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식'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9.10.15 '선덕여왕' 최초의 진골 왕 김춘추, 진실일까? by 파비 정부권 (11)
  2. 2009.08.11 선덕여왕, 덕만은 살고 천명이 죽어야 하는 이유 by 파비 정부권 (11)
  3. 2009.06.15 천추태후, 강조의 변이 삼각관계 때문? by 파비 정부권 (1)
김춘추는 자신이 주도하게 될 일대 혼돈을 앞두고 묘한 웃음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었다. “신라에는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 두 가지가 있어. 하나는 여자가 왕이 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진골이 왕이 되는 것이야. 어느 게 먼저 될까? 여왕? 아니면 진골 왕?” 물론 이는 최초의 여왕인 덕만과 최초의 진골 왕인 자신을 빗대어 이르는 말이란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김춘추가 최초의 진골 왕이었다는 것은 삼국사기에 근거한다. 김부식은 사기에서 혁거세거서간으로부터 진덕왕까지 28대의 왕들은 성골이었으며 태종무열왕 이후로는 진골이 왕이 되었다고 기술했다. 이 말은 진실일까? 애석하게도 김부식은 여기에 대한 아무런 근거도 내놓지 않은 채 그저 간단하게 그렇다고만 하고 있을 뿐이다.  

더구나 성골과 진골이 무엇이며 그 분류기준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다. 그럼에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외에는 고려시대 이전의 역사에 관한 특별한 기록이 없으므로 하는 수 없이 이 짤막한 기사에 대한 의존도가 심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김부식의 말을 금과옥조로 여겨왔다.

즉, 박혁거세왕으로부터 진덕여왕까지는 모두 성골 왕이었으며 김춘추가 최초로 진골로서 왕이 되었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처럼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 『선덕여왕』의 인기는 그동안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던 역사적 사실에 많은 의문점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물론 『선덕여왕』의 역사왜곡이나 자의적 해석에 대해 일각에서 비판의 날이 날카롭기는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던 역사적 사실 또한 그렇게 정교하고 정확한 것이 아니란 점에서 딱히 드라마를 탓할 게재만은 아니다. 드라마가 얼마나 역사적 고증에 철저했는가를 말하기 전에, 우리는 선덕여왕에 대해, 신라의 역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이렇게 따져보니 아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러나 이 시대는 분명 격동기였다. 외부적으로는 삼국이 패권을 놓고 각축을 벌이고 있었으며 내부적으로는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던 시기다. 진평왕 말기와 선덕여왕 말기에 일어난 칠숙의 난과 비담의 난만 보더라도 당시의 권력암투가 어떠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나는 많은 부분 드라마 작가의 편이다. 『선덕여왕』은 드라마라는 도구를 이용해 고대 신라사회를 하나의 그림으로 만들어 보여주는 친절함을 보여준다. 우리는 『선덕여왕』을 통해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나 생활상을 감상하고 상상할 수 있다. 연대나 인물에 대한 각색이 좀 도를 넘었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우리가 보아야할 것은 전체적 맥락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회에서 김춘추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리며 하던 말은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그 말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상식으로부터 나온 것이긴 하지만. “신라 역사에서 아무도 꾸어보지 못한 두 가지 꿈이 있어. 하나는 여자가 왕이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진골이 왕이 되는 것이지. 그런데 그 둘 중 어느 게 먼저 될까? 여왕? 아니면 진골 왕?”

여왕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우리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전하는 왕위 계승도를 부정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왕보다 권력이 더 센 왕후가 있었다고 하는 것은 앞서 <황남대총금관으로 본 선덕여왕 탄생의 비밀> 에서도 살펴보았다. 미실의 권력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신라는 여왕이 등극하는 데 대한 거부감이 별로 없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쨌든 선덕여왕이 최초의 여왕이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역사적 사실이므로 여기에 대해 왈가왈부할 것은 없다. 다만, 김춘추가 최초의 진골 출신 왕이었다는 삼국사기의 기사에 대해선 의문의 여지가 있다. 김춘추 이전에도 성골이 아니면서 왕이 된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실성왕은 왕족이 아닌데도 왕의 사위로서 왕위를 이어받았다. 

