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 해당되는 글 9건

  1. 2012.08.27 비 오는 날 '치맥'하자는 초딩딸 by 파비 정부권
  2. 2011.01.28 올릴 게 없어서 올리는 썰렁한 이야기 by 파비 정부권 (3)
  3. 2010.08.23 초딩 딸아이가 쓴 동화, 참 예술이네 by 파비 정부권 (3)
  4. 2010.08.20 초딩 딸이 쓴 시, 정말 예술이네 by 파비 정부권 (10)
  5. 2010.03.11 폭설에 묻힌 춘삼월 만날재의 하얀 사진들 by 파비 정부권 (2)
  6. 2009.12.06 초딩 딸, "아빠, 약속 지키기 전에 쓰러짐 안돼" by 파비 정부권 (15)
  7. 2009.05.20 내조의 여왕, 생활속의 사랑법 by 파비 정부권 (1)
  8. 2009.01.29 우리딸, 관광지에서 발칙한 남녀의 키스를 방해하다 by 파비 정부권 (7)
  9. 2008.09.19 유치원 졸업생 딸에게 보내는 편지 by 파비 정부권 (19)

“아빠, 오늘 비도 오는데 치맥이나 할까?”

딸이 말했다.

“……”

“치킨은 내가 다 먹고 맥주는 아빠 혼자 다 마시고, 어때?”

“……”

“좋은 생각이잖아.”

“돈은 누가 낼 건데?”

“당연히 아빠가 내야지.”

좋은 의견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헷갈린다. 암튼, 우리딸, 확실히 영재가 맞는 거 같다. 같다.



2012/ 8/ 23/ 페북 담벼롹

Posted by 파비 정부권
TAG , 치맥
이틀인지 사흘인지 블로그에 글을 안 올렸더니 좀 불안하네요. 이런 증상도 폐인이니 뭐니 그런 거 아닐는지... ㅎㅎ 제가 요즘 다른 데 신경 아닌 신경 쓸 일도 좀 있고... 늘 하는 핑계지만 매일 술 마신다고 정신 없어서, 드라마를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쓸 게 없을 수밖에.

'닥본사'에 실패하면,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다음캐쉬가 한 방에 700원씩 날아간다는... 휴~

월요일었던가요? 고등학교 동기놈과 옛날 태양극장 근처 어디서 소곱창에 소주 한잔 했습니다. 구제역이다 뭐다 해도 곱창 그거 참 맛있더군요. 가격도 저럼하고요. 그렇게 맛있게 먹고 있는데, 한떼의 아주머니들이 들어와서는 "야야, 빨리 틀어봐라. 시작할 때 안 됐나" 하면서 일렬로 티브이 앞에 늘어앉더군요.

잠시 있으니 또 두 명의 아주머니 들어오셔서는 "야야, 동해야 벌써 시작 했나? 동해 우찌 됐노." 하시면서 또 그 옆에 열지어 앉으시는 겁니다. 정말 티브이 드라마에 목숨이라도 건 듯이 보였습니다. 모두들. 무슨 소린가 했더니 8시 반 연속극 <웃어라, 동해야>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그 연속극 한번도 안 봐서 무슨 내용인지는 모릅니다만, 저렇게 연속극 하나 보기 위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뛰어오는 모습을 보니 신기하기만 하네요. 드라마 리뷰를 주로 쓰는 블로거인 제 입장에서도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 동해가 그렇게 잘나가는 중이었어?' 

아주머니들은 1오 횡대 대형으로 티브이 앞에서 30분간을 앉아 <웃어라, 동해야>를 시청한 다음, 역시 우리처럼 소곱창을 시켜 소주를 한잔씩 걸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아마도 그날이 곗날이었던 모양입니다. 물론 계모임의 화제도 주로 동해 이야기였습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가 아니고, 웃어라 동해야, 말입니다. 

하도 쓸 말이 없어서 대충 재미없는 이야기 좀 했습니다. 그분들 티브이 시청하는 뒷모습 찍어놓은 사진도 있지만, 어느 구석에 있는지 찾기도 어렵고, 사진 한장 없으면 이 포스트가 너무 썰렁할 것 같아서 대신 우리 딸이 우리집 화장실 문에 붙여놓은 경고문 내지 주의문 비슷한 거 하나 올려놓고 물러갑니다. 끝. 

 
Posted by 파비 정부권
역시 오늘 아침에도 별로 올릴 만한 소재가 없어서 우리 딸아이가 쓴 이야기를 맞춤법, 띄어쓰기 이런 거 가급적이면 안 고치고 그대로 올릴까 합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우리 딸아이는 스타 기질이 있어 제 사진과 글 기타 자기와 관련된 이야기를 올리는 걸 무척 좋아합니다. 

엊그제도 자기가 쓴 시를 올려주었더니 모른 척 하면서도 입가에 번지는 미소가 자못 볼 만했습니다. 오늘 이 글을 올리기 전에도 "얘, 엊그제 네가 쓴 시 올렸더니 사람들이 굉장히 좋다고 하더라. 너 진짜 유명해지겠다!" 했더니, 금세 입이 벌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초딩 딸이 쓴 시, 정말 예술이네

아래의 글도 역시 창원시 합포구 진전면 미천마을에 사는 송창우 시인이 여름방학을 이용해 개설한 독서캠프에서 배운 결과입니다. 독서캠프는 아마도 경남여성회가 주최해서 열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송창우 시인은 대학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님이라 그런지 효과가 만점인 것 같습니다. 

