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노'속 소현세자 죽음의 원인은 독살? 그럼 독살의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독살설이 맞다면, 그 결론이 추악한 욕망에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추노>의 시대적 배경은 인조시대를 다루고 있습니다. 인조가 통치하던 조선은 격동기였습니다. 두 차례의 왜란에 이어 다시 두 차례의 호란을 겪은 나라는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습니다. 사회는 혼란에 빠지고 노비가 급증하면서 도망가는 노비도 늘어났습니다. 추노질이 돈벌이의 한 수단이 되었다는 것은 당시 사회의 혼란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인조반정은 광해군의 실리노선에 대한 근본주의의 도전
이처럼 하층사회만 소용돌이에 빠진 것은 아닙니다. 양반사회의 당쟁은 권력암투로 날이 새고 날이 졌습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인조가 등장한 것입니다. 선조가 죽고 등극한 왕은 광해군이었습니다. 광해군은 매우 총명한 왕이었다고 전해집니다. 물론 정사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광해군이 매우 영특했었다는 것은 사실인 듯싶습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이후 스러져가는 명과 신흥 강대국 청 사이에서 실리외교를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실리외교는 성리학에 물든 조선 유학자들의 눈으로 볼 때는 오랑캐에 굴복하는 굴욕외교였을 것입니다. 동인의 일파인 북인세력이 광해군과 함께 친청외교를 주도하자 이를 빌미로 대북파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결집했습니다.
그들은 인조를 옹립하고 광해군을 몰아내는 반정에 성공했습니다. 역사는 늘 온건파보다는 강경파가 득세하는 모습을 보여주곤 합니다. 이때도 그랬습니다. 광해군을 강화도로 유배시킨 반정파들은 즉시 명에 의리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청과의 외교를 단절하는 친명배금정책을 취했습니다. 이 반정으로 정인홍을 비롯한 대북파들이 몰락했고, 이후 남명 조식 선생의 문하들은 씨가 말랐지요.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세력은 훗날 흥선대원군이 등장하기까지 무려 250여 년에 걸쳐 오랜 세월 집권합니다. 물론 중간에 남인이 정권을 잡은 경우도 있지만 아주 짧은 세월로 그렇게 유념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서인은 나중에 노론으로 이름이 바뀌고 이 노론에 소외당한 소수의 서인 일파들을 일러 소론이라 불렀지요.
인조의 콤플렉스와 소현세자의 의문의 죽음
인조가 정권을 잡은 것은 표면상으로는 실리주의 외교에 대한 단죄와 같은 것이었으므로 이후 조선은 급격하게 성리학 근본주의로 나가게 됩니다. 근본주의 하니까 갑자기 이슬람이 생각나십니까? 맞습니다. 극단적 반미주의와 극단적 반청주의는 시대는 달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근본주의는 정치적으로는 폐쇄적 패권주의, 독재로 이어지는 것이 필연입니다.
결국 인조의 반청주의는 두 차례의 전란의 소용돌이로 조선을 밀어 넣게 됩니다. 그리고 그 끝은 삼전도에서 인조가 청 태종에게 세 번 큰 절 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궤구고두의 예를 올리는 치욕을 당하게 됩니다. 아마도 인조는 신하들 앞에서 당한 이 치욕을 죽는 순간까지도 잊을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던 세자 소현이 원수의 나라 청나라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도 모자라 그들의 문물을 선진문물이라고 말하며 배워야 한다고 합니다. 일국의 왕이기 전에 나약한 한 인간에 불과한 인조의 분노가 어떠했을지 보지 않아도 짐작이 갑니다. 자신의 대를 이을 장남이 원수들과 시시덕거리는 모습을 보는 것은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겠지요.
소현세자는 청나라에서 돌아온 지 불과 두 달 만에 죽었습니다. 학질에 걸렸다고 했지만, 인조실록에 의하면 시신이 온통 검은 빛이고 아홉 구멍에서 피가 흘러나와 곁에 있는 사람도 얼굴을 분별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소현세자의 독살설을 뒷받침하는 유력한 증거가 기록된 셈입니다.
물론 소현세자가 독살된 게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오랜 볼모생활로 인한 피로의 누적과 국내로 돌아온 후의 정치적 갈등으로 인환 화병 등이 겹쳐 병사했을 수도 있지요. 그러나 귀국한 지 불과 두 달 만에 병을 얻고 사흘 만에 죽었다는 것은 누구라도 납득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더욱이 소현세자의 검은 시신은 독살 의혹을 강한 어조로 주장합니다.
소현세자가 청에서 들고 온 선진문물은
권력자들에겐 환영할 수 없는 위협적 존재
게다가 소현세자가 청으로부터 돌아올 때 들여온 문물들은 성리학을 떠받드는 조선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들이었습니다. 특히 독일인 주교 아담 샬로부터 선물 받은 천주교 서적들과 지구의, 천문관련 서적들을 조선 조정에서는 도저히 환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소현세자는 집권당인 서인세력과 인조에게는 권력을 위협하는 존재였던 것이지요.
