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김춘추의 지략이 빛난 하루였다. <선덕여왕>이 재미를 보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진패/허패 놀이다. 이미 덕만이 허패(일식이 없다)를 가장한 진패(일식이 있다)를 쓴 적이 있다. 김춘추도 역시 허패와 진패를 병용하며 미실 진영을 혼란에 빠뜨렸다. 이번에 김춘추가 던진 패는 허패다. 김춘추는 미실 편에 투항하는 척 하며 미실을 안심시켰다. 그리고 미실과 거래를 시도한 것이다.
 

김춘추가 미실파에 던진 패는 내분을 노린 허패 

덕만공주가 스스로 부군이 되어 왕이 되겠다는 선언은 미실 진영에 꽤 큰 혼란을 가져왔다. 전대미문의 선언이었지만, 있을 수 없는 일도 아니었다. 이미 신라는 사실상 미실이란 여인이 집권하고 있는 나라가 아니던가. 게다가 덕만공주는 성골이다. 성골만이 왕통을 계승할 수 있다는 불문율에 따로 저항할 명분도 없다.

여기에 춘추가 패를 던진 것이다. 춘추는 미실을 만나 자기를 부군으로 밀어달라고 말한다. 그럼 미실의 걱정거리 하나가 사라진다. 성골인 덕만공주가 스스로 부군이 되겠다고 한 이상 미실 일파는 권력을 잃게 될 위험을 피할 수 없다. 비록 상대등과 병부령이 살아있다고는 하나 영원한 것은 없다. 덕만공주는 강적이다. 그 사실을 모두들 잘 알고 있다. 

미실은 춘추의 제안이 매우 흡족했을 것이다. 춘추는 미실이 몰아낸 진지왕의 손자이기도 하지만, 진평왕의 외손자이기도 하다. 덕만공주를 제외한다면 진평왕의 가장 가까운 혈손이다. 명분은 충분하다. 그러나 그보다 미실을 기쁘게 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바로 덕만공주 세력의 내분이었다. 

춘추가 비록 미실 일파와 친하게 지내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는 역시 천명공주의 아들이며 덕만공주의 조카다. 천명과 덕만은 개양성이 두 개로 갈라지며 북두의 일곱별이 여덟이 되던 날 태어난 쌍둥이다. 그러니 천명과 덕만은 공동운명체다. 천명의 아들이 덕만과 대립하는 것은 곧 분열을 의미하며 이는 덕만공주 진영에 치명적 타격이 될 것이다. 

미실은 그걸 노렸다. 한편으론 덕만이 스스로 왕위에 올라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지는 것을 막고, 다른 한편 상대 진영을 분열시켜 어부지리를 얻는 것, 그게 미실이 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실은 진평왕과 신료들 앞에서 당당하게 “골품제도는 천박하고 야만적인 제도요” 라고 일갈하는 춘추를 보며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덕만과 춘추의 존재를 깨달은 미실, 그러나 조용히 물러나진 않는다

미실은 춘추를 보며 덕만공주를 떠올렸다. 이들은 공통점이 있다. 미실이 한 번도 넘지 못한 벽을 너무나 가볍게 넘어버림으로써 뼈아픈 슬픔을 안겼다는 점. 그녀는 평생을 권력의 정상에서 버텨왔지만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제도와 관습의 벽 앞에서 늘 좌절감을 맛보았던 것이 그녀였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그걸 너무나 쉽게 무너뜨려버린 것이다.

덕만과 미실의 마지막 대결이 볼 만하겠다.

미실은 순간 인생이 허무함을 느꼈을 것이다. 이토록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도 여자도 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골품의 벽도 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왜 안 했던 것일까? 덕만과 춘추가 진정 나누어진 두 개양성의 각각의 주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이제 자신도 늙었음을, 그만 세상에서 물러나야할 때가 되었음을 뼈저리게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세종공과 설원공이 서로 물고 뜯으며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도 모른 척 서라벌을 떠나 외유를 즐기고 있다. 차분하게 마치 인생을 정리하는 듯이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은퇴를 결심한 노정객의 모습이었다. 이제 더 이상 내가 이 세상에서 할 일은 없다. 그러나 아니었다.

“나는 절대 죽지 않아. 왜? 나는 미실이니까.” 이게 예고편에서 미실이 보여준 대답이었다. 덕만공주가 춘추에게 말한다. “너와 나는 모두 실패했어. 우린 둘 다 실패한 거야. 네가 무얼 했는지 알겠니? 잠자던 용을 깨운 거야.” 마치 무덤처럼 고요한 적막을 가르며 솟아오르는 서릿발 같은 광기, 이게 바로 미실의 힘 아니던가? 

그러나 덕만공주가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이 있다. 미실은 덕만공주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춘추도. 그녀는 이들이 미래의 신라를 이끌어갈 기둥임을 알게 되었다. 또 이 두 사람을 통해 그녀의 인생이 얼마나 부질없었던 것인지도 알았다. 이제 한 시대가 갔음도 깨달았다. 그러나 동시에 새로운 전의가 불타오른다.  

김춘추, 잠자던 용 미실을 깨운 것은 의도한 실수?  

젊은 시절의 혈기가 되살아남도 느꼈을 것이다. 미실은 여전히 가장 강력한 진골왕족이다. 그럼 덕만공주가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은 무엇인가? 바로 미실의 반격으로 얻게 될 덕만과 춘추의 동맹이다. 잠자던 용 미실과의 일대 회전은 쇠사슬보다 튼튼한 두 사람의 동맹을 요구한다. 이 동맹으로 덕만은 최고의 전략가를, 춘추는 든든한 미래의 후원자를 얻게 되는 것이다.

세상 모든 이치가 그러하지 않던가. 음이 있어야 양이 있는 법이다. 빛은 어둠을 뚫고 나온다. 강력한 적이야말로 아군의 강고한 연대의 원천이다. 그러나 미실이란 존재는 덕만공주보다는 김춘추에게 더욱 긴요한 존재인 듯하다. 덕만은 성골로서 어차피 왕이 될 것이지만, 쫓겨난 진지왕의 손자인 춘추에겐 신흥세력을 형성할 절호의 기회다.
 
그러고 보면 내일 덕만이 춘추에게 하기로 돼있는 말은 실은 틀린 것이다. “넌 실패했어. 네가 무얼 했는지 알겠니? 잠자던 용을 깨운 거야.” 아마 춘추는 속으로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른다. ‘이모, 사실은 내가 일부러 잠자던 용을 깨운 거예요. 난 퇴출된 왕족이에요. 세력도 없어요. 혼돈은 내게 기회죠. 이번 기회에 난 이모에게 최고의 공신이 될 거에요.’

마지막으로 춘추가 용춘공에게 한 말을 되새기며 글을 마무리하기로 하자. “숙부, 나는 분명 미실보다 훨씬 오래 살 거예요. (그러니 저와 동맹을 맺는 게 숙부에게도 좋지 않겠어요?)” 춘추가 일부러 잠자던 용을 깨운 것인지, 실수로 깨운 것인지는 아직은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춘추는 미실은 물론 덕만공주보다도 오래 살 것이라는 사실이다.
Posted by 파비 정부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