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0.03.06 추노, 좌의정 이경식은 중도주의자? by 파비 정부권 (4)
  2. 2009.05.18 황석영의 MB 중도론, 차라리 고맙다 by 파비 정부권 (3)
"원손을 풀어주자는 것도 충심이요, 그 반대도 충심 아닙니까?
이제 그만 전교를 내리시어 정국의 혼란을 바로잡아주시길 간언하나이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가장 즐겨 쓰는 표현 중에 중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도, 참 좋은 말입니다. 이쪽에 치우치지도 않고 저쪽에 치우치지도 않는다는 뜻이겠죠. "나는 아주 공정하다!" 말하자면 이런 따위의 자화자찬인 것입니다. 중도를 잘못 해석하면 자칫 박쥐같은 회색주의자로 오해될 수도 있지만, 현실에서 이 중도는 매우 매력적인 존재입니다. 

김응수 만큼 이경식 역에 잘 어울리는 사람도 드물어 보인다. 그를 보면 진짜 간교한 사람의 참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중도주의자 이경식?

바로 이런 중도주의자가 드라마 <추노>에도 있습니다. 권력의 실질을 잡고 있는 좌의정 이경식입니다. 그가 잡고 있는 권력의 기반은 어심입니다. 그는 어심을 잘 읽습니다. 어쩌면 어심을 만들고자 하는 그의 공작이 성공한 때문에 임금의 마음을 미리 알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어심을 잘 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조정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질 때면 조용히 듣고 있던 그는 논쟁이 최고조에 달할 즈음 임금에게 늘 이렇게 간하지요. "이 말도 충심이고 저 말도 충심인 바, 그만 전교를 내려 주시지요." 17부에서도 이런 장면이 등장했습니다. 물소뿔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르게 되자 조정에선 당파 간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친청파는 원손의 유배를 해제하고 청과의 교역을 재개해야 한다고 하고, 반청파는 청에 굴복해 원손을 사면하는 것은 굴욕외교라고 주장합니다. 이때도 역시 좌의정 이경식이 결론을 내리지요. "전하, 원손의 사면을 주장함도 충심이요 그 반대 역시 충심 아닙니까? 전교를 내리시어 정국의 혼란을 바로 잡아주시기를 간언하나이다." 

임금이 어떤 전교를 내렸는지에 대해선 드라마에서 명확한 언급이 없습니다. 다만, 다음에 이어지는 이경식과 박종수의 대화를 통해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선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박종수는 이경식의 수하인데 형조에 무시로 드나드는 걸로 보아 형조판서나 참판쯤 되는 걸로 보입니다만, 확실하게 그의 신분을 보여준 예는 없습니다. 

까메오 비슷한 인조역의 김갑수. 역시 음흉한 인물이다. 김갑수와 김응수, 이들이 아니라면 누가 이 역할들을 소화할 수 있었을까?


도대체 어심이란 게 무얼까

"물소뿔 가격이 세 배 이상 뛰었고 곧 열 배 이상 폭등할 것이 자명한데, 원손을 사면하고 교역을 풀라니요?" "어심을 읽으시게. 아, 그래야 그대가 좌우찬성에 오르실 거 아니신가?" 좌우찬성은 삼정승에 이어 오정승이라 불리는 의정부의 일원입니다. "제가 어찌 하면 되겠습니까?" "원손의 사면은 양보가 불가능한 일 아니신가? 그러나 그걸로 군사력에 문제가 생긴다면 책임을 피하지 못하실 게야." 

역시 박종수는 이경식의 수하답습니다. 이경식이 어심을 읽는다면 박종수는 이경식의 마음을 읽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건으로 이 논쟁을 덮어버리면 되겠습니까?" "그럴만한 일이 있으시겠나?" "역모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황판관이 잡아온 자 중에 조모라는 선비가 있습니다. 원손을 찾는 일은 차치하고 역모부터 추궁하신다면." "허허허허~ 떠날 때 다 된 이 늙은이가 무얼 아시겠나, 흠흐허허허~" 

우리는 이 대화를 통해 이경식이 반청파의 입장에 서 있음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반청파의 우두머리이면서 마치 중도주의자인 척 행세하며 뒤에서는 어심을 조작하기 위해 모략을 꾸밉니다. 그가 말하던 어심이란 결국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하기 위해 조작된 이데올로기였던 것입니다. 

