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이리저리 바쁘다는 핑계로 드라마를 자주 보지 못했습니다. 음, 텔레비전을 아예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들으면 좀 우스운 소리 같지만 그랬습니다. 저야 뭐 텔레비전을 통해 못 배운 지식도 얻고, 정서도 함양하고, 오락도 즐기는 등 여가를 선용하자는 주의이니…….
빛과 그림자라는 드라마를 우연히 재방을 통해 보고선 ‘오우, 이렇게 좋은 드라마도 있었어?’ 하고는 대뜸 1편부터 22편까지 밤샘을 하고도 다음날까지 쉬지 않고 달려서 다 보고야 말았습니다. 헬로TV에서 지난 프로는 공짜로 볼 수가 있더군요.
우선 드라마의 풍경이 추억을 불러일으켜 너무 좋았습니다. 60년대부터 최근 시대까지 한 엔터테이너의 좌절과 성공의 과정을 그리겠다는데요. 5월까지 방영할 예정이라고 하니 아직 반도 다 채우지 못했습니다. 이제 겨우 70년대 중후반을 지나고 있으니까요.
이 드라마의 주인공 강기태 역은 안재욱이 맡았는데 이 인물이 마치 무협지의 주인공처럼 특유의 매력으로 여자들을 매료시키는 그런 캐릭터입니다. 늘 그렇듯이 빛과 그림자에도 삼각관계가 등장합니다. 이정혜와 유채영. 남상미와 손담비가 맡았습니다.
드라마 초반에 극장에서 쇼가 공연되는 장면이 가끔 나오는데 거기서 이정혜와 유채영이 노래를 부릅니다. 이정혜는 강기태 덕분에 가까스로 원하던 빛나라쇼단에 입단한 신인이고 유채영은 이미 국민적 스타가 된 베테랑 가숩니다.
아, 이 쇼 장면이 제게는 너무 좋았습니다. 가수 뒤에서 율동하는 무용수들의 곡선과 좀 촌스럽게 보이기는 해도 정겨운 무대 조명. 그런데 이정혜에 뒤이어 나온 유채영의 노래와 춤을 보고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오우, 이건 완전 프로급이군!’
‘야 이거 진짜 가수 뺨치는 걸.’ 아, 그런데 그게 제 실수였습니다. 이 놀랍도록 가수보다 더 가수 같은 배우가 사실은 진짜 가수 중의 가수 손담비였던 것입니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나서는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도 ‘요즘 가수가 저토록 옛 노래와 율동을 잘하다니!’ 하고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손담비가 70년대의 쇼 무대에 섰더라도 지금보다 더 큰 성공을 이루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유채영은 멋들어졌습니다. 80년대에 김완선이 노래와 춤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우리가 군대 있을 때 TV에 김완선만 나오면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였습니다) 손담비는 그보다도 더 열광적이었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손담비인지 유채영인지 칭찬은 이정도로 하고, 이 드라마의 배경엔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그리고 보이지 않는 대통령 박정희가 있습니다. 물론 이들의 이름은 각기 장철환과 김재욱으로 나옵니다.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모두 비명에 갔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 드라마는 모두가 알고 있는 진실이지만 내놓고 드러내지 못했던 사실을 다루고 있습니다. 경호실장 차지철이 박정희에게 충성을 인정받기 위해 여자들을 모집해 대통령 비밀연회장인 궁정동 안가에 공급했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말하자면 경호실장이 기쁨조 모집책이었던 것입니다. 차지철은 아마도 ‘각하의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리는 것이 진정한 충성’이라고 생각했든가 봅니다.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는 것은 유신에 반대하는 세력은 탱크를 몰아서라도 싹 쓸어버리는 것이며 몸을 편안하게 해드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예쁘고 젊은 여자들을 뽑아 시중들게 하는 것이었겠죠.
