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인학살'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09.10.18 49년만의 민간인학살위령제, 마산시장은 왜 안 오나 by 파비 정부권 (14)
  2. 2009.06.21 민간인학살, 나찌의 유태인학살보다 더 나빠 by 파비 정부권 (31)
  3. 2009.01.31 전라도 좌파가 된 소감 by 파비 정부권 (7)
  4. 2008.11.10 빨갱이에 얽힌 추억 by 파비 정부권 (3)
10월 16일(금), 마산공설운동장 올림픽체육관 강당에서는 제59주기 민간인학살희생자 위령제가 열렸습니다. 저는 이 위령제가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열린 합동위령제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잘못 알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이 두 번째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다시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이렇게 씌어 있었습니다. 

<제59주기 2차 마산지역 민간인학살희생자 합동위령제>

위령제는 유교 방식으로 제를 지낸 다음 불교, 천주교, 원불교 등이 각각 위령예식을 올렸다. 개신교는 안 왔다.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수많은 민간인들이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학살된 사건은 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일입니다. 이승만 독재정권처럼 제 나라 국민, 제 민족을 재판도 없이 무참하게 학살한 천인공노할 만행은 사실상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들은 왜 죄 없는 민간인들을 아무런 재판절차도 없이 학살했던 것일까요? 

이승만 정권의 민간인 학살과 유사한 나찌가 저지른 유태인 학살이 있습니다. 히틀러도 선거에 의해 독일인들의 선택을 받은 정치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계대전을 일으켰고, 국민들을 동원하기 위해 희생양이 필요했습니다. 그 희생양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유태인이었습니다. 아우슈비츠, 홀로코스트, 얼마나 소름끼치는 말입니까?

묵념하고 있는 허정도 전 경남도민일보 사장 등 참석자들


그 홀로코스트가 대한민국 땅에서도 벌어졌다는 상상을 한번 해보십시오. 그것도 남이 아닌 동족의 손에, 이웃의 손에 말입니다. 지금으로부터 59년 전, 바로 이곳 마산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수천 명의 우리의 이웃들이 영문도 모른 채 손과 발이 묶여 마산 앞바다에 수장되었습니다. 깽이바다라고 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무심하지 않았습니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고 이승만 정권이 국민들의 손에 쫓겨났습니다.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고, 세상도 바뀌었습니다. 숨죽이고 있던 유족들도 늦게나마 억울하게 죽어간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누이들의 명복을 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제1차 마산지역 민간인학살희생자 합동위령제>가 열렸던 것입니다. 

위령제가 진행되는 동안 내내 오열하고 있는 유족


그러나 기쁨도 잠시 박정희의 쿠데타가 일어났고 유족들은 다시 숨을 죽여야만 했습니다. 유족회를 주도했던 노현섭 전국유족회장(마산)은 감옥에 끌려갔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유족으로서 억울하게 희생된 가족의 명복을 빌었다는 것이 죄였습니다. 그때는 법도 상식도 필요 없는 시대였습니다. 노 회장을 비롯한 많은 유족들에게 최고 10년씩 징역형이 선고됐습니다.

그 이후로 유족들은 오랜 세월을 눈물 속에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은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민주화의 여파로 김대중 정부가 들어섰고, 이어 노무현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들 앞에 나와 겸허하게 정부를 대표해 사과를 드린다며 고개를 숙였습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곧 과거사위원회도 해산해야할 운명에 처했습니다. 아직 일을 다 하지도 못했는데 말입니다. 이제 겨우 물꼬를 트기 시작한 일이 커다란 난관에 봉착한 것입니다. 다름 아니라 다시 정권이 바뀐 것입니다. 이명박 정부가 과거 이승만 정권이나 박정희 정권의 후예들이란 사실 때문이었을까요? 그들은 이제 그만 과거사위원회 따위는 접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명박 정부가 외면하고 싶어도 이미 전직 대통령이 공식 사과한 일에 대하여 왈가왈부하기는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국방부장관이 직접 군이 저지른 과거의 학살행위에 대해 인정하고 사과의 뜻에서 이번 합동위령제에 조화를 보내왔습니다. 그리고 39사단 강재곤 중령을 대리로 보내 추모사도 하게 했습니다.

