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에서 시작한 낙동강 도보기행(사단법인 우리땅걷기, 대표 신정일)이 드디어 다섯 번째를 맞았습니다. 매월 네 째주에 2박 3일 일정으로 진행되는 낙동강 도보기행의 이번 구간은 상주 강창나루에서 시작하여 낙동나루를 거쳐 구미까지입니다. 낙동나루는 김해에서 시작한 낙동강 7백리 뱃길의 종착점입니다. 낙동강이란 이름도 이 낙동나루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보물 제 492호 선산 보천사 석조여래좌상
물론 가야의 동쪽에 있는 강이란 뜻에서 낙동강이 유래했다고 해석하는 분도 있지만, 대체로 역사서들은 낙동강의 유래를 이곳 상주 낙동에서 찾습니다. 상주의 옛 이름은 낙양입니다. 우리는 낙동강 5차도보기행의 베이스 캠프로 구미시 해평면 소재의 청소년 수련원을 선택했습니다. 시설은 최악이었습니다. 전혀 관리가 안 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수련원에서 불과 500여 미터만 올라가면 만날 수 있는 보천사에서 진귀한 보물을 볼 수 있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보통 사찰 대웅전에는 금동불상을 모시는 게 일반적인데 이곳에는 돌을 깍아 만든 부처님을 모셔 놓았습니다. 아침 6시, 절은 조용했습니다.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절에 개 한마리가 불청객을 나무라듯 시끄럽게 짖어댑니다.
첫 번째 만난 보물 : 해평 보천사 석조여래좌상
1968년 보물 제 492호로 지정된 보천사의 본존불로서 경북 구미시 해평면 해평리 526번지 보천사 대웅전에 있다. 오른손을 무릎 아래로 내린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 석불좌상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이다. 대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으로 이 불상의 특징은 광배와 대좌다.
광배(光背)란 부처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것으로서 원광(圓光)·후광(後光)·염광(焰光)이라고도 한다. 2중의 원으로 표현된 머리광배와 몸광배의 원 안에는 덩쿨무늬가 새겨져 있고 머리광배의 중심부분에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광배의 곳곳에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고 아래쪽에는 향로가 새겨져 있으며 가장자리에는 화려한 불꽃무뉘가 둘러싸고 있다.
대좌(臺座)란 부처님이나 보살, 천인, 승려 등이 앉거나 서는 자리를 말하는데 기원과 전래에 대해 정확한 기록이 없지만 붓다가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을 때 앉았던 풀방석에서 유래한 것으로 금강좌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주로 연화좌가 많이 사용되는데 이는 연꽃이 더러운 흙 속에서도 청정함을 잃지 않는 덕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상중하 3면으로 나뉘어진 보천사 석불좌상의 대좌에도 연꽃잎이 새겨져 있다.
1968년 보물 제 492호로 지정된 보천사의 본존불로서 경북 구미시 해평면 해평리 526번지 보천사 대웅전에 있다. 오른손을 무릎 아래로 내린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 석불좌상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이다. 대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으로 이 불상의 특징은 광배와 대좌다.
광배(光背)란 부처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것으로서 원광(圓光)·후광(後光)·염광(焰光)이라고도 한다. 2중의 원으로 표현된 머리광배와 몸광배의 원 안에는 덩쿨무늬가 새겨져 있고 머리광배의 중심부분에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광배의 곳곳에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고 아래쪽에는 향로가 새겨져 있으며 가장자리에는 화려한 불꽃무뉘가 둘러싸고 있다.
대좌(臺座)란 부처님이나 보살, 천인, 승려 등이 앉거나 서는 자리를 말하는데 기원과 전래에 대해 정확한 기록이 없지만 붓다가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을 때 앉았던 풀방석에서 유래한 것으로 금강좌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주로 연화좌가 많이 사용되는데 이는 연꽃이 더러운 흙 속에서도 청정함을 잃지 않는 덕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상중하 3면으로 나뉘어진 보천사 석불좌상의 대좌에도 연꽃잎이 새겨져 있다.
보천사의 현재 주소가 구미시로 되어 있지만 원래 이곳은 선산군 해평면이었습니다. 고려말 삼은의 하나였던 야은 길재가 나고 말년을 보낸 선산은 조선인재의 반은 영남에서 나고 영남인재의 반은 선산에서 난다고 한 바로 그곳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선산은 공업도시 구미에 그 이름을 내어주고 말았습니다. 이름과 함께 역사와 전통마저 버린 셈입니다.
구미에 이름을 빼앗기고 구미시의 일개 읍으로 전락한 선산읍에는 보기 드문 보물이 하나 있습니다. 죽장사 5층석탑이 바로 그것입니다. 원래 죽장사였던 이 절은 이제 이름이 서황사로 바뀌었습니다. 절의 이름을 바꾼 이유는 죽장사란 이름을 가진 절들 중에 망한 절이 많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개명을 하는 이유도 참 다채롭다는 생각이 듭니다.
