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법'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1.03.23 근초고왕, 이혼녀의 재혼금지 필요한 이유? by 파비 정부권 (13)
  2. 2009.09.13 선덕여왕과 천추태후로 살펴보는 근친혼 by 파비 정부권 (54)

오랜만에 드라마 근초고왕 이야기를 해볼까한다. 사실 근초고왕이 백제 역사상 가장 강성한 군주였다는 것은 알겠지만 요서지방까지 경략했다는데 대해서는 아직 미심쩍은 감이  없지 않다. 당시의 백제는 아직 한강 일원만을 차지한 자그마한 나라에 불과했다. 여전히 경기남부, 충청 이남은 마한이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민족적 자긍심을 세우는 데는 이만한 드라마도 없는 것 같다. 요동은 고구려가, 요서는 백제가 차지하고 있었다는 역사적 가설이 사실이었으면 하는 바람은 역시 나도 알량한 민족주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반증 아니겠는가. 빨간 티를 입고 월드컵 경기장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때가 사실 엊그제다.

그런데 이런 근초고왕을 민족적 자긍심까지 더하여 재미있게 보다가도 어쩌면 꼭 이렇게 이야기를 꼬아야 하나 하는 게 있다. 바로 근초고왕의 제1왕후 부여화가 낳은 아들 이야기다. 그러니까 이 아이가 누가 아이냐 하는 것인데, 말하자면 요즘 거의 모든 드라마에 동시에 소재로 등장한 출생의 비밀이 여기서도 나오는 것이다.

부여화는 근초고왕 부여구와는 친족이다. 백제의 왕족들이 부여 씨라는 성씨를 사용한 것을 보면 그들이 스스로 부여의 후예를 자처하고 있다는 말이겠다. 후에 성왕은 도읍을 사비로 옮기면서 국호를 남부여라 고치기도 했으니 이는 과장이 아니다. 백제 민족의 기원이 만주에 있다는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다.

부여화는 고이왕통의 후손이요, 부여구는 초고왕통의 후손이다. 이 두 세력은 왕권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숙적으로 백제를 반분하고 있다. 비록 부여구가 어라하(왕)라고는 하나 고이왕통의 위례궁을 무시할 수 없다. 그리하여 부여구는 제1왕후의 자리에 부여화를 앉힌 것이다. 이른바 정략결혼을 한 것.

그런데 문제는 이 부여화가 부여구와 혼인하기 전에 고구려 태왕의 왕후였다는 사실이다. 부여구가 왕이 되기 전 선대왕은 부여준이었다. 부여준은 부여화의 아버지다. 즉, 고이왕통의 수장으로 어라하가 되었던 것. 허나 초고왕통에 비해 세력이 약했던 그는 고구려의 힘을 빌리기 위해 딸을 고국원왕에게 시집보낸다.

부여화는 우여곡절 끝에 백제로 돌아왔으며, 어라하의 위에 오른 부여구와 혼인했다. 그리고 곧 임신을 하게 된다. 문제가 되는 것은 부여화가 고구려 태왕의 부인이었다가 부여구의 부인이 되고 다시 임신을 한 다음 아이를 낳기까지의 시간이 열 달을 넘지 못한다는 것이다. 참 기가 막힌 일이다. 

달을 채워 아이를 낳아도 의심의 눈초리들이 야수처럼 번뜩이는 판에 부여화는 칠삭둥이를 낳았다. 고이왕통의 근거지 위례궁을 제거하고자 호시탐탐 노리는 부여구의 가신들이 이 기회를 놓칠 리 없다. 이들은 부여화가 임신하자마자 소위 참요란 것을 만들어 민간에 퍼뜨렸다. 한번 들어보자.

콩밭에 콩을 심었는데 어째 팥이 열렸는가.
콩밭에 콩을 심었는데 어째 팥이 나는가.
어라하의 콩밭에 고구려 팥이 열렸네.
어라하의 콩밭에 고구려 팥이 열렸네.
팥은 팥밭으로 보내야지, 보내야지, 보내야지.
고구려 팥밭으로 보내야지. 