<추노>는 소현세자 독살의 배후를 확실하게 인조로 지목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소현세자가 그의 오랜 친구인 송태하에게 보내는 편지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소현세자는 송태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에게 이 편지가 전달될 때쯤이면 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자신이 독살될 것을 알고 있다는 뉘앙스가 강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자신이 독살될 것을 이미 알고 있다? 도대체 누가 일국의 2인자요 차기 국왕을 죽일 계략을 꾸미고 있으며 그걸 세자 자신이 알고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고 그저 죽을 날만 기다리며 송태하에게 후일을 기약하는 편지만을 남기고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자기를 죽이려는 자가 다름 아닌 조선의 1인자, 곧 국왕인 인조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증언하는 게 아니었을까요? 학질에 걸려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이 편지가 그대에게 전해질 때쯤이면 나는 이미 죽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자기 아내와 아이들의 생사를 걱정하며 후사를 부탁했다는 것은 단순한 병사가 아님을 말합니다.
소현세자의 죽음이 원인 된
피비린내 나는 1, 2차 예송논쟁
그리고 소현세자가 죽은 다음 세자빈 강씨는 인조를 독살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세 아들 중 두 아들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오직 하나 남은 소현세자의 아들 이석견은 천운으로 살아남게 되는데 <추노>는 인조의 한마디로 석견이 살아남았음을 암시해주는 장면을 삽입했습니다.
"참으로 가엾은 아이가 아닌가."
좌의정 이경식 일파가 반대파들을 숙청할 목적으로 '역병으로 죽어가는 제주도민들 속에 홀로 선 어린 이석견'의 그림을 만들어 은밀히 돌렸는데 그걸 살펴보던 인조가 던진 말입니다. 제게 이 말은 역설적으로 하나 남은 소현세자의 아들 원손 석견만은 살려주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아무튼 소현세자의 죽음은 훗날 두 차례에 걸친 예송논쟁을 일으키며 피비린내 나는 당쟁의 원인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기해예송과 갑인예송으로 불리는 자의대비가 상복을 어떻게 얼마나 입어야 할 것인가에 관한 논쟁은 당파싸움의 폐단을 설명하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로 보면 예송논쟁은 대단히 중요한 정치투쟁이었지요.
바로 인조를 이은 효종 그리고 현종, 숙종의 정통성과 관련한 문제였으니까요. 이 쟁투의 주연으로 말하자면 그 유명한 송시열이죠. 송시열은 기호학파들에게는 위대한 유학자였지만, 영남과 호남의 유림들에게는 악마와 같은 존재였을 겁니다. 그래서 영호남의 선비들은 대문 앞에 송시열의 이름을 그려놓고 밟고 다녔다고 합니다.
모든 당파투쟁의 시작과 끝은 배타적 이데올로기와 부정부패
심지어 집에서 키우는 개 이름을 시열이라 지어놓고 개를 볼 때마다 "시열이 이놈의 똥개새끼" 하면서 욕을 했다고 하니 그 증오심이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이 갑니다. 우리는 보통 조선시대에 호남이 차별 받은 건 기억하면서도, 이유는 모르겠지만 영남 역시 똑같이 차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선 잘 모릅니다.
각설하고, 소현세자의 죽음이 어떻게 조선시대 당파투쟁의 절정을 보여준 2차에 걸친 예송논쟁의 불씨가 되었다는 것인지에 대해선 다음 기회에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어쨌든 우리가 <추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어떤 당파투쟁도 처음엔 이념이 중요했지만, 이게 나아가면 패권주의로 다시 이기적 욕망으로 변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4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유일적이고 배타적인 이념이 패권주의를 낳고, 이 패권주의는 독재가 독버섯처럼 자라는 토양이며, 독버섯처럼 자란 독재의 그늘에선 늘 부정과 부패가 판치는 것을 우리는 익히 보아왔던 터입니다. 그러므로 <추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먼 옛날 사람들이 아닌 게지요.
다시 한 번 <추노> 제작진의 기획의도의 마지막 문장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다음에 뵙죠. 아, 제목으로 낸 문제의 답을 말하지 않았군요. 제가 생각하는 답은 이렇습니다. 당연히 정답은 아닙니다.
"소현세자를 죽인 것은 인조의 콤플렉스(어심)를 이용한 이경식 일파의 추악한 욕망이다.
이 욕망은 근본주의란 음지에서 태어났으며, 좌의정 이경식의 말처럼 '어심'을 먹으며 자랐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죽음은 향후 백 년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당파싸움의 원인을 제공한다."
