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9.07.28 낙동강에서 만난 선산의 보물들 by 파비 정부권 (6)
  2. 2009.04.28 치열한 광고전쟁, 똥값이 쌀까, 껌값이 쌀까? by 파비 정부권 (11)
  3. 2009.03.31 터미널에서 만난 비키니 아가씨들 by 파비 정부권 (8)

태백산에서 시작한 낙동강 도보기행(사단법인 우리땅걷기, 대표 신정일)이 드디어 다섯 번째를 맞았습니다. 매월 네 째주에 2박 3일 일정으로 진행되는 낙동강 도보기행의 이번 구간은 상주 강창나루에서 시작하여 낙동나루를 거쳐 구미까지입니다. 낙동나루는 김해에서 시작한 낙동강 7백리 뱃길의 종착점입니다. 낙동강이란 이름도 이 낙동나루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보물 제 492호 선산 보천사 석조여래좌상


물론 가야의 동쪽에 있는 강이란 뜻에서 낙동강이 유래했다고 해석하는 분도 있지만, 대체로 역사서들은 낙동강의 유래를 이곳 상주 낙동에서 찾습니다. 상주의 옛 이름은 낙양입니다. 우리는 낙동강 5차도보기행의 베이스 캠프로 구미시 해평면 소재의 청소년 수련원을 선택했습니다. 시설은 최악이었습니다. 전혀 관리가 안 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수련원에서 불과 500여 미터만 올라가면 만날 수 있는 보천사에서 진귀한 보물을 볼 수 있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보통 사찰 대웅전에는 금동불상을 모시는 게 일반적인데 이곳에는 돌을 깍아 만든 부처님을 모셔 놓았습니다. 아침 6시, 절은 조용했습니다.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절에 개 한마리가 불청객을 나무라듯 시끄럽게 짖어댑니다.

첫 번째 만난 보물 : 해평 보천사 석조여래좌상
1968년 보물 제 492호로 지정된 보천사의 본존불로서 경북 구미시 해평면 해평리 526번지 보천사 대웅전에 있다. 오른손을 무릎 아래로 내린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 석불좌상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이다. 대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으로 이 불상의 특징은 광배와 대좌다.

광배(光背)란 부처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것으로서 원광(圓光)·후광(後光)·염광(焰光)이라고도 한다. 2중의 원으로 표현된 머리광배와 몸광배의 원 안에는 덩쿨무늬가 새겨져 있고 머리광배의 중심부분에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광배의 곳곳에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고 아래쪽에는 향로가 새겨져 있으며 가장자리에는 화려한 불꽃무뉘가 둘러싸고 있다.

대좌(臺座)란 부처님이나 보살, 천인, 승려 등이 앉거나 서는 자리를 말하는데 기원과 전래에 대해 정확한 기록이 없지만 붓다가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을 때 앉았던 풀방석에서 유래한 것으로 금강좌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주로 연화좌가 많이 사용되는데 이는 연꽃이 더러운 흙 속에서도 청정함을 잃지 않는 덕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상중하 3면으로 나뉘어진 보천사 석불좌상의 대좌에도 연꽃잎이 새겨져 있다.

보천사의 현재 주소가 구미시로 되어 있지만 원래 이곳은 선산군 해평면이었습니다. 고려말 삼은의 하나였던 야은 길재가 나고 말년을 보낸 선산은 조선인재의 반은 영남에서 나고 영남인재의 반은 선산에서 난다고 한 바로 그곳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선산은 공업도시 구미에 그 이름을 내어주고 말았습니다. 이름과 함께 역사와 전통마저 버린 셈입니다. 

구미에 이름을 빼앗기고 구미시의 일개 읍으로 전락한 선산읍에는 보기 드문 보물이 하나 있습니다. 죽장사 5층석탑이 바로 그것입니다. 원래 죽장사였던 이 절은 이제 이름이 서황사로 바뀌었습니다. 절의 이름을 바꾼 이유는 죽장사란 이름을 가진 절들 중에 망한 절이 많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개명을 하는 이유도 참 다채롭다는 생각이 듭니다.
 

