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에 해당되는 글 9건

  1. 2010.07.18 김수로, 작가 바꿨다고 배가 산으로 가나 by 파비 정부권 (8)
  2. 2009.10.10 김춘추와 선덕여왕, 진골 대 성골의 대결? by 파비 정부권 (5)
  3. 2009.09.25 황남대총금관으로 보는 선덕여왕 탄생의 비밀 by 파비 정부권 (6)
  4. 2009.09.21 선덕여왕이 만든 분황사의 석불머리, 왜 없어 졌을까? by 파비 정부권 (6)
  5. 2009.09.13 선덕여왕과 천추태후로 살펴보는 근친혼 by 파비 정부권 (54)
  6. 2009.08.11 선덕여왕, 덕만은 살고 천명이 죽어야 하는 이유 by 파비 정부권 (11)
  7. 2009.07.11 선덕여왕, 미실의 출신성분은 무엇이었을까? by 파비 정부권 (8)
  8. 2009.06.24 이요원이 창조할 선덕여왕 이미지는? by 파비 정부권 (3)
  9. 2009.06.17 하룻강아지 선덕여왕과 여우같은 천명공주 by 파비 정부권 (11)
아무리 작가 교체 때문이라지만… 좀 심하다















김수로, 드라마가 방영되기 전부터 큰 기대감으로 기다렸던 드라마입니
다. MBC는 선덕여왕으로 왕년의 드라마 왕국으로서의 면모를 어느 정도 회복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선덕여왕이 워낙 인기도 있었고 내용도 탄탄했던 터라 이어질 김수로에 대한 기대가 더욱 컸던 것도 사실입니다.

가야를 다룬 거의 첫 번째 시도, 김수로

김수로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다룬 예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드라마 뿐 아니라 역사가들의 연구도 매우 부진한 것이 현실이지요. 한반도의 남단에서 무려 500년 이상이나 떨쳤던 주요한 정치세력에 대한 대접치고는 너무나 허접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김수로의 일대기가 드라마로 만들어진다고 해서 매우 기뻤습니다. 특히나 김수로가 활약했던 가야는 바로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이기도 합니다. 나의 아내도 김해 김씨이니 말하자면 드라마 김수로는 우리 집안과도 무관하지 않은 셈이지요.(ㅋ~ 이건 좀 오버다, 그렇죠?)

아무튼 신문지상에 최인호의 제4의 제국을 드라마로 만든다는데 제목이 잃어버린 제국으로 한다더라, 뭐 어쩐다더라 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떠돌았습니다. 선덕여왕이 끝나자마자 그 열기가 채 식기 전에 돌았던 이런 이야기들은 더더욱 가야 건국 과정을 그릴 드라마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던 것입니다.

마침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드라마의 제목은 김수로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 제목이 가장 적절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사실 제4의 제국이니 잃어버린 제국 따위는 대중적 드라마의 제목으로는 좀 부적절하다고 할 수 있지요. 아마도 김수로 앞에 철의 제왕을 붙인 것은 철기문화가 융성했던 가야의 면모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그려나가려는 의도라고 보였고, 실제로도 그렇더군요.


오랜 기다림 끝에 맛본 김수로는 재미있었습니다. 그러나 CG, 전투장면 등은 추노가 끝난 지 오래지 않았던 탓인지 좀 실망스러웠습니다. 추노가 우리의 눈을 너무 고급스럽게 만들어놓았던 까닭도 작용했을 테지요. 그러나 전반적으로 줄거리는 흥미진진하게 진행됐다고 생각합니다.

잃어버린 제국의 복원이란 역사적 의미도 지닌 드라마

김수로와 정견모주가 북방에서 내려왔다는 설정도 논쟁의 지점은 있지만 나름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신라의 김씨와 가야의 김씨가 실은 같은 계통으로 북방에서 내려온 부족이란 설도 힘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으니까요. 석탈해와 김수로의 경쟁관계도 역시 역사적 자료에 근거한 것이라 크게 문제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김수로가 철기를 보유한 북방민족의 수장이란 관점보다 철기는 이미 가야지역에서 발달해 있었으며 김수로는 단지 이를 배우고 받아들였을 뿐이라는 해석도 매우 새롭고 독특한 시각이었습니다. 다만 유리왕의 뒤를 이어 신라의 왕이 될 석탈해가 너무 비열한 인물로 그려져 개인적으로 좀 아쉬운 감이 없잖아 있긴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재밌게 보고 있던 드라마 김수로가 오늘 보니 갑자기 배가 산으로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상당히 당혹스러웠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였습니다. 도대체 연기자들의 대사나 행동이 전혀 자연스럽지 못할 뿐 아니라 앞뒤가 맞지 않는 일들이 많았으며, 심지어는 코미디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특히 염사치는 황당함의 극치였습니다. 간자 임무를 띠고 구야국에 잠입한 고정간첩 아로와 염사치가 주루에서 벌이는 행각은 실로 저급한 코미디라 하기에 모자람이 없습니다. 염사치는 구야국의 실권을 장악하고 왕좌를 노리고 있는 신귀간(대천간)의 오른팔입니다. 그런 그가 벌이는 어설픈 장난은 참으로 도가 지나쳤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석탈해도 마찬가집니다. 아효는 또 어떻습니까? 아마도 짐작하건대 아로는 박혁거세의 딸이며 아효는 남해차차웅의 딸인 듯합니다. 둘은 고모와 조카 사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구야국에 첩자로 잠입해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니 그 충성심이 실로 대단합니다. 이런 걸 좀 유식한 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라 하나요?

너무나 엉성한 설정, 대사, 보는 사람이 부끄러울 정도

그런데 그토록 막중한 임무를 띤 아효의 행동이 참으로 이상합니다. 그녀는 아로의 명을 받고 김수로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죽이지 못했습니다. 김수로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겠지요. 그리고 얼마 후 김수로는 석탈해의 음모에 빠져 노예선에 팔려갔고 늑도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허황옥으로부터 구출되었지요.  


어찌어찌(이것도 참 거시기 합니다) 아효는 김수로가 있는 곳을 알아냈습니다. 아로의 눈을 피해 늑도에 온 아효, 김수로를 보자 감격에 눈물을 흘립니다. 사실은 아로에게 아효를 시켜 김수로를 죽이라고 한 사람은 석탈해였습니다. 드라마는 이 부분에 대한 해명도 제대로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로, 아효와 석탈해의 관계…. 

아무튼 아효는 김수로에게 당장 구야국으로 돌아가지고 채근합니다. 이 무슨 황당 시츄에이션? 거기에 가서 잡혀 죽으라고? 신귀간이 천군을 누르고 구야국의 실권자가 되어 공포정치가 실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아효가, 그 신귀간에게 붙어 김수로를 죽이도록 자기에게 사주했고, 그게 뜻대로 안 되자 음모를 꾸며 노예선에 팔아넘긴 석탈해가 버티고 있는 구야국으로 당장 돌아가잡니다.  


이거 작가님이 혹시 뭘 잘못 드셨을까요? 그러더니 오늘은 김수로와 허황옥, 허황옥의 부친 허장상이 철편(철근? 이름은 정확히 모르겠음)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구야국으로 들어갑니다. 김수로와 득선은 김수로의 양어머니(단야장 조방의 처)의 집에 갔다가 군사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그리고 같은 시각, 허장상과 허황옥은 철편(?)을 구하기 위해 상단을 관리하는 신귀간의 부하를 만나러 갔다가 아효와 마주칩니다. 원수가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것도 아닌데 이들은 실제로 외나무다리 비슷한 곳에서 만납니다. 모른 척 지나가려는 허황옥을 붙들고 아효가 어린아이 투정하듯 다그칩니다. 

"네? 수로 도련님은 잘 계신가요? 건강은 회복하셨나요? 그런데 왜 안 오시나요? 언제 오시죠?"  

가야의 옛땅에 사는 한 사람으로 좀 더 세심한 배려가 아쉽다

이건 뭐… "수로야, 너는 왜 빨리 호랑이 입으로 머리를 안 들이미는 거니? 빨리 와서 호랑이 밥이 되지 않고 뭐 하는 거냔 말이다. 재미없게" 하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도대체 그 어색함이란. 문제는 닭살이 돋을 것 같은 어색함이 이것뿐이 아니란 것입니다. 최소한 오늘은 드라마 전체가 어색함과 닭살 등으로 도배된 코미디였습니다.


듣자하니 작가가 중간에 교체되는 등 진통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껏이어야지 이건 너무 한다 싶습니다. 김수로에 대한 기대로 드라마가 시작되기를 기다려왔던 한 사람으로, 또 가야의 옛 땅에 살고 있는 후손의 한 사람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물론 김수로는 여타의 막장드라마와는 비할 바 없이 훌륭한 드라마임에 틀림없습니다. 특히 잃어버린 제국 가야를 복원하는 드라마여서 더욱 기대가 큽니다. 그런 만큼 세심한 배려가 더욱 절실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연기자들의 투혼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제작진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배종옥이나 유오성 같은 훌륭한 배우들이 이 드라마로 인해 연기에 대한 혹평을 듣게 되지나 않을까 그게 걱정이네요. 그러나 그보다는 제가 이 드라마를 보면서 느끼는 부끄러움, 몸 둘 바를 모르는 어색함, 그런 게 더 불편하답니다. 아무래도 김수로 열혈 팬이라 그런가봅니다. 아무튼, 건투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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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파비 정부권
김춘추가 골품제도를 일러 천박하고 야만스러운 제도라고 일갈했다. 그것도 성골 왕인 진평왕 앞에서.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일까? 결론은 도저히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이미 김춘추는 덕만공주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공주님은 어떤 마음으로 신라에 오셨습니까? 저는 또 어떤 마음으로 신라에 온 것 같습니까?"
 

