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품제도'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9.10.20 '선덕여왕' 미실의 최후는 미실의 선택 by 파비 정부권 (2)
  2. 2009.10.10 김춘추와 선덕여왕, 진골 대 성골의 대결? by 파비 정부권 (5)
  3. 2009.07.11 선덕여왕, 미실의 출신성분은 무엇이었을까? by 파비 정부권 (8)
"김춘추가 골품제는 천박한 제도라며 왕과 대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일갈을 했을 때,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라고 제 블로그에서 물어본 일이 있습니다. 물론 드라마를 계속 보았던 사람이라면 이건 문제 축에도 들지 못하는 문제죠. 답은 뻔히 미실 일파입니다. 미실 일파 중에서도 세종공이 가장 즐겁겠죠.


골품제 비판, 춘추는 할 수 없는 일

그러나 애석하게도 세종공은 사태를 읽는 명석한 두뇌가 없습니다. 주제에 넘치게 욕심은 많지만 재능이 따라가지 못합니다. 설원공은 머리는 명석하지만 타고난 출신의 한계로 인해 사고의 한계 역시 명확합니다. 물론 설원공이 출신이 미천하다는 것은 드라마의 설정일 뿐입니다. 출신이 미천하면 절대 병부령이 될 수 없는 게 바로 골품제죠.

그러니 그 설정이란 난센스입니다. 춘추와 미실조차도 넘을 수 없는 벽을 설원공이 넘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설총이나 최치원이 천하를 품을 만한 재능을 가지고도 방랑의 세월을 살았던 것도 다 골품제 때문입니다. 6두품은 진골과 함께 중앙귀족을 형성하는 정치집단이지만, 제6관등인 아찬까지만 오를 수 있었고 그 이상의 관직에는 진출할 수 없었습니다. 

6두품이 본격적으로 골품제의 모순을 비판하는 것은 신라 하대에 이르러서입니다. 진골귀족들 간에 왕위쟁탈전이 치열해지고 중앙과 지방의 정치혼란이 극심해지자 6두품은 반 신라적 입장을 취하거나 세상을 피해 은둔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최치원도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건국되었을 때 이들 6두품이 대거 진출했음은 물론입니다. 

그런데 김춘추가 골품제를 비판한 것은 옳은 일이었을까요?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김춘추는 6두품이 아니라 진골귀족이기 때문입니다. 6두품의 입장에서 보면 골품제는 천박하고 야만적인 제도가 맞습니다. 아니 백성의 입장에서 보면 신분제도 자체가 아먄적이고 폭력적인 제도입니다. 

미실, 신분의 벽을 깨고 왕위에 도전할 수 있나

그럼 여왕은? 그건 신라사회에선 가능한 일이었다고 보입니다. 이미 선덕여왕이 탄생하기 이전에도 여자가 권력을 장악한 경우는 몇 차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황남대총의 여주인이 그걸 증명하고 있습니다. 왕통이 끊어졌을 경우에 또는 왕자가 아직 나이가 어려 왕위에 오르기 어려울 때 공주의 부마를 부군으로 삼아 왕위를 계승한 사례는 수없이 많습니다. 석탈해, 김미추도 그렇게 해서 왕이 된 사람들이죠. 

다시 말해 여자도 남자와 동등한 상속권을 가졌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이는 신라 하대에 이르러 유학이 도입되기 시작하면서 비판 받기 시작합니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은 유학자로서 사대주의와 남녀차별적인 사고방식에 정신을 빼앗긴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그가 삼국사기를 편찬한 것을 역사의 불행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무튼 진평왕 시대에 여왕이 등극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가진 신라인은 드물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신분의 상속은 공평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그 예로 지소태후가 이사부와 통정하여 낳은 아들 세종에게 전군(태자가 아닌 왕자)의 칭호를 내린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공자님 소리 듣는 김춘추도 마찬가지죠. 이는 조선시대에는 도저히 불가한 일입니다. 