언제 우리 경남블로그공동체에도 모셔서 글쓰기 강의를 한 번 들어보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물론 회원님들의 생각을 들어봐야겠지만요. 

어느날 노랑애벌레는 길을 꿈틀꿈틀 기어 가다가 꽃밭을 보았다. 그 꽃밭은 유채꽃밭이었다. 하지만 아이큐가 낮은 노랑 애벌레는 그 꽃이 무슨 꽃인지 몰랐다. 그래서 날아가는 나비들에게 물었다. "저 꽃이 무슨 꽃이야?"

꽃에 대해 잘 알던 나비는 "유채꽃이야!" 하고 말했다. 그 나비가 말을 하였다. "너도 나비가 되면 저 꽃에 있는 꿀을 먹을 수 있을 거야." 라고 하며 꽃밭으로 날아갔다. 노랑애벌레는 빨리 나비가 되고 싶었다. 왜냐하면 노랑애벌레는 빨리 꿀을 먹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어느날 노랑애벌레는 사람들이 하던 얘기를 들었다. 4살 정도 되는 어린애가 자기 언니에게 물었다. "컴퓨터가 뭐야?" 노랑애벌레는 귀가 솔깃해졌다. "컴퓨터는 정보를 저장하고 정보를 알게 해주는 기계야" 하고 말했다. 노랑애벌레는 새로운 걸 알고나니 기분이 좋았다.


   
꿀이 먹고 싶어 나비가 되고 싶었던 노랑 애벌레가 마지막에 왜 갑자기 컴퓨터를 알고서 기분이 좋아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매우 기특했습니다. 이제 열살 짜리 꼬마치곤 참 잘 썼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기억엔 저는 저 나이 때 이런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글을 쓰는 요령으로 '꽃밭', '나비', '유채꽃', '길', '컴퓨터' 같은 단어를 미리 고르도록 하여 300자 이내로 글짓기를 하도록 시킨 모양이입니다. 그러고 보니 300자 이내에 앞에 열거된 낱말들을 이용하여 글을 짓는다는 게 그리 호락호락한 일은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아, 이거 제가 딸 자랑이 너무 도가 넘어 깊은 산골짝으로 들어서고 있군요. 자칫하면 길을 잃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이 정도로 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마지막이 좀 아쉽습니다. 나비가 되지 않더라도 컴퓨터를 통해 꿀을 구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는 걸 알면서 끝났으면 노랑 애벌레가 한결 행복했을 텐데요.

네, 과제의 제목을 보니 <강제 연결>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강제 연결이라…, 아무튼 저는 처음 듣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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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파비 정부권
오늘은 별로 쓸 만한 소재도 없고 해서, 우리 딸이 쓴 시를 하나 올려볼까 합니다. 우리 딸은 자기 이야기나 사진을 블로그에 올려주는 것을 무척 좋아합니다. 안 올려준다고 투덜거리며 삐질 때가 많은 걸 보면 어쩌면 스타 기질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스타? 아, 이건 좀 아니군요. 아무나 스타 되는 것도 아닌데... ㅋ

아마 이 시는 우리 지역의 송창우 시인이 여름방학을 이용해 개설한 독서캠프에서 배우고 쓴 시가 아닌가 합니다. 저는 아예 시를 쓸 줄도 모르고 읽을 줄도 모르는데, 그래서 그런지 딸이 쓴 시가 굉장히 잘 쓴 작품처럼 느껴집니다. 그게 다 제가 문학에 무디거나 무식해서 그런 것일 테지요. 이 점 특별한 이해를 구합니다. 

띄어쓰기나 맞춤법, 줄 모양은 고치지 않고 그대로 옮겼습니다. 딸아이는 이제 열 살인데 언제부턴가 왠지 가슴에 살이 붙는 느낌이 들어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모자

                               
정혜민

밀집모자 
밀집모자는 둥글다
나의 큰 얼굴 전체를 가려주는 양산
동글동글 보름달 모양같은 밀집모자

밀집모자를 다른 모양으로 만들면 
어떨까? 
세모 모양처럼 뾰족하게 만들면 
좋을까? 

네모모양으로 만들어 세워보면
어떨까?
이렇게 다양한 모양으로 만들면
좋을까?

그래도 난 동글한 보름달 모양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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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파비 정부권
TAG , 송창우,

엊그제 밤, 겨울에도 볼 수 없었던 비바람 소리가 윙~ 윙~ 창문을 흔들었습니다. 찬바람이 방안으로 스며들며 떠난 줄 알았던 추위를 다시 몰고 왔습니다. 발이 시리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오죽했을까요. 그리고 두어 시간 후에 다시 현관문을 열고 밖을 내다봤더니 비바람이 눈바람으로 바뀌고 있었습니다.

정원수 너머 어둠에 묻힌 지붕위에 하얗게 눈이 쌓이고 있는 게 보이실 겁니다. 강풍에 실려 온 눈보라가 마치 우리 동네를 북국에 실어놓은 게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였답니다.