사서에 등장하는 김춘추는 탁월한 외교전략가였다.


김춘추, "나는 신라를 가지기 위해서 왔다!"

그리고 김춘추는 힘주어 말했다. "저는 신라를 가지기 위해 왔습니다." 이미 덕만공주도 오래전에 같은 말을 했었다. "신라를 먹어버릴 거야." 그리고 그 말은 곧 "내가 신라의 왕이 되겠다"는 확신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덕만공주는 바야흐로 왕이 되려고 한다. 아무도 꾸어보지 못한,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꿈, 여왕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 김춘추가 제동을 걸고 나섰다. 김춘추는 말한다. "신라 역사에서 아무도 꾸어보지 못한 두 가지 꿈이 있어. 하나는 여자가 왕이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진골이 왕이 되는 것이지. 그런데 그 둘 중 어느 게 먼저 될까? 여왕? 아니면 진골 왕?" 묘한 웃음을 흘리며 질문 아닌 질문을 던지는 김춘추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진심은 무엇일까?

그러나 이미 우리는 김춘추의 마음을 그의 입을 통해 충분히 들었다. 그는 덕만에게 "나도 이모님과 마찬가지로 신라를 가지기 위해 바다를 건너 왔다"라고 말했으며, 엊그제는 진평왕과 대등들 앞에서 "골품제도는 천박하고 야만스러운 제도"라고 일갈했던 것이다. "그래, 성골만 왕이 되란 법이 있소? 나 진골도 왕이 되고 싶소!" 이게 그의 진심인 것이다.

그리고 김춘추는 입국하자마자 염종을 수하에 두고 비담을 포섭하기 위해 저울질 하는 등 나름대로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나아가 미생과 친하게 지내면서 적을 안심시키고 내부를 교란시키는 양동작전까지 펼치고 있다. 가히 외교술의 귀재였다는 그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아마 우리가 짐작하는 것이 맞는다면, 김춘추는 기골이 장대하고 빼어난 용모를 지녔으며 뛰어난 두뇌와 유창한 화술의 소유자였다. 당태종조차도 김춘추를 칭찬했다고 하니 그가 고구려와 일본, 중국을 넘나들며 외교전을 펼친 것이 우연한 일은 아니었을 듯하다. 게다가 김춘추는 출중한 지혜뿐 아니라 대범한 용기까지 지니고 있었다.  

김춘추는 뛰어난 외교전략가에 행동가였다

감히 누가 있어 용담호혈에 주저 없이 들어갈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과연 그런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나 김춘추는 스스로 죽을지도 모를 길을 주저 없이 갔다. 그리고 실제로 고구려에서 연개소문에게 죽을 고비를 가까스로 넘겼다. 그런 그였으니 진평왕 앞에서 감히 "골품제도는 천박하고 야만적인 제도"라고 일갈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는 국기를 뒤흔드는 일이다. 골품제도는 신라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장치다. 정확하게 말하면, 신라가 아니라 신라왕실을 지탱하는 장치다. 이를 부정하는 것은 곧 역모다. 성골왕족을 부정하고 역모를 일으키겠다는 공개적인 선언을 김춘추가 왕 앞에서 한 것이다.

사실 김춘추는 진지왕의 친손자이면서 동시에 진평왕의 외손자이기도 하다. 그러니 못할 소리도 아니다. 그의 입장으로 보면 성골남진한 상태에서 충분히 왕위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 김춘추는 진평왕에 의해 폐위된 진지왕의 친손자요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진골귀족일 뿐이다.   
 
아무래도 김춘추가 왕이 될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은 역시 덕만공주의 부마가 되어 부군이 되는 것이다. 부군이란 태자가 없을 때 공주의 부마를 다음 왕위계승자로 삼는 신라만의 독특한 제도다. 이런 제도는 근친혼이 성행하던(혹은 권장되던) 신라였기 때문에 가능했을지 모른다. 어차피 부마도 결국 같은 왕족이니까.   

실제로 부군의 지위에 올라 왕이 된 예는 많았다. 석탈해가 그랬으며 김씨족 최초의 왕인 미추왕이 그랬다. 내물왕과 실성왕도 모두 사위로서 왕이 된 케이스다. 그러니 성골 태자가 없을 경우에 진골귀족 중 한 명을 성골 공주의 부마로 맞아 부군으로 삼는 것이 신라의 전통이며 자연스럽게 후계를 확정짓고 정국을 안정시키는 방법이다. 

김춘추의 위험한 발언, "성골만 왕이 되란 법 있나? 진골도 왕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김춘추가 굳이 왕이 되고 싶다면 이미 미실과 계획한 것처럼 덕만공주와 혼인해 부군이 되면 될 일이다. 덕만은 김춘추에게 외가 촌수로는 이모(3촌)가 되지만, 친가로 보면 6촌 형제간이다. 근친혼을 신국의 도라 하여 권장하던 신라사회에서 6촌 형제간인 덕만과 춘추가 결혼하는 것은 하등 이상할 이유가 없는 일이다. 

물론 역사에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드라마에서도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신라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주겠다는 연출의도에 따라 연대나 인물 등에 대해 각색의 가위질이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도저히 손을 댈 수가 없는 역사적 사실도 있는 법이다. 선덕여왕과 김춘추의 관계가 그렇다. 

그래서 진골인 김춘추가 성골 왕 진평왕 앞에서 감히 역모에 준하는 발언을 한 것일까? "폐하, 어찌 성골만 왕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저 진골도 왕이 되고 싶사옵니다. 저를 후계자로 삼아주시옵소서." 그러나 이는 분명 매우 위험한 발언임에 틀림없다. 진평왕은 5촌 조카이면서 동시에 외손자이기도 한 김춘추의 발언을 문제 삼지 않을 수 있다.

만약 진골도 왕이 될 수 있다고 하면 위 인물들 중 누가 제일 기뻐할까?

 
그러나 다른 신료들은? 절대 그럴 수 없다. 그들은 당장 김춘추를 참하라고 소를 올릴 것이다. 만약 그들 귀족들도 김춘추의 발언을 문제 삼지 않는다면, 특히 미실과 세종 일파의 경우에, 다른 의도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도 진골이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기회가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며, 때문에 속으로는 김춘추의 발언에 쾌재를 부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현재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보이고 있는 권력을 둘러싼 역관계로 보아 김춘추의 주장이 받아들여진다면 다음 왕위에 가장 근접한 사람은 세종이다. 이것은 미실이 평생을 꾸어오던 꿈, 곧 황후가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 김춘추는 "성골만 왕이 되고 진골은 왕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야만적"이란 따위의 발언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김춘추에게 필요한 것은 세력이다

오히려 김춘추는 '성골만이 왕이 될 수 있으며, 덕만공주야말로 하늘이 예언한 개양자로서 나라를 다스릴 임금의 재목'이라고 진평왕에게 품해야 옳은 일이다. 나아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덕만공주의 결정이야말로 참으로 현명한 판단이라고 부추겨야 옳은 일이다. 그 길만이 "신라를 가지기 위해 돌아왔다"라고 말하던 그의 야심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설령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역사적 사실들을 땅 속에 묻어두고 이야기를 전개한다고 하더라도 김춘추의 생각대로는 절대 될 수가 없다. 왜? 김춘추는 미실 일파가 몰아낸 진지왕의 손자이기 때문이다. 김춘추는 패주의 자손이다. 그리고 진지왕을 패주로 만든 것은 미실과 세종, 설원공 등이다.

실제로 역사에서도 김춘추는 선덕여왕 16년과 진덕여왕 7년을 합하여 무려 20년이 넘는 긴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진덕여왕이 죽은 후에도 김춘추는 바로 왕으로 추대되지 못했다. 삼국사기에 보면 귀족들이 화백회의를 열어 알천공을 왕으로 추대했지만 알천공은 자신은 늙고 덕이 없음을 들어 고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진실일까?

온갖 부패혐의에 시달리면서도 대통령이든 총리 자리든 연연하는 오늘날의 세태로 보면 참으로 신선한 충격이 될 수도 있는 미담이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통틀어 이런 미담은 대체로 들어본 기억이 없다. 그럼 왜 알천공이 왕 자리를 고사했을까? 바로 김춘추의 뒤에는 김유신이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월성전투의 승리로 비담의 난을 제압한 이후 김유신은 신라의 무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아이러니지만 후일의 김유신과 김춘추를 만들어 준 것은 바로 비담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아무튼 알천공이 김춘추에게 왕위를 양보한 것은 매우 현명한 선택이었다. 목숨은 두 개가 아니니까.

김춘추가 해야 할 일은 조용히 때를 기다리는 것


그리고 이때부터 화백회의는 사실상 그 기능을 잃었다고 볼 수 있다. 중앙집권을 통해 왕권이 강화된 신라에서 화백회의는 왕의 괴뢰기구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법흥왕 때부터 대등들을 각 행정기관의 장으로 배치해 왕권의 통제아래 두려던 시도는 김춘추가 왕이 될 무렵에는 거의 복종하는 관계로 굳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김춘추가 덕만공주에 맞서 진골도 왕이 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대드는 것은 난센스다. 아니 치명적 실수다. 지금은 은인자중할 때다. 조용히 세력을 키우며 때를 기다리는 게 그가 할 일이다. 영민한 그로서는 분명 언젠가는 자기에게 기회가 올 것임을 알고 있을 것이다. 당나라에 유학까지 한 김춘추라면 태공망의 고사쯤은 읽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잠시 미쳤던 것일까?
Posted by 파비 정부권

신라밀레니엄파크에서 찍은 사진

선덕여왕 탄생의 전시대적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미리 말한다면 그건 신라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신라는 매우 개방적인 사회였다.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와는 달랐다. 고구려와 백제가 중국문화를 받아들이며 제도를 정비한 데 비해 신라는 이들과는 다른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유심히 유물을 관찰한 사람이라면 찬란한 신라문화의 독자적인 힘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신라고분은 찬란한 문화유산의 보물 창고

이재호가 쓴 <천년 고도를 걷는 즐거움(한겨레신문사)>에 이런 일화가 있다. 경주의 고분들에 일제는 아무런 의미없이 1호부터 155호까지 번호를 붙였다. 일제는 1920년대에 대대적인 고분 발굴에 착수했는데 금령총과 금관총 등에서 금관이 발굴되었다. 그리고 이어 129호분을 발굴하자 금관이 또 나왔다. 이에 본국과 긴밀히 연락한 총독부는 발굴을 중단했다. 

