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라벌'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10.21 '선덕여왕' 죽방의 홍보전략, 진짜 통했을까? by 파비 정부권 (4)
  2. 2009.07.08 선덕여왕, 근친혼의 이유는 무엇일까? by 파비 정부권 (68)

선덕여왕에서 가장 바쁜 사람은 뭐니 뭐니 해도 죽방거사다. 물론 덕만공주가 가장 바쁘다. 그러나 그녀는 주인공이니 당연히 바쁜 것이고. 김유신도 바쁘고 알천도 바쁘고 비담도 바쁘지만, 역시 죽방 만은 못하다. 죽방은 결정적인 순간에 상황을 반전시킬 만한 계책을 내놓는가하면, 적의 동태를 탐지하고, 필요한 정보를 입수하기 위해 담도 넘는다.
 


죽방은 타고난 여론선전가

그러나 무엇보다 죽방이 가장 크게 공을 세우는 곳은 다름 아니라 현장이다. 시장에서, 주막에서 죽방이 벌이는 고도의 선전활동은 누구도 따라가지 못한다. 죽방의 주특기다. 덕만이 일식을 통해 개양자의 자격으로 천신황녀가 되어 공주의 자리에 복귀할 때도 죽방은 바빴다. 일의 우선순위에는 반드시 여론전이 있기 마련이다. 

어제도 죽방은 엄청 바빴다. 시장에서, 골목에서, 주막에서 덕만공주가 만들어낸 '대귀족들에겐 세금을 높이고 중소귀족들과 서민들에겐 세금을 낮추는 조세정책'을 홍보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덕만공주가 아무리 좋은 정책을 만들어 중소귀족들과 백성들의 지지를 얻고자 하더라도 이를 아무도 모르면 그만이다. 

자, 그런데 이 대목에서 궁금한 것이 있다. 그때도 죽방의 여론 선전활동이 효과가 있었을까? 요즘처럼 신문이 있는 것도 아니고, 텔레비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인터넷도 없다. 그런데 겨우 시장통이나 골목에서 벌이는 죽방거사의 홍보전략이 얼마나 위력을 발휘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한번 살펴보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그때와 동시대에 여론선전을 통해 목적을 달성한 예가 실제로 있었다. 하나는 서동요로 유명한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 이야기요, 다른 하나는 김유신의 동생 문희와 김춘추의 혼인에 얽힌 이야기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두 이야기는 모두 너무나 유명해서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다. 

맹랑한 서동의 선화공주 훔치기도 여론조성으로

서동은 맹랑하기 그지없는 자였다. 서여(마로 만든 과자)를 캐서 내다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처지에, 그것도 백제 사람으로, 어여쁜 신라공주를 꾀어내려는 수작을 누가 감히 생각이나 하겠는가. 그러나 그런 맹랑한 사람을 우대하는 사회가 발전한다. 덕만공주도 사실 따지고 보면 얼마나 맹랑한가. 감히 여인인 주제에 왕이 되겠다니. 

그러나 서동에겐 아무도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 일을 돌파할 꾀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노래를 통한 여론의 조성이었다. 서동은 경주의 아이들을 구슬려 해괴한 노래를 가르쳐주고 소리 높여 부르게 했다. 뇌물로 서여를 나눠 주었음은 물론이다. 마치 서동과 선화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꾸민 노래는 삽시간에 퍼졌다. 

선화공주님은 
남모르게 짝지어 놓고
서동 서방을 
밤에 알을 품고 간다. 

그 다음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공주는 유배를 가게 되었고, 유배지에서 미리 기다리던 서동이 자신을 밝히고 선화공주를 데리고 백제로 갔으며,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그런 이야기다. 그리고 서동은 나중에 백제의 무왕이 되었다. 이런 이야기를 삼국유사에 진지하게 기술한 일연도 참으로 맹랑한 사람이다.


