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 2학년생에 대한 과잉 체벌 사태에 이어 또다시 체벌 논란이 재연되고 있습니다. 대구의 모 여고에서 교사가 단체로 학생들을 체벌하는 과정에서 한 여고생의 뺨과 허벅지를 구타하는 동영상이 유포돼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지난 5월에는 전북 익산의 한 여학교 운동장에서 교복치마를 입은 여학생 40여 명을 일렬로 엎드려뻗쳐 시킨 상태에서 엉덩이에 5대씩 몽둥이로 구타하는 장면이 TV에 방영되는 등 체벌 사태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학교폭력에 대한 잔인한 추억
저는 얼마 전 초등생 구타 사건이 났을 때, “초등생 체벌사태를 보며 드는 잔혹한 추억”이란 제목으로 포스팅을 한 바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말죽거리 잔혹사」란 영화에서 나왔던 장면이 제가 고1 때 우리 급우 한명이 담임선생님에게 폭행당하던 장면과 너무나 흡사했기 때문에 그렇게 제목을 붙였던 것입니다. 정말 우리는 지긋지긋한 폭력교실에서 일상화되고 제도화된 구타를 인내하며 학교를 다녔습니다.
저도 국민학교 5학년 때 담임선생님에게 밀대자루(밀걸레 자루)로 속칭 빳다 20대를 맞은 기억이 있습니다. 자습시간에 조용히 공부하지 않고 떠들었다는 이유로 엎드려뻗쳐해서 하나 둘 세어가며 맞았던 것입니다. 물론 맞은 것이 이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 아들이 지금 초등학교 5학년입니다. 그래서 그때 엎드려뻗쳐해서 빳다 20대를 하나 둘 세어가며 맞던 제 모습과 어린 제 아들놈을 가끔 비교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상상이 가지 않는 일입니다.
저는 맞은 기억 외에도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수치심에 몸을 떠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1979년에 저는 까까머리 중3이었습니다. 그리고 학생대대장이기도 했습니다. 우리 학교는 매주 월요일과 토요일에 ‘전체조회’를 했습니다. 저는 30리가 넘는 산골 길을 자전거를 타고 다녔지만 한 번도 지각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딱 한 번 지각을 했는데, 하필 이날이 ‘전체조회’를 하는 날이었습니다.
‘전체조회’를 빠트린 저는 교무실에 불려가 예의 빳다를 맞은 다음 교무실 앞 복도에 무릎을 꿇고 손을 든 채 벌을 받게 됐습니다. 교무실 양 옆으로 좌측에는 3학년 남학생 교실이 우측에는 3학년 여학생 교실이 있었습니다. 잠시 후 저에게 빳다를 때린 그 선생님이 다가오시더니, “이새끼, 손 똑바로 못 들어? 안 되겠군.” 하시더니 자기 책상에서 사과를 하나 들고 와서는 한 입 크게 베어 무시더니 남은 사과를 제 입에 척 물리셨습니다. 그러면서 떨어뜨리면 각오하라는 협박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폭력은 교사 스스로를 비인간화 시킨다
여러분께서는 그 이후의 제 심정이 어떠했을지는 말로 하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하시리가 믿습니다. 예민한 사춘기의 소년이 동급생인 여학생들 앞에서 당했던 수모는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 지지 않습니다. 그 사건 이후에 제가 매주 두 번씩의 ‘전체조회’를 어떻게 진행했으며, 또 남은 학교생활은 어떻게 마무리했는지 정말이지 아득합니다. 그런데 그 전한○ 선생님이 단지 조회 한 번 빼먹었다고 저한테 그러신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게지요.
이 선생님은 니콘 카메라를 가지고 계셨는데 어느 날 그걸 잃어버리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담임인 반의 저와 친한 친구 한 놈이 그걸 훔쳤다고 의심을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친구가 이 선생님 집에 가서 구두며 신발들을 가끔 도랑에다 내버리는 통에 슬러퍼를 끌고 학교에 오신 적이 많았었거든요. 선생님도 자기에게 자주 맞던 그 친구가 그랬으리라고 짐작하셨던 겁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이 친구를 지서에 신고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친구가 선생님의 신발을 가끔 훔쳐다 버리는걸 아는 제가 다그쳐 물어봤더니 자기는 절대 안 훔쳤다고 결백을 주장하는 겁니다. 이 친구는 저보다 국민학교 3년 선배였고 소위 ‘꼴통’이었지만 저하고는 아주 친했습니다. 그리고 저한테 거짓말 할 친구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교무실에 계신 그 선생님에게 가서 “걔는 절대 안 훔쳤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만 오해를 풀어주십시오.” 하고 부탁드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아무런 증거도 없는데 지서에서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후 그 선생님이 제게 앙심을 품었을 거라는 짐작을 ‘조회 사건’ 이후 하게 됐습니다. 산골 오지에 살았던 저는 니콘 카메라가 세계에서 제일 좋은 카메라였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학교폭력은 결국 군대와 사회로 이어져
우리가 학교를 다니던 유신독재와 5공화국에서 교사의 존재는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이었습니다. 그러나 또한 존경받지 못하는 권력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당시의 교사들이 사회에 전반적으로 팽배한 군사문화의 폭력적 경향에 최면이 걸린 불행한 분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당시에도 일제시대 교사들이 칼을 차고 가르치던 시대를 추억하는 엉터리 같은 선생님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집단적 최면의 피해자라고 이해를 하는 편이었습니다.
