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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

광개토태왕은 바보? 적국사신 코앞에 와도 몰라

사극을 좋아하다보니 드라마 <광개토태왕> 비판을 많이 하면서도 빼먹지 않고 보고 있습니다. 가끔 ‘내가 너무 외눈으로 보는 게지’ 하면서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하다가도 다시금 어이없는 장면을 만나면 허탈감에 허허 하고 웃고 마는데, 그러면서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뿌리깊은 나무>와 비교해보면 <광개토태왕>이 얼마나 수준 떨어지는 작품인지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물론 두 작품을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기는 어렵다는 주장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뿌리깊은 나무>가 소설적 허구라면 <광개토태왕>은 정통사극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에서 <광개토태왕>의 수준이 다시 한 번 비난을 받게 되는 역설이 일어납니다. 정통사극이 소설적 허구를 다룬 무협사극보다 더 허구적이라는 것이죠. <뿌리깊은 나무>는 논픽션 사극이면서도 어떤 사극보다 사실적이라는데 그 무게가 느껴집니다.

허구적 무협사극이 주는 사실감을 정통사극에선 찾아볼 수 없다는 것, 여기에 비애가 있습니다. 거기다 버럭버럭 질러대는 고함소리에 잔소리하는 것도 이젠 지쳤습니다. 드라마가 거의 중반부를 넘어선 상태에서 교정을 요구하는 것도 이미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래전에 <태조 왕건>에서 궁예로 나왔던 김영철은 어땠습니까? 그도 역시 자주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댔지만 <광개토태왕> 같지는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김영철의 궁예를 잊지 않고 있을 정도로 그의 연기는 리얼했습니다.

궁예의 광폭한 모습에서 우리는 궁예가 가졌을 내면의 아픔을 함께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단지 김영철이란 빼어난 배우와 이태곤의 차이기만 한 것일까요? 아무튼, 비슷한 시기에 방영되는 <뿌리깊은 나무>는 사소한 장면 하나에서도 깊은 감동을 주는 반면에 <광개토태왕>은 장면마다 짜증이 넘쳐납니다.

어제만 해도 그랬습니다. 후연으로 망명해 후연 황제의 신하가 된 고운이 자청해서 고구려에 사신으로 오게 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남의 나라에 사신을 파견하려면 미리 통지를 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그냥 옆집 가듯이 들이닥쳐도 되는 것일까요?

.......... △ 담덕과 독대를 하는 후연의 사신 고운.

물론 이해는 합니다. 당시는 요즘처럼 통신이 발달한 시대도 아니고 거리도 멉니다. 좋습니다. 그런저런 사정으로 해서 아무런 사전통지 없이 불쑥 사신을 보냈다고 칩시다. 그런데 아무리 후연이 고구려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고는 하나 후연 수도 중산과 고구려 수도 국내성은 못되어도 수천 킬로의 거리는 될 것입니다.

“폐하, 지금 후연에서 사신이 오고 있다고 하옵니다. 그런데 그 사신이 이미 우리 대궐 정문 앞에 당도하였다 하옵니다.”

이 무슨 황당한 일이란 말입니까? 후연의 사신들이 고구려 국경을 통과하지 않고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라도 했단 말입니까? 이 보고를 받은 광개토대왕이 헐레벌떡 대전에서 나와 벌써 궁으로 들어선 후연의 사신을 접하는 장면에선 실로 코웃음이 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대 동북아의 최강이었다는 고구려의 국경수비나 정보체계가 이런 정도로 허술했다니,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고운 등 후연의 사신 행렬이 고구려 국경을 통과하기도 전에 이미 광개토대왕은 후연에서 사신단이 출발했다는 사실을 보고받았어야 정상입니다.

그리고 고구려 국경을 통과하고 난 이후에도 광개토대왕은 봉화나 파발 기타 등등의 방법으로 얼마든지 후연에서 사신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어야 했습니다. 궁궐 정문에 사신이 당도했다는 보고를 받고서야 허겁지겁 달려 나가는 광개토대왕의 꼴이라니.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직접 달려나가 사신을 접할 까닭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선 영빈관에 묵게 한 다음 시간을 봐 알현을 허락하면 될 일을 말입니다. 하긴 뭐 이런저런 거 다 따지고 보면 재미없겠지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보면 될 일입니다.

드라마 초반에 광개토대왕은 말갈의 대족장과 함께 노예상인에게 잡혀 노예생활도 했으며 그 노예상인은 또 나중에 후연의 충직한 신하가 되어 고구려를 넘나들며 정보활동도 하는 <광개토태왕>이니 이런 정도야 충분히 이해하고 봄직 합니다.

.......... △ 담덕과 고운. 고운의 배신을 보고도 믿을 수 없다는 담덕은 순정파인가, 바보 멍청이인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일국의 대왕이 자기 집 문 앞에 적국의 사신이 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이게 될 법한 일입니까? 국내성이 무슨 산적들 소굴쯤이나 되기라도 한다는 것인지. 보아하니 다음 주에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공격할 모양입니다만.

그 전에 먼저 내부 기강부터 확실히 잡는 게 순서가 아닐까 합니다. 제가 볼 때 이런 상태로 전쟁에 나갔다간 백전백패합니다. 그러나 역사는 광개토대왕이 즉위하던 해 백제를 공략하여 수많은 성을 함락시키고 난공불락 관미성마저 차지한다고 말합니다.

그러고 보니 백제가 영 엉터리 같은 나라였나 봅니다. 불과 얼마 전에 광개토대왕의 조부 고국원왕을 죽이고 평양성을 공략하던 강성한 백제는 어디로 간 것일까요? 그저 엉터리 같은 나라 고구려에 당하는 엉터리 같은 백제, 이것이 <광개토태왕>이 그리고 싶은 모습일까요?

<광개토태왕>의 작가님과 연출자님. 아무리 바쁘셔도 리얼리즘은 좀 살려주셨으면 합니다. 시청자들 너무 무시하지 마시고요. 요즘 시청자들도 눈이 대개 높거든요. 차라리 자신 없었으면 광개토대왕 이야기에 손대지 말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괜히 광개토대왕에 대한 신비감만 떨어뜨린 건 아닐까 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