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09.10.10 김춘추와 선덕여왕, 진골 대 성골의 대결? by 파비 정부권 (5)
  2. 2009.09.12 미실이 황후가 된다면 세종과는 이혼해야 할까? by 파비 정부권 (3)
  3. 2009.07.23 선덕여왕, 미실은 몇 번 결혼 했을까? by 파비 정부권 (9)
  4. 2009.07.11 선덕여왕, 미실의 출신성분은 무엇이었을까? by 파비 정부권 (8)
김춘추가 골품제도를 일러 천박하고 야만스러운 제도라고 일갈했다. 그것도 성골 왕인 진평왕 앞에서.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일까? 결론은 도저히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이미 김춘추는 덕만공주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공주님은 어떤 마음으로 신라에 오셨습니까? 저는 또 어떤 마음으로 신라에 온 것 같습니까?"
 

사서에 등장하는 김춘추는 탁월한 외교전략가였다.


김춘추, "나는 신라를 가지기 위해서 왔다!"

그리고 김춘추는 힘주어 말했다. "저는 신라를 가지기 위해 왔습니다." 이미 덕만공주도 오래전에 같은 말을 했었다. "신라를 먹어버릴 거야." 그리고 그 말은 곧 "내가 신라의 왕이 되겠다"는 확신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덕만공주는 바야흐로 왕이 되려고 한다. 아무도 꾸어보지 못한,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꿈, 여왕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 김춘추가 제동을 걸고 나섰다. 김춘추는 말한다. "신라 역사에서 아무도 꾸어보지 못한 두 가지 꿈이 있어. 하나는 여자가 왕이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진골이 왕이 되는 것이지. 그런데 그 둘 중 어느 게 먼저 될까? 여왕? 아니면 진골 왕?" 묘한 웃음을 흘리며 질문 아닌 질문을 던지는 김춘추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진심은 무엇일까?

그러나 이미 우리는 김춘추의 마음을 그의 입을 통해 충분히 들었다. 그는 덕만에게 "나도 이모님과 마찬가지로 신라를 가지기 위해 바다를 건너 왔다"라고 말했으며, 엊그제는 진평왕과 대등들 앞에서 "골품제도는 천박하고 야만스러운 제도"라고 일갈했던 것이다. "그래, 성골만 왕이 되란 법이 있소? 나 진골도 왕이 되고 싶소!" 이게 그의 진심인 것이다.

그리고 김춘추는 입국하자마자 염종을 수하에 두고 비담을 포섭하기 위해 저울질 하는 등 나름대로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나아가 미생과 친하게 지내면서 적을 안심시키고 내부를 교란시키는 양동작전까지 펼치고 있다. 가히 외교술의 귀재였다는 그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아마 우리가 짐작하는 것이 맞는다면, 김춘추는 기골이 장대하고 빼어난 용모를 지녔으며 뛰어난 두뇌와 유창한 화술의 소유자였다. 당태종조차도 김춘추를 칭찬했다고 하니 그가 고구려와 일본, 중국을 넘나들며 외교전을 펼친 것이 우연한 일은 아니었을 듯하다. 게다가 김춘추는 출중한 지혜뿐 아니라 대범한 용기까지 지니고 있었다.  

김춘추는 뛰어난 외교전략가에 행동가였다

감히 누가 있어 용담호혈에 주저 없이 들어갈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과연 그런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나 김춘추는 스스로 죽을지도 모를 길을 주저 없이 갔다. 그리고 실제로 고구려에서 연개소문에게 죽을 고비를 가까스로 넘겼다. 그런 그였으니 진평왕 앞에서 감히 "골품제도는 천박하고 야만적인 제도"라고 일갈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는 국기를 뒤흔드는 일이다. 골품제도는 신라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장치다. 정확하게 말하면, 신라가 아니라 신라왕실을 지탱하는 장치다. 이를 부정하는 것은 곧 역모다. 성골왕족을 부정하고 역모를 일으키겠다는 공개적인 선언을 김춘추가 왕 앞에서 한 것이다.