자, 이쯤에서 미실이 얘기를 해보도록 하지요. 미실에게 깨달음을 준 것은 덕만과 춘추입니다. 덕만은 여자도 왕이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춘추는 진골도 왕이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덕만이 아니라도 미실이 살던 시대에 여자가 왕이 되는 것은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큰 흠이 아니었습니다.

미실이 할 수 있는 일은 쿠데타밖에 없었나

오히려 덕만은 미실을 통해 왕이 되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설정도 난센스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미실 정도의 걸출한 인물이라면 그녀가 만약 성골이었다면 틀림없이 왕위에 도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성골이 아니라 진골이었으므로 왕이 아니라 왕후가 되는 것에 만족하려 했을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녀는 아마도 정상적인 방법으로, 신라의 전통을 해치지 않는 방법으로 권력을 취하는 길을 택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진흥왕을 독살하고 유언장을 조작한 것도 알고 보면 정통성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덕만이 내놓은 조세감면정책에 대해 보인 미실의 태도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미실은 변화를 싫어합니다.

그런데 왜 미실이 직접 나선 것일까요? 지금까지 미실의 권력을 위협하는 현실적인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세력이 등장했습니다. 하나는 덕만공주요, 다른 하나는 춘추공입니다. 이 둘은 모두 현 왕의 직계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게다가 능력이 출중합니다.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죠.

그래서 직접 나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미실은 과거처럼 정상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유지하거나 쟁취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 방법은 정통성이 있는 왕족을 자기가 포섭하고 있거나 그런 왕족이 없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이제 그게 힘들어졌으니 미실이 선택할 수 있는 카드는 아주 제한적입니다. 진즉에 덕만을 죽였어야 했지만, 미실이 크게 실수했던 거지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미실의 쿠데타가 일어난다면

그럼 미실이 쓸 수 있는 카드는 무엇이 있을까요? 정변밖에 없습니다. 쉬운 말로 쿠데타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두 번의 쿠데타를 겪었습니다. 박정희와 전두환이 일으킨 구데타죠. 정통성이 없는 세력이 권력을 쥐기 위해 가장 손쉬우면서도 확실한 방법이 바로 군사정변입니다. 미실에게 주어진 카드는 결국 쿠데타뿐입니다.

미실이 칠숙과 나눈 잠깐의 대화를 통해 우리는 미실이 곧 난을 일으킬 것임을 직감했습니다. 칠숙은 미실에게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결연한 각오를 "나는 가진 것이라곤 재산도 가족도 아무것도 없습니다"라는 말로 대신합니다. 이미 칠숙과 함께 난을 일으키는 것으로 돼있는 석품은 칠숙의 심복이 되어있습니다. 

오래전에 칠숙의 난을 위한 준비는 완료되어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칠숙의 난이 미실의 난의 소품 정도일 뿐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 미실은 사실상 신라의 지배자였으니 그녀가 쿠데타를 일으킨다면 친위쿠데타가 되겠군요. 그러나 이것도 어렵게 되었습니다. 백성들과 중소귀족들의 신망이 미실로부터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미실의 난은 분명 실패하고야 말겠지요.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현실에서는 어떨까요? 덕만의 조세정책과는 반대로 종부세를 폐지하고 부자(귀족)들에게 세금을 깎아주는 MB정부의 정책에 대해 국민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만약 미실의 난이 일어났다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드는군요. 실패했을까, 성공했을까?  

덕만을 죽이지 않은 실수의 결과, 미실의 최후는 어떤 모습일까?

아무튼 미실은 덕만을 죽이라는 상천관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상천관을 독살하는 실수를 범했지요. 미실 일생일대의 실수였다고 할 수 있겠군요. 물론 그것은 황실을 압박해 마야부인을 축출하기 위해 덕만을 살려 이용하기 위함이었지만 말입니다. 스스로 옥처럼 찬란하게 부서지는 길을 택하겠다고 했으니 어떻게 부서지는지 한번 살펴보도록 하지요. 미실의 최후가 매우 궁금해지는군요.
Posted by 파비 정부권
김춘추가 골품제도를 일러 천박하고 야만스러운 제도라고 일갈했다. 그것도 성골 왕인 진평왕 앞에서.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일까? 결론은 도저히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이미 김춘추는 덕만공주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공주님은 어떤 마음으로 신라에 오셨습니까? 저는 또 어떤 마음으로 신라에 온 것 같습니까?"
 