그리고 때마침 일본에 신혼여행 중이던 스웨덴의 구스타프 6세 황태자에게 "신라 천 년 고도 경주에서 금관이 나왔고, 지금 발굴 중인 고분에서도 금관이 나올 기미가 있다"며 발굴에 참여하지 않겠느냐고 유혹했다. 물론 아시아 침략의 야욕을 위해 서방과 선린관계를 맺으려는 일본의 계략이었다. 구스타프는 고고학에 상당한 조예가 있는 사람이었다.  

구스타프는 당장 현해탄을 건너 경주에 왔다. 각본대로 금관이 발굴되었음은 물론이다. 흥분과 감동으로 금관을 잡은 황태자는 손을 파르르 떨었다. 이를 지켜보던 일본관리가 만면에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황태자님이 이름을 지어주십시오." "음…." "황태자님이 직접 발굴에 참여하셨으니 서전국(스웨덴)의 이름을 따 서전총이 어떨지요?" 

"안 될 말이오. 찬란했던 동양의 나라 신라 왕릉에 서양 이름을 붙이다니 당치도 않소. 아까 보니 금관 정수리에 봉황 세 마리가 붙어 있던데 봉황총이 어떻겠소." 결국 129호분의 이름은 스웨덴과 봉황의 이름을 합쳐 서봉총이 되었다. 어찌 되었든 고고학적 지식과 안목을 갖춘 서양의 황태자에게도 신라의 금관은 휘황찬란한 것이었다. 

그리고 해방 이후 1971년 경주관광개발종합계획이 수립되었을 때 대릉원에서 제일 큰 98호분을 발굴하기로 했다. 이 고분을 발굴하기 위한 예행연습으로 바로 옆에 있던 155호분을 먼저 발굴하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여기서 천마도가 나왔다. 예행연습으로 발굴한 고분에서 천마도와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 금관(국보 188호)을 비롯해 1만 5천여 점의 유물이 쏟아지다니.

그리하여 155호 고분은 천마총이란 이름을 얻었다. 신문에 보니 천마도는 30여 년이 흐른 오늘에서야 비로소 전체 모습이 공개되었는데 머리에 뿔이 달린 모습이 유니콘을 닮아 앞으로 많은 논란이 예상된다고 한다.   

국보 188호 천마총 금관. 플래시를 쓸 수 없어 사진 상태가 안 좋다.


황남대총의 주인은 누굴까?

천마총에서 연습을 끝낸 발굴팀은 1973년부터 2년 3개월에 걸쳐 98호분을 발굴했다. 여기에 연인원 3만 2800명이 투입되었다. 이 98호분이 바로 황남대총이다. 이곳에서도 3만 5000여 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황남대총은 북분과 남분으로 이루어진 쌍총인데 남분은 왕, 북분은 왕비의 능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북분에서는 금관(국보 191호)이 나왔는데 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남분에서는 금관이 나오지 않고 대신 은관이 나왔다는 것이다.  남분에는 60세 전후의 남자와 순장된 것으로 보이는 여자의 유골이 나왔는데 남자의 유골은 내물왕 또는 실성왕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금관이 출토된 고분의 제작시기를 5세기에서 6세기 초반으로 볼 때 이 시기의 왕은 대략 6명으로 압축되는데 내물, 실성, 눌지, 자비, 소지, 지증왕이다. 이 중에 황남대총 남분의 주인은 누구일까? 여기에 대해 일본의 역사학자 요시미즈 츠네오는 그의 저서 <로마문화 왕국, 신라>에서 흥미로운 주장을 한다. 그는 남분의 주인을 실성왕으로 보고 있다. 

그 이유로 실성왕은 왕족이 아닌 신분으로 왕위에 오른 유일한 신라의 왕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이 모든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실성왕 외에도 왕족이 아니면서 왕이 된 인물은 이미 여럿 있었다. 우선 유명한 석탈해가 있다. 석탈해는 왕족이 아니었다. 다음 미추왕도 있다. 그도 역시 왕족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의 공통점이 있다. 모두 왕의 사위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부마로서 왕이 된 사람들인데, 어쩌면 아들이 없는 왕의 공주를 대신해서 왕좌를 이어받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요시미즈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석탈해나 미추왕 또는 내물왕의 경우에 박씨족, 석씨족 혹은 김씨족과의 권력투쟁을 통해 왕권을 쟁취한 것이라면 말이다.  
 
황남대총의 왕비는 금관, 왕은 은관?

실성왕은 김씨족이긴 하지만, 즉 김알지의 후손이긴 하지만 최초의 김씨 왕인 미추왕의 자손이 아니다. 그러므로 왕족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내물왕의 사위였다. 내물왕이 죽으면서 어린 아들들을 대신해 사위에게 왕좌를 넘겼다. 실성왕은 왕이었지만 미추왕(또는 내물왕)의 딸인 왕비에 비해 계급이 낮았다. 

신라 왕릉 최대 규모의 황남대총. 길이는 남북으로 120m 동서로 82m, 높이는 남분이 22m 북분이 23m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왕은 은관을 쓰고, 왕비는 금관을 쓰고 누워있는 무덤의 실체'에 대해 이보다 더 확실한 대답은 없을 것이다. 또 혹자는 같은 맥락에서 내물왕의 무덤이 아니겠느냐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실성왕은 눌지에게 피살당해 권력을 상실했는데 이토록 거대한 무덤을 조성했을 리 없다는 차원에서 눌지왕의 능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물왕의 무덤이라는 주장은 비록 석씨왕의 사위로서 왕이 되었으나 김씨족 왕권의 기틀을 닦은 강력한 군주라고 평가한다면 별로 설득력이 없는 이야기다. 눌지왕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실성왕을 죽이고 권력을 빼앗았다고 하나 그는 내물왕의 아들로서 정통성이 있다. 은관을 쓰고 누워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리 보면 가장 확실한 무덤의 임자는 아무래도 요시미즈의 주장처럼 실성왕이다. 그런데 어떻게 눌지에게 피살당해 권좌에서 밀려난 왕의 무덤이 이토록 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미스터리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커다란 핸디캡이 있다. 바로 의식이며 고정관념이다. 이로 인해 우리는 왕을 보는 눈은 가졌지만 왕비를 보는 눈은 갖지 못했다. 

기록에 의하면 실성왕의 왕비는 미추왕의 딸이라고 한다. 그러나 연대 차이로 볼 때 이는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다. 아마도 미추왕의 적손이거나 내물왕의 딸일 가능성이 크다. 미추왕의 딸이라고 하는 것은 김씨 왕족의 정통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을 수 있다. 왕에 비해 신성한 혈통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황남대총의 여주인은 왕보다도 강한 권력자였다

어떻든, 우리는 황남대총의 북분과 남분의 피장자를 통해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북분의 피장자는 여왕이 아니었는데도 왕만이 쓸 수 있는 황금수목관과 호화찬란한 장신구를 비롯해 로마유리잔과 자기 등이 부장되었지만, 남분의 피장자는 비록 왕이었지만 왕비에 비해 낮은 신분 탓으로 은관과 금동관과 기타 무기·무구류가 부장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은 원래 이 글의 주제이기도 한데, 자신을 암살하려던 실성왕을 오히려 시해하고 왕이 된 눌지조차도 어쩔 수 없이 거대한 봉분을 조성하는데 협력할 수밖에 없었던 세력관계다. 실성왕의 왕비는 눌지왕의 이모이고 눌지왕의 아내는 실성왕의 딸이다. 눌지왕 주변에는 강력한 외척, 여인들의 파벌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 착안하여 우리는, 어째서 왕비의 무덤인 북분에서 왕이 쓰는 황금수목관이 나오고 왕의 무덤에서는 은관과 금동관만이 나왔는지에 대한 이해를 구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MBC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보듯 미실이라는 여인이 구축한 권력관계란 것이 그렇게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란 사실도 함께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미실이 구축한 구도란 것은 결국 선덕여왕이 왕좌에 오를 수 있는 토대다. 선덕여왕이 비록 성골이라고는 하나 여자로서 왕위에 오른 것에 대하여 아직 어떤 구체적인 해명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다만 삼국사기에서 '성골남진'을 이유로 들고 있는데 이는 그저 불가피한 하나의 조처였을 뿐이라는 소극적인 해명 아닌 해명에 불과하다. 

신라 왕릉 중 가장 거대한 황남대총은 활발하고 진취적인 신라 여인들의 패기를 보여주는 블랙박스다. 그러나 우리는 이 블랙박스를 푸는 열쇠를 잃어버렸다. 여기에는 통일신라 후기부터 유입되기 시작한 유교의 영향으로 고대의 전통을 깡그리 부정하는 풍조도 한몫했다. 이 풍조에 편승한 김부식은 암닭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는 식으로 선덕여왕을 비하했다. 

황남대총 사이를 지나가는 두 사람. 무슨 생각을 하며 걸어가고 있을까?


