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의>, 초반 첫 회가 매우 감동적인 드라마였습니다. 앞으로도 꽤 괜찮은 사극일 거라는 기대가 듭니다. 아마도 이 드라마를 만드는 감독이 이전에 상당히 괜찮은 드라마를 만들었던 모양으로 여기저기서 기대가 큰 모양입니다.

게다가 저처럼 사상이 울퉁불퉁하다 못해 왼쪽으로 기우뚱한 사람은 “어느 누구든지 의원 한번 못보고 죽는 일이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강도준의 포부를 그야말로 이 시대의 이슈인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벌써 조선 중엽에 선조들이 꿈꾸었다고 제멋대로 해석하여 흐뭇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그토록 괜찮은 드라마일 것 같은 예감이 듦에도 불구하고 역시나 옥에 티가 있습니다. 어쩌면 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본래 거의 모든 사극들은 주인공의 출생에 관해선 마치 무협지를 보는 것처럼 천편일률적인 스토리를 갖고 있습니다.

바로 모든 주인공은 고귀한 신분을 타고났다는 설정이 그런데요. 천민의 자식은 고사하고 하다못해 평민의 자식이 주인공이 되는 예를 사극에서 찾아보기는 힘듭니다. 오죽했으면 신분적으로 천한 기생에서 거상의 반열에 오른 김만덕조차도 출신이 서울 양반집 딸이었습니다.

물론 주인공의 부모가 되는 양반은 역모에 휘말리거나 당쟁에서 패퇴해 몰락함으로써 죽게 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마의>도 그렇습니다. 주인공 백광현은 실존인물로 글자도 알지 못하는 미천한 인물이었는데 말의 병을 치료하는 마의였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침술에 능하고 종기를 치료하는 능력이 탁월하여 내의원 의관에 발탁됐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말을 치료하며 얻은 오랜 임상경험으로 침술에 달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종기를 절개하여 치료하는 이른바 외과적 수술기법을 최초로 개발하고 보급했다고 합니다.

글자를 모르니 당연히 의서도 보지 못했을 백광현이 이루어낸 경지란 점을 생각해보면 그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아마도 그는 천재였을 것입니다. 무협지 식으로 말하자면 백년에 하나 날까 말까한 기재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드라마 <마의>는 주인공 백광현의 운명을 실로 무협지처럼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의 생부인 강도준은 나노라하는 명문세가 출신에 대과에 장원급제한 수재였던 것입니다. 거기다 강도준은 의술에 천부적인 자질을 지녀 읽지 않고 통달하지 않은 의서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기재 중의 기재입니다. 백광현의 생부를 천하의 기재로 만듦으로써 백광현이 의서를 한 번도 읽지 않아도 천재적인 의원이 되는 것은 당연한 운명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내고 싶었던 것일까요?

하긴 뭐 그게 편할 수도 있겠습니다. 상투적이긴 해도 사람들에게 익숙하고, 익숙한 스토리는 별다른 공을 들이지 않아도 설득하기가 쉽습니다. 사람들을 몰입시키기가 수월하다는 말이죠. 그리고 아무래도 상놈의 자식보다는 양반의 자식이 폼도 날 것입니다.

하지만 드라마 <마의>라면 얼마든지 이따위 상투적인 공식에서 탈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소현세자의 죽음의 비밀을 얽어놓으려는 의도는 알겠지만 굳이 역적으로 몰려 죽은 강도준의 아들이 아니라 그 비밀을 알고 있는 뱃사공의 아들이라도 별 탈이 없지 싶습니다만.

아무튼 저로서는 백광현이 천민 출신이어도 얼마든지 극적인 장면을 만들어내는데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 왜 굳이 양반 핏줄로 만들어야 했는지 그게 아쉬울 따름입니다. 백광현이 명의가 되기 위해선 반드시 양반의 핏줄을 타고나야만 하는 어떤 이유가 있었을까요?

다음주 혹은 다다음주엔, 혹은 언제이든지, 백광현의 양부가 백광현 앞에 무릎을 꿇고 출생의 비밀을 밝히는 장면이 나올지도 모르겠는데 정말이지 너무 자주 봐오던 장면이라 오글거릴 힘도 없을 것 같습니다.