사서에 등장하는 김춘추는 탁월한 외교전략가였다.


김춘추, "나는 신라를 가지기 위해서 왔다!"

그리고 김춘추는 힘주어 말했다. "저는 신라를 가지기 위해 왔습니다." 이미 덕만공주도 오래전에 같은 말을 했었다. "신라를 먹어버릴 거야." 그리고 그 말은 곧 "내가 신라의 왕이 되겠다"는 확신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덕만공주는 바야흐로 왕이 되려고 한다. 아무도 꾸어보지 못한,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꿈, 여왕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 김춘추가 제동을 걸고 나섰다. 김춘추는 말한다. "신라 역사에서 아무도 꾸어보지 못한 두 가지 꿈이 있어. 하나는 여자가 왕이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진골이 왕이 되는 것이지. 그런데 그 둘 중 어느 게 먼저 될까? 여왕? 아니면 진골 왕?" 묘한 웃음을 흘리며 질문 아닌 질문을 던지는 김춘추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진심은 무엇일까?

그러나 이미 우리는 김춘추의 마음을 그의 입을 통해 충분히 들었다. 그는 덕만에게 "나도 이모님과 마찬가지로 신라를 가지기 위해 바다를 건너 왔다"라고 말했으며, 엊그제는 진평왕과 대등들 앞에서 "골품제도는 천박하고 야만스러운 제도"라고 일갈했던 것이다. "그래, 성골만 왕이 되란 법이 있소? 나 진골도 왕이 되고 싶소!" 이게 그의 진심인 것이다.

그리고 김춘추는 입국하자마자 염종을 수하에 두고 비담을 포섭하기 위해 저울질 하는 등 나름대로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나아가 미생과 친하게 지내면서 적을 안심시키고 내부를 교란시키는 양동작전까지 펼치고 있다. 가히 외교술의 귀재였다는 그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아마 우리가 짐작하는 것이 맞는다면, 김춘추는 기골이 장대하고 빼어난 용모를 지녔으며 뛰어난 두뇌와 유창한 화술의 소유자였다. 당태종조차도 김춘추를 칭찬했다고 하니 그가 고구려와 일본, 중국을 넘나들며 외교전을 펼친 것이 우연한 일은 아니었을 듯하다. 게다가 김춘추는 출중한 지혜뿐 아니라 대범한 용기까지 지니고 있었다.  

김춘추는 뛰어난 외교전략가에 행동가였다

감히 누가 있어 용담호혈에 주저 없이 들어갈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과연 그런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나 김춘추는 스스로 죽을지도 모를 길을 주저 없이 갔다. 그리고 실제로 고구려에서 연개소문에게 죽을 고비를 가까스로 넘겼다. 그런 그였으니 진평왕 앞에서 감히 "골품제도는 천박하고 야만적인 제도"라고 일갈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는 국기를 뒤흔드는 일이다. 골품제도는 신라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장치다. 정확하게 말하면, 신라가 아니라 신라왕실을 지탱하는 장치다. 이를 부정하는 것은 곧 역모다. 성골왕족을 부정하고 역모를 일으키겠다는 공개적인 선언을 김춘추가 왕 앞에서 한 것이다.

사실 김춘추는 진지왕의 친손자이면서 동시에 진평왕의 외손자이기도 하다. 그러니 못할 소리도 아니다. 그의 입장으로 보면 성골남진한 상태에서 충분히 왕위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 김춘추는 진평왕에 의해 폐위된 진지왕의 친손자요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진골귀족일 뿐이다.   
 
아무래도 김춘추가 왕이 될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은 역시 덕만공주의 부마가 되어 부군이 되는 것이다. 부군이란 태자가 없을 때 공주의 부마를 다음 왕위계승자로 삼는 신라만의 독특한 제도다. 이런 제도는 근친혼이 성행하던(혹은 권장되던) 신라였기 때문에 가능했을지 모른다. 어차피 부마도 결국 같은 왕족이니까.   

