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길이 설화를 안은 까닭을 대길의 눈물에서 보다
대길이가 마침내 죽은 줄만 알았던 최장군과 왕손이를 만났습니다. 좀체 눈물을 보이지 않는 대길의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합니다. 그런 대길을 보며 '참 마음이 여린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대길은 실로 마음이 여린 사람입니다. 아마도 그렇게 마음이 여린 사람이 아니었다면 10년 가까운 세월 언년이를 찾아 헤매지도 못했을 겁니다.
최장군과 왕손이를 만나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는 이대길
대길의 노비에 대한 연민은 언년이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나온 것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사람이란 말이 있지요. 마음이 차가운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어쩌면 그런 사람에겐 몸속에 피도 흐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말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요? 아무튼 대길은 몸 안에 뜨거운 피가 흐르는 사람입니다. 업복이는 그를 짐승이라고 생각하며 반드시 죽이겠다고 결심 또 결심을 하지만, 대길이야말로 노비에 대한 뜨거운 연민을 가진 사람이죠.
그는 언젠가 송태하에게 이런 식으로 말을 했습니다. "세상을 바꾸겠다고? 네가 혁명을 해 새 왕을 세워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겠다고? 가장 아끼는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면서 누가 누구를 구한단 말이냐!" 대길은 오로지 언년이에게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주고 싶은 일념에 높은 벼슬을 해 세상을 바꾸겠다는 포부를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의 혁명관은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대길이가 바꾸겠다고 한 세상은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는 세상입니다. 노비도 양반도 없는 세상, 모든 사람이 더불어 행복하게 잘 사는 세상, 그런 세상이 대길이가 꿈꾸었던 세상입니다. 대길이가 그런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것은 바로 언년이 때문입니다. 그런 세상을 만들지 않고서는 언년이와 영원히 살 수 없기 때문이죠.
언년이의 씨다른 오라비인 큰놈이(대길의 배다른 형이기도 하다니 운명 참 얄궂죠)가 집에 불을 질러 자기 아버지와 가족들을 모두 죽이고 도망을 간 이후에 대길의 목표는 오직 한 가지 언년이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추노꾼이 된 것도 그것 때문이었죠. 처음에 많은 사람들이 대길이가 언년이를 찾아 어떻게 할 것인지 궁금해 했지요. "대길이의 목표는 사랑에서 나온 것일까, 증오에서 나온 것일까?" 하고 말입니다.
대길이 설화를 끌어안은 까닭은?
결국 결론은 변하지 않는 대길의 사랑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대길이가 언년이를 찾아 헤맨 것은 원수를 갚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증오심이 아니라 변함없는 사랑이 대길을 추노꾼의 세계에 뛰어들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대길이가 자기 얼굴에 낫자국을 남긴 큰놈이를 찾았을 때도 그이 가장 큰 관심은 언년이의 행방이었지요.
대길에게 언년이는 인생의 목표였던 셈입니다. 그런 대길이 언년이가 보는 앞에서 설화를 끌어안았습니다. 아시다시피 대길의 마음에 설화가 들어올 자리는 없습니다. 설화의 간절한 구애에도 불구하고 대길의 마음은 얼음장처럼 차갑기만 합니다. 그런 대길의 마음을 잘 아는 설화는 그래서 더욱 대길을 연모하는 마음이 깊어만 갑니다.
설화는 매우 단순하게 살아온 여잡니다. 그녀는 어려서 사당패에 팔려가 산전수전 다 겪으며 살아온 탓에 많은 생각을 하는 것은 자기 몸만 고될 뿐이란 사실을 일찍이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밥 먹고 자는 것 외에는 생각하지 않기로 작정한 듯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실제로 먹고 자는 것 말고는 별로 생각이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녀가 대길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도 살펴보면 매우 단순하고 무식합니다. 주변 환경이나 조건, 상황 따위는 안중에 두지 않습니다. 때로는 그녀의 맹목적인 사랑 때문에 대길 패거리가 위험해지지 않을까 몹시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그녀가 서울 저자의 주막으로 찾아가 대길의 행방을 묻다가 월악산 짝귀를 생각해냈을 때, "아이구 큰일 났구나" 했지만 아직 큰 탈은 생기지 않았습니다.
