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드라마 리뷰를 한번 써보려고 합니다. 너무 오랫동안 TV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좋아하는 연속극을 간간이 보기는 했습니다만 예전처럼 그렇게 재미를 느끼지는 못하는 편입니다. 왜 그럴까요? 드라마에 대한 저의 감이 떨어진 걸까요, 드라마가 질이 떨어진 걸까요?
제 생각을 말씀드리면 드라마가 질이 현저하게 떨어진 것 같습니다. 특히 사극에서 두드러집니다. 드라마는 연출자도 중요하고 연기자도 중요하지만 역시 작가의 시나리오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연출자에 뛰어난 연기자가 있어도 시나리오가 엉망이면 모든 게 꽝입니다.
MBC사극 계백도 처음부터 보다가 도저히 참기 힘들어 중간에 보기를 포기해버렸습니다만, KBS사극 광개토태왕은 이보다 더 심합니다. 도대체 이런 드라마를 왜 보고 있는지 황당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만 오래도록 이 시간대에 이 사극을 보는 것이 버릇이 된지라 관성으로 보는 것뿐입니다.
제가 옛날 한창 출장을 많이 다니던 시절에 불멸의 이순신을 바로 이 시간대에 했었습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가도 불멸의 이순신 할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휴게소에 차를 대고 드라마를 다 보고는 다시 출발하곤 했었지요. 그때 주인공이 베토벤 바이러스의 김명민이었는데, 참 멋졌었지요.
........ 버럭대왕 담덕역의 이태곤
그런데 어떻습니까? 담덕태자로 나오는 이태곤은 완전 버럭대왕이 됐습니다. 이태곤은 하늘이시여, 보석비빔밥 등에서 따뜻하고 사려 깊은 남자로 귀공자의 표본처럼 보였었지만 갑자기 광개토태왕이 되더니 버럭대왕이 돼버린 겁니다. 그래야 용맹무쌍한 광개토태왕을 잘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까요?
담덕이 버럭버럭 거리니 다른 이들도 덩달아서 버럭 댑니다. 국상도 눈에 있는 힘 다 주고 버럭버럭, 광개토태왕의 숙적 연나라의 황제도 버럭버럭, 연나라 태자도 버럭버럭. 고구려, 후연, 말갈의 장군들도 하나같이 버럭버럭. 눈을 치켜뜨며 으르렁거리는 모습을 보면 꼭 정신병자들 같습니다.
아, 김명민이 그립습니다. 김명민이 결코 버럭 대지 않더라도 이순신 장군의 위엄과 기개가 하늘을 찔렀지 않습니까? 왜군들이 외유내강의 이순신을 보고 벌벌 떨었지 않습니까? 꼭 이 드라마의 담덕처럼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고 미친 듯이 눈에 힘을 주며 으르렁거려야만 용맹함이 드러나는 것일까요?
아마도 광개토태왕의 작가는 동북아를 평정한 광개토태왕이라면 그 정도로 야성미 넘치게 야만적인 포효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요. 좋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광개토태왕이 범이면 그 아비인 고국양왕도 호랑이는 못되더라도 최소한 표범은 돼야 하는 거 아닙니까?
........ 소심하고 겁 많은 광개토태왕의 아버지 고국양왕. 국상에게 옥새를 바치며 "살려주시오" 하고 애원하고 있다.
그런데 이건 뭐 똥강아지도 아니고. 도대체 어떻게 저런 작자가 고구려의 왕이 되었으며 광개토태왕의 아버지란 것인지 실로 난해합니다. 물론 천하의 광개토태왕의 선왕이라도 인물이 똥강아지에도 미치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해도 너무합니다.
겨우 군사 몇 명으로 큰 성을 함락시키는가 하면 다시 얼토당토않은 계략에 빠져 성을 빼앗긴다거나 하는 현실성 없는 시나리오에 대해선 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야심 가득한 국상이 담덕을 몇 차례나 죽이려 시도하다가 돌연히 자기 딸을 시집보내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죠.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사위인 담덕을 죽이려 하더니 결국 역모까지 일으키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으로까지 몰고 왔습니다. 담덕의 아비 고국양왕과 왕비는 아들을 살리고자 모든 것을 내던지는 비련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허허,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말입니다.
