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MBC드라마 《선덕여왕》으로 인해 신라의 풍속에 대한 관심이 무척 높다. 특히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화랑들의 이야기로 세상이 뜨거운 것 같다. 화랑세기는 그 위작 논란에도 불구하고 신라사회를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한 장치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화랑도에 대한 언급이 있긴 하지만, 이처럼 생생한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특히 미실이란 여인은 화랑세기가 아니고서는 만나볼 수가 없다. 화랑세기는 사실상 미실의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래 김대문이 화랑세기를 저술할 때는, 그가 서문이나 후기에서 밝힌 것처럼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들의 세계(世系)를 밝히고자 함이었다. 그들의 계보를 통해 우리는 화랑의 실체를 접할 수 있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김대문의 집안은 세습 화랑의 집안이었다. 이 가문은 540년 화랑도가 시작한 이래 681년 폐지될 때까지 1세 풍월주 위화랑부터 시작해서 4세 이화랑, 12세 보리공, 20세 예원공, 28세 오기공 등 모두 5대에 걸쳐 풍월주를 세습했다. 나머지 풍월주들도 대부분 부자가 세습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김대문의 가문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32대에 걸친 풍월주들의 전기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바로 미실이다. 그녀는 5세 풍월주 사다함부터 시작해서 16세 풍월주 보종공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풍월주들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었다. 도대체 그녀는 어떤 신분의 인물이었기에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래서 나는 「선덕여왕, 근친혼의 이유는 무엇일까?」
(http://go.idomin.com/268) 라는 글을 통해 미실은 분명 김씨족임이 자명하다고 호언한 바 있다. 신라는 골품제를 근간으로 하는 나라다. 그런 나라에서 골품도 없는 여인이 화랑들을 발 아래 두고 국왕까지도 좌지우지한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랑세기에서도 미실의 세계에 대하여 자세한 언급은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화랑세기의 목적이 풍월주들의 세계와 세보를 기록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한편 미실에 대한 궁금증을 더욱 유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여러 독자가 댓글을 통해 내 글에 반론을 제기했다. 미실은 김씨족이 아니라 박씨라는 것이다.(인터넷을 검색해보았더니 또한 모든 네티즌들, 뿐아니라 위키백과에서도 미실을 박미실이라고 표기하고 있었다) 

사실 처음에 나의 관심사는 미실이 김씨족인가 박씨족인가 하는 것은 아니었다. 신라라는 신분제 사회의 특성상 진골귀족 신분이 아니고서 화백회의나 중앙정치를 주무를 수 없다는 주장을 강조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였을 뿐이다. 그러나 만약 드라마에서처럼 실제 미실의 역할이 그러했다면 그녀는 틀림없이 김씨족일 거라는 게 나의 생각이었다. 

골품제도는 법흥왕 7년(520년) 율령이 반포되면서 정립된 제도라고 말한다. 물론 그 이전에도 골품제는 이미 사회적 관습으로 정착되어 있었을 것이다. 법흥왕에 의해 골품을 받은 귀족들은 원래 왕족이었던 박씨족 일부와 김씨족, 그리고 가야의 왕족, 보덕국왕 안승의 후예들 정도였다고 한다. 그 범위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아직 정확히 알 길은 없다.  

박씨족 일부도 진골의 골품을 받았지만, 그들이 신라가 융성했던 중고시대나 중대에 중앙 정계에서 활발하게 활약했다는 증거를 찾기는 어렵다. 게다가 내물왕 이후 김씨족들이 왕권을 확실히 장악한 이후에 박씨족들은 6부 중 하나인 모량부에 이주해 살면서 가끔 왕비를 배출한 것 외에는 이렇다 할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 고로 화랑세기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미실이나 미생의 역할로 보아 틀림없이 이들의 조상은 김씨족일 거라는 생각은 지금도 확고하다. 그럼에도 여러 독자들이 미실은 박씨라는 주장을 하며 정정을 요구하였고, 심지어는 내물왕의 4대손이며 세종의 아비요 하종의 조부인 이사부조차도 박씨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어 부득이 다시 자료를 확인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사부나 거칠부가 김씨족인 것은 이미 사기에서 밝히고 있는 터라 더 이상 설명은 무의미할 듯하다. 그러므로 당연히 미실의 남편이며 아들인 세종과 하종도 김씨족인 것은 당연하다. 다만 미실에 대해서만 보다 더 확실한 조사가 필요할 것이지만, 아시다시피 그녀에 대한 기록은 화랑세기를 빼고는 전해지는 것이 없다.

그러나 미실의 부모에 대하여 화랑세기에 언급이 있으므로 그녀의 부계와 모계를 확인해 보면 그녀의 출신성분을 알아내는데 큰 어려움은 없을 듯싶었다. 미실의 아비는 2세 풍월주 미진부이며 어미는 묘도궁주이다. 미진부의 아비는 아시공이며, 아시공의 아비는  선모이고, 선모의 아비는 장이이고, 장이의 아비는 복호공이다. 복호공은 내물왕의 아들이다. 

