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절에 무학산 등산을 했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아니 사실은 평소에 거의 하지 않던 등산을 했습니다.
물론 개천절 기념 등반 이런 건 절대 아니었습니다. 제 아내의 대학 과선배(1년 선배고 저는 처형이라고 부릅니다)가 같이 가자고 해서 따라 나선 것입니다. 그 처형은 진해 웅진씽크빅 지국의 장님이십니다. 원래 부산에서 지사장으로 있었는데, 집에 어르신이 몸이 안 좋으셔서 일부러 지국장으로 좌천해서 낙향(?)했다고 합니다. 어쩌면 진짜로 좌천된 것인지도 모르지만, 효심이 갸륵해서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개천절이라 함은 하늘이 열렸다 이런 뜻이겠지요. 단군께서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기 위해 신시를 여신 날이라지요. 그 높고 큰 뜻을 어찌 알겠습니까만, 우리 같은 백성들이야 하루 쉴 수 있어 좋고 특히 이번엔 3일 달아서 쉴 수 있으니 더욱 좋지요. 그래서 바빠서 얼굴 한 번 보기 힘든 처형이 일부러 시간 내서 산에 가자고 할 수도 있었던 것이기도 하고 말이지요.
우선 우리 집 뒤 만날고개로 해서 대곡산 정상으로 올랐습니다. 가파른 산길이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숨은 턱에 차고 다리는 후들거리는데 뉘집 아이들인지 떼로 몰려 히히낙락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강아지 한 마리도 막 뛰어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강아지도 뛰어가고 아이들도 저리 잘도 올라가는데 어른인 내가 비실거린대서야 될 일이겠습니까? 물을 반병이나 비우고 힘을 냈습니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가 아니겠습니까?
드디어 대곡산 정상에 올랐습니다. 저 멀리 바다 너머로 거제도인 듯 보이는 육지가 기다랗게 널려 있었는데, 안개가 자욱한 날씨 탓에 그리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정상표지석에는 516m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이렇게 높이 올라와 보기는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어릴 때 산골에 살 때는 산에서 뛰어노는 게 일이었지요. 이즈음엔 한 시간만 뛰어다니면 머루가 쌀푸대에 한가득 담기고 했습니다. 그러면 겨울에 우리 아버지는 머루주에 붉어진 얼굴로 두만강 푸른물에를 부르시곤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아버지도 운동 삼아 산에 오르시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얘길 했더니 처형이 그러시는군요.
"전쟁을 겪으신 분들이야 어디 산에 재미삼아 오를 생각이 나겠어? 산에서 생과 사를 넘나들며 생존투쟁을 하셨을 텐데, 지긋지긋하실 테지. 우리 아버지도 산에 올라가는 사람들 보고 미친놈들이라고 그러셔."
그러고 보니 그 말씀이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산봉우리 하나를 지키기 위해 한 달을 넘게 오줌을 받아 마셔가며 버티던 쓰라린 전쟁의 기억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덕에 을지무공훈장 등을 세 개나 받으셨지요. 그러나 나라에선 전쟁터에 나가 목숨 바쳐 충성했다고 그리 알아주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릴 때 홧김에 모두 불살라 버렸답니다. 작년에 필요해서 다시 찾아오시긴 했지만…. 그런 분들에겐 처형 말씀처럼 산이란 존재가 지긋지긋할 수도 있겠군요.
어쨌든 우리는 대곡산 정상에서 막걸리를 한 잔씩 나누어 마시고 다시 힘을 내어 무학산 정상으로 향했습니다. 여기서부터 무학산 정상까지는 능선을 따라 완만하게 올라가는 길입니다. 역시 산은 능선을 타는 맛이 일품입니다. 익어가는 억새풀과 함께 산 아래를 굽어보며 걷는 기분은 정말 천상을 걷는 기분입니다. 억새를 보더니 갑자기 처형이 물어보는군요.
저야 물론 으악새란 가을이 오는 것을 구성진 울음소리로 알려주는 어떤 구슬픈 새라고 생각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억새풀이라고 가르쳐 주는군요. 역시 사전에 찾아보니 억새의 경기방언입니다. 새가 맞다, 아니다 억새의 방언이다 아직 논란이 많은데, 막상 ‘짝사랑’의 노랫말을 지은 박영호 선생이 월북 후 북조선연극인동맹 위원장을 하다 돌아가셨으므로 알 길은 없습니다.
