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12.07 선덕여왕, 비담이 새 깃털로 만든 부채를 든 이유 by 파비 정부권 (9)
  2. 2009.09.25 황남대총금관으로 보는 선덕여왕 탄생의 비밀 by 파비 정부권 (6)
일전에 촌스런블로그님께서 "비담은 왜 부채를 들고 있을까?" 란 주제로 포스팅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실은 저도 이 부분이 매우 궁금했었고 나름대로 이유를 밝혀 포스팅하고 싶었는데, 마침 촌스런블로그님이 주제를 잡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촌스런블로그에 댓글을 달아 기회가 되면 저도 비담의 부채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밝혔습니다. 선수를 빼앗겼다고 푸념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트랙백으로 남기겠다고 했었죠. 

비담이 부채를 든 까닭은?

제가 뭔가 말을 하면 꼭 지켜야만 하겠다는 강박관념 같은 걸 불필요하게 내장하고 다니는 사람이랍니다. 그래서 비담의 부채 이야기를 꼭 써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시간이 잘 나지 않았습니다. 시간보다는 이야기를 풀만한 소재가 빈약했다는 편이 맞을 거 같습니다. 언젠가 도서관에서 신라 금관에 관한 이야기를 읽었던 것이 기억나서 그걸 비담의 부채와 연결시키고 싶었지만 기억도 잘 안 나고, 도서관에 가서 찾아보자니 시간은 없고, 그랬습니다. 

그러나 더 늦추다가는 <선덕여왕>이 끝날 거 같은 생각이 들어 이렇게 부랴부랴 쓰기로 했습니다. 우선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비담이 부채를 들고 있는 이유는 신비롭게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비담은 사량부령입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CIA나 FBI 국장쯤 되겠군요. 이스라엘로 치면 사량부는 모사드일 것이고, 옛 소련이라면 KGB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우리나라에도 이런 조직이 있는데 중앙정보부, 국가안전기획부, 국가정보원 등으로 이름이 변천했습니다. 

그 옛날 삼국지에 나오는 신출귀몰 제갈공명도 부채를 든 모습으로 많이 그려졌지요. 제갈량이 든 부채를 백우선이라고 하는데 학의 깃털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적벽대전에서 백우선을 든 제갈량이 제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 동남풍을 부르는 장면은 실로 신선의 모습이 따로 없었습니다. 아무튼 부채는 예로부터 신비로운 사람들이 많이 애용하던 물품임에 틀림없습니다. 비담이 부채를 든 것도 바로 그런 효과를 노린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그런 목적만 있었을까요? 비담이 든 부채도 보아하니 새의 깃털로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제갈량의 부채도 새의 깃털로 만들었습니다. 자, 공통점이 있습니다. 부채들이 모두 새의 깃털로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새의 깃털, 여기에 어떤 비밀이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요? 왜 신비로운 힘을 과시하기 위해 든 부채를 모두 새의 깃털로 만들었을까요? 앞에서도 잠깐 말씀드렸지만, 저는 이 비밀을 신라의 금관과 연결시켜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습니다. 
 

그리고 부채를 새 깃털로 만든 이유는?

몇 달 전에 김주완 기자님, 커서님과 더불어 경주박물관에 갔을 때, 천마총에서 나온 금관을 보았습니다. 정말 대단했습니다. 그 화려함, 그 시대에 어떻게 이토록 정밀한 세공을 할 수 있었을까, 놀랍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금관을 다른 말로 황금수목관이라고도 하는데 둥근 다이아뎀에 삐죽삐죽 솟은 것은 바로 나뭇가지들입니다. 즉 금관은 나뭇가지 모양이란 얘기죠. 그래서 수목관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황금수목관.

그런데 그 나뭇가지의 맨 위에는 어김없이 새 한 마리씩이 앉아 있습니다. 즉 나뭇가지 위에 새가 앉아있는 모양을 본 떠 왕관을 만든 것입니다. 모든 왕관들이 그렇습니다. 황남대총에서 나온 금관에도 마찬가지로 나뭇가지 위에 새가 앉아있는 모양입니다. 그럼 왜 임금이 쓰는 금관 위에는 새를 만들어 올렸을까요? 여기에 대해 아직 정통한 학설은 없습니다. 아직은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신기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처럼 왕관 위에 새가 앉아 있는 모양은 유럽에서도 발견됩니다. 가깝게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가 대관식 때 썼던 왕관도 다이아뎀에 솟은 수목에 새가 앉아있는 모양이었다고 합니다.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썼던 왕관도 마찬가지로 위에 새가 앉은 수목관이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익히 보아오던, 그러나 세심히 보지 못했던 유럽의 왕관들은 거의 모두 이런 모양들이었습니다. 노르웨이나 스웨덴의 왕들이 쓰는 왕관도 마찬가지고요.
 