플래시를 켜고 찍으니 눈송이가 내려오는 게 보이시죠?


다음날 아침, 세상이 하얗게 변했습니다.
아직 눈보라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겨울보다 훨씬 더 춥게 느껴집니다. 이렇게 추운 겨울은 느껴보지 못했습니다. 그것도 춘삼월에 눈보라를 동반한 강추위를 맛보게 되다니... 그래도 눈을 처음 본 딸아이는 마냥 즐겁습니다.


우리 집 옥상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출근시간인데도 차들이 한 대도 나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오후에 살펴보니 딱 한 대가 나갔더군요. 누군지 몰라도 대단히 용감한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 옆은 우리 집 마당에서 눈사람을 만들고 있는 딸아입니다.

학교에 오지 말라는 문자를 받고 신이 난 딸아이와 함께 만날재에 올랐습니다.  마산만이 보이는군요.
이날만큼은 마산만도 매우 아름답습니다.


만날재 공원에서 우선 사진부터 한 컷. 
그런데 색깔이 이상하군요. 
3인치 모니터 창에 비친 그림도 너무 하얀색이라 눈 때문에 그런가 했는데, 집에서 뽑아보니 영 색감이 아니군요.   


계속 하얗습니다. 저 멀리 마산만의 푸른 물결과 창원, 진해를 가르는 하얀 머리의 산줄기가 보여야 하지만 그저 하얀 도화지 위에 딸아이와 소나무만 덩그러니 그려진 느낌이네요.


음, 여기선 은근하게 배경이 보이는군요. 역시 하얀 눈의 빛깔이 너무 강렬하기 때문일까요?  


빨간 나뭇잎이 너무 곱습니다. 눈속에서 보니 붉은 색이 더 붉어 보이더군요. 나무 이름은 제가 모릅니다. 
저는 고구마 줄기와 담쟁이 넝쿨을 잘 구분 못한답니다. 

한 번은 그런 일이 있었지요. 서울 종로에 갔을 때 도로변에 단지(화분인데 보통단지보다 훨씬 크더군요) 비슷한 것에 심어놓은 식물을 가리키며 한 일행이 물었습니다. 
"니 저기 뭔지 아나?" 물론 그는 저를 잘 아는 사람입니다. 짓궂은 장난이 하고 싶었던 게지요. 
한참을 망설이던 제가 자신 없이 대답했습니다. 
"담쟁이 넝쿨 아닙니까?" 
그러자 사람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앙천대소를 하며 말했습니다. 
"하하하하~ 그럴 줄 알았다. 이기 어떻게 담쟁이 넝쿨이냐, 고구마 줄기지." 

사실 저는 담쟁이 넝쿨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릅니다. 단지 '마지막 잎새'에 나오는 담쟁이 넝쿨이 그때 생각났을 뿐이죠.   


이날은 평일인데도 유난히 등산객이 많았습니다.


만날재 공원에 심어진 조경숩니다. 역시 나무 이름은 모릅니다.


그 이름 모를 나무 앞에 딸아이가 포즈를 취했습니다.
눈밭을 굴러다니던 딸아이가 잠깐 저를 위해 포즈를 취해주었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색깔이 너무 이상합니다.
그래서 카메라를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글쎄 이럴 수가….
노출레벨을 가장 오른쪽에 맞추어 놓았군요. 누가 그랬을까요?
저는 원래 이런 거 손 안대는 편인데, 틀림없이 아들 녀석입니다.
이 녀석은 뭐든 손에 쥐면 가만 놔두는 법이 없거든요.

아무튼 레벨을 다시 가운데로 맞추고 다시 찍었습니다.
이제 제대로 나오는군요.
아뿔싸~, 어쩐지 눈사람 윤곽이 희미하더라니.


에혀~ 눈사람을 눈 속에 파묻은 꼴이 되었네요. 그러나 어쨌든 눈 구경은 실컷 하셨지요? 만날재에 올라가니 도심에서 만난 눈과는 질이 달랐답니다. 발목까지 푹푹 빠지도록 쌓인 눈밭 그리고 아무도 밟지 않은 그 눈밭에서 뒹구는 재미란… 겪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그런 경지라고 할 수 있겠죠.

우리 딸아이는 10년 만에, 정확히는 8년하고 4개월 만에 처음 보는 눈이었습니다. 혹시 어디서 눈을 봤을지는 모르겠는데, 마산에서는 처음 보는 눈이었답니다. 제게도 물어보더군요.

"아빠도 눈사람 오늘 처음 만들어보나?"
"그래."
"아, 그렇구나. 아빠도 그럼 눈 처음 본 거야?" 
"아니지, 아빠 어릴 땐 눈이 엄청 많이 왔었지." 
"그런데 왜 처음 만들어 봤다고 했어?" 
"아, 마산 와서는 처음이란 말이었어." 
"아, 그랬구나. 아빠 어릴 땐 정말 눈이 많이 왔어?" 
"그랬지. 정말 많이 왔었단다. 네 키만큼 눈이 쌓이고 그랬지. 정말 솜사탕만한 눈송이가 하늘에서 떨어지고 그랬지." 

