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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야기

블로거와 간담회 나선 작은도서관의 희망만들기

도서관이 없던 시골에서 부산으로 유학(?)을 간 80년부터 도서관은 저에게 가장 친숙한 곳이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에는 독립된 도서관 건물이 있었습니다. 그곳이 저에겐 놀이터 겸 안식처였던 것 같습니다. 직업훈련소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던 고교시절, 저는 수학문제를 풀거나 영어 단어를 외는 대신 독서에 몰두했습니다. 

이미지아파트도서관 내부. 아이들이 책 보며 놀기 딱 좋은 공간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아직은 장서가 부족하고 좁다.


어린 시절 놀이터요 마음의 안식처였던 도서관

일반 인문계 고교에서 배우는 교과서를 한자도 읽지 않고 졸업했다면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그건 사실입니다. 재료역학이니 기계공작이니 하는 과목들은 자격증 시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공부해야 했지만, 국어나 수학을 공부하는 것은 제게 사치였습니다. 게다가 일주일에 3일을 꼬박 기름에 젖어 사는 우리에게 역사 같은 과목은 아예 없었습니다. 

그러나 대신에 학교에는 어디에도 부럽지 않은 큼지막한 도서관이 있었고 저는 거기에서 놀았습니다. 그곳에서 톨스토이도 만나고 헤밍웨이도 만났습니다. 채시라가 주연한 미니시리즈의 원작 <여명의 눈동자>도 그때 읽었었지요. 학교에서 배우는 교양 능력은 중학교 수준에서 멈추었지만, 도서관과 친했던 것이 오늘날 이처럼 블로그를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80년대 초반 창원공단에 취업한 제가 공장을 쉬는 날이면 늘 가는 곳도 도서관이었습니다. 공장에서 노동운동을 하다 경찰에 쫓겨 수배생활을 할 때도 시간을 보내던 곳은 도서관이었습니다. 물론 나이가 들면서 도서관은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지만요. 도서관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술집이 더 가까워지는 것은 인지상정일까요. 

그러나 아무튼 도서관은 지금도 제게 가장 친근한 곳 중 하나입니다. 도서관은 어린왕자도 만나게 해주고, 아름다운 전원주택도 만나게 해줍니다. 고대의 찬란한 유적도 만날 수 있으며, 그곳에서 살다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도 있습니다. 훌륭한 작가들이 찍은 아름다운 사진도 구경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카메라 사용법도 배울 수 있군요.

작은도서관 희망만들기 블로거 간담회. 블로거는 저쪽, 이쪽은 작은도서관 사서들.


작은도서관이 주최한 블로거 간담회

며칠 전, <경남여성새로일하기지원본부>에서 주최하는 <작은도서관 희망만들기 블로거 간담회>에 초대를 받아 다녀왔습니다. 마산의 중리에 있는 한 작은도서관에서 열렸는데, 간담회가 시작되기 전에 잠깐 작은도서관이 어떤 곳인지 둘러볼 기회를 가졌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원래 이곳은 창고였는데 개조해 작은도서관을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도서관은 아담하고 깨끗했습니다. 작은 도서관이란 말이 실감날 정도로 아늑했지만, 풍부한 장서는 시립도서관 부럽지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이는 과장이지만, 그러나 작은도서관을 주로 이용하는 아이들에겐 보다 효율적일 거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 도서관에 오는 이용객들에게 꼭 필요한 책들만 엄선해서 비치해놓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제가 사는 마을에도 작년에 작은도서관이 하나 생겼습니다. 우리 마을은 아파트촌이 거의 없고 대신 오래된 주택들이 많이 모인 곳입니다. 원래 창원군청이었던 것이 나중에 의창군청이 되고 합포구청이 되었다가 지금은 경남대학교에서 인수해 평생교육원으로 사용되는 건물이 이 마을에 있는데, 이곳 1층에 작은도서관이 하나 생긴 것입니다.

경남대학교와 STX가 협력해서 만든 작은도서관입니다. 말하자면, 산학협동 도서관인 셈입니다. 멀리 떨어진 마산시립도서관을 주로 이용하던 저는 집에서 5~600m 거리에 도서관이 생긴다고 하니 매우 기뻤습니다. 작은도서관이란 개념을 알게 된 것도 이때였습니다. 그 전에는 주로 도서관 하면 시나 도에서 만든 거대한 건물만을 생각했었지요. 