사실 김춘추는 진지왕의 친손자이면서 동시에 진평왕의 외손자이기도 하다. 그러니 못할 소리도 아니다. 그의 입장으로 보면 성골남진한 상태에서 충분히 왕위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 김춘추는 진평왕에 의해 폐위된 진지왕의 친손자요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진골귀족일 뿐이다.   
 
아무래도 김춘추가 왕이 될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은 역시 덕만공주의 부마가 되어 부군이 되는 것이다. 부군이란 태자가 없을 때 공주의 부마를 다음 왕위계승자로 삼는 신라만의 독특한 제도다. 이런 제도는 근친혼이 성행하던(혹은 권장되던) 신라였기 때문에 가능했을지 모른다. 어차피 부마도 결국 같은 왕족이니까.   

실제로 부군의 지위에 올라 왕이 된 예는 많았다. 석탈해가 그랬으며 김씨족 최초의 왕인 미추왕이 그랬다. 내물왕과 실성왕도 모두 사위로서 왕이 된 케이스다. 그러니 성골 태자가 없을 경우에 진골귀족 중 한 명을 성골 공주의 부마로 맞아 부군으로 삼는 것이 신라의 전통이며 자연스럽게 후계를 확정짓고 정국을 안정시키는 방법이다. 

김춘추의 위험한 발언, "성골만 왕이 되란 법 있나? 진골도 왕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김춘추가 굳이 왕이 되고 싶다면 이미 미실과 계획한 것처럼 덕만공주와 혼인해 부군이 되면 될 일이다. 덕만은 김춘추에게 외가 촌수로는 이모(3촌)가 되지만, 친가로 보면 6촌 형제간이다. 근친혼을 신국의 도라 하여 권장하던 신라사회에서 6촌 형제간인 덕만과 춘추가 결혼하는 것은 하등 이상할 이유가 없는 일이다. 

물론 역사에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드라마에서도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신라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주겠다는 연출의도에 따라 연대나 인물 등에 대해 각색의 가위질이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도저히 손을 댈 수가 없는 역사적 사실도 있는 법이다. 선덕여왕과 김춘추의 관계가 그렇다. 

그래서 진골인 김춘추가 성골 왕 진평왕 앞에서 감히 역모에 준하는 발언을 한 것일까? "폐하, 어찌 성골만 왕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저 진골도 왕이 되고 싶사옵니다. 저를 후계자로 삼아주시옵소서." 그러나 이는 분명 매우 위험한 발언임에 틀림없다. 진평왕은 5촌 조카이면서 동시에 외손자이기도 한 김춘추의 발언을 문제 삼지 않을 수 있다.

만약 진골도 왕이 될 수 있다고 하면 위 인물들 중 누가 제일 기뻐할까?

 
그러나 다른 신료들은? 절대 그럴 수 없다. 그들은 당장 김춘추를 참하라고 소를 올릴 것이다. 만약 그들 귀족들도 김춘추의 발언을 문제 삼지 않는다면, 특히 미실과 세종 일파의 경우에, 다른 의도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도 진골이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기회가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며, 때문에 속으로는 김춘추의 발언에 쾌재를 부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현재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보이고 있는 권력을 둘러싼 역관계로 보아 김춘추의 주장이 받아들여진다면 다음 왕위에 가장 근접한 사람은 세종이다. 이것은 미실이 평생을 꾸어오던 꿈, 곧 황후가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 김춘추는 "성골만 왕이 되고 진골은 왕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야만적"이란 따위의 발언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김춘추에게 필요한 것은 세력이다

오히려 김춘추는 '성골만이 왕이 될 수 있으며, 덕만공주야말로 하늘이 예언한 개양자로서 나라를 다스릴 임금의 재목'이라고 진평왕에게 품해야 옳은 일이다. 나아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덕만공주의 결정이야말로 참으로 현명한 판단이라고 부추겨야 옳은 일이다. 그 길만이 "신라를 가지기 위해 돌아왔다"라고 말하던 그의 야심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설령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역사적 사실들을 땅 속에 묻어두고 이야기를 전개한다고 하더라도 김춘추의 생각대로는 절대 될 수가 없다. 왜? 김춘추는 미실 일파가 몰아낸 진지왕의 손자이기 때문이다. 김춘추는 패주의 자손이다. 그리고 진지왕을 패주로 만든 것은 미실과 세종, 설원공 등이다.