실제로 부군의 지위에 올라 왕이 된 예는 많았다. 석탈해가 그랬으며 김씨족 최초의 왕인 미추왕이 그랬다. 내물왕과 실성왕도 모두 사위로서 왕이 된 케이스다. 그러니 성골 태자가 없을 경우에 진골귀족 중 한 명을 성골 공주의 부마로 맞아 부군으로 삼는 것이 신라의 전통이며 자연스럽게 후계를 확정짓고 정국을 안정시키는 방법이다. 

김춘추의 위험한 발언, "성골만 왕이 되란 법 있나? 진골도 왕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김춘추가 굳이 왕이 되고 싶다면 이미 미실과 계획한 것처럼 덕만공주와 혼인해 부군이 되면 될 일이다. 덕만은 김춘추에게 외가 촌수로는 이모(3촌)가 되지만, 친가로 보면 6촌 형제간이다. 근친혼을 신국의 도라 하여 권장하던 신라사회에서 6촌 형제간인 덕만과 춘추가 결혼하는 것은 하등 이상할 이유가 없는 일이다. 

물론 역사에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드라마에서도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신라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주겠다는 연출의도에 따라 연대나 인물 등에 대해 각색의 가위질이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도저히 손을 댈 수가 없는 역사적 사실도 있는 법이다. 선덕여왕과 김춘추의 관계가 그렇다. 

그래서 진골인 김춘추가 성골 왕 진평왕 앞에서 감히 역모에 준하는 발언을 한 것일까? "폐하, 어찌 성골만 왕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저 진골도 왕이 되고 싶사옵니다. 저를 후계자로 삼아주시옵소서." 그러나 이는 분명 매우 위험한 발언임에 틀림없다. 진평왕은 5촌 조카이면서 동시에 외손자이기도 한 김춘추의 발언을 문제 삼지 않을 수 있다.

만약 진골도 왕이 될 수 있다고 하면 위 인물들 중 누가 제일 기뻐할까?

 
그러나 다른 신료들은? 절대 그럴 수 없다. 그들은 당장 김춘추를 참하라고 소를 올릴 것이다. 만약 그들 귀족들도 김춘추의 발언을 문제 삼지 않는다면, 특히 미실과 세종 일파의 경우에, 다른 의도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도 진골이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기회가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며, 때문에 속으로는 김춘추의 발언에 쾌재를 부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현재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보이고 있는 권력을 둘러싼 역관계로 보아 김춘추의 주장이 받아들여진다면 다음 왕위에 가장 근접한 사람은 세종이다. 이것은 미실이 평생을 꾸어오던 꿈, 곧 황후가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 김춘추는 "성골만 왕이 되고 진골은 왕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야만적"이란 따위의 발언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김춘추에게 필요한 것은 세력이다

오히려 김춘추는 '성골만이 왕이 될 수 있으며, 덕만공주야말로 하늘이 예언한 개양자로서 나라를 다스릴 임금의 재목'이라고 진평왕에게 품해야 옳은 일이다. 나아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덕만공주의 결정이야말로 참으로 현명한 판단이라고 부추겨야 옳은 일이다. 그 길만이 "신라를 가지기 위해 돌아왔다"라고 말하던 그의 야심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설령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역사적 사실들을 땅 속에 묻어두고 이야기를 전개한다고 하더라도 김춘추의 생각대로는 절대 될 수가 없다. 왜? 김춘추는 미실 일파가 몰아낸 진지왕의 손자이기 때문이다. 김춘추는 패주의 자손이다. 그리고 진지왕을 패주로 만든 것은 미실과 세종, 설원공 등이다.

실제로 역사에서도 김춘추는 선덕여왕 16년과 진덕여왕 7년을 합하여 무려 20년이 넘는 긴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진덕여왕이 죽은 후에도 김춘추는 바로 왕으로 추대되지 못했다. 삼국사기에 보면 귀족들이 화백회의를 열어 알천공을 왕으로 추대했지만 알천공은 자신은 늙고 덕이 없음을 들어 고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진실일까?