물론 실성왕만 왕족이 아니었던 것은 아니고 석탈해도 왕족이 아니었을 것이며, 김미추도 본래 왕족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김춘추 이전의 왕들은 모두 성골이고 김춘추 이후는 모두 진골이라고 했을까? 이 점을 해명하기 위해선 우선 성골이 무엇인지 정의를 내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아직 성골에 대해 명확하게 밝혀낸 학자는 없다. 다만, 김부식의 짤막한 기사에 의존하여 성골과 진골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대세일 뿐. 김부식은 왜 이다지도 불친절한 기사를 작성했을까? 사실은 그도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 이상 아는 게 없었던 때문이었을까? 하긴 그도 선덕여왕 시대로부터 무려 500년 후의 사람이다.  

어떤 사학자는 법흥왕의 율령반포 이후에 신장된 왕권을 바탕으로 성역화된 것이 성골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즉, 왕위계승권의 범위를 성골로 축소함으로써 왕과 왕의 형제들과 그 가족들의 신분을 신성한 것으로 격상시켰다는 것이다. 매우 그럴듯한 논리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이 이론도 법흥왕 이전의 성골/진골을 제대로 해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박혁거세는 신라의 시조왕으로서 최초의 성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하늘에서 왔으며, 그의 왕후 알영부인도 하늘에서 왔다. 김부식의 의중을 정확히 읽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아마도 그는 박혁거세 시조왕으로부터 정통성을 부여받아 왕위를 계승한 왕과 왕족들을 성골이라고 했을 수도 있다. 

그렇게 본다면 석탈해는 남해왕의 공주와 혼인함으로써 성골을 이어받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역시 부마가 되어 김씨족으로 최초로 왕위에 오른 미추왕도 마찬가지다. 내물왕, 실성왕, 눌지왕 등도 모두 부마였다. 이런 사실들은 신라의 전통은 사위에게도 성골의 정통성을 이을 자격을 주었다고 유추해볼 수 있는 자료들이다.

그리하여 성골에 관하여 게 이렇게 정리해보면 어떨까? 시조왕 혁거세거서간으로부터 왕통으로 이어진 집단이 성골이다. 왕통이 끊어졌을 경우에는 사위를 부군으로 삼아 계승시켰다. 이렇게 보면 박혁거세왕으로부터 진덕왕까지 꾸준하게 성골이 이어졌다고 말하는 것이 별로 틀리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예외가 있다. 16대 임금 흘해이사금은 15대 기림이사금이 아들이 없이 죽자 귀족들의 추대로 왕이 되었다고 전한다. 흘해는 10대 내해이사금의 손자였으나 어쨌든 당대의 왕통과는 거리가 먼 친척일 뿐이다. 그런 흘해가 기림이사금의 사위로 부군이 되어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니라 귀족들의 추대로 왕이 되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흘해왕을 끝으로 석씨족은 왕좌에서 멀어지게 된다. 흘해왕 역시 아들이 없이 죽자 그의 사위였던 내물마립간이 왕위에 오르고 이후 김씨족의 전제왕권이 확립된 것이다. 내물왕 또한 그의 아들들이 어린 이유로 사위 실성을 부군으로 삼아 왕통을 계승시켰다. 실성왕에 이어 왕이 된―사실은 쿠데타로 집권한 것이지만―눌지도 역시 실성왕의 사위였다.

김춘추가 최초의 진골 왕이었다는 김부식의 주장은 그렇다면 김춘추는 현존 왕의 사위가 되어 부군의 자리에 오른 다음 그 자격으로 왕통을 계승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을까? 흘해왕의 예외가 걸리긴 하지만, 굳이 성골과 진골을 구분하고자 한다면 이만한 논리가 따로 없어 보인다.

그래도 남는 의문이 하나 있다. 김부식은 태종무열왕이 최초로 진골로 왕이 된 이래 신라의 왕들은 모두 진골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김춘추는 진골이었지만 그가 왕이 된 이후 그의 왕통을 이어받은 자손들은 모두 성골이라고 해야 되는 것 아닐까? 김춘추 이후 형성된 중앙집권적 전제왕권은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의 변화를 가져왔다.

