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담의 눈매가 예사롭지 않다. 비담은 원래 출현할 때부터 예사롭지 않은 눈매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었다.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말투와 자유분방한 태도, 새털처럼 몸을 날리는 경공술과 검법은 드라마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러나 누가 뭐라 해도 비담의 트레이드 마크는 눈으로 하는 연기였다.
비담, 너무나 잘 알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모르는 존재
우리는 비담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 동시에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비담은 단지 선덕여왕 말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김유신에게 패해 참형에 처해졌다는 기록으로만 우리에게 존재를 알리고 있을 뿐이다. 고금을 불문하고 역적은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그러니 우리가 비담에 대해 아는 것은 선덕여왕 16년(서기 647년)에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 뿐이다. 비담의 반란군은 명활산성에 주둔했는데 반월성에 고립되어 있던 김유신군에 비해 형세가 유리했다. 명활산성과 황궁인 반월성은 보문벌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었다. 이때 밤하늘에 긴 꼬리를 늘어뜨리며 별이 하나 떨어졌다.
떨어진 별은 선덕여왕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비담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 반대로 김유신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군세도 역부족인데 사기까지 떨어지니 전투는 끝난 것이나 진배 없었다. 그러나 유신은 기지를 발휘해 사태를 역전시켰다. 연을 이용해 별을 다시 하늘로 띄워 올린 것이다.
월성전투에서 패한 비담은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그러나 비담의 난의 여파였던지 선덕여왕도 죽고 말았다. 632년에 즉위하여 647년까지 왕좌에 있었으니 그리 짧은 세월은 아니었다. 게다가 나이 든 아버지 진평왕을 대신해 국사를 관장한 햇수까지 치면 꽤나 긴 세월 바람처럼 살았던 셈이다.
비담이 상대등에 오른 것은 서기 645년, 선덕여왕 14년이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비담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의 전부다. 비담의 출생과 성장, 출세에 관한 기록은 전혀 없다. 비담이 난을 일으킬 때 상대등의 지위에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그는 골품을 가진 왕족으로 왕권에 가장 근접한 인물이었다는 추측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선덕여왕에 의해 신라 최고 관직 상대등에 오른 비담
이렇게 본다면 비담은 사실은 김유신이나 김춘추에 비해 선덕여왕의 총애가 두터웠던 인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비담이 김유신이나 김춘추보다 훨씬 강력한 귀족세력을 배후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등에 올랐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렇게 쉽게 생각할 문제는 아니다.
어쩌면 신흥세력인 김유신과 김춘추보다 비담을 중심으로 하는 오래된 귀족세력이 선덕여왕이 왕좌에 오르는데 더 큰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 원래 상대등은 신라 초기부터 존재하던 지위가 아니었다. 법흥왕이 율령을 반포하면서 새롭게 만들어낸 귀족세력의 우두머리가 바로 상대등이다.
율령을 반포하기 전의 신라 왕은 왕이면서 한편 귀족연합체의 수장 역할도 동시에 수행했다. 말하자면, 왕이 국사를 관장하는 것과 별도로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기 위한 화백회의의 의장 역할도 겸했던 것이다. 법흥왕은 율령을 통해 이 부분에 대한 제도적 정비를 단행했다. 왕 대신 상대등이 귀족회의 의장을 맡도록 한 것이다.
이는 어찌 보면 권력을 나누어 준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신성한 왕권을 귀족들과 분리시킨 조치였다. 왕과 귀족들이 동등한 대등 자격으로 열던 회의를 폐지하고 상대등이 주관하는 새로운 회의를 창설한 것과 같은 효과를 발생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왕권이 허약할 경우에 상당한 위험을 내포하는 모험이기도 했다.
