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전도현과 송강호가 나온 영화 <밀양>이 떠오르신다고요? 네, 맞습니다. 요즘 사람들에겐 밀양 하면 전도현과 송강호가 떠오릅니다. 좋은 영화였지요. 하지만 오늘은 전도연, 송강호는 빼고 이야기하기로 하지요. 그러면 밀양 하면 역시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표충사입니다.
표충. 사명대사의 충절을 기리려는 뜻이 이름에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밀양은 사명대사의 고향입니다. 사명대사 생가가 있는 무안면에 가면 표충비가 있는데 국난이 있기 전에 땀을 흘린다고 합니다. 아마도 10.26 때도 그랬고 김정일이 죽을 때도 그랬다는 것으로 들었습니다.
김정일이 죽을 때는 한 달 전쯤인 11월 말에 노무현대통령 탄핵사태 이후 7년 만에 크게 땀을 흘려 나라에 큰일이 있을지 모른다며 신문에 나기도 했었는데 실제로 얼마 안 있어 김정일이 죽었던 것입니다. 표충비는 이외에도 한여름에 얼음이 어는 얼음골, 두드리면 종소리가 난다는 만어사 경석과 더불어 밀양의 3대 신비로 불립니다.
▲ 표충사 대웅전
아무튼 밀양은 사명대사를 빼놓고서는 말할 수 없으며 그런 사명대사를 모신 절이 표충사이고 이 표충사의 앞에는 울창한 송림과 시원한 계곡이 있으므로, “밀양 하면 어디가 떠오르세요?” 하고 물어보면 대개 사람들은 “표충사!” 하고 주저 없이 대답하는 것입니다.
물론 밀양에는 표충사 말고도 수없이 많은 볼거리와 놀거리와 먹을거리가 있습니다. 우선 아름다운 밀양강이 있습니다. 이 밀양강변에 세워진 영남루는 평양 부벽루, 진주 촉석루와 더불어 조선 3대 누각입니다. 밀양강에서 나는 미꾸라지로 끓인 추어탕은 남원추어탕과 더불어 추어탕의 쌍절이라 할 만합니다만, 제 입맛에는 밀양추어탕이 훨씬 맛있습니다.
시례호박소, 월연정, 만어사, 위양못, 삼랑진 양수발전소와 벛꽃터널, 사자평 등 단순하게 나열해도 100여개에 이르는 명소들이 즐비합니다. 사실 훌륭한 관광지(혹은 여행지)의 조건을 꼽으라면 아름다운 풍광과 맛있는 음식 아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밀양은 관광여행지로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아무튼 이렇게 많은 명소들에도 불구하고 밀양 하면 역시 표충사인 것입니다. 표충사에 가면 우선 표충사 솔밭이 우리를 반겨줍니다. 계곡을 따라 하늘 높이 일자로 치솟은 시원한 솔밭 그늘길을 걸어 표충사로 들어가는 기분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면 좋을까요?
이뿐 아니라 표충사 뒤로 산행을 시작하면 층층폭포, 흑룡폭포, 금강폭포를 만날 수 있고 8부 능선에 오르면 광활한 사자평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자평에는 우리나라 고산습지 중에 가장 넓다는 재약산 사자평 산지습지가 있는데 가을이면 은빛물결이 장관을 이룹니다.
오래 전 어느 여름에 재약산 정상에서 내려오다 사자평 근처 주막 평상에 앉아 막걸리 한잔을 기울인 적이 있는데, 머리 위에서 딱, 딱 하고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가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주막 마당 한 귀퉁이에는 차디찬 산수가 도토리가 가득한 커다란 물통 속으로 연신 떨어지고 있었지요. 낙원이 따로 없다 싶었습니다.
지난 주말, 그 표충사엘 다녀왔습니다. 밀양시가 후원하고 경남도민일보 갱상도문화학교가 주관한 밀양투어에 따라갔었는데 근 10년 만에 가보는지라 실로 감개가 무량했습니다. 열아홉, 스물 무렵 처음 표충사를 방문한 이래 십여 차례 이상 들렀던 곳이라 오랜 친구를 만나는 기분으로 표충사를 향했습니다.
하지만 표충사 입구는 많이 변해 있더군요. 우선 진입도로변에서는 공사가 한창이었습니다. 웰빙시대를 맞아 걷기가 유행인 점을 고려해 차도 변에 편하게 걸을 수 있는 데크인도를 만드는 모양이었습니다. 다 만들어지고 나면 계곡과 쭉쭉 뻗은 송림 사이를 걸을 수 있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표충사 입구 야영장. 숲속엔 오솔길도 마련돼있다. 텐트를 치겠다고 망치질을 하고 있는 한 아이의 모습이 이채롭다.
예전에는 표충사 송림 앞 계곡 옆에 큰 공터가 있고 거기를 승용차나 버스가 주차장처럼 이용했었는데(시내(외)버스 표충사 정류장도 있었죠)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동안 여기가 표충사 맞나? 하면서 혼란스러웠습니다. 대신 그곳엔 조경이 잘 돼있었고 버스 대신 텐트촌이 들어섰습니다.