용골대의 명으로 송태하를 구하는 청나라 무사들.


물론 청나라도 두 손 놓고 가만있지는 않습니다. 용골대가 원손을 확보하려는 이유도 조선과의 외교적 줄다리기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목적이 다분합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살과 피를 희생하면서까지 송태하를 구한 것이 오로지 송태하와 나눈 의리 때문이었을까요? 송태하를 대신해 죽은 용이라는 청나라 무장의 최후를 보면 그들이 나눈 의리가 꽤 크다는 걸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경식이 읽거나 만드는 어심은 근본주의

그러나 용골대의 심중에는 다른 계산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이경식은 이런 용골대의 계산까지 꿰고 있습니다. 아마도 조선비는 이토록 영악한 이경식에게 끝내 굴복해 투항하고 말겠지요. 그리고 이경식의 손에는 혁명세력의 명단이 쥐어질 것입니다. 이런 정황을 모르는 송태하는 우직하게 하던 일을 계속할 것이고 말입니다.  

아무튼 역사는 이경식 같은 인물의 손을 들어줍니다. 이경식은 어심을 잘 읽는 인물이고 또 어심을 잘 만드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당대의 어심은 청에 빼앗긴 자존감을 되찾는 것이며, 이에 기반해 성장하는 근본주의입니다. 이경식은 이 어심에 기생해야만 권력을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꾸로 이런 어심을 만들기 위해 역모사건 같은 것을 조작하기도 합니다. 

이런 그가 "이것도 충심이요, 저것도 충심이다. 다 나라를 위하고자 하는 일 아니겠는가!" 하고 연막을 치며 중도주의자 행세를 하는 것은 반대파의 피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신호탄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걸 모릅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토록 무서운 중도의 실체를 알았을 때는 이미 한 차례 격랑이 세상을 쓸고 지나간 뒤가 되겠지요.    

옛날에 황희란 정승이 있었지요. 그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중도적인 사람의 표본이었던 듯싶습니다. 어느 날 길을 가던 황희가 밭을 갈던 농부에게 물었지요. "저 두 마리 소 중에 어느 놈이 일을 더 잘 합니까?" 그러자 농부는 무슨 큰 비밀이라도 되는 양 황희를 이끌고 한쪽 귀퉁이로 가 귀에 대고 소근거렸습니다. "사실은 저 누렁이가 일을 훨씬 더 잘 한다우. 검정소란 놈은 농땡이지요."  

농부에게서 중도의 진정한 뜻을 깨우친 황희 정승

이 말을 들은 황희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농부의 가르침을 평생 가슴에 새기며 살았다고 하지요. 후세의 호사가들은 "그리하여 황희는 가장 위대한 정승이 될 수 있었다!" 라고 말합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그는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않는 훌륭한 중도주의자였다" 이렇게 되겠지요. 

대한민국 국회의사당. 여기엔 "때만 되면" 중도를 표방하는 인물들이 모여 정치를 하는 곳이다.


그러나 황희가 정말 중도주의자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에게도 분명 당파의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종의 등극에 반대하다가 모든 관직을 박탁 당하고 유배를 가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손을 내밀었던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반대파였던 세종이었습니다. 어쩌면 그에게 중도에 대한 영감을 준 것은 농부가 아니라 세종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황희는 중도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중도의 진정한 뜻을 깨닫고 실천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컨대 그는 좌파이면서도 우파를 포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반대로 우파이면서도 좌파를 포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중도입니다. 검정소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누렁소만 편애한다면 결국 검정소는 일을 하지 않게 될 것이고 누렁이만 고생하게 될 겁니다.   