왜 그런 것일까요? 여기에 대해 어떤 학자―도서관에 가서 책을 찾아볼 여유도 없고,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겠습니다―는 수목관은 알타이 계통의 민족들에게서 나타나는 왕관의 형식인데 동과 서로 퍼져 그 명맥이 이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동쪽의 신라 금관과 유사한 수목관이 서쪽 유럽의 왕관들에서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형식은 북쪽에 주로 퍼져 있고 남쪽에는 잘 없는데, 중국 등지에서는 수목관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신라 금관과 유럽의 왕관 그리고 솟대에 앉은 새

여기에 대해선 너무 전문적인 분야인 만큼 이 정도로 하기로 하고요. 그럼 왜 왕관에 새를 만들어 올렸을까요? 그게 무척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솟대를 보게 되었습니다. 모두들 아시다시피 솟대의 모양이 어떻습니까? 높다란 나뭇가지 위에 새가 한 마리 올라 앉아 있지 않습니까? 그 솟대를 보며 황금수목관이 연상되었습니다. 아, 어쩌면 황금수목관과 이 솟대가 무언가 유사점이 있는 것이 아닐까?

'문득' 솟대를 발견한 곳은 진주 청동기박물관이었습니다. <경남여성새로일하기지원본부>에서 주최한 작은도서관 블로거간담회에 참여했다가 다음날 청동기박물관 답사를 갔던 것입니다. 그때 창원대에서 강의를 하신다는 인솔 선생님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선생님, 이 솟대에 앉은 새들을 보니까 말입니다, 생각나는 게 있는데요. 신라시대 금관에도 새가 앉아 있거든요. 어떤 유사점이 있을까요? 듣자하니 유럽의 왕관들에도 새가 있다고 하고요."

"글쎄요. 정확하게 그 관련성에 대해선 알 수 없지만요. 아무튼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인들은 새를 숭배했지요. 하늘을 나는 새는 곧 최고 권력을 상징하는 거죠. 주로 스텝지방을 중심으로 동서쪽으로 이런 문화가 있었던 걸로 보이고요. 태양을 숭배하는 민족도 있는데 이도 원래 새를 숭배하던 풍습이 발전한 것이지요. 일본의 국기에 보면 태양이 그려져 있잖아요? 그것도 마찬가지 의미로 보시면 될 거에요. 고구려도 삼족오가 상징이죠."

"아, 그리고 말이죠. 새를 숭배하는 이런 풍습은 이후에 국가체제가 정비된 이후에도 나타나게 되는데요. 귀족들이 모자나 의복에 새의 깃털을 꽂거나 달고 다녔거든요. 그건 곧 왕과 가장 가깝다, 왕과 나는 일체다, 이런 의미였어요. 곧 새의 깃털은 권력의 상징이죠. 그렇게 보면 왕관에 새가 앉아 있는 모습이나 솟대에 새가 앉아 있는 모습이 아주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없겠네요."

비담의 새 깃털 부채는, 곧 내가 왕과 동일체란 선포 아닐까

그 말을 듣고 저는, 억지로 비담의 부채와 신라 금관과 유럽의 왕관을 연결시키기로 했습니다. 비담이 든 부채는 새의 깃털로 만들었다, 새의 깃털은 곧 최고 권력자와 내가 동일하다는 뜻, 곧 비담은 선덕여왕과 동일체라는 생각, 뭐 그런 걸로 말입니다. 아무튼 비담은 실제로 그런 생각을 현실에 옮기려고 하고 있으니 가히 틀린 억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난주부터 비담이 갑자기 부채를 들고 나오지 않더군요.