말하자면, 성골이 더욱 강화된 것이다. 그런데 왜 김부식은 김춘추 이후의 왕들은 모두 진골이라고 했을까? 김부식이 이 기사를 쓰면서 성골이란 무엇이며 진골이란 무엇이라고 부연 설명을 달아주는 친절함을 보였다면 오늘날 이런 논란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도 굳이 억지 해석을 하면 해결될 문제이다. 

박혁거세거서간의 성골 전통을 이어받지 못한 김춘추 이래의 왕들은 모두 진골이라고 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김춘추는 반드시 최초의 진골 왕이어야만 한다. 그래야 『선덕여왕』의 다음 이야기가 이어질 수 있다. 바야흐로 자고 있던 용이라고 표현되는 미실이 깨어났다. 그녀를 깨운 것은 다름 아닌 최초의 여왕 덕만과 최초의 진골 왕 춘추다.
 

미실은 그동안 자신이 알지도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두 가지를 이 두 사람을 통해 깨달았다. 하나는 여자도 왕이 될 수 있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성골이 아닌 진골도 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미실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미실이 정리했다는 마음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그녀도 왕이 되겠다고 도전장을 내밀기라도 하겠다는 것일까? 

아무튼 미실의 새로운 도전이 성립하기 위해서라도 김춘추가 최초의 진골 출신 왕이었다는 데 대해선 회의를 품어서는 안 될 것 같다. 최소한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만큼은…. 요 며칠 매일 술자리가 이어지는 바람에 화요일 『선덕여왕』을 오늘 새벽에 일어나서 보았다. 그러면서 들었던 궁금증이 바로 이것이었다. 

‘춘추가 최초의 진골 출신 왕이 맞기는 맞나?’ 술이 덜 깬 것일까? 별 희한한 궁금증도 다 있다. 공부 많이 하신 훌륭한 분이 그냥 그렇다고 하면 믿으면 될 일이지…, 흐흐.
Posted by 파비 정부권
왜? 덕만공주가 선덕여왕 자리에 올랐을까요? 천명공주는 무엇 때문에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일까요? 그보다 한술 더 떠 (드라마상이긴 해도) 천명공주는 왜 죽어야만 했을까요? 삼국사기는 덕만공주를 진평왕의 장녀로 묘사하고 있지만, 삼국유사는 진평왕의 장녀는 천명공주이며 덕만공주는 차녀라고 하고 있습니다. 화랑세기도 또한 유사와 같이 덕만을 차녀라고 하고 있지요. 그러고 보니 유사와 세기가 비슷한 점이 많고 사기만 따로 놀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어째서 천명이 아니라 덕만이 선덕여왕이 되었을까?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삼국사기는 김부식이라는 중앙관료가 정권 차원에서 집필한 역사서입니다. 따라서 당시 집권세력의 이데올로기가 잘 반영된 기사들로 채워졌을 것입니다. 이에 반해 세기와 유사는 집필자의 의도에 따라 보다 자유로운 기사 작성이 가능했으리라 봅니다. 그런 면을 고려한다면, 삼국사기보다는 삼국유사가 더 진실에 근접했을 수도 있습니다. 덕만을 장녀로 묘사한 것도 따지고 보면 신라왕조의 후예인 김부식으로선 당연한 기술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집권세력의 이데올로기든 집필자의 자유로운 의도든 주관이 개입되어있다는 점에선 다르지 않습니다. 유사가 사기에 비해 150 년 정도 후대에 씌어졌다고 하지만 이 역시 별 의미가 없습니다. 이미 많은 세월이 흘렀다는 점에선 두 기사 모두 차이가 없으니까요. 그렇게 본다면 화랑세기의 위작논란도 사실 생각해볼 대목이 많습니다. 화랑세기가 위작이라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위작일 가능성은 없는가?