실제로 우리가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보고 있는 화백회의와 상대등 세종이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법흥왕 이후의 역대 신라 왕들은 반드시 자신과 운명을 함께 할 만한 인물을 상대등 자리에 앉혔다. 그러지 못했을 경우에 심심찮은 역모에 휩싸였던 역사를 우리는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비담과 김유신의 경쟁관계는 숙명적인 것이었나
이로써 우리는 비담과 선덕여왕의 관계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선덕여왕이 그렇게 허약한 왕이 아니었다는 점을 가정한다면, 휘하에 김유신과 김춘추란 걸출한 인재를 거느렸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비담은 선덕여왕이 가장 신뢰하는 인물 중 한 명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러지 않고서야 비담이 상대등의 자리에 올랐던 사실을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그런데 이제 바야흐로 역사상 최초로 여왕의 자리에 오르려고 하는 덕만의 옆에서 김유신을 향해 분노와 질투의 눈초리를 날리는 비담은 누구인가? 김유신만이 관심과 논의의 대상이라고 공표하는 듯한 덕만을 향해 안타까운 원망의 눈초리를 날리고 있는 비담은 누구인가? 드라마에서 그는 미실의 버려진 아들이며 진지왕의 왕자다.
버려진 그를 문노가 안아다 키웠다. 문노는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그에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문노는 그런 비담에게 놀랍고도 가슴 벅찬 기대를 던져주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것은 삼한지세였다. 삼한의 형세를 분석한 비서, 이 책의 주인은 곧 신라의 주인이기도 했다. 그는 문노가 원래 자기와 덕만을 결혼시켜 왕재로 삼으려 했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때 이미 문노의 마음은 자신에게 돌아선 뒤였다. 문노는 측은지심은 고사하고 살생을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쉽게 하는 비담에게 실망했던 것이다. 문노는 비담 대신 유신을 선택했다. 문노의 눈에 유신이야말로 삼한을 통일시킬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유신에게 삼한지세를 전하려던 문노는 비담과 염종에게 암살 당한다.
비담은 다시 천애고아가 되었다. 그러나 비담은 이제 과거의 비담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진지왕의 아들이며 미실의 아들이란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천하에 세 사람 뿐이었다. 그 중 문노는 죽었으니 이제 비담과 소화만이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비담은 알고 있다. 자신의 존재를 아무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나 비담이 가야할 길은 아직도 멀고 험하다
그러나 비담은 원래의 자기 자리로 돌아가려는 강한 욕구를 갖고 있다. 잃어 버린 20여 년에 대한 보상심리로 심장은 폭발 직전이다. 덕만공주는 잃어 버린 꿈을 되찾게해 줄 든든한 지렛대다. 광야에서 바람처럼 살아왔던 비담으로서는 거칠 게 없다. 두려움도 없다. 다만 한 가지 있다면 덕만공주의 유신에 대한 애정이 문제다.
유신을 바라보는 비담의 두 눈은 질투와 분노의 화염으로 이글거린다. 비담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산이다. 결국 화산은 폭발할 것이며 곧 비담의 난이다. 비담의 난은 역사를 바꾸는 큰 획을 그은 중대한 사건이다. 비담의 난으로 신라는 상대시대의 종말을 고하고 중앙집권이 강화된 중대시대의 서막을 준비하게 된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남았다. 덕만이 아직 왕위에도 오르지 않았으니 최소한 16년 이상의 세월이 남은 셈이다. 그동안 비담이 해야할 일은 산처럼 쌓여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비담 외에 아무것도 모르는 비담이 사실은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그리고 있는 그 비담이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예사롭지 않은 비담의 눈매가 미리 먼 미래의 불행한 결말을 예비하는 것 같아 불안하긴 하지만, 그러나 아직은 비담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 그는 어미로부터 버려진 왕자요, 스승으로부터 배척당한 제자다. 사랑 받지 못한 존재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나오는 잃어버린 세월에 대한 누구부다 강한 집착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원망과 분노와 질투가 묻어나오는 슬픈 눈초리가 안타깝기만 하다. 그러나 오늘은 선덕여왕을 보지 못할 것 같다. 약속시간이 30분도 채 남지 않았다. 오늘은 술약속이라 하는 수 없이 선덕여왕은 내일 인터넷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오타나 문맥에 약간의 착오가 있더라도 선덕여왕처럼 넓은 아량으로 헤아려주신다면 매우 고맙겠다. ㅎㅎ
아이구~ 늦겠네, 후다닥…
비담, 너무나 잘 알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모르는 존재
우리는 비담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 동시에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비담은 단지 선덕여왕 말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김유신에게 패해 참형에 처해졌다는 기록으로만 우리에게 존재를 알리고 있을 뿐이다. 고금을 불문하고 역적은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그러니 우리가 비담에 대해 아는 것은 선덕여왕 16년(서기 647년)에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 뿐이다. 비담의 반란군은 명활산성에 주둔했는데 반월성에 고립되어 있던 김유신군에 비해 형세가 유리했다. 명활산성과 황궁인 반월성은 보문벌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었다. 이때 밤하늘에 긴 꼬리를 늘어뜨리며 별이 하나 떨어졌다.