“도련님. 도련님은 제 아들이 아닙니다. 도련님의 진짜 아버님께서는 대제학 대감댁의 장남이셨습니다. 대과에 장원급제하시고도 유의가 되어 백성을 돌보고자하셨던 훌륭하신 분입니다. 도련님은 아버님의 뜻을 받들어 의술을 익혀 훌륭한 의원이 되셔야만 합니다.”

에그, 밥이나 먹자!

Posted by 파비 정부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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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yeogangyeoho.tistory.com BlogIcon 여강여호 2012.10.03 11: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사극을 보면서
    가끔 의문을 품었던 내용이기도 합니다.
    역사를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여태 역사에서 민초들이 진정으로 승리했던 기록이 없었던 탓은 아닐까요..

    • Favicon of https://go.idomin.com BlogIcon 파비 정부권 2012.10.03 11: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암튼, 사실은 상놈이 능력이 탁월하야 출세해서 양반이 되어가는 상투적인 과정들이 재밌기는 한데.... 알고 보니 그 상놈이 실은 상놈이 아니고 양반이었다는... 이 운명적 결론이 마음에 안 든다는 거죠... 내가 상놈 출신이라 그런 생각 하는 것일까요? ㅎ

  2. 린아 2012.10.03 14: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그런거 좀 불편할때가 있더라구요.
    신분이 낮은 출신은 똑똑해도 성공에 목매고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으로 그려지고. 사극뿐 아니라 현대극에서도 그래요. 제벌2세는 망해도 인품 넘치고, 일반인은 돈에 눈멀어서 양심도 버리고고..

  3. jemiky 2012.10.03 14: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백광현 집안은 실제 무반집안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래서, 전 또 사극 특유의 양반들 노예로 고생시키기-.-;; 가 초반에 펼쳐지는갑다..
    생각했음;;; 천민출신은 아닌것으로 암.

  4. br 2012.10.04 07: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건 요즘 드라마도 마찬가지죠. 20대로 나오는 사람들은 왠만하면 상큼발랄 대학생들로만 나오니... 같은 연령대에서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꽤 될텐데 말이죠. 일찍 취업한 사람, 백수, 자영업자등등... 하여튼 요즘 드라마 보면서 느끼는 작은 짜증이었습니다.

  5. 양현 2012.10.04 11: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확실히 이병훈 감독 작품 (사실 한국 드라마 대부분이 그렇기도 하지만... 시나리오적 측면에서뿐 아니라, "메인남주"와 "메인여주"는 반드시 엮어지고, "서브남주"와 "서브여주"는 무슨 난리 발광을 쳐도 안되는...)에서는 운명론적인 전개가 두드러지죠.
    애초에 등장인물들의 출생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방식 자체가 마치 "신화적 인물의 태동"을 그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게...
    얼핏보면 밑바닥에서부터 노력과 끈기로 성공하는 인물들 같지만 다시 한번 살펴보면 그 밑에 면면히 깔려있는 운명론적인 논지... 그냥 걔는 애초에 그렇게 될, 될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던...
    그렇게 생각하면 다모는 참 앞서간 작품이었습니다. 아니, 앞으로 나올 작품들이 다모를 따를지 알 수 없으니 앞섰다는 표현은 적절치가 않지만, 어쨌든 참 구태의연과 멀리 떨어진 작품이었던거죠.
    그러고 보면 최근의 뿌리깊은 나무도 그런 면에서 참 진일보한 사극이었네요. 끊임없이 고뇌하고 스스로를 의심하고 포기하려고 하는 주인공... 단순히 왕인데 그 입으로 "지랄하고 자빠졌네" "우라질"했다는 이유로 새로운 사극 캐릭터가 아니라, 바로 그래서 새로웠죠. 그냥 당연히 자기에게 오는 운명의 흐름대로 꿋꿋이 해나가다보니 꼭대기에 올라서거나 성공하는게 아니라, 스스로도 뭐가 옳은지 모르고 고뇌하면서 나아간것...

    주인장이 마지막에 자조하듯 한탄하신 부분은 사실 한국사 아키타입으로써, 궁예의 전설에서부터 내려온 얘기죠. 홍경래 이야기도 비슷한 울림이 있군요. 그러고 보면 이요원이 주연이었던 선덕여왕도 마찬가지의 클리셰가 등장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