왜 그러는 것일까요? '비담과 선덕여왕 동일체'의 전선에 무슨 이상이 생긴 것일까요? 들고 다니려면 계속 들고 다니던지 이랬다저랬다 하니 참 헛갈립니다. 오늘은 들고 나오려나?
Posted by 파비 정부권

신라밀레니엄파크에서 찍은 사진

선덕여왕 탄생의 전시대적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미리 말한다면 그건 신라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신라는 매우 개방적인 사회였다.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와는 달랐다. 고구려와 백제가 중국문화를 받아들이며 제도를 정비한 데 비해 신라는 이들과는 다른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유심히 유물을 관찰한 사람이라면 찬란한 신라문화의 독자적인 힘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신라고분은 찬란한 문화유산의 보물 창고

이재호가 쓴 <천년 고도를 걷는 즐거움(한겨레신문사)>에 이런 일화가 있다. 경주의 고분들에 일제는 아무런 의미없이 1호부터 155호까지 번호를 붙였다. 일제는 1920년대에 대대적인 고분 발굴에 착수했는데 금령총과 금관총 등에서 금관이 발굴되었다. 그리고 이어 129호분을 발굴하자 금관이 또 나왔다. 이에 본국과 긴밀히 연락한 총독부는 발굴을 중단했다. 

그리고 때마침 일본에 신혼여행 중이던 스웨덴의 구스타프 6세 황태자에게 "신라 천 년 고도 경주에서 금관이 나왔고, 지금 발굴 중인 고분에서도 금관이 나올 기미가 있다"며 발굴에 참여하지 않겠느냐고 유혹했다. 물론 아시아 침략의 야욕을 위해 서방과 선린관계를 맺으려는 일본의 계략이었다. 구스타프는 고고학에 상당한 조예가 있는 사람이었다.  

구스타프는 당장 현해탄을 건너 경주에 왔다. 각본대로 금관이 발굴되었음은 물론이다. 흥분과 감동으로 금관을 잡은 황태자는 손을 파르르 떨었다. 이를 지켜보던 일본관리가 만면에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황태자님이 이름을 지어주십시오." "음…." "황태자님이 직접 발굴에 참여하셨으니 서전국(스웨덴)의 이름을 따 서전총이 어떨지요?" 

"안 될 말이오. 찬란했던 동양의 나라 신라 왕릉에 서양 이름을 붙이다니 당치도 않소. 아까 보니 금관 정수리에 봉황 세 마리가 붙어 있던데 봉황총이 어떻겠소." 결국 129호분의 이름은 스웨덴과 봉황의 이름을 합쳐 서봉총이 되었다. 어찌 되었든 고고학적 지식과 안목을 갖춘 서양의 황태자에게도 신라의 금관은 휘황찬란한 것이었다. 

그리고 해방 이후 1971년 경주관광개발종합계획이 수립되었을 때 대릉원에서 제일 큰 98호분을 발굴하기로 했다. 이 고분을 발굴하기 위한 예행연습으로 바로 옆에 있던 155호분을 먼저 발굴하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여기서 천마도가 나왔다. 예행연습으로 발굴한 고분에서 천마도와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 금관(국보 188호)을 비롯해 1만 5천여 점의 유물이 쏟아지다니.

그리하여 155호 고분은 천마총이란 이름을 얻었다. 신문에 보니 천마도는 30여 년이 흐른 오늘에서야 비로소 전체 모습이 공개되었는데 머리에 뿔이 달린 모습이 유니콘을 닮아 앞으로 많은 논란이 예상된다고 한다.   

국보 188호 천마총 금관. 플래시를 쓸 수 없어 사진 상태가 안 좋다.


황남대총의 주인은 누굴까?

천마총에서 연습을 끝낸 발굴팀은 1973년부터 2년 3개월에 걸쳐 98호분을 발굴했다. 여기에 연인원 3만 2800명이 투입되었다. 이 98호분이 바로 황남대총이다. 이곳에서도 3만 5000여 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황남대총은 북분과 남분으로 이루어진 쌍총인데 남분은 왕, 북분은 왕비의 능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북분에서는 금관(국보 191호)이 나왔는데 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남분에서는 금관이 나오지 않고 대신 은관이 나왔다는 것이다.  남분에는 60세 전후의 남자와 순장된 것으로 보이는 여자의 유골이 나왔는데 남자의 유골은 내물왕 또는 실성왕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금관이 출토된 고분의 제작시기를 5세기에서 6세기 초반으로 볼 때 이 시기의 왕은 대략 6명으로 압축되는데 내물, 실성, 눌지, 자비, 소지, 지증왕이다. 이 중에 황남대총 남분의 주인은 누구일까? 여기에 대해 일본의 역사학자 요시미즈 츠네오는 그의 저서 <로마문화 왕국, 신라>에서 흥미로운 주장을 한다. 그는 남분의 주인을 실성왕으로 보고 있다. 

