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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

‘역전의 여왕’은 ‘직장인 잔혹사’

<역전의 여왕>을 보려니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거 완전 직장 잔혹사로구먼. 그렇습니다. 초반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황태희. 연봉 7천만원의 퀸즈그룹 브랜드기획개발실 팀장입니다. 사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냉기류가 사무실을 휘감습니다.

 

쩔쩔매는 부하직원들. 그러나 황태희에게도 아킬레스건이 있습니다. 직속상사인 한송이 상무. 뷰티사업본부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황태희가 서른세 살의 나이에 뷰티사업본부에서도 노른자위인 브랜드기획개발팀장이 될 수 있었던 것도 한 상무의 라인에 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순식간에 황태희는 한 상무로부터 버림받았습니다. 한 상무는 황 팀장이 자기를 따라 결혼을 포기하고 일에만 전념하는 커리어우먼이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아무튼 황태희는 회사에서 쫓겨났습니다.(사직서를 썼지만 결과적으로는 추방된 거나 마찬가지죠.)


▲ 구조조정 대상자들을 모아놓고 회식을 열어주는 퀸즈그룹 구조본부장. 눈물겹게 고마운 장면이다.


부당하게 쫓겨난 황태희에 이어 봉준수도 정리해고 

이제 무능한 남편만 바라보며 살 수밖에 없게 된 황태희. 그러나 5년 동안 개근만 해도 단다는 대리도 달지 못하는 무능한 남편마저 결국 회사에서 쫓겨날 처지에 놓였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란 말이 남 말이 아닙니다 


황태희가 한 눈에 빠져 잘 나가던 팀장 자리까지 잃어가며 결혼한 봉준수
. 구조조정 대상에 딱 걸렸습니다. 이유는 뭐 뻔합니다. 실적이 없다는 거지요. 5년 동안 대리 승진도 못한 사정도 포함됐겠지요. 그러나 실상 그것은 봉준수 탓만은 아닙니다.

 

황태희를 미워하는 한 상무와 새로 팀장이 된 백여진이 봉준수를 돌린 탓이지요. 아무튼 어제도 말씀 드린 것처럼, 소위 구조조정회의란 것이 비정규직(계약직), 결혼한 여직원, 실적 없는 사원을 최우선순위로 잘라 형식을 갖추는 게 일이지요.

 

원래 경영악화를 이유로 구조조정을 한다면 경영의 책임을 져야 할 임원진들부터 사표를 내야 하지만, 그런 구조조정 예는 대한민국에서 보기 힘들지요. 대체로 경영의 책임을 지는 것은 비정규직들입니다. 그러니 우스갯소리로 말하자면 계약직과 유부녀 사원들이 경영진인 셈입니다.

 

이렇게 찍었건 저렇게 찍었건 퀸즈그룹의 구조조정 대상자들이 모두 결정됐습니다. 그러자 구조조정본부는 대상자들을 한군데 모아 술자리를 마련합니다. 이거 뭐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쫓겨나는 사람들 모아놓고 술 사주면 뭐 그리 큰 위로가 된답니까? 서럽기만 더하죠.  

 

물론 이 눈물의 술자리엔 봉준수도 끼었겠죠. 여기에 황태희가 나타났습니다. 남편 대신 구조본부장 구용식이 내미는 술잔을 받아 마신 황태희, 구용식에게 일침을 가합니다.


지금도 잘 살면서 얼마나 더 잘 살려고 사람들을 짜르는 거지?
 

넌 태어날 때부터 갑이잖아. 그런 네가 을의 아픔을 알아? 죽도록 충성해도 나가 죽으라면 죽어야 되는 게 을이야. 갑 보기엔 우스울지 몰라도 여기 이 을들, 다 지 밥벌이만큼은 하는 사람들이야. 이 사람들 잘라서 얼마나 더 잘 살려고 그래? 지금도 충분히 잘 살면서.”


▲ 한강에 투진자살 뉴스를 보며 혹시나 하고 불안해하는 황태희.

이 드라마를 보면서 얼마 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우리 동네의 한 노동자가 생각났습니다. 그는 대림자동차에 오랫동안 근무하다 희망퇴직을 당했습니다. 희망퇴직이란 것이 바로 <역전의 여왕>에서 퀸즈그룹이 하고 있는 구조조정입니다

 

구조조정 대상자로 찍히면 한 명씩 불려가 희망퇴직 신청서에 사인을 하던가 아니면 끝까지 버티다가 구조조정본부 요원의 말대로 위로금 한 푼도 없이 쫓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대림차의 이 노동자도 그렇게 위협을 당하다 희망퇴직신청서에 사인을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물론 희망퇴직신청서에 사인을 거부한 다른 노동자들도 퀸즈그룹 구조조정본부 요원이 말한 것처럼 결국 대부분 쫓겨났습니다. 보통 정리해고라고들 말하죠. 회사를 나와 여기저기 전전하던 그는 가족들에게 책임을 다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유서만 남긴 채 죽음을 택했습니다.

 

정리해고로 인한 죽음은 이 노동자가 처음이 아닙니다. 작년 쌍용자동차의 대량 정리해고 이후에도 십 수 명이 자결로, 화병으로, 또 이런저런 이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역전의 여왕>에서 그리는 구조조정이 너무 코믹하고 재미있어 못 느낄지라도 당사자들의 아픔은 죽음과도 같은 것입니다

구조조정이든 정리해고든 이는 곧 살인이다

황태희도 사실은 부당한 해고를 당한 것입니다
. 물론 황태희 스스로가 사표를 쓰긴 했지만, 부당한 인사이동을 통한 강등, 그로 인한 감봉은 엄청남 스트레스를 안겼을 테지요. 보통사람으로선 그와 같은 상황에서 회사에 계속 남아있을 수가 없습니다

▲ 구조본에 불려가 희망퇴직 종용을 받고 있는 봉준수. 이를 보며 눈물 짓는 황태희.


그리고 봉준수는 황태희의 남편이란 이유로 매번 승진에서 탈락하는 부당한 처우를 받다가 결국 구조조정대상에 포함되어 희망퇴직(사실상 정리해고) 당하게 되는 비운을 맞게 됩니다. 이 드라마의 제목이 의미하듯 황태희는 과감하게 다시 퀸즈그룹에 들어가 역전에 성공하겠지요 


아마도 백여진도 누르고
, 한 상무도 눌러 마침내 성공신화를 일구어낼 게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로또복권에 당첨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야말로 드라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죠. 다행히 황태희나 봉준수가 자살을 택하지 않은 것만도 복 받았다고 할 수 있지요.

 

황태희처럼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사람만 세상에 있다면 세상 살기가 얼마나 수월하겠습니까만, 세상이 그렇게 녹록한 것도 아니죠. 어쨌거나 퀸즈그룹의 구조조정본부는 정말 잘 그린 것 같아요. 보통 우리는 그렇게 생각했지 않습니까? 구조조정본부 이러면 뭔가 대단한 일을 하는 곳 같다는.

 

그런데 알고 보니 그곳이 살생부를 만들어 사람을 죽이는 곳이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