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혜림의 이른바 회초리 연설이 많은 관심을 끌었는데요. 저는 글쎄요. 이런 류의 교과서적인 발언에도 감성적으로 감동할 수밖에 없는 정치현실에 불만을 표시한 바 있었지요. 물론 찬성도 있었고 반대도 있었지만, 저는 여전히 서혜림의 회초리 연설은 난센스였다고 생각하고 있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방영된 대물에서는 더 놀랍고 코믹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지 뭡니까. 세상에 회초리 연설이 해당행위라고 민우당 지도부가 발칵 뒤집혔어요. 회초리 연설(사실은 연설도 아니고 TV토론회의 패널 발언이었죠)이 어떤 특정당을 지칭해서 비난하는 내용이었던가요?
그렇지 않죠. 물론 당지도부 눈치를 보며 소신을 굽히는 국회의원과 날치기 현장에 대한 연결 발언은 민우당을 향한 비판이란 해석도 가능한 면이 없잖아 있어요. 그러나 전체적으로 교과서적이며 도덕적인 내용들로 정치일반을 향한 회초리였죠.
회초리연설은 모든 정치인을 향한 도덕적 훈시
회초리 연설의 내용을 정리하면 대충 이런 것이에요.
1) 우리 정치 바꿔야 한다. 정치인들부터 몸을 낮추고 겸손해야 한다. 2) 당 지도부 눈치 보지 말고 소신정치 해야 한다. 3) 정치인들은 진정으로 국민을 사랑하지 않으며 오만불손하다. 이는 국민의 책임도 크다. 관심을 가져달라. 국민 여러분만이 희망이다. 회초리로 말 안 듣는 정치인들 때려달라.
긴 연설 내용을 짧게 요약하려니 좀 그렇긴 한데요. 대충 위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자 보십시오. 어디를 봐서 민우당 지도부가 해당행위랍시고 서혜림을 불러 징계를 해야 되니 말아야 되니 난리 필 정도의 사안이 있습니까?
그러고 보니 난센스는 서혜림이 아니고 민우당 지도부가 하고 있는 것 같네요. 그 중에서도 오재봉 의원인가 하는 친구, 참 걸작입니다. 지가 무슨 민우당이라는 군대의 통제군번쯤 되는 걸로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닌가 생각될 정도에요.
“서혜림 의원. 국회가 무슨 뽀로롱 놀이동산이야? 당신 정치생명도 이제 끝장이야. 당장 대표실로 따라와.”
국회가 무슨 애들 군대놀이 하는 곳인가
이거 뭐 정말 오재봉 의원이야말로 국회가 무슨 뽀로롱 놀이동산입니까? 아니면 애들 군대놀이 하는 곳이랍니까? 국회의원이 무슨 봉이에요? 군대 내무반 통제군번이 갓 입대한 이등병 윽박지르듯이 “당장 따라와!”라니요. 이어지는 민우당 대표와 지도부의 발언은 더 걸작입니다.
(조 대표) 강의원 서혜림이 문제 일으키면 책임진다고 그랬지. 어떻게 책임질 거야?
(강 의원) 제명, 출당, 다 감수하겠습니다.
(조 대표) 감수하겠다구?
(강 의원) 하지만 서혜림 의원 어제 방송은 해당행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모 의원) 아니 방송에 나와서 정치인들 국민 존경한다는 거 새빨간 거짓말이네, 회초리를 쳐야 정신을 차리네 이렇게 떠들어댔는데 이게 해당행위가 아니라는 건가?
(강 의원)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라는 겁니다. 서혜림은 버릴 카드가 아니라 위기에 빠진 당을 구할 조컵니다. 서 의원을 징계하신다면 민우당은 국민에게 버림받는 낡은 정치세력으로 전락할 겁니다.
(이때 오재봉 의원 서혜림을 데리고 들어오며) 해당분자 출두했습니다.
(서혜림) 어제 방송 경솔했던 거 인정합니다. 당에 누를 끼쳤다면 책임지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뭘 잘못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 대목. 저도 잘 모르겠거든요.)
(오재봉) 어랍쇼. 아직 잘 몰라? 당기위원회 갈 것도 없습니다. 당장 이 자리에서 제명하시죠.
당대표를 제왕으로 생각하는 오재봉 의원
하하, 이것 보십시오. 오재봉 의원님의 말씀 말입니다. 당기위원회 갈 것도 없습니다. 당장 이 자리에서 제명하시죠. 아니 조배호 민우당 대표가 무슨 김일성입니까? 조배호가 까라면 까는 게 민우당 국회의원들이 할 짓입니까? 이어지는 조배호 대표님의 훈시를 잠시 들어보시겠습니다.
(조 대표) 서의원. 정치 초년병은 말이야, 종갓집 며느리하고 같은 거야.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하고 싶은 말 있어도 참고,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소경 3년을 지난 후에 비로소 눈이 뜨이고 말문이 트이고 귀가 뚫리는 거지. 내 말 뜻 알겠나?