김유신이 부린 여론선전전, 삼한통일의 기초가 되다

이야기의 사실 여부를 떠나 그때나 지금이나 여론의 위력은 실로 막강하다는 것을 이 설화를 통해 우리는 알 수 있다. 여론의 위력을 짐작하는 데 하나의 설화가 더 있다. 위에 미리 말했던 김유신의 동생 문희와 김춘추에 얽힌 이야기다. 사실 이 이야기가 설화인지 일화인지 정확하게 알 길은 없으나 여론의 위력을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예임에는 분명하다. 

김문희가 언니 보희가 서쪽 산에 올라 오줌을 누었더니 서울 성안에 가득 차는 꿈을 꾸었는데 그걸 샀다는 이야기는 너무 진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유신과 축국을 하던 춘추의 옷이 찢어졌는데 그걸 보희 대신 문희가 꿰매주었고 후일 춘추와 혼인한 문희는 태종 임금의 왕후가 되었으며 문무왕의 모후가 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이야기의 줄거리가 아니다. 문희가 임신을 한 사실을 알게 된 유신이 취한 태도다. 누이를 호되게 꾸짖은 유신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누이를 불태우리라는 말을 온 나라 안에 퍼뜨린 일이었다. 그리고 선덕여왕이 남산에 행차하여 노는 날을 기다려 마당에 장작을 쌓고 불을 피웠던 것이다.

결국 유신의 여론선전전은 성공을 거두었다. 문희는 춘추와 공식적으로 혼례를 올렸으며 유신은 차기 국왕의 처남이 된 것이다. 패망한 가야국의 이민4세였던 유신과 김춘추의 결합은 한편 신라와 가야가 하나로 통일되는 실질적 계기였을지도 모른다. 김유신에겐 망국민의 콤플렉스를 벗어던질 절호의 기회였음도 물론이다. 

시대는 달라도 사람 사는 방법은 똑같다

당시 서라벌(서울)의 인구가 백만을 넘나들었다고 하니 소문의 전파 속도나 여론의 파급력도 상당했을 것이다. 세월은 흘러도 사람 사는 방법에는 별 차이가 없다는 말의 뜻이 이해가 된다. 그렇다면 죽방이야말로 선덕여왕 등극의 일등공신이 아닌가. 덕만이 왕위에 오른 다음 죽방을 홍보수석비서관으로 발령을 낸다한들 누가 탓할 수 있으랴.  

죽방이야말로 최고의 홍보전략가인 것을. 하긴 그러고 보니 유신이 문희를 불태우리라고 서울 성안에 소문을 내도록 한 것은 죽방으로부터 배운 것이 아닐까? 아니면 죽방이 직접 유신에게 계책을 내었던지. 하여간 죽방, 정말 대단하다. 배울 점이 참으로 많은 인물이다. 처음 볼 때부터 그런 예감이 들었다. 배울 점이 많은 인물일 것이라고.

Posted by 파비 정부권
『선덕여왕』에 드디어 칠숙이 등장했다. 소화와 함께 서라벌에 나타난 칠숙으로 인해 드라마 선덕여왕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안 그래도 내심 불안했었다. 칠숙이 소화를 구해 살아서 돌아온다는 소문은 진즉에 있었지만, 혹시나 했었다. 만약 칠숙과 소화가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다면 과연 누가 덕만의 정체를 증명해줄 것인가.

나는 그게 걱정이었다. 진흥대제(드라마에서 자꾸 대제라고 호칭하니 나도 민족주의 내지는 애국주의적 대세에 편승해서 대제로 부르기로 한다. 경남도민일보의 김훤주 기자라면 이런 걸 무척 싫어할 텐데… 그래도 할 수 없다. 시류에 편승하는 수밖에…)의 신물인 작은 칼 정도로 진평왕이 자기 딸을 확신하기에는 너무 무리다.

무엇보다 가장 확실한 증거는 진평왕이 덕만을 떠넘긴 소화다. 소화의 증언이야말로 태산도 움직일 수 있는 명백한 증좌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게다가 소화를 어머니로 믿고 따르는 덕만을 보면 진평왕과 마야부인의 소화에 대한 감사와 신뢰는 바다를 메우고도 남을 것이다. 어쨌든 칠숙과 소화의 등장은 부질없는 내 짐 하나를 덜어주었다.