실로 불경스런 노래다. 백제의 왕후가 고구려왕의 아이를 가졌다는 말이 아닌가. 이런 노래를 만들어 퍼뜨린 의도는 뻔하다. 부여화가 낳은 아이가 태자에 책봉되는 것을 막고 제2왕후 진홍란이 낳은 아이를 태자로 만들기 위함이다. 진 씨 가문은 전통적으로 초고왕통의 확고한 후견인.    

열 달을 채운 아이가 태어나도 고구려 왕의 씨앗이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는 자들에게 일곱 달 만에 아이를 낳은 부여화는 여간 고마운 것이 아니다. 마침내 국태공(부여구의 할아버지)은 아이를 엎으라고 명하고, 부여화는 위례궁에서 동원한 군사의 도움을 받아 궁궐을 탈출해 위례궁으로 간다.

자, 그런데 이 지점에서 따져볼 것이 있다. 부여구가 부여화를 제1왕후로 삼은 것은 고이왕통을 따르는 세력 때문이다. 그들에겐 초성리의 군사력이 있다. 이들을 끌어안지 않고서 부여구가 마한을 경략하고 고구려와 대방 땅(지금의 황해도 일대)과 요서지역을 놓고 다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그는 위례궁의 공주 부여화에게 제1왕후 자리를 준 것이다. 제2왕후는 초고왕통의 핵심이며 자신의 가장 확실한 후원자인 진 씨 가문에 내어주었다. 백제는 아마도 왕후를 두 명 두었던 모양인데, 이는 두 파로 갈라진 백제의 세력균형을 위한 고육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떻든 그처럼 용의주도한 부여구가 왜 이런 문제에 대해선 생각조차 못한 것일까? 고구려 왕후를 데려다가 자신의 왕후로 삼았을 땐 이런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예상했어야 했다. 탕평책으로 분열된 백제 내부를 하나로 통일하겠다던 근초고왕의 계획은 오히려 역효과를 낳게 되었다.

그건 그렇고 혼인한지 일곱 달(혹은 여덟 달) 만에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들은 부여구의 심정은 어떨까? 그도 사람인즉, 갈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도대체 남자들이란 그렇다. 루이지 조야는 <아버지란 무엇인가>란 책에서 어머니가 ‘원초적 존재’인데 반해 아버지란 존재는 ‘제도적 산물’이라고 폄하한다. 즉, 아버지와 자식은 불완전한 관계다.

아버지들은 자기 자식이 하다못해 발가락이라도 자기와 닮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안하다. 요즘에야 시대가 변해 많이 달라졌다지만, 옛날 사람들은 누군가가 아이를 보고 “아이고, 아버지는 안 닮고 엄마만 닮았네”라고 하면 매우 경망스럽거나 남의 가정에 돌을 던지는 아주 불순한 의도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비난했다.

그럴진대 부여구의 심정은 어떨까? 모르긴 몰라도 찢어질 것이다. 어쩌면 그는 의심하면서도 마치 칭기즈칸처럼 행동할는지 모른다. 칭기즈칸은 사랑하는 부인 보르테가 낳은 아버지가 불분명한 첫 번째 아들 주치를 자신의 장자로 인정했다. 메르키트족에게 납치되었던 보르테는 구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출산을 했던 것이다.

우리 속담에 “소 도둑질은 해도 씨 도둑질은 못한다”는 말이 있지만, 이 말을 거꾸로 해석하면 부자지간은 어디가 닮아도 닮아야만 한다는 족쇄로 귀결된다. 이런 속담을 철썩 같이 믿는 한 남자가, 만약 내 아이가 나와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다면? 아무리 살펴보아도 도무지 닮은 점을 찾을 수 없다면? 돌아버릴 것이다.