실제로 역사에서도 김춘추는 선덕여왕 16년과 진덕여왕 7년을 합하여 무려 20년이 넘는 긴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진덕여왕이 죽은 후에도 김춘추는 바로 왕으로 추대되지 못했다. 삼국사기에 보면 귀족들이 화백회의를 열어 알천공을 왕으로 추대했지만 알천공은 자신은 늙고 덕이 없음을 들어 고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진실일까?

온갖 부패혐의에 시달리면서도 대통령이든 총리 자리든 연연하는 오늘날의 세태로 보면 참으로 신선한 충격이 될 수도 있는 미담이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통틀어 이런 미담은 대체로 들어본 기억이 없다. 그럼 왜 알천공이 왕 자리를 고사했을까? 바로 김춘추의 뒤에는 김유신이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월성전투의 승리로 비담의 난을 제압한 이후 김유신은 신라의 무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아이러니지만 후일의 김유신과 김춘추를 만들어 준 것은 바로 비담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아무튼 알천공이 김춘추에게 왕위를 양보한 것은 매우 현명한 선택이었다. 목숨은 두 개가 아니니까.

김춘추가 해야 할 일은 조용히 때를 기다리는 것


그리고 이때부터 화백회의는 사실상 그 기능을 잃었다고 볼 수 있다. 중앙집권을 통해 왕권이 강화된 신라에서 화백회의는 왕의 괴뢰기구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법흥왕 때부터 대등들을 각 행정기관의 장으로 배치해 왕권의 통제아래 두려던 시도는 김춘추가 왕이 될 무렵에는 거의 복종하는 관계로 굳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김춘추가 덕만공주에 맞서 진골도 왕이 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대드는 것은 난센스다. 아니 치명적 실수다. 지금은 은인자중할 때다. 조용히 세력을 키우며 때를 기다리는 게 그가 할 일이다. 영민한 그로서는 분명 언젠가는 자기에게 기회가 올 것임을 알고 있을 것이다. 당나라에 유학까지 한 김춘추라면 태공망의 고사쯤은 읽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잠시 미쳤던 것일까?
Posted by 파비 정부권

만약, 만약에 말입니다. 
진평왕이 미실을 받아들여 황후가 되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면 어떤 결과들이 일어났을까요?


물론 미실이 왕권을 틀어쥐고 신라를 농단했겠지요. 아니면 지증왕이 내린 교지에 따라 삼한통일의 대업에 앞장섰을 수도 있습니다. 미실의 말처럼 그녀가 황후가 된다면 왕권강화를 위해 귀족들을 누를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녀는 황후가 되지 못했고, 따라서 왕권을 약화시키고 귀족의 권위를 높이는데 힘을 쏟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실과 진평왕을 결혼시키는데 최일선에서 고군분투하던 사람이 누구였을까요?

다름 아닌 미실의 하나뿐인 남편―설원공이 있지 않느냐고 말하고 싶은 분도 계시겠지만, 설원공은 남편이 아니라 연인입니다. 단지 세종이 묵인하고 있을 뿐이죠. 세종은 감정보다는 권력을 택한 약은 사람입니다. 비굴해보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의 권력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입니다.

세종은 화백회의의 수장 상대등입니다. 상대등은 유사시에는 왕이 될 수도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실제로 통일신라시대에는 상대등이 왕이 된 경우도 많습니다. 상대등은 관료사회의 최고 기관인 이찬이나 각간과는 달리 특별한 관직이 아니라 화백회의 구성원인 대등들을 대표하고 회의를 주재하는 자라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국회의장 같은 것이었을까요? 그러나 아마 국회의장보다는 훨씬 힘이 셌던 모양입니다. 그런 세종이 자기 부인인 미실을 처음에는 진지왕에게 다시 진평왕에게 시집보내려고 안달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럼 자기에게 어떤 이익이 돌아오나요? 저는 늘 그게 궁금했고 지금도 궁금합니다. 