국보 제 130호 선산 죽장동 5층석탑

석탑의 감실에 약사여래불이 모셔져 있었다

비구니승들의 섬세한 정성이 너무 예쁘다

            

두 번째 만난 보물 : 선산 죽장동 5층석탑
국보 제 130호다. 통일신라시대 5층석탑으로 높이가 10m이다. 5층석탑으로서는 국내 최대 규모이다. 행정구역은 경북 구미시 선산읍 죽장리다. 화감암을 깍아 만든 석탑의 규모만큼이나 위용이 대단하다. 18매의 장대석으로 기단을 만든 것이 특징이다. 기단의 면적이 평범하지 않다. 보통의 석탑에서는 느낄 수 없는 웅장함이 이 석탑의 묘미다.
 
일반적인 석탑과 달리 이 석탑은 기단이 2중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그 위에 탑신을 얹었다. 석탑의 모양으로 보아 안동-의성 지역에서 유행했던 전탑을 모방한 모전석탑으로 보여지며 웅장하고 세련된 신라 석탑의 조형미를 잘 보여주고 있는 뛰어난 석탑이다. 1층 탑신부에는 불상을 모실 수 있도록 감실이 만들어져 있다.

상륜부는 일제시대에 일본인에 의해 뜯겨져 일본으로 건너가 행방불명되었다. 아마 석탑 전체를 들고 가고 싶었겠지만, 워낙 크기가 거대하다 보니 상륜만 뜯어간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아마 정교한 조각이 빼어난 상륜부는 어느 일본인의 정원에 잠자고 있을 터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꼭대기를 보니, 탑신 가운데 비가 들지 않도록 돌을 깍아 얹어 놓았다.  

어떻든 이 절은 신라시대까지만 해도 50여 동에 이르는 대가람이었지만, 몽고의 침입 때 모두 소실되고 5층석탑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1952년에 새로이 창건되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도반이신 신정일 선생(사단법인 우리땅걷기 대표, 낙동강역사문화탐사 등 40여권의 기행록 저술)의 말씀에 의하면 비구승들이 말아먹은 이 절을 비구니승들이 와서 새로 일구었다고 합니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부 승려들 중에는 깡패 출신들도 있다고 합니다. 비구니승들이 절을 잘 닦아놓으면 이들이 와서 빼앗고 다시 불과 오래지 않아 절을 다 말아먹는다는 것입니다. 뭘 어떻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절의 재정상태를 완전 바닥까지 드러나도록 만들고서야 떠난다는 것입니다. 

그럼 다시 비구니승들이 와서 다시 절을 가다듬고 가꾸어 복원을 한다는 것이죠. 여자들의 섬세한 생활력이 남자들이 말아먹은 절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는 것입니다. 신정일 선생의 말에 의하면 이런 경우가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있다고 했습니다. 이곳 서황사의 내력이야 알 수 없는 노릇이긴 하지만 역시 절 곳곳에 비구니 스님들의 세심한 배려가 역력했습니다.
 
죽장동 5층석탑에는 전해내려오는 전설이 하나 있습니다. 옛날에 두 남매가 살았는데 서로 재주를 자랑하다가 누가 먼저 탑을 쌓는지 내기를 했다고 합니다. 이에 누이동생은 이곳 중장리에서 석탑을 쌓고 오빠는 낙산리에서 석탑을 쌓았는데 누이동생의 재주에 오빠가 감히 대적하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보물 제 469호 낙산동 3층석탑



이에 아들이 질 것을 염려한 어머니가 딸 몰래 아들이 석탑 쌓는 도왔지만 결국 누이동생이 이겼다고 합니다. 죽장동 석탑은 5층이요, 낙산동 석탑은 3층입니다. 죽장동 5층석탑의 기단과 마찬가지로 2층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기단의 크기는 훨씬 작습니다. 규모에 있어서 낙산동 3층석탑이 죽장동 5층석탑을 따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두 개의 석탑은 형식이나 모양이 크게 닮았습니다. 아마 그런 데서 남매의 전설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남매의 어머니는 어째서 아들이 질 것을 염려하여 아들을 도왔을까요? 딸이 이기면 안 되는 것입니까? 거 참 전설도 얄궂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설에도 남녀차별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슬퍼지네요.
 
