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폭력사태가 생길 때마다 하는 얘기들이 있습니다. “처벌이 능사가 아니다.” 그런데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이렇습니다. “처벌이 능사는 아닐 테지만 문제는 처벌조차도 하지 않아서 생기는 부작용이다.”
오늘 6일자 경남도민일보를 보니 예의 ‘처벌이 능사는 아니’란 논조의 기사들이 네 곳(두 개는 폭력근절 대책마련 기사였으나 상대적으로 왜소했다)에나 배치됐습니다. 우선 제 심정부터 말씀드리자면 한마디로 짜증납니다. “그래서 어쩌자는 건데?”
동급생들의 폭력에 견디다 못한 대구의 한 중학생이 하늘나라로 떠난 지 꼭 18일이 됐습니다. 이러한 때에 “처벌이 능사는 아니다” 따위의 기사를 싣는 것은 억울하게 죽은 이에 대한 예의도 아닐뿐더러 사태의 본질을 왜곡하고 호도하는 효과만 내고 말 것입니다.
물론 ‘처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은 ‘우선 선도가 중요하다’는 의미를 깔고 있기는 합니다. 도민일보는 4면 ‘폭력학생 처벌만이 능사 아냐’란 기사에서 창원지법 천호종 판사의 재판진행을 미담사례로 들면서 ‘전문가들’이란 익명을 빌어 “처벌이 학교폭력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처벌만이 능사는 아니’란 말은 지극히 옳은 말입니다. 처벌 외에도 다각적인 대책이 필요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다른 대책 이전에 처벌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의 ‘처벌만이 능사는 아니’란 말에는 처벌을 지양하고 선도로 해결하자는 뜻으로 읽힙니다.
지극히 낭만적인 이런 주장이야말로 학교폭력을 줄이기는커녕 조장하고 악화시키는 악적이란 사실을 이들은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선도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데는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예방적 조치에도 폭력사건이 생겼다면 처벌로 정의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천 판사는 “9명(여4, 남5)이 집단으로 아무 이유 없이 한 여학생을 야산으로 끌고 가 기절할 정도로 때리고 담뱃불로 지지는 등 폭력을 행사하고 돈까지 빼앗았음에도 가해학생 처벌은 풍선효과 같은 역효과만 일어나므로 화해권고제도를 활용해 불처분 결정을 내렸다”고 합니다.
일견 천 판사의 재판행위가 미덕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가해학생들이 재판정에서 피해학생과 그 부모에게 용서를 빌고 직접 쓴 편지를 낭독하게 했다고 하니 실로 고귀한 판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으슥한 야산에서 “부모님께 일러봐. 경찰에 고소해봐. 여기가 바로 네 무덤이야” 하며 으르던 아이들이 판사 앞에서 잘못을 빌고 참회의 편지를 써서 읽었다고 진정으로 반성했다고 생각한다면 천 판사야말로 참으로 순진무구한 사람입니다.
어쩌면 법정 밖으로 돌아나오는 이들의 입가에는 비릿한 승리의 미소가 흘러나오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학교폭력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 같은 기성세대들이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도 어김없이 학교폭력은 존재했습니다. 그때도 결코 지금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때는 요즘과 달리 폭력이 당연시되던 시절이란 것만이 다를 뿐입니다. 우리는 한해 선배들에게 이른바 ‘줄빠따’란 것도 맞으며 자랐습니다. 시내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 창문 밖으로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위력을 과시하는 학생들을 보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린 학생들의 몇 년은 어른들에겐 수십 년에 해당하는 엄청나게 긴 세월입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학생을 보면서 “아, 조금만 참으면 될 텐데” 하며 안타까워하는 사람을 보았지만 그들은 바로 이점을 모르는 것입니다. 중학생에게 1년은 10년과 같은 것입니다.
천 판사의 재판은 이미 1년 전에 일어난 일로 대구 중학생 자살사건 이후 학교폭력이 전 사회문제가 되기 이전에 선도를 목적으로 진행된 것이기는 합니다. 만약 요즘 같은 시기를 경험하고 난 이후였어도 천 판사가 똑같은 결정을 내렸을지는 의문입니다.
도민일보 11면 칼럼 란에 쓴 윤병렬(사천중학교) 교사의 ‘누가 학교폭력․왕따 괴물을 만들었을까?’란 글에선 더 큰 비애가 느껴집니다. 실적위주의 교사행정이 교사가 진심으로 학생에게 관심을 갖고 지도하는데 큰 한계로 작용한다는 변명은 나름 이유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학교폭력사태의 원인이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으며 공동체의 붕괴가 가장 큰 원인이다. 사회적양극화, 학벌지상주의, 황금만능주의가 만들어낸 괴물이 바로 학교폭력과 왕따다”라고 진단하는 데에선 경악을 넘어 분노까지 치밉니다.
공동체의 붕괴나 사회적 양극화, 학벌지상주의, 황금만능주의는 우리 모두가 지양해야할 폐단이란 것은 누구나 인정하고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사라지면 학교폭력도 사라질까요? “선생답게 참 답답한 말씀만 하신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인성보다는 성적을 우선시하는 경쟁지상주의 교육 때문”이라거나 “공문을 중심으로 하는 실적 쌓기 위주의 학교풍토”에 대한 지적은 매우 의미있는 말씀이긴 합니다만, 대체적으로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으며 대화와 소통이 절실하다” 따위의 추상적 결론만 얘기할 뿐입니다.
폭력에 관해 정말 할 말이 많은 저로서는 더 할 얘기가 많습니다만, 마지막으로 제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처벌이 능사만은 아니지만 처벌은 가장 우선적으로 선행되어야 할 필수적인 조치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형사적 처벌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강력한 형사적 처벌 외에 가해학생의 부모와 교사, 학교가 연대하여 손해배상책임을 지도록 손배소송을 반드시 해서 폭력을 행사하면 경제적 손해 등 최악의 결과를 맛보게 된다는 걸 보여줘야 합니다.
미안한 얘기지만 윤 교사의 글을 읽으면서 생각난 것은 대전의 모 교사가 1년 동안 동급생을 폭행한 자기 반 반장이 “선생님, 쟤 때려도 되죠?” 했을 때 피식 웃으며(이건 제 상상입니다만) 넘기고 말았다는 어처구니없는 교사가 떠올랐습니다.
사건이 불거지고 난 다음 “왜 알면서도 모른 척 했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 교사가 그랬다죠? “별로 그렇게 큰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 교사의 답변에 가장 큰 진실이 담겨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교사는 솔직하게 말했을 것입니다.
“때리고 그러는 건 알았지만 그게 무슨 큰 문제죠? 그럴 수도 있는 거죠.”
ps; 윤병렬 교사는 '누가 학교폭력·왕따 괴물을 만들었을까?'의 마지막 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학교폭력 괴물을 만들어내는 최소 단위는 가정입니다. 가정교육을 통해 좀 더 능동적이고 강한 아이, 자존감 높은 아이로 키워나가야, 괴물을 만났을 때 무서워하지 않고 힘껏 싸워나갈 수 있습니다."
옳고 훌륭하신 말씀이긴 합니다만, 교사로서 지금 이 순간에 꼭 해야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자살한 대구의 중학생은 피동적이고 자신감이 없어서 두려움에 떨다가 하늘나라로 도피한 것일까요? 먼저 간 그 아이가 들으면 얼마나 섭섭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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