물론 이명박 대통령의 각료인 국방부장관의 한계는 분명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사과하고 고개까지 숙인 일에 대해 그저 유감이란 애매모호한 말로 사과를 대신했습니다. 유감? 대체 뭐가 유감이란 것이죠? 어쨌든 민간인학살 행위가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유감을 표명한 데 대해 더 이상 토를 달고 싶지는 않습니다.

국방부장관이 보내 온 추모조화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기분 나빴던 것은 바로 황철곤 마산시장의 행위였습니다. 그는 이날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부시장을 대리로 보내고 추모사를 대독하게 하긴 했지만, 다른 일도 아니고 억울하게 죽어간 수천 명의 마산시민들의 유족들이 위령제를 지내는 곳에 그가 직접 오지 않고 부시장을 보낸다는 게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혹시 그는 자기가 마산시장이 아니라 전주시장이나 안산시장으로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게다가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그는 조화도 보내지 않았습니다. 국방부장관과 진실화해과거사위원회, 마산수협장의 조화는 있었지만, 마산시장의 조화는 없었습니다.

혹시, 이분 정말로 자기가 마산시장이란 사실을 잠깐 까먹은 것이 아닐까요? 아니면 까먹고 싶었거나…. 오늘 10·18 부마항쟁 기념 마라톤대회에 갔더니 제일 먼저 황철곤 마산시장이 축사를 하더군요.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독재에 항거했던 부마항쟁) 그날의 함성을 되새기며 힘차게 뛰어주시기 바랍니다."

희망연대 김영만 상임의장은 추모사에 앞서 위령제에 불참한 마산시장을 성토부터 했다.


저는 그저 웃음이 나올 뿐이었습니다. 어쩌면 저토록 뻔뻔할 수가 있을까? 그래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일까? 돈도 많이 벌고…. 하긴, 옛날 어릴 때 어른들에게 그렇게 배웠던 것 같습니다. "세상은 요령이란다. 요령이 없으면 거지처럼 늘 남 밑에서 살게 되는 거야. 그러니 아무래도 요령이 최고지."

그러나 역시 제게는 요령부득입니다. 그런데 마산시장은 그렇다 치고, 진보단체들, 민노당이나 진보신당, 민노총, 진보연합 등 수시로 각종 행사에 이름을 내미는 진보단체들이 민간인 학살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의외였습니다. 그들도 혹시나 마산시장처럼 민간인 학살 문제가 계륵이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59주기를 맞은 민간인학살희생자 유족 여러분의 말할 수 없는 슬픔에 대해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나 결국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라는 말 외엔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이상 아무런 도움도 돼 드리지 못하는 점에 대해서도 매우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Posted by 파비 정부권
6월 20일 오후 1시, 경남도민일보 3층 강당에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마산유족회> 창립총회가 열렸습니다. 저도 그 행사에 참석했습니다. 저는 유족은 아닙니다. 우리 가족 뿐 아니라 친족 누구도 학살에 희생된 사람은 없습니다. 참 다행한 일입니다. 창립총회 토의발언을 하시면서도 눈물을 적시는 어르신들을 보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치수 회장의 취임사는 민간인학살에 대한 정부태도 성토와 유족들의 결의촉구가 돼버렸다. 오른쪽은 김주완 부장.


우리 아버지는 한국전쟁 참전용사이십니다. 전쟁이 나던 해 열여덟 살이셨던 아버지는 부산의 어떤 거리에서 술을 마시다 잡혀갔다고 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군사 훈련장이었는데, 그곳에서 특수훈련을 받고 전쟁에 투입됐다고 했습니다. 공도 많이 세우셨다고 했습니다. 은성무공훈장을 세 개나 받기도 하셨습니다.