그냥 당당하게 졌으면 좋았을 걸… 아래 사진은 오빠가 쌓았다는 낙산동 3층석탑입니다. 과거에는 이곳에 커다란 절이 있었을 것이지만, 지금은 주변이 논과 밭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보물로 지정되어 있었지만 그저 쓸쓸하게 벌판에 버려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나마 바로 옆에 부락이 있어 위안이 되었습니다.

세 번째 만난 보물 : 선산 낙산동 3층석탑
보물 제 469호다. 행정구역은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 837-1번지이다. 양식이 죽장동 5층석탑과 비슷한 통일신라시대의 모전석탑 계열의 석탑이다. 주변에 별다른 유적이 없으나 주변 경작지 일대에서 기와조각과 토기 편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절터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도리사 극락전 마당에 도리사 석탑이 있다

 

보물 제 470호 도리사석탑

구미시 해평면에는 또 하나의 보물이 있습니다. 도리사석탑이 그것입니다. 도리사석탑은 1968년에 보물 제 47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러나 도리사는 절 전체가 하나의 보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선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러 왔다가 지은 신라 최초의 사찰입니다.
 
고구려의 승려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전한 것은 눌지왕 때인 417년이라고 합니다. 아도가 전법하기 위하여 서라벌에 다녀오는 길에 이곳 태조산을 지나는 데 한겨울인데도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만발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이곳이 길지라고 생각한 아도가 절을 지었는데 신라 최초의 절이라고 합니다.

1976년 종 모양의 세존사리탑 속에서 금동육각사리함이 발견되었는데 그 안에 부처님의 사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국에서 신도들이 몰려들어 조용하던 태조산이 한때 몸살을 앓았다고 합니다. 금동육각사리함은 국보 제 208호로 지정되었으며 직지사의 성보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고 합니다.

네 번째 만난 보물 : 도리사석탑
보물 제 470호다. 행정구역은 경북 구미시 해평면 송곡리 403 도리사다. 극락전 마당에 있다. 전체적으로 5개 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맨 아래는 기단, 그 위 두개 층은 탑신부로 보이지만 구분하기가 매우 모호하다. 일반 탑들과는 달리 형상이 매우 특이한 이 탑은 안동 의성지방의 모전석탑 계열로 보이는데 고려시대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왼쪽에 있는 사진이 바로 세존사리탑입니다. 불자들의 마음으로 보면 세존사리탑이 최고의 보물일 것입니다. 불교 신자들에게 세존의 사리는 곧 부처님의 현신으로 받아들여지겠지요. 세존의 사리를 보기 위해 전국에서 구름처럼 모여들었을 사람들의 기도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그러나 이곳은 이제 냉산의 차가운 여름 바람만이 부처님의 사리탑을 식혀주고 있습니다.   

태조산은 냉산이라고도 부릅니다. 도리사는 냉산의 거의 정상 가까이에 지어져 있었습니다. 산은 이름처럼 무척 추웠습니다. 찬바람이 마치 늦가을 날씨를 연상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태조산을 냉산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일까요? 이 무더운 여름날의 가운데에서 이처럼 시원한 산을 찾아 까마득한 절집을 오르는 것도 더없는 기쁨이었습니다.  

이렇게 네 개의 보물을 모두 구경한 우리는 다시 길을 떠나야 합니다. 낙동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행히 구름이 해를 가려 뜨거운 여름날의 고통은 많이 줄어들 듯합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강둑길을 바라보니 한숨이 납니다. 그래도 가야 합니다. 이곳에 온 목적은 보물을 보기 위함이 아닙니다. 

다시는 보지 못할지도 모를 낙동강을 눈에, 머리에
그리고 가슴에 담아두는 것이 목적입니다. 영원히, 수로로 변해 영원히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를 낙동강을 말입니다.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

얼마 전, 주완 기자의 블로그에서 휴대폰
홍보전쟁 기사를 보며 배꼽을 잡았습니다
.

"김주완 김훤주의 세상사는 이야기" 에서 사진 인용


“마산에서 제일 싼 집”
“북한 빼고 남한에서 제일 싼 집”

다음이 완전 압권이었죠?