온갖 부패혐의에 시달리면서도 대통령이든 총리 자리든 연연하는 오늘날의 세태로 보면 참으로 신선한 충격이 될 수도 있는 미담이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통틀어 이런 미담은 대체로 들어본 기억이 없다. 그럼 왜 알천공이 왕 자리를 고사했을까? 바로 김춘추의 뒤에는 김유신이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월성전투의 승리로 비담의 난을 제압한 이후 김유신은 신라의 무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아이러니지만 후일의 김유신과 김춘추를 만들어 준 것은 바로 비담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아무튼 알천공이 김춘추에게 왕위를 양보한 것은 매우 현명한 선택이었다. 목숨은 두 개가 아니니까.

김춘추가 해야 할 일은 조용히 때를 기다리는 것


그리고 이때부터 화백회의는 사실상 그 기능을 잃었다고 볼 수 있다. 중앙집권을 통해 왕권이 강화된 신라에서 화백회의는 왕의 괴뢰기구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법흥왕 때부터 대등들을 각 행정기관의 장으로 배치해 왕권의 통제아래 두려던 시도는 김춘추가 왕이 될 무렵에는 거의 복종하는 관계로 굳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김춘추가 덕만공주에 맞서 진골도 왕이 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대드는 것은 난센스다. 아니 치명적 실수다. 지금은 은인자중할 때다. 조용히 세력을 키우며 때를 기다리는 게 그가 할 일이다. 영민한 그로서는 분명 언젠가는 자기에게 기회가 올 것임을 알고 있을 것이다. 당나라에 유학까지 한 김춘추라면 태공망의 고사쯤은 읽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잠시 미쳤던 것일까?
Posted by 파비 정부권
요사이  MBC드라마 《선덕여왕》으로 인해 신라의 풍속에 대한 관심이 무척 높다. 특히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화랑들의 이야기로 세상이 뜨거운 것 같다. 화랑세기는 그 위작 논란에도 불구하고 신라사회를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한 장치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화랑도에 대한 언급이 있긴 하지만, 이처럼 생생한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특히 미실이란 여인은 화랑세기가 아니고서는 만나볼 수가 없다. 화랑세기는 사실상 미실의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래 김대문이 화랑세기를 저술할 때는, 그가 서문이나 후기에서 밝힌 것처럼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들의 세계(世系)를 밝히고자 함이었다. 그들의 계보를 통해 우리는 화랑의 실체를 접할 수 있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김대문의 집안은 세습 화랑의 집안이었다. 이 가문은 540년 화랑도가 시작한 이래 681년 폐지될 때까지 1세 풍월주 위화랑부터 시작해서 4세 이화랑, 12세 보리공, 20세 예원공, 28세 오기공 등 모두 5대에 걸쳐 풍월주를 세습했다. 나머지 풍월주들도 대부분 부자가 세습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김대문의 가문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32대에 걸친 풍월주들의 전기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바로 미실이다. 그녀는 5세 풍월주 사다함부터 시작해서 16세 풍월주 보종공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풍월주들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었다. 도대체 그녀는 어떤 신분의 인물이었기에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래서 나는 「선덕여왕, 근친혼의 이유는 무엇일까?」
(http://go.idomin.com/268) 라는 글을 통해 미실은 분명 김씨족임이 자명하다고 호언한 바 있다. 신라는 골품제를 근간으로 하는 나라다. 그런 나라에서 골품도 없는 여인이 화랑들을 발 아래 두고 국왕까지도 좌지우지한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랑세기에서도 미실의 세계에 대하여 자세한 언급은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화랑세기의 목적이 풍월주들의 세계와 세보를 기록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한편 미실에 대한 궁금증을 더욱 유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여러 독자가 댓글을 통해 내 글에 반론을 제기했다. 미실은 김씨족이 아니라 박씨라는 것이다.(인터넷을 검색해보았더니 또한 모든 네티즌들, 뿐아니라 위키백과에서도 미실을 박미실이라고 표기하고 있었다) 