하긴 부여구는 평범한 남자가 아니다. 그는 백제의 전성시대를 구가할 근초고왕이다. 그는 아마도 칭기즈칸처럼 현명한 판단을 하게 될 것이다. 초고왕통과 고이왕통의 화합과 단결을 위해. 하지만 그가 내미는 다정한 손을 고이왕통은 잡을 생각이 없다. 부여구의 가신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똑같이 부여화의 조산을 이용하려 한다.

한차례 피바람이 불 것이다. 한 여자의 이른 출산으로 인한 피바람.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과거의 전철을 우리 민법은 알고 있었던 것일까? 우리 민법 811조에 보면 ‘재혼금지기간’이란 것이 있다. ‘여자는 혼인관계가 종료한 날로부터 6월이 경과하지 아니하면 혼인하지 못한다. 그러나 혼인관계의 종료 후 해산한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무슨 말인가. 단서를 보면 무슨 뜻인지 금방 알 수 있다. ‘혼인관계의 종료 후 해산한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란 이혼한 남편과의 사이에 생긴 아이를 이미 낳았으므로 더 이상 분쟁의 소지가 될 사정이 없어졌다는 의미이다. 이 조항은 여성의 입장에서 논란이 많긴 하지만, 입법취지는 태어난 아이가 누구 아이인지 확정함으로써 보호하려는 것이다.

물론 페미니스트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분명히 여성에 대한 지나친 인권침해다. 태어날 아이와 이혼한 전 남편과 재혼할 새로운 남편의 권리를 보호하고 나아가 불필요한 분쟁에 휘말리게 될지도 모를 여성을 보호한다는 차원에서 이 조항은 꼭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면 차라리 남녀 모두 재혼금지기간을 두었으면 좋았을 일이다.

낡은 기억에 의하면, 10여 년 전부터 이 조항이 여성의 인권을 침해한다고 하여 폐지하자는 입법 움직임이 있었지만,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다. 반대로 이혼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측에선 민법상의 이 규정을 폐지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해서 남녀 모두 1년이 경과해야 재혼할 수 있도록 규제를 강화하자고 주장할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부여구의 명백한 실수다. 그는 왕좌에 오르자마자 결혼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부여화와 동침하는 것이 급했을까?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프게 사랑했던 사이라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이해는 간다. 하지만 그는 평범한 남자가 아니다. 어라하다. 백제의 군주, 위대한 백제를 일군 근초고왕이 바로 그가 아닌가.

고구려왕으로부터 부여화를 탈취해온(구출이라고 해야 되나?) 후에 바로 혼인을 할 것이 아니라 6개월의 재혼금지기간이 지나고 혼인을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긴 그러면 너무 재미없을 것이다. 부여화의 조산은 위례궁의 고이왕통과 근초고왕 세력의 투쟁에 불을 붙였다. 제2왕후 진홍란(원래는 부여국 마여왕의 자손 위홍란)과의 싸움도 재미다.

그러고 보니 부여화가 칠삭둥이를 낳은 것은 모두 시청자의 재미를 위한 것이라는 말이 되는데…, 그렇다면 이렇게 불만을 할 일은 아니다. 주인공 근초고왕 역을 맡은 감우성의 연기는 역시 볼만하다. 실로 그는 명배우다. 그런데 북방의 대유학자라는 고흥 역의 안석환, 너무 웃긴다. 자꾸만 추노의 그 방화백이 생각나서 그런 것일까?

“으힝, 임자, 오늘밤 어뗘?” 하던 그가 “그러니 네가 유학을 잘못 배웠다는 것이야” 하고 점잔을 피울 땐 정말이지 웃음이 아니 날 수가 없다. 나만 그런 것일까? 그의 연기에 감탄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나는 아무래도 고흥을 보면서 자꾸만 방화백이 흘리던 그 음흉한 웃음이 생각나니…. 으흐흐~ 