거기에 이정혜가 뽑혔습니다. 가수가 되고 싶었던 이정혜는 거기가 무슨 자리인지도 모르고 갔던 것이지만 이정혜를 마음에 둔 차수혁이 돌려보내는 바람에 대통령에게 정절을 버리게 되는 위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아, 승은을 입을 기회를 잃어버린 것인가요? 아무튼….
그러나 이정혜를 눈여겨 보았던 장철환 실장은 차수혁더러 이정혜를 데려오라고 명합니다. 그리고 말하죠. “그 여자 내가 마음에 들어. 내가 가져야겠어.” 하긴 뭐 경호실장이 여자들 모아서 몇 명은 대통령 드시라고 들여보내고 나머지 몇 명은 자기가 먹는다고 무슨 일 나겠나, 그리 생각했겠죠. 시대가 시대니만큼.
저는 사실 이 드라마에서 이정혜보다 유채영이 더 마음에 들었고, 그래서 강기태와 유채영이 잘되길 진심으로 바랬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권력이 없이는 이 바닥에서 살아남기 힘들다는 판단을 한 유채영이 제 발로 청와대 뚜쟁이 윤마담을 찾아갑니다. 윤마담은 말하자면 기쁨조 일선모집책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통령이 유채영에게 홀딱 빠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유채영, 춤과 노래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밤기술도 보통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하룻밤 사이에 유채영은 엄청난 권력을 거머쥐게 됐습니다. 중정부장이나 경호실장도 부럽지 않은.
졸지에 유채영에게 치근덕거리며 괴롭히던 재벌2세, 한성실업 회장 아들이 유채영에게 무릎을 꿇고 싹싹 빌며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합니다. 회사가 검찰수사에다 세무조사까지 망하게 생겼거든요. 유채영이 그런 고 실장의 뺨을 후려갈기지만 고 실장은 때려도 좋으니 제발 살려달라고 사정을 하는데, 후덜덜~
유채영, 대통령하고 하룻밤 자고 나니 남산(요즘 분들은 잘 모르실 텐데, 거기 들어가면 살아서 못나옵니다. 이 드라마에서 강기태의 아버지도 거기서 죽었죠)보다 더 무서운 여자가 됐습니다. 유채영, 대체 어떻게 한 거야, 어떤 기술로 그이를 홍콩으로 보낸 거지?
이쯤에서 잠깐, 다 아시겠지만 박정희의 유명한 어록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남자란 자고로 배꼽 밑의 일은 논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난봉꾼들에겐 좌우명처럼 되었는데요. 그러나 총탄에 맞아 의문의 죽음을 한 정인숙 사건을 보면 박정희의 신조가 꼭 그랬던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 정인숙 @사진=오마이뉴스/연합뉴스
정인숙은 적당한 키에 균형 잡힌 몸매와 하얗고 갸름한 얼굴을 가지 보기 드문 미인이었는데 대통령과 총리와 기타 등등 권력자들이 나누어 가지는 희대의 섹스스캔들의 장본인이었다는 겁니다. 저야 뭐 당시에 너무 어려서 잘 모르는 일이긴 합니다만.
이렇든 저렇든 이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박정희가 말처럼 “배꼽 밑의 일 따위는 논하지 않는” 호쾌한 남아가 절대 아니란 것입니다. 정인숙 사건은 이후에 나훈아의 유명한 노래 ‘사랑은 눈물의 씨앗’을 개사해 만든 ‘아빠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청와대 미스터 정이라고 말하겠어요~’ 같은 노래를 유행시키기도 했습니다.
어쨌거나 저는 빛과 그림자를 보면서 문득 박근혜 씨가 생각났습니다. 혹시 그녀가 이 드라마를 보았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버지 생각에 눈물지으며 그리워했을까? 아니면 부끄러워했을까? 아니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던 아버지를 부러워하며 자랑스럽게 생각했을까?
정말이지 궁금했습니다. 박근혜 씨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근래 보기 드물게 수작인 이 드라마를 우리처럼 재미있게 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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