옆집보다 무조건 싸게 팝니다”


하하.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물론 저도 매일 한번 이상은 이런 홍보문구를 거리에서 보았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무심코 지나쳤던 거지요. 워낙 이런 상술에 익숙해진 지 오래 됐으니까요. 그런데 김주완 기자가 부럽군요. 아직도 이런 것이 눈에 들어오는 걸 보면 그는 아직도 풍부한 감성을 간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덕분에 저도 지난 금요일에 구미에 올라갔다가 비스름한 것을 봤습니다. 구미에 간 이유는 낙동강 도보기행 제2구간(경북봉화 임기, 명호, 청량산, 안동 가송협, 도산서원까지)에 함께 갈 초석님이 구미역 근처에서 치과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그의 퇴근시간이 7이므로 그 시간에 맞춰 열차를 타고 구미역에 내렸습니다. 나중에 따로 포스팅 하겠지만 정말 환상의 강길이었습니다.

섬진강 하동포구길이 올해 한국의 아름다운 길 1등에 선정되었다는 기사를 어디서 본 것 같은데요. 글쎄요. 제가 보기엔 낙동강 가송리 협곡이 가장 아름다운 길이 아닐까 생각되는군요. 물론 이 길은 차가 다닐 수는 없는 길이니 섬진강과 비교하긴 좀 그렇지만요. 게다가 이 길은 퇴계 이황 선생의 발자취가 묻어나는 길이기도 하답니다
.

퇴계선생은 이 길을 걸어 수없이 청량산을 올랐을 텐데요,
 자신의 아호마저도 청량산인이라고 고쳤다 하는군요. , 이 정도로 제가 다녀온 낙동강 홍보는 그만 하기로 하고요. 금요일 오후 6 53, 구미역은 엄청나게 북적거리더군요. 한산한 마산역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습니다. 마치 서울역에 온듯한 착각이 일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가 촌놈이 된 듯 두리번거리며 역을 빠져 나온 제 눈에 제일 먼저 뛴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바로 이것이었답니다.   “폰값 똥값”


폰값과 똥값 사이에 있는 화투짝 보이시나요? 저게 바로 똥광이란 건데요. 제가 화투는 칠 줄 모르지만 아마 대충 맞을 겁니다. 광 중에서도 팔광과 똥광이 최고라고 들었거든요. 어쨌든 이 휴대폰 가게는 대구 동신골목을 싹쓸이하고 드디어 구미에 판을 깔았다는데요. 휴대폰을 똥값에 팔겠다는 거고요. 똥값에 폰을 사신 고객님은 화투판에서 똥광을 잡은 거나 마찬가지다 뭐 이런 이야기인 것 같네요.

폰값이 똥값이라…


, 그런데 옆집을 보세요. 이 집은 “폰값이 껌값이래요.”
 


! 정말 치열한 홍보전쟁이 김주완 기자의 말처럼 점입가경입니다. 차마 이 정도일 줄 몰랐는데 이제 아예 폰을 똥값이나 껌값에 팔겠다고 나섰으니… 먹고 살기가 어렵긴 어렵나 봐요. 이렇게 해서라도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쳐야 한다니. 이거 이러다 삼성전자나 엘지전자 같은 대형회사들 부도 나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 

아니 휴대폰을 똥값이나 껌값에 팔고 그 원가부담을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참으로 걱정됩니다. ? 제가 쓸데 없는 걱정을 하고 있다고요? 그래도 다 남는 장사라고요? 하긴 안 남기고 이런 짓 할 리도 없겠지요. 돈 되는 일이라면 공산주의도 팔아 이윤을 남긴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안 되는 짓을 할 리가 없겠지요. 

그런데 여러분, 사실은요. 제가 저 거대한 똥값과 껌값 간판을 보면서 생각이 들었던 건 그저 이런 이야기가 아니었답니다. 폰값이 똥값이든, 북한 빼고 남한에서 제일 싸든, 아니면 무조건 옆집보다는 더 싸게 팔든 뭐 우리는 이미 이 치열한 생존경쟁에 무덤덤해진 지가 오래 되었잖아요? 

휴대폰 가게를 자세히 보세요. 그리고 간판도 다시 한 번 봐주세요. 가게보다 간판이 더 크지 않나요? 그리고 위에 김주완 기자가 찍어 올린 자기네 신문사 근처에 있는 휴대폰 가게들 간판과도 한 번 비교해보아 주세요. 확실히 틀리지요? 구미는 대체로 간판들이 이처럼 초대형이더군요. 최소한 저 간판은 똥값으로는 달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던데, 여러분 생각은 어떠세요?