미실의 부계를 살펴보건대, 미실은 내물왕의 후손인 것이다. 내물왕은 신라의 김씨 왕조를 확립한 인물이다. 내물왕 이전에 미추가 김씨족으로서 최초로 왕위에 오르긴 했지만, 김씨족의 전제 왕권을 확립한 것은 내물왕이다. 그러므로 김씨 왕조의 사실상 시조는 내물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내물왕 이후 왕비들은 대부분 김씨족으로 채워졌는데, 이는 김씨족의 배타적 왕권을 확립하려는 결과였다. 이와 같은 근친혼으로 왕권의 지위는 더욱 초월적인 것으로 공고해졌다. 세기에 의하면, 아시공은 법흥왕이 미실의 조모인 옥진과의 사이에서 난 비대공을 후계자로 세우려 하자 이에 반대해 지소태후와 더불어 진흥왕을 옹립하는데 역할을 한 인물이다. 

어쩌면 미실의 권력은 이로부터 기인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녀가 비록 세습적으로 색공을 하는 여인이었으며 미색이 출중하고 교태가 남다르다 해도 출신이 미천하고서는 권력에 다가서기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조부인 아시공은 당대의 실력자였으며, 아비는 진흥왕의 총애로 2세 풍월주를 거쳐 최고 관등인 대각간에까지 올랐다.    

그렇다면 미실의 모계는 어떨까? 미실의 어미는 묘도궁주이다. 묘도궁주는 영실공과 옥진궁주의 딸인데, 영실공은 수지공과 법흥의 누이 보현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성골이다. 또 미실의 조모인 옥진궁주는 누구인가. 그녀는 1세 풍월주 위화랑의 딸이다. 위화랑은 진골로서 이찬에 오른 인물이다. 위화랑 역시 옥진의 소생인 비대공을 반대해 진흥왕을 옹립했다.

이렇게 미실의 부계와 모계를 살펴보니 양쪽 모두 진골귀족 출신이다. 진골일 뿐 아니라 왕권에 가장 근접한 권력의 핵심들이었다. 미실의 권력의 출발점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미실의 힘이 어느날 갑자기, 또는 드라마에서처럼 사다함의 매화로,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닌 것이다.
 
자, 그런데 아직 풀리지 않은 독자들의 궁금증이 하나 더 남아 있을 것이다. 바로 설원랑이다. 나는 앞서「선덕여왕, 근친혼의 이유는 무엇일까?」에서 미실 뿐 아니라 설원까지도 김씨족일 거라고 단정을 하는 오류를 범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 의도한 오류였다. 설원랑은 세기에 등장하는 거의 유일한 진골귀족이 아닌 풍월주다.

화랑의 대부분이 진골귀족으로 채워졌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진골귀족이라 하더라도 아무나 화랑에 뽑힐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선 권문세가의 자제여야 하고 인물이 출중하고 덕이 충만해야 한다. 그래야 선발의 기본조건을 갖추는 것이다. 그런데 설원은 어떠한가. 그는 진골귀족도 권문세가의 자제도 아니다.

더구나 그의 아비인 설생은 아비의 이름도 성도 모르는 미천한 출신이다. 다만 설생의 어미가 습비부촌의 설씨 가문의 자손이므로 어미의 성을 따라 설씨가 되었다고 한다. 설생은 용모가 출중했는데,그가 모시던 구리지가 전장으로 나간 틈에 구리지의 여인 금진낭주와 관계를 가져 설원을 낳았다고 한다.

금진낭주는 사다함의 어미이기도 하니 설원은 사다함과는 동모이부의 형제인 셈이다. 사다함은 구리지의 아들이며 내물왕의 7세손으로 진골귀족이다. 금진낭주 또한 위화랑의 딸로서 진골귀족이니 설원은 비록 아비가 출신을 모르는 미천한 사람이었다고는 하나 모계로 보면 역시 귀한 자손이며 미실에겐 외숙뻘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부계계승사회인 신라에서 설원랑은 진골은 고사하고 두품조차 받지 못했다. 그런 그가 화랑이 되고 풍월주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은 미실의 권력을 웅변해주는 대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드라마상에서처럼 설원이 지배집단의 화백회의에 참여하고 병부령의 지위에 올라 군권을 장악하는 것은 난센스라는 것이다.

그런 일은 미실의 권력이 아무리 태산처럼 높다 하더라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신라의 골품제를 뒤흔드는 일로서 체제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미실이라도 그런 일은 할 수 없는 것이다. 화랑은 골품제의 규정을 비교적 덜 받는 자치조직이었으므로 설원랑이 풍월주에 오르는 이변을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앙관직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기대할 수는 없다. 그랬다면 6두품으로 뛰어난 문재를 자랑했던 설총이나 최치원이 비운의 삶을 살지도 않았을 것이다. 골품제가 초기에는 왕권을 강화하고 세력을 확장하는 주요한 도구로 기능했을지는 모르지만, 나라의 규모가 커지고 복잡해지면서 결국 신라를 패망으로 인도하는 결정적 요인 중의 하나로 작용했다.