일제 말 친일작가로 활동하기도 했던 그가 이북 출신(강원도 통천)이란 점을 들어 왜가리의 이북 방언이란 설도 있지만 억새의 방언이란 설이 더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눈을 감으니 가을바람에 부대끼는 억새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아 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지나친 그 세월이 나를 울립니다
여울에 아롱젖은 이지러진 조각달
강물도 출렁출렁 목이 멥니다
목이 메거나 말거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훔치며 우리는 정상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이제 고지가 바로 저기입니다. 정상에 나부끼는 태극기를 보노라니 아닌 게 아니라 목이 메는군요. 이제 고생 끝입니다.
761.4m. 정상에 올라서니 젊은 학생들이 반겨주는군요. 수고했다고 막걸리도 한 잔 권합니다. 제 아내와 처형은 맛있게 한 잔씩 얻어 걸쳤습니다. 그러나 저한테는 아무도 권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남자들이란 세상 밖에 나와서도 이렇게 괄시만 받고 살아야 하다니 참 처량도 합니다.
정상에서 바라보니 마산은 물론이고 창원 시가지도 바로 손에 잡힐 듯 다가와 있습니다. 제가 살던 가음정과 상남동도 보이는군요. 정말 시원합니다. 이 동네에서 산지도 (좀 부풀려서!) 어언 30년이 다 되어 가는데 무학산 정상에는 처음 올라서 봅니다. 제가 스물 몇 살 때 마창노련 전진대회 한다고 딱 한 번 올라와 본 적이 있지만, 그때도 서마지기 고개에서 막걸리만 마시다 내려갔습니다.
역시 사람들에겐 누구나 정복자의 야심 같은 게 숨어있는 것일까요? ‘인자仁者’는 ‘요산樂山’ 해야 한다는 개똥철학을 모시고 사는 저도 산 정상을 정복하고 보니 그 희열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앞으로 자주 산을 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산을 정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산에 올라 저 자신을 정복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2009. 10. 4. 파비
물론 개천절 기념 등반 이런 건 절대 아니었습니다. 제 아내의 대학 과선배(1년 선배고 저는 처형이라고 부릅니다)가 같이 가자고 해서 따라 나선 것입니다. 그 처형은 진해 웅진씽크빅 지국의 장님이십니다. 원래 부산에서 지사장으로 있었는데, 집에 어르신이 몸이 안 좋으셔서 일부러 지국장으로 좌천해서 낙향(?)했다고 합니다. 어쩌면 진짜로 좌천된 것인지도 모르지만, 효심이 갸륵해서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개천절이라 함은 하늘이 열렸다 이런 뜻이겠지요. 단군께서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기 위해 신시를 여신 날이라지요. 그 높고 큰 뜻을 어찌 알겠습니까만, 우리 같은 백성들이야 하루 쉴 수 있어 좋고 특히 이번엔 3일 달아서 쉴 수 있으니 더욱 좋지요. 그래서 바빠서 얼굴 한 번 보기 힘든 처형이 일부러 시간 내서 산에 가자고 할 수도 있었던 것이기도 하고 말이지요.
저 멀리 마창대교가 보입니다. 안개만 아니었다면 거제도도 환히 보일 것만 같습니다.
우선 우리 집 뒤 만날고개로 해서 대곡산 정상으로 올랐습니다. 가파른 산길이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숨은 턱에 차고 다리는 후들거리는데 뉘집 아이들인지 떼로 몰려 히히낙락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강아지 한 마리도 막 뛰어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강아지도 뛰어가고 아이들도 저리 잘도 올라가는데 어른인 내가 비실거린대서야 될 일이겠습니까? 물을 반병이나 비우고 힘을 냈습니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가 아니겠습니까?
드디어 대곡산 정상에 올랐습니다. 저 멀리 바다 너머로 거제도인 듯 보이는 육지가 기다랗게 널려 있었는데, 안개가 자욱한 날씨 탓에 그리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정상표지석에는 516m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이렇게 높이 올라와 보기는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대곡산 정상. 여기까지가 힘들고 이후부터는 능선행입니다.
어릴 때 산골에 살 때는 산에서 뛰어노는 게 일이었지요. 이즈음엔 한 시간만 뛰어다니면 머루가 쌀푸대에 한가득 담기고 했습니다. 그러면 겨울에 우리 아버지는 머루주에 붉어진 얼굴로 두만강 푸른물에를 부르시곤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아버지도 운동 삼아 산에 오르시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얘길 했더니 처형이 그러시는군요.