저는 얼마 전 초등생 구타 사건이 났을 때, “초등생 체벌사태를 보며 드는 잔혹한 추억”이란 제목으로 포스팅을 한 바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말죽거리 잔혹사」란 영화에서 나왔던 장면이 제가 고1 때 우리 급우 한명이 담임선생님에게 폭행당하던 장면과 너무나 흡사했기 때문에 그렇게 제목을 붙였던 것입니다. 정말 우리는 지긋지긋한 폭력교실에서 일상화되고 제도화된 구타를 인내하며 학교를 다녔습니다.
저도 국민학교 5학년 때 담임선생님에게 밀대자루(밀걸레 자루)로 속칭 빳다 20대를 맞은 기억이 있습니다. 자습시간에 조용히 공부하지 않고 떠들었다는 이유로 엎드려뻗쳐해서 하나 둘 세어가며 맞았던 것입니다. 물론 맞은 것이 이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 아들이 지금 초등학교 5학년입니다. 그래서 그때 엎드려뻗쳐해서 빳다 20대를 하나 둘 세어가며 맞던 제 모습과 어린 제 아들놈을 가끔 비교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상상이 가지 않는 일입니다.
저는 맞은 기억 외에도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수치심에 몸을 떠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1979년에 저는 까까머리 중3이었습니다. 그리고 학생대대장이기도 했습니다. 우리 학교는 매주 월요일과 토요일에 ‘전체조회’를 했습니다. 저는 30리가 넘는 산골 길을 자전거를 타고 다녔지만 한 번도 지각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딱 한 번 지각을 했는데, 하필 이날이 ‘전체조회’를 하는 날이었습니다.
‘전체조회’를 빠트린 저는 교무실에 불려가 예의 빳다를 맞은 다음 교무실 앞 복도에 무릎을 꿇고 손을 든 채 벌을 받게 됐습니다. 교무실 양 옆으로 좌측에는 3학년 남학생 교실이 우측에는 3학년 여학생 교실이 있었습니다. 잠시 후 저에게 빳다를 때린 그 선생님이 다가오시더니, “이새끼, 손 똑바로 못 들어? 안 되겠군.” 하시더니 자기 책상에서 사과를 하나 들고 와서는 한 입 크게 베어 무시더니 남은 사과를 제 입에 척 물리셨습니다. 그러면서 떨어뜨리면 각오하라는 협박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폭력은 교사 스스로를 비인간화 시킨다
여러분께서는 그 이후의 제 심정이 어떠했을지는 말로 하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하시리가 믿습니다. 예민한 사춘기의 소년이 동급생인 여학생들 앞에서 당했던 수모는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 지지 않습니다. 그 사건 이후에 제가 매주 두 번씩의 ‘전체조회’를 어떻게 진행했으며, 또 남은 학교생활은 어떻게 마무리했는지 정말이지 아득합니다. 그런데 그 전한○ 선생님이 단지 조회 한 번 빼먹었다고 저한테 그러신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게지요.
