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크'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07.30 낙동강 도보길에 만난 탱크와 자주포 by 파비 정부권 (11)
  2. 2008.10.27 10·26의 추억, 부마항쟁과 유신의 종말 by 파비 정부권 (5)
이곳은 우리가 낙동강 5차 도보기행을 위해 베이스캠프로 준비한 구미청소년수련원입니다. 마침 휴가철이라 낙동강 일대의 숙박시설이 꽉 차는 바람에 이곳을 잡았는데 시설이 엉망이었습니다. 하루에 30km를 걸어야 하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샤워시설이었지만,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첫날밤은 대구 모 교회의 캠프 때문에 밤새도록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습니다. 내가 도착해 아래 사진을 찍은 시간이 9시 무렵인데, 이미 한창이었던 집회는 밤 12시가 넘도록 "아버지~ 아버지~"를 외치며 울기도 하고 하는 바람에 정말 힘들었습니다. 거의 새벽 2시가 되어 기도가 끝났지만, 이번에 아이들이 새벽5시 가까이까지 복도를 뛰어다니며 노는 통에 완전 뜬눈으로 밤을 새웠답니다.

기도도 좋지만 이왕 아이들 여름방학을 이용해 캠프를 왔으면 기도는 짧게 하고 재미있게 노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신나게 놀게 해주고 일찍 재우는게 옳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람 사는 방법도 믿는 방법도 가지가지라지만 이건 너무 하다 싶었습니다. 그리고 기도는 왜 조용히 하면 안 되는 것일까요? 마음 속으로 조용히 신을 찬미하면 신도 좋아 하실텐데 말입니다.

신이 귀가 먹은 것도 아니고 너무 시끄럽게 굴면 싫어할 것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하긴 이건 제가 간섭할 사항이 아니로군요.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민폐가 되는 일은 가급적 삼가는 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만… 그런데 제가 시끄러운 기도소리에 잠 못드는 밤을 괴로워하며 마당에 나와 있자니 희한한 광고썬팅을 한 차가 한 대 들어왔습니다. 

아마도 그 교회 팀의 일원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광고 문구가 너무 이상했습니다. VIP경호, 행사경호, 주주총회, 노사대립, 개인경호… 제가 이해할 수 있는 건 개인경호와 VIP경호뿐이었습니다. 주주총회를 하고 행사를 하는데 무슨 경호가 필요하다는 건지, 파업현장에 경호회사 요원들을 투입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보긴 했지만 막상 이렇게 광고썬팅을 보니 섬뜩하군요. 무섭습니다.


어렵게 새벽 3시가 거의 다 되어 잠을 청하고 다음날 새벽 5시 반에 기상해서 아침을 먹고 낙동강 도보기행 길을 떠났습니다. 이번 도보기행의 시작점은 상주 강창나루입니다. 강창나루에서 시작해 토진나루를 지나고 낙동나루를 거쳐 구미시 해평면(청소년수련원이 있는 곳)까지 걷게 됩니다.

옛날 이곳 강창나루에는 소금배가 드나들었던 모양입니다. 강창나루 나들목에 소금배란 간판을 단 식당이 있습니다.


나루배로 건너던 강에는 이제 배는 사라지고 대신 다리가 길게 낙동강을 가로지릅니다.


다리위에서 찍은 낙동강의 모습입니다. 강 중간에 모래톱이 섬을 만들었습니다.


낙동강둑길로 올라서니 고추잠자리들(고추잠자린지 배추잠자린지는 알 수 없지만 하여간 잠자리들)이 떼를 지어 축하비행을 해줍니다.


강둑으로 나가려면 이렇게 논둑을 가로질러 가야 합니다. 미안했지만, 농부 아저씨들은 우리를 보고 밝게 웃으며 고생이 많다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참으로 느낀 바이지만, 태백, 봉화, 안동, 예천, 상주를 거쳐 오는 동안 정말 인심들이 좋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풋풋한 경북 북부지방 사투리는 결코 사람을 밀어내는 법이 없었답니다.  


