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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

미스 리플리 장미리의 비극보다 허무한 반전이 슬프다

당찬 악녀에서 비련의 여주인공이 된 장미리

미스 리플리 장미리. 드디어 모든 거짓말이 탄로 나고 그녀는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햄릿의 경구뿐입니다. 저는 이미 이 드라마가 시작하면서 그녀가 죽을 것임을 예감했고 제 블로그에도 그렇게 썼습니다.

그녀의 비참한 최후는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저는 처음에 장미리가 학력을 위조하고 그 연쇄작용으로 계속해서 거짓말을 하다가 어느 시점에 모든 것이 드러나면서 원점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자 이를 비관해 자살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14부의 마지막 장면을 보니 그게 끝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 드라마는 16부작입니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연장방송 같은 것은 하지 않으리라 봅니다. 미스 리플리는 근래 보기 드문 완성도 높은 수작입니다. 이다해의 연기도 돋보입니다. 김승우, 박유천, 최명길 등의 연기도 압권이죠.

작품성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 미스 리플리 같은 드라마에 연장방송이란 칼을 대는 것은 실로 끔찍한 폭력입니다. 그러므로 16부가 마지막일 것으로 믿습니다. 그렇더라도 아직 2부가 남았습니다. 이 2부 동안에 일어날 일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화와 장미리의 관계가 특히 그렇습니다.

자, 오늘의 주제에 관해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장미리는 악녀일까요? 몹쓸 범죄자이기만 한 걸까요? 그녀의 죄는 그녀의 잘못이기만 한 걸까요? 저는 미스 리플리가 처음 시작할 때 그렇지 않다고 이 블로그에 썼습니다. 그녀의 잘못은 그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장미리가 저지른 학력위조행위는 범죄가 맞습니다. 과거 80년대에는 이 ‘학력위조에 의한 위장취업’이 사회변혁운동의 수단으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심상정이나 노회찬, 문성현 같은 진보정치인들도 실은 학력을 위조하고 (많은 경우 남의 명의를 빌려서) 위장취업을 했던 말하자면 전과자인 셈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현재 경기도지사를 하고 있는 김문수 같은 사람도 한때는 위장취업자였을 것입니다. 인천시장을 하고 있는 송영길도도 마찬가집니다. 사실은 저와 같은 집에서 살고 있는 아줌마도 한때 위장취업자였습니다. 학력을 위조한다는 것은 저학력을 고학력으로 고치는 것뿐만이 아니라 고학력을 숨기는 행위도 포함됩니다.

하지만 이들은 나름대로 선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개인의 이기적 욕심 때문이 아니라 이타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저지른 위법행위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현행법상 범법은 범법입니다. 이타적 목적을 달성하려 했든 개인의 욕심을 채우려 했든 장미리의 위장취업과 이들의 위장취업은 형식적인 면에서 큰 차이가 없습니다.

▲ 몬도그룹 부회장 이화를 찾아간 히라야마. 장미리의 정체를 폭로하지만 목적은 장미리를 다시 일본으로 데려가기 위함이다.

이 둘은 형식상 차이가 없을 뿐 아니라 내용적인 면에서도 유사한 점을 갖고 있습니다. 장미리의 위장취업이나 심상정의 위장취업이 모두 사회적 불평등구조에서 비롯됐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 사회가 학력차별이 없고, 노동이 노동한 것만큼 대우받는 사회였다면 심상정은 위장취업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장미리도 굳이 위장취업을 해 벌벌 떨 필요도 없었겠지요.

학력에 의해 노동의 기회와 가치가 차별받는 사회가 바로 한국사회입니다. 요즘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교육문제, 이른바 고액과외와 같은 사교육문제도 실은 그 근본은 바로 이 노동문제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위 위장취업자들이 대거 노동현장으로 달려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노동문제를 해결하면 교육문제를 비롯한 모든 사회적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맞았고 지금도 맞습니다. 최근엔 많은 이들이 교육개혁에만 집중적으로 매달리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만, 실은 교육문제 해결의 열쇠는 바로 노동문제에 있는 것입니다.

자, 장미리의 경우도 마찬가집니다. 그녀는 일본에서 히라야마를 피해 한국으로 넘어왔습니다. 심중의 목적은 자기를 버리고 도망간 엄마가 보고 싶어서 찾기 위해섭니다. 히라야마를 피해 환락가에서 탈출하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떻든 그녀가 한국에 정착하기 위해선 직업이 있어야 합니다.

직업을 구하지 못하면 한 달 만에 다시 일본으로 추방당한다고 했습니다. 비자 문제이겠습니다만, 저는 외국여행을 해보지 않아 그런 것 잘 모르니 대충 넘어가겠습니다. 그녀는 여러 곳을 전전하며 직장을 구하고자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학력 때문입니다.

