다. 시인은 우리 마산에서 너무 유명한 인물입니다. 아마 마산이 배출한 수많은 예술인들 중에 뽑아보라고 하면 문신과 이선관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또 너무나 잘 아는 분이기도 합니다. 

저는 생전에 시인을 딱 두 번 가까이서 뵌 적이 있습니다. 한 번은 대우백화점 엘리베이터 안에서였고, 또 한 번은 창동 골목의 만초라는 술집에서였습니다.  

아내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다 처음 뵈었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시인은 지체장애인이었습니다. 잘 걷지도 못하고 잘 말하지도 못했습니다. 이전에 이선관이란 이름만 들었지 그분이 어떻게 생긴 분인지 자세히 알지는 못했었습니다. 제 아내가 정중히 인사를 했고 저도 덩달아 인사를 했지만, 사실은 누군지도 모르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누구시냐?” “이선관 시인도 모르나?” 타박을 듣고서야 이선관 시인을 알아봤습니다. 두 번째 뵌 것은 창동 골목의 만초란 술집이었는데, 제가 앉은 자리의 건너편에 일행들과 함께 술 마시러 오셨을 때였습니다. 이미 한 번 뵈었었기에 가서 인사를 하고 술도 한 상 대접해드리고 나왔습니다. 그래봐야 만원입니다만.

좌로부터 우무석 시인, 이성모 교수, 배대화 교수, 구모룡 교수, 김경복 교수.


그리고 2008년 12월 13일, 세 번째입니다. 이날은 이선관 시인을 직접 만나 뵐 순 없었습니다. 시인은 이미 3년 전 이날(다음날)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대신 「고 이선관 시인 추모모임」이 주최한 『고 이선관 시인 3주기 문학 심포지엄 및 추모문화제』를 통해 그분의 시세계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선관의 시는 매우 단순하면서도 서민적이며 해학적입니다. 시인은 심한 뇌성마비로 발음이 정확하지 않습니다. 저도 딱 두 번 그분과 인사를 했지만, 그분의 말을 알아듣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선관 시인은 부정확한 발음을 오히려 해학으로 승화시켜 한편의 시로 만들어냈습니다. 이성모 교수(김달진 문학관장)는 “은폐되거나 억제된 몸이 오히려 장난스러움으로 전복되는 한편, 천진난만하기까지 하다.”는 말로 그의 시를 평가합니다. 

 나는 初志一貫으로 말을 하면
당신네들은 좆이 일관으로 알아듣고

다시
나는 初志一貫으로 말을 하면
당신네들은 좆이 일관으로 알아듣고

또다시
나는 初志一貫으로 말을 하면
당신네들은 좆이 일관으로 알아듣고    
                                                      -「나는」 이선관


시인은 몇 번이나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비장한 마음으로 자살을 시도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시인의 비장함은 “결여된” 자신의 존재를 넘어 “결여된” 사회를 향한 저항으로 발전합니다. 시인의 날카로운 통찰력은 어쩌면 결여된 존재에 대한 자아로부터 나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인은 이미 산업화가 시작되던 초기에 “침식되어 가는 자연과 오염에 시달리는 인간”을 발견합니다. 

바다에서

고 이선관 시인


둔탁한 소리가 난다.
이따이 이따이.

설익은 과일은
우박처럼 떨어져 내린다.
이따이 이따이.

새벽잠을 설친 시민들의
눈꺼풀은 아직 열리지 않는다.
이따이 이따이

비에 젖은 현수막은
바람을 마시며 춤춘다.
이따이 이따이.

아아
바다의 유언
이따이 이따이.
                         -「독수대.1」 이선관

시인의 시대를 뛰어넘는 통찰력은 인간과 자연에 대한 한없는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것일 것입니다. 그는 날카로운 지성으로 사회적 모순과 불의에 항거하는 시인이었지만, 항상 그가 쓴 시의 밑바탕에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흐르고 있습니다. 사랑이 빠진 서정은 서정이 아닙니다. 그건 그저 불의한 모순을 덮는 선전 나팔일 뿐입니다. 그래서 아직 이 시대는 편안한 서정을 노래할 때가 아니라는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보야 / 밥 안 먹었지 / 이리 와서 밥 같이 먹자 / 김이 난다 식기 전에 얼른 와서 / 밥 같이 나눠 먹자 / 마주 보면서 밥 같이 나눠 먹으면 / 눈빛만 보고도 / 지난 오십년 동안 침전된 미운 앙금은 / 봄눈 녹듯이 녹아내릴 것 같애 / 여보야 / 밥 안 먹었지 / 이리 와서 밥 같이 먹자 / 밥, 그 한 그릇의 사랑이여 용서여            -「밥, 그 밥 한 그릇의 사랑이여 용서여」 이선관

가수 김산의 축하공연. 화면을 가린 빨간 옷 입은 분은 고승하 선생.


시인의 인간과 자연에 대한 한없는 사랑은 통일에 대한 열망을 노래하는 것으로 승화되고 있습니다. 이성모 교수는 “이선관의 통일시는 통일의 갈망은 있으나, 분단에의 절망이 없다는 점에서 통일시가 지향하는 변증법적 통합은 상당히 유보”되어 있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절망과 안타까움을 딛고 통일은 청산해야 할 역사와 새롭게 창조해야 할 역사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청산에 따른 갈등, 반목, 대립은 어떻게 할 것이며, 새롭게 창조해야 할 조화, 이해, 화합의 길은 어떻게 할 것인가? 끝없는 모순의 도출, 그러한 긴장에 의한 변증법적 통합을 향한 회의주의, 그것이 진정한 통일문학으로서의 자유를 보장해 줄 것이다.”    -「통일문학에 대한 회의주의, 그 완벽한 자유, 마산문학 24호」 이성모

매우 어려운 논제이긴 하지만, 또한 매우 깊이 고민해야 할 논제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성모 교수의 말처럼 통일문학은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청산을 통한 새로운 역사의 창조라는 변증법적 통합을 달성한다는 것이야말로 진정 어렵고도 어려운 길이 될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 사고의 자유를 얻지 아니하고서는 불가능한 길이기도 합니다. 자유는 청산을 통해 다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청산은 매우 어려운 결단이 요구되는 통합의 전제입니다.