그래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라!"는 금언이 있는 것이 아닐까.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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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27m.net BlogIcon 東氣號太 2009.07.11 11: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선덕여왕을 처음부터 보지 못해 요즘 하나티비를 통해 다시 보고 있지만
    드라마적인 요소는 잘 구성되어 있으나, 역사적 배경이 궁금했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 달그리메 2009.07.11 15: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요~
    모르는 것은 찾아가면서 아주 열공을 하고 있습니다.^^

    저번에 경주에 갔을때 김유신 묘와 무열왕의 묘를 비교하면서 봤는데
    김유신 묘가 왕릉 같았고, 무열왕릉은 오히려 평범했거든요.
    묘를 보면서 조금 궁금했습니다. 물론 만드는 사람 마음이겠지만 무슨 이유라도 있는가 해서요

    • Favicon of http://go.idomin.com BlogIcon 파비 2009.07.11 16:03  댓글주소  수정/삭제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그런데 김유신은 사후에 흥무대왕으로 추존됐지요. 신하로서 대왕에 추존된 사람은 김유신이 역사상 전무후무한 걸로 알고 있네요. 그러나 역시 권력은 무상한 것이라서요. 김유신 일족의 세도도 결국 100년을 못 넘어가지요.

      삼국유사에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오잖아요? 혜공왕 때니까 대충 700년대 후반, 김유신의 묘에 회오리 바람이 일며 홀연히 김유신과 40여명의 병사들이 나타나 말을 몰아 죽현릉으로 들어갔다. 죽현릉은 미추왕의 묘다. 김유신이 미추왕을 향해 따졌다. "신이 신라를 위기에서 구하고 삼한을 통일했다. 죽어서도 신라를 구할 마음은 변함이 없다. 그런데 어찌 신의 자손을 죄 없이 죽이는가? 서운하기 짝이 없다. 이 나라를 떠나고자 한다." 그러자 미추왕이 말하기를, "그대가 이 나라를 지키지 아니하면 백성은 어찌하란 말인가?" 이에 김유신과 병사들은 다시 돌아갔다고 하지요.

      김유신의 자손들이 어떻게 고초를 당했는지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이런 설화가 있는 걸로 봐서 세월이 흐르면서 세도를 부리던 김유신가도 결국 토사구팽의 길을 걸은 듯... 그러나 김유신은 살아서도 상국의 영광을 누리고 죽어서는 대왕의 칭호까지 받았으니 그렇게 섭섭해하는 것은 매우 염치없는 짓이라고 생각되네요. 흐흐

  3. 2009.07.12 08: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Favicon of http://go.idomin.com BlogIcon 파비 2009.07.12 15:05  댓글주소  수정/삭제

      역사책(세기와 유사)도 읽어보는 여유를 부리긴 했습니다만(제가 본래 역사책을 좋아한답니다. 제가 닉으로 쓰는 파비란 이름도 한니발과 대적했던 역사적 인물의 이름으로부터 딴 것이니까요), 신상문제란 그처럼 한가한 것은 아니고 좀 더 복잡한 문제랍니다.

    • Favicon of http://go.idomin.com BlogIcon 파비 2009.07.12 15:07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참 그리고 요즘은 인터넷시대 아닙니까? 워낙 모든 정보가 공유되는 시대라... 그러나 아직 넘쳐나는 정보들도 신뢰성에는 문제가 많이 있답니다. 다음 위키백과사전의 박미실 정보가 하나의 예입니다. 미실이 박씨가 아니란 건 제가 본문에 말씀드린 바와 같고요. 미실은 부계도 모계도 모두 김씨입니다. 그러니까 인터넷에서 정보를 얻더라도 신중하게 확인하는 게 필요할 거 같아요. 그래서 책이 필요한 거지요, 여전히. 그리고 추모제 다녀오시느라 수고하셨네요. 먼 길을...

  4. 가림토 2009.09.01 13: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설원랑은 진골은 고사하고 두품조차 받지 못했다.

    이렇게 서술하신 부분은 수정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설원의 증손자인 원효가 6두품 신분이었고, 삼국유사에 의하면 원효의 아버지인 담내는 내말 벼슬에 있었으므로, 두품조차 받지 못했다는 것은 어떤 근거에 의한 것인가요?

    설원공의 지위를 보자면, 그의 아버지 설성을 구리지공은 급간 설우휘라는 6두품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서자로 입적시킵니다. 따라서 설원의 지위 역시 6두품으로 확인할 수 있으며, 설원이 벼슬자리에 있었따는 기록은 없고, 549년에 나서 606년 7월에 죽었다는 기록과, 579년 풍월주 자리를 문노에게 양위한 후 미실을 따라 영흥사에 들어가서 평생 그녀를 호위하다가 죽었다는 기록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