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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야기

초딩 딸, "아빠, 약속 지키기 전에 쓰러짐 안돼"

오랜만에 집에 들어왔습니다. 사실은 오늘은 아내의 생일입니다. 우선 가족들이 밖에서 모두 만나―우리 가족은 남자 둘, 여자 둘입니다―외식이랄 것도 없는 외식을 하고 집에 들어왔습니다. 맥주를 두 병 마셨는데, 피곤이 몰려오면서 잠이 들었습니다. 깨어보니 보석비빔밥이 막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어휴, 다행이다 생각하며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텔레비전을 보았습니다. 

보석비빔밥은 제가 빼놓지 않고 보는 주말 연속극입니다. 천막에 있을 때도 휴대폰이나 노트북 DMB로 꼭 본답니다. 이 시간만큼은 저만의 시간입니다. 보석비빔밥은 별로 건전하지 않은, 아니 아주 불량스러운 의식구조를 가진 4명의 형제자매가 엮어가는 그러나 대단히 건전한(?) 이야기입니다.

어쨌든 저는 그들 네 명의 보석, 비취, 루비, 산호, 호박이 펼치는 불량한 이기심이 그렇게 밉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인간이란 원래 그런 것이지요. 솔직한 그들이 오히려 예쁘기만 합니다. 어렵게 살아온 환경을 탓하며 절대, 다시는 그렇게 살지 않겠노라고 결의를 다지는 모습은 실은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아내와 저, 그리고 막내딸은 연속극을 재미있게 보고 난 뒤에―음, 초딩 2년차인 딸은 TV 앞에서 이렇게 그림을 그렸군요―내일을 기다려야한다는 아쉬움에 한숨을 쉬었습니다. 항상 그렇지만 예고편을 살짝 보고 나면 내일이 정말 궁금하고 기다려지죠. 다시 피곤해지기 시작한 저는 딸아이에게 부탁했습니다.

"혜민아, 아빠 등하고 어깨 좀 주물러주라."
우리 딸은 참 효녑니다. 아들 녀석은 함께 드라마도 보지 않고 어깨도 주물러주지 않습니다.
"그래, 대신 뭐 해줘야 된다."
"뭐?"
"음, 쿠션 같은 건데 보들보들하고 그런 거다. 마트에 가면 판다."
"얼만데?" 
"얼마면 좋겠는데?"
"오천 원 이상은 안 된다."
"에이~"
"그럼 만 원."
"만 오천 원."
"좋다, 만 오천 원" 
"좋아, 그럼 내일 사줘야 된다. 자 그럼 지금부터 십오 분이다."
"오 분만 더 안 될까?"
"좋아, 그럼 이십 분."

계약이 성립되자 딸애는 열심히 어깨와 등을 두드리고, 주무르고, 그러다 간지르고, 꼬집기도 하며 열심히 공급의무를 다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십 분은 금새 흘러갔습니다. 제가 다시 말했습니다. 
"서비스 십 분만 더 해줘야지."
"좋아, 딱 십 분이다." 
딸아이는 단순하고 명쾌합니다.

"머리 뒤쪽도 좀 주물러봐라. 손으로 꼭꼭 눌러봐." 
"머리 뒤는 왜?"
"아유, 뒷머리가 댕기는 게 별로 안 좋아." 
"안 돼. 그럼 아빠 쓰러질지도 모른다." 
"머리 주물러준다고 쓰러지긴 왜 쓰러지냐."
"전에 폐하도 뒷머리 만지다 쓰러졌잖아." 
"아니야, 나는 괜찮아. 빨리 머리 뒤를 꼭꼭 눌러봐."

며칠 전, 카메라 앞에서 갖가지 포즈를 취한 딸 / 오른쪽 끝은 몇 살 때더라?


딸아이의 손은 제법 맵습니다.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꼭꼭 누르면 머리 전체가 시원해지면서 활기가 살아납니다. 가만, 그런데 페하도 쓰러졌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아하~ 그러고 보니 <선덕여왕>에서 미실이 난을 일으켰을 때 진평왕이 직접 신하들 앞에 나나타나자 설원공이 진평왕의 머리 뒤를 눌러 기절시켰던 장면이 기억납니다. 

그래서 머리 뒤를 만지면 아빠가 쓰러질지도 모른다고 걱정했구나. 참으로 기특한 딸이 아닙니까? 뿌듯한 가슴으로 저는 딸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아빠가 쓰러질까봐 걱정돼서 그런 말을 한 거로구나. 혹시 아빠가 쓰러지더라도 엄마가 있잖니. 그러니까 괜찮아."
 
"그렇지만 아빠가 지금 쓰러지면 내일 약속을 지킬 수가 없잖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