그러나 그마저도 사랑만이 이룰 수 있습니다. 시인의 사랑은 말 못하는 나무 한그루에도 다가서 있습니다. 

해마다 년말 가까이 한 달 전부터
예수가 탄생했다는 성탄절을 맞아
밤마다 나무에 대낮처럼 불이
켜진다

나무들은 말한다

하느님이시여
당신 아들 탄생도 좋지만
제발 잠 좀 자게 해 주십시오.
                                        -「나무들은 말한다」 이선관
 
시인의 생명에 대한 사랑,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저항의식은 그러나 자그마한 지역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구모룡 교수(한국해양대 교수)는 “자기 땅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의 관념은 허황되다. 무엇보다 딛고 선 땅으로부터 구원과 희망의 메시지를 찾아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선관은 철저한 지역주의자이다. 하지만 그는 지역의 가치를 배타적으로 적용하는 향토주의자가 아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터전을 살리는 행위로부터 모든 것이 출발한다는 관념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겨자씨의 믿음’처럼 그는 지역에서 출발하여 한 세계를 통일할 생명의 가능성을 열고자 한다.”는 말로 시인의 “전지구적 시각, 지역적 실천”이란 인식세계를 설명합니다. 시인의 이러한 인식의 지평은 “마침내 “지구는/ 참으로/ 거대한 신전이다”(1989, 지구)에 이르게 된다.”는 말로 구모룡 교수는 부연합니다.

지난봄과 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던 촛불들이 가장 즐겨 불렀던 노래는 <헌법 제 1조>였습니다. 이 헌법 제 1조는 이미 1972년에 시인이 썼던 시의 제목입니다. 시인의 인식세계는 이처럼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사람들을 묶어주는 마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 1조, 제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제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둔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에 대해 시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민주공화국이다.
그렇다!

우리나라는 민주공화국이다.
그렇다니까!

우리나라는 민주공화국이다.
그래...... .

우리나라는 민주공화국이다.
...... 그래.

우리나라는 민주공화국이다.
...... 허긴 그래.
                                      -「헌법 제 1조」 이선관, 1972년, 씨알의 소리

축사 중 시인의 시로 만든 노래 "민들레 꽃씨하나"를 즉석에서 부르는 경남도민일보 허정도 사장.


생전에 시인은 몇 차례나 장례를 치를 뻔 했습니다. 1991년, 지나친 음주와 극도로 지친 삶에 못 이겨 간경화 진단을 받고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기적처럼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시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해 다시 간염말기로 복수가 차올라 병원에 입원하는가 하면, 93년에는 퇴원해 길을 가다가 피를 토하고 쓰러졌습니다. 이때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문인들은 ‘마산문인협회장’을 치르기로 하고 관까지 짜 맞추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극적으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시인은 창동 허새비였습니다. 생전에 늘 자기를 일러 그렇게 불렀다고 합니다. 창동은 시인의 생활공간이며 시가 생산되는 공장이었습니다. 창동의 지하다방 <흑과 백>이나 <만초> 같은 술집이 그가 주로 다니던 곳이었습니다. 1980년대에 생긴 <책사랑>과 <문화문고>는 시인이 책을 읽고 시상을 가다듬는 장소였습니다. 그곳에서 매일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모든 신문을 꼼꼼이 살펴보다가 어느 한 귀퉁이를 부욱 찢어 꼬깃꼬깃 주머니에 쑤셔넣으면 그게 바로 시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시인은 창동 허새비 외에도 스스로 삼류시인, 넝마주의, 바보, 거지 등으로 불리길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후배들이 그를 그렇게 부를 수는 없는 일입니다. 어느날 후배들이 시인에게 형이라고 하자, 시인이 장난처럼 “쪼꼬만 것들이 감히 형… 형… 한다.”고 나무라자, 그 중 하나가 갑자기 ‘독수선생’이란 이름을 생각해냈습니다. 「독수대」에서 따낸 말입니다. 시인은 부정하지도 거절하지도 않았고 그 다음부터는 독수선생으로 불렸습니다. 

이제 <책사랑>은 없습니다. 시인이 늘 책을 살펴보던 <문화문고>도 없습니다. 모두 교보나 영풍과 같은 대자본의 물량공세에 밀려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습니다. 이선관 시인이 놀며 술마시며 시를 쓰던 창동도 이제 옛 창동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이 넘실대던 창동엔 이제 찬바람만 붑니다. 

아서라 / 다친다 / 소주나 까자 /
뒤돌아보기 없기다 / 좌우로 살피기 없기다 /
아서라 다친다 / 소주나 까자         
                                                     -「소인들」 이선관

그러나 창동 허새비는 영원히 우리들 마음속에 살아있습니다. 시인이 생전에 놀며 술마시며 시를 쓰던 창동도 여전히 창동입니다. 아직은 찬바람이 불지만 창동에도 곧 봄이 오고 그러면 허새비도 돌아올 것입니다. 이날 밤, 우리는 창동 허새비를 그리며 술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시인의 시를 본떠 노래도 불렀습니다. 이렇게요.

“조지일관, 소주나 까자.”

