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에서 갈매기도 보고, 마지막으로 청사포도 구경하고…
2010년 2월 17일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졸업식이 있던 날입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졸업이라니. 졸업식은 입학식을 하던 바로 그 장소에서 치러졌습니다. 6년 전 입학식이 있던 날에는 아들녀석이 왜 그리 안쓰럽던지, 부모 품을 떠나 혼자 살아갈 준비를 해야 하는 녀석을 보며 기쁨보다는 왠지 불쌍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었지요.
그러나 6년 후 같은 장소에서 치러지는 졸업식장에서는 이번엔 반대의 감정으로 인해 슬퍼졌답니다. 얄미울 정도로 천방지축이 된 아들녀석에 비해 제가 훨씬 초라하고 불쌍해보였기 때문입니다. 6년 전만 해도 세상 무서울 것이 없는 젊은이였던 제가 이제는 머리털도 많이 빠지고 몸에는 비계가 늘어 볼품 없는, 그야말로 보잘 것 없는 중년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마지막 대학을 졸업할 때쯤이면 중년이 아니라 중늙은이가 되어 있겠지요. 인생무상이라더니, 남들은 다 기뻐서 웃고 떠들고 난린데 저는 왜 이런 기분이 들었을까요? 확실히 감상적인 인물이라 남다른데가 있습니다. 흠흠~, 아무튼 아들녀석은 그렇게 초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광안대교. 갈때는 아래층으로 올때는 위층으로 달린다.
"다른 애들은 대부분 행동발달상이고 과학탐구상은 두 명만 주는 거다." "그럼 국어탐구상 같은 것도 있을 거 아니냐? 수학탐구상도 있을 테고." 그러자 아들녀석은 기분 잡쳤다는 듯이 "에이, 몰라" 하면서 더이상 말을 안 하더군요. 그냥 잘했다, 수고했다 그러고 말 걸 하는 후회가 일었지만 '내가 뭐 예수님도 아니고 부처님도 아닌데' 하고 생각하며 그냥 넘어갔습니다.
졸업식장에는 아내의 대학선배도 참석했습니다. 마침 이날 휴가를 빼고 부산 센텀시티에 있는 어느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를 같이 보기 위해 전화했다가 합류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 영화의 제목은 <위대한 침묵>이었는데 이날 딱 한 번만 상영하는 그야말로 희귀한 영화였답니다. 상영시작 시간은 오후 1시.
그런데 졸업식을 끝내고 반으로 들어간 아이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졸업생들에게 일일이 졸업장을 나누어주는 통에―매우 고마운 일이었지만―졸업식도 평소에 비해 엄청 많은 시간이 소모되었던 터라 기다리는 시간은 더욱 지루했습니다. 추운 날씨에 떨면서 아이들을 기다리던 부모들의 입에서 불평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청사포 등대(아들사진)
"뭔 할 말이 그렇게 많아?"
"아니 졸업식 하기 전에 미리 할말이나 필요한 일들은 다 끝냈어야지."
"와~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남을 배려하라고 가르치면서 왜 정작 자기들은 부모들 배려를 하나도 안 하는 거야? 이렇게 추운데 세워놓고서는."
모두들 일리 있는 말씀이었습니다만, 아이들과 헤어지는 선생님의 입장을 생각해보면 그것도 아닌 게지요. 그러나 당장 1시 전에 부산 수영 센텀시티에 도착해야 하는 우리로서는 불만이 더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튼 아이는 11시 45분께 나왔고, 부랴부랴 기념사진 몇 장 찍고, 곧바로 부산으로 내달렸습니다.
<위대한 침묵>은 유럽의 어느 수도원(트라피스트계 수도원이라고 했습니다)을 한 영화감독이 무려 16년을 기다려 찍은 영화라고 했습니다. 수도원 측이 영화 찍는 것을 허용하고 문을 열어주는데 16년이 걸렸다는 이야기지요. 사실 저는 이 영화를 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직접 영화를 봤다면, 정말 자세하게 소개하고 싶은 그런 영화였지만 말입니다.
우리가 부산 동서고가도로와 광안대교를 지나 센텀시티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이미 1시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안해낸 방법이 그거였습니다. "차를 길에다 세우고 민이 엄마하고 나는 잽싸게 뛰어서 영화보러 가는 거야. 그럼 민이 아빠는 애들 데리고 다른데 가서 놀던지 하는 거지. 오케이?" 요약하면, 저더러 영화보지 말라는 이야기였지요.
나중에 장장 2시간 40분 동안 상영하는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저는 "아니 그게 바로 내가 봐야하는 영화였단 말이에요" 하고 장탄식을 하고 말았습니다. 영화는 2시간 40분 내내 대사가 한마디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닌데, 없었다고 무시해도 좋을 그런 수준이었답니다. 하얀 눈에 포위된 수도원에서 울려퍼지는 라틴 성가소리, 아~, 완전 내 스타일인데….