알 수 없다. 그러나 독살설이 맞다면, 그 결론이 추악한 욕망에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추노>의 시대적 배경은 인조시대를 다루고 있습니다. 인조가 통치하던 조선은 격동기였습니다. 두 차례의 왜란에 이어 다시 두 차례의 호란을 겪은 나라는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습니다. 사회는 혼란에 빠지고 노비가 급증하면서 도망가는 노비도 늘어났습니다. 추노질이 돈벌이의 한 수단이 되었다는 것은 당시 사회의 혼란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인조반정은 광해군의 실리노선에 대한 근본주의의 도전
이처럼 하층사회만 소용돌이에 빠진 것은 아닙니다. 양반사회의 당쟁은 권력암투로 날이 새고 날이 졌습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인조가 등장한 것입니다. 선조가 죽고 등극한 왕은 광해군이었습니다. 광해군은 매우 총명한 왕이었다고 전해집니다. 물론 정사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광해군이 매우 영특했었다는 것은 사실인 듯싶습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이후 스러져가는 명과 신흥 강대국 청 사이에서 실리외교를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실리외교는 성리학에 물든 조선 유학자들의 눈으로 볼 때는 오랑캐에 굴복하는 굴욕외교였을 것입니다. 동인의 일파인 북인세력이 광해군과 함께 친청외교를 주도하자 이를 빌미로 대북파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결집했습니다.
그들은 인조를 옹립하고 광해군을 몰아내는 반정에 성공했습니다. 역사는 늘 온건파보다는 강경파가 득세하는 모습을 보여주곤 합니다. 이때도 그랬습니다. 광해군을 강화도로 유배시킨 반정파들은 즉시 명에 의리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청과의 외교를 단절하는 친명배금정책을 취했습니다. 이 반정으로 정인홍을 비롯한 대북파들이 몰락했고, 이후 남명 조식 선생의 문하들은 씨가 말랐지요.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세력은 훗날 흥선대원군이 등장하기까지 무려 250여 년에 걸쳐 오랜 세월 집권합니다. 물론 중간에 남인이 정권을 잡은 경우도 있지만 아주 짧은 세월로 그렇게 유념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서인은 나중에 노론으로 이름이 바뀌고 이 노론에 소외당한 소수의 서인 일파들을 일러 소론이라 불렀지요.
인조의 콤플렉스와 소현세자의 의문의 죽음
인조가 정권을 잡은 것은 표면상으로는 실리주의 외교에 대한 단죄와 같은 것이었으므로 이후 조선은 급격하게 성리학 근본주의로 나가게 됩니다. 근본주의 하니까 갑자기 이슬람이 생각나십니까? 맞습니다. 극단적 반미주의와 극단적 반청주의는 시대는 달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근본주의는 정치적으로는 폐쇄적 패권주의, 독재로 이어지는 것이 필연입니다.
결국 인조의 반청주의는 두 차례의 전란의 소용돌이로 조선을 밀어 넣게 됩니다. 그리고 그 끝은 삼전도에서 인조가 청 태종에게 세 번 큰 절 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궤구고두의 예를 올리는 치욕을 당하게 됩니다. 아마도 인조는 신하들 앞에서 당한 이 치욕을 죽는 순간까지도 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이미지 출처@미디어다음 뉴스엔
소현세자는 청나라에서 돌아온 지 불과 두 달 만에 죽었습니다. 학질에 걸렸다고 했지만, 인조실록에 의하면 시신이 온통 검은 빛이고 아홉 구멍에서 피가 흘러나와 곁에 있는 사람도 얼굴을 분별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소현세자의 독살설을 뒷받침하는 유력한 증거가 기록된 셈입니다.
물론 소현세자가 독살된 게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오랜 볼모생활로 인한 피로의 누적과 국내로 돌아온 후의 정치적 갈등으로 인환 화병 등이 겹쳐 병사했을 수도 있지요. 그러나 귀국한 지 불과 두 달 만에 병을 얻고 사흘 만에 죽었다는 것은 누구라도 납득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더욱이 소현세자의 검은 시신은 독살 의혹을 강한 어조로 주장합니다.
소현세자가 청에서 들고 온 선진문물은
권력자들에겐 환영할 수 없는 위협적 존재
게다가 소현세자가 청으로부터 돌아올 때 들여온 문물들은 성리학을 떠받드는 조선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들이었습니다. 특히 독일인 주교 아담 샬로부터 선물 받은 천주교 서적들과 지구의, 천문관련 서적들을 조선 조정에서는 도저히 환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소현세자는 집권당인 서인세력과 인조에게는 권력을 위협하는 존재였던 것이지요.