만역 진평왕이 미실과의 결혼을 받아들여 미실이 황후가 되었습니다. 그랬다면 위에서 말한 것처럼 미실은 이제 진골귀족이 아니라 성골왕족이므로 귀족을 탄압하고 왕권을 강화해야하는 위치에 서게 됩니다. 이 말은 미실이 황후가 되기 전에는 세종을 비롯한 진골귀족들과 동지였지만, 황후가 되고부터는 대립각을 세우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설원공은 진골귀족이 아니니 그가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사실 진골귀족이 아닌 설원이 병부령이란 고위직에 오른다는 자체가 난센스라고 수차 지적했었죠―세종을 비롯한 진골귀족들은 미실과 맞서거나 아니면 그 동안 누려오던 권력을 내놓게 될 운명에 처하게 될 겁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보다 제가 가장 궁금해하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만약 미실이 황후의 자리에 오른다면 남편인 세종은 어떻게 될까요? 그냥 결혼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이혼을 해야 되는 것인지, 그게 궁금하네요. 쓸데없는 고민을 다 한다고요? 그렇지만 저는 그게 제일 궁금하답니다. 

아무리 천하를 주무르는 미실이지만 남편을 두고 또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게다가 상대는 일국의 황제입니다. 또한 신라시대는 1부1처제가 확립된 부계사회였습니다. 설원공이요? 그는 미실의 남편이 아니라 연인일 뿐이라고 위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아무튼 어떻습니까?

"미실이 황후가 되면 세종과는 이혼을 해야 할까? 이혼하지 않아도 될까?"

이거 헌법재판소에 물어볼 수도 없고… 누구에게 물어보아야 할까요? 그나저나 만약 제 생각대로 미실이 황후가 된 후에는 이혼해야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세종은 그냥 낙동강 오리알 되는 거 아닐까요? 그런데 세종은 무엇 때문에 자기 무덤을 스스로 파는 멍청한 짓을 하고 있었던 걸까요? 

그야 당연히 멍청하기 때문이라고요? 아~ 네,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
어제는 제가 음주회동이 있어서 《선덕여왕》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니지, 자정이 넘었으니 그 오늘도 이제 어제가 되었군요. 아무튼 역시 또 음주 회동이 있었지만, 과음을 자제하고 맑은 정신으로 들어와 거금 1000원을 결재하고 보았습니다. 물론 500원짜리도 있습니다만, 선덕여왕만큼은 1000원을 내고 보는 편입니다. 화질 차이가 많이 나거든요.


그런데 《선덕여왕》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되지 싶은 그런 사소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동안 《선덕여왕》을 보면서 신라의 색공 풍습에 관한 문제라든지, 오늘의 기준으로 보면 대단히 문란해 보이는 당시의 혼인제도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 몇 차례 포스팅을 하면서 여러 서적들을 살펴보았던 제가 좀 예민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했던 생각은 《선덕여왕》 제작진이 좀 오버한다는 것입니다. 자, 제가 오버한다고 생각한 장면은 이겁니다. 미실이 위천제를 올리고 하늘의 계시를 핑계로 가야세력을 궁지에 몰아넣는데 성공합니다. 봇짐을 메고 줄줄이 쫓겨나는 가야인들이 마치 재개발에 밀려 터전을 잃고 쫓겨나는 철거민들과 흡사하다는 생각도 들었었지요.

그러고 나서 미실이 어떻게 합니까? 자기 측근들을 모아놓고 다음 계책을 이야기합니다. 채찍으로 상처를 주었으니 이제 약을 발라줄 차례라는 거지요. 그 약이란 다름 아닌 김서현의 가문과 자기네 가문이 혼사를 통해 동맹을 맺자는 것이었지요. 그러자 듣고 있던 하종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외칩니다. "어머니, 또요? … 아이, 정말…" 

하종의 짜증스러운 말의 의미를 눈치 챈 세종 또한 얼굴색이 변합니다. 정말 해도 너무한다는 원망이 얼굴 가득하더군요. 그렇다고 큰 소리 칠 수도 없고…. 제일 불쌍한 사람은 역시 설원공이더군요. 그의 얼굴에도 원망과 불만이 가득했지만 세종 부자처럼 내놓고 말도 못합니다. 그런데 더 웃기는 건 그 다음 미실의 반응입니다.