제가 어릴 때 그 훈장들을 마당에서 석유를 부어놓고 불을 지르셨습니다만, 최근에 다시 받아다 집 거실에 걸어두고 계십니다. 다리에 총상이 선명하도록 처절하게 싸우셨건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한창 공부할 젊은 나이에 배우지도 못했습니다. 일본에서 태어나 교또중학교를 졸업하고 해방을 맞아 귀국했을 때 조종사가 되는 게 꿈이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모든 걸 앗아갔습니다. 전쟁이 끝나고도 10년 가까이 군에 남아있다 제대했지만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도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석회석광산, 탄광 등지에서 발파감독으로 오래 일하셨지요. 제 어릴 적 아버지의 기억은 살기어린 눈빛과 술과 그리고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훈장을 태우던 힘없는 모습이 대부분입니다.


저는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전쟁의 상처가 어떤 것인지를 몸소 느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식들을 앉혀놓고 자기 무용담을 늘어놓는 모습이 어느 날부터인가 푸념처럼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숱하게 사람을 죽이면서 얻어낸 “이거 하나면 사람 목숨 세 개와 바꾼다”던 훈장은 삶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훈장으로 얻은 것은 피폐한 생활과 살기등등한 성격, 평생을 가도 가슴속에 쌓여있는 분노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버지가 매우 불쌍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의 피해자로서 말입니다. 그리고 더불어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저도 매우 불쌍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매우 행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전투와 상관없이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것도 적군이 아니라 아군이나 경찰에 의해서 말입니다. 그들은 모두 민간인이었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가서 집단총살 당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배에 태워져 마산 앞바다에서 수장됐습니다.


그중 아홉 구의 시신이 마산 구산면에 떠내려 온 것을 마을사람들이 거두어 묻어주었다고 합니다. 곧 그곳에서 유골 발굴 작업이 벌어질 거라고 합니다.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쌀을 준다는 꼬임에 넘어가 죽음을 당한 분들도 많다고 합니다. 보도연맹 가입자를 늘려 실적을 쌓으려는 천인공노할 만행의 희생자들입니다.


4․19혁명으로 세상이 바뀌자 마산에서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유족회가 발족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등장한 박정희 쿠데타정권은 유족회를 강제해산시켰습니다. 이때 노현섭씨 등 지도부는 구속되어 15년을 감옥에서 썩어야했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48년 만에 유족회가 다시 창립하게 된 것입니다.

학살자 가족들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한이 맺힌다. @경남도민일보 김주완 기자


이미 6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사건을 정확하게 밝혀내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유골을 발굴하는 것조차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1960년에 했어도 어려운 일을 2009년에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일지 짐작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다 정부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도 없애겠다고 합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지난 2월 진실규명 결정문을 통해 '1950년 7월 5일부터 9월까지 네 차례에 걸쳐 국군과 경찰, 형무관들에 의해 마산형무소 재소자와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 등 최소한 717명이 인근 산골짜기에서 총살되거나 구산면 원전 앞바다에서 집단수장됐으며, 그들 중 358명의 구체적인 신원을 확인했다'(김주완 기자)고 밝혔다고 합니다.


창립총회에서 마산유족회 회장으로 선출된 노치수 회장에 의하면 과거사위원회가 밝힌 숫자는 극히 일부이며 자신들이 확인한 숫자만 해도 1676명이고 신고를 하지 않고 있는 수백 명을 포함하면 최소한 2000명이 넘게 학살당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럼에도 이 정도라도 밝혀낸 것은 과거사위원회의 공적입니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은 그런 과거사위원회가 불편한 모양입니다.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원혼을 달래고 유족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서는 과거에 국가가 저지른 범죄행위를 반드시 밝혀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을 교훈으로 삼아야합니다. 그런데 현 정부는 그게 싫은 것입니다.


‘그게 싫다는 것’은 똑같은 일을 되풀이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한 유족은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니면 누구도 우리 한을 풀어주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 절대로 물러나서는 안 됩니다. 제 나이가 육십 넷입니다. 여기 저보다 나이 더 많으신 분들도 많고요. 우리 죽고 나면 아무도 없습니다.”


그랬습니다. 거기 모인 분들은 모두 머리가 허연 할아버지, 할머니들이었습니다. 안경을 벗고 눈물을 훔치는 어르신을 보니 저도 눈물이 나왔습니다. 유족도 아닌 제가 눈물을 흘리는 것이 부끄러워 먼 산을 쳐다보았지만, 가슴속에 흘러내리는 눈물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분들을 보면서 홀로코스트가 생각났습니다.