한국사회에서 학력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시는 분은 없을 겁니다. 요즘은 사소한 경리 자리 하나 얻으려 해도 대졸학력이 필요한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대졸학력자가 세상에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하다못해 전문대 졸업장이라도 있어야 합니다.

저만 해도 그렇습니다. 예전에 사무실에 경리를 구하는데 모집광고를 냈더니 여러 명의 아가씨들이 응모를 했는데 대부분 전문대졸이거나 대졸이고 가물에 콩 나듯이 여고만 졸업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럼 누구를 뽑을까요? 당연히 대졸자가 합격입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 아니겠습니까.

▲ 몬도그룹 부회장 앞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흐트리지 않는 히라야마, 인상적이었다.

학력위조는 끔찍한 범법행위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인정된 우리나라에서 장미리를 계속 두둔하는 것은 사실 별로 흔쾌한 일은 아닙니다. 네티즌들 사이에서 찍힐 수도 있습니다. 잘못하면 “가정교육을 잘못 받았군” 하고(실제로 그런 분이 있더군요) 부모님께 욕을 먹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학력위조가 개인의 탓보다는 근원적으로 사회적 문제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장미리만 욕하고 장미리만 처벌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상당수의 연예인들처럼 별 필요도 없이 학력위조를 하는 경우도 많지만, 많은 경우에 학력위조는 장미리처럼 처절한 생존투쟁 과정에서 생기기도 합니다.

만약 심상정 씨가 스웨덴, 노르웨이 등 북구를 다녀와 말한 경험담처럼 “북유럽에서 가장 잘사는 사람은 미장공이라고 하더라. 미장공의 아내는 벤츠를 타고 다니지만 대학교수의 아내는 모닝 타기도 힘들다더라” 그러면 누가 대학을 가려고 할까요? 솔직히 우리나라 학부모들 기를 쓰고 자식 대학교육 시키려는 이유가 다 좋은 직업, 결국 돈 때문 아닌가요?

물론 북유럽 같은 나라라도 대학을 가려고 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공부를 정말 좋아하고 공부를 정말 잘하는 사람이 대학을 가고자 하겠지요. 미장공이나 전기수리공보다 훨씬 못한 박봉에도 굳이 대학을 가고 대학원을 나와 박사도 되고 교수도 되려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이럴 때 세상은 진정 돈이 전부가 아닌 세상이 되는 것 아닐까요?

음, 이제 A4 3장 가까이 다가서고 있으므로 그만 정리를 해야겠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장미리의 선전을 응원했습니다. 나중에 쓰러지더라도 한번 맘껏 실력을 발휘해 봐라, 동경대 출신? 그거 코를 납작하게 해줘라, 그리고 장렬하게 전사해라, 그런데 마지막 결론은 제가 바랐던 방향과는 영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저는 장미리가 철저하게 악녀가 되기를 바랐지만, 마지막 2부를 남겨둔 상황에서 장미리는 만인의 동정을 바라마지않는 가련한 여자로 변모하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비련의 주인공이었습니다. 도저히 동정 받지 못할 것 같던 장미리에게 격려는 아니더라도 위로의 손길들이 애처롭게 다가서고 있습니다.

그녀의 허접하고 추악한(사실 이런 평가는 말도 안 되게 비열한 것이긴 합니다만) 과거는 그녀를 버린 비정한 엄마와 그녀를 버리도록 공작을 꾸민 송 회장(몬도그룹 회장이며 송유현의 아버지)에 의해 어쩔 수 없었던 불행으로 치부되고, 그녀가 꾸민 거짓들도 동정을 받기에 충분히 가련한 슬픔으로 바뀌었습니다.

▲ 이화가 던지고 간 일본 화류계에서 활약하던 자신의 사진을 주워담으며 오열하는 장미리. 결국 학력위조도 거짓말도 문제가 안 될 수 있었지만, 과거 화류계 전력은 치명적 결함이다. 이 부분이 수작이라고 평가받는 이 드라마의 역시 치명적 결함인 듯.

이런 마지막 반전은 저를 너무나 슬프게 합니다. 저는 장미리가 가련하거나 불행한 여자이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동정받기보단 도전하는, 거대한 사회적 불평등의 장막에 맞서 투쟁하는 전사이기를 바랐습니다. 그녀의 거짓은 도저히 허물 수 없을 것으로 여겨지는 단절의 경계를 향한 무모한 돌팔매질이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미스 리플리는 이런 저의 바람을 배신하고 마지막 비극의 장면을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실로 슬픈 일입니다. 미스 리플리의 비극보다 이런 허무한 반전이 더 슬픕니다. 이제 더 이상 장미리를 통해 듣고 싶었던 “너, 그렇게 명문대 출신이야? 네 부모가 그렇게 돈이 많아? 그래, 좋아, 한번 해보자구”는 들을 수 없게 됐습니다.