미실은 측근들의 불만에, 사실 측근들이라고 해봐야 남편들과 아들들과 친동생이었지만, 내심 스스로도 무안했던지 헛기침을 하면서 얼굴을 찡그리며 난처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나 말고…" 그러나 저는 미실이 얼굴을 살짝 비틀어 숙인 자세로 찡그리며 "나 말고… 자식들 중에서… 아니면, 하종의 여식은 어떨까?" 할 때, 정말 큰 소리로 웃을 뻔 했습니다.

《선덕여왕》이 재미있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소재가 신선하고, 박진감 넘치는 시나리오가 탄탄하고, 연기자들의 연기가 훌륭합니다. 《선덕여왕》만큼 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는 드라마도 흔하지 않습니다. 《대장금》의 인기를 넘어서는 드라마가 아직 없었다고 하지만, 그 《대장금》도 이처럼 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지는 못햇습니다.

또, 《선덕여왕》에 재미를 더해주는 것은 코미디적인 요소입니다. 사극이 자칫 빠질 수 있는 심각하고 어두운 면을 이 코미디적인 요소들이 잘 어루만져주고 있는 것이지요. 죽방거사의 역할은 감초의 수준을 넘어 《선덕여왕》에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중요한 장치입니다. 그가 있어서 주인공들이 더 빛나는 거지요.

그리고 미실도 가끔 코미디 같은 대사나 행동을 하더군요. 지난주에는 유신을 불러다놓고 하늘의 뜻이 필요하다며 이렇게 말하지요. 뇌쇄적인 윙크까지 섞어서 말입니다. "아주 조금, 아주 조금은 필요하답니다." 아마 오늘, 아니 어제였군요. 미실과 측근들이 모여 벌인 해프닝도 결국 그런 의도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활력소를 위한 코믹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확실히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미실은 다행히 정략결혼의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고 밝힘으로써 측근들을 안심시켰지만, 이것은 난센스라는 사실입니다. 당시 신라는 모계사회도 아니고 다부다처사회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때도 분명히 부계전승사회였고, 일부일처제가 지켜지는 사회였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니까 보다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말하자면 미실은 단 한 번 혼인했으며 남편은 세종 한사람뿐이었습니다. 지금 드라마에서는 마치 설원이 미실의 남편인 것처럼 비쳐지지만, 그는 남편이 아니라 정부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세종이 받는 대접과 설원이 받는 대접은 다른 것입니다. 물론 세종은 진골이며 설원은 두품도 없는 천한 신분이지만서도…

그럼 미실이 3대에 걸쳐 왕들에게 바쳤다는 색공은 무엇일까? 그건 그냥 색공입니다. 미실이 진흥왕에게 색공을 바쳤다고 해서 그녀가 진흥왕비가 아닌 것이며, 진지왕비도 아닌 것이고, 진평왕비도 아닌 것입니다. 다만, 왕실의 자손을 번창시키기 위해서 색공을 바치기로 된 진골 가문의 한 여인에 불과한 것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드라마에서 보여준 '미실의 혼사'는 실은 난센스였던 것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물론 세종이 죽은 후라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당시는 여자의 재혼을 금하는 어떠한 법이나 관습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요. 게다가 미실이 굳이 김서현과 관계를 맺고 싶었다면 혼사가 아니라도 설원과 그랬던 것처럼 은밀하게 정을 통하면 될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미실은 공식적인 정략결혼을 통해 양 가문의 동맹관계를 맺고 싶었던 것이므로 미실이 아니라 자손들 중에서 누군가 하나를 골라 유신과 혼인시킬 생각을 했던 것이지요. 하여튼, 비록 난센스라고 제가 비토를 하긴 했습니다만 어디까지나 이는 자칫 심각하고 무겁고 어두운 사극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장치쯤으로 이해를 하면 그만입니다.