그 이유로 실성왕은 왕족이 아닌 신분으로 왕위에 오른 유일한 신라의 왕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이 모든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실성왕 외에도 왕족이 아니면서 왕이 된 인물은 이미 여럿 있었다. 우선 유명한 석탈해가 있다. 석탈해는 왕족이 아니었다. 다음 미추왕도 있다. 그도 역시 왕족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의 공통점이 있다. 모두 왕의 사위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부마로서 왕이 된 사람들인데, 어쩌면 아들이 없는 왕의 공주를 대신해서 왕좌를 이어받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요시미즈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석탈해나 미추왕 또는 내물왕의 경우에 박씨족, 석씨족 혹은 김씨족과의 권력투쟁을 통해 왕권을 쟁취한 것이라면 말이다.  
 
황남대총의 왕비는 금관, 왕은 은관?

실성왕은 김씨족이긴 하지만, 즉 김알지의 후손이긴 하지만 최초의 김씨 왕인 미추왕의 자손이 아니다. 그러므로 왕족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내물왕의 사위였다. 내물왕이 죽으면서 어린 아들들을 대신해 사위에게 왕좌를 넘겼다. 실성왕은 왕이었지만 미추왕(또는 내물왕)의 딸인 왕비에 비해 계급이 낮았다. 

신라 왕릉 최대 규모의 황남대총. 길이는 남북으로 120m 동서로 82m, 높이는 남분이 22m 북분이 23m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왕은 은관을 쓰고, 왕비는 금관을 쓰고 누워있는 무덤의 실체'에 대해 이보다 더 확실한 대답은 없을 것이다. 또 혹자는 같은 맥락에서 내물왕의 무덤이 아니겠느냐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실성왕은 눌지에게 피살당해 권력을 상실했는데 이토록 거대한 무덤을 조성했을 리 없다는 차원에서 눌지왕의 능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물왕의 무덤이라는 주장은 비록 석씨왕의 사위로서 왕이 되었으나 김씨족 왕권의 기틀을 닦은 강력한 군주라고 평가한다면 별로 설득력이 없는 이야기다. 눌지왕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실성왕을 죽이고 권력을 빼앗았다고 하나 그는 내물왕의 아들로서 정통성이 있다. 은관을 쓰고 누워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리 보면 가장 확실한 무덤의 임자는 아무래도 요시미즈의 주장처럼 실성왕이다. 그런데 어떻게 눌지에게 피살당해 권좌에서 밀려난 왕의 무덤이 이토록 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미스터리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커다란 핸디캡이 있다. 바로 의식이며 고정관념이다. 이로 인해 우리는 왕을 보는 눈은 가졌지만 왕비를 보는 눈은 갖지 못했다. 

기록에 의하면 실성왕의 왕비는 미추왕의 딸이라고 한다. 그러나 연대 차이로 볼 때 이는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다. 아마도 미추왕의 적손이거나 내물왕의 딸일 가능성이 크다. 미추왕의 딸이라고 하는 것은 김씨 왕족의 정통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을 수 있다. 왕에 비해 신성한 혈통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황남대총의 여주인은 왕보다도 강한 권력자였다

