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들 잘 아시다시피, 펠레우스와 테티스의 결혼식에 모든 인간과 신들이 초대되었지만 유일하게 초대받지 못한 이가 있었다. 바로 불화의 여신 에리스다. 그녀를 왜 초대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우리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결혼당사자인 펠레우스와 테티스의 마음속에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의 행복한 결혼식에 불화의 전령사를 부르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는 어쩌면 누군가가 에리스를 초대하지 말 것을 조언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에리스는 누구도 못 말리는 화근덩어리였던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펠레우스와 테티스가 불화의 여신 에리스를 기피해 초대하지 않은 행위는 사상 최대의 불화를 낳았다. 사소한 ‘왕따’ 하나가 하나의 도시를 영원히 지도에서 지워버리는 불행을 잉태하리라고 누군들 상상이나 했을까.
그러나 역시 모두들 잘 아시다시피, 이 터무니없는 불화 하나로부터 수천 년에 걸쳐 빛을 잃지 않는 위대한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태어났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격노한 에리스는 어떤 방식으로 불화를 일으켰을까? 그것은 욕망이었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신들에게도 욕망은 존재했는데, 에리스는 한창 무르익은 결혼식장에 나타나 좌중을 향해 황금사과 하나를 던졌으며 그 사과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던 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
헤라와 아프로디테와 아테나가 나서서 서로 자신이 사과의 진정한 주인이라고 주장하며 다투었지만 결판이 나지 않자 신들의 신 제우스가 나서서 판결을 내려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제우스는 이 미묘한 사태에 끼어들기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제우스는 이들을 이데 산으로 보내 파리스로 하여금 판결을 내리도록 조치하였다. 자, 이 대목이 내가 열 살 이래로 늘 궁금증을 풀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고전읽기반’에 뽑혔던 적이 있는데 그때 내가 선택했던 책 중의 하나가 바로 <그리스 로마 신화>이었으며, 그 내용 중에는 <트로야전쟁>도 있었다. 아마도 지금 생각해보면 불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어린이들이 읽기 쉽게 편집해 만든 <그리스 로마 신화>가 아니었을까 싶다.
파리스의 운명을 살펴보면 대략 이렇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신관의 점괘에 의해 ‘트로이를 멸망시킬 불길한 존재’로 낙인 찍혀 이데 산에 버려지게 되었다.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가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은 그에게는 이미 믿음직한 맏아들 헥토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부정이 있었던 프리아모스는 아들을 죽이지는 말고 강보에 싸서 숲속에 버리고 오도록 은밀하게 지시했다. 늑대들이 나타나 파리스에게 젖을 먹여 키웠던가? 파리스는 용케도 살아 이데 산에서 양치기가 되었다(이게 기억이 희미한데, 기억이 사실이라면, 늑대에게 키워진 파리스가 늑대로부터 양을 보호해야할 책무도 띤 양치기가 되었다는 것도 아이러니다).
그리하여 어느 날, 준수한 용모의 청년으로 성장한 파리스의 앞에 눈부시게 아름다운 세 명의 여신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리고 모두들 잘 아시다시피, 헤라는 권력과 부를, 아테나는 지혜와 영예를, 아프로디테는 세상에서 가장아름다운 여인과의 사랑을 약속했다.
여러분들은 이 중 무엇을 골랐을까? 사실은 세 가지 중 어느 것 하나 버리기 아까운 유혹들이다. 파리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과의 사랑을 골랐다.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파리스가 세속에 때가 덜 묻은 젊은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마 그가 스무 살 정도의 청년이 아니라 사십이나 오십쯤 된 장년이었다면 권력과 부 혹은 지혜와 영예 중 하나를 선택했을지 모른다. 권력이나 영예를 얻으면 아리따운 미인은 절로 얻어진다는 것쯤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나이니 말이다.
하지만 파리스는 혈기왕성한 순정에 불타는 청년이었고 아름다운 여인을 선택했다. 헤라와 아테나는 불꽃처럼 화를 내고 복수를 다짐하며 돌아갔으며, 아프로디테는 청년의 현명한 선택에 치하하고 곧 약속을 지키겠노라 맹세하며 흐뭇한 마음이 되어 신들의 세계로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파리스는 오랜 세월이 만든 주름에 깃든 자식에 대한 애처로운 사랑으로 인해 불길한 점괘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린 프리아모스 왕으로부터 눈물의 환영을 받으며 트로이 성으로 복귀한다.
그리고 다시 얼마 안 있어 형 헥토르와 함께 그리스로 여행을 떠나고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의 왕비 헬레네를 보자 한눈에 반하게 된다. 그리고는 모두들 잘 아시다시피, 파리스는 헬레네를 납치하게 된다.