실은 이렇게 비토를 하는 것도 《선덕여왕》을 보는 재미중의 하나입니다. 아무튼 선덕여왕은 매우 재미있는 드라마임에 틀림없습니다.  오늘 보니 드디어 덕만의 정체가 탄로 났군요. 아니 탄로가 난 것이 아니라 본래의 신분을 되찾은 것이지요. 축하를 해야 할 일이겠지만, 대략 예고편을 보니 앞날이 더 험해질 것 같은 예감입니다.

하여간 여러분, 미실은 오직 한번밖에 결혼하지 않았답니다. 남편도 세종 한사람뿐이랍니다. 비록 정부가 여럿 있었으며 세 명의 왕과 한 명의 태자에게 색공을 바치긴 했을지언정 일부종사(?) 했다는 사실,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역시 남자들도 결혼은 한번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김춘추와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의 혼인에 얽힌 고사를 보십시오. 

왜 김유신은 춘추와 사통한 문희를 묶어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불을 지펴 연기를 피우는 연기를 했을까요? 김춘추가 이미 결혼했으므로 문희를 아내로 맞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연기는 선덕여왕에게로 날아갔고 결국 여왕의 묵인으로 김춘추는 문희를 정식 아내로 맞이하는 전례없는 결혼을 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신라사회에서는 남자들도 여자와 마찬가지로 결혼은 한번밖에 할 수 없었다는 역사적 기록인 것입니다. 물론 정식 부인은 한명밖에 둘 수 없었지만, 미실과 마찬가지로 정부(첩)는 여럿 둘 수 있었겠지요. 어디까지나 재력과 권력을 가진 귀족들에 한해서만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말입니다. 이런 것도 부익부 빈익빈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런, 오늘 새삼스럽게 난센스 이야기 하다 보니 제가 난센스에 빠지는 기분입니다. 흐흐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
요사이  MBC드라마 《선덕여왕》으로 인해 신라의 풍속에 대한 관심이 무척 높다. 특히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화랑들의 이야기로 세상이 뜨거운 것 같다. 화랑세기는 그 위작 논란에도 불구하고 신라사회를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한 장치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화랑도에 대한 언급이 있긴 하지만, 이처럼 생생한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특히 미실이란 여인은 화랑세기가 아니고서는 만나볼 수가 없다. 화랑세기는 사실상 미실의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래 김대문이 화랑세기를 저술할 때는, 그가 서문이나 후기에서 밝힌 것처럼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들의 세계(世系)를 밝히고자 함이었다. 그들의 계보를 통해 우리는 화랑의 실체를 접할 수 있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김대문의 집안은 세습 화랑의 집안이었다. 이 가문은 540년 화랑도가 시작한 이래 681년 폐지될 때까지 1세 풍월주 위화랑부터 시작해서 4세 이화랑, 12세 보리공, 20세 예원공, 28세 오기공 등 모두 5대에 걸쳐 풍월주를 세습했다. 나머지 풍월주들도 대부분 부자가 세습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김대문의 가문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32대에 걸친 풍월주들의 전기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바로 미실이다. 그녀는 5세 풍월주 사다함부터 시작해서 16세 풍월주 보종공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풍월주들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었다. 도대체 그녀는 어떤 신분의 인물이었기에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래서 나는 「선덕여왕, 근친혼의 이유는 무엇일까?」
(http://go.idomin.com/268) 라는 글을 통해 미실은 분명 김씨족임이 자명하다고 호언한 바 있다. 신라는 골품제를 근간으로 하는 나라다. 그런 나라에서 골품도 없는 여인이 화랑들을 발 아래 두고 국왕까지도 좌지우지한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랑세기에서도 미실의 세계에 대하여 자세한 언급은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화랑세기의 목적이 풍월주들의 세계와 세보를 기록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한편 미실에 대한 궁금증을 더욱 유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여러 독자가 댓글을 통해 내 글에 반론을 제기했다. 미실은 김씨족이 아니라 박씨라는 것이다.(인터넷을 검색해보았더니 또한 모든 네티즌들, 뿐아니라 위키백과에서도 미실을 박미실이라고 표기하고 있었다) 