여기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어떤 역사서든 어느 정도의 위작은 가질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동양의 유명한 역사서로 사서의 바이블이라 할 사마천의 사기도 결국은 기자의 주관적 의도가 개입되었다는 점에선 위작이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사마천이든 김부식이든 일연이든 고증에 많은 땀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화랑세기의 위작논란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화랑세기는 김대문이란 당대의 인물이 당대의 이야기를 저술한 것이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화랑세기가 진본이라고 했을 때 그 폭발력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랑세기가 사실 기존 역사학계의 입장에서 보면 두려운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어찌 되었든 오늘의 이야기 주제는 그것이 아닙니다. 왜 덕만이 천명을 제치고 왕위에 올랐을까? 물론 이 질문은 어디까지나 유사나 세기의 기사를 사실로 가정하고 하는 것입니다. 사기의 입장에 서면 이런 질문은 성립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왜? 당연히 장녀인 덕만이 왕위에 오르는 게 순리니까요. 

그러나 세기나 유사의 눈으로 보면 이는 당연히 들 수 있는 궁금증입니다. 성골 남자가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장녀인 천명을 제치고 덕만이 왕위를 계승했을까? 진평왕이 재위 54 년 동안 왕자를 한 명도 생산하지 못했거나 생산했더라도 모두 죽었다는 성골남진에 대한 의문에 대해선 일단 덮어두기로 합시다. 유사에서도 선덕여왕 등극의 비밀을 여는 열쇠로 성골남진을 지목했으므로 지금으로선 성골남진이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여왕 출현의 이유일 수밖에 없습니다.

선덕여왕 등극의 이유는? 천명이 무능했기 때문
그러나 삼국유사는 단지 성골남진을 지목했을 뿐 차녀인 덕만이 등극한 이유에 대해선 언급이 없습니다. 여기에 대해선 화랑세기가 보다 많은 자료와 정보를 제공하고 있지요. 요즘 《드라마 선덕여왕》의 인기에 힘입어 출판계에서도 선덕여왕 출간 붐이 일고 있습니다. 서점의 신간 코너에 가보면 온통 선덕여왕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주로 화랑세기를 텍스트로 하는 이 소설들은 여러 권으로 이루어진 장편소설이 대부분입니다. 그 중에 한 권으로 된 소설 선덕여왕도 있습니다.

선덕여왕 - 10점
신진혜 지음/창해

   


창해출판사가 간행한 신진혜 저 선덕여왕입니다. 전질로 된 선덕여왕에 질린 독자라면 300여 페이지 정도로 간결하게 만들어진 부피에 우선 안도할 것입니다. 이 책은 주로 덕만이 공주의 신분으로 천명을 제치고 왕위에 오르게 되는 경위와 김춘추와 김유신을 중용해 왕권을 확립하는 과정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야기의 전개가 매우 빠르고 박진감 넘칩니다. 《드라마 선덕여왕》을 보며 들었던 궁금증들을 이 한 권의 책이 충분히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천명공주는 장녀로서 부군(태자가 없을 경우 왕위 계승권 1순위자에 내리는 칭호로서 태자가 생기면 그 지위는 해소된다)의 위치에 오르지만 매우 유약하여 결단력이 없습니다.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제 1의 자질은 결단력입니다. 다른 모든 것을 참모가 해주더라도 오직 하나 이 결단만큼은 어느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결단은 오로지 최고 지도자의 몫입니다. 천명공주에겐 이것이 부족했습니다. 이 결단력에 대한 이야기가 이 책의 전반부에 등장합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화랑세기에서 차용한 것이겠지요. 천명부군은 용춘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용춘은 세속에 관심이 없고 여자 보기를 돌 같이 합니다. 그래서 접근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와 달리 용춘의 형인 용수는 세속적 권력에 관심이 많습니다. 어쨌든 용춘을 좋아하는 천명은 어느 날 모후에게 털어놓습니다. "어머니, 저는 용숙이 좋아요. 용숙공과 혼인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런데 용숙을 용수로 잘못 알아들은 마야부인과 진평왕은 천명의 남편으로 용수를 정하고 맙니다.