이슬을 머금은 달맞이꽃… 밤새 활짝 가슴을 벌려 달을 애무했을 꽃들은 이제 아침을 맞아 몸을 오무리고 잠을 청하려나 봅니다.


토진나루에 닿았습니다. 이곳에서 모두들 휴식을 취했습니다.


토진나루 위쪽에서 강물은 줄기차게 흘러내려 오고…


나루터를 지난 강물은 우리가 쉬든말든 지치지 않고 흐릅니다. 정말 유장하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우리는 강창나루를 지나 토진나루로 오는 길에 이렇게 담배 밭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 멀리 미류나무 옆에 뭔가 심상찮은 물건이 보입니다. 뭘까요?


가까이 다가가 보았더니 155미리 자주포와 탱크가 서 있었습니다. 누군가 물었습니다. "혹시 저거 6·25 때 쓰다가 저렇게 버려진 거 아닐까요?" 그는 여자 회원이었습니다. 그러자 옆에 가던 남자 회원이 말했습니다. "에이~ 그때는 저런 대포나 탱크도 없었네. 저건 최근에 쓰던 걸 여기다 갖다 놓은 거야. 그런데 저걸 왜 여기다 전시해 놓았을까?"

글쎄 아무리 생각해도 거기에 대한 답은 알 수 없었습니다. 저 흉칙한 무기들의 오른편으로는 낙동강이 흐르고 그 옆과 앞과 뒤는 온통 논과 밭 뿐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말했습니다. "저거 고철로 팔아먹으면 돈 꽤 되겠는데!" 그러자 다시 옆에서 누군가 말을 받았습니다. "고철로 팔어먹고 싶어도 저거 끌고 갈 차가 들어올 길이 없어요, 여기는."


155미리 자주포와 탱크와 한대의 기관총(아마 캬라바 50인 듯)은 우리가 걸어온 북쪽 하늘을 노려보고 있는 모습이 왠지 외로워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기를 보고 외롭게 보인다는 저도 좀 이상하긴 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외로워 보이지 않나요?


무기를 지나 조금 내려오니 사람들이 들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농사일에 바쁜 사람들을 보니 기분이 풀립니다. 대포와 탱크와 기관총 옆에서도 농촌 사람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그저 평화롭기만 합니다. 트랙터가 바쁘게 땅을 갈고 있습니다. 방금 전에 보았던 탱크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평화로움입니다.
 

동네 주민들이 지나가다가 너무 반갑다는 듯 소리를 지르며 막 손을 흔듭니다. 하하~ 역시 경북북부지방 사투리를 쓰면서… "오데 가니껴~" "예, 낙동강 따라 걷습니다. 태백에서 부산까지 갑니다." "아이고~ 차말로 고생이 많게니더." 우리 일행과 헤어진 이분들도 잠시 후면 들에 세워져 하늘을 노려보고 서있는 자주포와 탱크와 기관총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도 이렇게 똑같이 반갑다고 인사할까요? "거기 뭐 한다꼬 서 있는교? 하루 젱일 땡비테 서 있을라카므 차말로 고생이 많겠니더~ 누가 그러라꼬 시키던고? 차말로 얄궂데이~"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

곧 10·26사태 29주년이다. 한 사람이 비참하게 죽은 날을 무엇이 기념할 것이 있어서 이런 제목까지 달고 추억하겠냐마는 그래도 이맘때만 되면 아련한 기억이 향수와 함께 밀려드는 걸 어쩔 수 없다. 산골에서의 어린 시절 추억과 더불어 그곳을 마지막 떠나기 전에 일어났던 유신독재의 종말이라는 시대적 사건은 나에게 영원히 잊혀 질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

1979년 10월 27일,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 일찍 학교에 갔다. 매일 아침마다 3학년 교실에 문제풀이 시험지를 돌려야 하는 게 내 일이었다. 교무실에 가면 전날 밤에 등사된 문제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산골이라 고입을 앞둔 중학교 3학년이면서도 도시처럼 학원이나 과외 같은 걸 받을 수 없었던 사정을 고려한 선생님들의 배려였다.