어떻든, 우리는 황남대총의 북분과 남분의 피장자를 통해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북분의 피장자는 여왕이 아니었는데도 왕만이 쓸 수 있는 황금수목관과 호화찬란한 장신구를 비롯해 로마유리잔과 자기 등이 부장되었지만, 남분의 피장자는 비록 왕이었지만 왕비에 비해 낮은 신분 탓으로 은관과 금동관과 기타 무기·무구류가 부장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은 원래 이 글의 주제이기도 한데, 자신을 암살하려던 실성왕을 오히려 시해하고 왕이 된 눌지조차도 어쩔 수 없이 거대한 봉분을 조성하는데 협력할 수밖에 없었던 세력관계다. 실성왕의 왕비는 눌지왕의 이모이고 눌지왕의 아내는 실성왕의 딸이다. 눌지왕 주변에는 강력한 외척, 여인들의 파벌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 착안하여 우리는, 어째서 왕비의 무덤인 북분에서 왕이 쓰는 황금수목관이 나오고 왕의 무덤에서는 은관과 금동관만이 나왔는지에 대한 이해를 구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MBC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보듯 미실이라는 여인이 구축한 권력관계란 것이 그렇게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란 사실도 함께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미실이 구축한 구도란 것은 결국 선덕여왕이 왕좌에 오를 수 있는 토대다. 선덕여왕이 비록 성골이라고는 하나 여자로서 왕위에 오른 것에 대하여 아직 어떤 구체적인 해명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다만 삼국사기에서 '성골남진'을 이유로 들고 있는데 이는 그저 불가피한 하나의 조처였을 뿐이라는 소극적인 해명 아닌 해명에 불과하다. 

신라 왕릉 중 가장 거대한 황남대총은 활발하고 진취적인 신라 여인들의 패기를 보여주는 블랙박스다. 그러나 우리는 이 블랙박스를 푸는 열쇠를 잃어버렸다. 여기에는 통일신라 후기부터 유입되기 시작한 유교의 영향으로 고대의 전통을 깡그리 부정하는 풍조도 한몫했다. 이 풍조에 편승한 김부식은 암닭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는 식으로 선덕여왕을 비하했다. 

황남대총 사이를 지나가는 두 사람. 무슨 생각을 하며 걸어가고 있을까?


그러나 결국 여왕도 배타적 근친혼을 통해 탄생한 왕족일 뿐, 
중요한 것은 골품귀족의 이해에 반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  
 
그러나 그 역시도 삼국통일의 토대를 닦고 문물을 장려한 선덕여왕의 공덕을 모두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완곡하게 "여자가 왕이 되었는데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은 신통한 일이다"라고 비틀어 말했던 것이다. 선덕여왕은 우연히 왕이 된 여인이 아니다. 또는 성골이 남진하여 그리된 것도 아니다. 

선덕여왕의 뒤를 이은 진덕여왕과 이백여 년이 지나 다시금 등장한 진성여왕은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사대주의 사관으로 씌어진 삼국사기, 이를 극복했으나 여전히 한계를 가지고 있는 삼국유사만으로 고대사회를 본다는 것은 얼마나 편협한 것인가. 그러므로 비록 필사본이라 해도 화랑세기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은 실로 위안이라 아니할 수 없다.

화랑세기 진본이 나타나기 전에는 위작 논쟁은 아마도 종지부를 찍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기와 유사에서는 볼 수 없는 생생한 고대 신라 사회의 생활상을 그려보는 기쁨을 화랑세기를 통해 누려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화랑세기의 이야기를 확실하게 증언하고 있는 것은 다른 어떤 왕릉보다 우뚝 솟아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황남대총의 여주인이 아닐까?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이 분묘의 여주인이야말로 당당하게 신라정계에서 활약한 미실과 선덕여왕의 전신이란 사실을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다만 전제가 있다면, 황남대총의 여주인이든 미실이든 선덕여왕이든 타고난 혈통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철저한 근친혼을 통해 배타적 신분으로 만들어진 왕족이거나 성골들이다.

그러나 아직 모든 것은 수수께끼다. 무덤들은 말이 없다. 대릉원을 순례하던 날, 마치 계곡을 타고 바람이 흐르듯 거대한 무덤들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무척이나 시원했다. 황남대총 사이를 걸어가며 드는 생각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래,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일 뿐이다.

"와, 정말 대단하다. 그리고 참 잘 생겼다." 

ps; 마무리가 희끄무리하지만 잠이 와서 할 수 없이 예약 걸고 그냥 잡니다. 내일 시간 나면 손 보겠습니다.
     뭐 크게 무리는 없다고 보지만, 결론은 신라사회는 여왕이 탄생하는 데 큰 거부감이 없는 사회였다는 겁니다. 
이 장소를 Daum지도에서 확인해보세요.
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 | 대릉원 황남대총
도움말 Daum 지도
Posted by 파비 정부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