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예

뿌나, 해례의 정체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이미 다 알고 있던 일이 대반전?

해례가 소이인 것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어젯밤 <뿌리깊은 나무>가 끝나자 (연예)언론들이 앞을 다투어 인터넷 판에 “해례의 정체가 신세경(소이)이었다니 놀라운 반전”이라며 일제히 호들갑들을 떨었다.

호들갑을 떨었다는 표현은 좀 지나친 감이 없잖아 있지만 ‘드라마를 조금이라도 보고서 기사를 썼다면’ 결코 ‘반전’ 따위의 말은 할 수 없었을 것이란 점을 강조하기 위해 좀 과격한 용어를 고른 것이다. 웬만한 시청자는 이미 ‘해례=소이’임을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소이는 한 가지 특별한 능력을 지녔다. 바로 암기력이다. 천하에 따를 자 없이 명석한 두뇌를 지닌 세종 이도조차도 감탄해마지않는 암기력. 한번 본 것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놀라운 기억력을 소이는 가지고 있다. 소이가 한글창제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이유다.

해례란 무엇인가? 사전에 의하면 ‘훈민정음의 해설서로써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강희안, 이개, 이선로 등이 지었으며 제자해(制字解), 초성해(初聲解), 중성해(中聲解), 종성해(終聲解), 합자해(合字解)의 5해(解)와 용자례(用字例)의 1례(例)로 되어 있다.’

즉, 소이가 훈민정음 해설서를 머릿속에 다 외고 있다는 말이렷다. 이 앞전에도 소이가 광평대군과 함께 몰래 궁궐을 빠져나가 모종의 임무를 수행하고자 할 때도 이도가 소이에게 이렇게 물었었다. “다 외웠느냐?” 대답은 물론 “예, 전하”다.

그때 소이의 임무는 뒤죽박죽으로 뒤섞어 아무도 알아볼 수 없게 만든 책 쪼가리들을 달구지에 싣고나가 다시 원상태로 깨끗하게 편집하는 일이었다. 눈으로만 한번 훑어보기만 해도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이고 그게 또 지워지지 않는다니 실로 놀랍고 부러울 따름이다.

요즘처럼 암기력 테스트를 위주로 하는 시험체계에 태어났다면 사법, 행정, 외무 등 고시란 고시는 모조리 수석이다. 소이가 이도를 도와 훈민정음을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 것도 실은 이 암기력 때문이었던 것이다.

해례의 존재에 대해 묻는 정기준에게 광평대군은 냉소를 날리며 “너희들은 결코 해례를 찾을 수 없을 것”이라며 비웃는다. 왜냐하면 해례는 눈에 보이는 어떤 물질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소이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광평대군과 윤평에게 납치된 궁궐나인이 “해례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므로 결코 찾을 수 없는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궁궐나인은 어째서 처음에는 “해례는 없다”고 했다가 다시 “해례는 소이다”라고 한 것일까?

최음제에 환각된 상태에서 궁궐나인이 횡설수설한 것일까? 아니면 나인이 최음제에 환각된 상태에서도 혼란야기를 위해 거짓을 말한 것일까?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명나라 황제의 친위부대인 창위의 고수가 시전한 최음수법이 그렇게 어설프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이 드라마에서 가장 미운 놈. 바로 우의정 이신적. 개인영달을 위해 명나라 스파이조직까지 동원한다. 아주 나쁜놈이다. 아마도 이완용의 조상이지 싶다).

그렇다면 “해례는 없다”고 했다가 “해례는 소이다”라고 말한 궁궐나인의 진술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처음에 나는 이것이 작가진의 실수이겠거니 하고 생각했는데 다시금 ‘여기에는 깊은 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런 것이 아닐까? 원래 해례는 있다. 그리고 그 해례는 책자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소이의 머릿속에 있다. 그러므로 ‘해례의 정체는 소이였다’라는 말은 맞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그걸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해례는 없다”는 말도 맞다. 왜? 백성들이 한글을 익히는데 해례 따위는 필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강채윤이 반나절 만에 글자를 익히는 것을 보았다. 반촌의 어린 소녀와 돌궐에서 온 개파이(카르페이)조차도 이틀 만에 글자를 익혔다.

논리와 논증을 좋아하는 먹물들은 해례가 굉장히 중요한 문건이며 이것만 없애면 글자가 퍼지는 걸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백성들에게 그딴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저 소리 내어 읽어보고 써보는 것이 필요할 뿐. 이도가 만든 글자는 그처럼 대단한 것이었다.

반포용과 유포용, 귀족용과 백성용. 해례는 두개였다

그리하여 정리하자면 해례는 두 가지다. 하나는 반포를 위해 사대부 설득용으로 만든 문서로써의 해례. 다른 하나는 일반 백성에게 널리 유포하기 위해 소이가 벌이는 놀이와 노랫말이다. 그러니 “해례는 없다”는 말도 맞고 “해례는 소이다”라는 말도 맞는 것이다.

궁궐나인이 최음제에 환각된 상태에서 태평관(명나라 사신관) 창위 앞에서는 “해례는 없다”고 했다가 다시 채윤(과 심종수) 앞에서는 “해례는 소이”라고 한 것은 두 가지 진실을 모두 말한 것이다. 이도는 동시에 두 개의 해례를 준비한 것이다. 반포용 해례와 유포용 해례.

즉, 명분과 공론에 약한 귀족들을 위한 해설서와 실용과 편리가 중요한 백성들을 위한 노랫말. 이도,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그런데 연예뉴스들이 그 깊은 뜻은 헤아리지 않고 이미 누구나 다 알고 있던 “해례의 정체는 소이, 충격대반전”이란 따위의 기사를 쓰다니.

하지만 “충격 대반전, 알고보니 신세경이 해례였다”는 타이틀이 언론들 입장에선 충분히 선정적이어서 침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이해는 한다. 먹고사는 게 중요하니까. 아무튼 이 두 개의 해례를 모두 갖고 있는 소이의 정체가 중요하긴 중요하다.

그녀에게 바야흐로 ‘죽느냐 사느냐!’가 문제가 됐다.

ps; 소이가 유포하고 있는 노랫말을 들으니 우리가 어릴 때 "바둑아 바둑아 나하고 놀자" 하며 한글을 배우던 시절이 생각나네요. ㅋ~ 아, 옛날이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