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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

김탁구, 감옥에 간 악당 한승재를 위한 변명

김탁구가 끝났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 여운이 진하게 남아 있습니다. 한 회 한 회가 긴장의 연속이었고 마지막회마저도 그 긴장은 줄지 않았습니다. 최근에 보기 힘든 드라마였습니다.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김탁구지만, 사실은 김탁구만 주인공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구마준도 주인공이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보다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또 하나의 주인공이 있었습니다. 바로 한승재입니다. 한승재. 그는 이 드라마에서 김탁구를 괴롭히는 악당이었습니다. 그러나 보통의 악당들과는 달랐습니다. 눈물겨운 사연을 가진 슬픈 악당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보면 "저 나쁜 놈" 하면서도 또 한편 가슴 시린 연민의 정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는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어려서 부모를 잃었습니다. 그런 그를 거두어준 것은 거성가였습니다. 구일중의 어머니 홍여사가 그를 거두어 키우고 대학 교육까지 시켜 거성맨으로 만들었습니다.


한승재의 콤플렉스는 종놈 의식에서 나온 것?

아마도 한승재에겐 말 못할 콤플렉스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는 홍여사 밑에서 구일중과 함께 자라고 친구가 되고 공부도 해서 매우 영특한 인재가 되었지만, 구일중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구일중의 밑에서 비서실장으로 2인자 역할을 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물론 그는 떠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 하지 않았습니다. 홍여사가 베풀어준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구일중을 위해 거성에 남아 열심히 일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구일중도 그런 한승재가 누구보다 미더웠을 것입니다. 형제같은 친구이자 비서실장 한승재가 든든했을 것입니다. 

한승재가 서인숙을 얼마나 사랑했기에, 또는 한승재와 서인숙이 어느 정도의 관계였기에 마치 구일중이 한승재가 사랑하는 여자를 빼앗았다고 했는지는 이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아무런 언급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매우 불만스런 것이었지만, 제작진이 왜 그랬는지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떻든 한승재는 서인숙의 꾐에 넘어가―처음에 그는 매우 머뭇거렸습니다. 그런 점으로 보아 그의 사랑이 홍여사에 대한 보은의 감정보다 크다고는 볼 수 없었습니다―불륜을 저질렀고, 그 결과 구마준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한승재가 악당이 되는 씨앗인 셈이었습니다.

한승재는 위에서도 말했듯이 아주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조실부모하고 홍여사 밑에서 구일중과 형제처럼, 친구처럼 자랐지만 늘 콤플렉스에 시달렸을 겁니다. 마치 문간방에 빌어먹는 종 신세가 바로 자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이 콤플렉스는 역으로 스스로를 더 종이란 인식에 가두었을지 모릅니다.

아들 마준은 외로운 한승재에겐 인생의 목표

그렇게 체념과 순종에 익숙한 그에게도 목표가 생겼습니다. 아들이 생긴 것입니다. 비록 떳떳하게 밝힐 수는 없지만 그는 아들을 거성가의 후계자로 만들겠다는 야심이 생겼습니다. 서인숙과 동일한 이 야심이 달성되면 서인숙도 자기 품으로 올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틀어졌습니다. 최후에 그의 계획은 실패했습니다. 구마준이 교도소에 수감된 한승재를 찾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아저씨, 나는 아저씨가 단 한 번이라도 존경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길 원했어요. 그랬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비참하지는 않았을 거에요. 그 기억 하나만으로도 살아갈 힘이 되었을 거에요."

그러나 저는 그렇게 말하는 구마준이야말로 참으로 미운 말만 골라서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마준은 알고 있습니다. 한승재가 왜 그토록 악독한 인간이 되었는지를. 그것은 모두 구마준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외로운 사람이었으므로 친아들 마준과 서인숙이 전부요 목표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아버지의 모습은 숭고한 것입니다. 비록 한승재가 살인미수, 강간사주, 폭력, 아동유괴, 횡령 등 갖가지 범죄를 다 저지른 악당이지만, 구마준은 아버지를 그런 눈으로 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최소한 마준에게 한승재의 아버지로서의 사랑은 절실한 것이었으니까요. 

한승재가 구일중에게 마지막으로 외친 말이 가슴에 닿습니다. "나는 평생을 네 밑에서 2인자로 살아왔어. 그런데 날 봐. 내가 뭘 가지고 있지? 종처럼 부려먹고 내게 해 준게 뭐냐고. 누군가가 가지게 되면 누군가는 빼앗기게 돼 있어. 이 세상은 이기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 거야." 