산청군 시천면 민간인학살 현장. 발굴팀장 경남대 이상길 교수는 마산유족회 자문위원이다. @김주완

잠시 후에 죽게 될 줄도 모르고 줄을 서서 목욕탕으로 들어가는 유태인들, 그 유태인들을 학살한 히틀러의 나찌정권과 우리나라가 무엇이 다릅니까? 그래도 나찌정권은 제 민족을 학살하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자기 동포를, 바로 얼마 전까지도 한 동네에서 함께 살아가던 이웃을 집단으로 학살한 것입니다.


이게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내내 분노와 슬픔으로 뒤범벅이 된 노인들의 붉어진 얼굴이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곧 마산시 구산면 바닷가에서 유골 발굴 작업이 이루어질 거라고 합니다. 10월 26일에는 위령제도 연다고 합니다. 저는 민간인학살 유족회원은 아니지만 그때도 꼭 참석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미력한 힘이나마 그분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고자 합니다. 왜 정부는 제 나라 국민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재판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국가범죄행위에 대하여 배상은 고사하고 한마디 사과도 안하는 것인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혹시나 그런 학살행위에 대해 찬동하고 있는 것일까요? 자기나 자기 가족이 그런 처지에 놓인다면 무어라고 할지 그게 궁금합니다.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
  • 들러본후 2009/01/23 19: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간낭비했구만... 전라도 좌파들... 하여튼...
    뭐? 북한이 틈만 나면 한국을 도와주려했는데, 이명박이 한테 낚여?
    정말로 세월 좋아졌구마...
    이런넘들 아주 싸그리 잡아서 삼청교육대가서 6.25때 어땠는지부터
    지대로 교육시켜야 정신차리지....
    이러니까 전라도 제외한 국민의 80%가 전두환때가 그립다고 하지들..ㅉㅉ
    정신좀 차려라 너네들끼리 서로 댓글달고 좋아하지들 말고....
    그런 귀족노조들 보호할 시간있으면 소년소녀가장좀 돌보시기를.......

    • 들러본후 2009/01/23 19: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물론, 좌파들 특징이 이런 본론만 얘기한 글들은
      무조건 삭제시켜버리지....
      삭제시키기전에, 고향이 어딘지부터 밝혀보시지들 그랴
      전라도 20%가 동조하고 옹호한다고
      국민의 80%가 찬성한다는 착각은 노무현때부터
      시작되더구만.... KBS/MBC때부터..... 



  • 위 글은 제 블로그에 달린 댓글입니다. 본문 제목은 <정몽준의 현대가 보여준 무자비한 보복테러>였습니다.

    어이없는 독해 수준 


    “뭐? 북한이 틈만 나면 한국을 도와주려했는데, 이명박이에게 낚여?…” 이렇게 말한 이유는 아마도 제가 글을 시작하면서 북한군 총참모장 대변인이 TV에 나와 “한계가 없는 무자비한 타격력을 보여 주겠다”고 엄포를 놓은데 대해 그 한계가 없는 무자비한 타격력은 방금 전 현대중공업에서 보고 왔노라고 쓴 데서 비롯되었을 겁니다. 

    사실 북한은 어수선한 내부를 단속할 목적으로 가끔 이렇게 남북관계를 긴장시키는 전술을 사용합니다. 며칠 전에는 아예 전쟁을 선포하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그것도 긴장을 고조시켜 내부를 단속하는 게 목적이라고 생각됩니다만. 어떤 분은 그러더군요. 자꾸 멱살 잡고 싸우고 그래야 옆에서 싸우지 말라고 말리면서 소주나 한 잔 하자고 할 거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북한의 이런 행동이야 정권안보 차원에서 저지를 수 있는 짓이라고 이해가 아주 안 가는 건 아닙니다. 남한에서도 과거 수시로 이런 캠페인을 했습니다. 독재정권이 국민의 눈과 귀를 막기 위해 저지르는 전형적인 수법이 바로 이거지요. 그래도 이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런 비유를 든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은 북한의 이런 행동들이 남한의 독재자들에겐 아주 유용한 일용할 양식과도 같은 것이 되곤 하는 것입니다. 기억이 희미하지만, 심지어 97년 대선 때는 당시 정권이 북한과 연계하여 판문점에서 총을 쏘아주기로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소위 총풍사건이었죠. 김대중 씨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통합책이었는지 어쨌는지 이 사건은 유야무야됐습니다.