이런 불상사가 벌어지게 된 데에는 천명공주의 우유부단함이 작용했습니다. 천명이 차마 용춘이란 이름을 입에 담지 못하고 용숙(龍叔)이라 했던 것입니다. 그리 말하면 응당 자기 마음을 알고 있는 모후가 용춘을 부마로 삼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겠지요. 마음이 유약하고 온순한 사람의 특성이 바로 이겁니다. 남들이 자기 마음을 알아주리라 믿고 확실하고 단호한 어조로 말하길 기피하는 것이지요. 이런 마음은 사실 연약한 희망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말 실수로 용춘이 아닌 용수에게 시집가는 천명공주
사태가 어그러졌으면 문제를 일으킨 본인이 해결해야 함에도 천명은 스스로 해결하지 못합니다. 결국 덕만이 부왕 앞으로 나가 사태의 진실을 고하고 바로잡아 줄 것을 청합니다. 그러나 이미 결정된 왕실의 혼사는 번복할 수 없다는 대답만 듣게 되지요. 이때 진평왕의 옆에서 덕만공주를 바라보던 원광법사는 그녀의 자질이 왕재임을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진평왕에게 덕만의 스승이 되겠다고 자청하지요. 헤게모니가 천명에서 덕만으로 넘어가는 순간입니다. 

오늘 드라마를 보니 내일 천명이 죽게 될 모양이군요. 화랑세기의 기사나 소설 선덕여왕들이 다루는 것과는 다르게 천명공주는 지금껏 강인한 결단력으로 화랑들을 통솔하는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늘은 김서현까지도 발아래 꿇게 만들었지요.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저는 내일 천명공주가 왜 죽어야 하는지에 대해선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출쌍생 성골남진의 저주 때문에 두 명의 공주 중 한 명이 죽어야 한다는 것도 대답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둘 중 누가 하나 먼저 죽든 말든 어출쌍생은 일어난 것이며 성골남진의 저주도 완성된 것이기 때문이죠. 둘 중 하나가 죽더라도 성골남진의 저주가 풀리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죽어야 했을까요? 아니 죽여야만 했을까요? 그것은 제가 생각하기에 성골남진의 저주 때문이 아니라 차녀가 왕이 되어야 하는데 그 이유를 이 드라마에선 만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덕만이 천명을 제치고 왕이 되려면 천명이 무능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드라마에서 천명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천하의 김서현을 발아래 꿇리고 알천과 유신을 복종하게 하는 지도력을 발휘합니다. 부왕인 진평왕보다 더 뛰어난 지도력을 가졌습니다. 이런 천명공주가 살아있는데 덕만공주가 왕위에 오른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게다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다가 왔는지도 모르는 덕만공주가 왕위에 오른다면 이건 천지개벽이죠. 그러니 《MBC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천명공주가 죽지 않고서 선덕여왕이 탄생할 수 없는 딜레마가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 딜레마는 《드라마 선덕여왕》 제작진이 스스로 만든 것일 테지요. 아마 의도는 이런 것이었을 겁니다. 천명을 죽임으로써 자연스럽게 덕만의 왕위계승 문제를 해결하고 또한 덕만으로 하여금 미실과 건곤일척의 싸움을 피할 수 없게 만드는 두 가지 효과를 동시에 노린 것입니다. 이 역시 기발한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제 덕만의 가슴에는 자기 존재를 찾아야겠다는 집념과 더불어 불타는 증오와 분노가 얹어졌습니다.
 
