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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야기

폭설에 묻힌 춘삼월 만날재의 하얀 사진들

엊그제 밤, 겨울에도 볼 수 없었던 비바람 소리가 윙~ 윙~ 창문을 흔들었습니다. 찬바람이 방안으로 스며들며 떠난 줄 알았던 추위를 다시 몰고 왔습니다. 발이 시리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오죽했을까요. 그리고 두어 시간 후에 다시 현관문을 열고 밖을 내다봤더니 비바람이 눈바람으로 바뀌고 있었습니다.

정원수 너머 어둠에 묻힌 지붕위에 하얗게 눈이 쌓이고 있는 게 보이실 겁니다. 강풍에 실려 온 눈보라가 마치 우리 동네를 북국에 실어놓은 게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였답니다.


플래시를 켜고 찍으니 눈송이가 내려오는 게 보이시죠?


다음날 아침, 세상이 하얗게 변했습니다.
아직 눈보라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겨울보다 훨씬 더 춥게 느껴집니다. 이렇게 추운 겨울은 느껴보지 못했습니다. 그것도 춘삼월에 눈보라를 동반한 강추위를 맛보게 되다니... 그래도 눈을 처음 본 딸아이는 마냥 즐겁습니다.


우리 집 옥상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출근시간인데도 차들이 한 대도 나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오후에 살펴보니 딱 한 대가 나갔더군요. 누군지 몰라도 대단히 용감한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 옆은 우리 집 마당에서 눈사람을 만들고 있는 딸아입니다.

학교에 오지 말라는 문자를 받고 신이 난 딸아이와 함께 만날재에 올랐습니다.  마산만이 보이는군요.
이날만큼은 마산만도 매우 아름답습니다.


만날재 공원에서 우선 사진부터 한 컷. 
그런데 색깔이 이상하군요. 
3인치 모니터 창에 비친 그림도 너무 하얀색이라 눈 때문에 그런가 했는데, 집에서 뽑아보니 영 색감이 아니군요.   


계속 하얗습니다. 저 멀리 마산만의 푸른 물결과 창원, 진해를 가르는 하얀 머리의 산줄기가 보여야 하지만 그저 하얀 도화지 위에 딸아이와 소나무만 덩그러니 그려진 느낌이네요.


음, 여기선 은근하게 배경이 보이는군요. 역시 하얀 눈의 빛깔이 너무 강렬하기 때문일까요?  


빨간 나뭇잎이 너무 곱습니다. 눈속에서 보니 붉은 색이 더 붉어 보이더군요. 나무 이름은 제가 모릅니다. 
저는 고구마 줄기와 담쟁이 넝쿨을 잘 구분 못한답니다. 

한 번은 그런 일이 있었지요. 서울 종로에 갔을 때 도로변에 단지(화분인데 보통단지보다 훨씬 크더군요) 비슷한 것에 심어놓은 식물을 가리키며 한 일행이 물었습니다. 
"니 저기 뭔지 아나?" 물론 그는 저를 잘 아는 사람입니다. 짓궂은 장난이 하고 싶었던 게지요. 
한참을 망설이던 제가 자신 없이 대답했습니다. 
"담쟁이 넝쿨 아닙니까?" 
그러자 사람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앙천대소를 하며 말했습니다. 
"하하하하~ 그럴 줄 알았다. 이기 어떻게 담쟁이 넝쿨이냐, 고구마 줄기지." 

사실 저는 담쟁이 넝쿨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릅니다. 단지 '마지막 잎새'에 나오는 담쟁이 넝쿨이 그때 생각났을 뿐이죠.   


이날은 평일인데도 유난히 등산객이 많았습니다.


만날재 공원에 심어진 조경숩니다. 역시 나무 이름은 모릅니다.


그 이름 모를 나무 앞에 딸아이가 포즈를 취했습니다.
눈밭을 굴러다니던 딸아이가 잠깐 저를 위해 포즈를 취해주었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색깔이 너무 이상합니다.
그래서 카메라를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글쎄 이럴 수가….
노출레벨을 가장 오른쪽에 맞추어 놓았군요. 누가 그랬을까요?
저는 원래 이런 거 손 안대는 편인데, 틀림없이 아들 녀석입니다.
이 녀석은 뭐든 손에 쥐면 가만 놔두는 법이 없거든요.

아무튼 레벨을 다시 가운데로 맞추고 다시 찍었습니다.
이제 제대로 나오는군요.
아뿔싸~, 어쩐지 눈사람 윤곽이 희미하더라니.


에혀~ 눈사람을 눈 속에 파묻은 꼴이 되었네요. 그러나 어쨌든 눈 구경은 실컷 하셨지요? 만날재에 올라가니 도심에서 만난 눈과는 질이 달랐답니다. 발목까지 푹푹 빠지도록 쌓인 눈밭 그리고 아무도 밟지 않은 그 눈밭에서 뒹구는 재미란… 겪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그런 경지라고 할 수 있겠죠.

우리 딸아이는 10년 만에, 정확히는 8년하고 4개월 만에 처음 보는 눈이었습니다. 혹시 어디서 눈을 봤을지는 모르겠는데, 마산에서는 처음 보는 눈이었답니다. 제게도 물어보더군요.

"아빠도 눈사람 오늘 처음 만들어보나?"
"그래."
"아, 그렇구나. 아빠도 그럼 눈 처음 본 거야?" 
"아니지, 아빠 어릴 땐 눈이 엄청 많이 왔었지." 
"그런데 왜 처음 만들어 봤다고 했어?" 
"아, 마산 와서는 처음이란 말이었어." 
"아, 그랬구나. 아빠 어릴 땐 정말 눈이 많이 왔어?" 
"그랬지. 정말 많이 왔었단다. 네 키만큼 눈이 쌓이고 그랬지. 정말 솜사탕만한 눈송이가 하늘에서 떨어지고 그랬지." 

그렇게 말해놓고 생각해보니 제가 어릴 땐 정말 그렇게 생각했었군요. 하늘에서 마술할멈이 솜으로 만든 눈송이를 뿌린다고 말입니다. 평소에 열심히 솜으로 눈송이를 만들어 모아두었다가 기분이 좋을 때 땅위로 뿌리는 거지요. 그러면 하늘하늘 눈송이가 푸른빛을 내며 내려온답니다.

그럼 엊그제 밤처럼 눈보라가 몰아칠 때는 마술할멈의 기분이 매우 안 좋을 땐가 보지요? 아무튼 기분 좋은 하루였습니다. 언제 다시 이런 날이 올 수 있을지…, 자주 왔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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