두 여자가 영화를 보러 간 사이 어디로 갈까 고민하던 우리는 레스토랑에 가서 파스타를 먹기로 했습니다. 요즘 파스타가 유행이지요. MBC에서 하는 월화드라마 <파스타>, 정말 달콤하고 맛있는 드라마 덕에 저도 파스타가 스파게티인 것을 알았답니다. 아니 스파게티가 파스타의 일종인가요? 아무튼 너무 깊은 것은 따지지 말기로 하고요.
부산 해운대 풍경. 글라이더를 날리는 사람들과 장구(북인가?) 치는 사람들 모습이 참 아름답죠? (아들사진)
일단 해운대 달맞이고개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파스타를 파는 레스토랑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돌아다녔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해운대로 내려와 몇바퀴를 돌았지만, 안 보이더군요. 그런데 아들녀석이 "앗, 방금 정통 이태리식당 지났다" 하고 외치는군요. 그래서 다시 한바퀴 돌았더니 역시 정통 이태리식당이 있긴 있네요. 그런데 이런~.
무슨 호텔 3층에 있군요.(나중에 알고보니 시클라우드 호텔이었음)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내내 마음이 불안합니다. 그러고 보니 "정통 이태리식당"이란 말을 귀담아 듣지 않은 데 대한 후회도 밀려옵니다. 그 '정통'이란 용어에 주의를 했어야 하는데. 2층 식당 이름이 <VIPS>입니다. 슬쩍 곁눈질로 살펴보니 어린이용 특선 뭐뭐라 적어놓고 가격이 할인해서 8만 7천 원이랍니다. 어이쿠~.
우리가 가는 식당은 3층 정통 이태리식당, 이름이 <벨라 치타>라고 되어 있습니다. 벨라 치타, 친숙한 이름이네요. 벨라 차오란 제가 특히 좋아하는 노래 제목과 이름이 비슷합니다. 벨라 차오는 '안녕, 예쁜 아가씨'란 뜻이라던데 벨라 치타는 무슨 뜻일까요? 어쨌든 이름 때문에 밀려들던 불안감도 눈녹듯 사라졌습니다. 들어서니 역시 분위기가 예사가 아니네요. 헐~ 내가 이런 델 다.
벨라 치타. 창문 너머로 망망대해가 보인다. 감도와 조리개값을 높였다면 파란 태평양을 보여드리는 건데... 초보탓.
아무튼 오늘의 주인공은 아들녀석입니다. 녀석은 늘 정통 파스타를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습니다. 심저어 저더러 파스타 재료를 사다주면 자기가 파스타를 만들어주겠다고 하던 녀석입니다. 파스타를 만들 때는 고급 와인을 써야 한다나요? 그래서 제가 그랬었죠. "야, 이놈아. 내 입에 들어갈 고급 와인도 없는데, 재료로 쓸 와인이 어디 있냐?"
아무튼 녀석은 이날 무척 기분이 좋았습니다. 녀석이 시킨 파스타는 모짜렐라 스파게티라고 부른 건데 메뉴판을 보니 이렇게 적혀 있더군요. '무슨 재료와 무슨 재료와 무슨재료 그리고 또 무슨 무슨 재료들로 맛을 내고 어쩌구 한 스파게티' 이름이 하도 길어서 저는 그게 무언지 몰랐는데 나중에 아들에게 물어보니 모짜렐라 스파게티였다고 하더군요.
역시 아이들은 스폰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금방 배우죠. 우린 아무리 애를 써도 이해하기 힘든 것들을 아이들은 금방 배웁니다. 문화를 흡수하는 힘이 우리보다 백배 천배는 뛰어나다는 생각이 순간 들었었답니다, 슬픔과 함께. 아무튼 저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게 가격이 2만 1천원(부가세 별도)이었거든요. 순간 속으로 '후유~' 한숨을 내쉬며 호기롭게 아들에게 말했죠.
"야, 이거보다 더 맛있는 것도 많잖아. 꼭 이거 먹을래? 봉골레도 있네. 이건 어때?" 저도 요즘 연속극 <파스타>에서 공효진과 이선균에게 배운 게 좀 있는 터라 "봉골레는 어때?" 하면서 좀 아는 체도 하는 여유를 부려봤답니다. 흐흐~. 그러나 아들녀석은 뭔가 심오하게 아는 게 있다는 듯이 그러는군요. "아니, 이게 좋아. 이걸로 할래."
