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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이야기

마산서 부마항쟁보다 앞선 항쟁모의 있었다

부마민주항쟁보다 앞서서 유신반대시위가 모의됐었다는 증언이 새롭게 나왔다. 12월 5일 오후 6시 30분, 경남 창원 ‘웨딩의 전당(구 가든예식장)’에서 열린 <부마항쟁증언집 마산편: 마산, 다시 한국의 역사를 바꾸다> 출판기념회를 열었는데, 이 증언집에 이러한 증언들이 수록됐다.

<증언집>은 가나다 순으로 40여 명의 증언자들이 구술한 녹취록을 실었는데 그중 제일 첫 번째로 올라온 김용백 신부(현 마산월영성당 주임신부)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경남대 학생이던 최갑순, 옥정애 씨 등이 주도하여 유신반대데모를 준비했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9월 말에 경남대 방송실을 점거하는 것을 시작으로 시위를 벌이기로 했으나 함께 하기로 했던 남학생들이 모이지 않아 실패했으며, 다시 10월 22일을 디데이로 잡고 가톨릭학생회, YMCA, JOC, 각 서클장들과 학과장들을 비밀리에 만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 정성기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회장의 인사 모습.

보다 치밀한 계획과 발로 뛰는 조직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이들은 정성기(현 경남대 교수), 경남대 극예술연구회 회장 이윤도 씨, 신정규 씨 등과 합세해 거사계획을 세웠는데, 10월 22일을 디데이로 잡은 것은 그때가 중간고사 시기라는 점을 활용하자는 것이었다.

김 신부는 증언록에서 “처음에 두 여학생이 나를 찾아와 도와달라고 했다. 그래서 너희들 그거 하면 죽는 줄 아느냐? 하고 물으니, 다 안다면서 감수하겠다고 했다. 처음엔 말렸지만 젊은 처자들이 의지가 너무 강하고 죽음도 불사한다는데 안 도와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김 신부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18일 마산에서 항쟁이 일어나기 이틀 전에 부산에서 먼저 시위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랬기 때문에 18일 저녁 상남성당에 모여 선언문 등을 완결 짓기로 했다. 그런데 경남대에서 먼저 터진 것이다.”

18일 오전 1교시를 마치고 학교를 빠져나와 유인물 작업을 하던 두 여학생은 학교에서 데모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택시를 타고 부랴부랴 학교로 돌아갔다. 그리고 1차 시위를 마치고 교내에 흩어져있던 학생들을 다시 규합해 거리로 나왔다.

당시 같은 경남대 학생이었던 한 증언자는 “여학생 둘이가 정말 대단했다. 우리가 미적거리고 있으니까 ‘남자××들이 × 달고 뭐하는 거냐?’면서 호령을 하기에 ‘여학생들도 저러는데 우리가 이래서 되겠나’ 해서 용기를 내 다시 모였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 두 여학생은 그러나 학생들이 거리로 진출해서 마산시청을 거쳐 3․15탑 주변에서 경찰과 대치하던 초반에 연행되고 만다. 시위대열의 선두에서 선동을 하고 있던 이 두 여학생을 경찰이 기습적으로 체포해 경찰차에 싣는 과정에서 십여 명의 남학생들이 함께 연행됐다.

▲ 한 참가자가 증언집을 읽고 있는 모습.

최갑순 씨의 증언에 따르면 “남자친구와 가포해수욕장에 데이트를 다녀오다 시위대와 경찰이 대치하고 있는 통에 길이 막혀있던 한 쌍의 연인도 그때 함께 체포됐는데 부산 계엄사까지 함께 갔다. 나중에 어떻게 됐는지 소식을 모른다”며 안타까워했다.

스무살 가량의 그 여인은 가방에서 조약돌이 나왔는데 ‘애인과 가포에 갔다가 해변에서 주운 것’이라고 해도 경찰은 막무가내로 시위용품으로 몰아 마산경찰서를 거쳐 부산 계엄사까지 끌고 갔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다른 증언자의 증언에도 들어있었다.

이 두 여학생은 입고 있던 바지와 치마가 다 찢겨질 정도로 난폭하게 연행되었는데, 마산경찰서에서는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온갖 고문과 폭력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이년들은 애도 못 낳게 만들어야 된다”는 욕설과 함께 자행된 고문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옥정애 씨는 증언에서 “79년 여름방학이 지나면서 시위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유신정권은 택시에서 박정희 대통령 욕을 한 승객을 신고한 택시기사가 포상(개인택시)을 받는 용납할 수 없는 단계까지 갔다. 누군가 성냥불 하나만 던지면 확 일어날 것 같은 상태였다”고 회고했다.

그녀에 따르면 김용백 신부 외에도 최동호 교수(현재 고려대), 고 이선관 시인 등이 모의에 조언을 주었으며, 학생들 중에는 이신모, 학보사 편집장 김명섭, 송창호, 정인권 씨 등 여럿이 함께 했는데 구체적인 계획은 두 여학생과 정성기, 신정규 씨가 짰다.

이들이 짠 계획을 보면 ‘먼저 방송실을 점거한 다음 최갑순이 마이크로 학생들을 모으고, 1차 시위로 교문 앞 진출을 시도하다가 흩어지면 2차로 마산의 상징적인 장소인 3․15탑으로 집결, 그때부터는 마산시민들의 몫으로 저녁까지 시위가 이어지면 3차 집결장소로 퇴근시간에 맞춰 수출정문으로 간다’는 식이었다.