천명공주의 죽음은 덕만을 왕위에 올리기 위한 드라마 제작진의 고육지책
바야흐로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겠군요. 그러나 손실도 만만치 않습니다. 천명공주의 결단성과 지도력에 감탄해 마지않던 시청자들의 실망이 바로 그것입니다. 천명의 예기치 않은 죽음은 그간 천명에게 성원을 보내던 수많은 시청들에게 허탈감을 안겨줄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 이 손실조차도 드라마 제작진의 의도일지도 모릅니다. 그 실망과 허탈감은 미실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고, 이 분노는 덕만과 유신에 대한 응원으로 승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이 연상되는 대목입니다. 어쨌든 천명공주의 죽음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제가 일전에 올린 글 중에 "쌍생의 저주를 풀기 위해선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둘 중 하나가 죽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새로운 예언을 만들어내는 것이다"라고 쓴 적이 있습니다. 저는 두 번째 경우의 수로 쌍생의 저주를 풀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결국 첫 번째 방법으로 가고 마는군요.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둘 중 하나가 죽는다고 저주가 풀리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저주를 푸는 방법은 단 하나 밖에 없습니다. 성골남진이면 성골여왕이 등극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라인들은 간단하게 이 문제를 해결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겐, 아니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썼던 시절의 우리들에게도 도저히 풀기 어려운 난제였을 성골남진을 신라인들은 너무나 쉽게 처리했습니다. "남자만 왕이 되어야 한다는 법이 있는가? 성골 남자가 없으면 여자가 왕이 되면 그만이다!" 이렇게 말입니다.     

그러나 아무튼 아쉬운 건 사실입니다. 천명공주를 죽이지 않고 보다 현명한 방법으로 문제를 풀었으면 하는 바람은 이제 접어야 할 것 같습니다. 어쩌면 천명이 죽어야 하는 운명인 것은 어출쌍생 성골남진의 저주 때문이 아니라 차녀가 장녀를 제치고 왕위에 올라야 하는데 장녀인 천명의 카리스마가 너무나 선명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어출쌍생의 저주는 천명의 죽음으로 새로운 사태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아, 벌써 내일 드라마가 기다려지는군요. 요즘 사는 낙도 없는데 선덕여왕 보는 재미로 삽니다. 이런 말세에 선덕여왕이라도 없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

KBS사극 『천추태후』가 드디어 막판을 향해 달려가는 것 같습니다. 영원히 천추태후의 심복으로 맹목적 충성을 다할 것처럼 보였던 강조와 천추태후 사이에 이상기류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김치양과 천추태후가 공공연히 정인임을 강조하며 궁궐에서 부적절한 관계―물론 어디까지나 요즘의 시각으로―를 시작하자 강조의 눈에서 불이 튀기 시작한 것입니다.


단 한 번도 천추태후의 명을 거역한 적이 없던 강조는 김치양으로 인해 태후와 각을 세우게 됩니다. 태후 또한 그런 강조를 절대 용인할 수 없다며 섭섭한 감정을 드러냅니다. 이미 태후는 김치양에게 완전히 마음을 빼앗겨 버린 상태입니다. 사랑에 눈을 뜨게 되면 도리어 눈이 멀게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열여섯 어린 나이에 경종과 결혼하고 일찌기 과부가 된 태후에게 김치양과의 사랑은 절실한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처음으로 남녀 간의 정을 알았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MBC드라마『선덕여왕』에서도 보고 있지만, 당시는 성풍속이 매우 개방적인 시대였던 것 같습니다. 고려속요 등에 묘사된 노골적인 성행위 장면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드라마에서 김치양과 강조는 각색이 심한 정도를 넘어 지나치게 왜곡된 인물들입니다. 이들은 실제 인물이면서도 거의 가공의 인물인 것처럼 시청자들에게 보여 지고 있습니다. 특히 김치양은 마의태자의 손자이며 신라의 부흥을 위해 복수의 칼을 가는 인물로 그려지지만 실상은 이와 다릅니다.


그는 패서지역 일대의 호족이었으며 천추태후의 외척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애정행각도 근친간의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강조는 어떻습니까? 사실은 이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강조입니다. 아시다시피 강조는 《강조의 정변》이란 매우 중대한 역사적 사건의 중심인물입니다.