Posted by 파비 정부권

우리는 선덕여왕을 통해 신라가 얼마나 성적으로 개방된 사회인가 하는 걸 알았습니다. 물론 이것은 신라민 전체에 해당되는 건 아니고 골족, 즉 성골과 진골귀족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개방적인 성풍속은 이미 오래전부터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고 있던 것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처용가를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처용가는 개방적인 성풍속과는 좀 다른 면이 있습니다. 사실은 아내의 외도를 눈 감아주는 마음 넓은 처용에 대한 이야기지요. 이에 감복한 도깨비(역신)가 은혜를 갚는 뜻에서 처용의 그림이 붙어있는 집에는 절대 들어가지 않겠다는 룰을 세웁니다. 그러나 어떻든 이런 처용의 관용은 오늘날의 시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대목입니다.

신라에 이어 등장한 고려왕조도 성풍속이 개방적이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어쩌면 족내혼에 관해선 신라보다 더 발달했을지도 모릅니다. 고려왕실의 족내혼은 왕씨 정권을 지키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려 4대 임금 광종은 족내혼을 권장하기까지 했습니다. 지방 호족세력을 완벽하게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근친혼을 통한 결속은 필수였을 것입니다. 

엊그제 <선덕여왕>에서 비담과 덕만공주의 혼사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성공하지 못한 문노의 계책이었지만, 족내혼에 관한 좋은 예시가 될 수 있겠습니다. 비담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진지왕과 도화녀의 아들인 비형과 실존인물 비담의 합성모델로 진지왕과 미실 사이에서 난 아들입니다. 즉 진평왕과는 사촌지간이란 얘기죠. 덕만공주에게는 5촌 당숙이 됩니다.  

우리나라 민법에는 8촌 이내의 친족은 결혼할 수 없도록 정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4촌 이내의 친족이 아니면 결혼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일본법으로 말하면 지금이라도 덕만과 비담은 합법적으로 결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선 불법입니다. 2005년 이전에는 동성동본간 결혼도 불법이었습니다. 이런 법외혼 관계는 부정기적인 정부의 특별법을 통해 구제받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이 민법규정(동성동본 금혼법)에 대해 위헌심판제청이 일어나자 유림에서는 "동성동본금혼제는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단군건국초부터 전래되면서 관습화된 우리 민족의 미풍양속으로서 전통문화의 하나" 라고 주장했지만, 최근 드라마 천추태후나 선덕여왕을 보면 이런 주장들이 얼마나 허구인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어쨌든 고려시대까지도 근친혼은 불법이 아니었으며 위에서 말한대로 권장되기까지 했습니다. 신라시대는 1부1처제 사회였습니다. 물론 고려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왕은 달랐을 것입니다. 왕은 나라를 통치하지만 한편 자손을 번창시켜 왕실을 안정시킬 의무가 있습니다. 물론 이는 의무이자 권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왕들은 여러 명의 부인을 두는 것입니다. 미실의 경우에 색공을 드는 여인이란 특수한 신분을 빼면 그녀도 1부1처제의 원칙에서 벗어나지는 않습니다. 만약 미실이 그녀의 계책대로 황후에 올랐다면 어땠을까? 이건 좀 복잡한 문제입니다. 그랬다면 세종과는 이혼해야 되겠지요. 아무리 미실이지만 두 사람과 결혼관계를 유지할 순 없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상대는 일국의 황제입니다. 미실과 설원공의 관계는 단지 연인관계일 뿐입니다. 미실과 설원공의 사이에서 난 보종은 실제 친자관계를 인정하여 미실의 아들로 인정 받습니다만, 설원공은 그저 연인일 뿐입니다. 세종이 묵인하고 있을 뿐이죠. 기분 나쁘면 이혼할 수도 있겠으나, 이사부 장군의 아들 세종은 감정보다는 권력을 택했습니다.

어쩌면 미실보다 세종이 더 무서운 사람입니다. 아니라구요? 멍청해서 그렇다구요? 음, 그러고 보니 그것도 그렇습니다. 하긴 드라마에서 세종과 하종 부자는 좀 멍청하게 그려지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러면서도 욕심은 배밖에 나와 왕이 되고 싶어 안달입니다. 다 미실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지요. 하여간 선덕여왕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대체로 멍청합니다.