그렇게 말해놓고 생각해보니 제가 어릴 땐 정말 그렇게 생각했었군요. 하늘에서 마술할멈이 솜으로 만든 눈송이를 뿌린다고 말입니다. 평소에 열심히 솜으로 눈송이를 만들어 모아두었다가 기분이 좋을 때 땅위로 뿌리는 거지요. 그러면 하늘하늘 눈송이가 푸른빛을 내며 내려온답니다.

그럼 엊그제 밤처럼 눈보라가 몰아칠 때는 마술할멈의 기분이 매우 안 좋을 땐가 보지요? 아무튼 기분 좋은 하루였습니다. 언제 다시 이런 날이 올 수 있을지…, 자주 왔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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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마산시 내서읍 | 만날재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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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파비 정부권
오랜만에 집에 들어왔습니다. 사실은 오늘은 아내의 생일입니다. 우선 가족들이 밖에서 모두 만나―우리 가족은 남자 둘, 여자 둘입니다―외식이랄 것도 없는 외식을 하고 집에 들어왔습니다. 맥주를 두 병 마셨는데, 피곤이 몰려오면서 잠이 들었습니다. 깨어보니 보석비빔밥이 막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어휴, 다행이다 생각하며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텔레비전을 보았습니다. 

보석비빔밥은 제가 빼놓지 않고 보는 주말 연속극입니다. 천막에 있을 때도 휴대폰이나 노트북 DMB로 꼭 본답니다. 이 시간만큼은 저만의 시간입니다. 보석비빔밥은 별로 건전하지 않은, 아니 아주 불량스러운 의식구조를 가진 4명의 형제자매가 엮어가는 그러나 대단히 건전한(?) 이야기입니다.

어쨌든 저는 그들 네 명의 보석, 비취, 루비, 산호, 호박이 펼치는 불량한 이기심이 그렇게 밉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인간이란 원래 그런 것이지요. 솔직한 그들이 오히려 예쁘기만 합니다. 어렵게 살아온 환경을 탓하며 절대, 다시는 그렇게 살지 않겠노라고 결의를 다지는 모습은 실은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아내와 저, 그리고 막내딸은 연속극을 재미있게 보고 난 뒤에―음, 초딩 2년차인 딸은 TV 앞에서 이렇게 그림을 그렸군요―내일을 기다려야한다는 아쉬움에 한숨을 쉬었습니다. 항상 그렇지만 예고편을 살짝 보고 나면 내일이 정말 궁금하고 기다려지죠. 다시 피곤해지기 시작한 저는 딸아이에게 부탁했습니다.

"혜민아, 아빠 등하고 어깨 좀 주물러주라."
우리 딸은 참 효녑니다. 아들 녀석은 함께 드라마도 보지 않고 어깨도 주물러주지 않습니다.
"그래, 대신 뭐 해줘야 된다."
"뭐?"
"음, 쿠션 같은 건데 보들보들하고 그런 거다. 마트에 가면 판다."
"얼만데?" 
"얼마면 좋겠는데?"
"오천 원 이상은 안 된다."
"에이~"
"그럼 만 원."
"만 오천 원."
"좋다, 만 오천 원" 
"좋아, 그럼 내일 사줘야 된다. 자 그럼 지금부터 십오 분이다."
"오 분만 더 안 될까?"
"좋아, 그럼 이십 분."

계약이 성립되자 딸애는 열심히 어깨와 등을 두드리고, 주무르고, 그러다 간지르고, 꼬집기도 하며 열심히 공급의무를 다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십 분은 금새 흘러갔습니다. 제가 다시 말했습니다. 
"서비스 십 분만 더 해줘야지."
"좋아, 딱 십 분이다." 
딸아이는 단순하고 명쾌합니다.

"머리 뒤쪽도 좀 주물러봐라. 손으로 꼭꼭 눌러봐." 
"머리 뒤는 왜?"
"아유, 뒷머리가 댕기는 게 별로 안 좋아." 
"안 돼. 그럼 아빠 쓰러질지도 모른다." 
"머리 주물러준다고 쓰러지긴 왜 쓰러지냐."
"전에 폐하도 뒷머리 만지다 쓰러졌잖아." 
"아니야, 나는 괜찮아. 빨리 머리 뒤를 꼭꼭 눌러봐."

며칠 전, 카메라 앞에서 갖가지 포즈를 취한 딸 / 오른쪽 끝은 몇 살 때더라?


딸아이의 손은 제법 맵습니다.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꼭꼭 누르면 머리 전체가 시원해지면서 활기가 살아납니다. 가만, 그런데 페하도 쓰러졌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아하~ 그러고 보니 <선덕여왕>에서 미실이 난을 일으켰을 때 진평왕이 직접 신하들 앞에 나나타나자 설원공이 진평왕의 머리 뒤를 눌러 기절시켰던 장면이 기억납니다. 

그래서 머리 뒤를 만지면 아빠가 쓰러질지도 모른다고 걱정했구나. 참으로 기특한 딸이 아닙니까? 뿌듯한 가슴으로 저는 딸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아빠가 쓰러질까봐 걱정돼서 그런 말을 한 거로구나. 혹시 아빠가 쓰러지더라도 엄마가 있잖니. 그러니까 괜찮아."
 
"그렇지만 아빠가 지금 쓰러지면 내일 약속을 지킬 수가 없잖아."  