옥새를 내주며 아들만은 살려달라고 간청하는 고국양왕에게 국상이 이렇게 말하죠. “폐하. 그러셔도 소용없습니다. 이미 옥새는 주지 않으셔도 우리 손에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고. 담덕태자는 이러나저러나 저자에서 참수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제가 어처구니없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 다음입니다. 담덕이 “네 이놈 국상” 하며 칼을 빼어들자 왕비가 담덕의 앞을 가로막으며 “안 된다. 참아야 하느니라. 참아야만 살 수 있느니라.” 뭐 이런 황당 시추에이션이. 제가 참 많고도 많은 드라마를 보아왔지만 이토록 황당한 시나리오는 처음입니다.
........ 천민이라도 좋다. 건강하게만 살아다오. 담덕의 어머니, 고국양왕 왕비. 이건 뭐 드라마가 광개토태왕인지 의자왕인지 모르겠다.
왕비의 말씀은 제대로 요약하자면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얘야 담덕아. 참아라. 칼을 들고 싸우다 죽는 것보다는 그냥 국상 손에 잡혀서 참수 당하는 편히 낫느니라.” 그리고 잠시 후 국상의 심복이 쏜 화살에 맞은 왕비, 죽어가면서 유언을 남깁니다.
“부디 너만은 건강하게 살아다오. 꼭 건강하게만 살아다오.”
하하, 정말 이 대목에서 웃음보가 터질 뻔했습니다. 옛날 광고 카피가 생각나더군요. “개구쟁이라도 좋다.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왕비의 말을 다시 제대로 번역하면 이렇게 되겠습니다. “어떻게 돼도 좋다. 건강하게만 살아다오.”
그러나 그게 어디 왕비 당신 뜻대로 된답디까? 국상을 쓰러뜨리지 않는 한 국상은 어떻게든 담덕의 목을 자를 게 뻔한데 말입니다. 왕비는 그렇다 치고, 일개 왕이라는 작자가 그런 기본도 모르고 어떻게 그 긴 세월을 왕 노릇을 해왔다는 것인지. 에혀~ 한숨이 절로 납니다.
저는 진짜 궁금한 게 있습니다. 국상 개연수의 아들과 딸의 운명에 대해서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현재 국상의 딸 도영은 태자 담덕의 아내지요. 태자비입니다. 그리고 개연수의 아들 고운은 담덕을 따르는 심복입니다. 일종의 장자방 역할을 하는 것 같기도 한데 아직은 그 존재가 확실치 않습니다.
이미 개연수의 역모는 고국양왕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강요하는 지경을 넘어 왕비까지 죽였습니다. 그야말로 구족이 멸문지화 당하게 생겼습니다. 길은 하나뿐입니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대한민국 사법부의 판결 예를 따라 무조건 ‘고’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개연수의 역모는 성공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개연수의 아들 고운이 국내성으로 돌아왔는데 뭔가 일을 벌일 것 같습니다. 이 대목도 참 이해할 수 없습니다. 국내성 성문을 완전히 봉쇄해서 출입이 금지됐고 일반백성은 절대 들이지 말라는 엄명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아니 봉쇄하려면 변방의 군대가 국내성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봉쇄해야지 왜 아무 힘없는 일반백성들의 출입을 통제한단 말입니까? 참 쓸데없는 짓입니다. 한데 고운은 부하장수가 명찰을 내밀며 “중앙군 부장 누구(도각?)다” 이러니까 확인절차도 없이 바로 성문을 활짝 열어주는군요.
그런데 잠시 후 한 떼의 군사가 고운이 들어간 성문으로 뒤따라 들어섭니다. 이것도 뭔 시추에이션인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무슨 역모를 한다면서 이렇게 허술하게 하는 것인지 원. 박정희나 전두환이 보면 코웃음을 치겠습니다. 아무리 상식이 없어도 이건 아니죠.
아무튼 태자 담덕은 수없이 칼에 맞고 창에 찔려도 불사신처럼 죽지 않고 버티고 있는데-여기에 대해 네티즌들이 말이 많은가본데 워낙 황당한 시나리오라 뭐 이런 정도는 참아줄 수 있겠습니다-이 군대가 담덕을 구해줄까요, 말까요?
그리고 이 군대에 앞서 들어간 고운과 이 군대의 관계는? 만약 제가 짐작하는 것처럼 이 군대가 고운과 관련이 있으며 결국 고운이 자기 아버지에 반하여 담덕을 구하게 된다면 실로 복잡하게 됩니다. 고운과 태자비 도영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그러나 그렇더라도 고운과 태자비 도영은 죄를 면할 길이 없습니다. 죽음은 피하더라도 유폐는 불가피합니다. 그게 현실이죠. 그런데 제가 짐작하는 두 번째는 이 드라마 작가들의 황당한 글쓰기 태도로 보아서는 고운과 도영은 태자를 살린 공을 인정받아 원래대로 담덕과 함께 영화를 누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 드라마의 지금껏 모양새로 보아서는 우리가 전혀 짐작하지 못하는 그야말로 황당한 전개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고무 대장군이 등장했다든지 아니면 해모월이 남겨둔 군사들이 들어왔다든지-전혀 그런 언급은 없었지만-.