2008. 12. 14. 파비

            
시낭송 "민들레 꽃씨 하나"
저걸 보아라 어디서 살아왔을까

시인의 시를 낭송하는 고등학생들.


도심지에 나비 같아 날아온 민들레
민들레 꽃씨하나
마침내 빌딩벽 틈새로
사뿐히 내려앉은 연약한 생명
마침내 겨울을 이겨내고
사뿐히 뿌리내린 연약한 생명
저걸 보아라 어디서 살아왔을까
도심지에 나비 같이 날아온 민들레 
민들레 꽃씨하나
                                          
-「민뜰레 꽃씨 하나」 
   시/이선관, 작곡/고승하, 노래/김산
Posted by 파비 정부권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우리 아들은 올해 초등학교 5학년입니다.

“아빠! 아빠! 빨리 밖에 나와 봐라. 눈 온다. 엄청 많이 온다. 쌓이겠다.”

마지막에 ‘쌓이겠다!’고 말한 것은 아마도 아직 마산에서는 쌓일 정도로 눈이 오는 것을 본적이 없기 때문일 겁니다. 아니 이렇게 눈발이 날리는 것도 본적이 거의 없다고 해야 맞는 말입니다. 여기는 겨울에도 눈이 안 오는 동네입니다. 거기다 지구 온난화로 눈 구경은 더욱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저는 눈이 아주 많이 오는 산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밤새 아무도 모르게 내린 눈으로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한 날 아침이면 으레 누구보다 일찍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걷지 않은 순백의 영토에 발자국으로 표식을 남기는 것입니다. ‘뽀드득~ 뽀드득’ 소리는 이 하얀 세상이 온통 내 것이라고 말해주는 듯했습니다.

이미지 출처=한겨레신문


그렇게 골목 어귀를 돌아 나오면 마을 입구에서 눈을 하얗게 머리에 이고 늘어진 채 밤새 마을을 지키던 고송들이 반겨줍니다. 세월이 무던히도 흘렀지만 저는 아직도 가끔 꿈속에서 이 고송들을 만난답니다. 그리고 여전히 머리에 하얀 눈을 덮어 쓴 이 고송들은 변함없이 웃으며 반겨주지요.

눈은 남모르게 제 어깨에 살포시 내려앉는 ‘노스탤지어’입니다.

전화선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아들의 기쁨에 찬 목소리는 제게도 복음이었습니다.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정말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전화에다 대고 소리쳤습니다.

“와, 정말이구나. 아들아, 나중에 우리 만나서 통닭 먹으러 가자.”

“정말? 와! 신난다!”

그런데 노스탤지어를 일깨워주는 눈을 보며 왜 갑자기 통닭 이야기가 튀어나왔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생각해보건대, 눈 오는 거리를 아들과 손을 잡고 걷다가 길가의 어느 통닭집을 찾아들어가 따뜻한 불을 쬐며 아들은(물론 초딩 1년짜리 딸도 함께) 통닭을 뜯고 저는 생맥주를 마시며 창밖에 내리는 눈을 감상하는 낭만을 그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짧은 찰나의 시간에 본능적으로….

그러나 곧 언제 그랬냐는 듯 태양이 하늘을 활짝 열었습니다. 하얀 구름과 파란 하늘이 원망스러우리만치 맑고 높습니다.

“그래, 역시 그렇지 뭐.”

그런데 걱정입니다. 아들 녀석은 틀림없이 눈이 오든 안 오든 통닭 먹으러 가자고 할 터인데, 바깥 날씨는 너무 춥습니다. 눈도 안 오는 추운 날씨란 정말 고역이지요.

아! 괴롭습니다. ㅎㅎㅎㅎ       
                                                                                                         (저는 지금 급히 피난 가는 중입니다.)

2008. 12. 5. 파비

습지와 인간
카테고리 여행/기행
지은이 김훤주 (산지니,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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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파비 정부권
마산 돝섬 해상유원지에서는 지금 가고파 국화축제가 한창이다. 별다른 문화제가 없는 마산 시민들에겐 특별한 기회가 아닐 수 없다. 나는 25년 전 어릴 때 딱 한 번 가본 것을 제외하고 한 번도 돛섬에 가본 적이 없다. 그때는 주로 동물원을 구경했는데 지독한 냄새를 맡았던 기억밖에 나지 않는다.

마산 국화축제를 보러 아이들 학원도 빼먹게 하다

그래서 그런지 돝섬에 대한 좋은 추억이 별로 없었던 나는 최근 매년 열리는 국화 행사에 무관심했다. 그러나 올해는 갓 초등학생이 된 딸아이도 있고, 아들 녀석도 이제 내년이면 초등학교 6학년이 되니 이때가 아니면 더 이상 기회가 없겠다 싶어 일부러 시간을 내기로 했다. 매년 들어왔던 국화축제란 것이 어떤 것일까 하는 궁금증도 있었다. 아이들에게 국화에 대한 좋은 교육의 기회가 될 것이란 기대도 있었다.  
 

아이들은 매일 가야하는 주산학원과 피아노학원을 빼먹고 돛섬에 놀러갈 수 있다는 생각에 매우 기뻐했다. 우리는 책가방을 부두 매표소에 맡겨놓고 거대한 유람선에 몸을 실었다. 다행히 친절한 매표원들은 축제장에선 거추장스러울 뿐인 짐을 선선히 맡아주었다. 정말 시원했다. 부두 아래에선 시커먼 바닷물이 마음을 답답하게 했지만, 배가 바다 한가운데로 들어서자 상쾌한 바람이 가슴을 적셔주었다. 