그러나 결국 여왕도 배타적 근친혼을 통해 탄생한 왕족일 뿐, 
중요한 것은 골품귀족의 이해에 반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  
 
그러나 그 역시도 삼국통일의 토대를 닦고 문물을 장려한 선덕여왕의 공덕을 모두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완곡하게 "여자가 왕이 되었는데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은 신통한 일이다"라고 비틀어 말했던 것이다. 선덕여왕은 우연히 왕이 된 여인이 아니다. 또는 성골이 남진하여 그리된 것도 아니다. 

선덕여왕의 뒤를 이은 진덕여왕과 이백여 년이 지나 다시금 등장한 진성여왕은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사대주의 사관으로 씌어진 삼국사기, 이를 극복했으나 여전히 한계를 가지고 있는 삼국유사만으로 고대사회를 본다는 것은 얼마나 편협한 것인가. 그러므로 비록 필사본이라 해도 화랑세기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은 실로 위안이라 아니할 수 없다.

화랑세기 진본이 나타나기 전에는 위작 논쟁은 아마도 종지부를 찍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기와 유사에서는 볼 수 없는 생생한 고대 신라 사회의 생활상을 그려보는 기쁨을 화랑세기를 통해 누려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화랑세기의 이야기를 확실하게 증언하고 있는 것은 다른 어떤 왕릉보다 우뚝 솟아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황남대총의 여주인이 아닐까?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이 분묘의 여주인이야말로 당당하게 신라정계에서 활약한 미실과 선덕여왕의 전신이란 사실을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다만 전제가 있다면, 황남대총의 여주인이든 미실이든 선덕여왕이든 타고난 혈통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철저한 근친혼을 통해 배타적 신분으로 만들어진 왕족이거나 성골들이다.

그러나 아직 모든 것은 수수께끼다. 무덤들은 말이 없다. 대릉원을 순례하던 날, 마치 계곡을 타고 바람이 흐르듯 거대한 무덤들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무척이나 시원했다. 황남대총 사이를 걸어가며 드는 생각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래,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일 뿐이다.

"와, 정말 대단하다. 그리고 참 잘 생겼다." 

ps; 마무리가 희끄무리하지만 잠이 와서 할 수 없이 예약 걸고 그냥 잡니다. 내일 시간 나면 손 보겠습니다.
     뭐 크게 무리는 없다고 보지만, 결론은 신라사회는 여왕이 탄생하는 데 큰 거부감이 없는 사회였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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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 | 대릉원 황남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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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경주박물관에 가면 목 없는 석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기다랗게 줄을 지어 앉은 목 없는 석불들을 보노라면 섬찟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석불들의 머리는 왜 없어진 것일까요?

선덕여왕 기행으로 국립경주박물관에 함께 간 김주완 기자가 목 잘린 석불들을 보고 있다.

  
위 사진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김주완 기자가 안내문을 읽고 있습니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석불의 머리는 왜 없어졌을까?
1965년 경주 분황사를 발굴 조사할 때, 절 안에 있는 우물 속에서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석불들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한결같이 머리가 잘려진 것들이었습니다. 이 불상들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그렇다면 불상들의 머리는 왜 없어진 것일까요? 
그 원인으로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를 들 수 있습니다. 지진이 나면 받침대 위에 있던 불상이 굴러 떨어지는데, 가장 약한 부분인 목이 부러지기 쉽습니다. 또 몽고군의 침입, 왜란, 호란과 같은 전란에 의해 피해를 입기도 합니다. 
유교를 국가 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는 일부러 불상을 훼손한 적도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간혹 땀을 흘리는 불상에 관한 기록이 보입니다. 이러한 일이 나면 유생들은 세상을 현혹시키는 것으로 간주하여 불상을 파괴하였습니다. 목불은 태워버렸고, 석불이나 금동불은 우물, 저수지, 바다에 던져버렸다고 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머리를 잘라 관청에 신고하기도 했습니다.
분황사 우물 속에서는 머리가 없는 석불의 몸체에 비해 적은 수의 머리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머리 없는 불상들은 머리가 잘리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깊은 우물 속에 버려지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석불의 머리를 잘라 분황사 경내 우물에 버린 것은 조선의 유생들

분황사 우물 속에서 발견된 머리 없는 석불들은 지진이나 전란에 의해 피해를 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진이나 전란은 머리가 잘린 채 우물 속에 버려진 사실을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 지진이나 전쟁의 와중에 불상의 목을 잘라 우물에 버린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조선시대 유생들이 저지른 일이 분명합니다. 매우 과격한, 오늘날로 말하자면 근본주의자들의 소행인 것입니다. 이 근본주의 혹은 원리주의라고 부르는 것들은 자기와 다른 사람이나 사상을 도저히 인정하지 못하는 결벽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슬람 근본주의가 그렇고, 기독교 근본주의가 그렇습니다.

몇 년 전 아프카니스탄에서는 참혹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바미얀 석불을 탱크를 끌고가 포격을 가해 파괴한 것입니다. 몇 일 몇 시에 파괴하겠다고 공언했으므로 그 시각 세계의 시선이 그곳에 주목되었을 것은 당연합니다. 이런 일은 마치 사형장의 사형수를 TV를 통해 바라보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런 일을 자행한 당사자는 바로 당시 아프카니스탄 정권이었던 탈레반이었습니다. 바미얀 석불은 세계에서 가장 높고 클 뿐만 아니라 역사유적으로서도 그 가치가 매우 높은 것입니다. 현장법사는 이 석불을 일러 ‘황금이 번쩍이는 화려한 석불’이라고 했습니다. <왕오천축국전>을 쓴 신라의 혜초스님도 722년에 이곳을 다녀갔습니다.

그럼 이런 일은 과거의 우리나라나 이슬람 세계에서만 일어났을까요? 개방적인 문명과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우리나라에선 일어날 수 없는 일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애석하게도 근본주의란 최면에 걸린 유생들이 저질렀던 범죄행위는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도 가끔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사는 마을에 공원이 하나 있고 거기에는 단군상이 놓여있습니다. 이 공원은 저도 가끔 가는 곳이고 엊그제는 제 아내가 속한 여성단체에서 마을문화제를 매년 여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단군상의 목이 예리하게 잘려나간 적이 있습니다. 오래 전의 이야기도 아니고 불과 3년 전의 일입니다.
 
우리는 가끔 불상에 똥물을 끼얹고 도망가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매스컴을 통해 듣습니다. 작년 부산의 어느 체육관에서 열린 모 종교단체의 신앙대회에서는 참으로 기괴한 기도가 벌어졌는데, 부산의 절 이름을 하나하나 들먹이며 불태워달라고 기도를 하는 장면이 인터넷에 공개돼 물의를 빚기도 했습니다.


잔혹한 근본주의자들은 21세기 대한민국에도 얼마든지 있다

세상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광신적인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위협받고 있습니다. 이런 정신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면 전쟁이 일어나고 자신과 다른 모습이나 사상을 가진 사람을 살육하는 잘못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경주박물관 한켠에 일렬로 늘어선 목 없는 불상들을 모며 오만 가지 생각들이 머리속을 스쳤습니다.

그런데 잘려진 불상의 머리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요? 잠시 후 불상들 뒤에 보이는 박물관 안으로 들어갔더니 거기에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섬찟…! 분황사는 선덕여왕이 창건한 절입니다. 절의 이름에서 보듯 여황제(황)의 향기가 묻어나는(분) 절입니다. 선덕여왕은 즉위하던 해에 신하들로부터 성조황고란 칭호를 받기도 했지요. 

성조황고. ‘성스런 혈통을 지닌 여황제’란 뜻입니다. 이미 당시에 자주적 독립국가였던 신라는 여자를 황제로 옹립할 정도의 배포로 분황사를 만드는 데 총력을 기울였을 것입니다. 조상들의 위대한 힘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조선의 일부 유생들은 사대주의와 근본주의의 포로가 되어 악마의 만행에 앞장서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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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월성동 | 분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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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파비 정부권

우리는 선덕여왕을 통해 신라가 얼마나 성적으로 개방된 사회인가 하는 걸 알았습니다. 물론 이것은 신라민 전체에 해당되는 건 아니고 골족, 즉 성골과 진골귀족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개방적인 성풍속은 이미 오래전부터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고 있던 것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처용가를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처용가는 개방적인 성풍속과는 좀 다른 면이 있습니다. 사실은 아내의 외도를 눈 감아주는 마음 넓은 처용에 대한 이야기지요. 이에 감복한 도깨비(역신)가 은혜를 갚는 뜻에서 처용의 그림이 붙어있는 집에는 절대 들어가지 않겠다는 룰을 세웁니다. 그러나 어떻든 이런 처용의 관용은 오늘날의 시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대목입니다.

신라에 이어 등장한 고려왕조도 성풍속이 개방적이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어쩌면 족내혼에 관해선 신라보다 더 발달했을지도 모릅니다. 고려왕실의 족내혼은 왕씨 정권을 지키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려 4대 임금 광종은 족내혼을 권장하기까지 했습니다. 지방 호족세력을 완벽하게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근친혼을 통한 결속은 필수였을 것입니다. 

엊그제 <선덕여왕>에서 비담과 덕만공주의 혼사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성공하지 못한 문노의 계책이었지만, 족내혼에 관한 좋은 예시가 될 수 있겠습니다. 비담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진지왕과 도화녀의 아들인 비형과 실존인물 비담의 합성모델로 진지왕과 미실 사이에서 난 아들입니다. 즉 진평왕과는 사촌지간이란 얘기죠. 덕만공주에게는 5촌 당숙이 됩니다.  