국보 제 130호 선산 죽장동 5층석탑
석탑의 감실에 약사여래불이 모셔져 있었다
비구니승들의 섬세한 정성이 너무 예쁘다
두 번째 만난 보물 : 선산 죽장동 5층석탑
국보 제 130호다. 통일신라시대 5층석탑으로 높이가 10m이다. 5층석탑으로서는 국내 최대 규모이다. 행정구역은 경북 구미시 선산읍 죽장리다. 화감암을 깍아 만든 석탑의 규모만큼이나 위용이 대단하다. 18매의 장대석으로 기단을 만든 것이 특징이다. 기단의 면적이 평범하지 않다. 보통의 석탑에서는 느낄 수 없는 웅장함이 이 석탑의 묘미다.
일반적인 석탑과 달리 이 석탑은 기단이 2중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그 위에 탑신을 얹었다. 석탑의 모양으로 보아 안동-의성 지역에서 유행했던 전탑을 모방한 모전석탑으로 보여지며 웅장하고 세련된 신라 석탑의 조형미를 잘 보여주고 있는 뛰어난 석탑이다. 1층 탑신부에는 불상을 모실 수 있도록 감실이 만들어져 있다.
상륜부는 일제시대에 일본인에 의해 뜯겨져 일본으로 건너가 행방불명되었다. 아마 석탑 전체를 들고 가고 싶었겠지만, 워낙 크기가 거대하다 보니 상륜만 뜯어간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아마 정교한 조각이 빼어난 상륜부는 어느 일본인의 정원에 잠자고 있을 터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꼭대기를 보니, 탑신 가운데 비가 들지 않도록 돌을 깍아 얹어 놓았다.
국보 제 130호다. 통일신라시대 5층석탑으로 높이가 10m이다. 5층석탑으로서는 국내 최대 규모이다. 행정구역은 경북 구미시 선산읍 죽장리다. 화감암을 깍아 만든 석탑의 규모만큼이나 위용이 대단하다. 18매의 장대석으로 기단을 만든 것이 특징이다. 기단의 면적이 평범하지 않다. 보통의 석탑에서는 느낄 수 없는 웅장함이 이 석탑의 묘미다.
일반적인 석탑과 달리 이 석탑은 기단이 2중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그 위에 탑신을 얹었다. 석탑의 모양으로 보아 안동-의성 지역에서 유행했던 전탑을 모방한 모전석탑으로 보여지며 웅장하고 세련된 신라 석탑의 조형미를 잘 보여주고 있는 뛰어난 석탑이다. 1층 탑신부에는 불상을 모실 수 있도록 감실이 만들어져 있다.
상륜부는 일제시대에 일본인에 의해 뜯겨져 일본으로 건너가 행방불명되었다. 아마 석탑 전체를 들고 가고 싶었겠지만, 워낙 크기가 거대하다 보니 상륜만 뜯어간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아마 정교한 조각이 빼어난 상륜부는 어느 일본인의 정원에 잠자고 있을 터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꼭대기를 보니, 탑신 가운데 비가 들지 않도록 돌을 깍아 얹어 놓았다.
어떻든 이 절은 신라시대까지만 해도 50여 동에 이르는 대가람이었지만, 몽고의 침입 때 모두 소실되고 5층석탑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1952년에 새로이 창건되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도반이신 신정일 선생(사단법인 우리땅걷기 대표, 낙동강역사문화탐사 등 40여권의 기행록 저술)의 말씀에 의하면 비구승들이 말아먹은 이 절을 비구니승들이 와서 새로 일구었다고 합니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부 승려들 중에는 깡패 출신들도 있다고 합니다. 비구니승들이 절을 잘 닦아놓으면 이들이 와서 빼앗고 다시 불과 오래지 않아 절을 다 말아먹는다는 것입니다. 뭘 어떻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절의 재정상태를 완전 바닥까지 드러나도록 만들고서야 떠난다는 것입니다.
그럼 다시 비구니승들이 와서 다시 절을 가다듬고 가꾸어 복원을 한다는 것이죠. 여자들의 섬세한 생활력이 남자들이 말아먹은 절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는 것입니다. 신정일 선생의 말에 의하면 이런 경우가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있다고 했습니다. 이곳 서황사의 내력이야 알 수 없는 노릇이긴 하지만 역시 절 곳곳에 비구니 스님들의 세심한 배려가 역력했습니다.
죽장동 5층석탑에는 전해내려오는 전설이 하나 있습니다. 옛날에 두 남매가 살았는데 서로 재주를 자랑하다가 누가 먼저 탑을 쌓는지 내기를 했다고 합니다. 이에 누이동생은 이곳 중장리에서 석탑을 쌓고 오빠는 낙산리에서 석탑을 쌓았는데 누이동생의 재주에 오빠가 감히 대적하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보물 제 469호 낙산동 3층석탑
이에 아들이 질 것을 염려한 어머니가 딸 몰래 아들이 석탑 쌓는 도왔지만 결국 누이동생이 이겼다고 합니다. 죽장동 석탑은 5층이요, 낙산동 석탑은 3층입니다. 죽장동 5층석탑의 기단과 마찬가지로 2층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기단의 크기는 훨씬 작습니다. 규모에 있어서 낙산동 3층석탑이 죽장동 5층석탑을 따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두 개의 석탑은 형식이나 모양이 크게 닮았습니다. 아마 그런 데서 남매의 전설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남매의 어머니는 어째서 아들이 질 것을 염려하여 아들을 도왔을까요? 딸이 이기면 안 되는 것입니까? 거 참 전설도 얄궂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설에도 남녀차별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슬퍼지네요.