국화 축제장이 아니라 바다 한복판 먹거리 장터였다

채 5분도 되지 않아 배는 돝섬에 닿았다. 평일인데도 섬은 북적거리는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섬에 도착하니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줄지어 늘어선 먹거리 장터였다. 소위 먹자판이다. 우리나라 축제는 어딜 가나 먹는 게 빠지면 안 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옛말도 그래서 나왔을까?

배에서 내리자마자 늘어선 음식점들의 호객행위와 북적이는 사람들로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붐비는 사람들을 향해 스님 복색을 한 사람들이 길을 막고 달마도를 팔고 있었다. 진짜 스님인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속절없이 길거리에서 팔려나가는 달마대사가 애처로운 생각이 들었다. 저러자고 대사께서 동쪽으로 오신 건 아닐 텐데 말이다.

               온통 장사치들이었다. 거기에 스님(?)들도 한자리 했다. 축제장에 왠 무조건 천원짜리 만물상회까지?

장터를 지나자 놀이기구가 보였다.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우선 놀이기구부터 타기로 했다. 무섭다고 고개를 젓는 바이킹을 제외한 나머지를 한 바퀴 돌고나서 곧장 국화 전시장으로 향했다. 산비탈 길을 타고 조금 오르니 국화로 만든 조형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멋있다고는 생각되었지만, 기대했던 것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다양한 국화를 심어놓고 거기에다 일일이 이름과 설명을 붙여놓았을 것이란 교육효과에 대한 기대는 완전 빗나갔다.

국화는 없고 국화벽돌로 만든 거대한 조형물만 있었다

아이들은 아예 국화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내가 멋있지 않느냐고 말하자 그저 무덤덤하게 그렇다고 대답만 할 뿐이었다. 아이들은 섬 꼭대기에 마련된 공중 자전거 놀이기구에만 관심이 있었다. 아이들에게 국화는 없었다. 국화로 치장한 여러 가지 모양의 조형물들만이 육중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빨간색은 국화가 아니라 사루비아인 듯싶다. 우리집 담벼락 밑 화단에 심은 사루비아와 모양이 같았다. 
                                              레일 자전거 뒤로 멀리 마창대교가 보인다.  

대충 구경을 끝내고 다시 내려와 해변을 따라 바닷가 길을 걸었다. 거대한 국화 조형물과 놀이기구와 장사치들과 북적이는 사람들로 정신없는 축제장보다 이게 나을 성 싶었다. 그러나 여기도 상식을 초월하긴 마찬가지였다. 초파일 연등행사에 쓰일 법한 등으로 만든 터널이 해변 입구를 막아서고 있었다. 거기엔 누구누구 이름과 ‘사업이 번창하길 빕니다.’ 따위의 소원문구들이 적혀있었다. 

화려한 등불로 치장된 썰렁한 돝섬 바닷가

한쪽에선 나이 지긋하신 노인네들이 소주병을 하나씩 들고 지화자를 부르고 계셨다. 차라리 그 모습이 정답게 보였다. 이 화려하게 촌스러운 색깔로 치장한 썰렁한 바닷가와 가장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걷다보니 다리가 아팠다. 그러나 쉴만한 의자 하나 변변하게 없었다. 

             이곳 출렁다리에서 놀 때가 제일 즐거웠다. 밤이 되어 연등에 불이 들어오면 꽤 그럴 듯하게 멋있을 것 같다. 
             그래도 국화축제에 국화는 없다. 국화는 그저 악세사리일 뿐...

목이 마르다고 투정하는 아이들을 위해 음료수를 샀다. 이온음료 한 병에 2천원이다. 더 있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바베큐가 먹고 싶다는 아이들을 밖에 나가서 더 싸고 맛있는 간장치킨 사주겠다는 말로 달래 배를 타고 돌아가기로 했다. 거대한 크루즈선 뒤편으로 바쁘게 돌아가는 가포 연안 매립현장이 보인다. 아이 엄마와 연애하던 시절, 저곳에서 함께 배를 타고 노를 저었었다.

돝섬에서 바라본 연안 매립의 현장

한때는 해수욕장이었던 가포만 매립현장을 한 번 더 돌아가면 거기엔 수정만 매립현장이 있다. 최근 STX 조선소 유치 문제로 마산시와 주민들 간에 마찰이 빚어지고 있는 곳이다. 그러고 보니 마산은 매립의 도시다. 이곳 돝섬의 자그마한 동산에서 바라보니 매립지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고운 최치원 선생이 바다를 품은 달을 노래하던 월영대는 매립지에 들어선 콘크리트 건축물 더미에 밀려 보이지도 않는다.

람사르에 참석한 국제환경기구의 지도자들도 이 모습을 보았을까? 마침 람사르 총회가 창원에서 열리고 있으니 그분들을 여기에 초대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미 바다를 매립해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는 신포매립지(위),  가포만 매립공사 현장(아래)    

돌아가는 배를 타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에 서있는데 뒤에서 어떤 중년 남녀의 대화 소리가 귀에 들어온다. 여자가 별로 재미가 없었던 모양인지 남자가 밤이 되면 불꽃놀이도 한다고 어르자, 여자가 남자에게 말했다.

“그라모 여는 밤에 와야 되겄네.”

“음, 맞다. 여는 원래 저녁 늦가 와야 되는기라. 한 잔 걸치러 저녁에 오는 게 맞제.”

대한민국의 축제 문화에 대한 오해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그래, 이곳은 우리가 올 곳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곳에 와서 무슨 국화 타령을 하고 문화를 논하는 자체가 난센스였던 것이다. 국화는 그저 구실이었을 뿐이다. 삶에 지친 사람들이 한적한 섬 하나를 내어 먹고 놀 자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굳이 비싼 바가지 물가를 감내해가며 편히 쉴 의자 하나 없는 척박한 섬을 꼭 가야만 하는 것인지에 대해선 아직도 깨달음이 부족하다.