물론 아프로디테가 사전에 자기 아들 에로스로 하여금 헬레네의 가슴에 사랑의 화살을 쏘도록 해놓았으므로 파리스의 납치작전은 한 잔의 물을 들이키는 것보다 수월했을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이 납치는 사실은 납치가 아니라 두 남녀가 서로 눈이 맞아 벌인 사랑의 도피 행각이라고도 한다. 어쨌거나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이러나저러나 결과는 같으니까.
스파르타에 돌아온 메넬라오스가 벼락같이 화를 냈을 것은 자명한 일. 메넬라오스는 즉시 구혼자들의 맹세를 들먹이며 그리스군의 소집을 요구했는데 그의 형 아가멤논이 총사령관이 되었다.
자, 여기가 내가 열 살 이래로 풀지 못하는 궁금증 중의 한 대목인데, 아가멤논의 명을 받은 오디세우스가 아킬레우스를 참전시키기 위해 미르미돈으로 갔을 때 아킬레우스의 나이가 몇 살이었을까 하는 것이 그것이다.
우선 파리스는 몇 살이었을까? 스무 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파리스가 이데 산에서 황금사과에 관한 판결을 내릴 때 아킬레우스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파리스가 이데 산의 판결을 내릴 때 나이가 열 살이었고 그가 지금 스무 살이라고 가정하면 10년의 세월이 흐른 셈이니 아킬레우스의 나이는 아무리 많아봐야 열 살을 넘지 못한다.
겨우 열 살 소년의 어깨에 트로이 멸망의 운명이 걸렸다는 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터무니없는 믿음을 들고 아킬레우스를 참전시켜야만 한다고 역설했다면 오디세우스의 지혜도 믿을 게 못된다.
그렇다면 그리스의 전쟁승리를 보장할만한 아킬레우스의 나이를 스무 살로 보면 파리스는 서른 살이 된다. 그러나 여기에도 모순이 있다. 겨우 열 살 소년에 불과한 파리스가 부와 권력 혹은 지혜와 영예보다 아름다운 여자를 선택했을 리가 없다.
여자를 선택할 정도라면 최소한 스무 살 언저리는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트로이전쟁이 벌어지려고 하는 찰나 아킬레우스는 스무 살, 파리스는 마흔 살이 된다. 자, 그런데 여기 함정이 하나 더 있다.
뭐냐 하면, 모두들 아시다시피, 헥토르를 죽이고 난 다음 트로이가 함락되기 전에 아킬레우스는 파리스가 쏜 화살에 아킬레스건을 맞아 죽는 사고가 일어난다. 그리스진영에 큰 위기가 찾아온 것인데, 아킬레우스 없이 견고한 트로이 성을 함락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때 현명한 용사 네스토르가 신탁을 들먹이며(이 부분도 명확치는 않은데, 네스토르는 몰라도 신탁은 분명하다) 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옵톨레모스(피로스)를 데려와야 하며 그가 있어야만 트로이는 함락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결국 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옵톨레모스도 참전하게 되는데, 자 이렇게 되면 다시 계산이 복잡해진다. 어떻게 되는 거지? 네옵톨레모스가 당시에 스무 살이면 아킬레우스는 최소한 마흔 살이 넘어야 되고, 그러면 파리스는?
에고 모르겠다. 쓸데없는 생각 혼자 열나게 했다. 이러면 간단한 것을.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던지고 간 황금사과를 두고 일어난 논쟁은 20년이 넘게 계속 되었다. 그러는 중에 아킬레우스도 태어나고 파리스도 태어났으며 이들이 장성해 스물 청년이 되었다.
도저히 논쟁이 종결될 조짐을 보이지 않자 제우스가 중재에 나서 이데 산의 양치기 파리스에게 판결을 맡긴다.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의 손을 들어주고 트로이 궁성으로 복귀하게 되며 이윽고 형 헥토르와 함께 스파르타로 운명의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이 사이 아킬레우스도 결혼해서 아들을 얻게 되는데 그게 곧 피로스라고도 불리는 네옵톨레모스다. 파리스와 헬레네가 눈이 맞아 스파르타를 탈출하게 되고 메넬라오스가 ‘구혼자의 맹세’를 발동해 그리스군을 소집해 트로이전쟁을 일으킨다.
이렇게 정리하니 간단하게 모든 게 해결되는구먼. 하긴 그렇다. 인간세상의 시간과 신들의 시간은 그 길이가 분명 다를 것이다. 끝. 이제 그만 자자.
ps; 잠이 안 와서 그저 심심풀이로 끄적거려 본 것이니 쓸데없는 잡설이라고 너무 탓하지 마시라! 블로그에 글 안 쓴지도 너무 오래 되었고...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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