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의 기준? 이런 식이면 모든 드라마는 다 막장이다
제가 <제빵왕 김탁구>에 대해 좀 호의적으로 말했더니 어떤 분이 그러시더군요. 너무 ‘예찬적(!)’이라고요. 뭐 별로 그렇다고 생각은 안 했는데,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군요. 이 분은 <김탁구>에 대해 매우 안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세기의 막장드라마라고 혹평을 하시더군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는 막장드라마란 표현에 대해 별로 바람직하게 생각하진 않아요. 왜냐하면 제 친구들 중에도 어린 나이에 막장으로 간 친구들이 더러 있기 때문이지요. 어려웠던 지난 시절에 막장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서민들이 따뜻한 아룻묵에서 겨울을 날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오히려 존경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장드라마가 이제 마치 불량한 드라마를 대변하는 말처럼 쓰이고 있으므로 오래 전 헤어져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친구들에게 미안하긴 하지만 그 말을 쓸 수밖에 없겠군요. 그런데 이 분은 <김탁구>를 막장드라마고 하는 이유에 대해 지역감정을 들었어요.
막장의 기준이 선량한 소재를 쓰지 않았기 때문?
경상도 사람은 착하게 보이게 하고 전라도 사람은 강간범으로 만들어 지역차별 조장하는 게 시대적 상황을 그대로보여주는 거냐고 반박하더군요. 제가 그랬거든요. <김탁구>의 초기 시대적 배경은 1960년대이고 1970년대를 거쳐 1980년대가 주요 무대가 된다, 그래서 지금의 기준으로 그때를 바라보면 안 된다, 라고 말이지요.
남아선호사상이니 불륜이니 출생의 비밀이니 하는 코드로 막장을 연출하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선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하려다가 그런 얘기가 나왔던 건데 왜 이분은 엉뚱하게 지역감정 얘기를 하신 건지 모르겠어요. 아, 주인공 김탁구와 그의 어머니 김미순이 경상도 사투리를 쓰고 있었군요.
그러고 보니 한승재의 사주에 의해 김미순을 겁탈하려고 했던 신유경의 아버지는 전라도 사투리를 쓰고 있었네요.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그러나 이건 지나친 피해의식 아닐까 싶네요. 우연히 작가가 김탁구의 어머니를 경상도 사람으로, 신유경의 아버지를 전라도 사람으로 그린 것을 놓고 그럴 필요까지야 있을까요.
그런 피해의식으로 제 얘기를 보자면 지나친 예찬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그러나 저는 아직도 <김탁구>가 막장이라고 비난하는 데 대해선 절대 동의할 수 없답니다. 그렇게 보면 정말 우리나라 드라마 치고 막장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해요. 우선 국민드라마로 칭송 받았던 <불멸의 이순신>도 막장 아닐까요?
<불멸의 이순신>에도 요즘 흔히들 막장코드라 불릴 만한 소재들이 무궁무진했었지요. 물론 강간 장면도 있었고요. 무엇보다 전쟁신으로 피를 뿌리는 장면들이 대부분을 차지했지요. 세상에 무자비한 살인 장면을 보여주는 것만한 막장코드가 있을까요? 1000만 관객 돌파로 유명한 <태극기 휘날리며>도 마찬가지지요.
'불멸의 이순신'과 '김탁구'의 차이는 뭘까?
그런 것들은 나름대로 정당한 이유가 있는 것이니 막장이 아니라고요? 정말 그럴까요? 그렇다면 <김탁구>에 나오는 남호선호사상이나 불륜은 정당한 이유가 없는 것일까요? 물론 바람직스럽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나름 다 이유가 있는 것들이죠. 차라리 전쟁코드보다는 훨씬 나은 소재들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저도 사실 막장드라마에 대해 비판한 적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김탁구> 같은 드라마를 막장으로 분류하진 않았어요. 제가 막장으로 찍은 드라마들은 <너는 내 운명>, <수상한 삼형제> 같은 드라마였는데요. 이런 드라마들의 특성은 앞뒤가 안 맞는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불륜, 살인 등 반사회적 소재들을 버무린다는 거죠.
예를 들어 이런 거랍니다. <너는 내 운명> 같은 경우에 극 중간에 느닷없이 50대의 주부가 임신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몇 회가 가다가(당연히 임신한 50대 부부는 창피하면서도 행복해했겠죠) 어느 날 갑자기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달밤에 체조하던 50대 임신부는 유산을 하는 겁니다. 아마도 그때는 임신도 아이도 필요없어졌던 것이겠죠.