강조의 신변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려진 기록은 없습니다. 일설에는 그가 황해도 신천지방 호족 출신이며 태조왕건의 왕비인 신주원부인(신주는 신천의 옛 이름)의 집안 동생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쨌든 드라마에서처럼 발해유민이며 어린 시절의 황보수를 만나 천추태후의 가신이 되었다는 것은 극을 전개시키기 위한 허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강조가 누구입니까? 그는 1009년 목종을 폐위시키고 현종을 등극시킨 인물입니다. 우리가 국사책에서 ‘강조의 변’이라 배운 역사적 사건을 일으킨 인물입니다. 김치양 일파가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사이에서 난 아들을 목종의 후계자로 옹립하려하자 목종은 서북면 도순검사로 나가있던 강조에게 구원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군사를 이끌고 온 강조는 거꾸로 목종을 강제로 폐위시키고 대량원군을 옹립한 다음 김치양 부자를 죽였으며 천추태후는 귀양 보냅니다. 결국 양국공으로 폐했던 목종을 죽이고 왕실의 부패를 척결하고 관제를 개편하여 명실상부한 권력의 1인자가 됩니다. 이에 거란은 이듬해 강조를 벌한다는 구실로 40만 대군으로 두 번째로 고려에 침입하게 되지요.


강조는 거란의 대군을 맞아 용감하게 싸웠으나 패하여 포로로 잡혀가게 됩니다. 거란의 성종은 강조에게 자신의 신하가 되면 목숨을 살려주겠노라고 하였으나 강조는 이를 거부하고 장렬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이를 두고 보면 임경업 장군이나 삼학사에 뒤질 바 없는 충절입니다. 그러나 고려와 조선을 통틀어 역사는 강조를 역도로 폄하하고 있습니다.


왕을 죽였기 때문이지요. 아무리 뛰어난 자질과 나라를 향한 충성심을 가졌다 하더라도 왕을 죽인 자는 역적이기 때문입니다. 왕과 충신들을 난도질하고 정권을 찬탈한 조선왕조도 역시 정국이 안정된 후에는 같은 태도를 취하였으니 아이러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에선 다른 해석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량원군을 주축으로 하는 세력들이 역모를 일으켰으며 이에 천추태후(혹은 목종)가 강조에게 구원병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강조는 김치양 세력(천추태후를 중심으로 하는 북방세력)과 대량원군 세력(경주를 중심으로 하는 신라계) 사이에서 갈등하게 되고 마침내 경주세력의 편에 서게 됩니다. 이유는 막강한 실권을 휘두르던 김치양을 도와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저는 후자의 해석이 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종이 죽고 난 이후 성종과 목종 대를 거치면서 패서지역과 경주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세력 간에 심각한 권력투쟁이 벌어졌다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역사적 정황들로 확인이 되는 것입니다. 경주세력(신라계)은 유학을 나라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성종을 통해 이를 실현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목종이 등극하면서 천추태후가 실권을 잡자 나라는 급변했습니다. 패서인들은 북벌을 중시했으며 그 결과 서경을 우대하고 경주를 낙랑군으로 강등하는 조처를 취했습니다. 나라의 요직을 패서인들이 독점하고 경주세력은 소외되었습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신라계들이 대량원군을 중심으로 모반을 꾀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대량원군은 태조왕건의 손자이며 경주원군의 아들입니다. 또한 경주원군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조카가 되니 현종이후로 고려는 신라의 외척에 의해 왕통이 이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후 무신정권이 등장할 때까지 신라계가 정권의 중심에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일입니다. 삼국사기를 지은 사람도 신라계인 김부식이었지요.


유학을 중시한 신라계들은 고려가 중국화해야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 때문인지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는 사대적인 요소가 많다는 비판을 많이 받습니다. 그래서 일연스님이 쓴 삼국유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 그건 그렇고, 그런데 우리가 대충 알고 있는 역사와 드라마는 얼마나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저는 처음에 이 드라마를 보면서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천추태후를 짝사랑하는 순진한 ‘꼬봉’ 강조를 보면서 ‘저자가 앞으로 어떻게 정변을 일으키고, 왕을 죽이고, 새 왕을 등극시킨다는 것인지’―물론 제가 할 걱정은 아닌 줄 압니다만―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걱정되던 강조가 드디어 몸을 일으켰습니다.