"……" 
Posted by 파비 정부권
오늘 「내조의 여왕」이 끝났네요. 섭섭합니다. 사실은 오늘 끝난 게 아니라 어제 끝났지요. 그런데 어제 제가 술을 한잔 하는 바람에 마지막회를 보지 못했답니다. 그래서 새벽에 일어나 500원을 내고 컴으로 보았습니다. “아유~ 아까운 내 500원”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어쨌든 그래서 제게는 「내조의 여왕」이 오늘 새벽에 끝난 셈이 되었답니다. 

역시 모든 드라마가 그러하듯 결말은 그렇고 그렇습니다. 요란하게 진행되던 이야기들을 욕조에 물 빼고 청소하듯 그렇게 정리해야 하는 거니까요. 물 빠진 욕조는 황량하지요. 오늘도 그렇군요. 물 빠진 욕조를 보는 기분… 그러나 뿌듯합니다. 오랜만에 드라마 같은 드라마를 볼 수 있었다는 기쁨, 천지애 같은 여자를 만날 수 있었던 보람, 뭐 그런 것이라고나 할까요.  

저는 사실 작년 말에 종영했던 「너는 내 운명」을 보고 난 이후 드라마를 끊었었답니다. 막장드라마로 유명했던 드라마였지요. 막장드라마였다지만 시청률이 엄청났었지요. 막장드라마가 시청률을 리드하고, 다시 방송사들은 그 시청률을 따라 막장드라마를 만들고, 그래서 막장드라마가 대세가 되는 악순환이 사실은 문제로 많이 지적되었었지요.

「아내의 유혹」을 비롯해 많은 드라마들이 막장드라마라는 악평을 받았는데요. 그러나 저는, 글쎄요. 「너는 내 운명」을 따라올 만한 막장드라마는 아직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걸 유식하게 표현하자면, 전무후무하다고 하지요. 하여튼, 「너는 내 운명」이야말로 전무후무한 불후의 막장드라마였다는 게 제 평가예요.


「너는 내 운명」은 자극적인 소재, 비상식적인 설정뿐만이 아니라 출연자들의 연기수준도 거의 막장이었지요. 심지어는 정애리 같은 쟁쟁한 연기자들의 연기마저도 역겨울 정도였으니까. 게다가 거의 매회 등장하는 반사회적 반인간적 요소들은 보는 이들을 불안하게 만들었죠. 그래서 저는 그 막장드라마의 신기원을 열었던 「너는 내 운명」이후 드라마를 딱 끊었답니다.

그런데 「내조의 여왕」이 꽤 괜찮은 드라마란 소문이 귀에 들려오기 시작하면서 다시 ‘이걸 한번 봐?’ 하는 충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제가 드라마 광이었거든요. 거의 모든 드라마를 다 보았지요. 아마 제가 안 본 드라마가 있다면 그건 뒤지도록 재미없는 것임에 틀림없을 거예요.


결국 다시 유혹을 못 이기고 TV 앞에 앉았는데, 아~ 정말 재미있더군요. 근래 보기 드문 재미있는 드라마였어요. “Good!” ‘내조’란 다소 봉건적인 소재를 사용하긴 했지만, 전혀 봉건적인 냄새가 나지 않았고요. 여성비하적인 그런 느낌도 별로 없었어요. 열심히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이야기에 묻어나는 아름다운 사랑, 저는 그게 진짜 사랑 같더라고요.

「사랑과 영혼」이나 「남과 여」, 「라스트 콘서트」에 나오는 로맨틱한 사랑만 사랑이 아니라 이런 사랑이 진짜 사랑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었지요. 생활 속에 진하게 배어 잔잔하게 타들어가는 그런 사랑이라고나 할까요? 저만 감동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감동적인 사랑을 느꼈었지요.

그러니까 어제 그저께군요. 딸과 함께 「내조의 여왕」을 보고 있었는데요. 우리 딸애가 또 저를 닮아 그런지 드라마 꽤나 좋아한답니다. 앞부분 조금 보면 거의 뒤가 어떻게 될 것인지 감 잡아버린다는 점에서도 절 쏙 닮았지요. 저로 말하자면, 우리 마누라가 “그냥 드라마 작가로 한번 나가보지” 하고 말할 정도랍니다. 그야 물론 비웃는 말인 줄 잘 알지만…

드라마를 한참 보다가 딸애가 갑자기 그러는 겁니다. “아빠, 우리 편지 쓰기 하자.” 그러더니 꽃무늬 편지지를 제게 한 장 주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뭐 대충 “앞으로 말 잘 들어라, 까불지 마라, 오빠하고 싸우지 마라.” 이런 식으로 무성의 하게 적어서 주었는데요. 딸애의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 이혼하자!” … 헉~ (애가 테레비를 너무 많이 봤나…)

뭐 장난이니까. 그렇지만 좀 심하군요. 그렇다고 내색하기도 그렇고. 그래서 저도 그랬습니다. “그래 우리 이혼하자. 그럼 지금부터 우리는 남남이다.” 그러자 딸애도 막 웃으면서 그랬습니다. “그래, 이제 우린 남남이다.” 글쎄, 이혼이란 인생최대의 비극이라 할 상황이 우리 부녀에겐 장난거리가 된 것입니다.