이렇든 저렇든 대형 크루즈선은 사람들로 미어터지고 있었다. 마산시가 장사 하나는 기차게 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돌아오는 배를 따라 날아드는 갈매기들이 최고 수지를 보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 맞다. 가장 행복한 것은 배가 불러터진 갈매기들이었다.

2008. 10. 30.  파비
습지와 인간
카테고리 시/에세이/기행
지은이 김훤주 (산지니,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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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10·26사태 29주년이다. 한 사람이 비참하게 죽은 날을 무엇이 기념할 것이 있어서 이런 제목까지 달고 추억하겠냐마는 그래도 이맘때만 되면 아련한 기억이 향수와 함께 밀려드는 걸 어쩔 수 없다. 산골에서의 어린 시절 추억과 더불어 그곳을 마지막 떠나기 전에 일어났던 유신독재의 종말이라는 시대적 사건은 나에게 영원히 잊혀 질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

1979년 10월 27일,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 일찍 학교에 갔다. 매일 아침마다 3학년 교실에 문제풀이 시험지를 돌려야 하는 게 내 일이었다. 교무실에 가면 전날 밤에 등사된 문제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산골이라 고입을 앞둔 중학교 3학년이면서도 도시처럼 학원이나 과외 같은 걸 받을 수 없었던 사정을 고려한 선생님들의 배려였다.

그날도 어김없이 나는 문제지를 돌리기 위해 아침 일찍 등교했다. 그런데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나보다 먼저 온 녀석이 있었다. 기종이란 친구 녀석이 책상에 엎드려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반 부실장이기도 한 이 친구는 공부도 매우 잘하는 똑똑한 녀석이었다. 도가사상에 심취해서 늘 가방에 장자를 넣고 다니던 친구였다. 그래서 내가 “어이, 도사님.” 하며 놀리곤 했었다.

만주군 장교 시절 박정희/위키미디어

나보다 먼저 온 것도 의외였지만, 어깨를 흔들며 흐느끼는 친구를 보니 순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난처하다는 듯이 녀석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야 기종아, 도대체 왜 그러나.”

내가 물어보자 녀석은 더 슬프다는 듯이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어~어엉 어엉 엉~ 각하께~서 돌아~가~셨~다~.”

“뭐라고?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라.”

나는 이 친구가 정녕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장난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엔 통곡하며 우는 모습과 너무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며 다시 물었던 것이다.

“대통령 각하께서 어엉 엉~ 서거 하셨단다.”

순간 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이게 도대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일어날 수도 없고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친구는 진정 각하의 서거가 애통해 우는 것 같았지만, 나는 전쟁을 생각했다. 국가원수가 죽었다는 슬픔보다 당장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먼저 나를 엄습했다.

잠시 후 교무실에 불려간 나는 급히 비상조회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리고 그때서야 나는 모든 것이 사실임을 깨달았다. 교단에 올라서신 교장선생님은 운동장에 집결한 학생들에게 슬픈 소식을 전했다. 이 자리에는 예외적으로 학교 육성회장인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도 참석했다. 많은 학생들이 슬픔에 잠겨 고개를 떨어뜨리고 눈물을 흘렸다.

그때 나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눈물을 흘리는 저 많은 학생들은 모두 내 친구 기종이처럼 정말 애통해서 우는 것일까? 아니면 나처럼 전쟁의 불안으로 몸서리치는 공포에 떠는 아이들도 있는 것일까? 그날 아침은 학교 뿐 아니라 온 나라 온 천지가 비통한 슬픔으로 눈물바다가 된 것만 같았다.

1966년 각국 정상과 함께한 박정희 대통령/위키미디어공용


나는 10·26사태가 나기 불과 며칠 전에 부산에 다녀 온 적이 있다. 부산에 있는 모 고등학교에서 실시하는 특차모집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서였다. 기차를 탔다. 차창 밖에서 달려드는 시원한 바람과 함께 밀려오는 낯설고 신기한 풍경들에 나는 마음을 흠뻑 빼앗겼다. 읍내에도 몇 번 가보지 못한 산골 소년에겐 시험을 치러 간다는 부담감조차 까맣게 잊을 만큼 화려한 외출이었다. 곧 있으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가는 대도시 부산이다.

그런데 부산역에 내린 나를 맨 먼저 반겨주는 것은 줄지어 늘어선 군인들과 탱크들이었다. 난생 처음 본 육중한 탱크는 철모르는 어린나이에도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마음을 졸이며 버스를 타고 해운대로 향했다. 여인숙을 잡고 저녁을 먹은 다음 내일 시험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그러나 역시 부담 탓인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이 잠이 오지 않았다.

여인숙을 나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해운대 백사장을 돌아 동백섬 쪽으로 산책을 나갔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머리를 식혀주었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에 이끌려 나는 계단을 따라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어둠 속에서 갯바위에 기대앉아 부서지는 파도를 지켜보고 있는 인어상도 보였다. 나도 그 모양으로 바위 한쪽을 차지하고 저 멀리 깜깜한 수평선 너머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부산에 진주한 계엄군/신동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환한 서치라이트 불빛이 나를 사로잡았다. 연이어 우레와 같은 함성이 들렸다.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소스라치게 놀란 나는 무슨 일인지 확인할 새도 없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절며 시키는 대로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은 몹시 가파르고 멀었다. 다 올라오니 내려올 땐 보지 못했던 철책이 양쪽으로 늘어서 있었고 계단 입구에는 문이 하나 있었다. 그곳에서 총을 겨누고 있던 군인들이 나를 보며 말했다.

“너, 아직 어린 학생이구나. 몇 학년이냐? 이런데 들어오면 안 되는 거 모른단 말이냐?”