    무식한 게 죄는 아니다, 그러나…

    그게 사실이라면 참 웃기는 일이죠. 적과의 동침도 아니고 무슨 이런 로맨스가 다 있느냐 이런 말입니다.

    게다가 버스 안 뉴스를 통해 북한 군부가 협박하는 무자비하고 한계가 없는 타격력이란 것을 아이러니하게도 불과 10분 전 현대중공업 경비대들로부터 보았던 것입니다. 정말이지 무자비하고 한계를 상실한 테러였습니다. 과거 현대는 식칼테러사건이란 걸 벌인 전력도 있습니다. 삼성비리를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의 변호사였던 이덕우(현 진보신당 공동대표)씨는 “삼성은 교활하고 현대는 무식하다”고 했지만, 그날 보았던 현대는 무식을 넘어선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벌이는 팔레스타인 학살전쟁을 무식하다는 정도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논조의 주장에 대해 “뭐? 틈만 나면 북한이 남한을 도와주려했다고?”라고 반응하는 것까지는 이해를 해줄 수 있겠습니다.(혹 익명의 이분 머릿속에는 ‘대한민국=한나라당’으로 꽉 차 있어서 그런 말이 나온 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뭐, 무식한 것이 죄는 아니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 말입니다.

    글쎄 저를 전라도 좌파로 만들어놓았습니다. 제가 좌파인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저 스스로는 좌파라고 생각하지만, 제 입으로는 그런 이야길 잘 안 합니다. 왜냐하면 진짜 좌파들이 들으면 기분 나빠할 것 같아 말이지요. 그래서 좌파라고 불러주는 것에 대해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좌파란 칭호는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실로 휴머니즘, 사회정의에 대한 열정이 없으면 다가갈 수 없는 것이 좌파가 아닌가 합니다.  

    느닷없이 전라도 사람에 좌파가 되다

    그래서 어떤 분은 “세상 사회과학 서적의 90%는 좌파지식인들이 썼으며, 그 이유는 모든 세상의 지식인들은, 그들이 죽을 때 지식인으로 남을 수 있다면, 결국 좌파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목수정-레디앙)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저더러 좌파라고 딱지를 붙여주신다면 참으로 영광스럽게 생각하겠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지만 저를 전라디언으로 만든 건 도가 지나쳤습니다.  

    저는 경남 창원군 웅천면(현재는 진해시)이 고향입니다. 이곳은 조상 대대로 살아온 터전이며 지금도 친척들 대부분이 살고 있습니다. 또 경상북도에서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나오고 고등학교는 부산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창원에서 근 이십년을 살았으며 지금은 마산에서 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전형적인 갱상디언이다, 그런 이야기지요.

    그런데 느닷없이 저를 전라디언으로 만들어놓았으니 이를 어쩝니까? 제가 전라도 사람이 되는 것도 별로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하지만, 조상들에겐 제 고향을 저버린 후레자식놈이 되고 마는 일입니다. 전통적 유교 문화에 익숙한 저로서는 이는 천벌을 받을 일입니다. 모욕도 이처럼 지독한 모욕이 없는 것입니다.

    전라도 좌파면 삼청교육대 보내야 되나

    익명의 이 댓글은 한 발 더 나아가 “저 같은 사람은 싸그리 잡아다 삼청교육대에 보내 6·25가 어땠는지 제대로 교육시켜 정신을 차리게 해야”한다고 열변을 토합니다. 저주도 이런 저주가 없습니다. 삼청교육대가 뭐 하던 곳입니까? 멀쩡한 사람 잡아다가 병신 만들어 보내던 곳 아닙니까? 길 가다 기분 나쁘게 생긴 놈 있으면 신고해서 잡아가라고 하기도 했다는 일화도 있었습니다.