그걸 아는 것이 농부의 지혭니다. 이경식이 읽는다는 어심과는 차원이 다른 세상의 이칩니다. 중도개혁이니 중도보수니 하는 말들을 무시로 내뱉는 오늘날 정치인들은 어느 범주에 속할까요? 자신의 주관을 분명히 하면서도 상대를 포용할 줄 알았던 황희? 겉으로는 중도를 표방하면서 뒤로는 상대를 죽이기 위해 모략을 꾸미는 이경식?

그런데 제 눈엔 이경식 같은 인물만 득실거리는 것으로 보이니 참담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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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파비 정부권

황석영이 변절했단다. 그래서 시끄럽다. 실망감과 배신감의 절규가 하늘을 찌른다. 아마 누군가는 카이사르를 흉내 내어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황석영, 너마저도…” 그러나 너무나 많은 변절자들을 보아온 사람들에게 이 유명한 대사도 그리 감흥을 주진 못하리라.

 

이미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한나라당을 말함)로 들어간다김문수를 비롯 과거 민중당의 사무총장으로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꿈꾸다가 역시 한나라당에 투항하여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에 1등 공신이 된 이재오 등으로부터 숱한 배신감을 맛보았던 터다. 

 

황석영을 변호하는 사람도 있다. 그의 진정성을 한번 믿어보자는 것이다. 남북관계가 이토록 경색된 상황에서 아직 4년이나 남은 대통령을 끌어내릴 것이 아니라면 누군가 물꼬를 터 대북문제를 풀어야 하지 않겠냐고 말한다.

 

석영이 노벨상이 유력시되는 인물이니 봐주자고 말하는 대목에선 실소를 금할 수 없지만, 그러나 어쨌든 이 모든 주장들도 나름 일리가 있을 것이다. 그래. 황석영은 노벨상을 탈지도 모르고 또 이명박 정권에 협력해서 남북관계를 개선시키는데 일조를 할지도 모른다.

사진=레디앙/청와대

나는 황석영을 두고 변절자라며 배신감에 떤다거나 반대로 얄팍한 애국주의나 민족주의를 말하며 낭만적 기대를 거는 일부 논객들을 나무라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들이 그러는 데에는 모두 나름대로의 근거와 이유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황석영이 변절을 하건 아니면 민족공동체를 완성하기 위해 중대한 결단을 하건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와 같은 사람의 낭만주의가 그런대로 이 시대적 상황에 모르핀의 역할이라도 한다면 그걸로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그보다는 황석영 사태를 통해 중도라고 불리는 이 해괴하고 이해하기 힘든 개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졌다. 오래 전부터 나는 이 중도라는 말의 의미가 매우 궁금했었다. 거의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불리길 원하는 이 해괴한 언어적 유희가 또한 매우 의심스러웠었다.   

 

바야흐로 중도의 시대다. 중도우파, 중도좌파, 그러더니 드디어 중도실용주의까지 나왔다. 좌파면 좌파고 우파면 우파지 중도는 무언가. 실용주의면 실용주의지 중도실용주의는 또 무언가. 그래서 우선 중도란 말이 무슨 뜻인지 사전적 의미부터 살펴보았지만, 명쾌한 답이 없다.

 

中道. 간단하게 직역하면 길의 한가운데란 뜻이다. 이리 치우치지도 아니하고 저리 치우치지도 아니한다는 뜻일 수도 있겠다. 황희 정승이 생각난다. 네 말도 옳고, 네 말도 옳다고 했다던 그분도 중도였을까? 모두 다 옳다니, 바꾸어 말하면 모두 틀렸다는 비관론이기도 하다.

 

그런데 세상에 중도란 것이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엄마와 아빠를 동시에 사랑하는 아이에게 누구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어보면 틀림없이 거의 대부분 둘 다 똑같이 사랑한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만약 중도를 하겠다면 그 아이의 마음부터 배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은 그 아이처럼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부모를 가지는 것이다. 아이와 그 아이의 부모가 소속된 가족이란 사회는 철저한 공동체사회다. 그들은 경제적으로도 확실하게 공유제를 유지한다. 그러므로 사실은 역설적이지만 이들에겐 중도란 말이 필요 없는 것이다.