대길의 사랑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헌신하는 것
결국 설화는 주막 큰주모에게 말을 빌려 월악산으로 왔고 대길을 보자 반가운 마음에 대뜸 달려들어 품에 안깁니다. 그런 설화를 멀뚱히 내려다보던 대길이 돌연 설화를 끌어당겨 안았습니다. 그만 떨어지려던 설화의 기쁨은 이만저만이 아니었겠죠. '앗, 이 오라버니가 웬일이람?' 그러나 대길의 그런 행동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언년이(또는 김혜원)이 쳐다보자 일부러 설화를 끌어안는 이대길
바로 지척에서 밥을 지으려고 준비하던 언년이가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지요. 대길이가 설화를 끌어안은 것은 언년이를 의식한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토록 찾아 헤매던 언년이를 이제 겨우 만났는데 왜 대길은 언년이 앞에서 설화를 끌어안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을까요? 이미 여러분도 모두 잘 알고 계시지요. 그것은 사랑 때문이란 것을.
대길의 사랑은 지배하거나 소유하는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언년이가 진정 행복해지기를 바랍니다. 그의 사랑의 목표는 언년이가 안돈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되는 것입니다. 이미 송태하와 혼례를 치른 언년이에게 대길은 다른 여인을 끌어안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에 대한 마음을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던 것이지요.
얼마나 지고한 사랑입니까. 그런데 저는 대길의 순수하고 고귀한 마음을 최장군과 왕손이를 만나 흘리던 눈물에서도 보았던 것입니다. 언년이를 찾기 위해 추노꾼이 된 대길에게 최장군과 왕손이는 가족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8년을 고락을 함께 했습니다. 겉으로는 퉁명스럽게 대하지만 대길의 최장군과 왕손이를 향한 마음은 깊고 넓은 바다와 같습니다.
대길의 눈물에 담긴 유토피아는 사랑에서 나온 것
언년이와 함께 반상의 구분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 행복하게 살고 싶었던 대길은 최장군과 왕손이게도 똑같은 생각을 합니다. 그는 언젠가는 추노질을 그만두고 조용한 곳에 집을 짓고 최장군, 왕손이와 더불어 안돈해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추노질을 해 번 돈의 상당부분을 빼돌려 저축을 했고 그 돈으로 이천에 땅을 사두었던 것입니다.
지금 그 땅에는 최장군과 자신의 집 그리고 왕손이가 운영할 여각이 지어지고 있는 중입니다. 말하자면, 대길이 꿈꾸고 있는 세상, 작지만 대길의 유토피아가 이천에 건설되고 있는 중이지요. 대길의 꿈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떠올렸습니다. 오래 전 유럽에도 대길이처럼 유토피아를 꿈꾸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들은 실제로 미국에 건너가 공동체를 만들기도 했었다고 하지요.
어쨌든 대길은 자기가 만들 유토피아의 주요한 시민들인 장군이와 왕손이가 죽어버렸다고 생각하고 크게 상심했을 것입니다. 아니 상심이 아니라 거의 절망에 가까운 충격을 받았을 테지요. 그런 최장군과 왕손이가 살아있는 걸 보았으니 대길의 기쁨은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겁니다. 야차 같기만 하던 그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모습은 실로 감동적이었습니다.
세 사람이 만나 회포를 푸는 장면을 보며 감동을 받지 않은 사람이 있었을까요? <추노>가 20부를 뛰어오는 동안에 가장 뿌듯한 장면이었습니다. 이산가족 상봉도 이렇게 기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세 사람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었지요. "아, 저들의 유토피아가 깨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마지막은 저들이 모두 이천으로 가서 행복하게 사는 걸로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
제발 살려주었으면...
이런 희망은 저만 가진 것일까요? 아닐 겁니다. <추노>를 좋아하는 모든 분들의 공통된 희망이리라 확신합니다. 언년이가 그 유토피아에 합류하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세 사람만이라도, 아니 설화까지 더해서 네 사람만이라도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자면 대길이도, 장군이도, 왕손이도, 아무도 죽으면 안 되는데요.
아~, 작가님. 제발 살려주세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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