너무나 놀란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마 대충 중학교 3학년이며, 입시를 위해 멀리 시골에서 왔고, 여기 들어오면 안 되는 것인지는 몰랐으며, 문이 열려있기에 내려가 본 것뿐이고, 내일 시험도 치러가야 하니 한 번만 용서해주시면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빌었던 것 같다. 다행히 그 군인은 마음씨가 좋아보여서 시골에서 온 어린 학생이라 예외적으로 한 번 봐줄 테니 어서 가서 자라고 했다.

놀란 가슴을 안고 여인숙에 돌아온 나는 부랴부랴 잠을 청하고 다음날 일찍 일어나 바로 가까운 곳에 있던 학교에 가서 시험을 쳤다. 그리고 나는 다음 해부터 3년간 그 학교를 다녔다. 나중에 그곳에 다시 가보았는데, 그곳은 늘 사람들이 붐비는 관광지였다. 그리고 인어상 주변에도 밤낮없이 사람들이 파도도 감상하고 사진도 찍으며 놀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때는 부마항쟁으로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시내에 계엄군대가 진주해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해운대 해수욕장과 동백섬 일원의 해안선에도 무장경계가 실시된 모양이었다. 산골로 돌아온 나는 다시 일상에 파묻혀 도시에서의 긴박했던 순간은 어느덧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10월 27일 아침에 느닷없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우리는 하교 길에 면사무소에 긴급히 마련된 분향소에 들러 다시 도무지 믿을 수 없고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다는 듯 눈물을 흘렸다. 면사무소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모여든 동네 어른들로 붐비고 있었다. 비명에 죽은 박정희 대통령이 만주군관학교에 가기 전, 우리 마을에서 가까운 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잠깐 잡았던 적이 있다. 그래서 여느 지역에 비해 슬픔이 배는 더 했으리라.

국장이 끝나고 채 열흘이 가기 전에 바로 그 국민학교 교정에 봄에나 피어야 할 꽃이 피었다고 했다. 요즘은 기상이변으로 가끔 있는 일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그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사람들은 모두 하늘이 노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수군거렸다. 이 이야기는 신문기자에게도 전해져 세상에 알려졌다고 했다.

10·26이 나던 날과 다음날에도 나는 이길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오갔다.


나도 그때는 하늘이 노해서 그런 것인 줄 알고 다시 한 번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순진하게도 산골에서 ‘유신교육의 해’ ‘근면 자조 협동’ 같은 선전문구를 건물 이마에 매단 학교에 다니고, 냇가에서 멱 감으며 놀다가 지나가는 기차를 향해 허옇게 고추를 내놓은 채 학교에서 배운 대로 일렬로 늘어서서 마치 비오는 날 승용차 와이퍼가 좌우로 힘차게 흔들리 듯 질서정연하게 손을 흔들던 산골소년도 이제는 안다.

하늘이 노해서 꽃이 핀 것이 아니라, 국민이 노해서 유신철권통치로 마음껏 권력을 휘두르던 독재자가 비명에 진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세월은 인간에게 망각이란 선물을 주어 슬픈 과거를 딛고 미래를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지만, 또한 역사는 끊임없는 비판과 각성의 바늘을 주어 잘못된 과거를 극복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열어준다.

코스모스가 바람에 몸을 흔드는 계절이 오면 나는 의례히 30여 년 전 그때를 기억한다.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기억의 편린을 더듬으며 기종이 녀석 생각도 한다. 그 친구는 지금쯤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늘 장자를 가방에 넣고 다니며 대통령의 죽음을 자기 부모의 일처럼 애통해하던 감성이 풍부하던 그 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을 꺼내보니 다시금 그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다. 

2008. 10. 23.  파비

습지와 인간
카테고리 시/에세이/기행
지은이 김훤주 (산지니,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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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파비 정부권
마산도 항구도시였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사실 나는 마산이 항구도시라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런데 마산은 과거에 항구도시였으며, 전국 7대도시였으며, 그래서 다시 과거의 영광을 재현해야 한다는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그 목소리들의 진원지가 어디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하겠지만, 아마도 마산시 청사가 아닐까 하는 것이 그저 지레짐작이다. 최근 마산시가 역점을 두고 추진하고 있는 미래 마산의 청사진이란 것은 <드림베이 마산>이라고 하는 슬로건에 온전히 들어있다. 꿈의 항구도시 마산을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그리고 그 계획에 따라 가포만 바다를 매립하여 신도시를 조성하는 대역사를 진행하고 있다. 또 수정만 바다를 매립하여 STX 조선소를 유치하기 위해 혈안이 되다시피 하고 있다. 신포 앞바다는 이미 매립하여 대형 아파트단지가 들어서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코딱지만 하기는 해도 시민의 눈을 의식해서 자그마한 공원이 하나 만들어졌다. 남들이 보면 무슨 공원이 이러냐고 핀잔을 주겠지만, 그래도 마산에서는 보기 드문 공원이다. 그나마 그마저도 친일논란이 있는 이은상과 조두남 기념관을 짓겠다고 하여 한동안 시민단체들과 씨름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런 것들이 마산시가 추진하고 있는 드림베이(dream bay), 즉 꿈의 항구도시 마산을 건설하기 위한 사업의 내용들이다.