 

공동체사회에서는 중도란 필요도 없고 있을 수도 없다면, 그렇다면 중도는 어떤 사회에서 필요하고 있을 수 있는가? 아마 그런 게 있다면 바로 치열한 계급계층 간의 갈등이 존재하는 사회일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가 바로 그런 사회다.

 

그럼 여기서는 과연 중도란 것이 실재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미 선험적으로 그것이 불가능함을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중도란 모두가 옳다고도 말할 수 있고 모두가 틀렸다고도 말할 수 있는 매우 유연한 입장에 설 수는 있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누구로부터도 지지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 중도란 경우에 따라서는 이쪽 편을 들었다가 상황이 불리해지면 반대편에 서겠다는 회색분자적 태도를 천명하는 것이기도 해서 매우 바람직하지 못한 사상이기도 하다. 정치세력들이 박쥐처럼 교활할 수는 있겠지만, 역시 영악한 인간은 박쥐처럼 무모하게 낮과 밤을 넘나들지는 않는다.

 

그래서 당연히 아직 어떤 중도적인 정치세력도 존재했던 역사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것은 정치인들이 입으로는 중도를 말하지만 사실은 철저하게 어느 한 편을 들어야만 자신이 살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실제의 세계에서 중도란 절대 존재할 수 없다고 해도 하등 틀렸다고 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중도란 이 애매하고 기괴한 용어가 매우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황석영도 이명박에게 바칠 선물로 이 헌사를 택했을 것이다.

 

아마 중도실용주의는 황석영이 다수의 국민들로부터 독재자로 인식되고 있는 이명박에게 바칠 수 있는 최고의 헌사였을 것이고, 이명박도 흐뭇했을 것이다. 그리고 한편 어쩌면 본래 이명박은 중도실용주의자였는데, 그를 둘러싼 극우편향의 인맥으로부터 그를 구해오겠다는 그의 말은 진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답답한 것은 그가 있지도 않은 중도란 말을 남용한다거나, 이명박 같은 수구파쇼에게 중도란 헌사를 바쳐 국민을 헛갈리게 한다거나 하는 따위가 아니다. 그는 곧 70을 바라보는 나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60이면 듣기만 하여도 이치를 깨닫고 70이면 무엇이든 마음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도리어 황석영의 말년을 보노라면 사람이 늙으면 욕심에 눈이 어두워진다는 옛말이 진리인 것처럼 보이니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젊은 시절 그의 위험한 낭만주의가 걱정이었으나 이젠 늙은 욕심에 돋아난 그의 무지가 걱정스럽다. 그는 나이가 들어 단어의 적당한 용법마저 잊어버린 것일까.

 

도대체 이명박에게 중도실용주의라니 촛불시위대에 물대포를 쏘고 철거민들의 생존권을 특공대로 짓밟는 것이 중도란 말인가. 부자들에겐 세금감면이란 특혜를 베풀면서 서민들에겐 복지를 축소시키고 오히려 세금을 올리는 것이 실용주의란 말인가. 게다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중도와 실용주의의 조합이라니… 

 

이명박을 반대하든 찬미하든 그의 자유이겠으나 정신만은 똑바로 차려 오랜 세월 쌓아 올린 지식인으로서의 공든탑만은 지키기를 바란다. 도대체 노벨상 후보로 거론된다는 대한민국의 대표적 지성이 이런 정도로 무식하다면 국민으로서도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나.

 

그러나 중도라는 이 애매하면서도 기만적인 용어를 하루빨리 퇴출시켰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 나로서는 황석영 작가에게 일면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가 이명박에게 헌사를 바침으로써 중도란 이 해괴한 언어를 충분히 오염시켜주었으므로 그리하여 다시는 우리땅에 중도라는 이 요사스런 박쥐가 기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