마침 TV에서도 천지애와 온달수가 이혼하네 마네하며 심각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었고요. 그런데 갑자기 딸애의 정색을 한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며 진지하면서도 매우 조용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그런데 아빠, 나하고는 이혼하더라도 엄마하고는 절대 이혼하지 마라.” “왜?” “그러면 내가 너무 쓸쓸해지잖아.”

우리 딸애는 아홉 살입니다. 아홉 살이지만 드라마의 앞을 조금만 보면 뒤를 읽어낼 정도로 영민한 아이랍니다. 게다가 초등학교에 입학해 처음 치른 받아쓰기 시험에서 받은 10점짜리 시험지를 들고 와서 칭찬해달라고 조를 정도로 배포도 큰 아이죠. ‘애늙은이’같은 딸아이의 진지한 얼굴을 보며 한숨이 나오더군요. ‘얘가 이혼이 뭔지 알기는 아는가 보네.’

그러나 참 다행인 것은 그때 보고 있던 드라마가「내조의 여왕」이었다는 사실이에요. 아마 다른, 그러니까 막장드라마를 보고 있던 중이었다면 저는 참으로 슬프거나 화가 나거나 했을 것입니다. 딸애는 TV를 보며 말했습니다. “아빠, 쟤들 절대 이혼 안 한다.” “니가 어떻게 아는데?” “에이~ 다 알지. 쟤들은 진짜로 사랑하거든. 그러니까 이혼 못해.”

어젯밤, 딸아이가 술이 취해 일찍 자고 있는 저를 막 흔들며 「내조의 여왕」마지막회 한다며 깨웠지만 저는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모두들 잠든 새벽에 일어나 홀로 이렇게 그 마지막회를 감상했답니다. 우리 딸애의 예언처럼 걔들은―애들이 어른 보고 쟤들 이러면 안 되는 건데, 그걸 따라하는 저도 참 한심하군요―이혼하지 않았군요. 천지애와 온달수 말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오늘은 제 큰아들이―그래봤자 아들 하나 딸 하나, 둘입니다―수학여행 가는 날입니다. 서울로 간다는군요. 아들은 초등학교 6학년입니다. 우리 때는 초등학교는 경주로, 중고등학교는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갔었는데. 어제 저보고 5시 반에 깨워달라고 부탁했는데 깨울 시간이 다 돼가는군요.

오랜만에 드라마 같은 드라마를 보고나니 기분이 좋습니다. 천지애의 본명이 김남주였던가요? 저는 원래 김남주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좋아하지 않았다기보다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앞으로는 좋아해줄 생각입니다. 훌륭한 드라마, 훌륭한 연기자는 많이 좋아해주고 응원해주는 것이 막장드라마를 퇴출시키고 좋은 드라마를 안방에 앉히는 첩경이 아닐까 해서요…  

음~ 이제 아들놈 깨워 수학여행 보내야겠군요. 자기네 학교 운동장에서 6시 30분에 버스가 출발한다니까요.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
설 연휴에 잠시 짬을 내 거제도에 다녀왔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바다가 싱그럽습니다. 와이프의 친구가 거제도에서 장사를 한답니다. 일이 바빠 마산에 넘어오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준비해둔 오피스텔에서 하루밤 묵었습니다. 그 친구의 백화점 내 골프웨어 가게에도 들렀는데, 아쉽게도 우리는 사 입을 옷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피스텔 유리창 밖으로 조선소가 보인다.


우선 가격대가 사람 기를 팍 죽여 놓더군요. 거기 옷 한 벌이면 제 평생 입을 옷을 살 수 있을 듯싶었습니다. 물론 조금, 아니 과장으로 많이 화장한 말이긴 하지만…. 어쩌면 과장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여간 저로서는 계산이 잘 안 되는 숫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옷을 입고 아마도 골프를 치는 모양입니다.  

그 옆 가게에서는 골프채를 팔고 있었는데 가격대가 최저 25만원 대에서 최고 95만 원대까지 있더군요. 물론 그것보다 더 비싼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직접 살펴보는 게 왠지 두려워서 슬쩍 지나가면서 곁눈질로 보았거든요. 왜 그랬을까요? 마음속으로는 저거 한 번 빼들고 이리저리 돌려보고 싶었지만, 마치 부잣집 담 넘어보기가 쉽지 않은 것과 같았습니다.  

이거 혹시 못 가진 자의 비굴함이 아닐까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오늘은 주제는 이 이야기가 아니랍니다. 거제도에 갔으니 당연히 거제도 유람을 했겠지요? 추운 겨울날 어디를 갈까 고심을 하다가 바람의 언덕에 가기로 했습니다. 언젠가 <블로거스 경남>에서 바람의 언덕이 매우 훌륭한 관광지라고 격찬을 한 걸 보았던 기억이 났기 때문입니다. 기억은 가물거리지만, 발칙한 생각님이셨던가요?

몽돌해수욕장의 급경사에 쩔쩔매는 우리 딸내미. 뒤에 보이는 녀석은 아들내미.

그러나 바닷가에서는 승리의 V자.