떨어진 별은 선덕여왕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비담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 반대로 김유신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군세도 역부족인데 사기까지 떨어지니 전투는 끝난 것이나 진배 없었다. 그러나 유신은 기지를 발휘해 사태를 역전시켰다. 연을 이용해 별을 다시 하늘로 띄워 올린 것이다.
월성전투에서 패한 비담은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그러나 비담의 난의 여파였던지 선덕여왕도 죽고 말았다. 632년에 즉위하여 647년까지 왕좌에 있었으니 그리 짧은 세월은 아니었다. 게다가 나이 든 아버지 진평왕을 대신해 국사를 관장한 햇수까지 치면 꽤나 긴 세월 바람처럼 살았던 셈이다.
비담이 상대등에 오른 것은 서기 645년, 선덕여왕 14년이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비담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의 전부다. 비담의 출생과 성장, 출세에 관한 기록은 전혀 없다. 비담이 난을 일으킬 때 상대등의 지위에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그는 골품을 가진 왕족으로 왕권에 가장 근접한 인물이었다는 추측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선덕여왕에 의해 신라 최고 관직 상대등에 오른 비담
이렇게 본다면 비담은 사실은 김유신이나 김춘추에 비해 선덕여왕의 총애가 두터웠던 인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비담이 김유신이나 김춘추보다 훨씬 강력한 귀족세력을 배후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등에 올랐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렇게 쉽게 생각할 문제는 아니다.
어쩌면 신흥세력인 김유신과 김춘추보다 비담을 중심으로 하는 오래된 귀족세력이 선덕여왕이 왕좌에 오르는데 더 큰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 원래 상대등은 신라 초기부터 존재하던 지위가 아니었다. 법흥왕이 율령을 반포하면서 새롭게 만들어낸 귀족세력의 우두머리가 바로 상대등이다.
율령을 반포하기 전의 신라 왕은 왕이면서 한편 귀족연합체의 수장 역할도 동시에 수행했다. 말하자면, 왕이 국사를 관장하는 것과 별도로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기 위한 화백회의의 의장 역할도 겸했던 것이다. 법흥왕은 율령을 통해 이 부분에 대한 제도적 정비를 단행했다. 왕 대신 상대등이 귀족회의 의장을 맡도록 한 것이다.
이는 어찌 보면 권력을 나누어 준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신성한 왕권을 귀족들과 분리시킨 조치였다. 왕과 귀족들이 동등한 대등 자격으로 열던 회의를 폐지하고 상대등이 주관하는 새로운 회의를 창설한 것과 같은 효과를 발생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왕권이 허약할 경우에 상당한 위험을 내포하는 모험이기도 했다.
