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이번에도 뭔 일 내는 거 아녀?
6월 12일 오후 4시, 창원시 상남동 분수공원에서 지율스님 낙동강 사진전을 열기로 하였습니다. 조금 늦게 도착했을 때 미리 도착한 김훤주 기자와 경남도민일보 김두천 기자가 열심히 사진을 꺼내 널고 있었습니다. 널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양쪽 나무에 마치 빨랫줄처럼 줄을 걸어 거기에 사진 판넬을 매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상남동 근처 창원시청 앞 광장에는 벌써 붉은 옷을 입은 젊은 무리들이 떼를 지어 왔다갔다 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이날 저녁 8시 30분부터 월드컵 한국 대 그리스전이 열리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오랜만에 들뜬 축제분위기를 보노라니 옛날 생각이 났습니다. 저도 8년 전에는 붉은 옷을 입고 창원 정우상가 뒷골목을 누볐던 기억이 있습니다.
축구광인 저는 심지어 대구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리는 한국 대 미국의 경기를, 아니 대한민국 대 미국의 경기를(아마 2002년 월드컵 이후로 우리나라를 대한민국이란 고유명사로 널리 부르기 시작했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직접 보기 위해 전날 저녁부터 꼬박 밤을 새워 줄을 섰습니다. 애석하게도 워낙 뒷줄이라 표는 구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9만 원짜리 표를 40만 원이나 주고 밀거래를 해서 대망의 월드컵 경기장에서 응원을 하게 되었는데, 후반전 막판 최용수 선수가 바로 제 눈앞에서 헛발질을 하고 말았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을용 선수의 기막힌 드리볼과 재치 있는 패스로 최용수는 노마크 찬스를 맞았지만, 너무나 당황했던지 그만 똥볼을 날리고 말았던 것이지요.
아아, 얼마나 억울하던지. 그 한골이었다면 대한민국은 미국을 2:1로 이기고 16강행을 확정짓는 순간이 되었을 것이고, 저는 그 역사적인 순간에 입회인 중의 한명이 되었을 것입니다. "야, 용수야, 피 같은 내 돈 돌리도!" 창원으로 돌아오는 내내 핸들을 잡은 제 손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억울할 수가!"
나중에 최용수가 헛발질 하는 장면을 TV를 통해 수도 없이 보았지만, 현장에서 느꼈던 실감을 느끼진 못했습니다. TV에서 보이는 최용수의 실수는 헛발질이 아니라 그저 많은 실수 중의 하나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제 눈앞에서 벌어진 장면은 완벽한 헛발질이었습니다. 역시 축구는 그라운드에서 함께 뛰며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며칠 후, 대한민국 대 포르투갈의 경기가 인천에서 열렸습니다. 인천은 워낙 먼 곳이라 도저히 갈 수 없었으므로 우리는 정우상가 뒤 어느 술집에 모였습니다. 10여 명의 30대들이 모두 붉은 티를 입고 앉은 모습이 꽤나 가관이었지만, 아무도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주변에 역시 그룹을 짜 모여 앉은 20대들이 오히려 우리를 부러워하며 응원을 보낼 정도였지요.
대한민국은 프랑스, 브라질과 함께 우승후보 1순위로 꼽히던 포르투갈에 절대 밀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포르투갈을 압도하기 시작했고, 당황해하는 피구의 모습이 애처롭기 그지없어 보였습니다. 박지성이 마침내 골을 넣었을 때, 술집은 흥분의 함성으로 무너질까 두려울 정도가 되었습니다.
소파 위에서 펄쩍펄쩍 날뛰고 테이블 위에 올라가 춤을 추는 친구들, 종료시간이 다가오자 16강 진출은 거의 확정적인 것으로 굳어졌고, 포르투갈에 동정심을 느낀 친구들이 "야, 운재야, 그냥 한 골 먹어줘라!" 하는 소리까지 나오게 되었지요. 모두들 그때는 제발 미국이 떨어지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입니다.
이건 무슨 반미주의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이야깁니다. 그 자리에서 함께 빨간 옷을 입고 격정의 시간을 보냈던 친구들은 건축업자이거나 부동산업자, 혹은 술집 주인, 팬시점 사장, 회사원 등 다양한 직업의 종류를 가진 평범한 시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아마도 누구라도 미국이 탈락하기를 바랐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안톤 오노 때문이었습니다. 이 재수없게 생긴 일본계 미국인이 어떤 이념적 경향성이나 이데올로기의 세례도 받지 못한 평범한 대한민국 국민들을 반미주의자 비슷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던 것입니다. 미국전에서 골을 넣은 안정환과 그의 동료들이 만든 안톤 오노를 조롱하는 골 세리머니는 아직도 가장 인상 깊은 장면 중의 하나입니다.
제가 잘 알고 존경하는 어떤 분은 이 당시의 서울광장을 "광기로 뒤덮였다!" 라고 자신의 책 서문에서 적었는데, 그 광기의 붉은 옷을 8년이 지난 2010년 6월 12일 창원 상남동 분수공원에서 다시 만났지만 제 눈에 그것은 광기가 아니라 약동하는 생명이었습니다. 그 젊음이 한없이 부러워서 한참을 서서 구경했습니다.
경기가 시작되려면 아직 4시간이나 남았지만 대형 모니터가 설치된 창원시청 광장이나 상남동에선 붉은 옷의 축제가 한창이었습니다. 낙동강 사진전을 펼쳐놓고도 제 눈은 그 붉은 물결들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8년 전이었다면 얼마든지 저 붉은 물결 속에 함께 어울리련만, 이제는 그럴 용기가 없어진 자신의 모습을 아쉬워하면서.
전반전에 한 골, 후반전에 한 골, 2:0 승리는 2002년 폴란드전을 다시 보는듯하여 뭔가 심상찮은 예감으로 몸을 떨게 합니다. 이러다 대한민국, 이번에도 진짜 뭔 일내는 거 아냐? 친구의 말처럼 정말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아마 어쩌면 2002년 그 비싼 암표를 사 대구 월드컵 경기장에 들어갔던 저도 폴란드전 승리로 고무되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2010년 6월 17일, 뭔가 심상찮은 예감이 꼭 실현될까요? 3:1로 대한민국 승리!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요. 꼭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3:0이라 하지 않고 굳이 3:1이라 한 것은 그래도 리오넬 메시 선수를 영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 막아도 한 골 정도는 내 줄 수밖에 없겠지요.
아무튼 대한민국 3:1 승!! 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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