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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

'전우'의 전쟁바람에 졸속 막내린 '거상 김만덕'

이해할 수 없는 졸속 마무리 '김만덕', 뒤이은 전쟁 대작드라마 '전우'

조선 정조 임금 때의 제
주 상인 김만덕의 일대기를 다룬 <거상 김만덕>이 막을 내렸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상인 김만덕을 다룬 대하드라마를 기대했지만, 결과는 싱거운 실망만 안겼습니다. 어쩌면 마치 훌륭한 도덕 드라마를 보는 듯했다고 하면 지나친 악평일까요? 그러나 어떻든 막판에 드는 느낌은 그것이었습니다. 잘 만든 도덕 드라마.

김만덕이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아마도 KBS 역사스페셜을 통해 처음 대중적으로 세상에 나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김만덕은 조선시대의 여성이었습니다. 김만덕이 높게 평가되는 지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여성이라는 것, 그리고 그가 살았던 시대가 조선이었다는 것. 그런 김만덕이 제주 최고의 상인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김만덕은 한성을 비롯한 조선의 내륙은 물론 청나라와 러시아에까지 분점을 두고 무역을 했다고 하니 실로 대단하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당시 제주 여인들은 출륙금지령으로 인해 뭍에는 나갈 수 없었을 터인데도, 드라마에서처럼 앉아서도 천리를 보는 혜안을 가진 그녀의 재주가 부럽기만 합니다.


<거상 김만덕>은 초반에 야심차게 출발했습니다. 시전 상인 강계만과 강유지, 그리고 오문선과 김만덕의 갈등을 통해 자칫 심심할 수도 있는 극에 긴장감을 불어넣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드라마가 너무 갈등에만 치우치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거상 김만덕>은 그렇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갈등만 하다가. 

참으로 아쉬운 대목입니다. 김만덕은 초지일관 부처님이고, 오문선은 끝까지 야차처럼 행동하다가 어느 날 뜬금없이 개과천선 했습니다. 마지막회에. 그것도 하나뿐인 아들을 만덕에게 맡기고 제주를 떠나는 것입니다. 실로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바야흐로 6·25동란 60주년이 다가오고 있었으니까요.   

다음 주부터는 1970년대에 방송되었던 <전우>를 리메이크한 <전우>가 방영된다고 합니다. <전우>. 기억하시는 분은 하시겠지만, 추억의 드라맙니다. 이미 고인이 된 라시찬과 "짠짜라잔짜~ 짠짠♬" 하면서 시작되던 음악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구름이 간다. 하늘도 흐른다.
피 끓는 용사들도 전선을 간다.
빗발치는 포탄도 연기처럼 헤치며
강 건너 들을 질러 앞으로 간다."


추억이 새롭겠지만, 이 드라마는 철저한 반공드라마였습니다. 말하자면 <대한늬우스>와 별로 다를 바 없는 드라마였지요. 가끔 <지금 평양에선>이나 <통일전망대>에서 볼 수 있는 북한의 정권안보용 드라마를 보면 이 <전우>가 생각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 <전우>가 리메이크 되어 다시 등장한다고 하니 궁금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도대체 21세기에 만드는 <전우>는 어떤 식일까? 30여 년 전의 <전우>와 비교해가며 보는 재미도 꽤나 있겠다 싶습니다. 그러나 제가 오늘 아쉬워하는 것은 <거상 김만덕>이 전쟁 드라마의 기획에 밀려 부랴부랴 공중파에서 탈락했다는 느낌 때문입니다. 

실제로 <거상 김만덕>은 이야기를 제대로 시작하지도 못했습니다. 태안 앞바다에 대량의 기름을 쏟아 붓는 사고를 치고도 사람 죽어가는 꼴을 구경만 하고 있는 삼성 같은 재벌이 뻔뻔하게 활보하는 비정상의 시대에 이 드라마는 보여줄 것들이 많았습니다.

김만덕을 알기 전에 조선의 뛰어난 여성 하면 떠오르는 이름들은 신사임당, 허난설헌, 황진이 정도였지요. 이들은 신사임당을 제외하곤 모두 비운의 운명을 살다간 여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뛰어난 재주를 지녔지만, 세상이 그들에게 부정적이었으며 그들도 세상에게 부정적이었습니다.

<거상 김만덕>에서 할매(고두심)가 오문선에게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네 그릇을 알고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거라. 그리고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성공하는 법이다." 아마 이 말은 김만덕에게도 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드라마를 통해 김만덕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여성으로 조명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기회는 전쟁 바람에 사라졌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졸속 마무리에 놀라 돌아보니 거기에 <전우>가 있었습니다. 하긴 KBS나 MBC도 땅 파서 장사하는 거 아니니까 한국전쟁 60주년이란 호기를 그냥 날려버릴 수는 없겠지요. 그래서 MBC도 <로드 넘버원>이란 전쟁 드라마를 곧 시작한다고 합니다.

아무튼 재미는 있을 것 같습니다. 세상에 제일 무서운 게 전쟁이지만, 또 제일 재미있는 것도 전쟁 이야깁니다. 졸속으로 어영부영 막을 내린 <거상 김만덕>을 아쉬워하면서도 <전우>와 <로드 넘버원>을 기다리는 저도 참 희한한 족속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거참~

<전우>가 기획의도에서 밝힌 것처럼 반전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해줄 수 있을지, 아니면 30여 년 전 <전우>처럼 하나의 반공드라마로, 그리하여 뿔 달린 적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하는 이데올로기 선전물에 불과할 뿐일지는 지켜볼 일입니다. 그 전에 한 가지 확실하게 동의하는 것이 있습니다.

"비극의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비극을 생생히 기억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