생존경쟁에 내몰린 아버지들이 존경받는 삶, 쉽지 않다

한승재의 부정은 삐뚤어진 것이었지만, 그 삐둘어진 부정의 배경에는 이 사회의 냉혹한 현실이 있었던 것입니다. 한승재가 말한 현실, 곧 누군가가 가지게 되면 누군가는 빼앗기게 되어 있다는 이 엄연한 사실 앞에서 대체 구마준은 어떤 존경스러운 아버지의 모습을 기대했던 것일까요?  

저 역시도 한승재의 그 말을 들으면서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자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교도소에 찾아가 한승재를 향해 "왜 존경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느냐?" 하고 비난하는 모습을 보며 탄식했습니다.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은 과연 자식들에게 얼마나 존경스런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말로는, 정치사회적으로는 진보니 민주니 하고 떠들면서도 막상 직장에 나가면 살기 위해 신념과는 다른 행동을 하도록 강요받는 것이 이 시대 아버지들의 모습입니다. 4대강사업 반대 집회에 꼬박꼬박 참석하는 사업을 하는 어떤 아버지는 살기 위해 권력자들을 만나면 웃음을 팔아야 합니다.  

어찌보면 이 사회에서 진정 존경받을 수 있는 아버지가 과연 얼마나 될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물론 한승재는 벌 받을 만한 짓을 했습니다. 한승재는 비열했으며, 잔인했고, 부도덕했습니다. 온갖 악행을 다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도 이유는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가지게 되면 누군가가 빼앗기게 되는 이 냉혹한 현실 앞에서 나는 내 아들에겐 절대로 빼앗기는 서름을 당하게 하지 않겠다. 이기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 이 세상에서 내 아들 만큼은 기필코 승자의 삶을 살도록 해주겠다."  

한승재의 삐둘어진 아들 사랑은 그의 탓만은 아니다

한승재의 비장하기까지 한 이 이유가 오로지 그의 탓만일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승재의 아들을 향한 삐뚤어진 부정은 실은 그가 속한 사회로부터 온 것입니다. 만약 이 사회가 누군가의 것을 빼앗아 가진자가 되어야만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할 필요가 없는 사회였다면 한승재의 불행은 처음부터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갑자기 얼마 전 봉하마을에 블로거 간담회를 갔다가 들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김경수 전 비서관이 한 말인지 김정호 전 비서관이 한 말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일화 하나를 들려주었습니다. 

퇴임 후 고향에 정착한 전직 대통령을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봉하마을을 찾았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도 많았는데 그들은 한결 같이 노 전 대통령에게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아이에게 덕담 한마디 해주세요." 그러면 노 전 대통령은 진지하게 고민하다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글쎄요. 이런 말이 있잖아요.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우리 세대는 그럴 말 들으며 자랐잖아요. 그런데 말이에요. 이런 생각을 해야만 했던 그런 사회가, 그런 시절이 그만큼 불행했던 것이죠. 그런 사회는 미래가 없어요. 그런 사회를 물려주면 안 되겠다, 그런 생각을 많이 해요."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별 생각없이 메모만 하고 말았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하니 '사람 사는 세상'이란 어떤 것인지 또 그런 세상을 아이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어른들의 할 도리가 아니겠냐 뭐 그런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원칙과 상식이 있는 사회', 그렇게도 말할 수 있겠지요.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되면 한승재 같은 인물은 없어질까?

노무현은 매우 진지한 사람이어서 어쩌면 아이들에게 그저 "착하고 건강하게 크세요"라거나 "공부 열심히 하세요" 같은 상투적인 덕담은 하기 싫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어른들에게 덕담을 해준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아무튼, 정반대의 방향에 있는 모난 돌과 한승재를 비교하는 것은 난센스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어떻든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그게 어떤 세상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물어보긴 했는데 시원한 답을 듣지는 못했습니다) 모난 돌도 한승재 같은 인간도 나타나지 않겠지요.

어떻게 마무리를 하다 보니 한승재를 위해 변명을 한다는 것이 엉뚱하게 한승재를 욕하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한승재가 악당이기는 하지만 그가 삐둘어지게 된 배경에는 치열하게 경쟁을 조장하는 이 사회의 탓이 더 크지 않겠나 그런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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