우리나라 민법에는 8촌 이내의 친족은 결혼할 수 없도록 정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4촌 이내의 친족이 아니면 결혼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일본법으로 말하면 지금이라도 덕만과 비담은 합법적으로 결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선 불법입니다. 2005년 이전에는 동성동본간 결혼도 불법이었습니다. 이런 법외혼 관계는 부정기적인 정부의 특별법을 통해 구제받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이 민법규정(동성동본 금혼법)에 대해 위헌심판제청이 일어나자 유림에서는 "동성동본금혼제는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단군건국초부터 전래되면서 관습화된 우리 민족의 미풍양속으로서 전통문화의 하나" 라고 주장했지만, 최근 드라마 천추태후나 선덕여왕을 보면 이런 주장들이 얼마나 허구인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어쨌든 고려시대까지도 근친혼은 불법이 아니었으며 위에서 말한대로 권장되기까지 했습니다. 신라시대는 1부1처제 사회였습니다. 물론 고려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왕은 달랐을 것입니다. 왕은 나라를 통치하지만 한편 자손을 번창시켜 왕실을 안정시킬 의무가 있습니다. 물론 이는 의무이자 권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왕들은 여러 명의 부인을 두는 것입니다. 미실의 경우에 색공을 드는 여인이란 특수한 신분을 빼면 그녀도 1부1처제의 원칙에서 벗어나지는 않습니다. 만약 미실이 그녀의 계책대로 황후에 올랐다면 어땠을까? 이건 좀 복잡한 문제입니다. 그랬다면 세종과는 이혼해야 되겠지요. 아무리 미실이지만 두 사람과 결혼관계를 유지할 순 없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상대는 일국의 황제입니다. 미실과 설원공의 관계는 단지 연인관계일 뿐입니다. 미실과 설원공의 사이에서 난 보종은 실제 친자관계를 인정하여 미실의 아들로 인정 받습니다만, 설원공은 그저 연인일 뿐입니다. 세종이 묵인하고 있을 뿐이죠. 기분 나쁘면 이혼할 수도 있겠으나, 이사부 장군의 아들 세종은 감정보다는 권력을 택했습니다.

어쩌면 미실보다 세종이 더 무서운 사람입니다. 아니라구요? 멍청해서 그렇다구요? 음, 그러고 보니 그것도 그렇습니다. 하긴 드라마에서 세종과 하종 부자는 좀 멍청하게 그려지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러면서도 욕심은 배밖에 나와 왕이 되고 싶어 안달입니다. 다 미실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지요. 하여간 선덕여왕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대체로 멍청합니다.

일본의 경우에도 왕족은 철저하게 족내혼을 통해 혈통을 보존합니다. 현 아키히또 일왕이 역사상 최초로 왕족 외의 여자와 결혼했다고 해서 세간에 화제가 된 적이 있다는 사실은 앞서 제 블로그에서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 이같은 족내혼 또는 근친혼은 최근 들어,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2000년대 들어 TV사극에 자주 등장합니다. 


태조왕건, 제국의 아침 그리고 가장 최근엔 천추태후, 이 천추태후는 그야말로 근친혼을 다룬 드라마라 할 만큼 본격적이고 노골적이었습니다. 사촌형제들이 결혼을 하거나 숙질 간에 혼인을 하는 예는 허다한 일에 속합니다. 심지어 자매가 동시에 왕후로 간택되어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로 경종에게 시집 간 천추태후와 헌정왕후가 그렇습니다. 

경종과 이들 두 자매는 사촌지간입니다. 경종이 죽자 헌정왕후는 숙부인 왕욱과 연애를 하게 되고 그 사이에서 아들을 얻게 되는데 이가 곧 대량원군입니다. 그리고 이 대량원군이 강조의 정변으로 실각한 목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되는데 바로 현종입니다. 우리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이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왕욱과 헌정왕후는 결혼한 사실이 없습니다. 그들 두 사람은 연인었지만, 부부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고려 왕실은 그들 사이에서 난 아들을 왕족으로 인정하여 대량원군이란 칭호를 내리고 마침내는 왕좌에까지 앉혔습니다. 법도보다는 혈통을 중시한 것입니다.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인간의 법도 위에 신국의 도가 있다." 김대문의 조부인 예원공은 유학에 심취하여 근친간 결혼을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그의 모친이 타이르며 한 말입니다. 신국의 도. 도대체 이 신국의 도란 무엇일까요? 예원의 모친이 말한 바처럼 인간의 도리보다 위에 두었다는 것은 국가의 존망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제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는 <천추태후>에서는 목종이 물러나고 현종이 등극했습니다. 그리고 현종이 결혼을 하게 되는데요. 선대왕인 성종의 딸과 혼인을 합니다. 성종으로 말하자면 현종의 어미인 헌정왕후의 오라비이니 성종의 딸은 모계로 보면 4촌지간입니다. 그러나 현종의 아비 왕욱은 성종과 헌정왕후의 숙부가 되니 부계로는 5촌 당숙이 되는 것입니다.

이 국혼으로 다시 실권을 잡은 성종대의 경주 유학파들은 여세를 몰아 천추태후를 탄핵하며 목소리를 높이는데, 그 사유가 장히 헛갈립니다. 천추태후가 사통을 하였다고 하지만 그들이 세운 현종 임금 역시 천추태후의 동생인 헌정왕후가 사통을 하여 낳은 혼외 자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현종은 결코 왕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지요. 

드라마가 역사를 각색하다 보니 일어난 혼선이라고 보여집니다.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잡고 천추태후와 김치양을 역도로 몰아 처단하는 것으로 끝냈다면 간단한 것이었을 텐데 말입니다. 어쨌든 고려시대에도 신라의 신국의 도와는 좀 다르겠지만 그 비슷한 사상이 통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근친혼도 결국 역사의 산물이었다, 이런 말입니다.

천 년도 훨씬 전의 일을 이해한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어쩌면 당시에는 친형제 자매가 아니고선 혈족이란 유대감도 별로 없었을지 모릅니다. 삼촌이니 사촌이니 하는 개념조차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런 개념들보다는 신국의 도가 우선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대체 그 신국의 도란 무엇이었을까요?  

근친혼에 '도'라는 거창한 의미까지 부여한 걸 보면 어떤 특별하고 심오한 사상이 숨어있었던 것은 틀림없어 보입니다만.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
왜? 덕만공주가 선덕여왕 자리에 올랐을까요? 천명공주는 무엇 때문에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일까요? 그보다 한술 더 떠 (드라마상이긴 해도) 천명공주는 왜 죽어야만 했을까요? 삼국사기는 덕만공주를 진평왕의 장녀로 묘사하고 있지만, 삼국유사는 진평왕의 장녀는 천명공주이며 덕만공주는 차녀라고 하고 있습니다. 화랑세기도 또한 유사와 같이 덕만을 차녀라고 하고 있지요. 그러고 보니 유사와 세기가 비슷한 점이 많고 사기만 따로 놀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어째서 천명이 아니라 덕만이 선덕여왕이 되었을까?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삼국사기는 김부식이라는 중앙관료가 정권 차원에서 집필한 역사서입니다. 따라서 당시 집권세력의 이데올로기가 잘 반영된 기사들로 채워졌을 것입니다. 이에 반해 세기와 유사는 집필자의 의도에 따라 보다 자유로운 기사 작성이 가능했으리라 봅니다. 그런 면을 고려한다면, 삼국사기보다는 삼국유사가 더 진실에 근접했을 수도 있습니다. 덕만을 장녀로 묘사한 것도 따지고 보면 신라왕조의 후예인 김부식으로선 당연한 기술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집권세력의 이데올로기든 집필자의 자유로운 의도든 주관이 개입되어있다는 점에선 다르지 않습니다. 유사가 사기에 비해 150 년 정도 후대에 씌어졌다고 하지만 이 역시 별 의미가 없습니다. 이미 많은 세월이 흘렀다는 점에선 두 기사 모두 차이가 없으니까요. 그렇게 본다면 화랑세기의 위작논란도 사실 생각해볼 대목이 많습니다. 화랑세기가 위작이라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위작일 가능성은 없는가?

여기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어떤 역사서든 어느 정도의 위작은 가질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동양의 유명한 역사서로 사서의 바이블이라 할 사마천의 사기도 결국은 기자의 주관적 의도가 개입되었다는 점에선 위작이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사마천이든 김부식이든 일연이든 고증에 많은 땀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화랑세기의 위작논란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화랑세기는 김대문이란 당대의 인물이 당대의 이야기를 저술한 것이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화랑세기가 진본이라고 했을 때 그 폭발력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랑세기가 사실 기존 역사학계의 입장에서 보면 두려운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어찌 되었든 오늘의 이야기 주제는 그것이 아닙니다. 왜 덕만이 천명을 제치고 왕위에 올랐을까? 물론 이 질문은 어디까지나 유사나 세기의 기사를 사실로 가정하고 하는 것입니다. 사기의 입장에 서면 이런 질문은 성립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왜? 당연히 장녀인 덕만이 왕위에 오르는 게 순리니까요. 

그러나 세기나 유사의 눈으로 보면 이는 당연히 들 수 있는 궁금증입니다. 성골 남자가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장녀인 천명을 제치고 덕만이 왕위를 계승했을까? 진평왕이 재위 54 년 동안 왕자를 한 명도 생산하지 못했거나 생산했더라도 모두 죽었다는 성골남진에 대한 의문에 대해선 일단 덮어두기로 합시다. 유사에서도 선덕여왕 등극의 비밀을 여는 열쇠로 성골남진을 지목했으므로 지금으로선 성골남진이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여왕 출현의 이유일 수밖에 없습니다.

