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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야기

아들과 올라간 장복산, 감동적 일몰과 비극적 결말

아들과 함께 장복산에 올랐습니다. 아래의 사진들은 10월 25일에 찍은 사진들입니다. 그러니까 10월 25일 우리는 장복산을 오른 것입니다. 시내버스를 타고 진해시민회관에서 내려 장복산 공원과 삼밀사를 거쳐 정상에 오르는 코스를 선택했습니다. 장복산 정상에서 능선을 타고 봉우리들을 넘어 안민고개에서 도로변 데크 등산로를 걸어 태백동으로 내려오기로 했습니다. 

진해시민회관에서 조금 올라가니 장복산 공원이 나왔습니다. 이곳에서 오뎅을 사먹었는데 맛은 하나도 없는 것이 개당 700원, 세 개에 2000원 하더군요. 기분 잡쳤습니다. 가격이 비싸면 그만한 값어치를 해야 하는데 이건 내가 만든 오뎅보다 더 맛이 없는데다가, 주인아주머니(할머니인지)가 경상도 갯가 사람 아니랄까봐 퉁명스럽기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초장부터 기분 잡쳤군. 오늘 산행은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 이거 기분이 영 안 좋아." 위에 보이는 녀석이 아들입니다. 이 녀석이 산에 따라온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요즘 제 카메라에 부쩍 눈독을 들이고 있습니다. 캐논 450D인데 나름대로 쓸 만한 DSLR 카메라죠. 전문가용은 아니라도 전문가용을 흉내 낸 보급형 SLR 카메랍니다.

저는 이 카메라를 산지 무려 8개월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자동모드만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들놈은 재산 1호인 이 카메라에 손을 못 대게 하는 데도 벌써 수동모드를 마음대로 조작하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알지 못하는 용어까지 써가면서 말입니다. 확실히 신식문물을 익히는 데는 아이들이 빠른 것 같습니다.

빛의 세계에 대해 더 고수인 것처럼 보이는 아들에게 저는 "그래, 좋다. 오늘은 카메라 니거다." 하고 과감하게 맡기고 말았습니다. 저는 8개월 동안 이 재산 1호를 불면 꺼질 새라 신주처럼 모셔왔습니다. 아직 잔기스 하나 없으니 방금 산거라고 해도 믿을 겁니다. 자, 그러므로 이제부터 보시는 모든 사진들은 아들놈의 솜씨랍니다. 

다람쥐가 지나가고 있군요. 녀석이 잽싸게 셔터를 눌렀지만, 18-55미리의 표준 줌렌즈로는 한계가 명백합니다. 녀석이 말합니다. "아빠, 봐라. 지름신이 안 내리나? 아, 나는 자꾸 지름신이 내리는 것 같다." 그게 무슨 소린지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망원렌즈 사고 싶지 않느냐 뭐 그런 이야기였더군요.  


망원렌즈? 아직 초보인 우리에게는 표준 줌렌즈면 꿀떡입니다. 그리고 풍경을 찍기에는 표준렌즈가 딱이죠. 산을 오르다보니 이런 태그가 나무에 붙어있군요. 산을 사랑하는 부부. 오우, 정말 훌륭한 부붑니다. 함께 산을 오르내리면 건강에도 좋겠지만, 정도 돈독해지고 일석이조란 생각이 드는군요.  


장복산 정상입니다. 아 참, 우리가 산에 오른 목적은 산행도 산행이지만, 장복산 일몰을 사진에 담기 위해서랍니다. 사실은 2주 전에 장복산에 올랐었는데 넘어가는 해가 너무 멋졌거든요. 아마 평생 그렇게 멋진 일몰광경은 처음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들놈을 꼬여 다시 장복산에 오른 것입니다.

12시 반부터 산을 타기 시작해 쉬엄쉬엄 올랐는데도 시간이 2시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해가 지려면 5시는 넘어야 할 텐데….


북쪽을 보니 창원시가지와 공단이 보입니다.


서쪽을 보니 마산시가지가 보입니다.


이번엔 다시 남쪽을 보니 진해시가지가 보입니다.


그러고 보니 장복산이 진해, 마산, 창원의 중심에 솟은 산이었습니다. 아들놈이 장복산 정상 표지석에 섰습니다. 제가 카메라를 받아 한 컷 찍었습니다. 산은 그리 높지 않았습니다. 5백 수십 미터쯤 되었는데, 정확한 높이는 까먹었습니다.


저 멀리 마창대교도 보이는군요. 다리 건너 오른쪽에 희미하지만 가포 매립현장이 보입니다. 날씨가 구름이 많고 황사가 있었던지 시계가 별로 좋지 않습니다. 며칠 전처럼 선명하고 대단한 크기의 일몰은 기대하기 어렵겠습니다.


저물어가는 가을에 웬 봄꽃이 피었습니다. 이게 창꽃이던가요, 진달래던가요? 아무튼 찬바람을 맞고 있는 꽃이 애처로웠습니다. 겨울을 재촉하는 늦가을에 핀 봄꽃의 피부 곳곳은 멍이 든 것처럼 시커멓게 시들어 있었습니다.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또 한편 왠지 불길한 생각이 다시금 밀려왔습니다.  


장복산 정상 바위에서 내려오는데 이렇게 밧줄을 타고 내려오는 코스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옆에 목재로 잘 만들어놓은 계단이 있는 줄을 모르고 이리로 내려왔습니다. 마치 유격대가 된 것 같습니다.