그녀는 “그런데 갑순이가 전화를 하고 오더니, ‘큰일 났다. 부산에서 일이 크게 터졌다는데 그 여파가 마산에도 올까봐 휴교령을 내린 모양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세운 계획 터트려보지도 못하고 막 내리는 거 아니냐’면서 안절부절 했다. 급히 택시를 타고 학교로 갔다”고 말했다.

▲ 허성무 부지사가 축사를 하고 있다.

한편, <증언집>에는 부마항쟁에 시위대로 참여했던 인사들 뿐 아니라 전경으로서 반대편에 서있었던 사람들의 증언도 몇 편 실렸다. 이들의 증언은 당시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또 MBC, 경남매일 등에서 근무하던 기자의 증언도 3자적 관점에서 실렸다.

무엇보다 시선을 끄는 것은 소문으로만 돌던 부마항쟁 희생자의 유족의 증언이 <내 아버지 죽음의 진실, 32년 만에 밝힌다>란 제목으로 실렸다는 것이다. 경찰은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증언자의 부친을 부검한 다음 서원곡에 가매장했다.

이날 출판기념회에는 여러 사람이 축사를 했지만 이은진 교수(경남발전연구원장)의 축사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역사는 위험한 사람들이라고 분류되는 사람들보다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움직였을 때 바뀐다.”

그래서 그는 “세상이 어떤 면에선 불공평하다”고 말했다. 부마항쟁증언집도 결국 정부가 위험하다고 분류한 사람들의 취조기록이나 공판기록을 토대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며 앞으로 이를 극복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부마항쟁에 앞서 데모를 주도적으로 기획했던 두 여학생이 10월 18일 시위초반에 끌려가는 장면을 목격한 시민들로부터 둘 중 하나는 죽었을 거란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나 곧이어 10․26이 터졌고 독재자 박정희가 죽고 난 후 이들은 무사히 사회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 이후 최갑순 씨는 여성운동에 투신해 경남여성회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창원여성문제상담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옥정애 씨는 중등교사가 되었으며 전교조 조합원으로서 노조활동에도 대단히 열심이라고 한다.

<증언집> 제목처럼 ‘두 번이나 독재자를 쓰러뜨린’ 역사의 중심에 어린 두 여학생이 있었다는 사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ps; 1. 주대환 씨(한국사회민주주의연대 대표)는 이은진 교수의 말에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사실은 전혀 위험하지 않다”는 말로 해석을 달았다. <증언집>에는 그의 증언도 들어있다. 그는 구치소에서 박정희의 죽음 소식을 듣고 “기쁘지 않느냐?”는 간수의 물음에 “사람이 죽었는데 무엇이 기쁘겠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2. 주대환 씨처럼 최갑순 씨도 구치소에서 박정희의 죽음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통방(수감자들끼리 창살을 통해 연락을 취함)을 해서 기도를 할 것을 제안해 “불쌍한 영혼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마산사람들은 두 번이나 독재를 무너뜨렸지만, 대개 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3. 이 <증언집>에는 자기 아버지의 말을 믿고 애인을 밀고했다가 그 애인이 물고문, 전기고문 등 갖은 고초를 겪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미쳐버린 이야기도 실려 있다. 증언자는 그러나 “나는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잘 살고 있는데 그녀는 그렇게 돼버려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고 말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서울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을 때 그녀의 오빠는 “만나면 괴롭기만 할 거다. 과거의 기억은 잊는 게 좋다. 만나지 말고 그냥 떠나 너라도 잘 살아라”고 했다 한다. 창원대 출신인 그는 현재 인천에 살고 있다.

4. 북마산파출소 등을 불태운 당사자의 증언도 생생하게 실려 있다. 당시 그는 18세의 청년이었다. 그는 “그때 정말이지 희열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었을까? 잠겨있던 울분이 폭발하면서 느낀 전율 혹은 오르가슴 같은 것이었을지도.  

5.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했던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79년 당시에는 경찰이나 중정, 보안대보다도 헌병대가 민간인 사찰에서 큰 활약을 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내가 읽고 느낀 바로는 헌병들이 경찰보다 훨씬 우수한 자원이 많았던 듯하다. MBC 기자였던 신용수 씨의 증언에서 그걸 느꼈다. 첨언하면, 일정시대 헌병들이 생각났다.

6. 그러고 보니 나도 부마항쟁을 목격한 사람 중의 하나다. 당시 나는 중3으로서 부산에 고등학교 시험을 치러갔다가 탱크와 군인들이 도열해있는 것을 목격했다. 후일에 내가 보았던 현장을 찍어놓은 사진으로 안 것이지만 탱크는 장갑차였다. 당시만 해도 경북의 어느 골짜기 산골소년이었던 나는 탱크와 장갑차를 구분하지 못했다.

그날 저녁, 해운대에 숙소를 정하고 동백섬에 바람 쐬러 나갔는데 갑자기 써치라이트가 켜지면서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같은 수하가 들려왔다. 당연히 나는 손을 들고 덜덜 떨면서 수백 개나 되는 계단을 올라갔다. 어찌나 멀든지. 철모를 쓴 두 명의 군인 앞에서 나는 빌었다. “저 중학생이에요. 내일이 시험인데 저 멀리 시골에서 왔어요. 살려주세요.”

그들은 “밤에는 위험하니 나다니지 마라. 빨리 가서 자거라” 하면서 보내주었다. 정말이지 천지신명께 감사를 드렸다. 너무 놀라서 다음날 어떻게 시험을 봤는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때가 아마도 10월 18일 경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1주일 정도 지나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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