선덕여왕 등극의 이유는? 천명이 무능했기 때문
그러나 삼국유사는 단지 성골남진을 지목했을 뿐 차녀인 덕만이 등극한 이유에 대해선 언급이 없습니다. 여기에 대해선 화랑세기가 보다 많은 자료와 정보를 제공하고 있지요. 요즘 《드라마 선덕여왕》의 인기에 힘입어 출판계에서도 선덕여왕 출간 붐이 일고 있습니다. 서점의 신간 코너에 가보면 온통 선덕여왕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주로 화랑세기를 텍스트로 하는 이 소설들은 여러 권으로 이루어진 장편소설이 대부분입니다. 그 중에 한 권으로 된 소설 선덕여왕도 있습니다.

선덕여왕 - 10점
신진혜 지음/창해

   


창해출판사가 간행한 신진혜 저 선덕여왕입니다. 전질로 된 선덕여왕에 질린 독자라면 300여 페이지 정도로 간결하게 만들어진 부피에 우선 안도할 것입니다. 이 책은 주로 덕만이 공주의 신분으로 천명을 제치고 왕위에 오르게 되는 경위와 김춘추와 김유신을 중용해 왕권을 확립하는 과정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야기의 전개가 매우 빠르고 박진감 넘칩니다. 《드라마 선덕여왕》을 보며 들었던 궁금증들을 이 한 권의 책이 충분히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천명공주는 장녀로서 부군(태자가 없을 경우 왕위 계승권 1순위자에 내리는 칭호로서 태자가 생기면 그 지위는 해소된다)의 위치에 오르지만 매우 유약하여 결단력이 없습니다.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제 1의 자질은 결단력입니다. 다른 모든 것을 참모가 해주더라도 오직 하나 이 결단만큼은 어느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결단은 오로지 최고 지도자의 몫입니다. 천명공주에겐 이것이 부족했습니다. 이 결단력에 대한 이야기가 이 책의 전반부에 등장합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화랑세기에서 차용한 것이겠지요. 천명부군은 용춘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용춘은 세속에 관심이 없고 여자 보기를 돌 같이 합니다. 그래서 접근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와 달리 용춘의 형인 용수는 세속적 권력에 관심이 많습니다. 어쨌든 용춘을 좋아하는 천명은 어느 날 모후에게 털어놓습니다. "어머니, 저는 용숙이 좋아요. 용숙공과 혼인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런데 용숙을 용수로 잘못 알아들은 마야부인과 진평왕은 천명의 남편으로 용수를 정하고 맙니다.

이런 불상사가 벌어지게 된 데에는 천명공주의 우유부단함이 작용했습니다. 천명이 차마 용춘이란 이름을 입에 담지 못하고 용숙(龍叔)이라 했던 것입니다. 그리 말하면 응당 자기 마음을 알고 있는 모후가 용춘을 부마로 삼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겠지요. 마음이 유약하고 온순한 사람의 특성이 바로 이겁니다. 남들이 자기 마음을 알아주리라 믿고 확실하고 단호한 어조로 말하길 기피하는 것이지요. 이런 마음은 사실 연약한 희망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말 실수로 용춘이 아닌 용수에게 시집가는 천명공주
사태가 어그러졌으면 문제를 일으킨 본인이 해결해야 함에도 천명은 스스로 해결하지 못합니다. 결국 덕만이 부왕 앞으로 나가 사태의 진실을 고하고 바로잡아 줄 것을 청합니다. 그러나 이미 결정된 왕실의 혼사는 번복할 수 없다는 대답만 듣게 되지요. 이때 진평왕의 옆에서 덕만공주를 바라보던 원광법사는 그녀의 자질이 왕재임을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진평왕에게 덕만의 스승이 되겠다고 자청하지요. 헤게모니가 천명에서 덕만으로 넘어가는 순간입니다. 

오늘 드라마를 보니 내일 천명이 죽게 될 모양이군요. 화랑세기의 기사나 소설 선덕여왕들이 다루는 것과는 다르게 천명공주는 지금껏 강인한 결단력으로 화랑들을 통솔하는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늘은 김서현까지도 발아래 꿇게 만들었지요.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저는 내일 천명공주가 왜 죽어야 하는지에 대해선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출쌍생 성골남진의 저주 때문에 두 명의 공주 중 한 명이 죽어야 한다는 것도 대답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둘 중 누가 하나 먼저 죽든 말든 어출쌍생은 일어난 것이며 성골남진의 저주도 완성된 것이기 때문이죠. 둘 중 하나가 죽더라도 성골남진의 저주가 풀리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죽어야 했을까요? 아니 죽여야만 했을까요? 그것은 제가 생각하기에 성골남진의 저주 때문이 아니라 차녀가 왕이 되어야 하는데 그 이유를 이 드라마에선 만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덕만이 천명을 제치고 왕이 되려면 천명이 무능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드라마에서 천명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천하의 김서현을 발아래 꿇리고 알천과 유신을 복종하게 하는 지도력을 발휘합니다. 부왕인 진평왕보다 더 뛰어난 지도력을 가졌습니다. 이런 천명공주가 살아있는데 덕만공주가 왕위에 오른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게다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다가 왔는지도 모르는 덕만공주가 왕위에 오른다면 이건 천지개벽이죠. 그러니 《MBC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천명공주가 죽지 않고서 선덕여왕이 탄생할 수 없는 딜레마가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 딜레마는 《드라마 선덕여왕》 제작진이 스스로 만든 것일 테지요. 아마 의도는 이런 것이었을 겁니다. 천명을 죽임으로써 자연스럽게 덕만의 왕위계승 문제를 해결하고 또한 덕만으로 하여금 미실과 건곤일척의 싸움을 피할 수 없게 만드는 두 가지 효과를 동시에 노린 것입니다. 이 역시 기발한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제 덕만의 가슴에는 자기 존재를 찾아야겠다는 집념과 더불어 불타는 증오와 분노가 얹어졌습니다.
 
천명공주의 죽음은 덕만을 왕위에 올리기 위한 드라마 제작진의 고육지책
바야흐로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겠군요. 그러나 손실도 만만치 않습니다. 천명공주의 결단성과 지도력에 감탄해 마지않던 시청자들의 실망이 바로 그것입니다. 천명의 예기치 않은 죽음은 그간 천명에게 성원을 보내던 수많은 시청들에게 허탈감을 안겨줄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 이 손실조차도 드라마 제작진의 의도일지도 모릅니다. 그 실망과 허탈감은 미실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고, 이 분노는 덕만과 유신에 대한 응원으로 승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이 연상되는 대목입니다. 어쨌든 천명공주의 죽음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제가 일전에 올린 글 중에 "쌍생의 저주를 풀기 위해선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둘 중 하나가 죽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새로운 예언을 만들어내는 것이다"라고 쓴 적이 있습니다. 저는 두 번째 경우의 수로 쌍생의 저주를 풀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결국 첫 번째 방법으로 가고 마는군요.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둘 중 하나가 죽는다고 저주가 풀리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저주를 푸는 방법은 단 하나 밖에 없습니다. 성골남진이면 성골여왕이 등극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라인들은 간단하게 이 문제를 해결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겐, 아니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썼던 시절의 우리들에게도 도저히 풀기 어려운 난제였을 성골남진을 신라인들은 너무나 쉽게 처리했습니다. "남자만 왕이 되어야 한다는 법이 있는가? 성골 남자가 없으면 여자가 왕이 되면 그만이다!" 이렇게 말입니다.     

그러나 아무튼 아쉬운 건 사실입니다. 천명공주를 죽이지 않고 보다 현명한 방법으로 문제를 풀었으면 하는 바람은 이제 접어야 할 것 같습니다. 어쩌면 천명이 죽어야 하는 운명인 것은 어출쌍생 성골남진의 저주 때문이 아니라 차녀가 장녀를 제치고 왕위에 올라야 하는데 장녀인 천명의 카리스마가 너무나 선명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어출쌍생의 저주는 천명의 죽음으로 새로운 사태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아, 벌써 내일 드라마가 기다려지는군요. 요즘 사는 낙도 없는데 선덕여왕 보는 재미로 삽니다. 이런 말세에 선덕여왕이라도 없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
요사이  MBC드라마 《선덕여왕》으로 인해 신라의 풍속에 대한 관심이 무척 높다. 특히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화랑들의 이야기로 세상이 뜨거운 것 같다. 화랑세기는 그 위작 논란에도 불구하고 신라사회를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한 장치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화랑도에 대한 언급이 있긴 하지만, 이처럼 생생한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특히 미실이란 여인은 화랑세기가 아니고서는 만나볼 수가 없다. 화랑세기는 사실상 미실의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래 김대문이 화랑세기를 저술할 때는, 그가 서문이나 후기에서 밝힌 것처럼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들의 세계(世系)를 밝히고자 함이었다. 그들의 계보를 통해 우리는 화랑의 실체를 접할 수 있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김대문의 집안은 세습 화랑의 집안이었다. 이 가문은 540년 화랑도가 시작한 이래 681년 폐지될 때까지 1세 풍월주 위화랑부터 시작해서 4세 이화랑, 12세 보리공, 20세 예원공, 28세 오기공 등 모두 5대에 걸쳐 풍월주를 세습했다. 나머지 풍월주들도 대부분 부자가 세습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김대문의 가문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32대에 걸친 풍월주들의 전기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바로 미실이다. 그녀는 5세 풍월주 사다함부터 시작해서 16세 풍월주 보종공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풍월주들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었다. 도대체 그녀는 어떤 신분의 인물이었기에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래서 나는 「선덕여왕, 근친혼의 이유는 무엇일까?」
(http://go.idomin.com/268) 라는 글을 통해 미실은 분명 김씨족임이 자명하다고 호언한 바 있다. 신라는 골품제를 근간으로 하는 나라다. 그런 나라에서 골품도 없는 여인이 화랑들을 발 아래 두고 국왕까지도 좌지우지한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랑세기에서도 미실의 세계에 대하여 자세한 언급은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화랑세기의 목적이 풍월주들의 세계와 세보를 기록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한편 미실에 대한 궁금증을 더욱 유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여러 독자가 댓글을 통해 내 글에 반론을 제기했다. 미실은 김씨족이 아니라 박씨라는 것이다.(인터넷을 검색해보았더니 또한 모든 네티즌들, 뿐아니라 위키백과에서도 미실을 박미실이라고 표기하고 있었다) 

사실 처음에 나의 관심사는 미실이 김씨족인가 박씨족인가 하는 것은 아니었다. 신라라는 신분제 사회의 특성상 진골귀족 신분이 아니고서 화백회의나 중앙정치를 주무를 수 없다는 주장을 강조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였을 뿐이다. 그러나 만약 드라마에서처럼 실제 미실의 역할이 그러했다면 그녀는 틀림없이 김씨족일 거라는 게 나의 생각이었다. 