사실 처음에 나의 관심사는 미실이 김씨족인가 박씨족인가 하는 것은 아니었다. 신라라는 신분제 사회의 특성상 진골귀족 신분이 아니고서 화백회의나 중앙정치를 주무를 수 없다는 주장을 강조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였을 뿐이다. 그러나 만약 드라마에서처럼 실제 미실의 역할이 그러했다면 그녀는 틀림없이 김씨족일 거라는 게 나의 생각이었다. 

골품제도는 법흥왕 7년(520년) 율령이 반포되면서 정립된 제도라고 말한다. 물론 그 이전에도 골품제는 이미 사회적 관습으로 정착되어 있었을 것이다. 법흥왕에 의해 골품을 받은 귀족들은 원래 왕족이었던 박씨족 일부와 김씨족, 그리고 가야의 왕족, 보덕국왕 안승의 후예들 정도였다고 한다. 그 범위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아직 정확히 알 길은 없다.  

박씨족 일부도 진골의 골품을 받았지만, 그들이 신라가 융성했던 중고시대나 중대에 중앙 정계에서 활발하게 활약했다는 증거를 찾기는 어렵다. 게다가 내물왕 이후 김씨족들이 왕권을 확실히 장악한 이후에 박씨족들은 6부 중 하나인 모량부에 이주해 살면서 가끔 왕비를 배출한 것 외에는 이렇다 할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 고로 화랑세기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미실이나 미생의 역할로 보아 틀림없이 이들의 조상은 김씨족일 거라는 생각은 지금도 확고하다. 그럼에도 여러 독자들이 미실은 박씨라는 주장을 하며 정정을 요구하였고, 심지어는 내물왕의 4대손이며 세종의 아비요 하종의 조부인 이사부조차도 박씨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어 부득이 다시 자료를 확인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사부나 거칠부가 김씨족인 것은 이미 사기에서 밝히고 있는 터라 더 이상 설명은 무의미할 듯하다. 그러므로 당연히 미실의 남편이며 아들인 세종과 하종도 김씨족인 것은 당연하다. 다만 미실에 대해서만 보다 더 확실한 조사가 필요할 것이지만, 아시다시피 그녀에 대한 기록은 화랑세기를 빼고는 전해지는 것이 없다.

그러나 미실의 부모에 대하여 화랑세기에 언급이 있으므로 그녀의 부계와 모계를 확인해 보면 그녀의 출신성분을 알아내는데 큰 어려움은 없을 듯싶었다. 미실의 아비는 2세 풍월주 미진부이며 어미는 묘도궁주이다. 미진부의 아비는 아시공이며, 아시공의 아비는  선모이고, 선모의 아비는 장이이고, 장이의 아비는 복호공이다. 복호공은 내물왕의 아들이다. 

미실의 부계를 살펴보건대, 미실은 내물왕의 후손인 것이다. 내물왕은 신라의 김씨 왕조를 확립한 인물이다. 내물왕 이전에 미추가 김씨족으로서 최초로 왕위에 오르긴 했지만, 김씨족의 전제 왕권을 확립한 것은 내물왕이다. 그러므로 김씨 왕조의 사실상 시조는 내물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내물왕 이후 왕비들은 대부분 김씨족으로 채워졌는데, 이는 김씨족의 배타적 왕권을 확립하려는 결과였다. 이와 같은 근친혼으로 왕권의 지위는 더욱 초월적인 것으로 공고해졌다. 세기에 의하면, 아시공은 법흥왕이 미실의 조모인 옥진과의 사이에서 난 비대공을 후계자로 세우려 하자 이에 반대해 지소태후와 더불어 진흥왕을 옹립하는데 역할을 한 인물이다. 