<추노>는 소현세자 독살의 배후를 확실하게 인조로 지목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소현세자가 그의 오랜 친구인 송태하에게 보내는 편지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소현세자는 송태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에게 이 편지가 전달될 때쯤이면 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자신이 독살될 것을 알고 있다는 뉘앙스가 강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자신이 독살될 것을 이미 알고 있다? 도대체 누가 일국의 2인자요 차기 국왕을 죽일 계략을 꾸미고 있으며 그걸 세자 자신이 알고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고 그저 죽을 날만 기다리며 송태하에게 후일을 기약하는 편지만을 남기고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자기를 죽이려는 자가 다름 아닌 조선의 1인자, 곧 국왕인 인조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증언하는 게 아니었을까요? 학질에 걸려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이 편지가 그대에게 전해질 때쯤이면 나는 이미 죽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자기 아내와 아이들의 생사를 걱정하며 후사를 부탁했다는 것은 단순한 병사가 아님을 말합니다.
소현세자의 죽음이 원인 된
피비린내 나는 1, 2차 예송논쟁
그리고 소현세자가 죽은 다음 세자빈 강씨는 인조를 독살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세 아들 중 두 아들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오직 하나 남은 소현세자의 아들 이석견은 천운으로 살아남게 되는데 <추노>는 인조의 한마디로 석견이 살아남았음을 암시해주는 장면을 삽입했습니다.
"참으로 가엾은 아이가 아닌가."
좌의정 이경식 일파가 반대파들을 숙청할 목적으로 '역병으로 죽어가는 제주도민들 속에 홀로 선 어린 이석견'의 그림을 만들어 은밀히 돌렸는데 그걸 살펴보던 인조가 던진 말입니다. 제게 이 말은 역설적으로 하나 남은 소현세자의 아들 원손 석견만은 살려주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아무튼 소현세자의 죽음은 훗날 두 차례에 걸친 예송논쟁을 일으키며 피비린내 나는 당쟁의 원인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기해예송과 갑인예송으로 불리는 자의대비가 상복을 어떻게 얼마나 입어야 할 것인가에 관한 논쟁은 당파싸움의 폐단을 설명하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로 보면 예송논쟁은 대단히 중요한 정치투쟁이었지요.
바로 인조를 이은 효종 그리고 현종, 숙종의 정통성과 관련한 문제였으니까요. 이 쟁투의 주연으로 말하자면 그 유명한 송시열이죠. 송시열은 기호학파들에게는 위대한 유학자였지만, 영남과 호남의 유림들에게는 악마와 같은 존재였을 겁니다. 그래서 영호남의 선비들은 대문 앞에 송시열의 이름을 그려놓고 밟고 다녔다고 합니다.
모든 당파투쟁의 시작과 끝은 배타적 이데올로기와 부정부패
심지어 집에서 키우는 개 이름을 시열이라 지어놓고 개를 볼 때마다 "시열이 이놈의 똥개새끼" 하면서 욕을 했다고 하니 그 증오심이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이 갑니다. 우리는 보통 조선시대에 호남이 차별 받은 건 기억하면서도, 이유는 모르겠지만 영남 역시 똑같이 차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선 잘 모릅니다.
각설하고, 소현세자의 죽음이 어떻게 조선시대 당파투쟁의 절정을 보여준 2차에 걸친 예송논쟁의 불씨가 되었다는 것인지에 대해선 다음 기회에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어쨌든 우리가 <추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어떤 당파투쟁도 처음엔 이념이 중요했지만, 이게 나아가면 패권주의로 다시 이기적 욕망으로 변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4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유일적이고 배타적인 이념이 패권주의를 낳고, 이 패권주의는 독재가 독버섯처럼 자라는 토양이며, 독버섯처럼 자란 독재의 그늘에선 늘 부정과 부패가 판치는 것을 우리는 익히 보아왔던 터입니다. 그러므로 <추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먼 옛날 사람들이 아닌 게지요.
다시 한 번 <추노> 제작진의 기획의도의 마지막 문장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다음에 뵙죠. 아, 제목으로 낸 문제의 답을 말하지 않았군요. 제가 생각하는 답은 이렇습니다. 당연히 정답은 아닙니다.
"소현세자를 죽인 것은 인조의 콤플렉스(어심)를 이용한 이경식 일파의 추악한 욕망이다.
이 욕망은 근본주의란 음지에서 태어났으며, 좌의정 이경식의 말처럼 '어심'을 먹으며 자랐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죽음은 향후 백 년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당파싸움의 원인을 제공한다."
지금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픽션이
지금 이 시대에서 잊혀져가는 것들을 바라보게 만든다면,
다른 시대를 다룬 픽션은 필연적으로,
지금 이 시대 그 자체를 바라보게 만든다고 한다.
블로그 구독+은 yogi Qook지금 이 시대에서 잊혀져가는 것들을 바라보게 만든다면,
다른 시대를 다룬 픽션은 필연적으로,
지금 이 시대 그 자체를 바라보게 만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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