골품제도는 법흥왕 7년(520년) 율령이 반포되면서 정립된 제도라고 말한다. 물론 그 이전에도 골품제는 이미 사회적 관습으로 정착되어 있었을 것이다. 법흥왕에 의해 골품을 받은 귀족들은 원래 왕족이었던 박씨족 일부와 김씨족, 그리고 가야의 왕족, 보덕국왕 안승의 후예들 정도였다고 한다. 그 범위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아직 정확히 알 길은 없다.  

박씨족 일부도 진골의 골품을 받았지만, 그들이 신라가 융성했던 중고시대나 중대에 중앙 정계에서 활발하게 활약했다는 증거를 찾기는 어렵다. 게다가 내물왕 이후 김씨족들이 왕권을 확실히 장악한 이후에 박씨족들은 6부 중 하나인 모량부에 이주해 살면서 가끔 왕비를 배출한 것 외에는 이렇다 할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 고로 화랑세기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미실이나 미생의 역할로 보아 틀림없이 이들의 조상은 김씨족일 거라는 생각은 지금도 확고하다. 그럼에도 여러 독자들이 미실은 박씨라는 주장을 하며 정정을 요구하였고, 심지어는 내물왕의 4대손이며 세종의 아비요 하종의 조부인 이사부조차도 박씨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어 부득이 다시 자료를 확인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사부나 거칠부가 김씨족인 것은 이미 사기에서 밝히고 있는 터라 더 이상 설명은 무의미할 듯하다. 그러므로 당연히 미실의 남편이며 아들인 세종과 하종도 김씨족인 것은 당연하다. 다만 미실에 대해서만 보다 더 확실한 조사가 필요할 것이지만, 아시다시피 그녀에 대한 기록은 화랑세기를 빼고는 전해지는 것이 없다.

그러나 미실의 부모에 대하여 화랑세기에 언급이 있으므로 그녀의 부계와 모계를 확인해 보면 그녀의 출신성분을 알아내는데 큰 어려움은 없을 듯싶었다. 미실의 아비는 2세 풍월주 미진부이며 어미는 묘도궁주이다. 미진부의 아비는 아시공이며, 아시공의 아비는  선모이고, 선모의 아비는 장이이고, 장이의 아비는 복호공이다. 복호공은 내물왕의 아들이다. 

미실의 부계를 살펴보건대, 미실은 내물왕의 후손인 것이다. 내물왕은 신라의 김씨 왕조를 확립한 인물이다. 내물왕 이전에 미추가 김씨족으로서 최초로 왕위에 오르긴 했지만, 김씨족의 전제 왕권을 확립한 것은 내물왕이다. 그러므로 김씨 왕조의 사실상 시조는 내물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내물왕 이후 왕비들은 대부분 김씨족으로 채워졌는데, 이는 김씨족의 배타적 왕권을 확립하려는 결과였다. 이와 같은 근친혼으로 왕권의 지위는 더욱 초월적인 것으로 공고해졌다. 세기에 의하면, 아시공은 법흥왕이 미실의 조모인 옥진과의 사이에서 난 비대공을 후계자로 세우려 하자 이에 반대해 지소태후와 더불어 진흥왕을 옹립하는데 역할을 한 인물이다. 

어쩌면 미실의 권력은 이로부터 기인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녀가 비록 세습적으로 색공을 하는 여인이었으며 미색이 출중하고 교태가 남다르다 해도 출신이 미천하고서는 권력에 다가서기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조부인 아시공은 당대의 실력자였으며, 아비는 진흥왕의 총애로 2세 풍월주를 거쳐 최고 관등인 대각간에까지 올랐다.    

그렇다면 미실의 모계는 어떨까? 미실의 어미는 묘도궁주이다. 묘도궁주는 영실공과 옥진궁주의 딸인데, 영실공은 수지공과 법흥의 누이 보현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성골이다. 또 미실의 조모인 옥진궁주는 누구인가. 그녀는 1세 풍월주 위화랑의 딸이다. 위화랑은 진골로서 이찬에 오른 인물이다. 위화랑 역시 옥진의 소생인 비대공을 반대해 진흥왕을 옹립했다.

이렇게 미실의 부계와 모계를 살펴보니 양쪽 모두 진골귀족 출신이다. 진골일 뿐 아니라 왕권에 가장 근접한 권력의 핵심들이었다. 미실의 권력의 출발점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미실의 힘이 어느날 갑자기, 또는 드라마에서처럼 사다함의 매화로,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닌 것이다.
 
자, 그런데 아직 풀리지 않은 독자들의 궁금증이 하나 더 남아 있을 것이다. 바로 설원랑이다. 나는 앞서「선덕여왕, 근친혼의 이유는 무엇일까?」에서 미실 뿐 아니라 설원까지도 김씨족일 거라고 단정을 하는 오류를 범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 의도한 오류였다. 설원랑은 세기에 등장하는 거의 유일한 진골귀족이 아닌 풍월주다.

화랑의 대부분이 진골귀족으로 채워졌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진골귀족이라 하더라도 아무나 화랑에 뽑힐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선 권문세가의 자제여야 하고 인물이 출중하고 덕이 충만해야 한다. 그래야 선발의 기본조건을 갖추는 것이다. 그런데 설원은 어떠한가. 그는 진골귀족도 권문세가의 자제도 아니다.

더구나 그의 아비인 설생은 아비의 이름도 성도 모르는 미천한 출신이다. 다만 설생의 어미가 습비부촌의 설씨 가문의 자손이므로 어미의 성을 따라 설씨가 되었다고 한다. 설생은 용모가 출중했는데,그가 모시던 구리지가 전장으로 나간 틈에 구리지의 여인 금진낭주와 관계를 가져 설원을 낳았다고 한다.

금진낭주는 사다함의 어미이기도 하니 설원은 사다함과는 동모이부의 형제인 셈이다. 사다함은 구리지의 아들이며 내물왕의 7세손으로 진골귀족이다. 금진낭주 또한 위화랑의 딸로서 진골귀족이니 설원은 비록 아비가 출신을 모르는 미천한 사람이었다고는 하나 모계로 보면 역시 귀한 자손이며 미실에겐 외숙뻘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부계계승사회인 신라에서 설원랑은 진골은 고사하고 두품조차 받지 못했다. 그런 그가 화랑이 되고 풍월주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은 미실의 권력을 웅변해주는 대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드라마상에서처럼 설원이 지배집단의 화백회의에 참여하고 병부령의 지위에 올라 군권을 장악하는 것은 난센스라는 것이다.

그런 일은 미실의 권력이 아무리 태산처럼 높다 하더라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신라의 골품제를 뒤흔드는 일로서 체제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미실이라도 그런 일은 할 수 없는 것이다. 화랑은 골품제의 규정을 비교적 덜 받는 자치조직이었으므로 설원랑이 풍월주에 오르는 이변을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앙관직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기대할 수는 없다. 그랬다면 6두품으로 뛰어난 문재를 자랑했던 설총이나 최치원이 비운의 삶을 살지도 않았을 것이다. 골품제가 초기에는 왕권을 강화하고 세력을 확장하는 주요한 도구로 기능했을지는 모르지만, 나라의 규모가 커지고 복잡해지면서 결국 신라를 패망으로 인도하는 결정적 요인 중의 하나로 작용했다.

그래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라!"는 금언이 있는 것이 아닐까.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

이요원을 처음 본 것은 <주유소 습격사건>에서였다. 그때 이요원은 매우 어리고 철없어 보였다. 당돌해보이기도 했던 그런 모습은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 다음 본 것은 TV드라마였는데, <패션 70s>에서 그녀는 ‘더미’라는 이름의 남도의 섬마을에서 상경한 소녀였다. 청순함과 터프함이 믹스된 그런 캐릭터였다.


아마도 이런 캐릭터는 시골처녀의 전형일지도 모른다. 한없이 가냘프고 부드러워 보이지만, 그 속에 끈질긴 생명력을 감추고 있는 것이 땅을 딛고 살아온 시골처녀의 표상이 아닐까. 그래서 도시의 여자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대지와 같은 포용력을 그녀들은 갖고 있는 것이다. <패션 70s>에서 더미가 그랬다.

그리고 재작년이었던가?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그녀는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가냘프고 강인하다. 평범한 간호사로 사춘기 같은 사랑과 소소한 삶의 아름다움에 빠져있던 신애가 광주에 진주한 중무장 군대에 맞선 결말을 알 수 없는 사투 속에서 비장하게 보여주던 강인함….
 