별천지더군요. 외지에서 온 관광들에겐 정말 좋겠다 싶었습니다. 텐트자리가 바로 길 옆인데다 계곡 또한 코앞이니 편리하게 쉬고 즐기는 데는 이만한 데가 따로 없다 싶습니다. 게다가 하늘로 높이 솟은 송림이 울창하게 텐트촌을 감싸고 있으니 시원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바비큐파티를 열기 위해 숯불을 피우는 옆에서 캠핑용 의자를 놓고 비스듬히 눕듯이 앉아 책을 보고 있는 이의 모습이 그렇게 편안해보일 수가 없습니다. 밀양시가 많은 공을 들였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10여년 만에 만난 표충사 입구는 확 달라져 있었습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유원지처럼 산뜻해지고 편리해지긴 했지만 잃어버린 것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텐트촌이 들어선 옛날 버스정류장에서부터 표충사에 이르는 누렇던 황토 흙길이 하얗게 일직선으로 반짝거리는 대리석 길로 변해버렸던 것입니다.
하얀 대리석의 딱딱한 질감이 발바닥을 타고 전해져오는 순간, 모든 감동들이 일순간에 허물어짐을 느꼈습니다. 정말이지 이건 아니었습니다. 누가 이런 아이디어를 냈을까요?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겠지만 아무래도 저는 옛날 발바닥을 포근하게 감싸주던 누런 흙길이 더 좋았습니다.
표충사는 그대로였습니다. 지장보살, 지장보살, 목탁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스님의 독경소리도 그대로였습니다. 삼층석탑도 그대로였고 달콤한 약수물맛도 그대로였습니다. 다만 달라진 것은 울창한 송림 사이를 가로지른 길과 정류장이 있던 공터였습니다. 하나는 좋았고 하나는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예전보다 더 좋아졌을지도 모릅니다. 좋지 않은 것이야 옛날 걸었던 흙길의 추억에 대한 제 개인적인 감상일 뿐이니 다른 이들도 다 좋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깔끔한 대리석을 깔아 똑바로 길을 냈으니 오히려 사람들에게는 더 좋아졌다고 말하는 것이 맞겠군요.
제 추억이 가진 이기심만 버린다면 표충사는 하나의 관광지로서 훌륭하게 탈바꿈했습니다. 토요일이라 그랬던지 야영장은 꽉 차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텐트들은 여유가 있어보였습니다. 공간도 그렇고 시원한 그늘도 그렇고 바람도 그랬습니다. 풍족해보였습니다.
▲ 표충사로 올라가는 도로. 사진 오른편으로 데크산책로 공사가 한창이고 그 아래는 계곡이다.
오랜 가뭄에 물이 있을까 걱정했지만 계곡엔 물도 풍성했습니다. 물놀이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더 없이 밝고 명랑했습니다. 나중에 만난 시장부속실 비서에게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좋은 야영장에 왜 돈을 받지 않나요?” 그러자 그가 말했습니다. “아, 그럼 돈을 좀 받아도 될까요?”
저는 그리 생각합니다. 대부분 외지에서 오는 야영객들에게 자리 요금으로 만원, 이만원 받는 것은 정당하다고 말입니다. 생각건대 자가용을 몰고 올 것이 틀림없는 요즘 세태로 보아 밀양에서 먹을거리 등 장을 보았다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돈은 창원에서 쓰고, 놀기는 밀양에서 놀고, 쓰레기도 밀양에 버리고 간다.’ 불합리한 것이죠. 물론 놀러온 사람 입장에서는 전혀 불합리한 것이 아니지만 밀양 주민들 입장에서 보면 아주 불합리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제안도 생각해봅니다. 밀양에서 장을 보았다는 증표(영수증 같은 것)를 내보이면 야영장을 무료로 쓸 수 있도록 해주는 겁니다. 제가 이런 거까지 신경 쓸 이유는 없지만 아무튼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하, 이야기가 옆으로 좀 샜군요.
밀양 표충사, 정말 좋은 곳이었습니다. 아마 계곡 따라 산책로(데크길)가 완성되면 더 좋아질 것입니다. 야영하기도 아주 편리하게 돼있고 야영하려다가 야영을 포기한 사람들에게도 주변에 민박이나 펜션 등이 많아 불편함이 별로 없어보였습니다.
저도 곧 친구들과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습니다. 그때는 텐트를 치고 하룻밤 자고 싶습니다. 그래본 적이 정말 오래됐습니다. 시원한 나무그늘 아래서 책도 읽고 싶고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부터는 숯불을 피우고 바비큐파티도 하고 싶습니다.
▲ 호박소
정말 꼭 이번 여름이 가기 전에 하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더 늦으면 이런 거 못할 나이가 벌써 됐거든요. 표충사를 보고 나서 다음 코스로 간 곳은 얼음골 케이블카였습니다. 그러고 바로 위에 있는 호박소도 들렀죠. 호박소도 정말 좋은 곳이었습니다. 제가 그날 현장에서 페이스북에다 호박소 사진 찍어 올렸었는데요. 이렇게 적어놓았었죠.
“호박소. 호랑이가 박 터지게 싸우다 생긴 장소?”
이 설에 대해 별로 이견이 없는 걸 보니 호박소란 이름의 유래를 그렇게 정해도 무방할 듯 합니다만, 아무튼, 그날 호박소에서 꽤 슬프고도 아름다운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는데, 그건 다음번에 기회가 되면 얘기하도록 하지요. 오늘은 너무 기니까...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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