나는 처음에 드림베이라고 하기에 태평양의 푸른 파도와 지중해의 낭만이 연상되었었다. 그런데 드림베이란 것이 알고 보니 대형 아파트촌을 건설하고 공장을 유치하여 인구를 유입하는 것이었다. 드림베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꿈이나 낭만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 아름답고 살기 좋은 마산, 녹색이 물결치는 살만한 마산과도 거리가 먼 것이었다. 사람들은 오로지 파괴하고 개발해야만 다시 7대도시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들 생각하는 듯하다. 그나저나 과연 소원대로 7대도시가 된다한들 그것이 우리의 삶의 질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인지도 나는 알지 못하지만, 도대체 드림베이란 것을 해서 살기 좋은 도시가 된다는 것도 말 그대로 드림, 꿈같은 소리로만 들린다.  

이번 추석에 목포에 다녀왔다. 그곳도 항구도시다. '목포는 항구다'란 노래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목포는 마산에 비하면 자그마한 도시다. 마산사람들이 생각하기엔 자그마한 시골도시쯤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번에 목포를 둘러보고 참으로 부끄러움을 느꼈다. 목포는 마산에서 느껴보지 못한 푸근함 같은 것이 있었다. 바닷내음부터 달랐다. 목포는 정말 항구로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일었다. 역시 목포는 항구였다.

그러나 내가 목포에 반한 것은 그곳이 항구였기 때문이 아니다. 그곳도 이곳과 마찬가지로 개발바람을 비껴가진 못한다. 역시 그곳에도 아파트촌이 건설되고 공장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엔 아름다운 산이 있었고 문학관이 있었고 박물관이 있었다. 바닷가 경치 좋은 곳 엄청나게 널따란 부지에 예닐곱 개의 박물관들이 모여 있었다. 자연사 박물관도 있고 해양 박물관도 있다. 정말 웅장하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는 마산 같았으면 금싸라기 같은 땅이 아까워서 과연 이렇게 커다란 박물관들을 그것도 한개도 아니고 예닐곱 개나 지을 수 있었을까? 그리하여 드림베이란 이름에 어울리는 도시가 있다면, 그런 꿈을 꿀만한 자격이 있는 도시라면, 그곳은 마산이 아니라 목포 같은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어쨌든 나와 아이들에겐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다. 목포시민은 50% 할인이라고 해서 목포시민인 형과 형수, 병원에 장기 입원해 계시다 추석 때 이틀간 외박 나오신 아버지까지, 모두들  모시고 갔다. 해양박물관은 공짜였고, 자연사박물관과 도자기 박물관은 아래와 같은 저렴한 가격으로(자연사박물관에서 계산하면 도자기박물관은 덤이다) 거의 공짜로 구경하다시피 했다. 공짜라면 빠지지 않는 것이 또 우리 가족인 고로 구석구석 열심히 발품을 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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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멍텅구리배다. 우리나라에 마지막 한 대 남은 배라고 했다.
               더 이상 만들지 않는 하나 남은 유물이라고 하니 더 유심히 살폈다.
               이 배는 1989년에 만들어 조업하던 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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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멍텅구리배의 닻이다. 배에 비해 크기가 웅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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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양박물관의 맞은편에 자연사박물관이 보이고 그 뒤에 나지막한 암산이 보인다.  
               목포엔 이런 바위산들이 많이 보였다. 그 중 최고는 물론 유달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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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포돛배를 재현해 박물관 마당에 전시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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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세기에 신안 앞바다에 침몰한 중국 무역선을 잔해를 모아 재현한 신안호.
               1천년 전에 만들어진 배라고 하기엔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아래 사진에 보이는 포토존에서 촬영했는데 사진 상태가 별로 좋지 않다.
               카메라 탓이라고 하고 싶지만, 내게 DSLR 카메라가 주어진다 해도 별로 다르진 않을 것이다.
               사진기(삼성디카)도 별로고 사진사도 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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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안 해저에서 발굴한 유물들. 후추와 일본장기도 보인다.
               그리고 해저에서 발굴된 금화보다 귀한 엽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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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물표다. 화패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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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양박물관 유리창 너머로 나무기둥에 앉아있는 갈매기들이 평화롭다.
               마치 풍어를 기원하는 솟대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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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양박물관에 이어 자연사박물관으로 갔다. 정말 대단했다. 지구에 생명의 신비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사라져갔는지 잘 보여주는 박물관이었다.
                암모나이트로부터 티라노사우루스, 신생대의 포유동물들, 나비, 장수풍뎅이 등 곤충들,
                사라져가는 식물들, 바다생물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모래무지도 보았다.
                어린 시절 모래무지와 놀던 기억이 새록새록 했다. 놀라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우리 아이들도 신이 나서 어쩔 줄 몰랐다.

                아!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곳은 촬영금지구역이었다.
                어차피 내 사진 실력으로는 이곳의 감동을 전하기에 역부족이므로 차라리 잘 됐다.
                궁금하신 분은
http://museum.mokpo.go.kr/ 에 가서 아쉬운대로 살펴보시면 되겠다.

                이곳 구경을 끝내고 도자기 전시관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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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기한 듯 옆에서 쳐다보고 있는 혜민이. 초딩 1년짜리 우리 딸이다. 직접 실습도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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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자기 재료도 전시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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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 엄마와 딸아이가 타일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아들놈은 그 옆에서 그리고 있는데
               사진 찍지 말라고 한다. 집중이 안 된단다.  
               맨 왼쪽이 딸, 가운데가 아내, 맨 오른쪽이 아들놈 그림인데, 아들놈은 화투짝을 그렸다.
               지금 컴퓨터 앞에 앉아 블로깅에 빠져있는 내 옆에서 두 놈이 화투짝을 돌리고 있다.
               이거 교육적으로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좋다는 걸 말리기도 그렇고, 내가 할 줄 모르는
               걸 잘 하는 녀석들이 대견(?)스럽기도 하다.
               요놈들이 컴퓨터에서 화투치는 법을 배워서는 내게도 가르쳐줘서 며칠 전에 셋이서 한 판 쳤다.
               평생에 처음 쳐본 고도리였다.  
               우리 가족이 만든 타일그림들은 박물관 벽에 붙여져 영원히 전해진다고 한다.
               물론 다른 가족이 그린 타일들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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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엇? 오랜만에 보는 것이지만 정감이 가는 익숙한 물건이다. 이게 바로 요강이란 것이렷다.
               뒷간 가는 것이 두려운 옛날 어린아이에겐 정말 귀중한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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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도자기 전시관의 마지막은 행남자기가 차지하고 있었다. 아마 이 지방 향토기업인가보다.
               그러나 이렇든 저렇든 향토기업이 이런 전시관에 지원도 하고 자기들 자리도 하나 차지하는
               게 그리 나빠 보이지 않는다. 우리 지역엔 이런 향토기업도 하나 없다.