<수상한 삼형제>도 더 말할 나위 없이 온통 이런 식이었어요. 잘 나가다가 갑자기 김순경(주인공 김이상 경감의 아버지)과 함께 근무하던 파출소 직원의 아들(전투경찰이었나봐요)이 시위 진압에 앞장서다 병원에 입원했는데 실명 상태에 빠지는 거예요. 울면서 외치는 거지요. "왜 죄 없는 우리 아들의 눈을 뺏아가는 겁니까? 원통합니다."
이 장면은 정말 황당했는데, 아무도 왜 갑자기 그런 시츄에이션이 등장했는지 이해하지 못했어요. 이후에도 이런 류의 설정들은 수도 없이 등장해서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했다지요. 저는 중간에 끊어서 잘 모르겠지만. 이 드라마들의 특성은 마지막은 늘 행복, 화해모드로 평화를 달성한다는 거예요. <수삼>도 그렇게 끝났겠지요.
아무데나 막장 딱지 붙이면 진짜 막장이 울고 간다
<김탁구>가 그런가요? 저는 그렇게 보지 않아요. 1960년대의 남아선호사상을 말씀하시는데 그땐 그런 시대였어요. 그건 우리 집도 마찬가지에요. 저는 평생을 부엌에 한 번 들어가보지 않고 자랐어요.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가 며느리를 미워하는 것 중에 한 가지는 제가 결혼한 후 부엌 출입을 자주 한다는 거였지요.
그러나 제가 보기에 <김탁구>는 남아선호사상을 그냥 맹목적으로 전파하는 그런 내용도 아니었어요. 탁구의 누이인 구자경은 매우 진취적인 여성이죠. 그녀는 남아선호사상에 대해 맹렬한 거부감을 갖고 있어요. 그녀는 이렇게 결심하죠. "마준이나 탁구가 아빠 회사를 이어받도록 놔두지는 않을 거야. 이 집의 장녀는 나야. 내가 이어받을 거라고."
저는 오히려 이런 설정이야말로 비상식적이라고 생각해요. 과연 1960년대의 여성이 그런 정도의 진보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을까요? 그리고 그걸 마음속으로 생각했다고 하더라도 행동으로 옮길 수 있었을까요? 그러나 그런 정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죠. 우리는 사극 속에서도 오늘날 우리의 사고를 대입시킨 것을 많이 볼 수 있으니까요.
아무튼 <김탁구> 같은 드라마를 막장이라고 함부로 이름 짓지는 말아주세요. 그럼 진짜 막장드라마가 눈물짓는다니까요. 억울해서요. 막장은 난데 왜 엉뚱한 데 가서 난리야, 이러면서 말이죠. 사실 <김탁구>엔 남아선호사상, 불륜, 아동학대, 강간, 거기다 재산을 둘러싼 비열한 음모 등 온갖 것들이 망라돼 있어요.
아마 이 드라마의 주제를 김탁구가 제빵왕으로 성공하는 과정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은 그런 이야기 장치들이 불편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 드라마는 제가 보기에 성장드라마가 아니에요. 인간들 사이의 갈등을 1960년대로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사회의 격변기를 통해 보여주려는 거라고 생각해요.
'김탁구'는 성장드라마가 아니라 갈등을 그린 드라마
가장 추악한 인간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 필요불가결한 장치들이었다는 거죠. 극이 이제 본궤도에 올랐으니 더 이상 그토록 무자비한 장면들은 필요 없을 거예요. 이제부턴 보기가 한결 부드러워지겠죠. 아동학대의 당사자인 신유경이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도 큰 관심거리로군요. 그녀의 피해의식이 성장한 그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상도 사람은 선량한 사람(탁구와 탁구 엄마)으로, 전라도 사람은 악독한 사람(딸 폭행을 낙으로 삼는 술주정뱅이로 한승재의 사주를 받아 강간음모에 동참하는 신유경의 아버지)으로 그린 <김탁구>야말로 지역차별을 조장하는 세기의 막장이라고 항의하실 어느 독자에겐 할 말이 없군요.
지금이라도 역할을 바꿔달라고 부탁하고 싶지만, 그러긴 이미 너무 늦었잖아요. 그냥 그렇게 이해하면 안 될까요? 탁구로 캐스팅 된 오재무인가 하는 어린 친구가, 전라도 사투리보다는 경상도 사투리를 하는 게 더 쉬워서 그래서 그렇게 된 거라고 말이에요. 경상도 사투리는 너무 단순해서 아무래도 전라도 사투리보다는 배우기가 쉽지 않을까요?
어쨌거나 또 너무 예찬적(!)으로 나갔다고 그분한테 욕먹겠는데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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