그런데 칠숙은 어떤 인물인가? 칠숙은 기록에 의하면 진평왕 말년에 석품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는 인물이다. 그도 역시 화랑이었으니 진골귀족이다. 화랑은 진골귀족의 자제들 중 용모가 수려하고 덕망이 높은 자 중에서 선발한다. 이처럼 화랑도가 내면적 정신 못지 않게 외모를 중시하는 것은 신라인들의 영육일체, 선미합일의 미적 관념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설이 대체적이다.

어떻든 이렇게 본다면 
『선덕여왕』에 등장하는 화랑들은 모두 같은 씨족들로서 형제자매들이다. 드라마에서 미실이나 설원공이 스스로를 천한 신분이라고 말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진골귀족 내부에서의 역관계일 뿐이고 이들은 모두 신라 최고의 관등에 오를 수 있는 진골귀족들이다. 그러니 미실이나 설원공이 김씨인 것도 자명한 일이다.

만약 설원공(혹은 설원랑)이 김씨가 아닌 설씨라면 그는 화랑도 될 수 없었겠지만 병부령의 자리에도 오를 수 없다. 더구나 대등들만이 참여하는 화백회의에 참여한다는 것은 천지가 개벽하더라도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우리가 어린 시절 학교에서 이 화백회의가 매우 민주적인 제도라고 배웠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신라사회의 이처럼 독특한 골품제와 화백회의는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그리고 이 골품제를 유지하기 위해 근친혼이 권장되었던 것은 아닐까? 드라마에서 만명부인은 공주의 신분을 버리고 김서현과 결혼해 김유신을 낳았다. 만명공주는 성골의 신분이었지만 골족이 아닌 가야 출신 김서현을 선택함으로써 귀족 신분을 잃게 된다.

김서현이 공을 세워 만명부인의 어머니인 진흥대제 황후의 배려로 다시 진골귀족의 신분을 얻게 되지만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다. 만명공주가 귀족신분을 잃게 된 이유는 바로 족외혼을 강행했기 때문이란 사실이다. 내가 알기로, 김유신 일가는 가야의 왕족으로 신라에 투항한 공을 인정받아 진골 작위를 받고 공주와 결혼하는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 

그렇다면 만명공주가 족외혼을 고집해 귀족의 작위를 잃었다는 것은 별로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렇든 저렇든(드라마가 옳든 내가 알고 있는 얄팍한 지식이 옳든)간에 신라는 언제부터인가 족내혼이 하나의 관습이요 제도로 정착되었다는 사실이다. 왜 그랬을까? 씨족사회도 아니고 부족사회도 아닌 국가 체제가 정비된 고대의 강국 신라에서….

언젠가 아키히토가 황태자이던 시절, 천황족 외부의 여인과 결혼한다고 해서 크게 화제를 몰고 왔던 적이 있다. 일본사회를 들썩이게 했던 커다란 사건이었다. 일본에서 천황이 생긴 이후 최초의 일이었다고 언론들이 대서특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들도 족내혼의 관습이 법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백제에서 건너간 일파가 일본을 정복하고 지배하면서 혈통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족내혼을 선택했다느니 하는 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물론 역사적 기록이나 신뢰할 만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신라에 대해서도 비슷한 추론을 내세울 수도 있지 않을까? 

최근 발표된 연구 중에 신라 금관의 비밀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신라의 금관은 성인의 머리에는 도저히 쓸 수 없는 물건이었다.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금관의 둘레를 재어보았더니 너무 좁아 머리가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단순한 장식용이었을까? 그런데 어느 학자가 그 비밀의 동굴에 손을 집어넣었다. 비밀의 열쇠는 고대에 행해진 풍습에 있었다.  

