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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2.22 맞아떨어지는 예언이 하나도 없어 by 파비 정부권 (2)

머릿속이 온통 시커먼 연기에 뒤덮인 듯 혼란스럽다. 마치 깜깜한 터널 속을 홀로 걷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아무 생각도 안 난다. 뭔가 일을 해야 하는데 막막하고 답답하다. 그래서 잠시 정신을 돌려 다른 생각을 좀 해보기로 한다.

일전에 심심풀이땅콩으로 <트로야전쟁>에 대해 썼던 적이 있다. 아마도 트로이가 멸망한 원인은 왕따 당한 한 여신의 질투심 때문이었던 것으로 이야기했다. 사소한 불화 하나가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야기했는가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는 사실은 또 얼마나 많은 불합리가 내포돼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썼다. 우선 나이에 대한 이야기였다. 트로이 멸망의 원인이 된 불화는 아킬레우스의 부모인 펠레우스와 테티스의 결혼식에서 비롯됐다. 에리스가 던진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란 문구가 새겨진 황금사과를 놓고 헤라와 아테나와 아프로디테가 다투다 결판이 나지 않자 목동 파리스에게 달려가 판결을 구하는데 그때 아무래도 파리스는 스무 살 정도는 되었을 거란 것이다. 그리고 이때 아킬레우스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는 것.

여기에 대한 의문은 나중에—아전인수식으로—해소됐다. 신들의 세계의 시간은 인간세계의 시간과 달라서 이들이 잠깐 황금사과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냐를 놓고 논쟁하는 사이 아킬레우스도 태어나고, 파리스는 불길한 신탁에 따라 프리아모스 왕이 숲에 버리도록 지시했지만 늑대들에게 키워져 이데 산의 목동이 되었다.

그럼에도 이 오래된 사건이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여전한 의문들이 있다. 트로이 최고의 용사 헥토르가 죽은 후 아킬레우스 역시 아폴론의 사주를 받은 파리스의 독화살에 아킬레스건을 맞고 죽음을 맞게 된다. 그러자 그리스 진영은 큰 혼란에 빠진다. 아킬레우스 없이 어떻게 견고한 트로이 성을 공략할 것인가?

이때 “오직 헤라클레스의 활과 화살로써만 트로이는 정복될 수 있다”는 예언이 제출되고—내가 제출되었다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이 전설적인 이야기를 듣노라면 꼭 무슨 사건이 생겨야만 예언자의 입이 열리더라는 것이다—그 활과 화살을 갖고 있는 이는 필록테테스였던 것이다.

필록테테스는 원래 트로이로 향하는 그리스 원정군의 일원이었다. 그도 역시 스파르타의 공주 헬레네의 구혼자 중 한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불행하게도 렘노스 섬에서 독사에게 물려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이에 오디세우스를 비롯한 그리스 장수들은 그를 렘노스섬에 버리고 갈 것을 주장하고 결국 그는 섬에 홀로 버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의논 끝에 그리스의 장수들이 렘노스 섬으로 달려가 필록테테스를 설득했겠지만 뭐 잘 될 턱이 있겠어요? 10년 동안이나 섬에 버려져 무서운 독과 싸우며 살아남은 자의 원한이 얼마나 컸겠느냐 이 말이죠. 특히 오디세우스를 향한 저주는 남달랐을 테죠.

그런데 ‘헤라클레스의 활과 화살’보다 앞서서 ‘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옵톨레모스가 있어야만 트로이를 함락시킬 수 있다’는 예언이 있었던 걸 앞의 이야기에서 했었죠? 그리하여 네옵톨레모스를 데려왔지만 트로이는 요지부동. 그래서 이번에 헤라클레스의 활과 화살에 대한 예언까지 나온 겁니다.

필록테테스를 설득하기 위한 사자들에는 네옵톨레모스도 끼어있었습니다. 오디세우스 등 다른 그리스 장수들은 믿지 않았지만 필록테테스는 아킬레우스에 대한 존경심과 믿음이 워낙 강했기에 네옵톨레모스의 간청을 들어주기로 작정하고 트로이로 가게 됩니다.

다들 아시는 이야기지만, 헤라클레스의 활과 화살을 확보했음에도 그리스 군은 트로이 성을 어떻게 하지 못했습니다. 피록테테스의 화살에 파리스가 맞아 죽는 전과가 있긴 했었죠. 하지만 그 얄팍한 바람둥이 파리스 하나 죽는 게 무슨 대수였을까요? 트로이에는 여전히 아이네아스를 비롯한 용장들이 버티고 있었으니까요.

결국 트로이를 함락시킨 것은 아킬레스의 무력도 헤라클레스의 활과 화살도 아닌 목마였습니다. 트로이 인들의 자만심과 방심이 결국 트로이를 영원히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했던 거지요.

아무튼, 아주 오랜 옛날,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어린 마음에도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아니, 뭐야. 도대체 맞아떨어지는 예언이 하나도 없잖아.”

아, 그런데 써놓은 글을 다시 읽어보니 아직 정신 못 차린 거 같다. 여러분은 뭐 이상한 거 안 느껴지시나요? ㅠㅠ

Posted by 파비 정부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