혹시 앞 전에 제가 올렸던 기사 중에 <터미널에서 만난 비키니 아가씨들>을 보셨던 분이라면 "그래 맞다!" 하실 거에요. 제가 한 달 전 낙동강 탐사를 떠나기 위해 이곳 구미에 들렀을 때, 그때는 버스를 타고 구미종합터미널에 내렸었죠. 터미널 앞은 온통 아가씨들로 뒤덮여 있었는데요. 간판 속의 아가씨들 말이에요. 그 간판들 크기도 장난이 아니었죠. 


저는 나날이 이토록 커지는 간판들이 걱정이네요. 작년이었던가요? 아니면 재작년? 모 방송사에서 방영한 신년기획 다큐멘터리에서 세계적인 사진작가인 프랑스의 얀이 유네스코의 지원으로 우리나라의 산하를 찍으면서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한국의 산과 들은 참으로 아름답다. 정말 눈이 부실 지경이다. 그러나 한국의 도시들은 너무나 황량하다. 미안하지만, 한국의 도시들은 너무 볼품없어서 카메라를 들이대기가 민망하다.

한국의 도시들은 건물들도 너무 개성이 없이 지어졌지만 거기에 달린 간판들도 너무 무질서하고 너무 크다.

 

대체로 이런 투로 이야기 했던 것 같은데요. 유럽 사람답게 참 솔직하게 말한다 싶었지만, 살짝 기분이 나빴던 것도 사실이었지요. 그런 제 마음을 알았던지 그는 친절하게도 또 이렇게 마무리 코멘트를 해주었답니다.  다만, 한국의 절들은 정말 감동적이다. 자연에 녹아 든 절의 모습은 실로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실제로 백두대간을 따라서 헬기를 타고 사찰을 찍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모습을 다큐멘터리를 통해 보여주었습니다. 자연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 오래된 절의 모습은 자연 그 자체였습니다. 요즘은 절에서도 자연을 배제한 인공의 모습이 많이 발견되기도 합니다만, 우리 조상들이 만들어놓은 아름다운 건축기술을 보고 싶다면 여전히 절로 가야 한다는데 아무도 이의가 없을 겁니다.  

 

아무튼, 오늘 제 블로그에서 무지막지하게 큰 도시의 간판 때문에 눈을 버리신 분이 있다면 보상하는 의미에서 아름다운 한국의 건축물 사진을 하나 보여드리겠습니다. 바로 위에 있는 사진은 제가 엊그제 낙동강을 타고 내려오다 가송리 협곡을 지나 농암종택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긍구당입니다. 뒤에는 낙동강이 살짝 보일 겁니다.

 

아이고, 결국 마무리는 낙동강 타령이군요. 요즘 제가 낙동강에 풍덩 빠졌거든요. 금강산 가는 길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청량산으로 가는 가송협과 퇴계 오솔길 만은 못할 것이다. 왜냐? 거긴 낙동강이 없으니까….” 이건 그냥 제 말인데요. 믿기지 않으시면 한번 가보세요. 후회는 안 하실 겁니다.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

 

낙동강 천삼백 리 길을 걷는다

1. 낙동강의 고향, 태백산으로

 터미널에서 만난 간판속 비키니 아가씨들
낙동강 천삼백 리 도보기행에 참여하기 위해 먼저 구미에 들렀다. 여기서 <우리땅걷기> 회원인 초석님을 만나 함께 차를 타고 태백으로 향할 것이다. 일찍 서둘러 마산시외버스터미널에서 구미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는 새로 난 중부내륙고속도로를 시원하게 달렸다
. 성주IC를 빠져 나와 구미 방향으로 접어들자 오른편으로 드넓은 모래사장을 적시며 흐르는 강줄기가 보인다. 바로 낙동강이다. 감동이 밀려온다. , 언제쯤이면 우리는 이곳에 다다를 수 있을까.


구미종합터미널에 도착하니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았다
. 먼저 육개장으로 허기진 창자부터 달랬다. 그러고도 한 시간 반이 남았다. 어떻게 시간을 보내지? 생각하다 터미널 주변을 걸어서 구경하기로 했다.