그냥 당당하게 졌으면 좋았을 걸… 아래 사진은 오빠가 쌓았다는 낙산동 3층석탑입니다. 과거에는 이곳에 커다란 절이 있었을 것이지만, 지금은 주변이 논과 밭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보물로 지정되어 있었지만 그저 쓸쓸하게 벌판에 버려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나마 바로 옆에 부락이 있어 위안이 되었습니다.
세 번째 만난 보물 : 선산 낙산동 3층석탑
보물 제 469호다. 행정구역은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 837-1번지이다. 양식이 죽장동 5층석탑과 비슷한 통일신라시대의 모전석탑 계열의 석탑이다. 주변에 별다른 유적이 없으나 주변 경작지 일대에서 기와조각과 토기 편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절터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물 제 469호다. 행정구역은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 837-1번지이다. 양식이 죽장동 5층석탑과 비슷한 통일신라시대의 모전석탑 계열의 석탑이다. 주변에 별다른 유적이 없으나 주변 경작지 일대에서 기와조각과 토기 편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절터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도리사 극락전 마당에 도리사 석탑이 있다
보물 제 470호 도리사석탑
고구려의 승려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전한 것은 눌지왕 때인 417년이라고 합니다. 아도가 전법하기 위하여 서라벌에 다녀오는 길에 이곳 태조산을 지나는 데 한겨울인데도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만발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이곳이 길지라고 생각한 아도가 절을 지었는데 신라 최초의 절이라고 합니다.
1976년 종 모양의 세존사리탑 속에서 금동육각사리함이 발견되었는데 그 안에 부처님의 사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국에서 신도들이 몰려들어 조용하던 태조산이 한때 몸살을 앓았다고 합니다. 금동육각사리함은 국보 제 208호로 지정되었으며 직지사의 성보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고 합니다.
네 번째 만난 보물 : 도리사석탑
보물 제 470호다. 행정구역은 경북 구미시 해평면 송곡리 403 도리사다. 극락전 마당에 있다. 전체적으로 5개 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맨 아래는 기단, 그 위 두개 층은 탑신부로 보이지만 구분하기가 매우 모호하다. 일반 탑들과는 달리 형상이 매우 특이한 이 탑은 안동 의성지방의 모전석탑 계열로 보이는데 고려시대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물 제 470호다. 행정구역은 경북 구미시 해평면 송곡리 403 도리사다. 극락전 마당에 있다. 전체적으로 5개 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맨 아래는 기단, 그 위 두개 층은 탑신부로 보이지만 구분하기가 매우 모호하다. 일반 탑들과는 달리 형상이 매우 특이한 이 탑은 안동 의성지방의 모전석탑 계열로 보이는데 고려시대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왼쪽에 있는 사진이 바로 세존사리탑입니다. 불자들의 마음으로 보면 세존사리탑이 최고의 보물일 것입니다. 불교 신자들에게 세존의 사리는 곧 부처님의 현신으로 받아들여지겠지요. 세존의 사리를 보기 위해 전국에서 구름처럼 모여들었을 사람들의 기도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그러나 이곳은 이제 냉산의 차가운 여름 바람만이 부처님의 사리탑을 식혀주고 있습니다.
태조산은 냉산이라고도 부릅니다. 도리사는 냉산의 거의 정상 가까이에 지어져 있었습니다. 산은 이름처럼 무척 추웠습니다. 찬바람이 마치 늦가을 날씨를 연상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태조산을 냉산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일까요? 이 무더운 여름날의 가운데에서 이처럼 시원한 산을 찾아 까마득한 절집을 오르는 것도 더없는 기쁨이었습니다.
이렇게 네 개의 보물을 모두 구경한 우리는 다시 길을 떠나야 합니다. 낙동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행히 구름이 해를 가려 뜨거운 여름날의 고통은 많이 줄어들 듯합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강둑길을 바라보니 한숨이 납니다. 그래도 가야 합니다. 이곳에 온 목적은 보물을 보기 위함이 아닙니다.
다시는 보지 못할지도 모를 낙동강을 눈에, 머리에 그리고 가슴에 담아두는 것이 목적입니다. 영원히, 수로로 변해 영원히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를 낙동강을 말입니다. 파비
'여행이야기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낙동강에서 만난 보물 석탑에 앉은 목 잘린 불상 (7) | 2009.08.01 |
---|---|
낙동강 도보길에 만난 탱크와 자주포 (11) | 2009.07.30 |
회룡포에 빼앗긴 이름, 의성포의 사계 (12) | 2009.07.20 |
낙동강은 산도 뚫고 흐른다 (5) | 2009.07.18 |
택시기사들이 직지사로 간 까닭은? (6) | 2009.05.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