그 다음 남농미술관이며, 문예역사관이며, 또 무슨 전시관이며 문화관은 다음 기회에 보기로 했다. 여기 소개한 사진들은 그야말로 신발에 묻은 흙 정도만 턴 것에 불과하지만, 여기까지 보는데도 종일 걸렸다.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밥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또 있겠는가?
저녁을 먹고 유달산에 달구경 갔다. 그러나 달은 보지 못했다. 구름 속에 숨어 끝끝내 그림자조차 보여주길 마다하는 보름달과 먹구름을 함께 원망하며 산을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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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집에 돌아왔다. 마당에 핀 꽃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언제 피었는지 모르겠다. 이름도 모르겠다.
아름다운 꽃이다.
               
밤에 달이 떴다. 하루를 넘겼지만 보름달과 다름 없다. 역시 달은 마산 달이다. 목포가 아름다운 항구고 문화적으로 여유가 풍부하기로 마산이 비할 바가 못 되지만, 달 만큼은 마산이 최고다.
그래서 우리 동네 이름도 고운 최치원 선생께서 ‘월영月影’이라고 지어주지 않았던가!  
그러나 도무지 파괴와 개발의 대명사가 된 드림베이와 어울려 보이지 않는 것이 또한 월영이란 이름이고 보니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고운선생이 다시 돌아와 보신다면 무어라 말씀 하실까?


2008. 9. 16 한가위 연휴 끝에, 파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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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에 ‘작은 도서관’이 하나 생겼습니다. 참 반가운 일입니다. 마산은 문화와 복지의 사각지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문화복지시설이 빈약합니다. 푸른 숲이 우거진 공원과 잘 다듬어진 도로와 보도, 여기에다 마산시민이 보기에는 넘칠 정도로 풍부한 문화예술 시설을 보유한 인근 창원이 부럽기만 합니다. 같은 생활권에 살면서도 마치 다른 민족이나 계급인 것처럼 비교당하기 일쑤입니다. 한때는 “아직도 마산에 사나?” 하는 게 오랜만에 만난 친구사이에 나누는 인사가 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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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원래 창원에 오래 살다가 마산으로 이사 온지 몇 년 되지 않았습니다. 막상 마산에 와보니 도시가 낙후된 것은 둘째 치고 아이 키우기 참 힘들겠다는 걱정부터 하게 됐습니다. 특별히 인도가 따로 없이 자동차와 행인이 뒤섞여 서로 눈치 보며 다니는 도로에 애들을 마음 놓고 내보낼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주변에 딱히 공원이나 놀이터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죽으나 사나 집에서 놀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를 바라보는 제 마음은 ‘얼마나 답답할까’ 하는 걱정으로 아이보다 먼저 답답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실정이 이러하다보니 마산시의 문화나 복지수준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배부른 일로 여겨졌습니다. 우선 도시환경이나마 조금이라도 개선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대도 하지 않고 있던 우리 마을에 ‘작은 도서관’이 하나 생긴 것입니다. STX그룹의 지원을 받아서 경남대학교에서 만들었습니다. 저도 고마운 마음과 기쁜 마음 두 가지를 가슴에 안고 작은 도서관으로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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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막상 가서보니 기대에 훨씬 미치지 못했습니다. 규모가 작은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읽을 만한 책이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초등학교 5학년인 아들과 초등학교 1학년인 딸을 데리고 갔었는데 이 아이들이 읽을 만한 것은 더욱 없었습니다. 물론 아직 도서관이 문을 연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러는 건 섣부른 투정일 수도 있겠습니다. 앞으로 차근차근 장서를 늘려나가면 제대로 된 마을 주민들을 위한 문화공간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기대도 부질없는 것이란 것을 곧 깨닫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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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좁은 도서관 안의 책장은 꽉 차 있었습니다. 주로 대학 전문서적들이었습니다. 이곳이 아무리 대학교 주변 마을이라지만 주민들이 저런 전문서적 읽기를 즐기는 그런 학구적인 사람들이 많은 마을은 분명 아닐 것입니다. 저부터도 그렇습니다. 주민들과 함께 호흡하는 대학, 주민들과 함께 어울리는 기업이미지를 만들기 위하여 노력하시는 뜻은 충분히 알고 아름답게 생각하지만, 자칫 지방정부들이 즐겨하는 전시행정 같은 꼴이 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좋은 일 하려다가 도리어 욕먹는 그런 우를 범해서야 되겠는가 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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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도서관'은 신마산에 있는 옛날 창원군청 자리에 위치한 경남대학교대학원 평생교육원 1층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제가 거기 사서로 아르바이트(?)하고 있는 학생에게 학교측에 제 의견을 좀 전해달라고 부탁은 해놓았는데, 개선이 될지는 잘 모르습니다만. 컴퓨터도 4대 비치돼 있으니까 필요하신 분은 들러보세요.


2008. 9. 11  파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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