 

터미널 바로 앞 도로에서 횡단보도를 건넜다. 그러자 끝도 보이지 않는 기다란 골목이 나타났다. 아마도 상업지역인 듯싶다. 그 골목길을 터덜거리며 걸었다. ? 그런데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큰 상권에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를 않다니 .

 

그런데 어느 순간 불현듯 좌우를 둘러본 나는 깜짝 놀랐다. 온통 벌거벗은 아가씨들이 건물 벽에서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아니 그냥 웃는 것이 아니라 유혹하고 있었다. 세상에…, 이곳은 유흥가였다.

골목길은 재어보지는 않았지만 수백 미터는 족히 넘을 성싶었다. 그리고 이런 거대한 골목길이 아래위로 서너 개가 더 있었고 바둑판처럼 이어져 있었다. 내가 너무 좁은 세상에서만 살다 온 것일까? 왜 나는 그 동안 이렇게 차려진 골목을 보지 못했던 것일까?

 

물론 마산이나 창원에도 유흥가는 존재한다. 인구 백만에 달하는 도시가 아무래도 구미에 비해 유흥산업이 뒤떨어질 리도 없을 것이다창원은 밤이면 불야성이 따로 없다. 서울사람들도 강남에 비해 쳐지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이니….

 

그런데도 나는 이런 곳은 처음이다. 끝도 없이 펼쳐진 환락의 거리 양 옆 대형간판에 비키니를 입고 뭇 사내들을 유혹하는 이렇듯 자극적인 거리는 실로 처음이다. 곧 땅거미가 지면 반짝이는 불빛과 더불어 사람의 숲으로 흥청거리게 될 터이다. 괜스레 이 길을 걷는 내가 민망스럽다.

 

문득 카메라 생각이 났다. 낙동강 기행을 위해 장만한지 오래지 않은 윤이 반지르르 흐르는 캐논450을 꺼내 들었다. 아직 조작이 서툴러 그냥 자동모드만 사용한다. 여기저기 셔터를 눌렀다. 저쪽 골목 각지에 위치한 24 슈퍼에서 아저씨가 나를 보며 빙긋이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할까? 혹시 감찰 나온 공무원? 그러나 등에 배낭을 매고있는 모습을 보고 그렇게 생각할리는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다시 터미널 앞으로 돌아왔다. 터미널 입구에서는 한 명의 거지가 구걸을 하고 있었다. 그는 말이 자유롭지 않은 지체장애자인 듯싶었다. 그는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바람 부는 터미널 입구에서 손을 벌리고 발음도 정확하지 않은 말투로 간절하게 흐느끼듯 말했다.

 

배거~ 언 만 배거~ ~ 언 만…”

 

그러나 백 원만을 간절하게 속삭이는 그의 부르튼 손에 쥐어지는 백 원짜리는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너무 바빴다. 분주한 행인들에게 부정확한 발음에다 흐느끼듯 속삭이는 힘없는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을 것 같았다.  

 

예로부터 선산은 선비의 고장이다. 중환이 택리지에서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서 나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서 난다!고 갈파한 바로 그곳이다. 선산군 구미면이었던 이곳은 국가산업단지로 개발되면서 구미시가 되고 선산은 이제 구미시의 일개 읍으로 전락했다.  

 

택리지가 극찬한 영남일선(嶺南一善) 선산은 이렇게 사라져 가는 것인가. 이리하여 멀리서 찾아온 객을 맞는 것은 선비들의 옹골찬 숨결 대신 얼굴에 한없이 미소를 머금은 비키니 입은 아가씨들이다.  

 

그러나 수백 리를 흘러온 낙동강은 여전히 선산을 휘감아 돌아가며 그 유장함을 뽐내고 있다. 자본주의의 밤 물결이 제 아무리 휘황한들 억만년을 지칠 줄 모르고 흘러온 낙동강에 견줄까. 낙동강은 이렇게 말하리라.

 

너희들의 노래도 단지 한때일 뿐이다. 너희들이 제아무리 교만을 떨어도 곧 세월에 정복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너희들은 모두 나에게로 올 것이다. 나는 너희들이 갖고 오는 온갖 더러운 것도 다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니 일찌감치 얄팍한 생각일랑 버리고 빨리 와서 나와 같이 생명의 찬가를 부르자.”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