    진주에 가면 육거리파라고 있는데요. 그 육거리파 두목이 삼청교육대에 갔다 와서는 정신이상이 됐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비가 오는 날도 남강다리결에 나와 멍하니 흐르는 강물을 쳐다보곤 했다고 합니다. 그는 밤에 애인과 잠을 자다가 잡혀갔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들은 전해들은 이야기들입니다. 당시 저는 직접 이런 일들을 보고 겪을 만큼 나이가 차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 무시무시한 곳에 저를 전라디언 좌파로 낙인찍으며 보내려고 합니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6·25가 어땠는지 거기 가서 안 배워도 이미 충분하게 그 참상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다. 6·25는 지금도 이 나라 안에서 얼마든지 벌어지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익명의 이 분은 군대나 제대로 갔다 오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로 말씀드리자면 군대 30개월 꼬빡 채웠을 뿐 아니라 육군본부 참모총장실에 가서 육참총장으로부터 수고했다고 금일봉까지 받은 사람입니다. 노란 봉투에 백만 원 들어있었습니다. 물론 저 혼자 쓴 건 아니고 네 명이서 갈랐지만 말입니다. 우리 아버지 이야기도 조금 하지요.

    익명의 이분, 군대나 갔다 오셨는지 모르겠다

    우리 아버지야말로 6·25를 제대로 겪으신 분입니다. 그분은 특수부대원으로 직접 참전하셨으며 혁혁한 전공을 세우기까지 하셨습니다. 그 결과로 은성무공훈장 등을 세개나 받아왔습니다. 제가 어릴 때 홧김에 불태워버렸던 것을 아쉬웠던지 최근에 다시 받아다 거실 벽에 걸어놓으셨습니다. 저는 귀가 따갑도록 아버지의 무용담을 들은 통에 마치 제가 6·25 참전용사인 것으로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습니다.


    6·25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함양에 가시면 얼마든지 그 참상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경남도민일보의 김주완 기자가 그 민간인학살 발굴작업을 알리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니 그분의 블로그에 가보시면 공부가 많이 되시리라 생각됩니다.(2kim.idomin.com) 그런데 굳이 삼청교육대를 다시 만들어 저 같은 사람을 그곳에 보내고 싶다는 이 익명의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분이 원하는 것이 대체 무엇일까요?

    그런데 저는 이런 류의 사람들이 막상 전쟁이 터지면 죄다 꼬리를 감추고 도망이나 갈, 용기라고는 개미오줌 만큼도 없는, 나라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그저 잉여물에 불과한 인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이런 악성 댓글을 익명을 이용해 서슴없이 다는 사람들이 한나라당이 추진하는 사이버모욕법 따위에 주로 동조한다는 사실은 아이러니 중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경험으로 미루어 보면, 이런 분들은 밝은 불을 켜놓으면 한마디 말도 못하는 겁쟁이들입니다.

    그러나 어떻든지 간에 전라디언, 그것도 전라도 좌파씩이나 돼보는 영광을 본의 아니게 누리게 되었으니 그리 썩 나쁜 일만도 아니었던 듯합니다. 전라디언 좌파라! 웃지 않을 수 없군요. 이런 몰상식한 사람들에겐 하하하… 하고 통쾌하게 웃어주는 건 사치라고 생각됩니다. 그냥 이렇게 웃어주어야지요. 피식~

    2009. 1. 31.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

    김주완 기자는 경남도민일보 기자입니다. 그는 기자 신분을 십분 활용해서 지역현대사에 관한 누구도 넘보기 어려운 커다란 업적을 쌓았습니다. 주로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일어났던 민간인학살을 들추어내기 위해 지난 수년 간 그가 닳아 없앤 신발만 해도 상당하리라 짐작합니다. 