황당한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담덕의 심복 연살타의 아버지 연도부 말입니다. 분명히 역모를 일으켜 태자 담덕을 척살하자는 모의를 하는 중에 개연수에게 자기 아들 연살타를 살려달라고 부탁했었죠. 그러자 개연수가 “하하, 걱정마시오. 그대의 아들은 내 중히 쓸 것이오” 하지 않았습니까?
연도부의 입장에서야 당연한 요청이고 주장일 것입니다만, 글쎄요. 지난 일요일 마지막 장면에 보니 태자 담덕과 함께 연살타가 포위돼 있는데 거기를 향해 연도부가 이렇게 외치네요. “저것들 모조리 죽여 버려.” 와, 이거 완전 막 가자는 건데요. 흐흐.
방울소리 하나로 신라의 성을 함락시킨 계백도 황당하긴 마찬가집니다만-제작비가 모자라 대형 전투신 같은 거 만들기 곤란하니까 그런 해괴한 이야기를 만들었을까요?-, 광개토태왕의 황당부르스는 도를 넘어도 너무 많이 넘었다는 생각입니다.
그나저나 개연수의 역모가 실패로 끝나고 나면 대대적인 연기자 교체가 불가피한데 큰일이네요. 드라마에서 하차할 인물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개연수를 필두로 해서 대당주 여소이, 연도부 등 장난이 아닙니다. 고운과 도영도 마찬가지고요.
혹시 이렇게 되는 건 아닐까요? 제작비도 부족하고 새로 연기자를 대거 영입하는 것은 여러 모로 어려운 점이 있으니, 그냥 모두 용서하고 함께 힘을 합쳐 대고구려를 건설하자, 뭐 이렇게 말입니다. 까짓 광개토태왕이 못할 게 뭐가 있습니까? 버럭 소리 한 번 지르면 다 끝나는 거지요.
어쨌거나 어떤 의미이든지간에 드라마 광개토태왕은 사극계에 전무후무, 공전절후, 군계일학의 대업적을 세웠다는 건 확실한 것 같습니다. 정말 대단한 드라마에요. 흐흐. 하지만 이런 엉터리 같은 사극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사극도 있습니다.
..... 근래 보기 드문 사극, 뿌리깊은 나무. 역시 한석규와 장혁의 연기가 빛난다. 하지만 역시 작가들의 능력이 받쳐줘야 연기자도 빛이 나는 법.
오늘 밤 10시에 하는 뿌리깊은 나무가 바로 그런 사극입니다. 주인공 장혁과 한석규의 연기력은 정말 대단합니다. 광개토태왕에 나오는 인물들과는 비교할 바가 못됩니다. 장혁은 추노에 이어 뿌리깊은 나무에서도 명연기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밤이 기대되는군요. 에혀~ 그나저나 세종대왕은 저렇게 멋있는데... 불쌍한 광개토태왕. 참고로 아래에다 다음백과사전/브리태니커에 소개한 고국양왕 내용입니다. 이걸 보면 그렇게 비굴한 인간도 또 그렇게 불쌍한 인간도 아니었습니다..
아들 광개토태왕에 못잖은 활달한 왕이었던 거지요. 다시 에혀~가 나옵니다. ㅠㅠ
외치(外治)에 힘써 국력을 외부에 떨치면서, 안으로는 불교를 널리 펴 문화를 발전시켰다. 이름은 이련(伊連)·이속(伊速) 또는 어지지(於只支). 고국원왕의 아들이며, 광개토왕의 아버지이다. 형인 소수림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선왕이 이룩해놓은 국내정치의 안정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대외활동을 전개했다. 385년 4만의 군사로 후연(後燕)을 공격하여 요동군(遼東郡)과 제3현도군을 점령했으나, 이듬해 다시 후연에게 빼앗겼다. 남쪽으로는 386년에 백제를 공격했고, 389년과 390년에는 백제의 공격을 받기도 하는 등 공방을 계속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392년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신라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으로 하여금 실성(實聖)을 인질로 보내게 했다. 같은 해 국사(國社)를 세우고 종묘(宗廟)를 수리하는 등 국가체제의 확립에도 이바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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