신라 왕족들의 머리는 모두 길게 늘어진 모양이었다. 이는 북방 흉노족의 관습에 기인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흉노족은 아이가 태어나면 머리에 돌을 올려놓아 머리를 늘어뜨리는 관습이 있다는 것이다. 금관의 둘레가 좁아 성인의 머리가 들어가지 않는 것은 바로 흉노의 이런 관습 때문이란 것이다. 

편두 풍습으로 머리가 가늘고 길쭉해지면 충분히 금관을 쓸 수가 있었을 것이다. 이로부터 하나의 가설이 만들어졌다. 신라의 왕족들은 흉노의 일파인 북방 선비족이라는 것이다. 김알지의 신화는 그의 후손이 왕위에 오르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설도 함께 만들어졌다. 충분히 가능한 가설이다.

그 가설이 정당하다는 가정 하에 하나의 가설을 더 추가해보는 것도 그리 엉뚱해보이지는 않는다. 일본의 천황족이 그러했던 것처럼 신라를 장악한 경주 김씨들도 자신들만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족내혼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골품제도를 만들고 골족 내부의 의견을 통일하고 연대를 제고하는 기관으로 화백회의를 둔 것은 아닐까? 

죽은 줄 알았던 소화가 돌아왔다.


신라가 건국될 당시에는 왕은 하나의 상징적 존재로서 6부족이 세력균형을 이루는 연맹체였을 것이다. 이 6부족의 평화로운 연맹을 위해 6부족장이 아닌 인물을 왕으로 추대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혁거세거서간의 신화는 그래서 탄생했을 것이다. 남해차차웅의 사위로서 유리이사금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석탈해의 경우도 그렇다.

석씨 부족이 철기문화를 가진 강성한 군사력으로 왕위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는 학설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사기나 유사를 인용한다면 이때도 평화로운 연맹체가 지향이었으며 왕권은 6부족이 인정하고 승복할 수 있는 덕망있는 사람이 맡았을 것이다. 그러나 석탈해가 계림에서 얻었다는 김알지는 누구였을까? 

그들이 북방에서 남하한 흉노족이었다면 정복민족으로서 정체성을 지키면서 피정복민들을 지배할 효과적인 수단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아마도 골품제도는 그렇게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 그 골품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족내혼은 필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명하기 힘든 또 다른 역사적 함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왜 김알지의 7세손인 미추이사금 때에 가서야 비로소 김씨가 왕위에 등극하느냐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가설을 풀어보았으나 이 부분에 대한 답은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대목이다. 그러나 어떻든 이런 가설이 아니라면 그들의 근친혼을 설명할 길이 없다. 경주 김씨들은 원래 문란한 성전통을 가져서? 그건 아니지 않나.

경주 김씨가 정복민족이었다는 가설은, 그래서 골품제도를 만들고 족내혼을 했으며 나아가 다산을 위해 일부다처 또는 일처다부를 권장했다는 사실을 뒷바침할 수 있는 유력한 논리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든 저렇든 칠숙이 돌아왔다. 그도 화랑이다. 그러므로 그도 설원이나 세종처럼 미실을 사랑할 수 있고 충성할 수 있다.

그런 줄 알았다. 안 그러면 아무리 칠숙랑이 우직하다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미실에 대한 사랑은 15년 세월을 만주를 거쳐 타클라마칸까지 유랑하면서도 불평 한마디 없었던 배경을 잘 설명해 준다. 사랑은 모든 것을 한다. 특히 남자들은 그렇다. 그런데 이 칠숙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소화를 바라보는 눈빛 말이다.

어?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런 식으로 나가다가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가려고 그러는 거지? 작가의 의도가 도무지 짐작이 안 간다. 아무리 '엿장수 마음대로'라는 말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역사를 너무 걸레조각으로 만들면 시청자들의 반감을 사지 않을 수 없다. 칠숙이 소화를 사랑하게 되면 선덕여왕의 등극에 반발해 일으키게 될 반란은 어쩌란 말인가?

실로 귀추가 주목된다. 칠숙, 한 눈 팔지 말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기를… 그리고 그건 법도에도 어긋나는 짓이란다.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