어쩌면 미실의 권력은 이로부터 기인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녀가 비록 세습적으로 색공을 하는 여인이었으며 미색이 출중하고 교태가 남다르다 해도 출신이 미천하고서는 권력에 다가서기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조부인 아시공은 당대의 실력자였으며, 아비는 진흥왕의 총애로 2세 풍월주를 거쳐 최고 관등인 대각간에까지 올랐다.    

그렇다면 미실의 모계는 어떨까? 미실의 어미는 묘도궁주이다. 묘도궁주는 영실공과 옥진궁주의 딸인데, 영실공은 수지공과 법흥의 누이 보현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성골이다. 또 미실의 조모인 옥진궁주는 누구인가. 그녀는 1세 풍월주 위화랑의 딸이다. 위화랑은 진골로서 이찬에 오른 인물이다. 위화랑 역시 옥진의 소생인 비대공을 반대해 진흥왕을 옹립했다.

이렇게 미실의 부계와 모계를 살펴보니 양쪽 모두 진골귀족 출신이다. 진골일 뿐 아니라 왕권에 가장 근접한 권력의 핵심들이었다. 미실의 권력의 출발점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미실의 힘이 어느날 갑자기, 또는 드라마에서처럼 사다함의 매화로,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닌 것이다.
 
자, 그런데 아직 풀리지 않은 독자들의 궁금증이 하나 더 남아 있을 것이다. 바로 설원랑이다. 나는 앞서「선덕여왕, 근친혼의 이유는 무엇일까?」에서 미실 뿐 아니라 설원까지도 김씨족일 거라고 단정을 하는 오류를 범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 의도한 오류였다. 설원랑은 세기에 등장하는 거의 유일한 진골귀족이 아닌 풍월주다.

화랑의 대부분이 진골귀족으로 채워졌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진골귀족이라 하더라도 아무나 화랑에 뽑힐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선 권문세가의 자제여야 하고 인물이 출중하고 덕이 충만해야 한다. 그래야 선발의 기본조건을 갖추는 것이다. 그런데 설원은 어떠한가. 그는 진골귀족도 권문세가의 자제도 아니다.

더구나 그의 아비인 설생은 아비의 이름도 성도 모르는 미천한 출신이다. 다만 설생의 어미가 습비부촌의 설씨 가문의 자손이므로 어미의 성을 따라 설씨가 되었다고 한다. 설생은 용모가 출중했는데,그가 모시던 구리지가 전장으로 나간 틈에 구리지의 여인 금진낭주와 관계를 가져 설원을 낳았다고 한다.

금진낭주는 사다함의 어미이기도 하니 설원은 사다함과는 동모이부의 형제인 셈이다. 사다함은 구리지의 아들이며 내물왕의 7세손으로 진골귀족이다. 금진낭주 또한 위화랑의 딸로서 진골귀족이니 설원은 비록 아비가 출신을 모르는 미천한 사람이었다고는 하나 모계로 보면 역시 귀한 자손이며 미실에겐 외숙뻘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부계계승사회인 신라에서 설원랑은 진골은 고사하고 두품조차 받지 못했다. 그런 그가 화랑이 되고 풍월주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은 미실의 권력을 웅변해주는 대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드라마상에서처럼 설원이 지배집단의 화백회의에 참여하고 병부령의 지위에 올라 군권을 장악하는 것은 난센스라는 것이다.

그런 일은 미실의 권력이 아무리 태산처럼 높다 하더라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신라의 골품제를 뒤흔드는 일로서 체제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미실이라도 그런 일은 할 수 없는 것이다. 화랑은 골품제의 규정을 비교적 덜 받는 자치조직이었으므로 설원랑이 풍월주에 오르는 이변을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앙관직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기대할 수는 없다. 그랬다면 6두품으로 뛰어난 문재를 자랑했던 설총이나 최치원이 비운의 삶을 살지도 않았을 것이다. 골품제가 초기에는 왕권을 강화하고 세력을 확장하는 주요한 도구로 기능했을지는 모르지만, 나라의 규모가 커지고 복잡해지면서 결국 신라를 패망으로 인도하는 결정적 요인 중의 하나로 작용했다.

그래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라!"는 금언이 있는 것이 아닐까.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