세상에 초선 국회의원은 종갓집 며느리하고 같답니다.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소경 3년을 지나고 나야 비로소 눈이 뜨이고 말문이 트이고 귀가 뚫리는 거랍니다. 3 곱하기 3 해서 9년 동안 죽은 듯이 지내라는 까라면 까면서 지내라, 뭐 그런 말일까요?
(서혜림) 죄송합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갑니다.
당연하죠. 그걸 이해하면 이상한 국회의원이죠. 오재봉 같은 국회의원 아니고선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내용이죠. 국민이 국회의원을 뽑은 게 아니라 종갓집 며느리를 뽑아 국회로 보냈단 말입니까? 국회가 무슨 종갓집이었던가요? 그러나 조배호, 역시 능글맞은 정치 고단숩니다.
(조 대표, 어이없어 멍한 표정을 짓다가) 하하하하하하, 거 솔직해서 좋구만. 서 의원. 당직 하나 맡아봐. 부대변인 어때?
(서혜림) 네?
(조 대표) 아, 아나운서 전공도 살리고, 우리 민우당 클린정치도 알리고, 아이콘이 돼봐.
강태산의 대항마가 된 서혜림
조배호의 이해할 수 없는 이런 행동은 물론 강태산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죠. 견제구로 서혜림을 발탁한 겁니다. 똑똑하고 예리한 강태산도 조배호의 그런 심중을 모를 리 없지요. 대항마. 그는 조배호가 서혜림을 자기를 견제하기 위한 대항마로 내세웠단 사실을 꿰뚫고 있습니다.(강태산은 이를 역으로 이용할 계산이죠.)
(대표실을 나서며 강태산을 종종걸음으로 따라간 서혜림) 저 야단맞을 줄 알았는데 감투를 썼네요. 우리 대표님 생각보다 마음이 넓으신 거 같아요.
(강태산) 정치판에서 관용 같은 거 생각 말아요. 철저한 계산만 판치는 무자비한 정글입니다. 서 의원이 방송토론에 나간 거, 부대변인으로 전격 발탁된 거 다 조배호 대표의 계산서에 있습니다.
(서혜림, 맹한 표정을 지으며) 계산서요?
(강태산) 서혜림 의원의 눈물 한 방울이 국가재정법 강행처리로 곤두박질치던 당 지지율을 5% 끌어올렸습니다. 각계에서 폭발적인 성원을 보내고 있어요. 서혜림은 조배호 대표가 표방하는 클린정치의 아이콘이 된 겁니다.
(서혜림, 우습다는 듯 속삭이는 목소리로)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어요.
(강태산, 역시 웃으며) 차차 알게 될 겁니다.
아무튼 잘 모르기로는 저도 마찬가지지만 말이에요. 무엇보다 조배호 대표님의 그 말씀이 아직도 아리송하면서도 뭔가 기분이 찜찜하네요. 소위 종갓집며느리론 말이죠. 국회의원은 종갓집 며느리와 같다? 이거 여러분은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국민의 대표가 종갓집 며느리에 군대 졸병?
국민을 대리해서 국회에 나가 바른말을 하라고 보낸 국회의원이 3년은 벙어리요, 또 3년은 귀머거리, 마지막 3년을 더 소경으로 지내야 한다니 이거 참 기가 막히네요. 그런데 이거 말이죠. 이 말이 코믹드라마의 난센스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막연하게 드네요.
실제 한국 정치판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것은 아닐까, 의도적으로 구태정치를 반복하고 있는 대한민국 정당과 정치인들을 비꼰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만약 그렇다면 오재봉이야말로 가장 사실적인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조배호 대표를 마치 김일성 수령님처럼 떠받들고 있는 오재봉 의원. 어찌 보면 박정희 시절의 차지철 같다는 생각도 들고, 전두환 시절의 장세동 같다는 생각도 드는데…, 그리고 하나만 더요. 당기위원회도 안 열고 의원인 당원을 제명할 수 있나요?
오재봉 위원이 조 대표에게 그랬잖아요. “당기위원회 갈 것도 없습니다. 그냥 이 자리에서 제명하시죠.” 확실히 오재봉은 조배호를 왕으로 생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네요. 아니면 민우당을 무슨 군대로 착각하고 있거나. 민주적인 정당에서 당기위를 거치지 않고 대표의 명령으로 당원을 제명하는 게 가능한가요?
그리고 다선 의원과 초선 의원이 무슨 차이가 있죠? 이들은 다만 4년간 국민을 대리해 국회에 나가 의사결정에 참여할 뿐 어떤 서열도 있어서는 안 되는 거 아닌가요? 대물을 보면서 몹시도 불편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대물이 그리고 있는 난센스들이 대한민국 현실정치의 반영이라는 사실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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