    그런 그가 엊그제 그의 블로그에 올렸던 기사 「70 노인이 말하는 빨갱이의 정의 
    http://2kim.idomin.com/521」에 실린 70대 노인의 육성은 그야말로
    지난 수년 간 돌아다니며 파헤친 현대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살아있는 역사였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굴비처럼 엮여가서 죽은 사람들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었습니다. 심지어 남자가 멀리 출타하고 없자 그의 아내를 대신 엮어가서 죽였다는 이야기엔 넋을 잃을 지경이었습니다.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 발굴현장에서 유해의 상태를 설명하는 이상길 교수. 경남도민일보/김주완기자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말들이 많습니다. 이런 진실을 밝혀내는 사람을 도리어 빨갱이라고 모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자 이어 김훤주 경남도민일보 언론노조지부장이 거들었습니다. 역시 그의 블로그에다 「21세기의 ‘빨갱이’와 150년 전의 ‘천좍쟁이’ http://2kim.idomin.com/523」란 제목으로 권력자들이 빨갱이를 어떤 용도로 이용해왔으며 빨갱이의 제대로 된 정의가 무엇인지 밝혀주는 좋은 글을 실었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의 빨갱이에 얽힌 이야기들 듣다보니 저도 갑자기 빨갱이에 관한 오래 된 추억이 하나 떠오릅니다. 저도 예전에 빨갱이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결혼 전
    지금의 처가에 인사드리러 갔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한창 때인 20대였는데, 연애 중이었던 아내가 집에 인사드리러 가자는 말에 아마 엉겁결에 가게 되었지 싶습니다.  

    그때 저는 노동조합 일로 경찰에 지명수배 중이었고 제 아내는 마산수출공단 어느 공장의 노조 위원장이었습니다. 미리 이야기가 있었던지 장인, 장모님과 위로 언니 세 분과 형부들이 모두 모여 있었습니다. 제가 수배자라고 미리 언질이 있었으므로 모두들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막상 저를 보더니 약간 안심하는 눈치였습니다.

    제가 당시만 해도 허우대가 꽤 멀쩡했습니다. 그래서 그랬던지 뭐 그렇게 대단한 빨갱이처럼 보이지는 않았나 봅니다. 어른들에게 큰절을 올리고 몇마디 물어보시고 대답하고 하는 의례적인 순서가 지나가고 과일상이 나오고 모두들 편하게 둘러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긴장이 풀리려는 순간, 갑자기 제일 손위 처형이 대뜸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사람은 빨갱이 사상을 가지고 있어서 아무래도 안 돼. 두 사람은 고마 저 위에 평양에 올라가서 결혼하고 거기서 살든지 해."

    "사람에게는 저마다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재능, 기독교에서는 이를 신이 부여한 운명으로 여기는 모양)가 있는데 그 달란트대로 살아야 되는 거야. 그걸 부정하는 사람이 바로 빨갱이지."

    참고로 우리 큰처형과 큰동서는 서울에서도 꽤 큰 교회의 집사와 장로입니다. 대뜸 저더러 자기 동생 데리고 평양 가서 김일성이 밑에서 살라고 하니까 황당했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몇 년 후에 무사히 결혼을 했고 애도 낳고 잘 사는지는 모르지만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그때는 노조만 한다고 해도 모두 빨갱이로 보는 시절이었으니 큰처형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그분들이 저를 빨갱이라고 생각하시진 않는 거 같습니다. 저나 제 아내가 약간 좌파적 경향을 갖고 있는 건 알지만, 그렇게 (그분들이 생각하는 머리에 뿔 난) 숭악한 빨갱이처럼 보이진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오래지않아 학교 선생님들도 노동조합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뒤이어 일반 공무원들도 노동조합을 만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들과 대학교수에 공무원들까지 모두 빨갱이가 된 셈입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머잖은 장래에 경찰들도 유럽 선진국처럼 노조를 만드는 세상이 올 겁니다.  

    그런데 아직도 세상에선 빨갱이가 유령이나 악마의 거죽을 쓰고 돌아다니고 있으니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젊은 사람들 중에도 빨갱이 타령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니 그놈의 유령이 끈질기긴 끈질긴 모양입니다. 그나저나 이렇게 계속 거꾸로 돌다가는 어지러워서 모두 다 쓰러지고 말 것이 걱정입니다.  

    2008. 11. 10.  파비

    습지와 인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김훤주 (산지니,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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