영화 '화려한 휴가'의 한 장면. 사진=다음영화


선덕여왕도 그런 이미지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 같다. 덕만공주는 궁궐이 아닌 사막에서 각지에서 몰려든 무역상들 속에 자란다. 그녀는 그들의 식사를 준비하고 잠자리를 보살펴주면서 자연스럽게 인간에 대한 사랑을 배웠을 것이다. 숱한 여행자들의 고향 이야기와 경험담을 들으며 포부를 키웠을 것이다.


만약 덕만이 서라벌에서 금지옥엽으로 귀하게 자랐다면 서민들의 애환도 몰랐을 것이고, 그들과 한마음이 될 수도 없었을 것이고, 더욱이 대지와 같은 포용력은 더더욱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사람들 속에서, 서민들 속에서 자랐으므로 그들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았다. 아니 그들의 마음이 그녀의 마음이었다.


그 마음은 어린 김유신이 천명공주에게 말했던 바로 ‘진심’이다. “진심을 다하면 내가 변하고, 내가 변하면 사람들이 변하며, 그러면 결국 세상이 변한다!” 그 진심을 가장 잘 표현해낼 수 있는 것이 가냘프면서도 강인한 캐릭터다. 여기에 이요원이 가장 어울림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패션 70s>에서 고준희 역을 맡았던 김민정이라면 이 역이 어울렸을까?


그녀에겐 미안하지만, 화려한 캐릭터의 그녀는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천명공주 역의 박예진도 마찬가지다. 도회적 이미지의 김민정이나 박예진에게 풋풋한 시골냄새가 풍기는 덕만의 역할을 맡기기엔 분명 무리가 있다. 이요원이야말로 말똥냄새 풍기는 백성들의 고충을 가장 잘 알고 대변해줄 선덕여왕으로서 적격이 아닌가.


10회에서 보여준 이요원의 덕만은 뭇사람들의 그런 기대에 충분히 부응한 듯하다. 아역배우 남지현이 이요원에게 많은 부담을 준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요원을 걱정했지만, 10회에서 보여준 활약은 충분히 그런 불안을 불식시켜주었다. 남지현에서 이요원으로 넘어온 덕만은 어느 곳에서도 이질감을 찾기가 어려웠다.


내가 보기엔, 역시 남지현에 비해 이요원이 베테랑이므로 청순함과 터프함이 믹스된 카리스마를 서서히 구축하며 시청자들을 즐겁게 해주는데 부족함이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선덕여왕이 살았던 시대는 신라에겐 힘든 때였다. 북쪽에서는 연개소문이, 서쪽에서는 백제 무왕이 강성해진 세력으로 압박하던 위기의 시대였다.


진흥왕이 쌓아놓은 위업은 역으로 풍전등화의 위험에 신라를 노출시켰다. 시대를 극복할 사명이 주어진 선덕여왕에게 뛰어난 지혜와 담력도 필요했겠지만 무엇보다 백성들과 일체감을 형성하지 않고서는 나라를 위난으로부터 구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작가는 그러한 점을 고려해 덕만을 사막과 백성들 속에 고군분투하도록 한 것은 아니었을까?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가. 덕만처럼 백성들 속에서 백성들과 함께 고락을 같이하며 백성들의 마음을 다독여줄 가냘프면서도 강인한 카리스마를 간직한 지도자를 우리는 가져본 적이 있었던가? 덕만처럼 다른 이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 줄을 놓고 낭떠러지로 떨어질 용기를 가진 지도자를 우리는 본 일이 있는가? 그리고 미래에는 그런 지도자를 가질 수 있을까?  


물론 이제 시대가 바뀌어 지도자는 하늘이 내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스스로 만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덕여왕이 될 덕만의 캐릭터를 보면서 못내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불만 때문이리라. 오늘 10회에서 미실과 설원공이 반대파의 싹을 미리 자를 심산으로 김서현과 김유신을 사지로 몰았다고 자축하고 있지만…


그것이 미래의 선덕여왕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일이었을 줄이야. 그래서 역사는 아이러니다. 다음 주가 기대된다.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
MBC드라마 선덕여왕이 벌써 8회가 끝났다. 어느새 한 달이 훌쩍하고 지나갔다. 드라마 속에선 20번이 넘게 춘추가 바뀌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시작은 이제부터다. 진흥왕 사후 20년간 그 누구도, 황제조차도 감히 대적할 수 없었던 신라의 실질적인 주인 미실, 그녀가 최초의 패배를 당한다. 바로 덕만에게…. 덕만이 드디어 서라벌에 등장한 것이다.


덕만공주는 천명공주를 움직였다.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천명공주는 덕만을 만나면서 변화하기 시작한다. 어린 유신랑의 말처럼 ‘진심을 다하면 자기가 변할 수 있고, 자기가 변하면 세상이 변할 수 있다’는 것에 믿음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바야흐로 북두의 여덟 번째 별 개양성이 감추어진 자신의 비밀에 다가가고 있다.


첫 회에서 진흥왕이 미실에게 말했다. “미실아, 너는 내가 어떻게 이 넓은 세상을 얻었다고 생각하느냐? 내가 뛰어나서 그렇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사람이다. 나는 사람을 얻었기 때문에 세상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후일 진흥왕의 주검 앞에서 또한 미실이 말했다. “폐하, 사람이라고요? 보십시오. 모두 내 사람들입니다.”


이 드라마의 키워드는 사람이다. 치열한 권력투쟁의 승패도 결국은 누가 사람을 얻느냐에 달린 것이다. 물론 사람을 얻기 위해선 사람을 잘 알아보는 혜안도 중요하겠지만, 그러나 무엇보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보이지 않는 ‘무엇’이 있어야 한다. 그 ‘무엇’이란 바로 ‘진심’에서 나온다고 어린 유신랑이 설파한다. 


그런데 그 진심을 덕만은 실천으로 몸소 보여준다. 낭떠러지에 매달린 자기를 끌어당기기 위해 줄을 잡고 버둥거리는 천명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줄을 놓아버린다. 그런 덕만을 따라 천명도 낭떠러지로 몸을 날리고 결국 덕만을 구한다. 진심이 천명을 움직였으며 또한 덕만도 살린 것이다. 그럼 덕만의 그 진심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처음부터 보신 분들은 사막에서 모래 유사에 빠진 덕만의 어머니(사실은 궁궐시녀 소화)가 덕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끌어당기던 줄을 끊어버리고 모래 속으로 사라진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렇다. 덕만의 진심은 소화에게 배운 것이다. 15년간 덕만은 사막에서 아라비아와 로마의 상인들을 만나 선진문물을 배우고 어머니에게선 진심을 배웠다.


그런 덕만이 드디어 서라벌에 나타났다. 무언가 불길한 예감에 가늘게 몸을 떠는 미실에게 예기치 못한 첫 번째 패배도 안겨주었다. 게다가 승리의 대가로 사람까지 얻었다. 그 사람이 다름 아닌 당대의 영웅 김서현 공이며 북두칠성의 꿈으로 태어난 김유신이다. 김유신과 김춘추, 덕만공주와 천명공주….


덕만이 나타남으로서 이렇게 미실에 대항할 진용이 갖추어진 것이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자, 그런데 이쯤에서 궁금한 점 두 가지만 짚고 넘어가자. 첫째, 어째서 사람들은 모두 미실을 두려워하는데 덕만공주만이 미실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일까? 황제까지도 두려워 그녀에게 반대를 하지 못하는데 말이다.   


물론 답은 너무 쉽다. 덕만은 미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계림 사람들이 미실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녀가 신라의 병권을 장악하고 있으며 자기에게 방해가 되는 자는 가차 없이 죽인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덕만은 그것을 모른다. 덕만에게 미실은 그저 나이 든 여자일 뿐이다. 덕만은 사막에서 자란 철부지 하룻강아지였던 것이다.


그럼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왜 사람들은 미실에게 대적을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미실이 두려워 이미 마음속에서부터 싸울 의지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만약 덕만도 천명처럼 궁궐에서 공주로 자랐더라면 아마 다름없이 미실을 두려워하며 해보지도 않고 미리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막에서 자란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걸 알리가 없다.


다음 문제는, 그렇다면 덕만공주 혼자의 힘으로 미실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대든다고 호랑이를 잡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덕만에겐 쌍둥이 언니 천명공주가 있다. 그녀는 궁궐에서 자라 권력의 생리를 잘 안다. 미실이란 적의 장단점도 잘 알고 있다. 무엇보다 사람들을 알고 구별할 줄 안다.


두 번째 답도 사실은 이미 8회에서 나왔다. 김서현 공과 김유신을 알아보고 그들을 서라벌에 입성하도록 안배하는 천명공주 역시 북두의 여덟 번째 별이다. 작가의 의도가 어떤 건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아마 물어보더라도 안 가르쳐줄 것이다―, ‘어출쌍생 성골남진’의 저주는 나라를 들어먹으려는 미실로부터 황실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본다면 어출쌍생이야말로 신라를 보호하기 위한 하늘의 기막힌 안배다. 진흥왕은 죽기 전에 이미 그 안배를 보았다. 그래서 그는 받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미실에게 유지를 남겼던 것일까? 물론 그도 인간이므로 설원랑이 미실의 정부요 심복이란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그에게 비밀을 말하는 실수를 범했지만….


하룻강아지처럼 대범한 그러면서도 영리한 덕만공주와 범이 무서워 오들오들 떨면서도 냉정하고 신중하게 처신하는 여우같은 천명공주, 이 두 사람의 환상적인 콤비야말로 미실을 격파할 절대적인 무기다. 아마 내가 작가가 아니라서 장담은 못하겠지만, 북두의 여덟 번째 별은 미실을 물리치고 난 다음 다시 하나로 합쳐질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금 빛나는 북두칠성으로 서라벌의 밤하늘에 찬란하게 빛나지 않을까, 이건 그저 내 상상이지만… 꼭 그렇게 될 걸로 생각한다.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