그날도 어김없이 나는 문제지를 돌리기 위해 아침 일찍 등교했다. 그런데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나보다 먼저 온 녀석이 있었다. 기종이란 친구 녀석이 책상에 엎드려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반 부실장이기도 한 이 친구는 공부도 매우 잘하는 똑똑한 녀석이었다. 도가사상에 심취해서 늘 가방에 장자를 넣고 다니던 친구였다. 그래서 내가 “어이, 도사님.” 하며 놀리곤 했었다.

만주군 장교 시절 박정희/위키미디어

나보다 먼저 온 것도 의외였지만, 어깨를 흔들며 흐느끼는 친구를 보니 순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난처하다는 듯이 녀석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야 기종아, 도대체 왜 그러나.”

내가 물어보자 녀석은 더 슬프다는 듯이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어~어엉 어엉 엉~ 각하께~서 돌아~가~셨~다~.”

“뭐라고?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라.”

나는 이 친구가 정녕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장난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엔 통곡하며 우는 모습과 너무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며 다시 물었던 것이다.

“대통령 각하께서 어엉 엉~ 서거 하셨단다.”

순간 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이게 도대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일어날 수도 없고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친구는 진정 각하의 서거가 애통해 우는 것 같았지만, 나는 전쟁을 생각했다. 국가원수가 죽었다는 슬픔보다 당장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먼저 나를 엄습했다.

잠시 후 교무실에 불려간 나는 급히 비상조회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리고 그때서야 나는 모든 것이 사실임을 깨달았다. 교단에 올라서신 교장선생님은 운동장에 집결한 학생들에게 슬픈 소식을 전했다. 이 자리에는 예외적으로 학교 육성회장인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도 참석했다. 많은 학생들이 슬픔에 잠겨 고개를 떨어뜨리고 눈물을 흘렸다.

그때 나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눈물을 흘리는 저 많은 학생들은 모두 내 친구 기종이처럼 정말 애통해서 우는 것일까? 아니면 나처럼 전쟁의 불안으로 몸서리치는 공포에 떠는 아이들도 있는 것일까? 그날 아침은 학교 뿐 아니라 온 나라 온 천지가 비통한 슬픔으로 눈물바다가 된 것만 같았다.

1966년 각국 정상과 함께한 박정희 대통령/위키미디어공용


나는 10·26사태가 나기 불과 며칠 전에 부산에 다녀 온 적이 있다. 부산에 있는 모 고등학교에서 실시하는 특차모집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서였다. 기차를 탔다. 차창 밖에서 달려드는 시원한 바람과 함께 밀려오는 낯설고 신기한 풍경들에 나는 마음을 흠뻑 빼앗겼다. 읍내에도 몇 번 가보지 못한 산골 소년에겐 시험을 치러 간다는 부담감조차 까맣게 잊을 만큼 화려한 외출이었다. 곧 있으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가는 대도시 부산이다.

그런데 부산역에 내린 나를 맨 먼저 반겨주는 것은 줄지어 늘어선 군인들과 탱크들이었다. 난생 처음 본 육중한 탱크는 철모르는 어린나이에도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마음을 졸이며 버스를 타고 해운대로 향했다. 여인숙을 잡고 저녁을 먹은 다음 내일 시험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그러나 역시 부담 탓인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이 잠이 오지 않았다.

여인숙을 나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해운대 백사장을 돌아 동백섬 쪽으로 산책을 나갔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머리를 식혀주었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에 이끌려 나는 계단을 따라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어둠 속에서 갯바위에 기대앉아 부서지는 파도를 지켜보고 있는 인어상도 보였다. 나도 그 모양으로 바위 한쪽을 차지하고 저 멀리 깜깜한 수평선 너머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부산에 진주한 계엄군/신동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환한 서치라이트 불빛이 나를 사로잡았다. 연이어 우레와 같은 함성이 들렸다.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소스라치게 놀란 나는 무슨 일인지 확인할 새도 없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절며 시키는 대로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은 몹시 가파르고 멀었다. 다 올라오니 내려올 땐 보지 못했던 철책이 양쪽으로 늘어서 있었고 계단 입구에는 문이 하나 있었다. 그곳에서 총을 겨누고 있던 군인들이 나를 보며 말했다.

