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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

'선덕여왕' 유신, 사랑 버리고 근친결혼한 까닭

김유신이 미실의 아들 보종의 딸 영모와 결혼했다. 물론 이는 MBC 드라마 선덕여왕에서의 이야기다. 이전에도 이야기했던 것처럼 유신이 협박에 굴복해 미실의 가문에 장가를 든 것은 난센스란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실제로는 미실이 유신의 가문과 혼사를 맺음으로써 권력기반을 더욱 공고히 하고자 했을 것이란 사실이 보다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김유신의 가문이 신라 진골인 것은 시혜인가, 노력의 결과인가

김유신의 조부인 김무력은 금관가야 구형왕의 아들이다. 그는 신라에 귀순한 이후 전장에 나가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관산성전투에서는 성왕을 죽여 백제부흥운동에 찬물을 끼얹기도 했다. 김무력은 그 공으로 대각간의 지위에 올랐다. 무력의 아들 서현 역시 낭비성전투 등에서 공을 세웠으며 각간의 자리에 올랐다. 각간은 신라 17관등 중 1등위다.

나중에 삼한을 병합한 김유신이 태대각간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데 대각간이나 태대각간은 상설적인 벼슬이 아니라 특별한 사람에게 특별한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비정규적으로 특설한 것이었다. 김유신의 가문은 신라에 귀순한 이래 대대로 각간에 올랐을 뿐 아니라 진골귀족으로 행세했다(참고로 신라에서는 진골귀족이 아니면 3등위 이상의 관직에 오를 수 없다). 

신라가 귀순한 가야의 왕족에게 진골귀족의 작위를 부여한 것은 나름 정치적 계산이 있었을 테지만, 그것이 다만 시혜적인 것이었을까? 신라란 나라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열린 사고 구조를 가진 나라였을 수 있다. 박씨족에서 석씨족으로, 다시 김씨족으로 왕권이 이전되는 과정을 보아도 그렇다. 신라는 통합왕조였던 것이다. 

하나의 왕조가 다른 왕조를 배타적으로 멸망시키는 관계가 아닌 상생하는 관계였다고나 할까. 여기에 가야계가 하나 더 추가된 것이다. 이런 전통에 따라 신라는 가야계의 유력한 왕족인 유신의 가문을 진골로 인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김유신 가문이 진골귀족이 된 것이 단순히 가야의 왕족이었기 때문일까?

그들이 아무리 가야의 왕족 출신이라도 탄탄한 무력이 없었다면 모두 불가능한 일이다. 구형왕은 신라에 귀순함으로써 자신과 자식들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영지에 대한 관할권까지도 일정하게 유지했을 것이다. 우리가 드라마 선덕여왕을 보면서 유심히 살펴볼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비담의 화랑 입문기다. 

정치적 입지는 무력보다 혼사가 더 큰 변수

비담은 화랑이 되었지만 아직 낭도가 없다. 말하자면 그는 병사 없는 장군이다. 만약 비담이 끝내 낭도를 구하지 못한다면 그는 영원히 나홀로 화랑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에 여러분은 하나의 의문도 들지 않는가? 어째서 신라는 화랑으로 임명한 또는 인정한 자에게 낭도를 나누어 주지 않는 것일까? 아무튼 김유신은 이런 문제로부터 자유롭다. 

그러나 이런 무력도 그저 가문의 귄위를 지키는 정도 이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니 결국 전장에 나가 공을 세우지 않고서 패망한 왕조의 가문의 영광을 일군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나 마찬가지다. 김무력과 김서현은 수많은 전쟁에서 공을 세웠지만 앞으로 김유신도 마찬가지 길을 걷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열심히 노력하는 자가 항상 승리의 월계관을 쓰는 것은 아니란 사실을 잘 가르쳐준다. 여기엔 보다 복잡한 고도의 변수가 작용하는 것이다. 그 변수란 다름 아닌 혼사다. 오늘날의 재벌가나 정치인, 고위관료 집단의 혼맥을 살펴보면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신학림 전 언론노조위원장의 말에 의하면,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조선일보와 이명박 대통령의 혼맥도라고 하니 관심있는 분들은 한 번 살펴보시기 바란다. 아마도 내가 느낀 그대로라면 여러분은 틀림없이 거미줄로 쳐진 망을 상상하게 될 것이다. <덕업일신 망라사방>이 아니라 <우리끼리 망라독점>이라고 말해도 하나도 지나치지 않은….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김유신과 영모의 결혼도 분명히 책략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에서도 그랬을 수 있다. 김유신이 자신의 누이들과 김춘추를 결혼시키기 위해 벌인 쇼를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꿈을 사고 판 누이들의 이야기로 너무도 유명한 이 아름다운 고사의 그림자 속에는 무서운 책략이 숨어있었던 것이다. 

김유신의 연애담, 천관녀와의 사랑

그런 김유신에게도 애절한 연애담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천관녀와의 사랑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천관녀는 기생이라고도 하고 제관이라고 하며 주막집 처녀라고도 하는 등 다양한 신분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몇 해 전, KBS 사극 <연개소문>에 등장했던 천관녀는 미실의 양녀로서 하늘에 제사를 주관하는 천관이었다. 

천관녀가 어떤 출신의 여인이었던지간에 분명한 것은 김유신의 어머니 만명부인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천한 가문에 속했음은 그다지 틀지지 않아보인다. 만명부인으로 말하자면, 법흥왕의 동생 입종갈문왕의 손녀이며 진흥왕의 동생 숙글종(숙흘종이라고도 발음함)의 딸이다. 유신의 어머니 만명부인은 왕족이었다. 