그래서 그곳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장승포를 돌아 구조라해수욕장을 지나고 학동 몽돌해수욕장을 거쳐 달렸습니다. 가던 길에 잠시 구조라와 몽돌해수욕장에 내려 시원한 바닷바람에 몸을 맡기기도 했습니다. 바닷물을 머금은 구조라 해변의 모래사장은 정말 고왔습니다. 오래전 총각 시절, 친구 종길이와 신안 비금도에서 보았던 명사십리의 모래에도 뒤지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길은 구불구불 바닷가 언덕을 기어가고, 파아란 바다는 햇빛에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구불구불 해변을 달려 마침내 바람의 언덕에 닿았습니다. 바람의 언덕에는 많은 사람들이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즐거운 듯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바람의 언덕은 해변으로 달려오던 산이 멈칫거리며 뭉쳐져 만들어놓은 커다란 놀이터 같았습니다. 놀이터 아래는 절벽이 깎아지른 모습으로 서있었습니다. 이름처럼 바람이 시원했습니다. 무척 추운 날씨였지만, 바람이 참 시원하다고 느꼈습니다. 손사래 치는 아이들을 뒤로 하고 나는 언덕위로 향했습니다. <전망대 가는 길>이란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이왕 이곳까지 왔다면 당연히 전망대에 가서 사방을 조망하는 것이 도리 아니겠습니까? 그리하지 않는다면 전망대에 대한 무례이기도 하거니와, 두고두고 후회가 될지도 모릅니다. 구두를 신은 폼이지만, 관광지의 전망대에 오르는 게 무에 그리 대수일까 싶었습니다. 

바람의 언덕. 그래도 여기는 시원했다. 아지랑이 뭉실한 봄에 다시 오면 좋겠다.

저 위 올라가는 저 부부를 말리지 않은 게 후회가 됐다. 나중에 욕 좀 했을 거다.


제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갔습니다. 올라도, 올라도 끝없이 펼쳐진 구불거리는 나무계단들만이 우뚝 솟아있을 뿐 전망대는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았습니다. 그러고보니 내려오는 사람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미 시작한 일을 중도에서 포기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태산도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다고 옛 성현은 갈파했습니다. 

그러나 후들거리는 두 다리는 제발 돌아 내려가자고 타이르고 있었습니다. 반면, 비 오듯 땀에 젖은 머릿속은 손사래 치는 아이들을 나무라며 올라온 체면으로 갈등이 처연합니다. 결국 어리석은 체면이란 두개골에 포장된 뇌수의 명령에 따라 휘청거리며 나무계단을 따라 올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내 저 위에 전망대 비슷한 것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무너질 듯 흐느적거리던 두 다리는 어느새 힘을 얻어 가뿐해졌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다 얻은 듯 기쁨이 흐르는 땀방울을 타고 함께 흘러내리는 듯했습니다. 자, 조금만 더 힘을 내자. 고지가 바로 저기다!

이곳에서 만난 두쌍의 부부는 시청을 향해 투덜거렸다.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속았으니까.

나무들 사이로 다도해의 섬들이 펼쳐져 있다. 사진은 이렇지만, 실제 풍경은 빵점이다.

답답한 정상의 나무숲 너머로 멀리 외도가 보인다.


여러분, 저는 정상이란 것을 정복해본 숱한 경험 중에 이날처럼 허무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모두들 아시다시피 산의 정상이란 늘 상쾌함, 시원한 전망, 포만감, 승리의 도취 같은 것을 우리에게 제공해주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곳엔 그런 것은 고사하고 사방을 가린 소나무들로 인해 낭패감만 밀려왔습니다. 이렇게 허무할 수가. 이보다 더 나쁠 수는 없었습니다.  

가파른 경사를 타고 내려오는 다리는 천근처럼 무거웠습니다. 게다가 비탈길에 수술한 허리마저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 이거 오늘 완전 왕재수다.’  한참을 내려오다 보니 아들놈이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하도 안 오니까 어떻게 됐나 제 엄마가 가보라고 시킨 모양입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오를 땐 몰랐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던 모양입니다. 

다 내려와서 정상 올라가는 입구에 세워진 표지판을 다시 살펴보았습니다. 아! 그런데 표지판에는 누군가가 4.0km라고 적어 놓았던 것입니다. 4.0km면 산길로서 대단히 먼 거리입니다. 그러나 제 느낌으로는, 그처럼 먼 거리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굳이 이렇게 친절하게 연필로 4km라는 어마어마한 단위를 적어놓았을까요?  

“여기 올라가시면 큰 낭패를 당하게 되니 주의하시오!”  

혹시 이런 뜻이 아니었을까요?

저 뒤 언덕 너머에도 훌륭한 주상절리가 있다. 그러나 거긴 못 갔다. 여기서 너무 진을 뺐다.

외도 가는 유람선 선착장이 바람의 언덕 아래로 보인다.


역시 우리 딸이 반갑게 맞아줍니다. 우리 딸을 보니 땀 흘려 내려온 보람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늦었어?”

그러더니 딸아이가 제 귀에 대고 속삭입니다. 무슨 커다란 비밀이야기라면서 말입니다.

“아빠, 아빠, 저기 있잖아. 어떤 아줌마하고 어떤 아저씨가… 조오기서 둘이서 얼굴을 마주대고… 히힛~ 뽀뽀 하려고 그랬다~ 그런데 내가 딱 쳐다보고 있으니까, 하려다가 못했다. 히히.”

