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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

뿌나, 채윤을 위한 이방지의 마지막 수업은?

정기준이 이도에게 보기 좋게 속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도가 만든 글자를 보급하는 일을 담당할 자들이 모두 여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하긴 한글이 만들어진 이후 조선이 망할 때까지 이 글자를 애용한 층은 부녀자들이었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거기에 대해선 따로 논해보기로 하지요.

이방지가 죽었습니다. 조선제일검이자 임금의 호위무사인 무휼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패한 인물이니 그의 무공수위에 대해선 따로 설명이 필요 없겠습니다. 이방지는 강채윤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그는 평생 단 두 명의 제자를 거둔 것으로 보입니다.

한사람은 강채윤이요 다른 한사람은 윤평입니다. 윤평을 제자로 삼은 것은 정도전의 호위무사였던 이방지가 한순간의 실수로 인해 주군을 지키지 못한 것을 빌미로 정기준과 거래를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방지는 윤평을 제자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약속대로 윤평을 살수로 키워내는 것으로 거래는 끝났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정기준이 이방지에게-정도전과 한 여인을 두고 다투었고, 그 여인을 구하고자 정도전을 구하지 못한 과거를 들먹이며-다시 밀본을 위해 일할 것을 종용하지만 끝내 거절합니다.

△ 첫눈에 개파이가 절세고수임을 알아본 이방지. 개파이와 생사를 건 혈투를 벌이는데...

그러자 정기준은 개파이에게 이방지를 죽일 것을 명합니다. 개파이는 카르페이라는 이름의 돌궐(투르크)인입니다. 그가 어떻게 조선에 흘러들어왔으며 정기준의 수하(혹은 친구? 관계가 아직 모호하다)가 됐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철저하게 베일에 싸인 인물입니다.

엄청난 파워를 지녔다는 것 외에 그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어떤 무공을 즐겨 사용하는지에 대해서도 알려진 게 없습니다. 부러진 나뭇가지를 날려 사람을 죽인 고강한 무공을 지닌 자도 바로 개파이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경복궁 안에서 벌어진 집현전 학사 연쇄살인사건의 범인도 실은 윤평이 아니라 개파이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윤평이 이방지로부터 무술과 출상술을 배워 살수가 되었지만 작은 대롱으로 물방울을 날려 사람의 급소를 정확하게 공격해 죽일 정도는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이방지는 윤평을 진정한 제자로 생각하지 않았기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 무공을 전수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저 살수가 되기에 충분할 정도의 무술만 익히도록 했을 뿐. 살수에게 가장 중요한 비기가 출상술이었으니 그 정도로도 윤평과 정기준은 만족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방지가 마음에 둔 유일한 제자는 강채윤이었습니다. 강채윤은 타고난 근골에 뛰어난 두뇌까지 가졌으니 무예를 익히기에는 더할 나위없는 재목이었을 것입니다. 누구도 제자로 받지 않으리라 맹세했던 이방지도 탐을 내었을 법합니다. 게다가 심성까지 착하니.

이방지는 강한 듯 보이면서도 여리고 착한 강채윤에게 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걸고 사랑했던 여자마저 스스로 목숨을 버리며 자기보다는 정도전을 구하라 했으니 그의 가슴은 겨울산입니다. 마음 둘 곳 없던 이방지에게 강채윤은 유일한 제자이자 자식 같은 존재였겠지요.

이방지는 죽기 전에 꼭 강채윤을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 전에는 눈을 감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죽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마지막 수업이었습니다. 그 마지막 수업을 하기 위해 이방지는 사력을 다해 조말생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조말생 대감의 집에서 마주한 이방지와 강채윤. 흐느끼는 채윤에게 이방지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말합니다. “나는 행복했다. 그렇게 강한 적수를 살아서 만날 수 있었다니 내가 그토록 바라던 바가 아니었더냐. 그러니 이렇게 죽더라도 나는 행운아다.”

그리고 제자에게 마지막 무공을 전합니다. 모든 무공을 다 전수했지만 오로지 전하지 못한 단 하나. 살수의 비법. 이방지는 강채윤을 살수로 만들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복수심에 불타면서도 선량한 눈을 가진 강채윤을 자기처럼 살수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강채윤에겐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 생겼습니다. 이방지마저도 패한 상상할 수 없는 고수. 무휼도 개파이와의 일합에서 패한 것으로 보입니다. 개파이는 강한 충격파에 손에 상처를 입긴 했으나 칼을 놓치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무휼은 칼을 놓쳐버렸죠.

이방지는 강채윤에게 나지막이 말합니다. “채윤아. 네놈은 여리고 착하다. 난 그래서 네놈이 좋았다. 하지만 채윤아. 넌 칼을 쓰는 마지막 순간에 망설임이 있어. 그래선 살수가 될 수 없는 것이야. 명심해라. 절대 망설여선 안 된다.”

무사가 칼을 뽑았으면 전광석화처럼 상대를 베어야 한다는 가르침이지요. 이방지는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강채윤에게 살수의 도를 가르치고 간 것입니다. 개파이와의 일전에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칼을 뽑아 베어야만 이길 수 있다는 이방지의 마지막 수업.

이 한마디를 남기기 위해 이방지는 죽지도 못하고 조말생의 집에서 강채윤을 기다린 것입니다. 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집 나간 자식을 기다리다 죽지도 못하고 생명을 부지하던 노모가 자식이 왔다는 소리에 숨을 놓았다는 뉴스는 봤지만, 스승의 사랑도 대단한 것이군요.

강채윤은 스승의 마지막 수업을 잘 새겨들었을까요? 강채윤과 개파이의 일전이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정말 궁금해지네요. 여하튼, 이방지의 숭고한 죽음에 경의를 표하면서 명복을 빕니다. 내세가 있다면 무사로 태어나지 말고 좋은 여자 만나 행복하게 사시길.

사랑하는 여자가 눈앞에서 다른 남자를 위해 칼을 가슴에 꽂을 때 그 심정 오죽했을까요?

ps; 강채윤은 이방지의 (어느 쪽을 택할 것이냐는) 질문에 "(위험한) 일도 성공하고 사랑하는 이도 지키겠다"고 답합니다. "그게 어디 답이더냐?"고 하면서도 이방지는 '사생결단의 필살기'를 강조하며 숨을 거둡니다. 이방지는 알았을 것입니다. 망설임만 제거한다면 채윤이 개파이를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그리하여 자기는 그렇게 못살았지만 제자만은 모든 것을 놓고 자연으로 돌아가 담이와 함께 자식 낳고 밭 갈면서 그렇게 평범한 삶을 살기를 원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채윤이 오기 전에 숨을 놓지 못했던 것이지요. 갑자기 이방지의 삶이 불쌍해지는군요. 아무튼, 채윤이 꼭 이기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