일본의 경우에도 왕족은 철저하게 족내혼을 통해 혈통을 보존합니다. 현 아키히또 일왕이 역사상 최초로 왕족 외의 여자와 결혼했다고 해서 세간에 화제가 된 적이 있다는 사실은 앞서 제 블로그에서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 이같은 족내혼 또는 근친혼은 최근 들어,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2000년대 들어 TV사극에 자주 등장합니다. 


태조왕건, 제국의 아침 그리고 가장 최근엔 천추태후, 이 천추태후는 그야말로 근친혼을 다룬 드라마라 할 만큼 본격적이고 노골적이었습니다. 사촌형제들이 결혼을 하거나 숙질 간에 혼인을 하는 예는 허다한 일에 속합니다. 심지어 자매가 동시에 왕후로 간택되어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로 경종에게 시집 간 천추태후와 헌정왕후가 그렇습니다. 

경종과 이들 두 자매는 사촌지간입니다. 경종이 죽자 헌정왕후는 숙부인 왕욱과 연애를 하게 되고 그 사이에서 아들을 얻게 되는데 이가 곧 대량원군입니다. 그리고 이 대량원군이 강조의 정변으로 실각한 목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되는데 바로 현종입니다. 우리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이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왕욱과 헌정왕후는 결혼한 사실이 없습니다. 그들 두 사람은 연인었지만, 부부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고려 왕실은 그들 사이에서 난 아들을 왕족으로 인정하여 대량원군이란 칭호를 내리고 마침내는 왕좌에까지 앉혔습니다. 법도보다는 혈통을 중시한 것입니다.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인간의 법도 위에 신국의 도가 있다." 김대문의 조부인 예원공은 유학에 심취하여 근친간 결혼을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그의 모친이 타이르며 한 말입니다. 신국의 도. 도대체 이 신국의 도란 무엇일까요? 예원의 모친이 말한 바처럼 인간의 도리보다 위에 두었다는 것은 국가의 존망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제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는 <천추태후>에서는 목종이 물러나고 현종이 등극했습니다. 그리고 현종이 결혼을 하게 되는데요. 선대왕인 성종의 딸과 혼인을 합니다. 성종으로 말하자면 현종의 어미인 헌정왕후의 오라비이니 성종의 딸은 모계로 보면 4촌지간입니다. 그러나 현종의 아비 왕욱은 성종과 헌정왕후의 숙부가 되니 부계로는 5촌 당숙이 되는 것입니다.

이 국혼으로 다시 실권을 잡은 성종대의 경주 유학파들은 여세를 몰아 천추태후를 탄핵하며 목소리를 높이는데, 그 사유가 장히 헛갈립니다. 천추태후가 사통을 하였다고 하지만 그들이 세운 현종 임금 역시 천추태후의 동생인 헌정왕후가 사통을 하여 낳은 혼외 자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현종은 결코 왕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지요. 

드라마가 역사를 각색하다 보니 일어난 혼선이라고 보여집니다.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잡고 천추태후와 김치양을 역도로 몰아 처단하는 것으로 끝냈다면 간단한 것이었을 텐데 말입니다. 어쨌든 고려시대에도 신라의 신국의 도와는 좀 다르겠지만 그 비슷한 사상이 통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근친혼도 결국 역사의 산물이었다, 이런 말입니다.

천 년도 훨씬 전의 일을 이해한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어쩌면 당시에는 친형제 자매가 아니고선 혈족이란 유대감도 별로 없었을지 모릅니다. 삼촌이니 사촌이니 하는 개념조차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런 개념들보다는 신국의 도가 우선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대체 그 신국의 도란 무엇이었을까요?  

근친혼에 '도'라는 거창한 의미까지 부여한 걸 보면 어떤 특별하고 심오한 사상이 숨어있었던 것은 틀림없어 보입니다만.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