이 선생님은 니콘 카메라를 가지고 계셨는데 어느 날 그걸 잃어버리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담임인 반의 저와 친한 친구 한 놈이 그걸 훔쳤다고 의심을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친구가 이 선생님 집에 가서 구두며 신발들을 가끔 도랑에다 내버리는 통에 슬러퍼를 끌고 학교에 오신 적이 많았었거든요. 선생님도 자기에게 자주 맞던 그 친구가 그랬으리라고 짐작하셨던 겁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이 친구를 지서에 신고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친구가 선생님의 신발을 가끔 훔쳐다 버리는걸 아는 제가 다그쳐 물어봤더니 자기는 절대 안 훔쳤다고 결백을 주장하는 겁니다. 이 친구는 저보다 국민학교 3년 선배였고 소위 ‘꼴통’이었지만 저하고는 아주 친했습니다. 그리고 저한테 거짓말 할 친구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교무실에 계신 그 선생님에게 가서 “걔는 절대 안 훔쳤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만 오해를 풀어주십시오.” 하고 부탁드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아무런 증거도 없는데 지서에서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후 그 선생님이 제게 앙심을 품었을 거라는 짐작을 ‘조회 사건’ 이후 하게 됐습니다. 산골 오지에 살았던 저는 니콘 카메라가 세계에서 제일 좋은 카메라였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학교폭력은 결국 군대와 사회로 이어져
우리가 학교를 다니던 유신독재와 5공화국에서 교사의 존재는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이었습니다. 그러나 또한 존경받지 못하는 권력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당시의 교사들이 사회에 전반적으로 팽배한 군사문화의 폭력적 경향에 최면이 걸린 불행한 분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당시에도 일제시대 교사들이 칼을 차고 가르치던 시대를 추억하는 엉터리 같은 선생님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집단적 최면의 피해자라고 이해를 하는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학교에서부터 길들여진 폭력 문화는 결국 사회 전반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맞은 놈이 더 잘 팬다는 속설도 있습니다. 무의식중에 주입된 폭력을 통한 문제 해결 방식은 군대에서 그 절정에 다다르고 결국 가정에까지 침투하는 것입니다. 어느 틈엔가 우리는 대화를 통한 모색보다는 폭력을 통한 손쉬운 해결을 추구하는 습관에 길들여지게 됩니다. 학교가 민주주의의 적을 훈련시키는 부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학교와 사회를 지배하던 폭력적 군사문화도 유신정권이 궁정동의 총성과 함께 종말을 고하고, 전두환의 5공화국도 6월 항쟁으로 막을 내리면서 서서히 종적을 감추는가 했습니다. 그런데 유신도 아니고 5공도 아닌 21세기 선진 대한민국의 학교에서 버젓이 폭력이 자행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 폭력이란 것들이 모두 상식을 초월하는 것들입니다.
9살짜리 여자아이의 엉덩이를 피투성이로 만들어놓는가 하면, 여고생의 뺨과 허벅지를 무자비하게 구타하는 장면이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여고 2학년은 학생이란 신분만 뺀다면 성숙한 여성입니다. 아무리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성숙한 여고생의 뺨을 후려갈기고 허벅지를 때릴 수 있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치마 입은 여학생들을 운동장에 일렬로 엎드려뻗쳐 시킨 상태에서 몽둥이로 엉덩이를 두드려 패는 장면은 무슨 말로도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학교와 교사가 폭력을 조장하고 가르쳐서야
이건 폭력이나 구타의 수준을 넘어 변태라고까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올바로 된 정신 상태를 가지고 이런 일을 벌인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 어린 딸아이들 둔 부모로서 소름이 끼치는 일입니다. 금년 5월 춘천에서는 한 여고생이 체벌을 견디다 못해 유서를 써놓고 자살을 기도한 사건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학교당국이나 교육청은 은폐에만 급급합니다.
얼마 전, 초등생 체벌사태로 세상이 시끄러울 때 울산의 어느 학교 학부모들이 체벌동의서란 것을 학교에 제출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참으로 어이가 없었습니다. 체벌은 폭력의 동의어일 뿐입니다. 체벌은 군사독재의 잔재일 뿐입니다. 이러니 세상에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기 어려운 것입니다. 극우적 경향의 사람들이 무시로 내뱉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박정희나 전두환 같은 사람이 총 들고 나타나서 확 후려잡아야 돼.”
저는 이런 망발조차 학교에서부터 익숙해진 폭력의 결과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군대 갔다오신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졸병 때 고참에게 얻어맞던 때가 언제였느냐는 듯, “졸병놈들은 뒈지게 맞아야 돼. 그래야 군대가 잘 돌아가.” 라고 하면서 서슴없이 폭력을 행사합니다. 이미 자기는 졸병생활 지났다는 거지요. 소위 ‘맞아본 놈’이 더 때리는 것입니다.
폭력교실은 결코 성숙한 인격도야의 장이 될 수 없다
학교는 지식만 전수하는 곳이 아니라 학생을 성숙한 인격체로 인도하는 곳입니다. 민주주의의 요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을 구타로 괴롭히며 폭력의 모범을 보여준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질풍노도의 미성숙한 학생들을 교육하는 것이 아무리 어려운 일이기로서니 폭력으로 해결하려는 태도는 스스로 교사이기를 포기한 자가당착입니다.
저는 사소한 체벌조차 반대합니다. 외국의 사례를 보면 상담 등의 노력을 통해 교사와 문제 학생이 일체가 되는 경험을 가끔 접할 수 있습니다. 어째서 체벌 외에 다른 방법에 대한 연구를 하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교육당국 만이 아니라 전교조를 비롯한 참교육을 추구하는 여타의 단체들이 깊이 관심을 가지고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생활지도라는 명목으로 자행되는 구타 등 폭력이 도대체 어떤 생활에 대한 모범을 보여준다는 것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폭력은 폭력을 부릅니다. 폭력은 민주주의의 적이며 독재의 수단일 뿐입니다. 폭력을 조장하는 교사가 학교 내 학생들간에 벌어지는 폭력을 막을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학교에서 체벌, 구타, 폭력 등이 어떠한 이름으로도 자행되어서는 안 됩니다. 학교가 민주적 시민의식을 제쳐두고 폭력과 독재를 가르친다는 오명을 덮어써서야 되겠습니까?