옆에 있던 우리 아들놈은 둘이서 무슨 이야기 했느냐고, 빨리 실토하라고 막 따집니다. 자기 흉 본 거 아니냐고 말입니다. 우리 아들은 늘 그런 식입니다. 제가 딸과 이렇게 귓속말을 하면 틀림없이 자기 흉을 봤으리라고 짐작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 아줌마와 아저씨(실은 젊은 처녀총각이었겠지만. 우리 딸에겐 누구나 아줌마고 아저씨니까), 참 안됐습니다. 하필 우리 딸애가 보고 있었을 게 무어란 말입니까?

아니, 사실은 그게 아니로군요. 하필 우리 딸애도 보고 있고 다른 사람도 많은 그런 곳에서 둘만의 은밀한 뽀뽀를 하려고 한 그분들이 잘못한 거지요. 물론 분위기에 도취돼 감정이 시키는 대로 한 것이라고 이해는 합니다만, 그렇더라도 장소선택에 보다 신중했어야겠지요.  

그래도 저는 그 젊은 선남선녀가 부럽기는 합니다. 장소에 아무런 구애 받지 않고 버젓이 뽀뽀를 하겠다는 용기가 참으로 가상합니다. 우리 때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장소에서는 손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게 뭐 그리 큰 자랑은 아니겠지만요. 요즘 젊은 분들처럼 못해본 것이 후회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래도, 역시, 조금 지나치다는 생각은 어쩔 수 없군요.

그랬거나 말거나, 바람의 언덕엔 여전히 바람이 씽씽하게 불고 있었습니다.

2009. 1. 29.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

1년 치나 쌓여 먼지가 풀풀 나는 이메일을 청소하다가 우리 딸아이 유치원(사실은 어린이집) 졸업식에 보낸 편지를 발견했습니다. 다시금 읽어보니 감회가 새롭군요. 그래봤자 불과 일곱 달 전의 편지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자식 일이란 게 바로 어제 일이라도 감회가 새로운 법입니다. 아직 아이를 안 키워보신 분께는 미안하지만 부모들이란 다 팔불출들이니 할 수 없습니다.

유치원 선생님께서 학부모들에게 내린 지시사항을 멀쩡하게 까먹고 있다가 졸업식 하루 전날 밤에서야 기억해내고 부랴부랴 숙제하듯 쓴 편지라 딸아이에게 좀 미안하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 다시 살펴보니 딸아이를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그리 모자라지 않는 듯합니다. 그래서 여기 팔불출로서 딸 자랑삼아 사진과 함께 올리오니 널리 이해를 구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딸, 혜민아.


네가 어린이집에 아장아장 걸음으로 들어 간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졸업을 하는구나.


엄마 아빠는 우리 혜민이가 정말 대견하고 자랑스럽단다.


처음엔 모든 것이 서툴러 걱정스러웠지만

하루하루 달라지는 우리 딸의 모습을 보며

엄마 아빠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단다. 


유난히 오빠를 졸졸 따라다니며 꼬집고 괴롭히는 게

걱정스럽기도 하지만

그게 다 오빠를 사랑해서 그렇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단다.


그래서 엄마 아빠가 가끔 야단을 치기도 하지만

그래도 오빠하고 다투기도 하고 사이좋게 지내기도 하는

너희들을 보고 있노라면 너무 행복하단다.


그렇지만 이젠 너도 어엿한 초등학생이니까

오빠하고 그만 싸우고 사이좋게 지내도록 하자꾸나.


곧 우리 혜민이가 초등학생이 되는구나.

정들었던 어린이집을 떠나

새로운 선생님과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게 되겠지.


초등학교에 가서도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좋은 친구들 많이 사귀도록 하여라.


엄마 아빠는 우리 혜민이가 공부도 잘하면 좋겠지만

무엇보다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면서 자연을 사랑할 줄 아는

그런 착한 어린이가 되었으면 좋겠어.


마음이 착해지면 얼굴도 예뻐진단다.

고운 마음으로 친구들에게 예쁜 얼굴을 보여줄 수 있는

혜민이가 된다면 얼마나 좋겠니?


사랑하는 우리 딸, 혜민이가

엄마 아빠는 너무도 자랑스럽구나.

벌써 이렇게 건강하게 자라서

이제 어엿한 초등학생이 되다니

정말 대견하고 사랑스럽구나.


혜민아, 사랑해! 


2008. 2.

엄마 아빠가

                                             초등학교 1학년에 다니는 혜민입니다

그리고 초등학교 1학년이 된 어느날, 딸아이가  헐레벌떡 문을 열고 들어와 가방을 벗어던지며 말했습니다. 

"아빠, 나 칭찬해 줘."
"응? 무슨 일인데?"
"오늘 학교에서 받아쓰기 시험 쳤다~ 그리고 나, 10점 받았다~"
"잉? 100점이 아니고 10점? 그게 잘한 거라고 칭찬을 해달라는 거야?"

그러자 딸아이가 말했습니다. 

"빵점보다는 잘했잖아. 그러니까 칭찬해줘야지."

아이는 대단히 자랑스러운 듯 으쓱거렸습니다. 

“······”

“개구쟁이라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

이런 말은 그저 광고 속에서나 하는 말인 게지요.


2008. 9. 19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