실제로 우리가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보고 있는 화백회의와 상대등 세종이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법흥왕 이후의 역대 신라 왕들은 반드시 자신과 운명을 함께 할 만한 인물을 상대등 자리에 앉혔다. 그러지 못했을 경우에 심심찮은 역모에 휩싸였던 역사를 우리는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비담과 김유신의 경쟁관계는 숙명적인 것이었나
이로써 우리는 비담과 선덕여왕의 관계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선덕여왕이 그렇게 허약한 왕이 아니었다는 점을 가정한다면, 휘하에 김유신과 김춘추란 걸출한 인재를 거느렸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비담은 선덕여왕이 가장 신뢰하는 인물 중 한 명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러지 않고서야 비담이 상대등의 자리에 올랐던 사실을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그런데 이제 바야흐로 역사상 최초로 여왕의 자리에 오르려고 하는 덕만의 옆에서 김유신을 향해 분노와 질투의 눈초리를 날리는 비담은 누구인가? 김유신만이 관심과 논의의 대상이라고 공표하는 듯한 덕만을 향해 안타까운 원망의 눈초리를 날리고 있는 비담은 누구인가? 드라마에서 그는 미실의 버려진 아들이며 진지왕의 왕자다.
버려진 그를 문노가 안아다 키웠다. 문노는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그에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문노는 그런 비담에게 놀랍고도 가슴 벅찬 기대를 던져주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것은 삼한지세였다. 삼한의 형세를 분석한 비서, 이 책의 주인은 곧 신라의 주인이기도 했다. 그는 문노가 원래 자기와 덕만을 결혼시켜 왕재로 삼으려 했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때 이미 문노의 마음은 자신에게 돌아선 뒤였다. 문노는 측은지심은 고사하고 살생을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쉽게 하는 비담에게 실망했던 것이다. 문노는 비담 대신 유신을 선택했다. 문노의 눈에 유신이야말로 삼한을 통일시킬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유신에게 삼한지세를 전하려던 문노는 비담과 염종에게 암살 당한다.
비담은 다시 천애고아가 되었다. 그러나 비담은 이제 과거의 비담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진지왕의 아들이며 미실의 아들이란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천하에 세 사람 뿐이었다. 그 중 문노는 죽었으니 이제 비담과 소화만이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비담은 알고 있다. 자신의 존재를 아무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나 비담이 가야할 길은 아직도 멀고 험하다
그러나 비담은 원래의 자기 자리로 돌아가려는 강한 욕구를 갖고 있다. 잃어 버린 20여 년에 대한 보상심리로 심장은 폭발 직전이다. 덕만공주는 잃어 버린 꿈을 되찾게해 줄 든든한 지렛대다. 광야에서 바람처럼 살아왔던 비담으로서는 거칠 게 없다. 두려움도 없다. 다만 한 가지 있다면 덕만공주의 유신에 대한 애정이 문제다.
유신을 바라보는 비담의 두 눈은 질투와 분노의 화염으로 이글거린다. 비담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산이다. 결국 화산은 폭발할 것이며 곧 비담의 난이다. 비담의 난은 역사를 바꾸는 큰 획을 그은 중대한 사건이다. 비담의 난으로 신라는 상대시대의 종말을 고하고 중앙집권이 강화된 중대시대의 서막을 준비하게 된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남았다. 덕만이 아직 왕위에도 오르지 않았으니 최소한 16년 이상의 세월이 남은 셈이다. 그동안 비담이 해야할 일은 산처럼 쌓여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비담 외에 아무것도 모르는 비담이 사실은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그리고 있는 그 비담이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예사롭지 않은 비담의 눈매가 미리 먼 미래의 불행한 결말을 예비하는 것 같아 불안하긴 하지만, 그러나 아직은 비담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 그는 어미로부터 버려진 왕자요, 스승으로부터 배척당한 제자다. 사랑 받지 못한 존재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나오는 잃어버린 세월에 대한 누구부다 강한 집착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원망과 분노와 질투가 묻어나오는 슬픈 눈초리가 안타깝기만 하다. 그러나 오늘은 선덕여왕을 보지 못할 것 같다. 약속시간이 30분도 채 남지 않았다. 오늘은 술약속이라 하는 수 없이 선덕여왕은 내일 인터넷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오타나 문맥에 약간의 착오가 있더라도 선덕여왕처럼 넓은 아량으로 헤아려주신다면 매우 고맙겠다. ㅎㅎ
아이구~ 늦겠네, 후다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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