게다가 더 기분 좋은 일은 딸아이는 9900원짜리 피자를 시켰다는 겁니다. 저는 딸에게도 "얘, 너도 오빠처럼 파스타 먹어. 파스타 맛있잖아." 그러나 딸아이는 아직 파스타에 대한 신뢰를 할 수 없다는 듯이 자기가 잘 아는 피자를 먹겠다고 고집해서 결국 피자를 시켰습니다. 물론 저는 속으로 만세를 불렀고, 나중에 딸아이는 후회했습니다.
"아빠, 오빠야 파스타 정말 맛있더라. 담엔 나도 그거 먹을래."
배가 부르니 녀석들이 많이 친해졌습니다.
뜻하지 않게(!) 정통 이태리식당에서 고급 파스타를 맛본 두 녀석은 기분도 좋아졌을 뿐 아니라 매우 친밀해졌습니다. 원래 서로 앙숙이라 이렇게 가까이 붙어 다정하게 있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가 쉽지 않은데 이날은 아주 자연스럽군요. 역시 민주주의나 평화 뭐 이런 게 달성되려면 먼저 배가 불러야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아래 사진을 보시면 해운대 백사정 멀리 끄트머리에 조선비치호텔이 보입니다. 제가 이곳 해운대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무렵에는 저 건물이 가장 큰 건물이었습니다. 해운대 어디서든 조선비치호텔과 동백섬이 선명하게 보였었지요. 그러나 이제 아닙니다. 주변의 웅장한 마천루들에 가려 조선비치와 동백섬은 너무나 초라해지고 말았더군요.
아래 오른쪽 사진의 거대한 건물들이 서있는 자리 오른편으로는 원래 송림이 있었습니다. 고교시절, 이 송림에 비둘기집을 만들어 달던 기억이 나는군요. 물론 선생님이 시켜서 했던 일이지만, 재미있었지요. 그런데 이제 송림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웅장한 건물들이 대신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센텀시티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도시는 강남이나 분당보다도 더 대단하다는군요.
(아들사진) 이 글을 쓰는 중에 녀석이 나타나서 "내가 찍은 사진은 저작권 확실히 표기해라"고 해서... ㅎㅎㅎ
다시 두 여자를 내려주었던 곳으로 돌아오니 딱 시간이 맞습니다. 2시간 40분이 지났습니다. "영화는 재미있었어요?" "아, 정말 감동적인 영화였어요. 그런데 말이 한마디도 없어서 보통 사람들은 보기가 쉽지는 않을 거 같애. 우리도 잠깐 잠깐 졸았다고요. 아니 수도자들이 가만히 앉아 묵상하는 장면이 한참 나오는데 안 졸 수가 있어야지. 하하."
"하얗게 눈내린 수도원, 나무들, 조용한 라틴 성가, 오르간 소리, 기도소리, 아~." 이런, 사람 염장 지르는 것도 아니고 그게 바로 딱 내 취향인데. 아무튼 재미있었다니 다행입니다. 어디로 갈까 고민하던 우리는 해운대를 몇바퀴 또 돌다가, "고마 경치 좋은 데 가서 밥 먹자" 결론 내리고 달맞이고개를 넘어 청사포로 갔습니다.
거기 유명한 밥집이 있다는군요. 아래 사진에 보시는 집입니다. 분위기는 벨라 치타와는 완전 딴판이었습니다. "그래 나한테는 역시 이런 집이 딱 어울리지." 마치 고향집에 온 느낌이 들더군요. 벨라 치타에서는 식탁에 뭘 흘리기라도 할까 조심조심 해야 했었지만, 여기선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아, 역시 자유는 좋은 것이여. 흐흐~
커다란 소나무를 앞에 둔 집이 우리가 장어구이를 먹은 수민이네.
자, 이상으로 아들 졸업식날 이야기는 끝났습니다. 여기서 배불리 먹고 마시고 그리고 모두들 집으로 갔습니다. 물론 저는 소주를 한 잔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못했습니다" 라고 하는 게 더 정직한 표현이겠죠? 어쨌든 두 여자는 술을 마시지 않는 제 모습이 무척 좋아보였나 봅니다. "민이 아빠 술 안 마시는 꼴을 보니 오늘 내가 기분이 엄청 좋다." "??? !!!"
(아들사진)
아래 사진들은 배가 불러 기분 좋은 녀석들이 어른들이 장어구이를 안주로 소주를 먹고 있을 동안에 식당 앞 바닷가에 나가 풍경을 찍은 사진들입니다. 물론 아들녀석이 찍었습니다. 장비는 캐논 450d. 한 번쯤 가볼만한 곳이었습니다. 주변에 횟집도 많았습니다. 저녁 노을이 질 무렵의 조용한 풍광이 참 마음에 드는 곳이었습니다.
청사포란 이름도 참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럼 이만…, 안녕히.
(아들사진) 맨아래 숯불은 식탁 밑에 있던 것임. 발밑이 뜨뜻해서 깜짝 놀랐음. 이것도 아이가 찍었더군요. 기특하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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