2008. 11. 3. 파비
※ 독서의 계절 가을과 람사르 총회를 맞이하여 추천하는 책 한권/
이처럼 학교와 사회를 지배하던 폭력적 군사문화도 유신정권이 궁정동의 총성과 함께 종말을 고하고, 전두환의 5공화국도 6월 항쟁으로 막을 내리면서 서서히 종적을 감추는가 했습니다. 그런데 유신도 아니고 5공도 아닌 21세기 선진 대한민국의 학교에서 버젓이 폭력이 자행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 폭력이란 것들이 모두 상식을 초월하는 것들입니다.
9살짜리 여자아이의 엉덩이를 피투성이로 만들어놓는가 하면, 여고생의 뺨과 허벅지를 무자비하게 구타하는 장면이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여고 2학년은 학생이란 신분만 뺀다면 성숙한 여성입니다. 아무리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성숙한 여고생의 뺨을 후려갈기고 허벅지를 때릴 수 있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치마 입은 여학생들을 운동장에 일렬로 엎드려뻗쳐 시킨 상태에서 몽둥이로 엉덩이를 두드려 패는 장면은 무슨 말로도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학교와 교사가 폭력을 조장하고 가르쳐서야
이건 폭력이나 구타의 수준을 넘어 변태라고까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올바로 된 정신 상태를 가지고 이런 일을 벌인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 어린 딸아이들 둔 부모로서 소름이 끼치는 일입니다. 금년 5월 춘천에서는 한 여고생이 체벌을 견디다 못해 유서를 써놓고 자살을 기도한 사건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학교당국이나 교육청은 은폐에만 급급합니다.
얼마 전, 초등생 체벌사태로 세상이 시끄러울 때 울산의 어느 학교 학부모들이 체벌동의서란 것을 학교에 제출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참으로 어이가 없었습니다. 체벌은 폭력의 동의어일 뿐입니다. 체벌은 군사독재의 잔재일 뿐입니다. 이러니 세상에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기 어려운 것입니다. 극우적 경향의 사람들이 무시로 내뱉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박정희나 전두환 같은 사람이 총 들고 나타나서 확 후려잡아야 돼.”
저는 이런 망발조차 학교에서부터 익숙해진 폭력의 결과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군대 갔다오신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졸병 때 고참에게 얻어맞던 때가 언제였느냐는 듯, “졸병놈들은 뒈지게 맞아야 돼. 그래야 군대가 잘 돌아가.” 라고 하면서 서슴없이 폭력을 행사합니다. 이미 자기는 졸병생활 지났다는 거지요. 소위 ‘맞아본 놈’이 더 때리는 것입니다.
폭력교실은 결코 성숙한 인격도야의 장이 될 수 없다
학교는 지식만 전수하는 곳이 아니라 학생을 성숙한 인격체로 인도하는 곳입니다. 민주주의의 요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을 구타로 괴롭히며 폭력의 모범을 보여준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질풍노도의 미성숙한 학생들을 교육하는 것이 아무리 어려운 일이기로서니 폭력으로 해결하려는 태도는 스스로 교사이기를 포기한 자가당착입니다.
저는 사소한 체벌조차 반대합니다. 외국의 사례를 보면 상담 등의 노력을 통해 교사와 문제 학생이 일체가 되는 경험을 가끔 접할 수 있습니다. 어째서 체벌 외에 다른 방법에 대한 연구를 하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교육당국 만이 아니라 전교조를 비롯한 참교육을 추구하는 여타의 단체들이 깊이 관심을 가지고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생활지도라는 명목으로 자행되는 구타 등 폭력이 도대체 어떤 생활에 대한 모범을 보여준다는 것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폭력은 폭력을 부릅니다. 폭력은 민주주의의 적이며 독재의 수단일 뿐입니다. 폭력을 조장하는 교사가 학교 내 학생들간에 벌어지는 폭력을 막을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학교에서 체벌, 구타, 폭력 등이 어떠한 이름으로도 자행되어서는 안 됩니다. 학교가 민주적 시민의식을 제쳐두고 폭력과 독재를 가르친다는 오명을 덮어써서야 되겠습니까?
2008. 11. 3. 파비
※ 독서의 계절 가을과 람사르 총회를 맞이하여 추천하는 책 한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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