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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중년의 유시민이 쓴 풋내기 유시민의 독서

『청춘의 독서』, 유시민 전 장관이 쓴 책이다. 유시민은 글을 참 잘 쓰는 사람이다. 내가 유시민이란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스물다섯쯤 되었을까, 그때 나는 공장노동자로 일하던 한창 나이의 젊은이였으며, 노조 활동가이기도 했다. 그리고 비밀지하조직의 일원이기도 했다. 참 우스운 것은, 그 비밀조직이란 것이 기껏 오늘날의 진보신당이나 민노당 정도의 이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결사체였다는 점이다.

청춘의 독서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유시민 (웅진지식하우스,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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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첫 작품, 항소이유서
 

아니 어쩌면 그들보다 어떤 면에선 더 유연한 사고의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라고도 할 수 있었는데, 그 조직에서 유시민이란 사람이 썼다는 <항소이유서>란 문건을 읽어보길 권했다. 비밀조직이었던 만큼 차라리 요구이거나 지시라고 해야 옳을 수도 있었던 그 권고를 나는 충실히 이행했다.


어쨌든 나는 무언가를 읽는 것을 세상의 낙으로 생각하던 사람이었으므로, 그 권고는 썩 마음에 내키는 것이었다. 더욱이 특별한 방향이나 지침도 없이 닥치는 대로, 마치 그저 무언가를 읽고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는 듯이 독서를 즐기던 내게 그런 권고는 위험한 바다를 떠도는 뱃사람들의 머리위에서 빛나는 북극성처럼 흡족한 것이었다.


오늘 다시 그 문건을 읽는다면 어떤 느낌일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당시 그 문건이 던져주는 힘과 감동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그의 삶은 그 문건에서 내가 느꼈던 힘과 감동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물론 그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하겠지만, 그가 존경하는 노무현과 그가 딛고 선 땅은 우리 같은 약자들이 묻힌 세상과는 달랐다.

그들이 권력을 쥐고 개혁을 추구하던 시대에도 여전히 노동자들은 해고와 구속에 시달렸고, 농민들은 고속도로를 점거하고 쌀을 불태우고 얼어붙은 배추를 추운 눈밭에 버렸다. 모든 진보세력들이 한미FTA에 반대하며 시위를 벌일 때, 노무현은 섭섭한 마음을 TV에 나와 가감 없이 드러내기도 했다. 유시민은 그 섭섭함의 대변자였다.


중년의 유시민이 쓴 『청춘의 독서』

그 유시민이 책을 냈다. 바로 <청춘의 독서>다. 그리고 나는 지금 대림자동차 정문 앞 ‘대량정리해고 반대 진보신당 천막농성장’에서 이 책을 읽고 있는 중이다. 역시 유시민의 글은 명문이다. 세월의 파고를 넘어온 그의 글에선, 이제 그가 스스로 ‘풋내기’였다고 고백한 젊은 시절의 위험한 선언보다는 차분한 성찰이 돋보인다. 그럼에도 현실주의자가 된 그의 글 곳곳에선 여전히 ‘풋내기’ 이상주의자의 면모가 스며있다.


그게 사랑스럽다. 나는 아직 그의 책을 다 읽지 않았다. 겨우 첫 장만을 읽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서둘러 이 서평을 쓰려는 이유는 그 첫 장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아픔을 느꼈기 때문이다. 풋내기 고교생 유시민이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읽었을 때 받았던 충격과 감동은 세월이 흘러 현실주의자가 된 중년의 유시민의 눈으로 <청춘의 독서> 첫 장에서 재해석된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는 살인자다. 그는 도끼로 전당포 노파를 죽였으며, 예정에 없이 나타난 배다른 노파의 여동생 리자베따마저 죽였다. 그의 이 엽기적인 살인은 그러나 ‘초인론’이란 이름으로 포장된다. 말하자면, 선한 목적을 위한 악한 수단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전당포 노파 알료나는 악인이었다. 그녀는 아마도 세익스피어가 묘사한 베니스의 샤일록 같은 존재였을 터이다.


게다가 노파는 배다른 여동생 리자베따를 하녀처럼 부려먹었고 그녀가 부업을 해 번 돈까지 빼앗았다. 이런 이야기를 어느 술집에서 우연히 엿듣게 된 라스꼴리니꼬프는 전당포  노파를 죽이고 돈을 빼앗기로 결심하고, 이를 결행한다. 그는 ‘악을 응징하고 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악행을 택한 셈이다. 그리고 유시민이 표현한바, 이 ‘초인정신’은 후대에 스탈린과 히틀러에 의해 현실세계에서 발현되었다. 