모든 대신들이 천추태후에게 떨면서 몸을 낮추는데 유독 강조만이 뻣뻣하게 김치양을 내칠 것을 주장합니다. 그러자 태후는 강조를 따로 불러 달랩니다. “내가 그대를 그리 보지 않았건만 대체 왜 이러는 것이오?” 그러면서 덧붙입니다. “내가 그대가 왜 그러는지 속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오. 그러나 그 이유를 말하지는 않겠소. 만약 그리한다면, 그대와 나는 영원히 멀어질 것 같기 때문이오.”


그냥 대충 어제 본 드라마의 대사를 옮긴 것이지만, 크게 틀리지는 않으리라 봅니다. 이 말을 듣고 천추궁을 뛰쳐나오는(!) 강조의 악 다문 입술이 제가 보기엔 이빨을 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강조의 정변을 예고하는 대목이지요. 그러나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서글퍼지더군요. 두 가지 이유에서 말입니다.


하나는, 천추태후가 기껏, 결국은 이렇게 허망하게 애정행각이나 벌이다가 쫓겨나게 되는 허접한 여인이었던가, 원래의 기획 의도는 강성한 고려제국을 꿈꾸며 북벌을 주도하던 여걸 천추태후를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역사의 기록을 무시할 순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역사의 기록이란 어디까지나 승자의 역사입니다.


승자의 역사란 그들의 입장으로 오도될 가능성이 많은 것이므로 늘 행간을 잘 짚어 읽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어제 드라마에서, 대신들이 김치양과의 관계를 단절할 것을 주청하자 천추태후는 이렇게 추궁했습니다. “왜 남자들은 되고 여자들은 안 된단 말인가? 그대들은 몇 명씩의 축첩을 거느리고 있으면서 나는 안 된단 말인가?”


저는 이 대사를 들으며 천추태후가 무슨 여성단체 대표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이 그리 틀린 말은 아닙니다. 아니 아주 지극히 온당한 말입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 시대에 천추태후가 그런 말을 했을까?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 시대에 사별한 태후가 새로운 정인을 가지는 것이 그리 나쁜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나중에 강조의 정변으로 목종을 퇴위시키고 현종을 즉위시킨 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천추태후의 사생활을 비판한다면 틀림없이 그 사람들은 태후와 정적관계이며 유학을 중시하는 경주세력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후일 ‘부적절한 관계’의 씨앗인 대량원군을 왕으로 추대합니다. 


대량원군은 경종의 비인 헌정왕후가 경종 사후에 경주원군과 사통―사통이란 쉽게 말하자면, 간통이죠―하여 낳은 아들인데 왕으로 추대되어 현종이 되고 이후 고려의 왕통은 그의 자손들이 잇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어제 방영된 천추태후의 대사는 아주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태후의 행실이 부정하다고 생각했다면, 대량원군도 절대 왕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강조가 결국 정변을 일으키는 이유가 김치양과의 삼각관계 때문이란 뉘앙스 때문입니다. 강조가 천추궁을 나오면서 악 다문 입술에서, 불을 튀기는 눈빛에서 타오르는 질투심으로 인한 분노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껏 드라마를 보면서도 ‘이’ 강조가 ‘그’ 강조가 맞는지 미심쩍어했지만, 어제 비로소 ‘이’ 강조가 ‘그’ 강조임을 알았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천추태후와 김치양, 강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해 태후와 김치양 사이에 강조를 집어넣어 삼각관계를 만들었어야 했다는 고충도 이해는 갑니다. 그리하지 않았다면, 마지막에 가서야 느닷없이 강조가 칼을 들고 나타나야 되는 부자연스러움이 생기겠지요. 또는 심복이었던 강조에게 태후가 당하게 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불가피했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어떻든 고려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인 천추태후와 강조, 이 두 사람의 원래 모습이 크게 훼손되지 않는 선에서―원래 모습이 어떤 것인지는 우리 모두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애초에 드라마의 기획의도가 만들려고 했던 그런 모습으로―극을 전개시켜 주길 바라는 것입니다. 천추태후도 좋아하고 강조도 좋아하는 시청자의 입장에서는…


겨우 삼각관계로 인한 애정행각 때문에 두 사람이 망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