사실 처음에 나의 관심사는 미실이 김씨족인가 박씨족인가 하는 것은 아니었다. 신라라는 신분제 사회의 특성상 진골귀족 신분이 아니고서 화백회의나 중앙정치를 주무를 수 없다는 주장을 강조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였을 뿐이다. 그러나 만약 드라마에서처럼 실제 미실의 역할이 그러했다면 그녀는 틀림없이 김씨족일 거라는 게 나의 생각이었다. 

골품제도는 법흥왕 7년(520년) 율령이 반포되면서 정립된 제도라고 말한다. 물론 그 이전에도 골품제는 이미 사회적 관습으로 정착되어 있었을 것이다. 법흥왕에 의해 골품을 받은 귀족들은 원래 왕족이었던 박씨족 일부와 김씨족, 그리고 가야의 왕족, 보덕국왕 안승의 후예들 정도였다고 한다. 그 범위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아직 정확히 알 길은 없다.  

박씨족 일부도 진골의 골품을 받았지만, 그들이 신라가 융성했던 중고시대나 중대에 중앙 정계에서 활발하게 활약했다는 증거를 찾기는 어렵다. 게다가 내물왕 이후 김씨족들이 왕권을 확실히 장악한 이후에 박씨족들은 6부 중 하나인 모량부에 이주해 살면서 가끔 왕비를 배출한 것 외에는 이렇다 할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 고로 화랑세기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미실이나 미생의 역할로 보아 틀림없이 이들의 조상은 김씨족일 거라는 생각은 지금도 확고하다. 그럼에도 여러 독자들이 미실은 박씨라는 주장을 하며 정정을 요구하였고, 심지어는 내물왕의 4대손이며 세종의 아비요 하종의 조부인 이사부조차도 박씨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어 부득이 다시 자료를 확인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사부나 거칠부가 김씨족인 것은 이미 사기에서 밝히고 있는 터라 더 이상 설명은 무의미할 듯하다. 그러므로 당연히 미실의 남편이며 아들인 세종과 하종도 김씨족인 것은 당연하다. 다만 미실에 대해서만 보다 더 확실한 조사가 필요할 것이지만, 아시다시피 그녀에 대한 기록은 화랑세기를 빼고는 전해지는 것이 없다.

그러나 미실의 부모에 대하여 화랑세기에 언급이 있으므로 그녀의 부계와 모계를 확인해 보면 그녀의 출신성분을 알아내는데 큰 어려움은 없을 듯싶었다. 미실의 아비는 2세 풍월주 미진부이며 어미는 묘도궁주이다. 미진부의 아비는 아시공이며, 아시공의 아비는  선모이고, 선모의 아비는 장이이고, 장이의 아비는 복호공이다. 복호공은 내물왕의 아들이다. 

미실의 부계를 살펴보건대, 미실은 내물왕의 후손인 것이다. 내물왕은 신라의 김씨 왕조를 확립한 인물이다. 내물왕 이전에 미추가 김씨족으로서 최초로 왕위에 오르긴 했지만, 김씨족의 전제 왕권을 확립한 것은 내물왕이다. 그러므로 김씨 왕조의 사실상 시조는 내물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내물왕 이후 왕비들은 대부분 김씨족으로 채워졌는데, 이는 김씨족의 배타적 왕권을 확립하려는 결과였다. 이와 같은 근친혼으로 왕권의 지위는 더욱 초월적인 것으로 공고해졌다. 세기에 의하면, 아시공은 법흥왕이 미실의 조모인 옥진과의 사이에서 난 비대공을 후계자로 세우려 하자 이에 반대해 지소태후와 더불어 진흥왕을 옹립하는데 역할을 한 인물이다. 