당시는 왕족의 명예와 특권을 위해 철저하게 근친혼이 행해지던 때였다. 김유신이 비록 진골귀족이라고는 하나 패망한 가야의 왕족일 뿐이었다. 내물왕계의 후손으로 철저한 근친혼이 신국의 도라고 배웠던 만명공주에게 김서현은 절대 결혼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만명공주는 김서현을 따라 만노군(충북 진천)으로 도망쳐 그곳에서 유신을 낳았다. 

물론 전해오는 이야기는 이렇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믿지는 않는다. 김서현은 당대의 명장이며 신라 최고의 관등 각간에 '대'자를 더한 대각간이다. 신라 천년역사를 통틀어 대각간의 지위을 받은 인물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이런 김무력의 가문과 혼사를 맺는 것은 왕족이라 하여 거부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아무튼 만명공주는 사랑의 열병을 앓았던 젊은날의 에피소드로 인해 콤플렉스가 있었을 것이다. 이런 콤플렉스는 자연스레 출세지향적인 성향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그런 만명부인에게 천관녀는 가당치도 않은 존재였다. 그런데 자신의 기대를 짊어진 아들 유신이 천관녀에게 빠지다니. 만명부인은 유신에게 호통을 쳤다.

유신, 출세를 위해 애마의 머리를 자르다

"나는 어렵게 너의 부친과 결혼하여 너를 낳았다. 너는 어찌하여 가문의 장래를 생각하지 않는단 말이냐? 술 파는 천한 계집과 어울리다니 정신이 있는 게냐, 없는 게냐?" 크게 꾸지람을 들은 김유신은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맹세했다. "다시는 천관녀를 만나지도 않을 것이며 그 집에 가지도 않겠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술 취한 유신을 등에 태운 말은 천관녀의 집으로 갔다. 유신의 말은 명마였다. 유신이 술에 취하면 가는 곳이 어디인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술에 취한 유신이 천관녀의 집에서 운우의 정으로 밤이 깊어감을 잊었음은 물론이다. 다음날 아침 술이 깬 유신은 대경실색했다. 어머니에게 한 맹세를 깨뜨린 것이다. 

다음 이야기는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유신의 말은 그 자리에서 목이 잘려 자연의 품으로 돌아갔다. 주인의 연애를 도운 결과는 비참한 죽음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유신은 진정으로 천관녀를 사랑했을까? 아니면 하찮은 노리갯감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천관녀가 주막집 기생이었다면, 그래서 유흥 목적으로 드나든 것이었다면, 만명부인의 충고를 받아들인 유신은 매우 강단이 있는 젊은이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천관녀가 단순히 주막집 기생이 아니라, 요즈음 주로 대세를 이루는 주장처럼 제사를 주관하는 천관이었다면 이야기는 매우 달라진다.

유신 역시 어머니 만명부인과 마찬가지로 매우 출세지향적인 성격의 인물이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때 그가 자기 명마의 목을 자른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그것은 출세를 위해 사랑도 과감하게 버리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영모와 결혼했으며 또 후에 자기 누이가 김춘추와 결혼하여 낳은 공주와 결혼하게 된다.

유신도 근친결혼, '혼사는 정치야심의 도구'

말하자면, 김유신도 자기 가문의 권위와 특권을 만들기 위해 근친혼을 강행했던 것이다. 하긴 강행이란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그 시대에 근친혼이란 이상한 것도 아니며 오히려 신국의 도란 이름으로 권장되던 행위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원술랑이 바로 김춘추와 문희 사이에서 난 공주가 김유신과 혼인하여 낳은 아들이다. 

그토록 출세지향적이었던 김유신, 그래서 천관녀와의 연애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말의 목을 잘랐던 김유신, 그러나 천관녀를 향한 사랑의 감정은 가슴속에 남아있었던 것일까? 백제를 멸망시키고 돌아온 김유신은 자신이 드나들던 천관녀의 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절을 지었다. 천관사란 이름의 이 절은 오는날 흔적은 없고 자취만 남아 천관사지라고 불린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김유신이 영모와 결혼하는 장면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었다. '김유신은 정말 대단한 사람임에 틀림없군. 자기 감정을 다스리며 저토록 처절하게 이성에 충실하다는 것은 보통 수양이 깊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는 경지를 보여주는 것이지. 실로 삼한통일을 이룰 만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런 삶이 과연 행복한 삶일까? 거기에 대해선 뭐라고 말할 자신은 없다. 사람에겐 저마다 가치관이 다르다.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우리는 뉴스를 통해 한국 최고 재벌의 후계자가 이혼하는 것도 보았으며, 또 그 최고 재벌에 시집을 갔다고 해서 신데렐라가 되었다가 스스로 이혼을 결심하고 나온 사람도 보았다. 

신데렐라가 동화 속에서 아름답고 순수한 사랑의 테마일지는 몰라도 현실에서는 어떨까? 왕비가 된 신데렐라는 과연 행복한 삶을 살았을까? 혹은 왕비가 된 신데렐라가 잃어버린 것은 없을까? 단지 유리구두 한 짝 뿐이었을까? 그리고 그것이 사실은 인생에서 가장 고귀하고 소중한 것은 아니었을까? 

천관사를 완성한 김유신, 천관녀에게 무어라 말했을까?

아무튼 김유신이 미실가문과의 혼사로 정치적 제휴를 맺어 가야 유민들을 살렸다는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다. 가야 유민들은 김유신에게 목숨을 빚졌다. 그들은 생사를 다해 충성을 다할 것이니 김유신으로서는 확실한 무력을 확보한 셈이다. 그나저나 후반부에서 김유신과 최대의 각을 세우게 될 비담은 어떻게 자신의 군대를 만들어갈까? 

좀 촌스럽게 말한다면, "그것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