“너, 아직 어린 학생이구나. 몇 학년이냐? 이런데 들어오면 안 되는 거 모른단 말이냐?”

너무나 놀란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마 대충 중학교 3학년이며, 입시를 위해 멀리 시골에서 왔고, 여기 들어오면 안 되는 것인지는 몰랐으며, 문이 열려있기에 내려가 본 것뿐이고, 내일 시험도 치러가야 하니 한 번만 용서해주시면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빌었던 것 같다. 다행히 그 군인은 마음씨가 좋아보여서 시골에서 온 어린 학생이라 예외적으로 한 번 봐줄 테니 어서 가서 자라고 했다.

놀란 가슴을 안고 여인숙에 돌아온 나는 부랴부랴 잠을 청하고 다음날 일찍 일어나 바로 가까운 곳에 있던 학교에 가서 시험을 쳤다. 그리고 나는 다음 해부터 3년간 그 학교를 다녔다. 나중에 그곳에 다시 가보았는데, 그곳은 늘 사람들이 붐비는 관광지였다. 그리고 인어상 주변에도 밤낮없이 사람들이 파도도 감상하고 사진도 찍으며 놀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때는 부마항쟁으로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시내에 계엄군대가 진주해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해운대 해수욕장과 동백섬 일원의 해안선에도 무장경계가 실시된 모양이었다. 산골로 돌아온 나는 다시 일상에 파묻혀 도시에서의 긴박했던 순간은 어느덧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10월 27일 아침에 느닷없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우리는 하교 길에 면사무소에 긴급히 마련된 분향소에 들러 다시 도무지 믿을 수 없고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다는 듯 눈물을 흘렸다. 면사무소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모여든 동네 어른들로 붐비고 있었다. 비명에 죽은 박정희 대통령이 만주군관학교에 가기 전, 우리 마을에서 가까운 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잠깐 잡았던 적이 있다. 그래서 여느 지역에 비해 슬픔이 배는 더 했으리라.

국장이 끝나고 채 열흘이 가기 전에 바로 그 국민학교 교정에 봄에나 피어야 할 꽃이 피었다고 했다. 요즘은 기상이변으로 가끔 있는 일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그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사람들은 모두 하늘이 노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수군거렸다. 이 이야기는 신문기자에게도 전해져 세상에 알려졌다고 했다.

10·26이 나던 날과 다음날에도 나는 이길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오갔다.


나도 그때는 하늘이 노해서 그런 것인 줄 알고 다시 한 번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순진하게도 산골에서 ‘유신교육의 해’ ‘근면 자조 협동’ 같은 선전문구를 건물 이마에 매단 학교에 다니고, 냇가에서 멱 감으며 놀다가 지나가는 기차를 향해 허옇게 고추를 내놓은 채 학교에서 배운 대로 일렬로 늘어서서 마치 비오는 날 승용차 와이퍼가 좌우로 힘차게 흔들리 듯 질서정연하게 손을 흔들던 산골소년도 이제는 안다.

하늘이 노해서 꽃이 핀 것이 아니라, 국민이 노해서 유신철권통치로 마음껏 권력을 휘두르던 독재자가 비명에 진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세월은 인간에게 망각이란 선물을 주어 슬픈 과거를 딛고 미래를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지만, 또한 역사는 끊임없는 비판과 각성의 바늘을 주어 잘못된 과거를 극복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열어준다.

코스모스가 바람에 몸을 흔드는 계절이 오면 나는 의례히 30여 년 전 그때를 기억한다.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기억의 편린을 더듬으며 기종이 녀석 생각도 한다. 그 친구는 지금쯤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늘 장자를 가방에 넣고 다니며 대통령의 죽음을 자기 부모의 일처럼 애통해하던 감성이 풍부하던 그 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을 꺼내보니 다시금 그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다. 

2008. 10. 23.  파비

습지와 인간
카테고리 시/에세이/기행
지은이 김훤주 (산지니,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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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파비 정부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