오히려 장미리를 통해 확인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히라야마가 대신 해주고 있습니다. 히라야마는 이화를 만나러 몬도그룹 부회장실로 찾아갑니다. 그리고 “원하는 게 뭐냐”는 말에 능글거리는 투로 말합니다. “내 여자 찾으러 왔어요. 당신들이 어차피 버릴 여자잖아요. 뻔한 화투패 보는 것 같아서 지겹고 역겨워요.” 대화는 계속됩니다.

“무슨 뜻이죠?”

“멋진 대학 나오고 폼나오는 집안의 딸 정도 돼야 사람 취급하는 거 아녜요, 당신들? 당신들은 무슨 생각하는지를 모르겠어요. 돌아가면서 찾아오고 돌아가면서 묻고 그러다 또 돌아가면서 버릴 셈인가요? 걸레처럼 갈기갈기 찢어서….”

“그런 가당치않은 꿈을 먼저 꾼 건 그애지 우리가 아니에요.”

“가당치않은 꿈? 으허허허허~ 당신들은 꼭 두 가지를 얘기하더라고요. 꿈이면 그냥 꿈이지 가당치않은 꿈이 있고, 사람이면 그냥 사람이지 사람 취급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들 이야기하죠. 왜, 안 그래요?”

“그런 경계를 모르는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세상이 있죠, 이 세상에는요. 누구나 밟을 수 없는 땅이, 누구나 누릴 수 없는 것들을 당연히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존재하죠. 일반인과 다른 것들을 먹고 일반인과 다른 것들을 누리고 대신 일반인들과 다른 책임들을 지는 그런 걸 아나요? 장미리는 그 경계를 넘을 수 없는 종류의 아이에요.”

“뭐라고요?”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되는데, 문제는 욕심이었었죠. 주제를 모르고 부리는 가당치않은 욕심….”

히라야마의 일그러진 얼굴 표정이 참 볼만 했는데요. 히라야마가 갈수록 멋있어진다는 것은 뭐 대개 인정되는 사실입니다. 히라야마의 다음 말이 저는 정말 멋지고 시원하고 통쾌했습니다만, 실제에선 히라야마에게 이런 말을 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겠지요. 왜냐하면, 히라야마 역시 경계를 넘어 이화를 만날 수는 없을 테니까요.

▲ 히라야마, 나쁜 남자인가, 순정 남자인가?

“니들이 그렇게 잘났어? 어? 뼛속까지 로얄이야? 어? 로얄? 으하하하하~~”

“아니라고 할 순 없겠죠.”

“(손바닥을 마주 치며) 나는 상관없어. 니들이 얼마나 잘난지 나는 상관없어. 니들이 된장을 먹었든 똥을 처먹었대도 나는 상관없어. 하지만 말이야. 장미리, 장미리 건들면 다 죽어. 나, 못 참는다. 재수 없는 것들, 씨이~”

아무튼 장미리가 당당하게 거짓을 무기삼아 경계의 벽에 도전하던 당찬 모습은 사라지고 비 맞은 새처럼 바들바들 떠는 비련의 여주인공이 된 것은 참으로 유감이지만, 대신 히라야마의 거만한 말투가 위로해준 격이 되었습니다. 그는 나쁜 남자가 아니었습니다. 정말 멋진 남자 히라야마와 이화의 대화내용에 대해선 한 번 더 포스팅을 하기로 하지요.

뜯어볼수록 심오한 철학이 숨어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어떤 정치인보다도, 대학교수보다도, 기업가, 법조인, 또는 이른바 사회지도층으로 불리는 어떤 인간들보다도 세상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물론 좀 아쉬운 부분도 있습니다. “된장을 먹었던 똥을 처먹었든 나는 상관없어” 하는 부분 말입니다.

된장을 먹는지 똥을 처먹는지 상관없으면 안 되죠. 이놈들이 누구 된장을 퍼다 먹고 누구 똥을 걷어다 처먹는지 두 눈 똑바로 뜨고 상관해야 되는 거 아닐까 싶은데요. 하하. 다음 주에 마지막을 어떻게 장식할지 심히 궁금합니다. 이다해는 이 드라마 한편으로 일약 연기파 배우로 거듭날 것 같습니다

그녀에겐 미스 리플리가 증후군이 아니었던 셈입니다. 오늘은 히라야마가 너무 멋있어서 이미지 사진들을 모두 히라야마로 채웠습니다. 히라야마가 그래도 마음에 안 드시는 분들은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어쨌거나 히라야마는 화류계의 나쁜 남자니까요. 나쁜 남자 하니까 조머시기가 생각나네요. 정말 멋졌는데….  

ps; 참고로 이 포스팅은 소맥 다섯 잔 이상 먹고 썼다는 점을 밝힙니다. 저도 나쁜 남자에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