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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

장희빈의 죽음은 곧 동이의 몰락

장희빈의 죽음이 코앞에 다가왔습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벌써 끝났어야 하지만, 10부가 연장됐다고 하니 이제 8부가 남았습니다. 왕자 금이가 성장해서 왕이 되는 모습도 그려야 하니까 장희빈을 그렇게 오래 살려둘 수도 없는 문제겠지요. 그렇다면 다음주 아니면 그 다음주쯤?

아무튼 장희빈이 죽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동이는 장희빈이 몰락하는 것을 마냥 즐거워 할 수만 있을까요? 물론 드라마상에서 동이는 워낙 착하고 고운 여자라 장희빈의 몰락을 바라지도 그리지도 않습니다. 오직 장희빈 스스로 함정에 빠질 뿐이지요. 

그러나 실제의 동이는 어땠을까? 그녀도 그토록 착하고 고운 모습으로 장희빈이 몰락해가는 과정을 안타까운 눈으로 지켜봤을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인현왕후가 죽고 장례를 치르자마자 곧 숙종에게 달려가 장희빈의 비행을 고변했다고 하니 말입니다. 

장희빈을 죽이는 것은 곧 동이의 몰락

▲ 동이, 그렇게 착하기만 한 여인이었을까?


우리가 실록의 기록을 다 믿을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당대와 후대의 실력자 최숙빈이 임금에게 사사로이 고변한 기록까지 믿지 못한다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실록은 어떤 경우에도 왕이 당대에 실록을 볼 수 없도록 했던 만큼 기사 작성의 자유가 보장되었던 터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실제 역사에서는 드라마가 만든 픽션에서처럼 동이가 중전 자리를 놓고 고민하는 모습이 아니라 중전 자리를 따내기 위해 쟁투를 마다하지 않는 열혈여성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마도 숙종이 그런 동이의 말을 별 증거도 없이 믿고 장희빈을 사사했다는 것은 동이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대단했었다는 증거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반대로 당시 숙종은 노론과 소론, 남인 사이에서 환국정치를 통해 세력을 확보하는 전략을 쓰고 있었던 고로 남인과 소론을 제거할 목적으로 최숙빈의 손을 들어준 것인지도 모릅니다. 환국정치란 무엇인가 생각해보니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정권교체 같은 것이더군요. 

단지 차이가 있다면 현대의 정권교체는 민의로 바꾸는 것이지만, 그때의 정권교체, 즉 환국이란 임금의 뜻으로 바꾼다는 것입니다. 숙종은 아마도 골치 아픈 원리주의자들, 책에 나오는 원칙과 민심 뭐 이런 따위를 즐기는 남인들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서인들, 시류와 대세를 논하는 노론의 편을 드는 게 편했을지도 모릅니다. 세상의 재물과 권세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가진자들에게 집중되는 것이고, 그 가진자들이 세상을 운영하고 다스리는 것은 마치 자연의 섭리와도 같다고 주장하는 대세론은 왕에게도 매우 편안한 정치였을 겁니다. 

숙종은 매우 영악한 왕, 동이의 소원 다 들어주지 않아

숙종은 매우 영민한 혹은 영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동이의 말을 100% 들어주었지만, 마지막 한가지는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절대로 들어줄 수 없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왜냐? 동이가 다만 천인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 겁니다. 무치한 왕에겐 천민이니 귀족이니 이런 구분은 의미가 없습니다.    

숙종은 동이의 야심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드라마에선 숙종이 동이를 중전으로 만들기 위해 여러가지 수를 쓰느라 고생 꽤나 하고 있습니다만, 실제 역사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장희빈에게 자진을 명하는 동시에 교지를 내려 후궁이 왕비가 되지 못하도록 법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것입니다. 한편으론 동이의 발고를 받아들여 장희빈을 죽이되 동이에게 중전 자리를 주어 권력을 몰아주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의 후계체제를 지키기 위한 고육책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동이가 중전이 되면? 세자는 떨려나는 것지요, 당연히. 

인현왕후가 죽으면서 동이가 중전이 돼야만 세자도 살고 연잉군도 산다고 했던 말? 그건 비상식을 넘어 몰상식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중전인데, 여러분은 내 아들 말고 평생을 자기와 대립했던 여자의 아들이 왕이 되는 꼴을 보실 수가 있겠습니까? 

아무튼 장희빈이 죽고 임금은 후궁이 왕비가 될 수 없는 법을 만듭니다. 그리고 곧 새 왕비를 반가에서 들여오게 됩니다. 바로 인현왕후의 계비, 인원왕후입니다. 듣기로는 열여섯 살의 새파란 나이라고 하지요? 동이는 그때 몇 살이었을까요? 속 좀 뒤집어졌을 겁니다. 


뭐 들리는 설에 의하면 동이는 그 이후에 사가에 나가 시름시름 자주 앓다가 4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합니다. 영조가 등극하기는 것을 보지도 못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조금만 더 살았으면 아들이 왕이 되는 모습을 보고 죽었을 텐데요. 49세면 저보다는 오래 살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너무 아까운 나이네요. 

동이의 투쟁이 만들어낸 후대의 피의 역사

그러므로 이런 결론의 유추가 가능해지는군요. 동이는 장희빈을 몰락시켰지만 그것이 곧 자기의 영광으로 되지는 않았다, 세자도 바꾸지 못했고 경종이 등극하는 것을 막지도 못했다, 오히려 인원왕후란 새파란 왕비가 들어오면서 왕의 총애만 빼앗기고 사가로 내쳐지는 신세가 됐다, 이렇게요. 

그리하여 결국 소위 경종독살설이란 역사적 의문이 만들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이 경종독살설에 가장 깊이 개입된 인물이 동이인지도. 이인좌의 난이나 과거장 괴답안지 사건 등은 영조의 음모라고 주장하지만, 동이가 중전이 되고 세자도 바꿨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지 모르지요.  

그러니까 동이는 장희빈을 몰락시켰지만, 편해진 것이 아니라 더한 가시밭길이 앞에 놓이게 된 셈입니다. 그러다 채 50도 넘기지 못하고 요절하고 말았네요. 게다가 영조가 갖게 될 이 두 개의 콤플렉스, 경종독살설과 천민의 아들이란 사실은 후일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결국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기반이었던 노론과 평생 싸우다 또 독살설을 남기고 죽게 됩니다. 아시다시피 정조가 죽은 다음 해 1801년은 피의 해였지요. 신유사옥(혹은 신유박해)이라고 해서 정약용 3형제를 비롯 이가환, 이승훈 등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학살된 해였습니다.

이렇게 길게 보니 동이의 투쟁이 그렇게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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