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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

자본주의는 결코 당신을 사랑해주지 않아요

“정말 돈과 권력과 자본주의만 사랑하세요? 하지만 그런 것들은 당신을 사랑해주지 않아요.”

오늘 우연히 EBS에서 하는 뮤지컬 영화를 보다 눈에 꽂힌 대사였다. 눈에 꽂혔다고 하는 것은 대사의 내용을 자막을 통해서 알 수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니 귀에 꽂혔건 눈에 꽂혔건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기로 하자. 중요한 것은 영화의 대사다.

“정말 돈과 권력과 자본주의만 사랑하세요? 하지만 그런 것들은 당신을 사랑해주지 않아요.”

정말이지 너무나 멋진 대사가 아닌가. 한국영화를 사랑하고 또 사랑해야한다고 생각하며 열심히 보고자 노력하지만, 늘 불만이었던 것은 한국영화에서 내 심장을 울리는 대사를 들어본 기억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웰컴 투 동막골>에서 북에서 내려온 인민군 장교가 강원도 혹은 경북 어느 산골마을 동막골의 촌장노인에게 묻는다.

“거… 고함 한번 지르지 않고… 부락민들을 휘어잡을 수 있는… 그… 위대한 영도력의 비결이 뭐요…?”

“뭐를 마이 멕에이지 머….”

촌장의 대답은 의외로 단순하며 단순하다. 인민군 장교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비결이었지만, 이 단순명료한 답변에 모든 진리가 들어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이 비결을 제대로 완성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뭐를 골고루 마이 멕에이지 머….”

자, 다시 원래의 주제로 돌아오자. 이 뮤지컬 영화의 제목은 <애니>였다. 1999년에 제작된 미국영화. 1930년대 대공황기의 미국이 무대다. 열렬한 공화당 지지자이며 백만장자인 올리버 워벅스의 개인비서 그레이스가 올리버 씨와 함께 크리스마스를 지낼 고아소녀 애니를 데려오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가 이 영화의 뼈대다.

영화는 매우 감동적이다. 티 없는 아이들의 장난과 웃음과 노래가 ‘돈과 권력과 자본주의’에 짓눌린 우리의 마음을 한순간이나마 해방시켜 밝은 햇살아래 뛰놀 수 있게 만들어준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뮤지컬 음악도 경쾌하고 즐겁다. 어쩌면 촌스럽다고 느껴지는 춤은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무엇보다 감동적이었던 것은 맨 위에 소개한 대사였다. “정말 돈과 권력과 자본주의만 사랑하세요? 하지만 그런 것들은 당신을 사랑해주지 않아요.” 예쁘고 사랑스러운 올리버 씨의 개인비서 그레이스가 세계적인 갑부 워벅스를 훈계하고 있는 것이다.  

이토록 가볍고 가족적이고 재미있는 영화에 이토록 교훈적인 대사가 나오다니. 어쩌다 우연으로 삽입된 대사였으리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영화 <애니>는 한 번 더 교훈적인 만족을 주는 친절함을 베푼다. 올리버 씨와 루스벨트 대통령의 대화. 

아이들을 무척이나 귀찮게 여기던—실은 올리버 씨는 돈과 권력과 자본주의 외에 모든 것을 귀찮고 하찮은 것으로 여긴다—올리버 씨는 애니로 인해 인생의 의미에 대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어가던 중 애니를 기쁘게 하기 위해 백악관으로 미국대통령 루스벨트를 찾아간다. 여기서 나눈 대화는 대충 이런 내용이다.

“올리버, 이제 그만 생각을 바꿔 내 정책에 동의해 주게.”

“자네가 잘못 생각하는 걸세. 그 많은 돈을 왜 그런 곳에다 쓰나. 산업화를 발전시키는데 돈을 쓰는 게 미국의 미래를 위해 훨씬 도움이 될 걸세.”

“많은 사람들이 가난에 힘들어하고 있네. 뉴딜정책은 사람들이 가족들과 함께 미국인임을 자랑스러워하며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돈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자는 걸세.”

“나는 뜨거운 가슴만 있고 머리는 텅텅 빈 그런 바보 같은 정책에 결코 찬성할 수가 없네.”

올리버 씨는 완강하게 거부의 뜻을 밝혔지만 영화가 주는 뉘앙스로 봐서는 틀림없이 루스벨트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애니의 사랑이 ‘돈과 권력과 자본주의만 사랑하는’ 백만장자 워벅스를 ‘뜨거운 가슴’만 있고 ‘머리는 텅텅 빈’ 뉴딜정책을 지지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람들은 1시간 30분짜리 이 영화에서 교훈적이지만 너무나 짤막한 이 두 개의 에피소드를 무심코 지나치고 말테지만, 나처럼 삐딱한(!) 시선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그냥 지나치기가 어려운 주제였다. 나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돈과 권력과 자본주의는 당신들을 사랑하지도 않을뿐더러 당신들을 짓밟고 마침내는 당신들을 망치고야 말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