어쩌면 미실의 권력은 이로부터 기인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녀가 비록 세습적으로 색공을 하는 여인이었으며 미색이 출중하고 교태가 남다르다 해도 출신이 미천하고서는 권력에 다가서기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조부인 아시공은 당대의 실력자였으며, 아비는 진흥왕의 총애로 2세 풍월주를 거쳐 최고 관등인 대각간에까지 올랐다.    

그렇다면 미실의 모계는 어떨까? 미실의 어미는 묘도궁주이다. 묘도궁주는 영실공과 옥진궁주의 딸인데, 영실공은 수지공과 법흥의 누이 보현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성골이다. 또 미실의 조모인 옥진궁주는 누구인가. 그녀는 1세 풍월주 위화랑의 딸이다. 위화랑은 진골로서 이찬에 오른 인물이다. 위화랑 역시 옥진의 소생인 비대공을 반대해 진흥왕을 옹립했다.

이렇게 미실의 부계와 모계를 살펴보니 양쪽 모두 진골귀족 출신이다. 진골일 뿐 아니라 왕권에 가장 근접한 권력의 핵심들이었다. 미실의 권력의 출발점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미실의 힘이 어느날 갑자기, 또는 드라마에서처럼 사다함의 매화로,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닌 것이다.
 
자, 그런데 아직 풀리지 않은 독자들의 궁금증이 하나 더 남아 있을 것이다. 바로 설원랑이다. 나는 앞서「선덕여왕, 근친혼의 이유는 무엇일까?」에서 미실 뿐 아니라 설원까지도 김씨족일 거라고 단정을 하는 오류를 범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 의도한 오류였다. 설원랑은 세기에 등장하는 거의 유일한 진골귀족이 아닌 풍월주다.

화랑의 대부분이 진골귀족으로 채워졌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진골귀족이라 하더라도 아무나 화랑에 뽑힐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선 권문세가의 자제여야 하고 인물이 출중하고 덕이 충만해야 한다. 그래야 선발의 기본조건을 갖추는 것이다. 그런데 설원은 어떠한가. 그는 진골귀족도 권문세가의 자제도 아니다.

더구나 그의 아비인 설생은 아비의 이름도 성도 모르는 미천한 출신이다. 다만 설생의 어미가 습비부촌의 설씨 가문의 자손이므로 어미의 성을 따라 설씨가 되었다고 한다. 설생은 용모가 출중했는데,그가 모시던 구리지가 전장으로 나간 틈에 구리지의 여인 금진낭주와 관계를 가져 설원을 낳았다고 한다.

금진낭주는 사다함의 어미이기도 하니 설원은 사다함과는 동모이부의 형제인 셈이다. 사다함은 구리지의 아들이며 내물왕의 7세손으로 진골귀족이다. 금진낭주 또한 위화랑의 딸로서 진골귀족이니 설원은 비록 아비가 출신을 모르는 미천한 사람이었다고는 하나 모계로 보면 역시 귀한 자손이며 미실에겐 외숙뻘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부계계승사회인 신라에서 설원랑은 진골은 고사하고 두품조차 받지 못했다. 그런 그가 화랑이 되고 풍월주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은 미실의 권력을 웅변해주는 대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드라마상에서처럼 설원이 지배집단의 화백회의에 참여하고 병부령의 지위에 올라 군권을 장악하는 것은 난센스라는 것이다.

그런 일은 미실의 권력이 아무리 태산처럼 높다 하더라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신라의 골품제를 뒤흔드는 일로서 체제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미실이라도 그런 일은 할 수 없는 것이다. 화랑은 골품제의 규정을 비교적 덜 받는 자치조직이었으므로 설원랑이 풍월주에 오르는 이변을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앙관직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기대할 수는 없다. 그랬다면 6두품으로 뛰어난 문재를 자랑했던 설총이나 최치원이 비운의 삶을 살지도 않았을 것이다. 골품제가 초기에는 왕권을 강화하고 세력을 확장하는 주요한 도구로 기능했을지는 모르지만, 나라의 규모가 커지고 복잡해지면서 결국 신라를 패망으로 인도하는 결정적 요인 중의 하나로 작용했다.

그래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라!"는 금언이 있는 것이 아닐까.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