왼쪽은 이미지아파트도서관, 책 고르는 아이들을 위한 배려가 바닥에 보인다/ 오른쪽은 경남대-STX도서관 책장


첫 번째 만났던 작은도서관에서 얻은 실망 

그러나 작은도서관과의 첫 만남은 실망 그 자체였습니다. 여기에 대해선 제가 1년 전에 그 감상을 적은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좋으실 듯합니다(http://go.idomin.com/28). 요즘도 저는 그 도서관을 자주 이용합니다만, 별로 나아진 건 없습니다. 여전히 장서의 대부분은 법학개론이니, 경제학원론이니, 기계공학이니, 물리학이니 하는 이름만 들어도 머리 아픈 책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도서관 입구에 앉은 사서는, 사실은 진짜 사서가 아니라 아마도 아르바이트 대학생인 듯이 보이는 사서는 매우  불친절하고 사무적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는 이용객들이 불필요한 행동을 하지는 않는지, 컴퓨터 이용대장에 기록을 제대로 하는지 지켜보기 위해 고용된 감시원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경직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서 아닌 사서는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작은도서관을 이용하는 방문객은 아무리 둘러보아도 저 외에는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실은 이곳에 책을 보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곳에 컴퓨터가 두 대 비치되어 있는데, 그걸 쓰기 위해 가끔 들르는 정도였지요. 어떨 땐 이곳이 제 개인서재 같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지요.  

처음 만났던 작은도서관은 이처럼 저에게 실망만 안겨주었습니다. 그래서 대학과 기업체가 만든 작은도서관 말고 마을도서관은 어떨까 궁금한 마음으로 중리의 작은도서관에서 열리는 간담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새로 만난 마을도서관은 와~ 하는 탄성을 절로 자아내게 했습니다. 우선 이곳엔 경제학원론이니 민법총칙 같은 책은 없었습니다. 

주민이 스스로 만드는 작은도서관과 관 주도 도서관의 질감의 차이

게다가 아파트 단지의 한가운데에 도서관이 있다는 사실은 매우 즐거운 것이었습니다. 어려운 말로 <접근성>이 아주 뛰어나니까요. 사실 이것은 아파트촌의 장점입니다. 우리처럼 단독주택이 주로 모인 동네에선 부러운 일이지요. 어쩌면 우리 동네의 아이들에게 더욱 절실한 것이 이런 공간일 텐데도 말입니다.

간담회 진행자 문정희 팀장. 오른쪽은 김미정 도서관 사업담당.


아무튼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이 작은도서관의 이름은 대동이미지아파트도서관입니다. 블로거 간담회에 참석한 관장의 말에 의하면 창고였던 이곳을 개조해 도서관을 만들면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합니다. 장서를 확보하는 것도 문제였고, 고정적인 사서를 배치하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아이가 있는 집과 없는 집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블로거 간담회를 주최한 <경남여성새로일하기지원본부>에서 준비한 발표에 의하면, 작은도서관 희망만들기(전담인력 양성·파견사업)는 경력단절여성, 여성가장 등 취약계층의 일자리 창출과 사회적 기여를 통한 자기만족도 제고에도 유용할 뿐 아니라 지역민들이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는 문화공간을 통해 삶의 질을 제고하는데도 커다란 기여를 할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거기에 깊은 공감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관이나 기업체가 만든 도서관이 아니라, 민이 주도가 되어 운동적 관점으로 만들어나가는 작은도서관이어야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게 처음 작은도서관을 보여준 경남대-STX 합작 작은 도서관처럼 딱딱한 콘크리트의 질감과 다른 대동이미지아파트도서관의 우드질감은 운동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작은도서관은 운동이다!

국립중앙도서관 정책과의 김준이란 분이 2006년에 쓴 <작은도서관 개념에 대한 이해>에 보니 이런 말이 나와 있군요. "작은도서관은 운동이다." 두 개의 작은도서관을 경험해본 바에 의하면 이 말은 진리입니다. 기업과 대학이 만든 도서관도 결국은 관 주도 전시행정 수준을 넘지 못하는 한계가 분명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작은도서관은 운동이다!"란 말이 실감납니다.  

그리고 그 운동에 여성들이 앞장서는 것은 매우 지당하고 적절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래 사진은 간담회 다음날 작은도서관 사서로 일하고 있는 여성들과 진주 청동기박물관에 갔을 때 찍은 것입니다. 청동기박물관에 마련된 문고 앞에서 사서들은 탄성을 지르며 한참을 이곳에서 머물렀습니다. 역시 직업은 못 속이는 것일까요? 

블로거 간담회 다음날, 작은도서관 사서들과 다솔사를 거쳐 진주 청동기박물관 견학.


그 모습들에 제게서도 탄성이 흘러나왔습니다. "역시 작은도서관은 운동이야!" 그렇습니다. 역시 작은도서관은 운동이고 운동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운동을 이끌고 나가는 데 여성들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란 점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저와 나이가 비슷한 어느 사서의 말을 들으며 그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녀는 여성입니다.

"처음엔 일자리 생각으로 작은도서관 사서 일을 시작했어요. 아이들도 어느 정도 크고, 그러고 나니까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돈을 벌어 가계에도 보태야겠다는 생각을 했고요. 그런데 이제 돈은 뒷전이 됐어요. 돈보다는 뭐랄까, 일에 대한 보람 같은 거, 맞아요, 그게 우선이 됐어요. 이 일은 정말 보람 있는 일이에요. 정말 내 일을 찾은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