세상은 비범한 사람들에 의해 구원될 수 있을까

유시민에 의하면 라스꼴리니꼬프처럼 스탈린, 히틀러는 ‘비범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인류를 구원하려는 신념에 입각해 모든 종류의 폭력을 행사할 권리를 부여받은, 혹은 부여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도스토옙스키의 라스꼴리니꼬프가 이들 ‘비범한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끔찍한 정신적 번민과 고통에 시달렸다는 점이다. 반대로 스탈린과 히틀러, 이들의 지시를 받아 대량학살을 저질렀던 수많은 부하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런 양심적 가책의 증거도 찾을 수 없는 그들이 그러한 죄악을 저지른 결과 어떤 선한 목적도 이루지 못했다는 증거도 너무나 명백하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라고 믿었던 ‘비범한 사람들’의 실패한 악행을 통해 ‘평범한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선이라고 매듭짓는 유시민의 결론은 유려한 문체와 더불어 빛난다. “선한 목적은 선한 방법으로만 이룰 수 있다.” 누가 이 마지막 명제에 반박할 수 있을까.


자, 그런데 나는 이 유려하게 빛나는 첫 장을 읽으며 왜 진한 아픔을 느꼈는가. 그것은 아직도 여전히 목적을 위해 악한 수단이 정당화되는 악행의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다는 자각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악행에 저항하는 모든 수단이 역으로 악으로 간주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현실 때문이다. 애석하게도 유시민은 여기에 대해선 함구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자기 성찰로 성숙한 현실주의자 유시민이 아니라 ‘풋내기’ 유시민이었다면 어땠을까?


이런 생각들이 든 것은 대림차 정문 앞 농성장에서 한 해고노동자의 피맺힌 절규를 들었을 때였다. 그는 “악질적인 대림자본의 정리해고에 맞서 우리는 더 악해져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저들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정리해고 되어 돌아갈 세상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디에 회사에서 쫓겨난 우리를 따뜻이 맞아줄 세상이 있습니까. 여러분, 저들이 악랄하면 우리는 그보다 더 악해져야 살 수 있습니다.” 


풋내기 유시민이었다면?
정리해고와 비범한 자들의 대량학살을 어떻게 비교했을까


‘기업의 입장’이란 이름 아래 자행되는 대량 정리해고는 대량학살행위에 다름 아니다. 과연 ‘풋내기’ 시절의 유시민이었다면 이런 사태가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에 무어라고 말할까. 자기성찰이 부족한(!) 젊은 날의 그였다면 대량학살에 다름 아닌 정리해고를 남발하는 이 나라 ‘기업의 입장’이야말로 처단 받아 마땅한 노파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아니, 성숙한 현실주의자 유시민이라도 마찬가지다.

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기업의 입장’은 스탈린과 히틀러 같은 비범한 사람들이 저지르는 악행이며, 결코 선한 목적조차도 이룰 수 없다고 외쳐야 마땅하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그 비범한 사람들의 악행이 멈추지 않는 제도화된 악의 나라라고 외쳐야 마땅하다. 그러나 성숙한 현실주의자 유시민은 그저 선한 목적은 선한 방법으로만 이룰 수 있다고 반박할 수 없는 옳은 말만을 할 뿐이다.


아마도 ‘풋내기’ 유시민이라면 “라스꼴리니꼬프의 초인론으로 현실화된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체주의에 맞서 ‘평범한 사람들’에게 동등한 인권과 참정권을 부여하고, 그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에게 의사결정권을 위임하는 민주주의 체제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따위의 말은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신 그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이기적인 자기 목적을 위해 악행을 일삼는 자본에 맞서 우리도 스스로 악해져야만 합니다.”

19세기의 도스토옙스키는 민주주의가 승리하는 20세기 세계사를 목격하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풋내기’ 시절의 이상이 퇴색한 유시민은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보지 못하는 슬픔이 있는 것이다. 현실주의자가 된 유시민이 현실을 목격하지 못하는 아이러니가 있지만, 그의 글 곳곳에 나타나는 이상주의의 그림자들은 아직 그가 ‘풋내기’처럼 맑은 영혼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게 사랑스럽다. 그래서 나는 그의 『청춘의 독서』를 꼼꼼히 읽어볼 참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각 장마다 모두 서평을 달 생각이다.

<…………>

다시 느끼는 것이지만, 역시 그는 글을 잘 쓴다. 대충 훑어본 『청춘의 독서』에는 몇 가지 논쟁적 지점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판적 의식을 잃지 않고 잘 읽는다면, 우리의 정신세계가 한없이 넓어질 것이라는 기대가 이 책속에는 있다. 유시민은 국회의원도 했고 장관도 했지만, 그러나 어떤 잘난 직업보다도 그에겐 뛰어난 글쟁이란 이름이 어울린다. 그리고 그게 가장 훌륭하다. 아마 『청춘의 독서』가 그걸 증명해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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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도서는 Daum책과 TISTORY가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