정상 부근의 바위들이 멋들어지게 서있군요. 아마 이 일대에서 가장 아름다운 능선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름다운 능선에 아름다운 꽃들도 만발하고요. 이 꽃은 구절초라고 하나요? 아니면 국화일까요? 저는 꽃 이름은 장미, 코스모스 밖에 몰라서…


장복산 정상이 바라보이는 옆 봉우리에 올랐습니다. 여기서 배낭에 넣어온 도시락을 먹고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현재 시간은 2시. 세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합니다. 저는 미리 책을 한 권 넣어왔습니다. 주변의 적당한 바위를 찾아 그곳에 앉아 세 시간을 버티려면 독서가 최고지요. 아들 녀석은 카메라를 들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를 테고요.


측량기준점인 모양입니다. 삼각점의 중심에 추를 늘어뜨리면 거기가 기준이지요.


드디어 서서히 일몰이 시작 되려나 봅니다. 그러나 아직 멀었습니다.


하늘에 비행기도 지나가고요.


이제 다섯 십니다. 오랫동안 기다린 보람이 있습니다. 역시 다가오는 저녁의 색은 아름답습니다.


자 지금부터는 말이 필요 없습니다. 그냥 사진만 감상하시겠습니다. 물론 다 우리 아들이 찍은 사진입니다. 아 우리 애는 월포초등학교 6학년입니다. 내년에 중학생이 되죠.


자, 잘 감상하셨습니까? 여기까지가 마지막 사진입니다. 아들 녀석은 진해시가지 야경도 찍겠다고 했지만 찍지 못했습니다. 장복산 정상에서부터 안민고개까지는 예닐곱 개의 봉우리가 있습니다. 오르락내리락 해야 하죠. 그런데 흥분에 도취된 아들놈이 내리막길을 카메라를 손에 든 채 뛰어가다가 엎어진 것입니다.

다음 봉우리에 뛰어올라가서 거기서 또 다른 일몰장면을 잡고 싶었던 것이죠. 제 딴에는 엎어지면서도 최대한 카메라를 보호하려고 했던 모양이지만, 보시다시피 이후부터 사진은 없습니다. 말씀 안 드려도 아시겠지만, 암흑은 산중에만 찾아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씩씩거리면서 능선을 달렸고, 녀석은 모르겠습니다. 대화가 단절되었으니까…. 

일몰이 지나가자 세상은 순식간에 검은색으로 변했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칼 같은 바위 능선의 양쪽은 천 길 낭떠러지, 이거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워낙 화가 났던 터라 아무 생각이 없더군요. 그냥 묵묵히 한 시간 가량을 달리니 안민고개가 나왔습니다. 속으로 살았다 싶었지만 일단 냉전을 유지해야 하므로 그런 내색은 하지 않았습니다. 

안민고개에서 진해시가지 방향으로 한참을 내려가려니 진해에 사는 아내의 대학 선배가 차를 몰고 우리를 데리러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평소 잘 가는 어느 실내포장에 들어가서 닭발 요리와 소주를 한 병 시키고 녀석에겐 우동과 만두를 한 접시 시켜주었습니다. 그 선배가 아들놈의 눈치를 살피더니 "야, 너 무슨 기분 안 좋은 일 있나. 표정이 와 그렇노." 

"일마 이거 오늘 사고 한개 칬다 아임니까." "와 무슨 사고 칬는데?" 경위를 들은 그 선배는 "야, 너그 애비 재산 1호를 그래 뿌사삤으니 성질 안 날끼가. 조심 좀 하지. 지나간 일인께 신경 쓰지 말고 만두나 먹어라." 그리고 제게도 한마디 했습니다. "아한테 너무 그라지 마라. 카메라가 중요하나, 아가 중요하지." 

하긴 맞습니다. 그러나 어디 사람이 그게 됩니까? 기분 나쁜 건 나쁜 것이고 또 아들은 아들이고 카메라는 카메라인 것이지요. 어쨌든 카메라는 2주 후에 부산에 가서 깨끗하게 수리를 했습니다. 그리고 아들놈은 매일 저녁마다 아르바이트로 설거지를 해서 받은 1000원을 모아 2만원을 변상했습니다. 

영문도 모르는 애 엄마는 "야 임마, 시키지도 않는 설거지를 니가 와 하는데?" 하면서 불만입니다. 그리고 제게도 불만입니다. "설거지를 할라면 자기가 하지 와 아를 시키노?" 제가 시켰거든요. 설거지해서 돈 벌어 갚으라고요. 어쨌든 오늘부로 2만원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녀석이 꽤 설거지를 많이 한 셈이죠. 

오늘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동민아, 오늘까지 2만원 받은 걸로 끝내자. 5만원은 받아야 되는데 나머지는 탕감이다. 됐나?" 그러자 녀석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며 무척 기분 좋아라 하는군요. 가만 생각하니 저도 좀 웃기는 구석이 있다는 생각은 들지만, 어쨌든 벌어진 일이니까…. 

적당한 시기에 적당한 방법으로 2만원은 돌려주어야 할 듯합니다. 아무튼 카메라는 무상수리로 간단하게 고쳤거든요. 물론 부산까지 두 차례 왕복 차비는 들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