은성무공훈장
그러고 보니 그 말씀이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산봉우리 하나를 지키기 위해 한 달을 넘게 오줌을 받아 마셔가며 버티던 쓰라린 전쟁의 기억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덕에 을지무공훈장 등을 세 개나 받으셨지요. 그러나 나라에선 전쟁터에 나가 목숨 바쳐 충성했다고 그리 알아주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릴 때 홧김에 모두 불살라 버렸답니다. 작년에 필요해서 다시 찾아오시긴 했지만…. 그런 분들에겐 처형 말씀처럼 산이란 존재가 지긋지긋할 수도 있겠군요.
어쨌든 우리는 대곡산 정상에서 막걸리를 한 잔씩 나누어 마시고 다시 힘을 내어 무학산 정상으로 향했습니다. 여기서부터 무학산 정상까지는 능선을 따라 완만하게 올라가는 길입니다. 역시 산은 능선을 타는 맛이 일품입니다. 익어가는 억새풀과 함께 산 아래를 굽어보며 걷는 기분은 정말 천상을 걷는 기분입니다. 억새를 보더니 갑자기 처형이 물어보는군요.
“부권씨는 으악새가 무슨 뜻인지 알어?”
구름과 맞닿은 억새
저야 물론 으악새란 가을이 오는 것을 구성진 울음소리로 알려주는 어떤 구슬픈 새라고 생각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억새풀이라고 가르쳐 주는군요. 역시 사전에 찾아보니 억새의 경기방언입니다. 새가 맞다, 아니다 억새의 방언이다 아직 논란이 많은데, 막상 ‘짝사랑’의 노랫말을 지은 박영호 선생이 월북 후 북조선연극인동맹 위원장을 하다 돌아가셨으므로 알 길은 없습니다.
일제 말 친일작가로 활동하기도 했던 그가 이북 출신(강원도 통천)이란 점을 들어 왜가리의 이북 방언이란 설도 있지만 억새의 방언이란 설이 더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눈을 감으니 가을바람에 부대끼는 억새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아 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지나친 그 세월이 나를 울립니다
여울에 아롱젖은 이지러진 조각달
강물도 출렁출렁 목이 멥니다
포즈 잡는다고 웃고 있지만 사실은 울고 싶은 모양입니다. 태극기 날리는 정상이 바로 뒤에 보입니다.
목이 메거나 말거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훔치며 우리는 정상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이제 고지가 바로 저기입니다. 정상에 나부끼는 태극기를 보노라니 아닌 게 아니라 목이 메는군요. 이제 고생 끝입니다.
761.4m. 정상에 올라서니 젊은 학생들이 반겨주는군요. 수고했다고 막걸리도 한 잔 권합니다. 제 아내와 처형은 맛있게 한 잔씩 얻어 걸쳤습니다. 그러나 저한테는 아무도 권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남자들이란 세상 밖에 나와서도 이렇게 괄시만 받고 살아야 하다니 참 처량도 합니다.
무학산 정상에서 만난 친절한 학생들과 무학산을 정복한 투여사
정상에서 바라보니 마산은 물론이고 창원 시가지도 바로 손에 잡힐 듯 다가와 있습니다. 제가 살던 가음정과 상남동도 보이는군요. 정말 시원합니다. 이 동네에서 산지도 (좀 부풀려서!) 어언 30년이 다 되어 가는데 무학산 정상에는 처음 올라서 봅니다. 제가 스물 몇 살 때 마창노련 전진대회 한다고 딱 한 번 올라와 본 적이 있지만, 그때도 서마지기 고개에서 막걸리만 마시다 내려갔습니다.
역시 사람들에겐 누구나 정복자의 야심 같은 게 숨어있는 것일까요? ‘인자仁者’는 ‘요산樂山’ 해야 한다는 개똥철학을 모시고 사는 저도 산 정상을 정복하고 보니 그 희열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앞으로 자주 산을 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산을 정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산에 올라 저 자신을 정복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2009. 10. 4. 파비
서마지기 고개에서 지하여장군의 머리가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하산하는 길이 너무 가팔라서 올라가기보다 힘들었습니다. 다음엔 다른 하산 코스를 골라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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